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부녀
- 감독
- 정창화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김진규, 문정숙, 김승호, 최남현, 황정순, 윤인자, 이빈화, 주연, 남석훈, 전옥, 주선태, 서월영, 최삼, 최성호, 이업동, 추봉, 지방열, 조천금, 류수미, 나애심, 박병기, 조덕성, 이예성, 석운아, 정애란, 박미영, 이지연, 남미리
에로 팬들에게 1990년대 초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1988년 유진선 감독의 < 매춘 >을 정점으로 한국의 에로티시즘 영화는 확실히 하향곡선을 그렸고, 이후 < 애마부인 > < 산딸기 > < 변강쇠 > < 빨간 앵두 > < 뽕 > 등 굵직한 프랜차이즈들이 속편을 쏟아냈지만 태작이 대부분이었다. < 사방지 >(송경식. 1988)나 < 애란 >(이황림. 1989) 등 주목할 작품도 있었지만 대세를 막을 순 없었다. 다행히 하향세의 반대편에 에로 비디오가 급성장하고 있었지만 아직 < 젖소부인 바람났네 >(김인수. 1995) 같은 압도적 작품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 틈새에 등장한 이상한 에로 사극 한 편이 있었다. 1993년 여름에 개봉된 양병간 감독의 <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이하 <무쓰물>)다. 여기서 ‘양병간’이라는 이름이 왠지 익숙하다고 느끼셨다면… 맞다. 8년 전 < 무서운 집 >(2015)이라는 저예산 호러를 내놓은 바로 그 감독이다. <무서운 집>의 거친 페티시즘과 느닷없이 몰아치는 분위기의 정서적 근원이 궁금했던 관객이라면 <무쓰물>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현장의 양병간 감독과 배우 김문희. 양 감독은 1950년생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영화계에 들어와 연출부 생활을 했고 1985년에 < 피조개 뭍에 오르다 >로 데뷔했지만 검열로 인해 만족스러운 작품이 되진 못했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는 8년 만에 나온 두 번째 작품으로 파격적인 에로 사극이고, 다음 해 미스터리 멜로인 < 태양 속의 남자 >(1994)를 연출했다. 이후 20년 가까운 공백을 딛고 내놓은 저예산 호러 <무서운 집>(2015)은 컬트로 평가 받고 있다. 감독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지만, <무쓰물>은 조선 시대 설화집 『고금소총』에 수록된 ‘귀봉변괴’(鬼棒變怪)가 원작이다. ‘귀신 들린 방망이의 이상야릇한 일’이라는 뜻으로, 도깨비가 던져 준 양물(陽物), 요즘으로 치면 ‘딜도’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何用物耶)라는 주문을 접하면 건장한 남자로 변해 눈 앞에 있는 여성과 성교를 한다는 판타지 스토리다. 감독은 이 매력적인 소재를 각색하는 과정에서 두 편의 에로 정전을 끌어왔다. 바로 <변강쇠>(엄종선. 1986)와 <뽕>(이두용. 1986)이다. <무쓰물>은 전자의 ‘과장된 성적 표현’과 후자의 ‘마을을 휩쓰는 섹스 스캔들’이라는, 한국 사극 에로의 가장 중요한 장르 관습을 결합한다. 클리셰를 이용한 안전 장치인 셈인데, 흥미로운 건 이 영화가 클리셰를 따르는 방식이 아니라 그것을 지키는 척하면서 위반하고 뒤집는 태도다. 김문희와 이미지의 캐스팅은 이 영화의 중요한 성공 요인이다. 1960년대 동갑이던 두 배우는 이 영화에서 노련하면서도 섹슈얼한 연기를 해낸다. 이미지는 아쉽게도 2017년 57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주인공은 한 과부(김문희)와 오 과부(이미지)다. 독수공방을 벗어날 수 있게 정인을 점지해 달라고 매일처럼 폭포수 밑에서 정화수 떠놓고 빌던 한 과부는 어느 날 우연히 집 마당에서 양물을 줍는다. 무심코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혼잣말을 하자, 갑자기 상의를 탈의하고 한쪽 다리는 걷은 건장한 사내(이상일)가 나타나 한 과부에게 달려들고, 마을에 지진이 날 정도로 거대한 스케일의 방사가 치러진다. 나무 막대기에서 11단 변신을 통해 정인으로 변하는 남자 덕에 한 과부의 얼굴엔 화색이 돌고, 이를 수상하게 생각한 오 과부는 그 비밀을 알게 되고, 양물을 훔친 오 과부도 놀라운 경험을 한다. 이후 양물은 마을을 돌아다니게 되고, 결국 여인들과 함께 그 요술 방망이는 관아에 끌려가게 된다. 사또(홍성민)는 양물을 뜨거운 물에 끓이기도 하고 불 속에 넣기도 하지만, 끄떡없다. 결국 단두대를 통해 절단하려는 찰나, 변신이 이뤄지며 등장한 사내는 한 과부를 번쩍 들어 안고 늠름하게 걸어간다. 한 과부가 치성 드리는 장면. 사극에 흔히 등장하는 클리셰지만, 바위와 폭포수가 만들어내는 교묘한 미장센은 분출하는 성욕에 대한 메타포처럼 느껴진다. <무쓰물>은 한국의 극장용 에로 사극 끝물에 등장한 전복적 텍스트다. ‘판타지 에로 사극’이라 부를 수 있는 이 영화는 그 환상성을 토대로, 에로 사극에서 여성에 대한 양대 억압 기제였던 ‘은장도’와 ‘열녀문’ 이데올로기를 뒤집는다.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은장도로 자결하겠다며 욕망을 억압하고, 가부장제에 순응한 대가인 열녀문을 하사 받기 위해 역시 욕망을 억압해야 했던 조선 시대 사극. 이 장르가 항상 그 욕망의 경계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통해 긴장감을 만들어냈다면 <무쓰물>은 그 제약을 가볍게 뛰어넘는다. “억압 같은 게 있었어?”라고 반문하듯, 이 영화에 등장하는 마을의 아낙네들은 열녀문을 하사 받은 양반댁 마님이든, 여염집의 과부댁이든, 어엿한 남편을 둔 유부녀든, 갑자기 마을에 찾아 든 양물(과 그것이 변한 사내)에 광적인 집착을 보이며 집단적 욕정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영화 초반부 어느 양반집 마님이 외간남자를 취한 후 관계가 끝나자 하인들을 시켜 먼 곳에 내다 버리는 설정이 등장한다. 조선 시대 하류층의 수절 과부가 노총각이나 홀아비를 납치하는 일(이른바 ‘보쌈’)이 있었다곤 하지만, <무쓰물>은 상류층 여성의 원 나잇 스탠드를 과감하게 영화 첫 장면에 배치하며, 이 영화는 유교적 세계관에서 상당 부분 이탈해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양물이 변신한 사나이도 흥미롭다. 일반적인 에로 사극의 돌쇠가 산발 스타일의 순수남이라면, <무쓰물>의 사나이는 상투를 틀었고 항상 상의를 탈의한 상태로서 한쪽 바지는 허벅지까지 걷었다. 헝크(hunk, 덩치가 크고 섹시한 남자) 스타일에 결혼한 남자의 징표인 상투가 있는, 변형된 남창(gigolo) 이미지다. 원 나잇 스탠드와 지골로. <무쓰물>은 이러한 요소를 통해 1980년대 에로 사극과 결별한다. 양물은 11단 변신을 거치며 사나이로 변한다. 돌쇠가 아닌, 헝크이자 지골로 이미지를 지녔다. 이 영화에서 또 한 번 놀라게 되는 건 비역질에 대한 묘사다. 양물은 성적 대상의 성별을 가리지 않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라는 주문에 반응하고, 사나이는 눈 앞에 보이는 존재를 무조건 범하는 터미네이터 같은 존재인데 스님이나 사또도 피해가지 못한다. 특히 관아에서 사또와 이방이 비역질을 당하는 대목은 “찢어졌구만!”이라는 고통 섞인 대사와 함께 한국 사극에선 접하기 힘든 설정이다. 종교와 정치에 대한 반역적 메타포라고 확대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성적 표현의 수위 만으로도 <무쓰물>은 선을 넘는다. 여기서 <무쓰물>은 애너크로니즘(anachronism)을 통해 확실하게 탈주한다. 번역하면 ‘시대 착오’ 정도가 될 애너크로니즘은 조선 시대 배경 영화에 고려 시대 의상이 등장하는 정도의 고증 오류 수준이 아닌, 좀 더 파격적인 방식으로 <무쓰물>에 확실한 인장을 남긴다. 마을 전체가 양물의 광풍에 휩싸이자, 음란함을 다스리는 음무제(淫撫祭)가 치러진다. 이 장면에서 일반적 사극이라면 무당의 굿판이 벌어지겠지만, <무쓰물>은 놀랍게도 동네 여인네들이 모여 캉캉 춤 추는 장면을 보여준다. 음무제의 캉캉 춤과 해피 엔딩. 이 영화는 사극 장르를 경쾌하게 해체한다. 감히 말하건대 한국영화에서 이런 파격은 없었고, 이외에도 강인구의 전자 음악(그는 <무서운 집>에서도 음악을 맡았음)이나 길로틴의 등장 등은 <무쓰물>의 장르 해체적 성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사나이가 한 과부를 안고 어디론가 가는 대목은 한국 사극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해피 엔딩이자 감동의 피날레다. 부디 두 사람, 행복하시길.
[사진]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 출연한 김동원, 오른쪽은 배우 신성일 구경꾼들 폭소 자아낸 <밤의 태양>의 야외 촬영 1948년 밀수 근절을 위한 수도청 후원의 정책 홍보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에 출연한 김동원(金東園)은 신극배우로서 은막에 진출한 첫 사례가 된다. 그동안 극단 황금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영화에 출연한 황철, 심영 등 해방 전 신파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신극을 지향한 극예술협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역은 최은희, 조연으로 전택이, 한은진 등이 합류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 장르는 달라도 연기의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무대 연기와는 달리 감독의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토막 촬영이어서 감정을 잡지가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쓰러진 애인(최은희)을 안아 일으키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긴장한 나머지 여자를 안고일어서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첫 출연은 이렇게 ‘실망스럽게’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나의 예술과 삶』, 태학사, 2003, 144~145쪽) 끝났다. <밤의 태양>에 출연한 후 다시는 외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동원이 문화영화 <코리아>(신상옥, 1954)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만이었다. 명승지와 그곳에 담긴 일화를 소개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남원을 무대로 전개되는 <춘향전>의 이몽룡 역할을 맡아. 춘향 역인 최은희와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다. 그사이 그는 악몽 같은 ‘6,25 동란’을 겪었다. 극단 신협이 앙코르 공연으로 마련한 번역극 <뇌우(雷雨)>(부민관)가 끝난 지 이틀 만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종로구 필운동 처가에서 숨어 있다가 붙들려 한밤중에 연극인 일행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한 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평양을 지나 대동강 중류 연안의 순천지역에 이르렀을 때 유엔군과 함께 진격해온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김동원, 앞의 책, 173~180) <자유부인> 이후 형성된 신사풍의 캐릭터 김동원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부터였다. 1954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정비석의 서울신문 연재소설(215회) 『자유부인』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 양품점 주인 안태석 역이 주어졌다. 검열 당시 그가 유부녀 오선영을 끌어안은 포옹 장면과 그녀가 이웃청년 신춘호(이민)와 가진 키스 장면이 한국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상영이 보류될 위기 (“키스 장면이 말썽, <자유부인>도 상영 불허”, 『동아일보』, 1956.6.9) 를 맞기도 했으나 수도극장에 개봉되면서 15일간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안태석 역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화평론가 이봉래는 ‘완전한 미스캐스트’라고 전제하고 “그 신파조의 대사와 움직임이 없는 생경한 연기는 이분이 어떻게 연기를 한 분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근래의 쾌작, 영화 ‘자유부인’”, 『한국일보』, 1956.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원은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후광 덕인지 그는 잇따라 같은 해에 김소동, 김한일 형제 감독에 의해 각기 만들어진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여성의 적>(1956)에 출연하게 된다. [사진]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주인공 오선영을 맡은 배우 김정림 이후 그는 홍성기 감독의 <실낙원의 별>(1957)을 비롯한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 <한말 풍운과 민충정공>(남홍일, 윤봉춘, 1959)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연산군>(신상옥, 1961), <유정>(김수용, 1966), <엘레지의 여왕>(한형모, 1967),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엄마 결혼식>(조문진, 1973) 등 160여 편에 캐스팅 된다. 이 가운데 주연급이 ‘영화연기로서의 이행을 확실히 실증 ’(유한철, “57년 영화계 총평”, 『조선일보』, 1957.12.26) 한 <실낙원의 별>(소설가 역) 등 60편에 이른다. 1950년대 중후반 김동원은 그동안 연극배우로서 누려온 정상의 위상에 버금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 사실은 당시 월간 대중지 《희망》이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현역 남녀배우 인기투표’ 결과 (“제2회 배우 인기투표, 제1위에 남 김동원, 여 조미령”, 『조선일보』, 1957.8.3) 가 말해 준다. 그는 2위의 전택이, 3위의 최무룡을 제치고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선택받았다. 그동안 그는 왕(<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연산군>)이거나, 회사 사장(<장미는 슬프다>), 독립운동가(<별아 내 가슴에>), 충신(<한말풍운과 민충정공>,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대학교수(<낭만열차>(박상호, 1959), <일월>(이성구, 1967)) 소설가(<실낙원의 별>, <장군의 수염>), 초등학교 교장(<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 등 악역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신사풍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진]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배우 김지미(사진제공: 김종원) 일본 유학 시절의 단역 출연 김동원은 1916년 11월 14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김경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혁(東爀)이 본명이었으나 해방이 되는 해 11월 <검찰관> 공연 때부터 획이 많고 딱딱한 본명 대신 대중들이 알기 쉽게 평소 좋아한 작가 이광수의 아호 ‘춘원’에서 원(園)자를 따서 새로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 4학년이 되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자 배제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후 처음 유진 오닐의 〈고래〉로 연극무대에 섰다. 부풀어 오른 그의 ‘대배우로의 야망’은 결국 일본대학 예술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들끼리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연극 서클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일생에 연극의 동반자가 된 이해랑을 만나게 된다. [사진]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왼쪽이 여배우 주증녀, 오른쪽이 노경희(사진제공: 김종원) 이 무렵 그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연기자 모집에 응모하여 8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단역’ 몇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동원, 앞의 책, 70쪽)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결국 1939년 5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에 오른다. 이후 그는 신협 등에서 활약하며 국내 최초의 <햄릿>(1951)에 출연,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확한 발성과 화술로 중후한 연기를 보여줬던 김동원은 2006년 5월 13일 아흔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사진]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촬영 현장에서 최은희와 신상옥 속눈썹이 긴 열여덟 살의 가출 최은희는 1926년 11월 20일 1 경기도 광주읍 초월면 묵고리에서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영환은 구한말의 군인이었으나, 그가 태어난 지 20일 만에 서울로 이사한 후 우체국 직원이 되었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수줍음을 탄 그녀의 본명은 경순(慶順)이다. 속눈썹이 길고 눈이 큰 편인 그녀는 말이 없는 대신 고집이 세었다. 그녀의 집안은 자식의 공부를 위해 도시로 보낼 만큼 여유가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의 임지가 서울로 바뀌어 수구문 쪽으로 이사하는 바람에 다행히 광희공립심상소학교(광희초등학교 전신)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녀는 소학교 때부터 유별난 데가 있었다. 극장 주변을 자주 기웃거렸고 공연 포스터를 보면 친구들에게 장차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런 그녀가 종로 6가에 있던 경성기예고등학교(京城技藝高)를 다니다가 그만 두고 방공 연습을 나갔다가 우연히 알게 된 연극배우 문정복(배우 문정숙의 언니, 월북)의 소개로 마침 <칭기즈칸>을 준비 중인 극단 ‘아랑(阿狼)’(대표 황철)의 의상을 거드는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승낙 없는 결행이었다. 1943년 열 여덟 살 때였다. 선배들의 심부름이나 하며 시름을 달래던 그녀에게 기회가 온 것은 대전 공연 때였다. 문정복이 한번 해보라며 무대로 올려 세운 것이다. 비록 하녀라는 단역에 지나지 않았으나 극의 반전을 돕는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날 공연한 작품이 ‘아랑’의 단골 레퍼토리인 신파극 <청춘극장>(임선규 작)이었다. 그 시대에는 연구생으로 들어가면 일단 선배의 화장가방부터 챙기는 일을 해야 했다 (최은희, 『고백』 ‘패기의 수업시대’ 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 38쪽). [사진] 극단 아랑 시절 최은희 그녀는 지방 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해방 소식을 들었다. 일제의 패망으로 문화계가 정비에 들어간 가운데 토월회가 부활하자 그녀는 신극을 표방하는 이 극단에 참여했다. 이때 무성영화 시절의 복혜숙, 서월영과 일제강점기의 김소영, 김일해, 최운봉과 같은 배우들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다. 그런데 이 분들을 보자 영화에 대한 열망이 타올랐다. 어릴 때 우연히 친구 손에 끌려가서 본 문예봉 주연의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이규환)의 몇 장면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연극은 무대를 떠나는 순간 존재 가치가 없어지지만 스크린은 그 폭과 생명력에 있어 무한하지 않는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영화계 진출이 당면 과제로 다가왔다. 이 무렵 토월회 연극에 함께 출연 했던 최운봉이 제 상대역이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것 같다며 영화를 할 생각이 있느냐고 물었다. 최은희는 이렇게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1947년)와 인연이 닿게 되었다. 험준한 길, 분단의 희생양 그녀가 이성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영화배우로 변신한 촬영기사 김학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그들은 사귄 지 얼마 안 된 1947년 가을 서울 정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은 스물 한 살인 신부보다 열세 살이나 많은 서른세 살로 재혼이었다. 김학성은 무성 영화시대의 여배우 김연실(金蓮實, 납북)의 동생으로 일본의 메이지(明治)대학을 다니다가 복싱선수를 거쳐 영화 <성황당>(1939)의 카메라를 잡은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6년 만에 파경을 맞고 말았다. 전쟁 때문이었다. 6·25 동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 남산동에 살고 있던 이들은 미처 피난을 하지 못했다. 김학성은 마루 밑에 굴을 파고 숨었으나 최은희는 북한군에게 끌려가 위문공연을 강요당했다. 죽을 고비를 겪은 끝에 탈출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이번에는 ‘부역’한 일로 국군에게 붙들려 조사받는 곤욕을 치렀다. 그녀는 종군 뉴스영화 촬영 중에 입은 중상으로 병상에 누운 남편을 간호하는 한편 광복동 ‘녹원(綠苑)다방’ 얼굴 마담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부산 피난 시절이었다. 여기서 알게 된 것이 신상옥이었다. 그들이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은 극단 ‘신협’ 소속인 최은희가 무대에서 영양실조로 쓰러졌을 때 뛰어들어 병원으로 옮겨 준 데서 비롯되었다. 그 사건 이후 그들은 급속히 가까워졌다. 유부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무명 영화인에게 그녀는 따뜻한 눈길로 화답했다. [사진] 1960년 경 최은희와 신상옥 부부 그사이 신상옥은 <악야>(1952)로 데뷔했다. 그리고 16밀리 문화영화 <코리아>(1954)에 그녀를 출연시켰다. 그녀는 주로 신필름의 영화에 무상으로 출연했지만 회사의 운영을 돕기 위해 다른 제작사의 영화에도 나갔다. 그의 출연작 1백 20여 편 가운데 30여 편을 제외하고는 자회사 작품이었다. 이 가운데 <민며느리>(1965),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 등 세 편이 그녀가 연출한 작품이다. 그러나 1975년 오수미를 주연으로 기용한 <장미와 들개>의 예고편 ‘검열 위반’ 사건으로 신필름이 문을 닫게 되면서 신 감독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한다. [사진] <코리아>(1954)에서의 최은희와 김동원 결국 1976년 여름 신상옥과 23년의 부부생활을 청산하고, 경영이 부진한 안양영화예술학교의 정상화를 위해 백방으로 뛰어 다니던 78년 1월22일 홍콩에서 북한 공작원에 의해 납북되고 만다. 이런 사태 아래서 1983년 3월7일 김정일이 초대한 연회장에 갔다가 신상옥과 극적으로 재회, 그동안 소원했던 감정을 풀게 된다. 이후 <탈출기>(1981년), <소금>(1985년> 등 10여 편을 같이 만든 뒤 198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는 모험을 단행하고 1999년 10년이 넘는 미국 망명생활 끝에 영구 귀국길에 오른다. [사진] 최은희 신상옥 부부 납북 기사 [사진] 북한에서 연출한 영화 <소금>의 한 장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그녀의 기구한 삶은 자신이 연기한 그 어떤 영화보다도 드라마틱한 것이었다. 분단 한국의 최대 희생자이자 황금기 한국영화의 최대 수혜자이기도 했던 최은희는 아흔 한 살에 이른 2018년 4월 16일 <어머니와 아들>(이유섭, 1976)의 출연을 끝으로 짧지 않은 투병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1. 생년관련, 그동안 그녀의 생년월일에 대해 『한국연극무용영화사전』(예술원, 1985)과 『여성영화인 사전』(소도 발행, 2001)은 1928년 11월 20일 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최은희는 자전적 저술인 『고백』(랜덤하우스 코리아, 2007)에서 1930년 생으로 기재, 혼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는 1913년생인 김학성에 대해 “나보다 열두 살이나 많은 사람” (51쪽)이라고 했으니 1926년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