위진사방
- 감독
- 왕홍창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왕유, 초교, 이예민
대구에는 1910년 이전 달성관(達城館)이라는 연예회장이 있었다. 극장이라기보다는 각종 집회와 연회가 이루어지는 공간이었다. 1912년 폐관되었다. 그 외에도 대구 서문과 북문 밖에는 가설극장들이 존재했으며 금정(錦町)의 금좌(錦座)와 대화정의 낭화관(浪花館), 대구구락부와 같은 활동사진이 상영되던 극장이 있었다. 1910년대 후반 이후 대구지역의 극장들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① 칠성관(七星館), 대송관(大松館), 만경관(萬鏡館), 대경관(大鏡館), 호락관(互樂館) 대구부 촌상정(村上町)에 있었던 활동사진관으로 1916년 후루가와(古川文之助) 등이 청원하여지어졌다. 1922년 무렵 칠성관은 대송관으로 바뀌었다. 이후 대송관은 대영관(大榮館)에 인수되어 제2대영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28년 만경관(萬鏡館)을 운영하던 이제필이 만경관이 화재로 소실 된 후 대송관(제2대영관) 건물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운영했다. 이후 만경관이 신축되자 이제필은 이곳을 대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운영했다. (<영화 대경관 신설>, 《동아일보》, 1929.01.02) 이제필이 운영하던 대경관은 1933년 8월 12일 윤무용(尹武用), 김상덕(金尙悳), 김파영(金波影) 등의 경영진 하에서 다시 이름이 호락관(互樂館)으로 바뀌었다. 1938년 시설 낙후 등을 이유로 문을 닫았다. ② 대구좌(大邱座), 대구극장(大邱劇場) 대구좌는 대구부 전정에 있었던 극장이다. 용산의 앵좌(櫻座)를 이전하여 건설한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던 대극장이었다. (<대구좌 신축 신보(新捗)>, 《조선시보(朝鮮時報)》, 1918.04.27) 1918년 5월 말 대구기업주식회사에서 세웠다. 극장의 운영은 나카무라(中村喜一)가 맡았다. 1925년 봄 야마네(山根初太郞)가 대구좌의 운영을 맡아, 외관과 내부를 수리한 후 9월 재개장 했다. 이 무렵 대구좌라는 명칭 대신 대구극장이라는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다. 대구극장은 경성의 부민관이나 평양의 금천대좌와 같이 다목적 회관의 성격을 지닌 극장으로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③ 조선관(朝鮮館), 만경관(萬鏡館) 조선관은 대구부 경정 1정목에 있었던 극장이다. 1920년 대구의 전당포업자들의 모임인 십일회(十日會)와 대구좌(大邱座) 주인 나카무라(中村喜一), 조선인 배모(裵某)가 합작하여 만든 극장이었다. (<대구에 극장 신설>, 《매일신보》, 1920.02.26) 하지만 건립 직후 화재로 사라졌다. 1922년 8월 조선관이 있던 자리에 만경관(萬鏡館)이라는 새로운 극장이 지어졌다. 삼층의 벽돌 건물로 대구지역의 대표적 조선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이었다. 1928년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시 만경관의 흥행을 맡아하던 이제필은 대송관(大松館)을 빌려 만경관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이어갔다. 1929년 화재로 사라졌던 만경관이 재건되었다. 1943년 현재 만경관의 흥행주는 니시야마(西山吉五郞)이며, 720석의 좌석을 가지고 있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④ 대영관(大榮館), 소명관(昭明館), 신흥관(新興館),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 대영관(大榮館)은 대구부 전정 14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으로 1921년 무렵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29년에 대영관은 소명관(昭明舘)으로 관명이 바뀌었으며, 1931년 4월에는 신흥관(新興館)으로 다시 바뀌었다. 신흥관은 1939년 6월 문을 닫았다. 18년 전 지어진 건물이라 시설이 낙후하였기 때문이다. 1940년 7월 5일 시마다(島田金四郞)가 대구송죽영화극장(大邱松竹映畵劇場)을 설립했다. 신흥관의 흥행권을 이어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1943년 현재 대구송죽영화극장의 흥행주는 이토(伊藤勘吾)이며 객석 수는 570석이었다. 해방 후 대구동보극장(大邱東寶劇場)으로 바뀌었다. ⑤ 영락관(永樂館) 1930년 무렵 대구부 전정(田町) 11번지에 일본인 위주의 활동사진관인 영락관(永樂館)이 기록으로 확인된다. 당시 경영자는 나가오(長尾喜重郞)이었다. 1934년 영락관을 운영하기 위해 주식회사 대구영흥상회(大邱映興商會)가 조직되었다. 1936년 여름 시설을 크게 개선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800석이었다. 해방 이후 이름을 송전극장으로 바꾸었다. ⑥ 대구키네마구락부(大邱キネマ俱樂部), 대구보총극장(大邱寶塚劇場) 대구부 동성정 2정목 88번지에 있었던 영화관이다. 대구키네마구락부는 1938년 호락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1940년 이름을 대구보총극장으로 바꾸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대구영흥상회 사장 호리코시(堀越友二郞)이며 객석수는 950석에 달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는데 한국전쟁 기간에는 국립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⑦ 김천좌(金泉座), 김천극장(金泉劇場) 김천좌는 1910년대부터 흥행장으로 활용된 경상북도 김천의 극장이다. 정확한 설립연대와 설립자는 알 수 없다. 1925년 무렵 낡고 협소한 공간이 문제가 되어 당시 관주인 후쿠시마(福島格一)가 영업을 중지했다. 대신 1923년 잠시 문을 열었다가 문을 닫은 활동사진상설관 조선관(朝鮮館)의 건물을 인수받아 영업을 이어갔다. (<金泉唯一の娯楽塲>, 《朝鮮新聞》, 1925.08.22) 1938년 김천읍내 유지들로 구성된 경북흥업주식회사가 김천좌의 흥행권을 인수한 후 성내정의 부지를 매수하여 그곳에 극장을 신축하게 된다. (<경북흥업 신축 재이(在邇)>, 《동아일보》, 1938.02.24)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김천극장이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사노(佐野秋千代), 지배인은 타니히치(谷久平)이다. 객석 수는 800석이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⑧ 영일좌(迎日座) 포항극장(浦項劇場) 1920년대 포항에는 영일좌(迎日座)라는 극장이 있었다. 언제 만들어지고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영일좌에 이어 들어선 극장이 포항극장이다. 1936년 포항읍 대정정에 들어섰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마노우치(山之內學)이며 객석 수는 597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⑨ 영천극장(永川劇場) 경북 영천읍 창구동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34년 무렵 신문지상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 즈음 설립된 것으로 보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야스하라(安原在玉)이며, 객석 수는 450석이었다. 해방 후까지 존속했다. ⑩ 상주좌(尙州座), 상주극장(尙州劇場) 경북 상주읍 서정에 위치하고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쿠쇼쿠(拓植光太郞)이며 37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⑪ 예천극장(醴泉劇場)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 있었던 극장이다. 1938년 1월 영업을 시작했다. 설립자는 예천 청년 김위진(金渭鎭)으로 1만 1천원의 비용을 들여 완성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김위진(창씨명 正木渭鎭)이며 객석은 총 400석이었다. ⑫ 청도회관(淸道會館) 경북 청도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오하라(大原基一)이다. ⑬ 안동극장(安東劇場) 경북 안동읍에 있었다. 1939년 무렵 개관을 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서는 권투경기가 자주 열렸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나가노(中野文雄)이며 객석수는 300석이었다. ⑭ 경주극장(慶州劇場) 경북 경주읍 동부리에 있던 극장이다. 1928년 8월 19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경주 학교조합관리자 기노시타(木下宇平)이다. (<慶州劇塲竣工>, 《朝鮮新聞》, 1928.8.17) 경주지역의 유일한 흥행장으로 연극, 영화의 상연은 물론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었다. 1939년 9월 17일 흥행주 기노시타(木下淸)가 낡고 좁은 건물을 증축하였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기노시타(木下淸)이며 객석 수는 350석이다. ⑮ 대인좌(大仁座) 구룡포 읍내에 있던 극장이다. 1932년 11월 20일 설립되었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타다(多田仁助)이며 객석 수는 3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⑯ 영주극장(榮州劇場) 영주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로타(廣田且吉), 지배인은 야스다(安田浩三)였다. 객석수는 500석이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다. ⑰ 강구회관(江口會館) 강구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후지하라(藤原英一)였다. ⑱ 의성회관(義城會館) 의성 읍내에 있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1943년 현재 흥행주는 히라노(平野文雄)이며, 객석 수는 600석이었다. [자료] 《朝鮮新聞》, 1928.08.17. 慶州劇塲竣工, 十九日落成式 (慶州)篤志家木下宇平氏は前學校組合管理者にして地方發展の爲慶州劇場建設を計畫し愈愈日頃竣工し上つたので新築落成式を兼ねこけら落しを擧行する事となり內地より松島家松鶴一座を招聘し來ろ19日午後3時より落成式を擧げ引續き6時から招待演劇を開幕すぺく多數各方面に夫夫招待狀を出しをりつあり [자료] 《매일신보》, 1940.11.11. 감포극장(甘浦劇場) 전소(全燒) 【경주】 감포극장(甘浦劇場)은 지난 八일 오전 二시경에 전소하였는데 원인과 손해는 방금 당지 주재소(駐在所)에서 조사 중이라는데 동 극장은 十여 년 전에 건축한 二층으로서 손해는 대략 三천원가량이라고 한다. [자료] 《매일신보》, 1927.05.19. 대구의 대극장, 만경관(萬鏡舘) 전소(全燒), 십팔일 새벽에 불이 낫다 【대구지국특전】 대구에 잇는 죠선인 죠합 조직의 활동사진상설관 만경관(萬鏡館)은 젼에 불탄 극쟝자리에 새로 셰운 남선유일의 큰 극장이엇섯는대 십팔일 새벽 돌연이 불이 나서 대구 시내의 소방대는 일제히 츌동하야 진화에 노력하야 연소는 없섯스나 만경관은 젼소되고 악긔와 및 비품도 젼부 소실되고 마랏다는대 진화는 오젼 여섯시경이었다. 손해는 오(五)만원, 원인은 실화인 듯 츌화한 원인에 대하야는 아직 조사 즁이나 삼층 우에서 발화되듯하다 하며 손해액은 젼부 오만원 이상에 달하겟고. 보험에는 삼만원 드러잇다고 한다. 만경관은 최근에 신츅된 남션 유수한 극장이다. [자료] 《동아일보》, 1922.06.28. 대구 이오극장(二五劇塲) 신설 대구부 경정(京町) 一정목 전(前) 조선관(朝鮮館) 기지(基址)에 대구 유력자 十二인이 합명하야 극장을 건설하고 기(其) 명(名)을 이오관(二五館)이라 하야 활동사진 ᄭᅡ 지 겸영(兼營)하리라더라.(대구) [자료] 《동아일보》, 1939.09.20. 경주극장 신장(新裝), 거(去) 십칠일부터 개관 【경주】 二만여 읍민의 유일한 관극장소인 경주극장(慶州劇場)은 과거에 넘우 자리가 협소하야 왜지의 큰 흥행단체도 흥행 “코-수”에 엇지안코 통과하는 일이 만흘뿐덜어 또한 조곰 조흔 극이 오면 즉시 만원이 되어 일반의 관극 상 불편이 적지 안엇는터인데 금번 극장주 목하청(木下淸)씨가 다대한 돈을 엇고 수리를 시작하야 낭하를 물리이고 장내를 확장하는 등 어느 정도의 신장을 보이게 되엇다. 그동안 근 수십일을 두고 휴업중에 잇든 경주극장도 지난 십칠일 밤부터 참신한 면목으로 손의 앞에 개관케 되엇다. 앞으로 속속 조흔 흥행물을 골나서 관중을 마즈리라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8.01.12. 예천극장 개관 【예천】 예천 지방에서 일반이 갈망하든 극장은 예천읍 발전 상 긴요한 숙제이든바 당지 청년 김위진(金渭鎭)씨의 노력으로 一만 一천여원의 금전과 五개월의 시일을 소비한 결과 지난달에 준공하고 그동안 모든 설비도 완비되엇으므로 신년 벽두를 기하야 지난 五, 六 양일간 주야겸행으로 일반에게 피로 공개한바 연일 초만원의 성황이엇다. [자료] 《동아일보》, 1929.01.02. 영화 대경관(大鏡館) 신설 대구의 상설영화 만경관은 연전(年前)의 화재를 당한 후, 당시 경영자 이제필(李濟弼)씨는 촌상정동(村上町洞) 대송관(大松館) 집을 빌어 만경관 이름을 보게(保揭)하고 이래 적극적 노력을 하야 오든 바 금번 경정(京町) 소지(燒址)에 신관이 재성(再成)되고 신경자(新營者)가 현출(現出)됨으로 씨는 종래의 만경관 명을 해관(該館)에 양환(讓還)하는 동시, 신년 一월 一일부터 종래 씨의 경영하든 바 만경관은 『대경관』이라 개칭하야 더욱 확충에 진력하겟다는 바이로서 대구에 영화상설관은 양처(兩處)가 된다더라. 【대구】
한국여배우사를 훑어볼 때 '착한 여자 콤플렉스', '천사표 콤플렉스'로 관객들의 눈물주머니를 터뜨려 놓은 배우들이 있었다. 그 이름은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졌던 전옥 을 필두로 김연실 , 김소영 , 문예봉 , 유계선 , 김신재 , 이경희 , 고은아 , 전계현 , 문희 등 기라성 같은 명성을 떨친 여배우들이었다. 이들 여배우들 중에서도 특히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로 관객들에게 깊은 감동을 안겨준 여배우가 전옥에 이어 '제2의 눈물의 여왕'으로 알려진 이경희(李璟姬)였다. 이경희 는 1932년 9월 29일 서울에서 출생하였다. 한성여고 졸업 수 한때 레코드가수 및 악극단에서 활동하다가 영화연기자로는 1955년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로 데뷔하였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는 전택이 , 노경희 와 트리오로 공연했다. 이경희는 어린 소년시절부터 재학 당시 서울방송국에 출연하는 기회도 자주 가졌으며 졸업 후 레코드사의 요청을 받아 <서울의 거리>, <서울 부기> 등의 히트곡을 취힙하기도 했다. 그 뒤 6.25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 그곳에서 악극단 <희망>에 입단하여 <루루태자>, <라 콤파르시타>, <분홍치마>. <클레오파트라> 등의 연극에 출연하였다. 그녀가 애수에 젖은 음감으로 <라 콤파르시타>를 불러 젖힐 때 관객들은 주저없이 '순정의 가희', '눈물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던 것이다. 이경희 의 데뷔작 < 망나니 비사 >에 따른 에피소드(<여성영화인사전>69쪽 이경희.2001년 도서출판 소도)를 살펴 보자. 55년 서울 수복 후 여배우를 물색하던 김성민 감독은 이경희가 적역이라는 조언을 듣고 당시 국도극장에서 황해 등과 <님의 품에 안기리>라는 연극을 하고 있던 그에게 찾아봤다. 노경희 , 전택이 , 이민 등 당대의 빅 스타들과 함께 <망나니 비사>에 출연하게 된 이경희는 정조을 지키려던 자신 때문에 모함에 빠지게 된 아버지와, 본의 아니게 아버지의 목을 쳤지만 자신을 사랑하게 된 망나니 ''먹''(전택이)의 죽음까지 묵묵히 지켜보아야 하는 비운의 여인 ''채''로 분했다. 장옷를 뒤집어쓰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채''의 모습은 너무나 단아해서 잡시 발성영화에 잘못 캐스팅된 무성영화의 슬픈 페르소나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이 영화 이후 청순가련한 비극의 히로인은 이경희 에게 일종의 숙명처럼 고착되었다. 영화 < 망나니 비사 >에서 여주인공 '채'로 분한 이경희 와 역시 여주인공 '달'로 분한 노경희 는 양반집 규수(전자)대 술집 작부라는 상반된 신분의 여인으로 등장하였다. -어느 고을의 교리( 이민 )가 그 고을 진사의 딸 '채'( 이경희 )를 좋아한다. 그러나 진사는 자기 딸을 교리의 소실로 들여보내려 하지 않았다. 교리는 갖은 모함을 다해서 진사를 역적으로 몰고 그의 딸을 차지하려 했다. 그랬지만 딸은 도망을 쳤다. 그 딸이 도망친 곳은 바로 망나니인 '먹'( 전택이 )이네 집. '먹'은 그 딸을 숨겨주었다. 그것을 인연으로 망나니 '먹'은 진사딸 '채'를 짝사랑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을 눈치챈 술집작부인 달은 사랑하는 '먹'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갖은 수를 다 쓴다. - 이른바 삼각형 연애가 벌어진 것이다. 이 영화에서 이경희 가 청순가련형의 여인상을 연기한 반면 노경희는 특유의 빈정거림으로 '먹'을 다루는 능동적인 하층민 여인상을 선보였다. 노경희는 이 영화의 '달'역으로 1955년 제1회 금룡상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하지만 관객들의 가슴에는 '채'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마지막 대목에서의 이경희 연기가 아프게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경희 는 이밖에도 < 모정 > '58. 양주남 감독 , < 육체의 길 > '59. 조긍하 감독, < 삼여성 > '59 박성복 감독, < 연산군 >'61 신상옥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63 유현목 감독, < 단종애사 >'63 이규웅 감독, < 모란이 피기까지는 > '63 김기덕 감독, < 혈맥 > '63 김수용 감독, < 추풍령 > '65 전범성 감독, < 신설 > '74 조문진 감독, < 들국화는 피었는데 > '74 이만희 감독, < 여자를 찾습니다 > '76 하길종 감독, < 깃발없는 기수 > '79 임권택 감독, < 내가 버린 여자2 > '80 홍성기 감독, < 아가다 > '79 김현명 감독>, < 영웅연가 > '86 김유진 감독, < 이장호의 외인구단 > '86. 이장호 감독, < 아다다 > '87 임권택 감독 등에 출연하였다. 이경희 의 대표작을 들라고 하면 < 망나니 비사 >, < 잃어버린 청춘 >, < 찔레꽃 > 등 3편을 통해서 보여준 연기를 평가의 기준으로 삼게된다. 그 가운데서 대표작 중 1편만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에서 보여준 이경희의 연기(정애 역)를 평가하고자 한다. 영화 <잃어버린 청춘>의 주인공인 위진구( 최무룡 )의 직업은 전기공이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전선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어느 괴한과 맞부딪쳤다. 상대방은 바람처럼 달아나버리고 그 자리에는 돈다발이 떨어져 있었다. 위진구가 조심스럽게 돈다발을 집어들었을 때 근방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진구가 그 사람을 발견, 일으켜 세우려고 할 때, 그가 갑자기 '강도다!'라고 소리치며 칼을 뽑아들었다. 진구는 옷소매를 붙잡고 달라붙은 그 자를 때려눕히고 위기를 벗어난다. 하지만 피를 많이 흘린 그는 죽었고, 진구는 억울하게도 살인범으로 쫓기는 신세가 되어버린다. 그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이 단절된 진구는 신을 의지하는 애인 정애 이경희 )에게서 구원을 찾는다. 결국 젊은 전기공은 경찰에 자수하지만 애인의 따스한 눈물만으로는 냉엄한 현실의 절망감을 밀어젖힐 수 없었다는 내용의 드라마가 6.25전쟁 후의 폐허가 되다시피한 서울의 도심을 배경으로 전개된다. 주인공의 운명이 리얼한 영상 속에서 속절없이 농락당한다는 ''쫓기는 인생''의 삶이 비정하게 묘사된 영화에서 여주인공 정애의 마지막 내뱉은 말은 '이젠 울지 않겠어요'였다. 필자는 < 잃어버린 청춘 >이 제작된 지 45년이 지난 며칠 전 유현목 감독을 만나 영화배우 이경희 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유감독님이 < 잃어버린 청춘 >을 연출한 당시 연기자로서 이경희 씨는 어떠했습니까?' '한 마디로 해서 청순가련형의 동양적 이미지의 배우였지요. <잃어버린 청춘>의 라스트신을 찍는데, 비오는 장면이었습니다. 때가 엄동설한이라 우중 신을 찍기가 용이치 않았어요. 소방차를 동원 호스로 물을 뿌렸는데, 물이 잘못 뿜어져 고압선에 닿으면 위험한 형국이었어요. 나는 이경희 씨에게 추우니 비닐 옷을 입으라고 권했지요. 그런데도 2시간 이상 촬영하는 동안 이경희 씨는 끝내 비닐 옷을 걸치지 않고 꼬박 혹한 속에서 물세례를 받았어요. 나는 속으로 그녀가 인내력은 물론, 프로 의식이 강한 외유내강형 연기자로구나 생각했지요. 성실하고 싹싹했고, 외모도 나무랄 데 없는 미인형이였지요.' < 눈내리는 밤 ''58>, < 목포의 눈물 ''58> 등 신파극 멜로 드라마를 연출한 바 있는 하한수 감독도 이경희 에 대해 연기평을 했다. '내 영화에 출연한 후 <눈물의 여왕>이라고 불리워진 전옥 씨는 정말 전설적인 여배우로 연기에 대한 열정은 가히 ''불꽃''이라고 부를만 했어요. 거기에 비해 이경희 씨는 소극적이며 내향적인 성품의 연기자였지요. 그의 매력은 항시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연약함에 있습니다.' 1958년 초여름 결혼했던 남편 김영건과 1963년 사별한 이경희는 딸 혜정의 강한 어머니로서 모정의 세월 속에서 연기생활에 전념했다. 이경희 가 출연한 최근 작품으로는 < 세상 밖으로 >''94 여균동 , < 닥터 봉 > ''95 이광훈 , < 도둑과 시인 > ''95 석래명 , < 애 > ''99 이두용 , < 가위 >2000 윤종찬 등이 있다. 영화배우 이경희 .... 그녀는 1950년대 중반에 데뷔한 이래 45년간을 현역 연기자로 활동하였다. ''눈물과 천사표의 페르소나''는 늙음도 마다 않고 항상 우리 곁에 있다. 변인식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출 생 : 1932. 4. 27 서울 데 뷔 : 1955년 김성민 감독 < 망나니 비사 > 주요 작품 : < 찔레꽃 >, < 망부석 >, < 두남매 >, < 잃어버린 청춘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