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청춘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신성일, 문희, 문정숙, 허장강, 최지희, 트위스트 김, 이지영, 최성, 지방열, 최일, 권오상, 이민철, 황건, 심훈세, 이광식, 윤신옥, 김기범
이지룡은 1954년부터 1992년까지 영화계에서 활동한 영화제작자이다. 외화수입업으로 영화계에 입문해 명보극장을 설립했고 정창화 감독을 비롯한 유명 감독들의 작품을 제작한 인물이다. (사진1) 젊은 시절의 이지룡 그는 1926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함흥에서 치마대소학교와 대흥상업학교, 금정고등학교를 나와 함산금융조합 출납계원으로 일했다. 일제강점기 안정된 직장을 다니며 함흥 명보극장에 들어오는 영화를 놓치지 않고 보던 평범한 청년이었다. 그러나 안정적이었던 생활은 해방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그렇다해도 좌우대립이 심한 남한보다 그곳이 낫다는 생각에 그는 함흥에서 장사를 하며 새로운 체제에 적응해갔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곧 한국전쟁을 만나게 된다. 만세교를 건너 함흥에 입성하는 국군은 그에게 해방군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사진2) 함흥만세교 사진 (사진출처_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군이 입성한 뒤 그는 함흥 민사부 동원부장으로 국군을 도왔고 흥남철수작전이 시작되자 퇴각하는 1군단과 함께 서호진에서 간신히 수송선을 타고 월남한다. 배는 예상과 달리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포항에 닿았다. 단신에 무일푼으로 월남한 그는 국민방위군에 차출되었고 우여곡절 끝에 방위군이 해산되자 본격적인 피난생활이 시작된다. 부산에서 그는 친척인 삼양물산 주동태의 도움으로 쌀창고와 함흥냉면 장사를 하며 종자돈을 모아, 휴전되기 전 도강증을 구해 서울로 상경한다. 그리고 전쟁으로 파괴된 서울에서 건설업을 시작한다. 입찰과 재무 업무는 자신 있었지만 건설에는 영 취미가 없던 그는 친척인 이회극이 부사장으로 있는 수도극장에 자주 출입하게 된다. (사진3) 1951년 한국전쟁기의 수도극장의 모습과 2003년 스카라극장의 모습이다. 수도극장은 1930년 약초극장으로 개관해 1945년 수도극장, 1962년 스카라극장으로 재개관하며 유지되어 오다 2005년 근대문화재로 등록예고 된 뒤 소유주에 의해 철거되었다. (사진출처_한국콘텐츠진흥원kocca 문화컨텐츠닷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극장 문 닫는 법이 없어. 손님이 오는 거야.” 사람이 끊이지 않는 극장에서 그는 영화사업의 가능성을 보게 되고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준비한다. 그는 먼저 외화수입을 통해 영화흥행에 대한 감을 익히며 명보극장 건설을 추진한다. 삼양물산의 주동태와 고향 친구이자 후에 연방영화사 부사장이 되는 양봉식을 설득해 투자유치를 하고 파리에서 귀국한 건축가 김중업에게 설계를 의뢰해 극장건설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국회부의장 조 모 씨의 권력을 등에 업고 나타나 일신산업에게 공사를 맡기며 위기는 시작된다. 자본도 기술도 부족했던 건설업체인 일신산업의 미숙으로 공사가 난항을 겪게 된 것이다. (사진4) 1956년 명보극장(공사 초기 명성극장) 기공식 현장. 오른쪽 끝이 양봉식, 그 옆이 이지룡으로 일신산업 대표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5) 1956년 명보극장 기공식 현장. 양봉식과 이지룡 위기에 빠진 상황에서 그는 자본과 기술이 있는 대림산업에게 공사를 의뢰했고 대림산업은 초기 투자자들 보다 더 많은 지분을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대림산업의 요구를 들어준 뒤 공사는 시작되었다. (사진6) 명보극장 상량식. 대들보에 돈을 넣은 하얀천을 묶고 있다. (사진7, 사진8) 명보극장 건설현장 1957년 여름, 드디어 명보극장은 완성된다. 한국전쟁 후 처음으로 건설된 현대식 영화상영관이자 그가 청년기 함흥 시내에서 영화를 봤던 명보극장이 서울 충무로에도 들어선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29세이다. 명보극장은 1957년 8월 25일 개관식을 갖고 개관작 <상류사회 High Society>(찰스 월터스, 1956)를 시작으로 극장영업을 시작한다. 그는 명보극장 부사장으로 자리한다. (사진9) 1957년 명보극장 개관기념. 극장종업원들과 명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가 당시 민의원 의장 이기붕이고 오른쪽이 부인 박마리아, 그 옆이 이지룡이다. 명보극장은 개관했으나 대림산업과의 알력다툼으로 친구 양봉식을 비롯한 초기 관계자들은 명보극장에서 손을 떼게 되고 그 또한 명보극장에서 나오게 된다. 대림산업 측의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소송을 제기했으나 5.16으로 유야무야 된다. 그는 다시금 심기일전해 1960년대 중반 영화제작업에 뛰어든다. 1964년 <학생부부>(김수용) 등 다른 영화사의 이름을 대명해 세 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1966년 아세아영화사를 만들어 자신의 메이커로 본격적인 영화제작을 시작한다. (사진10) <학생부부>(김수용, 1964) 촬영현장. 선글라스를 낀 이가 김수용 감독이고 그 옆에 양복을 입고 있는 이가 제작자 이지룡이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보고 있는 이가 촬영감독 전조명이다. 그리고 1965년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로 정창화 감독과 처음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2차 세계대전 중 미얀마 전선을 배경으로 스스로를 황군으로 정체화한 조선인 지원병이 미얀마 게릴라 대원과 친구인 조선인 학도병들의 죽음을 통해 각성하고 일본군에 대항하지만 미얀마 게릴라 대장의 오해에 의해 결국 죽임을 당한다는 내용의 남방전쟁액션영화이다. 열대 지방인 미얀마 전선을 국내에 재연하기 위해 그는 미공보원에 있는 지인의 도움을 받아 정창화 감독과 함께 미공보원에 들어가 동남아 전투장면에 대한 영상을 살펴보고 자료를 모았다. 이를 바탕으로 일본군 초소와 열대 밀림을 광릉에 만들고 실제 동남아 전선을 촬영한 미공보원의 필름까지 복사해 영화에 사용했다. (사진1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동남아 분위기를 내기 위해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사용한 것이다. (사진12)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의 한 장면으로 열대 전선 상공을 나는 전투기 장면도 미공보원에서 가져온 필름을 영화에 사용한 것이다. (사진13, 14, 15)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오픈세트로 만든 일본군 초소는 그 규모와 정교함에서 추석 대작프로그램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창화 감독은 본인의 구술에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의 열대 야자수는 국내의 호사가에게 빌려서 촬영한 것이라 증언했다. 제작자 이지룡은 야자나무를 제작팀이 천이나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직접 만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쌀과자로 중국식 발을 만들었던 당시 소품팀의 재주라면 야자나무 또한 그럴듯하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영화 속에 열대 풍경을 재현하기 위해 야자나무 일부는 빌리고 일부는 만드는 식으로 처리한 듯하다. (사진16, 17)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야자나무가 화면 전면에 배치되어 있는데 옥의 티처럼 화면 왼쪽 하단에 화분이 보인다. 당시 촬영현장에는 따로 모니터가 없고 카메라의 작은 뷰파인더로만 촬영 중인 화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시네마스코프 영화의 경우 카메라 뷰파인더에는 일명 쫄쫄이 화면이라 불리는 세로로 긴 왜곡된 화면이 보이기 때문에 이런 실수가 발생했을 것이다. (사진18, 19, 20)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에서 광릉에 만들어 놓은 열대밀림과 서해안으로 보이는 곳에 만들어 놓은 열대의 바닷가 장면이다. 전쟁이 끝나고 회한에 젖은 주인공이 홀로 바닷가로 향하는 장면에는 큰 키의 야자나무들이 이국적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호사가의 야자나무인지 제작팀이 직접 제작한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도 당시 대부분의 한국영화 처럼 지방배급업자들에게 지역판권을 선판매한 자금에 초기 투자금 및 초과되는 제작비를 제작자가 감당하는 방식으로 돈을 조달해 영화를 만들었다. 제작 초기 스틸사진만 보고 지방배급업자들이 어음을 끊어주고 시사회에서 개봉관 아카데미극장 방우영 사장이 일어나 박수 칠 정도로 평이 좋아 흥행을 기대했으나 대중의 반응은 달랐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손해만 안겨준 작품이 된다. (사진21)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포스터 깐깐하고 꼼꼼한 정창화 감독을 만족시키는 데는 많은 제작비가 들었다. “정창화한테 내가 밤낮 지지...연출자가 뭐 하는데 밀어줘야지. 그러니까 다른 회사는 가지도 않고, 다른 회사에서도 정창화가 제작비를 많이 들인다 해가지고 정창화 쓰는 걸 겁내 한 거야.” 그럼에도 그는 정창화 감독의 가능성을 보고 영화를 계속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연출로 1966년 <순간은 영원히>, <예라이샹>, <위험한 청춘>, 1967년 <비련>, <위험은 가득히>, <황혼의 검객>, <조용한 이별>, 1970년 <아랑곡의 혈투>(정창화·짱깅퍼)를 연이어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이 2년간 연출, 개봉한 작품의 70퍼센트를 그가 제작했다. 정창화 감독의 까다로운 연출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제작사는 아세아영화사 말고는 없었다는 말이 과언이 아니었다. (사진22) 아세아영화사 사무실에서 이지룡, 정창화 당시 홍콩 굴지의 영화사 쇼브라더스가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게 된 영화 <순간은 영원히>도 그가 한홍합작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그는 정창화 감독이 아시아 무협영화의 거장으로 탄생할 수 있는 밑거름을 제공한 제작자였다. 자칫 멜로드라마로 오해할 법한 제목인 <순간은 영원히>는 사실 홍콩을 무대로 남한 정보원들이 대남공작을 위해 막대한 금괴를 수송하려는 북괴 간첩단을 일망타진한다는 첩보액션영화이다. 영화의 원래 제목은 <위기X7호>인데 무슨 일인지 공보부는 개명을 권유했고 결국 <순간은 영원히>로 변경한다. 그래도 영문제목은 <Special Agent X-7>이다. (사진23)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의 포스터 <순간은 영원히>는 홍콩 로케이션 촬영을 위해, 국내에서 중화권 영화의 통번역을 맡았던 인물의 소개로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유린영화사와 합작해서 만들어졌다. 달러의 반출이 어렵던 시절 이국적인 홍콩배경이 필요한 경우 합작은 유리한 선택이었다. 국내 배우와 스태프들의 개런티와 국내 촬영 비용은 국내제작사가 부담하고 홍콩배우들과 홍콩촬영분은 합작한 홍콩 현지 제작사가 비용을 부담하는 식으로 진행했다. 이런 제작 방식은 홍콩이나 대만의 영화사들에게도 매력적인 일종의 공동제작, 투자방식이었던 듯싶다. 그래서 그는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 <비련>(정창화, 1967),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낮과 밤>(전우열, 1968),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대벽관>(부청화·장진원, 1970) 등을 한홍합작으로 제작했다. 홍콩에서 <순간은 영원히>(정창화, 1966)를 본 쇼브라더스사는 정창화 감독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아세아영화사에 연락했고 그는 정창화 감독 외에 액션영화에 일가견이 있던 김기덕, 장일호 감독도 함께 소개해주었다. 또한 부족한 홍콩의 남자배우들을 채우기 위해 배우 성훈, 남석훈, 방수일, 오경아 등을 추천해 그들 또한 홍콩에서 한동안 활동하게 된다. (사진24)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에 출연 중인 오경아와 방수일 정창화 감독을 쇼브라더스에 소개한 인연으로 아세아영화사도 쇼브라더스와 함께 <아랑곡의 혈투>를 합작하게 된다. 이 작품은 쇼브라더스의 영화를 합작영화로 둔갑시킨 위장합작 영화라는 논란이 많은 작품이다. 당시 외국영화의 수입편수가 국가에 의해 통제되다 보니 인기 있는 외국영화와 겉모습을 취할 수 있는 합작영화의 제작이 인기였다. 실제 국내영화사와 거래를 했던 홍콩과 대만의 영화사는 국내 영화법의 각종 제약(합작영화의 조건인 국내감독의 참여, 국내배우의 출연, 투자금액의 제한 등)을 인식하고 이에 맞춰 때로는 이면계약이 이뤄지던 시절이었다. 당시 홍콩이나 대만영화에 국내 영화제작사가 사전투자를 통해 합작영화 타이틀을 얻기도 했는데 이런 작품들 모두 당시 기준으로는 위장합작이다. 아세아영화사는 김진규의 추천으로 대만 영화에 사전투자를 했지만 결과물이 좋지 않아 추가 투자를 철회하고 판권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국가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합작영화의 제작은 대단히 유동적이고 탄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진25) 쇼브라더스와 아세아영화사와의 합작영화인 <아랑곡의 혈투>(정창화, 1970) 포스터이다. 홍콩무협영화의 색채를 띈다. (사진26) 홍콩의 군소영화사인 영광영업공사와 아세아영화사의 합작영화인 <조용한 이별>(정창화, 1967) 포스터이다. 주연 여배우인 홍콩 배우 정향이 신성일과 남정임 사이에 작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 1971년에 그는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을 연출한다. 아세아영화사의 여배우 공모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인데 당시 공모전 사진을 보면 지금의 오디션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사진27)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포스터 (사진28) <20인의 여도적>(이지룡, 1971) 여배우 공모전 사진 1972년에는 영화제작사인 유림흥업을 설립한다. 그리고 1973년 이성구 감독 연출로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를 일본의 고즈시마섬에서 로케이션으로 제작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쥬리아는 임진왜란기 일본에 입양된 조선 출신 여성으로 천주교도로 성장해, 천주교를 박해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측실 제안을 거절하여 유배당하고, 유배지에서 약자와 병자에게 헌신해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된다. (사진29)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포스터 1973년 오타 쥬리아에 대한 기사가 국내에 소개되어 인기를 얻자 다섯 개의 영화사가 이 소재를 영화화하고자 경합했다. 영화사들이 기획안을 문화부에 접수했고 그 중 유림흥업의 작품이 선정된다. 유림흥업은 야심차게 일본 고즈시마섬에서 이 작품의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한다. (사진30, 31)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의 스틸 섬 사람들의 관심과 우호적인 협조 속에서 진행된 작품이라 벅찬 마음에 제작자는 영화 타이틀이 뜨기 전 작품의 취지에 대한 제작자의 당부 영상과 이를 일어로 통역하는 배우 김진규의 영상까지 넣어 완성시켰다. (사진32)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일본 고즈시마섬 촬영 현장. 보조출연을 해 준 섬 주민들과 함께한 사진으로 양복을 입은 이가 이지룡이고 오른쪽이 배우 김진규이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천주교 신자들의 단체관람도 기대했으나 신통치 않았다. 김수환 추기경을 초대한 시사회에서 추기경이 관람 도중 나가는 사태가 발생할 만큼 영화에 불편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쥬리아가 유배를 가게 된 동기를 묘사하는 과정에서 쥬리아의 성녀로서의 이미지가 훼손된 것이 원인이라 지적했다. 흥행을 위해 외설적인 묘사를 시도한 것이 오히려 흥행에 악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사진33, 34)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 도꾸가와 이에야스 역의 허장강과 쥬리아 역의 신숙 야심차게 제작한 작품의 부진으로 타격을 입은 그는 10년 정도 합동영화사와 한진흥업, 남아진흥공사에서 부사장으로 있으며 극장업과 영화제작에 대한 자문과 기획 활동을 했다. 극장업과 수입, 제작을 아우르며 폭넓게 활동한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제작사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리고 1986년 다시 다남흥업을 설립한다. 1992년까지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와 같은 흥행작을 수입했으며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를 비롯하여 6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프리지스 오너>는 1986년 9월 다남흥업이 수입하여 단성사에서 개봉한 작품이다. 당시 신문에 의하면(《매일경제》 1986년 8월 13일 9면) 다남흥업은 <프리지스 오너>의 사전제작단계에서 수입을 결정해 저렴한 가격에 좋은 영화를 수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사진35, 사진36) <프리지스 오너 Prizzi’s Honor>(존 휴스턴, 1985) 개봉 당일. 종로 극장 단성사 앞의 풍경으로 관객들이 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길게 줄 서 있다. 단관 개봉관 시절에는 인기작의 경우 영화표를 사기 위해 극장 앞에 관객들이 길게 줄지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작자들은 이것 또한 광고라 생각하고 일부러 줄을 대로변으로 세우거나 티켓박스를 조금 늦게 열기도 했다. 1989년에 제작한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는 작가 이문열의 요구에 따라 원작료를 러닝개런티로 선점하고, 베니스영화제와 모스크바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 강수연을 캐스팅해, 영화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로케이션 촬영한 야심작이었다. (사진37, 38)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 홍보사진 이 작품은 음력설이었던 개봉일, 한파에도 불구하고 국도극장에서 을지로까지 줄을 선 관객들로 전회 매진을 기록하며 극장 문을 열었다. 31만이 넘는 관객이 들어 그해 방화 3번째 흥행작이 된다. 그리고 1990년 대종상 최우수 작품상과 기획상 등 7개 부문을 수상해 흥행은 물론 작품성까지 인정받는 영화가 된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정창화, 1965), <쥬리아와 도꾸가와 이에야스>(이성구, 1973)등 흥행성과 작품성을 만족시키고자 큰 투자를 감행했던 작품들이 기대에 못 미쳤으나 드디어 만족스러운 성과를 낸 작품이 나온 것이다. 그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장길수, 1989)의 성공 이후 소품 두 어 편을 제작한 뒤 40년 가까이 몸담은 영화계를 은퇴한다. 무일푼 단신으로 월남했지만 빠른 판단과 추진력, 도전정신을 통해 영화계에 족적을 남긴 그의 다이나믹한 인생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된 2012년 원로영화인 구술에서 좀 더 깊이 있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도 늘 왕따를 당하는 12살의 콜. 겁이 많고 용기는 부족한 콜을 위해 부모는 지금도 베이비시터를 고용한다. 콜이 짝사랑하는 예쁘고, 멋지고, 화끈한 비. 부모가 외출한 사이 콜과 놀아주고, 콜이 잠든 후 부모가 돌아오면 일이 끝나는 베이비시터다. 그런데 콜은 궁금하다. 내가 잠들고 난 후 비는 무엇을 할까. 동급생이자 이웃집에 사는 친구 멜러니는 어른들이 하는 짓을 할 것이라고 놀린다. 정말, 정말일까? < 사탄의 베이비시터 >의 원제는 ‘The Babysitter’다. 이 제목이라면, 그리고 예고편도 보지 않았다면 10대 소년이 짝사랑하는 베이비시터를 통해서 현실을 알게 되는 성장영화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혹은 섹스 코미디나 불륜물. 그러나 <사탄의 베이비시터>는 10대 소년과 베이비시터의 이야기를 코믹 호러 성장물로 연성한다. 잠이 든 척했던 콜이 거실을 훔쳐보니 비의 친구들이 몰려와 있다. 게임을 하면서 벌칙으로 키스를 한다. 이제 어른들의 사정이 시작되는구나 싶더니만 반전이 시작된다. 애인으로 보이는 남자와 비가 키스를 시작하는데, 웬걸 비의 두 손에 들린 칼이 남자의 머리에 꽂힌다. 피가 줄줄 흐른다. 잠든 척하다가 들킨 콜은 추궁을 받는다. 뭘 봤지? 어디까지 봤지? 그리고 비와 친구들이 악마의 책을 이용하여 의식을 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10대 청소년들이 악마 의식에 빠지는 것은 빈번한 일이고 딱히 이상하지도 않다. 그 시절이야말로 바라는 것이 더욱 많을 때니까. 그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생각하지 않고, 일단 저지르고 볼 때니까. < 사탄의 베이비시터 >의 장르를 따진다면 호러 코미디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성장이다. 12살의 콜은 스스로 새가슴이라 말한다. 언젠가는 경찰이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마음뿐이다. 아버지가 운전을 가르쳐주겠다며 운전석에 앉혀도, 늘 다음 주를 기약하며 결국은 내려 버린다. 그런 콜이 비를 짝사랑하다가 배신당하고,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하기에 한 걸음 나아간다. 영화가 끝나면, 콜은 운전도 하고, 그를 짝사랑했던 멜러니와 데이트도 하게 될 것이다. 집에서 책과 영화만 보며 몽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니 반드시 비를 극복해야만 한다. 익숙한 이야기다. 하지만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기존의 청춘물, 공포물, 성장물의 특정한 요소들을 제대로 배합하여 효과를 발휘한다. 톰 크루즈를 처음 배우로 인식하게 한 걸작 < 위험한 청춘 Risky Business >(1983)이 겹친다. 모범생이 부모의 휴가를 틈타 파티를 열었다가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되는데, 막대한 돈이 구하기 위해 그가 세운 타개책은 포주가 되는 것이다. 파티에 온 콜걸에게 연락을 하며 대학 경영학과에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자본주의 생존법을 알게 된다. 청춘물의 아이들은 이렇게 고난을 통해 어른이 된다. <위험한 청춘> 초반, 혼자 남은 톰 크루즈가 거실을 누비며 에어 기타를 치는 장면이 있다. <사탄의 베이비시터>에서 콜과 비가 함께 거실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며 톰 크루즈의 에어 기타를 떠올렸다. 도망치는 콜을 쫓는 비는 < 13일의 금요일 >의 효과음을 연상시키는 소리를 낸다. 그리고 도망갈 생각만 하던 콜이 용기를 내서 하나씩 비의 친구들을 물리치면 < 나 홀로 집에 >가 된다. 혼자 집에 남은 소년이 악당들을 물리치기 위해 집안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싸우는 영화.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오가잡탕인데 꽤나 맛있다. 한때 < 미녀 삼총사 > 1, 2편을 만들며 각광받다가 <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 >(2009) < 디스 민즈 워 >(2012) < 쓰리데이즈 투 킬 >(2014) 등 실패작을 연속하며 움츠러든 맥지이지만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아기자기한 연출력이 돋보인다. 성공작인 <미녀 삼총사>와 <사탄의 베이비시터>에 공통점이 있다면 다양한 장르적 요소를 적절하게 뒤섞었다는 것과 1980년대에 대한 향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주도했던 80년대 장르 영화 트렌드를 뭉뚱그린 소년소녀 모험백서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다. < 구니스 > < 그렘린 > < 빽 투 더 퓨처 > 등의 영화로 대표되는. 토비 후퍼를 초빙하여 만들었던 < 폴터가이스트 >(1982)가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다면 그 시절에 이미 청춘 호러가 득세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980년대는 청춘보다 호러에 방점을 둔 슬래셔 영화가 절정이었고, 이후 케빈 윌리암슨이 그 시대 슬래셔 영화를 패러디한 < 스크림 >(1996)의 시나리오를 쓰면서 청춘 호러는 개화했다. 청춘 호러를 너무 어둡게 가기보다는 케빈 윌리엄슨처럼 적절히 유머를 섞어가며 다루는 편이 효과적이었다. 호러와 코미디의 결합은 어려운 선택이지만 피터 잭슨의 < 데드 얼라이브 >와 샘 레이미의 < 이블 데드 > 시리즈가 보여준 스플래터의 감각을 더욱 끌어올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80년대 감각의 청춘 호러 코미디를 매끈하게 엮어낸 영화라 할 수 있다.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영리하게 향수를 끌어낸다. 마당에서 프로젝터로 보는 영화는 1971년 작인 <빌리 잭>이다. 기존의 영웅들로 은하계 드림팀을 만드는 게임을 하는데, 비가 선택한 드림팀은 < 스타 트렉 >의 커크와 피카드, <에일리언>의 리플리, < 인디펜던스 데이 >의 윌 스미스와 제프 골드블럼이다. 콜은 < 배틀스타 갈락티카 >의 아다마 제독, <스타 트렉>의 데이터, 프레데터 그리고 콜과 비였다(1978년 작 <배틀스타 갈락티카>가 있다). 이렇듯 <사탄의 베이비시터>는 영화 내내 과거의 영화와 드라마 등 대중문화의 기억들을 소환한다. 또한 < 사탄의 베이비시터 >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지점은 캐릭터다. 콜은 비를 짝사랑한다. 멜러니는 콜을 짝사랑한다. 전형적인 스토리라면 비가 악녀로 밝혀지고, 비를 물리치는 모험을 한 후 멜러니와 맺어져야 한다. 하지만 <사탄의 베이비시터>를 보고 있으면, 아무리 노력해도 비를 미워할 수가 없다. 싫어할 수가 없다. 예뻐서만은 아니다. 콜을 괴롭히는 소년에게 비가 귓속말을 한다. 지독한 말에 놀란 소년은 잔뜩 겁을 먹고 도망친다. 비는 기존의 여성 캐릭터인 비치(bitch), 빅센(vixen), 팜므파탈 무엇으로 규정하기 힘들다. 뭔가를 얻기 위해 사람을 죽이는 것은 맞는데, 그것 말고는 미워할 지점이 없다. 동정인 남자의 피가 필요해서 콜이 필요했을 뿐, 나름 성심껏 대해준다. 최선을 다해서 콜의 부족한 단점을 메워주고 용기를 준다. 대체 왜 이러는 거냐는 콜의 질문에 비는 답한다. 원하는 무엇이든 가질 수 있다고. “나는 너무 작았고 두려움에 떨곤 했지. 지금은 강하지. 두려움도 없어.” 라고. 비도 콜과 다르지 않았다. 어쩌면 더 약하고 초라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는 선택했을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더라도 강해지겠다고. 그리고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콜이 비에게, “누나는 <매드맨>의 주인공 같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멋지고 잘 생겼지만 바람이나 피우는 놈.’ 하지만 그만의 이유가 있고, 매력이 있는 놈이 아닌 X인 비. 콜은 비를 사랑했고, 결코 미워할 수가 없다. 하지만 비가 정체를 드러내고, 콜의 친구를 죽일 것임을 알게 되었을 때 콜은 대적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비로소 콜은 어른이 된 것이다. 비를 통해서, 비와 맞서고 극복한 후에 콜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 위험한 청춘 >에서 톰 크루즈가 콜걸인 레베카 드 모네이와 섹스를 하고 포주가 되는 경험을 한 후 어른이 된 것처럼. 과감하게 대학을 포기하고 자신의 인생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듯이. 2014년, 아직 제작되지 않았으나 가장 좋아하는 시나리오인 ‘블랙리스트’, 2015년(에도) 아직 제작되지 않은 가장 좋아하는 호러 시나리오인 ‘블러드 리스트’에 꼽혔던 브라이언 더필드의 시나리오는 전형적인 장르 요소들을 도발적이고 역전된 캐릭터와 훌륭하게 결합시킨다. 킬링타임 용 오락영화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듯 한 기분이다. < 사탄의 베이비시터 >는 2015년 완성되었지만 2017년 10월 13일의 금요일에 넷플릭스를 통해서 공개되었다. 사족. 최근 넷플릭스에서는 스티븐 킹 원작의 <제럴드의 게임>과 <1922>, 애나 릴리 아미푸르의 < 버려진 자들의 땅 The Bad Batch >, 제러미 러시의 <겟어웨이 드라이버 Wheelman>, 닉 다미치의 <부시윅> 등 다양한 장르영화들을 직접 제작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자체 제작 장르 영화들은 오래 전 할리우드 동시상영시대에 만들던 B-Movie 같다. 스타가 나오는 대작을 메인으로 상영하면서 열혈 팬이 있는 액션, 호러, SF 등을 저예산으로 만들었던 B급 영화. 넷플릭스는 기존 채널에서 모두 거절당한 드라마 < 기묘한 이야기 Stranger Things >를 제작하여 대성공을 거두었고, SF <익스팬스>와 호러 <헴록 그로브> 등 장르물에서 더욱 두각을 보이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 < 블레임 > <아인> < 사이보그 009 >를 자체 제작하고 기존 작품 판권도 대거 사들이는 중이다. 소수 취향이지만 전 세계로 동시에 내보내면 시청자는 아주 많아지니까. 앞으로 넷플릭스는 < 사탄의 베이비시터 > <제럴드의 게임> 등 재기 있고 발랄한 영화들의 수원지가 될 것이다.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F/02184 청춘, 성장, 정체성. 여기까지만 들으면 풋풋하고도 쓰라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시절을 그린 성장영화들이 떠오른다. 구스 반 산트의 < 파라노이드 파크 >나 이와이 슈운지의 < 릴리 슈슈의 모든 것 > 같은. 그런데 이 단어들 사이에 섹스를 던져 넣으면 방향이 미묘하게 뒤틀린다. 섹스를 통해서 젊은 날의 방황을 진지하게 그리는 영화들도 더러 있지만 청춘과 섹스라면 대개 ‘청춘 섹스 코미디’로 연결된다. 도발적이거나 유희로 풀어내는 정도의 차이가 있고. 청춘 섹스 코미디의 시작이라면 1983년에 개봉한 < 그로잉 업 >을 들 수 있다. 고등학교 남자애들이 성에 눈을 뜨며 벌어지는 갖가지 이야기들. 당시에는 할리우드 영화라고 생각하고 봤는데 후일 알고 보니 이스라엘 영화였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남녀가 함께 입영 훈련을 하는 장면도 있었다. 야하기는 했지만 가슴 뭉클하기도 했는데, 1978년 이스라엘에서 개봉했을 때 인구의 40%가 본 화제의 국민영화였다. 골든글로브 해외영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제임스 딘의 < 이유 없는 반항 >(1955)이나 < 폭력교실Blackboard Jungle >(1955)을 비롯하여 이전에도 청춘영화는 있었지만 하나의 장르로서 형성된 것은 1980년대였다. < 그로잉 업 >의 영향을 받아 더욱 선정적이고 머리는 비운 <포키스>가 나온 것이 1981년. 1980년대에는 청춘영화들이 쏟아져 나왔고, 수작도 많았다. 에이미 해커링의 < 리치몬드 연애소동Fast Times at Ridgemont High >(1982), 프랜시스 코폴라의 < 아웃사이더 >(1983), 폴 브릭먼의 < 위험한 청춘Risky Business >(1983) 등등. 한때 청춘영화의 셰익스피어라고 과찬을 받았던 존 휴즈는 1984년부터 <아직은 사랑을 몰라요Sixteen Candles>(1984) < 브렉퍼스트 클럽 >(1985) < 페리스의 해방Ferris Bueller’s Day Off >(1986) 등을 만들었다. 청춘영화에 성적 체험이 빠질 수는 없었지만 두드러지게 섹스를 내세운 영화는 < 리치몬드 연애소동 >과 < 위험한 청춘 >이다. 1995년에 < 클루리스 >를 만들기도 했던 에이미 해커링은 숀 펜, 제니퍼 제이슨 리, 피비 케이츠를 출연시킨 <리치몬드 연애소동>에서 남자의 성적 모험만이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청춘의 한 시절을 그려냈다. <위험한 청춘>은 아이비리그에 진학하려던 모범생이 콜걸을 만나 대학을 때려 치고 포주로 나아가는 ‘위험한’ 결말을 보여주었다. 주인공은 무려 톰 크루즈. ‘청춘 섹스 코미디’는 어느 정도 감동과 후련함을 주지만 그 이상은 결코 쉽지 않다. < 아메리칸 파이 >(1999)는 아주 재미있고, 지나간 시절의 추억과 감동을 함께 주었지만 딱 그 정도였다. 그럴 수밖에 없다. 사춘기 남자아이들의 성적 충동은 때로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일상을 보내지는 않으니까. 야한 책과 영화를 보고 자위를 매일 할지라도 나머지 시간에는 다른 무엇인가를 한다.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거나 배신하기도 하고, 왕따를 당하며 괴로워하기도 하고,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불안으로 방황하기도 한다. 그런 고뇌와 일상의 풍경을 스쳐 지나면서 섹스에만 포커스를 맞추는 청춘 섹스 코미디는 애초에 한계가 명확하다. < 에브리바디 원츠 썸!! >도 제목만으로는 그랬다. 누구나 ‘썸’을 원해. 일단 이성을 만나고, 연애 이전에 탐색을 하며 섹스를 하고 미래로 나아갈까 말까 하는 단계. 기왕이면 연애 이전에 썸만 수없이 타면 더욱 좋지 않을까? 연애는 아주 아주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 훗날 하면 되는 것이고. 제목만 듣고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가벼운 만남과 섹스를 보여주는 청춘 섹스 코미디이겠지, 라고 생각했다. 감독이 리차드 링클레이터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는. 감독을 알고는 바로 선입견을 내렸다.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연출한 청춘 섹스 코미디의 방점은 당연히 ‘청춘’일 테니까. 1991년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데뷔작 < 슬래커 >는 다수의 젊은이들을 따라간다. 에피소드마다 이야기가 흐르고, 자잘한 에피소드들이 섞이고 뭉쳐서 커다란 이미지로 남게 한다. 다음 작품인 < 멍하고 혼돈스러운Dazed and Confused >(1993)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다양한 청춘의 풍경을 그려낸다. 스치는 것 같으면서도 하나하나의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다. 이후 < 비포 선라이즈 > 3부작과 아카데미 수상작인 < 보이후드 >로 대중의 사랑과 평단의 찬사를 모두 얻은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영화는 순간을 포착하면서, 그 순간들이 어떻게 거대한 흐름으로 수렴하는지를 보여준다. 개별적이고 파편적이면서도 거대한 그림의 조각으로 맞춰지는 영화.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대학 개강을 하기 전, 3일 15시간의 풍경을 보여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제이크가 차를 몰고 대학으로 가는 장면에서 낵의 ‘마이 샤로나’가 흘러나온다. 1980년 8월의 풍경이다. 전작인 < 보이후드 >의 마지막 장면이, 성장한 소년이 대학에 입학하여 차를 타고 떠나가는 것임을 생각하면 일종의 연장선이다. 혹은 < 멍하고 혼돈스러운 >이 1976년의 고등학생들 이야기였던 것을 기억한다면 <에브리바디 원츠 썸!!>은 그들이 대학에 들어가 겪는 사흘간의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리차드 링클레이터 자신이 겪었던 1980년의 대학이기도 하고. 명목상의 시간은 <멍하고 혼돈스러운>의 다음이고, 상징적으로는 <보이후드>의 연속선에 놓여 있다. 고등학교에서 투수였던 제이크는 대학에서도 야구부 활동을 한다. 제이크의 동료, 선배들은 모두 개성이 강하다. 허세를 부리기도 하고, 사소한 내기에 지는 것도 싫어하고, 후배들을 은근히 경쟁자로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에서만은 일치단결한다. 여자를 만나는 것. 디스코 클럽, 컨트리 클럽, 펑크록 공연 그리고 코스튬 파티까지 오로지 여자를 만나기 위해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목적은 섹스다. 뭐 어떤가. 혈기왕성한 스무 살의 청년인데.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다. 제이크는 말한다. 디스코, 컨트리, 펑크를 오락가락하다 보니 뭐가 진짜이고 뭐가 아닌지 헷갈린다고. 신입생인 뷰터도 말한다. 대학은 생각할 것이 너무 많다고. 그럴 수밖에 없다. 만약 프로에 가지 못한다면, 그들의 인생은 확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그라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공부를 하거나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전공은 중요하지 않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대학에 오니 주전에 끼기도 쉽지 않다. 제이크가 좋아하게 된 베벌리는 공연 예술 전공이다. 고등학교 때는 다들 주연이었는데 이제는 캐스팅만 되어도 감지덕지다. 사흘 동안, 선배들과 대학이라는 공간을 만나서 알게 된다. 이제부터가 진짜 인생의 시작이라는 것을. 나이가 엄청 많은, 좋았던 시절을 버릴 수 없어 대학을 떠도는 월러비는 말한다. “너희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해. 자신을 찾는 경험을 두려워하지 마.” 하지만 그 역시 진짜 자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고만 있다. 월러비가 쌓아놓은 <환상특급> 비디오테이프를 보고 제이크가 한 에피소드를 말한다. 어떤 여자가 예뻐지기 위해 성형을 하려고 하는데, 알고 보니 그 여자가 아름답고 다른 이들이 엉망이었다고. 그들은 모두, 자신이 별종이라고 생각한다. 사춘기 때는 대개 그렇다. 나는 왜 이렇지? 나는 누구지? 어디로 가야 하지? 뭐가 맞는 것일까? 아무리 이성을 찾아 하룻밤을 탕진하며 생각을 멈춰도 마음속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월러비는 원소가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결합방식이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말 많은 핀은 재료가 아니라 재료를 느끼는 방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존재하는 그들 자신이 아니다. 남들이 평가하는 무엇, 나도 알고 있는 나 자신, 그것은 이미 존재한다.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결합해 갈 것인가. 대학은 찾아가는 과정이다. 어른이 된다는 역시. 마지막 코스튬 파티에서 그들은 평소의 모습 그대로 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지금의 모습 자체도 가면이라고. 우리는 항상 가면을 쓰고 있고, 어쩌면 가장 파티에서의 가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이거나 미래인 것일지도 모른다. 투수는 혼자 마운드에 올라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지만, 또한 팀원들의 도움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나를 찾는 것과 동시에 타자를 만나고 어우러져야 한다. 그게 대학이고, 세상이고,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이다. 1980년대는 싸워야 하는 대상이 사라진 시대였다. 68혁명의 여파가 이어지던 낙담과 쾌락의 70년대와는 전혀 다른 시대. 모든 것이 반짝거리고 부유하는, 텅 빈 세계. 그러나 젊은이들의 존재는 언제나 똑같다. 시대가 변해도, 그들의 불안은, 그들의 고독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에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결국 리차드 링클레이터가 경험했던 1980년대의 번들거리는 풍경을 통해 그려낸 청춘의 표상이다.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명확하게 말해준다.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좋을지를.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청춘 영화들은 언제나 별종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결국은 ‘Freak’ 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많은 여자들과 썸을 타다가 베벌리를 만난 제이크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쓴 에세이에 대해서 말한다. 시지프스의 신화를 빗대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의미가 생긴다고. 세상이 뭐라던 내가 할 일을 하고, 좋든 나쁘든 다가올 것을 받아들인다고. 베벌리도 말한다. 어떤 일에 열정을 갖는 것은 아름답지 않아? 그렇기에 바보처럼 보일 배짱을 가지고 예술과 함께 살아가겠다고 선언한다. 아마도 수없이 꺾이고 나뒹굴겠지만 시지프스를 떠올리면서 그들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한계를 설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니까. < 에브리바디 원츠 썸!! >은 청춘 섹스 코미디다. 사려 깊고, 원숙한 시선으로 방탕한 청춘의 사흘을 그려낸 섹스 코미디.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 길다. 사흘만으로 그들의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는 것처럼, 한순간의 섹스에 대한 욕망과 바보 같은 열정을 쉽게 판단할 수 없다. 리차드 링클레이터는 무모하고도 요란한 청춘의 순간을 절묘하게 이어붙이면서 새벽, 아침의 개강 순간으로 관객을 끌어간다. 그건 파티가 끝난 후의 적막이 아니라 일상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작의 열정이다. 아침의 열정. 섹스가 끝난 후 남아 있는 미열을 느끼며 미소 짓는 기분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