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을 많이 하면 빨리 죽는다
- 감독
- 김홍수
- 제작년도
- 2013
“(밀레니엄 세대가) 성인기에 이르는 과정은 지연되고 있을 뿐 아니라 극단적인 경제 구조 조정, 심대한 문화 변동, 깊은 사회 불평등 때문에 근원적으로 파괴되고 있다.” 1) 사회학자 제니퍼 M. 실바는 미국의 밀레니엄 세대 100명을 인터뷰를 통해 연구한 저서 『커밍 업 쇼트』에서 위와 같이 적고 있다. 물론 2010년대 미국의 청년들과 2020년대 한국의 청년들을 일대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리스크풀링(Risk-pooling)이라는 사회안전망의 축소,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 산업 노동계급의 쇠락, 급속한 문화 변동 2) 등 실바가 꼽은 문제점은 지금의 한국에도 충분히 적용 가능하다. 『커밍 업 쇼트』의 국내 서평들은 88만원 세대, N포세대, 흙수저, 헬조선 같은 단어들을 사용해가며 국내 청년의 상황을 책의 내용과 비교하고 있다. 미국의 청년들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의 청년들 또한 독립, 취업, 결혼, 육아 등 전통적으로 성인기라 여겨지는 단계에 접근하는 것이 지연되고 있다. 이는 수준미달(Coming Up Short)의 개인들 때문이 아니라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 때문이라는 것이 이 책의 주된 분석이다. 더 나아가 실바는 성인기가 “극적으로 새롭게 상상되고” 있다며, 전통적인 성인기의 지표들 대신 다양한 방식으로 경험한 “고통의 치유를 성인 정체성의 기반” 3) 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홍다예 감독의 < 잠자리 구하기 >(2022)는 입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은 불안에 관한 고백이다. 고3이었던 2014년 입시생활에 관한 다큐멘터리 < 시발 .>(2014)을 시작으로 <개새끼>(2016), <관종쓰레기>(2018)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의 연장선상에 놓인 작품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하나의 고백으로 시작한다. 감독은 고3 시기 학교에서 마주한 잠자리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창밖으로 나가려 하지만 반복해서 유리창에 머리를 부딪히던 잠자리는 결국 떨어져 죽었다. 감독은 자살을 위해 찾은 한강 다리 위에서 그 잠자리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대학은 지긋지긋한 입시생활의 탈출구로 여겨짐과 동시에 학생들을 구속하는 유리벽이기도 하다. <잠자리 구하기>는 “대학에 간다는 것”의 의미를 끊임없이 되새긴다. 대학에 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며, ‘어른’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감독과 친구들은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다. 원하는 대학에 가지 못하고, 재수생활을 하고, 원하는 대학에 들어갔음에도 또다시 좌절을 경험한다. 대학에 들어가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이야기하던 말들은 허상이었음이 드러난다. 대학에 간다는 것은 성장이 아니라 새로운 불안의 시작임을 깨닫는다. 자신을 규명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학생들은 성적과 대학의 이름으로 자신을 정의하기 시작한다. 각자의 상황을 토로하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절망과 불안을 토해낼 뿐 아무런 논의도 서로에 대한 공감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잠자리 구하기> 속 친구들은 서로의 불안을 직관적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을 서로 해소해줄 수 없다. <잠자리 구하기>는 < 공부의 나라 >(2015)와 같은 다큐멘터리처럼 입시 제도를 분석적으로 비판하는 영화가 아니다. 고3, 재수생, 대학 신입생, 20대 중반인 현재 등 다양한 시간대의 모습이 계속하여 교차되는 영화의 형식은 ‘입시’와 ‘대학생활’이라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도 않다. 더 나아가, 이 영화는 그러한 불안을 떨쳐내고 마침내 발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성장담도 되지 못한다. 감독 자신은 이 영화를 “20대 청년의 인류학적 반(反)-성장 보고서” 4) 라 말하고 있다. “잘 지내지 못한다는 고등학교 친구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라는 시놉시스가 무색하게, 이 영화는 결국 편지를 부치지 못했다는 고백을 포함하고 있다. 불안 속에 놓여 있는 감독은 친구에게 편지를 보낼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다만 부치지 못한 편지를 이 영화로 대신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8년이라는 시간 동안 촬영된 감정을 유일한 진실로서 제시한다. 홍다예 감독과 친구들이 입시 과정에서 어떠한 실패와 성공을 경험했는지는 그저 그들이 경험한 사실의 기록으로서 제시될 뿐이다. <잠자리 구하기>가 제시하는 기록은 입시라는 과정 속에서 경험한 사실들의 진술이 아니라, 8년이라는 시간 동안 누적된 감정들이다. 자기 파괴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날것의 감정들을 파헤치고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반-성장을 고백한다. 이는 원하던 대학에 진학했음에도 여전히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는, 끝없이 성장기에 머무를 뿐 성인기에 도달할 수 없는 청년의 초상이기도 하다. 대학 진학이라는 지표는 여전히 강력한 성인기의 지표임과 동시에, 너무나도 추상적이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반-성장을 고백하는 또 한 편의 다큐멘터리가 있다. 푸른영상에서 제작한 이효진 감독의 < 가단빌라 >(2022)다. 이 영화 또한 감독 자신의 자살사고를 고백한다. 흑백 화면의 작은 공원에서 시작한 이 영화는 한 빌라의 문을 열고 들어가 빌라 꼭대기의 집으로 향하는 카메라의 이동에서 시작된다. 그곳은 이효진 감독이 26년을 살아온 공간이다. 이어지는 장면 속 내레이션은 14살 때 부모를 대신해 빚쟁이들의 전화를 받으며 자라왔고, 그렇게 10여 년간 이어진 불행 속에서 자살충동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감독은 불행 속에서 살아온 할머니 또한 자살을 생각했을지 궁금해 카메라를 들었다고 영화 속에서 밝히고 있다. 감독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하지만, <가단빌라> 속 대부분의 푸티지에서 감독의 목소리는 삭제되어 있다. 할머니나 어머니 등과 감독이 대화하는 장면에서 감독의 말은 사운드에서 지워진 채 자막으로만 처리되어 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은 카메라 뒤로 자신을 잔뜩 숨긴 채 가족의 이야기를 기록한다. 이효진 감독은 ‘손녀’이자 ‘딸’로서 할머니와 어머니 앞에 서 있지만, 목소리를 지움으로써 온전한 관찰자의 위치로 물러나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이효진 감독의 모습은 가끔씩 등장하는 내레이션으로, 흑백 화면의 영화 속 몇 안 되는 컬러 화면의 홈비디오 영상으로만 등장한다. <가단빌라>는 할머니를 비롯한 여성 가족구성원들의 일상을 관찰한다. 이 일상에는 부동산과 돈의 문제를 두고 격앙된 목소리로 싸우는 가족구성원들의 모습 또한 포함되어 있다. 내레이션이 아닌 이효진 감독의 목소리가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는 화가 난 할머니가 칼을 드는 장면이다. “할머니 칼 들었어”라는 감독의 말은 감독이 자신의 목소리를 삭제함으로써 결심한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배반하며, 자신에게 내포된 불안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가단빌라>는 가족이 왜 싸우는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살아왔는지 친절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부동산과 돈의 문제가 전면화되는 다른 작품, 이를테면 마민지의 < 버블 패밀리 >(2016)와 같은 작품들이 IMF를 비롯한 국가적, 사회적 사건들을 끌어오고 뉴스화면 등을 차용하며 가족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설하는 것과 대비된다. 다만 관객들은 어렴풋이 그 문제들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가족의 생계와 함께 육아와 가사노동까지 책임져야 했던 할머니의 과거, 딸의 기여를 무시하고 아들에게 먼저 이익을 물려주려는 할머니의 태도, 끊임없이 재산을 ‘날려먹음’에도 반성하지 않는 집안의 남성들. 한국 특유의 부동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가 이 영화의 내부에서 맴돌고 있지만, 이효진 감독의 카메라는 그곳에 집중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집안의 남성들을 거의 담아내지 않는다. 종종 프레임 속에 들어오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속에서 등장할 뿐이다. 이 영화는 집안을 말아먹고 감독에게 불안감을 심어준 가장 큰 이유가 되는 인물들을 담아내지 않는다. 오히려 감독 자신과 비슷한 위치에서 비슷한 방식으로 살아온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주목한다. 마치 “이런 끔찍한 집안에서 살아남은 비결이 무엇인가요?”라며 묻는 것처럼. 영화의 제목인 ‘가단빌라’는 감독이 거의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동시에 "집을 지어 성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공하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말처럼 자본주의적 성공의 지표이고, “삼촌이 말아먹을 수 있는” 투자가치를 지닌 상품이자, 욕설과 고성이 오가는 싸움터이다. 가단빌라라는 공간에 담긴 한 가족의 역사와 정동, 수준미달의 사회와 제도가 만들어낸 집이라는 전쟁터는 반-성장을 추동한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가단빌라의 평면도 위로 가족의 사진을 오버랩시키는 장면은 영화가 담아낸 반-성장의 근원을 갈무리하고 있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의 반-성장 서사는 그것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잠자리 구하기>의 마지막에서 홍다예 감독은 물에 빠진 잠자리를 나뭇가지로 건져 올려 구해낸다. <가단빌라>는 흑백의 이미지를 담아내는 카메라 뒤에 숨어 있던 감독이 다시금 목소리를 내고 푸른색 하늘을 담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두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모종의 결심이 담겨 있다. 혹은 그 모든 것을 견디고 자신이 아직 버티고 있다는 증거로 각자의 영화를 제출해낸 것만 같다. 실바의 말을 다시금 빌리자면, 두 영화는 “과거로 돌아가 (정신적) 병리 현상의 숨겨진 원천을 찾고, 타인들과 의사소통하면서 겪은 고통의 이야기에 목소리를 부여하고, 해방되고 독립된 자아를 형상함으로써 과거를 극복” 5) 하는 것이다. 실바가 이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마크 피셔는 『커밍 업 쇼트』의 논의를 확장하는 글 [반-치료]에서 실바의 분석이 "치료 서사는 더 이상 제도에 의지해 개인을 뒷받침하고 보살필 수 없는 세계에서 의미를 부여해 주는 유일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이며, “치료 서사의 확산은 의식 고양 운동이 야기한 분자 혁명을 억누르고 개인화한 한 방식” 6) 이라 덧붙이고 있다. 두 영화가 각각 보여주는 우정의 붕괴와 가족의 파괴는 한 개인과 한 가족의 실패라 치부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감독은 그럼에도 살아있고 그럼에도 살아가며 카메라를 들고 자신과 친구들, 가족들을 찍는다. 두 영화는 그 실패 속에 놓여 있는 개인(들)에 집중하고, 각 개인이 놓인 상황에 관한 분석보단 감정의 기록을 택함으로써, 그 이면에 있는 사회와 제도를 생각하게끔 한다. 실바는 “이들이 성인이 된 이야기는 여전히 전개 중이며 이들의 미래는 아직 다 쓰이지 않았다.” 7) 며 책을 마무리한다. <잠자리 구하기>와 <가단빌라>는 90년대에 태어났고 2010년대에 성인이 되었지만 2020년대까지 성인기를 지연시키고 있는 이들의 고통스러운 일기장이다. 이제 그 일기의 이면을 상상하고, 두 영화의 마지막이 내미는 손을 잡을 차례다. *** 1) 제니퍼 M. 실바 「커밍 업 쇼트」, 문현아, 박준규 옮김, 리시올, 2020, 32p. 2)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8~38p. 3) 제니퍼 M. 실바, 같은 책, 33~35p. 4) 이우빈, "JeonjuIFF #2호 [인터뷰] 20대 청년의 반성장 보고서, '잠자리 구하기' 홍다예 감독", 씨네21, 2022, 출처: www.cine21.com/news/view/?mag_id=100062 . 5)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50~51p. 6) 마크 피셔, "반-치료", 박진철 옮김. https://playtime.blog/2020/10/22/반-치료/ 7) 제니퍼 M. 실바, 위의 책, 284p.
봉준호 감독의 영화 < 마더 >(2009)에서 엄마 혜자에게는 남들보다 조금 부족해서 앞가림 못하는 아들 도준이 있다. 아들을 지켜보느라 손가락이 잘려도 아픈 줄 모를 만큼, 도준은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들이 살인죄로 잡혀가자, 누명을 썼다고 철썩같이 믿고 결백을 밝히려고 혼자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결백을 밝힐만한 걸 잘 기억해보라는 혜자에게 아들은 묻는다. “엄마, 그때 왜 나 죽이려고 했어?” 혜자는 잠깐 “얼마나 힘들었으면 같이 죽으려고 했겠어”라고 말하지만 금세 아들 걱정으로 생각이 넘어가고, 그 일이 응어리가 되었을 거라고 면회실 유리벽 너머에 있는 아들에게 응어리가 풀리는 혈자리에 침을 놓아 주고 싶어한다. 혜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들은 신경도 쓰지 않지만. 남들은 미친 사람 취급하고 욕해도 내 자식은 무죄라고 외치는 엄마, 문제가 된 아들을 어쩌지 못해 자신의 응어리에 침을 놓고 잊어내려고 춤추는 엄마. 종일 아들만 쳐다보는 혜자의 얼굴에서, 김혜자 배우가 연기한 엄마의 다른 자식이 했던 대사가 떠오른다. “하루 종일 뭐, 엄마 얼굴만 쳐다보고 있으란 말야?” 윤인호 감독의 영화 < 마요네즈 >(1999)에서 딸 아정이 엄마에게 했던 말이다. 엄마는 딸에게 전화해 불안하고 힘들다고 불평하고 관심 받고 싶어한다. 늦게 들어와서 내가 힘드니 딸에게 일 그만두라 말하며 응석 부리던 철없는 엄마의 모습을 기억하는 관객에게, 남의 아들에게까지 이입해서 “너 엄마 없니?”라고 말하며 안타까워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한국영화 속에서 딸의 엄마는, 아들의 엄마와 다른 존재 같다. 꼽을 수도 없을 만큼 수많은 영화에 아들의 엄마가 나오는데 엄마가 아들에게 공감을 호소하는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 열한번째 엄마 >( 김진성 , 2007)처럼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자식으로 보듬는 여자가 있을 뿐이다. < 우리형 >( 안권태 , 2004)과 같은 영화에서처럼 아들이 엄마를 이해하는 순간은 있어도, 깊은 이해와 고통을 나누는 사이가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딸의 엄마는 다르다. <마요네즈>처럼 엄마는 딸에게 자신을 이해하길 강요하는 영화가 있는가 하면, 엄마와 딸의 이야기를 그렸던 영화 < 애자 >( 정기훈 , 2009)처럼 보살핌을 받는 것은 아들이여도 엄마와 마지막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딸이라고 말하는 영화도 있다. 일단 엄마와 딸이 등장하면, 둘 사이를 특별한 관계로 묶는 것은 너무 당연한 듯이 보인다. 스릴러 영화 < 오로라공주 >( 방은진 , 2005)에서 순정이 죽은 딸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순정은 어린 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한다. “아빠 이제는 알아요. 인생은 외로운 거라고.” 어린 딸은 오로라공주를 좋아하고 그 노래를 부르고 싶지만, 엄마가 시키는 노래를 부른다. 가사는 아빠를 이해한다는 내용이지만, 엄마가 딸에게 원하는 것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순정의 표현대로 부르고 싶지 않은 노래를 부르는 이 행동은 벌이다. < 비밀은 없다 >( 이경미 , 2015)에서도 노래로 엄마와 딸의 감정을 엮는다. 딸 민진과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아빠가 바람 핀 상대에 대한 분노고, 엄마를 지키기 위해 복수할 계획을 담고 있는 가사다. 오로라공주의 딸이 중학생이라서 자발적인 공감을 형성하기 어려웠다면, <비밀의 없다>에서의 딸은 중학생인 만큼 스스로 엄마에게 공감한다. < 미성년 >( 김윤석 , 2018)에서도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 중학교 2학년인 주리와 윤아는 미성년자이지만 정신은 영화 안의 어른에 비교해 매우 성숙해있다. 그리고 그 성숙한 정신은 엄마에 대한 이해나, 엄마의 부족한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주리는 바람 핀 아빠 때문에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고민하고, 윤아는 바람 핀 상대의 아이를 꼭 낳겠다는 엄마를 세상의 비난 속에서 지키기 위해 고민한다. 주리의 엄마 영주는 아이들에게 너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윤아는 처음부터 엄마가 겪을 고통을 이해하고 걱정하고 있었고, 윤아의 엄마 미희는 엄마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엄마가 아니라 여자로 이해해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한다. 엄마와 딸이 이런 식으로 묘사되는 것에 관해서, 엄마와 딸의 신체적 유사성이나 같은 여성으로 사는 것에 동질감을 느낀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있으면 그 이상의 혐의를 찾을 수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미성년에서 미희가 윤아에게 “엄마는 아들이 생겨서 든든해”라고 말하는 부분 같은 지점이다. 윤아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엄마의 보호자 역할까지 하는 와중에, 엄마는 왜 아직 뱃속에 있는 아들에 대해 든든함을 느끼는 것일까. <마더>에서 혜자는 도준의 혐의를 밝히기 위해 변호사를 만나고, 형사를 만나지만 스스로의 힘으로 알아 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느냐고 조롱당하는 도준이지만, 반쯤은 남성무리 안에 들어가 있는데 혜자는 이들에게 “도준이와 형제같은” 사람들이라며 도움을 호소한다. 그리고 딱 그 절반만큼 형사는 혜자에게 친절하고, 진태는 돈을 받았지만 혜자를 위해 일을 해 준다. 그 덕분에 혜자는 남자 무리들만이 공유하고 있는 비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권력이든 무력이든, 힘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남자무리이고, 혜자가 이 안에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은 아들의 존재다. <비밀은 없다>에서 연홍은 남편을 비롯해, 형사와 같은 권력을 가진 남성집단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단이 없다. 결국 그가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도움을 받는 존재는 권력과 무력을 가지지 못한 딸의 친구이다. 힘이 있는 집단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딸보다 아들의 존재가 필요해 보이는데, 이런 증거는 < 박쥐 >( 박찬욱 , 2009)에서도 찾을 수 있다. 매주 수요일, 라여사의 집에서는 마작판이 열린다. 공간은 라여사의 것이지만, 마작판의 구성원은 아들 강우의 지인들이다. 그들은 각자 의사, 형사와 같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상 밖에서는 의사의 아내인 이블린과 강우의 아내 태주 쭈그리고 앉아 김밥을 마는 노동을 하고 있다. 이들 사이에는 명백히 눈에 보이는 계급이 존재한다. 박찬욱 감독의 전작 < 공동경비구역 JSA >(2000)에서 남북한 군인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게임을 하고 음식을 먹는 행위를 통해 계급과 소속에 상관없이 수평적인 관계에서 교류하는 장면을 보여준 바 있다. 이런 예시까지 들지 않아도, 남자는 밥상에서 밥을 먹고 여자들은 부엌 바닥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강우가 죽으면서 이 권력관계는 모호해지고, 부인들은 모두 테이블 위로 올라온다. 혜자처럼 죽은 아들을 통해 입성한 권력 있는 남성들에게 도움을 처하면서도, 아들자식이 없는 여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전복하고 테이블 위로 올라오는 것을 제지할 능력은 없다. 이런 의심 속에서, 영화 < 박화영 >( 이환 , 2017)에서 화영은 이런 영화들이 말하는 엄마와 딸의 관계를 거스르고 싶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화영은 마치 아들의 엄마를 요구하고 있는 것 같다. 화영은 엄마를 자처하며 엄마는 맹목적으로 자신의 편이 되어주고, 자식이 때리면 때리기 좋은 곳을 내미는 희생정신이 있는 사람이다. 화영이 의도했든 아니든 그룹 안에서 화영은 여자로 여겨지지 않는데, 화영 또한 당연히 엄마를 이해하는 다른 많은 딸들처럼 엄마를 이해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새로운 가정을 꾸린 엄마를 찾아가 욕설하고, 인터폰 너머에 있는 엄마에게 침을 뱉는다. 영화 후반부, 자신이 지켜준 가짜 딸이 자신을 희생물로 삼고 도망간 뒤에 또 새로운 딸을 데리고 와, 그들이 제대로 듣지도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얘기를 끊임없이 떠든다. 그 속에서 “너네는 나 없으면 어떻게 살래?”라는 대사는 오히려 반대로 나는 들어줄 딸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처럼 들린다. 맹목적으로 희생하는 엄마가 필요하지만, 한편으로 엄마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토로할 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박화영은 아름답지 않지만, 딸과 엄마의 관계에 대해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특별한 관계가 아닐 수도 있다고. 아들이 권력자에게 가까이 붙어있을 수 있는 도구로 존재할 수 있다는 짐작이, 엄마의 희생적인 애정이 정말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인가를 의심스럽게 느끼게 한다. 엄마와 딸은 정말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고, 그 관계를 아름답고 특별한 것이라고 말하는 영화들의 흐름이 과연 합당한 것인가를 되묻게 한다. 그리고 이 영화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는 한국의 딸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진다. 정말 이 영화들에서처럼 엄마를 이해하고 싶은지, 정말 딸이라서 엄마를 이해할 수 있는지, 무엇보다 엄마의 사랑이 아들과 딸에게 동등하다고 느끼는지. 혹은 박화영처럼 딸은 가질 수 없는 아들의 엄마를 갈망하고 있는지를.
주현숙 감독의 신작 < 빨간 벽돌 >을 보다 불쑥 떠오른 우화가 하나 있다. 세상 밖으로 나온 아기 돼지들이 각기 다른 재료로 집을 짓는다. 짚과 나무로 집을 지은 첫째 둘째의 시행착오를 거쳐, 셋째 돼지는 벽돌로 튼튼하게 집을 지어 늑대의 공격에 맞선다. <아기돼지 삼형제> 우화이다. 이 우화의 결말은 디즈니 버전은 좀 다르긴 하지만 두 돼지를 잡아먹고 셋째 돼지까지 잡아먹으려는 늑대를 막내 돼지는 끓는 물에 빠뜨려 잡아먹는다. 권선징악이자 먹고 먹히는 이야기다. 사실 <아기돼지 삼형제> 우화와 <빨간 벽돌>은 별다른 연관이 없다. 아마도 영화의 제목에서 셋째 돼지의 지혜와 생존전략의 도구인 벽돌이 연상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실제 감독은 빨간 벽돌의 제목이 구로동맹파업 당시 구로공단을 둘러싼 벽이 붉은 벽돌임에 착안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아기돼지 삼형제>에서 시작하는 것은 연상 작용으로 비롯된 ‘의도적 오독’으로, 민중의 지혜와 생존전략을 담은 두 이야기를 벽돌로 이어내면서 둘의 비교를 통해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새롭고도 반가운 징후를 짚어보고자 함이다. 우화적으로 그리고 우회적으로. < 빨간 벽돌 >은 크게 두 축으로 아니 세 축으로 풀어볼 수 있다. 1985년 구로동맹파업에 참여했던, 지금은 중년이 된 여인들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다른 한 축은 2017년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당시 구로동맹파업 언니들의 나이인 청년들의 인터뷰이다. 그리고 그 두 그룹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요청하는 감독이 존재한다. 큰 얼개로만 얼핏 보면, 구로동맹파업 사건을 중심으로 세대별 시선과 태도를 다루는 것 같지만, 영화는 예상과 달리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즉 부지런히 집을 지었고, 짓고 있는 아기 돼지들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기돼지 삼형제>와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먼저, < 빨간 벽돌 >은 사건에 집중하지 않는다. 영화는 사건보다 인물에 주목한다. <아기돼지 삼형제>를 비롯한 많은 이야기들이 그렇듯, 사건을 중심으로 대상을 담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 역시 은폐된 혹은 왜곡된 과거사를 다룰 경우,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인물은 당시 사건을 체화한 증거이자 증언자로 소환된다. 최근에는 사건의 공간 자체에 주목하면서 공간에 내재되고 축적된 기억과 감응을 전면화한 영화도 등장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인물은 부재하거나 전면화되지 않는다. 행동과 사건 중심 혹은 공간 중심의 이야기 구성에서 <빨간 벽돌>은 오늘을 살아가는 진행형의 인물에 주목한다.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 여분 동안 인물들의 일상을 나눈다. 몸이 마음 같지 않은 갱년기 증상에 대해, 솔 내음과 바람의 촉감을 느끼는 등산의 즐거움에 대해, 시어머니 병간호로 분주하고 힘들었던 마음에 대해, 나이 들수록 내면과 대화를 해야 할 때가 된 거 같다는 말을 통해 인물들의 오늘을 공유하고 동시에 낯가림을 풀어간다. 인물과 관계 맺기의 여정을 영화로 전반부 긴 시간 녹여낸 것이다. 참으로 낯가림 심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처럼 영화는 다큐멘터리 영화의 주요 화두인 대상과 관계 맺음을 영화의 구조 속에 과감하게 기입한 것이다. 누군가를 알아가고 속내를 나누기까지 필요한 시간들을 영화 속에 기입한 것이다. 관계 맺음의 과정은 청년들과의 만남에도 같이 적용된다. 주어진 장소를 찾아오는 청년들의 모습에서 시작해 “어색하면 어색한 대로”를 말하는 감독의 모습이 삽입되면서 영화는 청년의 축이 시작된다. 다만, 중년의 언니들은 흘러가는 이미지(버스, 지하철, 자동차)를 따라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방식인 반면, 청년들은 세팅된 장소에서 감독이 무엇인가 요청하고 물음을 던지는 방식이다. 여기에 바로, 두 세대를 아우르는 감독의 위치와 태도가 담겨져 있다. 윗세대는 찾아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다음 세대는 자리를 마련해 말 걸기를 시도하는 그 가교 역할이자 그 자리에 놓인 감독. 그러나 아무래도 감독은 윗세대가 조금 더 편한 모양이다. 중년 여성들의 말은 경청하고 맞장구를 치며 함께한다면, 청년들의 말은 요청되고 세팅되고 종종 유리벽 밖에서 그들을 담는다. 생략되어짐과 동시에 논의의 과정을 비춰내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청년들에게 정리해고 대상을 가려내라는 가상의 ‘나쁜 질문’을 던질 때, 감독은 386 세대의 이중성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쁜 질문을 받고 싸웠지만 결국 그 질문을 더 공고히 전달하고 심지어 다그치게 된 그 위치. 그래서 이 마지막 장면은 가장 불편하고 가장 긴장감이 넘치는 묘한 장면이다. 영화는 이처럼 두 그룹을 담아내는 동시에 두 그룹의 사이에 위치한 감독의 위치 혹은 역할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그래서일까? 영화 속 간간히 파편적으로 틈입하는 이미지들은 단순히 삽입 이미지라고만 보기 힘들 정도로 힘이 있다. 신발, 빨래, 운전사의 명찰 목걸이, 창틀 거미줄, 재봉틀... 감독의 시선이 일상 속 사물에 가 닿은 방식으로 읽힌다. 영화는 감독을 포함해 인물들의 오늘이 보이는 작품이다. 영화는 시작하고 삼십여 분 지나서야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조금씩 풀어낸다. 영화는 조용히 우리들의 크고 작은 선택을 소환한다. 화장실이 급한데 지하철에서 내릴까 말까? 자고 간 남친의 팬티를 빨아야 되나 말아야 되나? 다시 온 남친을 가라고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영화는 간간히 웃음을 유도하면서 살면서 마주하는 선택에 대해 말 걸기를 시도한다. 사실 숱한 선택을 해오면서 살아온 인생 아니던가. 어떤 선택은 여러 선택지 중에 나의 자의로 선택한 것도 있고, 어떤 선택은 선택의 여지가 없어 강요된 방식의 선택도 있다. 그리고 고스톱을 치고 돌아온 새벽녘 강명자 씨의 말처럼 “나 자신에게 쪽팔리지 않으려는” 선택도 있다. 영화는 선택의 수많은 결과 그 선택의 저변에 놓인 마음들을 섬세하게 짚어가면서 나에게 부끄럽지 않은 선택에 대해 다가간다. 구로동맹파업의 참가자들 더 나아가 수많은 민중항쟁과 오늘의 촛불 시위까지 “선택”으로 풀어낸다. 사건에 결박당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선택한 사건과 경험에 대하여. 그래서 영화는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공장 도자기 부딪히는 소리가 좋았던”, “구로공단에 언발란스 머리를 퍼뜨린 패션 감각”에 대하여, “넝쿨장미가 어우러진 공장 벽이 너무 예뻤던”, “기를 쓰고 벗어나려던 공장을 대학생이 공장에 들어왔다는 말에 받았던 충격”을, “50장을 하고 5장을 숨기던” 기억을 오롯이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 빨간 벽돌 >은 늑대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등장하지 않을 뿐 아니라 늑대의 악행이 말되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늑대가 악행을 저지르지 않았다거나 늑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아기돼지에게 늑대의 악행에 대해 말을 하도록 묻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아기돼지의 일상과 기억을 공유하고 듣는다. 사실 늑대의 악행은 잘못된 사건과 문제를 고발하고 폭로할 때는 적절하고 유효하지만, 아기돼지의 입으로 악행을 말하게 되면 아기돼지는 사건에 결박당한 힘없는 피해자로 강제되어 버린다. “피해자의 피해자화”를 구축하게 된다고 할까. 영화는 아기돼지에게 늑대의 만행을 고발해 늑대의 피해자로 가두는 대신 아기돼지가 어떻게 벽돌을 선택했는지, 벽돌을 쌓아나갔는지, 지금도 열심히 쌓고 있는지에 주목한다. 피해자 서사의 프레임을 벗어버린 것이다. 우화 <아기돼지 삼형제> 역시 아기돼지를 피해자로만 가두지 않고 아기돼지의 지혜와 활약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긴 하다. 그러나 우화는 결국 먹히거나 먹는 것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끝이 난다. 얼핏 보면 해피엔딩이지만 먹느냐 먹히는 구도 외에는 다른 여지가 없는 시스템이다. 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어야 하는 “가해자화 서사”는 우리 시대의 “나쁜 프레임” 중 하나이다. 피해자/가해자 서사 혹은 가해자화 서사는 결국 쳇바퀴처럼 돌고 도는 진흙탕 싸움을 유도하는 프레임이다. <빨간 벽돌>은 우리를 설명하기 위해 선택이라는 새로운 프레임을 걸고, 다른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버틀러식 용어를 빌면, “박탈당한 주체”로서 우리를 마주하게 하는 것이다. “박탈당했기 때문에 박탈당할 수 있는 것” 여기서 박탈은 자족성을 한계짓는 용어이자 우리를 관계적이고도 상호의존적인 존재로 확정 짓는 양가적 가치를 가진다. 영화는 사건을 겪은 혹은 겪어낸 인물들을 사건에 결박하기보다는 사건의 경험을 통해 자신을 속박하기도 하고 동시에 구성하기도 한 자율적 존재로 풀어낸다. 사람이 보이는 영화 <빨간 벽돌>은 우리 모두 유죄라는 집단적 대속 행위나 피해자에게 애도나 위로를 건네는 방식이 아니라 현재를 중심으로 과거사를 소환하고 기억하게 하되, 이를 통해 일상이 품은 정치적 수행의 가능성을 조용히 풀어낸 힘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