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독신녀
- 감독
- 바벳 슈로더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제니퍼 제이슨 리, 브리짓트 폰다, 스티븐 웨버, 피터 프리드먼, 스티븐 토보로스키, 프란세스 베이, 미셸 파, 타라 카시안, 크리스티아나 카페틸로, 제시카 런디, 르니 에스테베즈, 티파니 마타라스, 크리스틀 마타라스, 아멜리아 캠벨
올해도 10편의 영화를 뽑았는데, 유감스럽게도 빈 구석이 있다. 예를 들어 <벌새>는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 중 하나였다. 하지만 부산 영화제에서 먼저 본 다른 필자들이 이미 작년 리스트에 올리는 바람에 올해 리스트에서는 누락시킬 수밖에 없었다. (몇몇 필자들의 올해 리스트엔 여전히 이 영화가 있다! 아, 다들 무시하고 버텼나보다.) 더 아쉬운 영화는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셀린 사아마, 2019)이다. 영상자료원이 준 진짜 진짜 진짜 최종 마감일이 11월 8일. 프라이드 영화제에서 내가 이 영화를 본 건 11월 9일. 어쩔 수가 있나. 안 본 영화를 미리 리스트에 올릴 수는 없다. 언제나처럼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일단 올해는 한국 영화를 많이 넣었다. < 우리집 >, < 아워 바디 > 그리고 < 벌새 >(!)는 올해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 중 가장 내 뇌 속에 오래 남았던 영화들이다. 봉준호 의 < 기생충 >은 2019년에 나온 영화 중 가장 흉악하게 재미있는 작품일 것이다. 사악한 즐거움은 < 더 페이버릿 >도 만만치 않다. 극도로 개인적이고 거의 기이하기까지 한 특별한 개인사를 냉전시대 역사로 보편화시킨 심술궂은 영화 < 콜드 워 >도 있다. 리미티드 시리즈인 < 믿을 수 없는 이야기 >와 < 체르노빌 >은 영화와는 다른, 텔레비전 매체 고유의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 경계선 >, < 어스 >, < 미드소마 >는 판타지와 호러 영역에 속하는데, 여기엔 내 취향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린 이 영역의 영화들이 슬슬 게토에서 벗어나 진지한 목소리로 인정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아워 바디>( 한가람 , 2019) 이야기를 하자. 이 영화가 나에게 올해 최고의 영화였느냐. 그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었고, 그 반응을 뒤에서 구경하는 것도 그만큼이나 재미있었다. 굉장히 심술궂은 재미를 방사능처럼 발산하는 영화이다. 여담이지만 올해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 대부분은 심술궂은 표정의 여자를 한 명 이상 품고 있었다. 이 영화의 주인공 자영도 예외는 아니다. 설정만 보면 건전하기 짝이 없어 보인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시험을 포기해버린 8년차 행정고시생인 자영은 어느 날 동네에서 달리기를 하는 현주라는 여자를 만난다. 현주의 모습에 매료된 자영은 달리기를 시작하고 현주의 친구가 된다. 자영은 서서히 건강을 되찾고 친구가 소개해 준 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인턴으로 들어간다. 여기서 열심히 일하며 능력을 인정받으면 정직원이 될 가능성이 열린다. 이 정도면 거의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오래된 격언에 바탕을 둔 생활 체육 홍보 영화처럼 보인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는 로맨스의 가능성을 암시하기도 하는데, 이 역시 건전해보인다. 운동을 하면 건강도 얻고 사랑도 얻고 취직도 할 수 있다니 이렇게 노골적인 프로파간다가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영화는 그 방향으로 안 간다. 사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 도 원래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유베날리스가 한 말은 기껏해야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까지 깃들기를 기도하라’ 정도였다. 육체의 건강과 질병은 분명 정신에 영향을 끼친다. 하지만 건강한 몸의 영향이 건전한 방향으로만 향하는지 누가 확신할 수 있겠는가. 육체가 정신의 건전함이 뭔지 어떻게 아는가? 군인과 검투사의 나라에 살았던 풍자 시인이 설마 그 자명한 사실을 몰랐을까. <아워 바디>는 유베날리스의 회의적인 관점을 충실하게 따른다. 영화는 자영에게 건강한 몸을 준다. 하지만 8년의 고시 생활 중 피폐해진 정신까지 치료하지는 않는다. 이 뒤틀릴 대로 뒤틀린 정신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추구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는다면 어떻게 될까? 슬슬 <위험한 독신녀>의 시나리오가 떠오른다. 토론토에서 이 영화가 상영되었을 때 몇몇 평론가들이 이 두 영화를 비교했었다. 다행히도 자영은 그 방향으로는 안 간다. 덜 뒤틀린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뒤틀림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더 나쁜 방향으로 진행되는 건 충분히 가능하지만 자영이 현주의 몸에 티끌만큼이라도 상처를 내는 건 여전히 상상하기 어렵다. <아워 바디>는 현주, 정확히 말하면 현주의 몸에 대한 자영의 욕망에 대한 영화이다. 단지 그 욕망이 어떤 의미인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데에서 이 영화의 재미가 있다. 자영과 현주는 당연히 모르고 관객들도 모르고 이들의 창조주인 한가람도 확신하지는 못하는 거 같다. 이해와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흐름은 있다. <아워 바디>가 멀쩡하고 건강한 영화였다면 자영과 현주는 섹스를 했을 것이다. 적어도 영화의 구조를 보면 둘이 만나는 순간부터 그게 유일하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아워 바디>의 드라마는 영화가 이 당연하기 짝이 없는 지점으로 가는 길에서 끊임없이 일탈하다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자영이 이성애자이거나 이성애자로 정체화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영은 현주의 몸에 집요하게 집착하고 있지만 이것을 성애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이를 선망으로 정의하고 (이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까) 현주를 모방하려는 시도까지는 정상이다. 이는 얼마든지 건강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 중반에 현주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뜨면서 자영은 죄의식에 휩싸인다. 이 죽음이 자살인지 사고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영에게 불건강한 죄의식을 제공해주기엔 충분하다. 자영은 현주에게 정말 드물게 다가간 ‘여자친구’였다. 현주는 남의 시선을 받기 싫어 한동안 런닝 머신만 뛰었던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자신의 외모가 아닌 내면을 읽어주기를 바랐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오래간만에 만든 ‘여자친구’가 지금까지 만난 어떤 남자들보다 자신의 몸과 외모에만 집착하고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 <아워 바디>가 두 사람이 나누는 섹스와 로맨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역시 건강한 진행이 가능했다. 아름다운 몸에 대한 사랑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두 사람이 이성애자여도 상대방과 자신의 몸을 사랑하며 같이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에는 없다. <아워 바디>의 작은 세계에서 이성애는 모든 건강한 전개를 막는다. 그러고보니 올해 본 영화 중 가장 멀쩡하고 건강한 섹스를 나눈 사람들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마리안과 엘로이즈라는 게 생각난다. <아워 바디>에 대한 반응 중 가장 재미있는 것은, 이 작품의 섹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영이 살아있는 다른 사람과 나누는 섹스는 매력적인 구석이 단 하나도 없고 대부분 불쾌하다. 남자친구와 헤어지기 전에 나눈 마지막 섹스는 비루하기 짝이 없다. 현주의 죽음 이후 달리기 모임의 남자와 한 섹스는 남자의 자기 도취와 그에 전혀 반응하지 않는 자영 때문에 공허하다. 직장상사인 중년 남자와 나눈 섹스는 문장 자체가 불쾌한 이유를 품고 있다. <아워 바디>를 싫어하는 몇몇 관객들은 이 영화를 ‘중년남자와 섹스하는 영화’라고 부른다. 마치 젊은 여자가 중년 남자와 하는 섹스가 한국 영화에서 흔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고보면 마지막 섹스에서 영화는 이 상황이 얼마나 불쾌한지 인식하게 하는 뜻밖의 목표를 달성한 셈이다. 관객들이 이 영화의 섹스신을 싫어하는 이유는 동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고 이성애 기반에 바탕을 둔 것일 수도 있다. 자영과 현주의 관계만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관객들은 이성애 섹스가 지겨울 것이다. 하지만 더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리는 모든 이성애 섹스의 환멸에 찬 묘사가 더 신경 쓰일 것이다. 보다보면 숨이 막힌다. 주인공은 자신이 이성애자라고 믿는데 이성애엔 답이 없다. 그리고 다들 질겁하는 마지막 섹스는 따지고 보면 자영이 할 수 있는 가장 동성애에 가까운 섹스이다. 자영이 현주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욕망을 대신 실천한 것이니까. 이를 통해 자영과 현주는 한 몸이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현주가 자영에게 한 말들이 사실이라는 증거는 단 하나도 없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자영은 현주의 내면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현주가 정말 이성애자인지도, 자영에게 어떤 감정을 품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자영이 뒤늦게 참회하며 스스로 재구성한 현주는 몇몇 의미없는 단서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허구에 불과하다. 자영도 이를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식의 브레이크는 걸리지 않는다. 아, 어쩔 수 없지. 우리의 몸과 정신이 뒤섞이며 만들어내는 욕망은 결코 온전하게 납득이 가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한마디로 <아워 바디>는 엄청나게 심술궂다. 종종 심술궂기로는 만만치 않은 <기생충>을 능가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한 모든 교훈은 파괴되고 두 주인공과 관객의 욕망은 단 하나도 실현되지 않으며 이들이 가는 길은 최악의 모양으로 배배 꼬여있다. 정말로 성격 안 좋은 이야기꾼이 킬킬 웃으면서 만들었을 것 같은 영화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대부분 그렇듯 <아워 바디>는 우리가 전에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지만 처음부터 존재할 수밖에 없는 욕망의 사각을 비춘다.
한니발 렉터가 돌아왔다. 조금 젊어진 모습으로. 모든 걸 꿰뚫어보는 날카로운 눈과 냉소어린 표정, 그리고 특유의 예의범절은 그대로다. 매즈 미켈슨이 맡은 한니발 렉터는 고혹적이고 중후한 신사의 품격을 지녔다. 여전히 심중을 알 수 없는 괴물이지만, 군더더기가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면모에 예술을 찬양하는 심미안적 태도는 은밀한 호감을 불러일으킨다. 동시에 일말의 불안감과 그늘이 감돌기도 한다. 저 요리의 출처는? 저 발언의 의미는? 저 시선의 목적은? 신중하면서도 차가운 말투과 몸짓에서 냉철하면서도 강인한 북구의 늑대를 연상케 한다. 잡으면 놓치지 않을 강한 턱뼈와 송곳니로 전리품을 취하며 맛을 음미하고 상대와의 승부를 기꺼이 즐기려든다. 한니발 렉터의 모든 것을 창조해낸 원류 안소니 홉킨스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홉킨스의 렉터 박사는 고양이과 맹수류에 가까웠다. 본능적이고 카리스마가 넘치며, 재미없으면 가차 없이 처리해버리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서 자신의 페이스대로 상대를 농락하고 마음껏 사냥했다. 대단히 우아하며 기품 있고, 또 잔인하고 흉포하다. 지적 유희를 즐기며 위트 있고 나름 관대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괴물은 누구도 통제할 수 없고,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악의 결정체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짧은 분량의 연기에서 영속성을 얻었고, 영화를 넘어 모든 장르와 현실에 있어 대표적인 살인마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엔 < 양들의 침묵 >이 있었다. 한니발 렉터 단언컨대 <양들의 침묵>은 가장 완벽한 스릴러다. 85년에 이르는 아카데미 역사상 가장 중요한 5개 부문(작품, 감독, 각본, 남우주연, 여우주연)을 모두 수상한 3편의 영화들 중 하나일뿐더러(나머지 두 영화는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과 밀로스 포먼의 <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다), 미국영화연구소에서 선정한 100편의 스릴러 중 5위로 뽑혔고, IMDb 평점리스트에서도 매번 30위 안에 드는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토머스 해리스의 묵직하고 디테일한 원작소설을 뛰어넘는 시각화로 평단이나 관객들에게 깊고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이는 2003년 미국영화연구소(AFI) 100주년을 맞아 뽑은 최고의 악당과 영웅 부분에서도 당당히 나타난다. 한니발 렉터 박사는 무수히 많은 영화 속 슈퍼 악당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으며, 그와 대적하는 견습 수사관 클라리스 스탈링은 영웅 부분 6위에 올라 여자 캐릭터로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무려 시고니 위버의 리플리보다도 높은 순위다. 그러나 정작 그 역할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와 조디 포스터는 1순위 캐스팅 후보가 아니었다는 사실. 애초에 판권을 사서 연출하려던 이도 진 해크만이었고, 아예 디노 디 로렌티스가 제작한 전작 < 맨 헌터 >가 흥행에 실패하지 않았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물과 마주쳤을지 모른다. 조나단 드미는 주로 다큐멘터리와 코미디를 연출하던 감독이었기에 이처럼 무겁고 어두운 스릴러를 잘 연출할 수 있을 거라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그건 음악을 맡은 하워드 쇼어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 반지의 제왕 >과 < 호빗 > 시리즈로 누구나 다 아는 명 작곡가의 반열에 올라섰지만, 91년 당시 하워드 쇼어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음악적 영혼의 동반자, 혹은 NBC의 히트프로그램 ? 국내에선 신동엽이 호스트로 자리 잡아 섹드립을 날리는 바로 그 프로 ?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음악 감독으로 알려져 있었다. 크로넨버그와 함께 한 작품들이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사운드가 강해 대중들에게 어필하지 못했던 반면,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에서 그는 유쾌하고 신랄한 코미디를 뒷받침하고, 온갖 패러디가 난무하는 음악을 맡아 휴머니즘과 재기발랄함을 뽐냈다. 그 결과 마틴 스콜세지의 가벼운 소품 < 특근 >을 시작으로 소소하고 경쾌한 작품들로 필모를 채워나갔는데, 그야말로 제목처럼 빅히트한 톰 행크스 주연의 < 빅 >을 비롯해, < 나딘 >, <불같은 열정>, <그녀는 악마>, <이사대소동>같은 코미디/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에게 변신의 기회가 찾아온 건 바로 (역시나 그간 코미디 감독으로 이름을 날린) 조나단 드미와 함께 한 <양들의 침묵>이었다. 이후 그에게 스릴러 장르 의뢰가 폭발적으로 들어온 건 불을 보듯 뻔한 일. < 죽음 전의 키스 >와 < 위험한 독신녀 >, < 의혹의 함정 >, < 슬리버 >, < 의뢰인 >, < 세븐 >, < 증오 >, < 게임 > 등 90년대 다양한 메이저 스릴러들이 그의 손을 거쳐 가며 쇼어는 할리우드 주류 작곡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후 피터 잭슨과 함께 한 <반지의 제왕>으로 드디어 긴 무관을 세월을 벗고 아카데미 음악상을 거머쥐었고. 하워드 쇼어 <양들의 침묵>의 음악은 영화상에서 크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한니발 렉터의 움직임처럼 은밀하고 우아하며 무시무시하게 다가온다. 낮은 스트링과 목관악기를 위주로 편성이 된 이 고전적이고 세련된 스코어는 감상하기에 다소 지겨울지 몰라도 하워드 쇼어의 어둡고 진중한 매력이 무엇보다 돋보인다. 느리고 암울하기 짝이 없지만 심리적으로 서서히 옥죄어오는 오케스트라의 환영은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영화의 공포감과 전적으로 일치하며, 잔기술 효과나 미키 마우징 따위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영화의 흐름에 맞춰 전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집중한다. 크로넨버그와 함께 했을 때만큼의 기괴하고 실험적인 사운드는 아니지만, 적어도 그가 코미디나 드라마에서 보여주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접근법이었다. < 플라이 >를 통해 이미 장중한 오케스트라의 다이나믹한 활용을 익힌 쇼어는 그 노련한 솜씨를 <양들의 침묵>에 접목했으며, 비록 브라스의 강렬하고 드라마틱한 파워를 지워버렸지만 마음 속 깊이 자리한 공포심을 대변하는 짙은 저음의 스트링을 통해 현실 속 존재할 것만 같은 심각한 사건의 무게감과 리얼리티를 만들어냈다. 이후의 쇼어가 담당한 <세븐>이나 <게임>, < 패닉룸 >과 <의뢰인> 등에서도 계속 이런 건조한 스타일은 이어진다. 테마나 선율이 명확히 들리지는 않지만 영화의 톤을 잡아가는데 있어 일관된 방향성과 합목적성을 제시한다는 면에서 무엇보다 직관적이고 원초적인 스코어 롤을 행하고 있다. 하워드 쇼어는 특별한 모티브나 테마를 사용하진 않지만, 악기의 음색을 통해 언뜻언뜻 캐릭터들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오프닝 씬에 흐르는 ‘Main Title’에선 암시적으로 벌어질 사건들과 캐릭터들이 설명되는데, 서정적이고 서글픈 클라리넷이 현재 스털링의 모습과 과거 상처로 남은 어린 양의 기억을 상징한다면, 진중하고 어두운 현과 목관부의 하강을 통해 심리적인 중압감과 공포심을 배가시켜 쉽지 않을 임무가 기다리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는 뒤의 ‘Clarice’나 ‘Lambs Screaming’에서도 효과적으로 반복돼 활용되며, 비슷비슷한 큐들 사이에서 가녀리지만 확실한 그녀만의 색채를 부여해 어디에서고 그녀의 존재를 찾을 수 있게 만든다. 또한 한니발 렉터 박사의 위용을 과시하는 ‘Lecter in Memphis’나 ‘Lecter Escapes’에선 그간 자제하던 관악기를 편성해 비로소 그의 공포스러운 진면모를 드러내고 있으며, ‘Finale’에선 그의 자유스러워진 모습을 성장한 스털링과 대비시키며 진한 여운과 잔향을 남기고 있다. 가장 하이라이트인 버팔로 빌과 스털링 대결에 흘러나오는 ‘The Cellar’는 그간 쇼어가 크로넨버그와 작업해왔던 결과물의 연장선상에 있는 큐로 엠비언트와 일렉트릭 사운드를 결합한 -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호러 스코어에 가깝다. 비록 드라마틱하고 서사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파괴적이고 일탈적인 고통과 상처들을 심리적으로 치환해 상승해가는 고조감과 눅눅한 지하실의 공기를 담은 사운드는 기존의 전통적인 스코어링과는 전혀 다른 기묘한 성취와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하워드 쇼어는 세 번의 기회를 통해 마애스트로로 거듭났다. 영화음악을 맡을 수 있었던 데이빗 크로넨버그와 운명적인 만남, 장르를 확장하고 메이저에 안착하게 된 조나단 드미와 혁신적인 변신, 그리고 비로소 아카데미상을 수상하고 거장으로 우뚝 선 피터 잭슨과의 협업. <양들의 침묵>은 그 두 번째 발판으로 비록 강렬한 비평적 성과와 화려한 찬사를 얻진 못했지만,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매력적인 슈퍼 빌런의 등장에 걸맞는 암울하고 장중한 진혼곡으로 하워드 쇼어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한 작품이다. Track listing 1. Main Title 2. The Asylum 3. Clarice 4. Return to the Asylum 5. The Abduction 6. Quid Pro Quo 7. Lecter in Memphis 8. Lambs Screaming 9. Lecter Escapes 10. Belvedere, Ohio 11. The Moth 12. The Cellar 13. Fina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