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주얼 서스펙트
- 감독
- 브라이언 싱어
- 제작년도
- 1995
- 출연
- 케빈 스페이시, 채즈 팔민테리, 스티븐 볼드윈, 가브리엘 번, 피트 포슬스웨이트, 베니치오 델 토로, 지안카를로 에스포지토, 피터 그린, 케빈 폴락
봉준호 감독의 편지를 받았을 때 확실히 기분이 묘했다. < 기생충 >(2019) 기자 시사에 참석한 사람들은 모두 받았을 그 편지 얘기다. “부탁드립니다”로 시작하는 공식적인 편지는 단어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간곡했다. 기자 시사에서 리뷰 공개 일자 등을 명시한 엠바고 서명을 받는 경우가 많다. 상영 전후 “기사 작성 시 영화의 결말에 관한 스포일러 자제를 부탁드린다”라는 안내 멘트를 듣는 일도 빈번해졌다. 하지만 감독이 직접 쓴 편지를 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스토리의 크고 작은 고비마다 관객들이 때론 숨죽이고, 때론 놀라며 매 순간의 생생한 감정들과 함께 영화 속으로 빠져들기를, 만든 이들은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감독이기 전에 열렬한 관객인 봉준호 감독의 편지는 ‘당신의 사인을 받았으니 법적 책임을 물을 수도 있습니다’라는 공식 문서보다 힘이 셌던 것 같다. <기생충>이 개봉하고도 한동안 ‘스포 공포’ 없이 관련 기사를 읽을 수 있었다. 영화를 본 분들은 아시다시피 <기생충>은 눈밭을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러닝 타임이 진행되면서 이야깃거리가 쑥쑥 불어나는 영화다. 진즉 ‘해설’ 혹은 ‘분석’이라는 제목을 달고 엔딩까지 탈탈 털어낸 기사가 나올 법했지만 매체들의 ‘자발적 엠바고’ 기간은 꽤 길었다. 거의 모든 정보가 ‘즉시’ 거의 모든 곳으로 퍼져나가는 네트워크 시대에 봉준호 감독의 편지 한 장이 정중하게 미디어에 질문하는 것 같았다. 그토록 ‘빠른’ 정보는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어벤져스: 엔드게임> <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 이하 <엔드게임>)이 쏟아낸 다채로운 ‘역대 최초’ 기록을 살펴보면서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역대 최단기 관객 1백만 명 돌파. <엔드게임>은 개봉 당일 첫 상영 4시간 30분 만에 관객 수 1백만 명을 넘었다. 너무 빨라서 ‘오보’ 의심을 받았을 정도다. 이전 기록 보유작은 <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 >(2018)으로 개봉 당일 오후 5시 반 경에 관객 수 1백만 명을 돌파했다. 화제성을 따지면 <엔드게임>의 압승이 당연해 보이지만,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이 6월 6일 현충일 개봉한 걸 감안하면 평일 개봉한 <엔드게임>의 기록이 더욱 놀랍다. 화제작 한편이 전국 상영관에 도배하다시피 내걸리는 ‘와이드 릴리즈’ 탓에 관객 수 돌파 기록은 마치 단거리 경주 기록처럼 매번 당겨진다. 이런 환경 속에서도 <엔드게임>의 1백만 돌파 기록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엔드게임>의 러닝 타임은 무려 3시간 1분. 한번이라도 더 상영하고자 대부분 극장에서 오전 7시부터 조조 상영을 시작했고, 극장별로 차이는 있지만 10~20분 간격으로 회차가 이어졌다. 뭉툭하게 계산하자면, 첫 상영 4시간 30분 만에 달성한 1백만 관객은 오전 7시부터 8시 반 사이 영화를 본 조조 관객만으로 채워진 셈이다. 개봉 당일 총 관객 수는 약 138만 명. 소위 ‘프라임 타임’ 관객보다 조조 관객이 2배 이상 많았다는 뜻이다. 좋아하는 영화를 누구보다 빨리 보고 싶은 ‘덕심’만큼이나, ‘스포 폭격’이 쏟아지기 전에 영화를 훼손 없이 즐기려는 관객들의 조바심이 작용했다고 본다. 특히 <엔드게임>은 개봉 전, 해외에서 도둑 촬영된 주요 영상이 유출되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관객들의 스포일러 공포증이 극에 달했다. 기상천외한 스포일러 소동극의 주범은 개인이었지만, 주요 장면 묘사가 대부분인 리뷰를 경쟁적으로 쏟아낸 미디어도 관객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유주얼 서스펙트> 전설로 회자되는 “절름발이가 범인이다”( 유주얼 서스펙트 , 1996),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다”( 식스센스 , 1999) 시절의 스포일러가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다면, 21세기 관객에게 스포일러는 미세먼지 같은 공해이자 공포다. 누구나 즉각 정보를 전달할 수 있는 온라인 네트워크 환경이 최근의 스포일러 공해를 증폭시킨 건 맞다. 하지만 인터넷은 거들 뿐. 스포일러의 본질은 결국 ‘정보의 파워 게임’이다. 예나 지금이나 정보는 힘이다. 스포일러의 기저에는 ‘정보’라는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자의 쾌감이 자리한다. 상대에게 지금 그 정보가 필요한지는 중요치 않다. 하지만 미디어라면 ‘남보다 빨리, 많이 확보한 정보를 어떻게 쓸 것인가’라는 질문을 곱씹어야 한다. 제 아무리 속도전에 치이고, 클릭 수에 목말라도 ‘이 정보가 지금 왜 필요한가’라는 고민이 필요하다. 봉준호 감독의 간곡한 부탁의 편지가 뜨끔했던 건, 이 고민을 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디어가 많은 정보를 독점하고 그 정보를 미디어의 일정에 따라 발행하면 그만인 때도 있었다. 스포일러는 무슨. 관객들은 몇 줄짜리 영화 소개도 반겼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물론, 앞으로도 미디어가 독점적 정보를 얻기는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관객들은 과다 공급되는 정보 중에서 더 까다롭게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만을 고른다. 그나마 ‘조금 빨리 얻는 것’ 외에 정보 독점력을 잃어가는 우리 미디어들은 속도전에 내몰리다가 스포일러 공해에 합류하고 말 것인가. 글쎄, 단박에 답을 낼 고민은 아니다. 다만 봉준호 감독의 ‘스포금지’ 부탁 편지 이후 변화의 싹이 보이는 듯하다. 제약은 창조의 동력이라더니, <기생충>에 관한 새로운 시선과 독특한 형식이 돋보이는 기획 기사가 많았다. 영화를 아직 못 본 관객을 위한 ‘프리뷰’와 영화를 본 관객을 위한 ‘심층 리뷰’가 순차적으로 노출됐고, 주연 배우들은 물론 탁월한 조연 배우까지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차근히 받았다. 물론 읽을거리가 많은 영화의 풍성한 텍스트 덕이기도 하지만, 스포일러를 피하려는 미디어들의 고민 덕도 크지 않을까. 어쩌면 우리는 앞으로 시사회장에서 더 자주 감독들의 편지를 받을 지도 모른다. 그때는 지금보다 덜 뜨끔해지면 좋겠다. 아니 “뭘 이런 걸 다”라고 빙긋 웃을 수 있으면 더 좋겠다.
연설을 듣는 청중이나 지켜야 할 조국은 여자다. 열정적인 연설은 대중을 오르가슴에 이르게 한다. 정치란 창녀와 같아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면 그녀가 너의 머리를 물것이다. - 아돌프 히틀러 철학은 인간 해방의 머리이며 프롤레타리아는 그 심장이다. - 루트비히 포이어바흐 『리바이어던Leviathan』과 < 작전명 발키리Valkyrie > 브라이언 싱어가 서른 살에 < 유주얼 서스펙트The usual suspects )>(1995) 를 들고나왔을 때 할리우드는 들썩거렸다. 지금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랐지만 23년 전 이 영화의 파장은 대단했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무슨 ‘석학’이 출현한 것 같았다. 이후 브라이언 싱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유주얼 서스펙트> 케빈 스페이시 그때 주인공인 케빈 스페이시가 어찌나 무서웠던지, 나는 며칠 동안 세상의 모든 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버릇이 생길 정도였다(영화의 작은 소품이 사람을 그렇게 놀라게 하다니!). 이후 케빈 스페이시가 나온 < 쉬핑 뉴스Shipping news >(2001) 같은 ‘힐링’ 영화를 많이 보았는데도 여전히 그는 내게 <유주얼 서스펙트> 속 모습으로 남았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 그는 다른 영화에서 한 코믹한 연기조차 누군가의 뒤통수를 칠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최근 미투 가해자로 지목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는 수많은 상을 탄 베테랑 연기자이다. 젊은 나이에 그런 영화를 만든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2008)역시 야심작이다. 톰 크루즈는 말할 것도 없고 < 블랙북Black book >(2006)의 캐리스 밴 허슨, 한국 영화 < 택시운전사 >(2017)의 토마스 크레취만도 반갑고, 케네스 브래너는 언제나처럼 멋지다. 브라이언 싱어 캐리스 밴 허슨 토마스 크레취만 케네스 브래너 2차 대전 말기, 조국을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독일 장교 슈타우펜베르크 대령(톰 크루즈 분)은 히틀러 정권의 전쟁에 신물이 났다. 상부의 지시를 어기고 나치 정권을 비판하다가 아프리카 튀니지 전선으로 좌천된 그는 영국군의 폭격으로 왼쪽 눈, 오른손, 왼쪽 손가락 둘을 잃은 뒤 독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43년, 이미 여러 번 히틀러 암살 작전을 시도했던 일군의 장교들과 함께 ‘발키리 작전’을 역이용해 히틀러와 그의 측근을 제거하려 한다. ‘역모’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극적인 정치적 배경에 브라이언 싱어의 재능이 더해져, 두 시간 내내 관객의 심장을 ‘관할한다’. 하지만 영화 <작전명 발키리>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이 텍스트는 근대 국가를 설명하는 데 매우 적절한 교재이다. <작전명 발키리>는 토머스 홉스(1588~1679)의 『리바이어던』과 연동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리바이어던』과 <작전명 발키리>는 상호 충실한 해제이다. 메타포로 국가를 만들다 고전의 정의 중의 하나로 “널리 회자되지만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책”이라는 말이 있다. 『리바이어던』도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이들이 생각보다 않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 책이 인용되는 것만큼 사람들에게 읽혔다면, 절대 몸 이야기를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을 언급하는 이들은 대개 ‘딴소리’를 한다. 조금 냉소적으로 말하자면, 비서구 국가 혹은 한국의 (남성) 지식인들 중에서 헤겔, 마키아벨리, 칸트, 홉스, 루소 등을 맥락 없이 ‘들먹이는’ 이들이 많은데, 나는 솔직히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해한 방식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수염 난 백인 남성’의 지적 권위가 (유학을 다녀온) 비서구 남성 ‘엘리트’에게 ‘내부 통치용’(“그들의 사상을 나만 안다.”)으로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리바이어던』의 경우, 사람들은 괴물에 대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이 책의 분량은 생각보다 짧다. 가장 놀라운 점은 첫 페이지부터 끝까지 거의 단 한 줄도 빼놓지 않고 몸의 은유(body metaphor)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 책의 ‘위대한 업적’은 상상의 공동체로서 국가를 실체(entity)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는 관계와 제도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사람의 몸처럼 주권, 영토, 인구의 총체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국가 내 모든 영토는 평등하지 않다. 모든 국민도 평등하지 않다. 어디가 국가인가? 서울? 전라도 완도? 경상도 언양? 누가 국민인가? 여성? 장애인?…… 영토나 인구 개념은 상정된 것이지 실제가 아니다. 다만, 특정 지역이 국가로 대표될 뿐이다. 어떨 때는 서울이, 어떨 때는 독도가, 어떨 때는 한라산이……. 주권은 어떠한가. 나는 식량 주권, 검역 주권에는 찬성하지만, 군사 주권에는 회의적이다. ‘국가의 영혼’이라는 주권은 하나가 아니다. 19세기 말 중국은 서구에 의해 완전히 약탈당했지만(영화 <북경의 55일>(1963)을 보라) 공식적으로는 주권을 빼앗기지 않았다. 관타나모? 지금 그곳은 미국의 군사 기지이지만, 쿠바의 영토다. 『리바이어던』의 역사적 의미는 근대 국가의 개념적 기틀을 제시했다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 인류학자인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로서 민족’은 민족이 상상의 산물이라서 ‘없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인쇄술-표준어의 발달 따위가 국가를 탄생시킨 물적 토대라는 주장이다.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설명이다. 홉스 역시 유물론자였다. 그는 가부장제를 자연적인 산물로 보지 않고 사회적 구성물로 여겼다. ‘없는 실체’를 ‘존재’로 만들려면 반드시 은유가 필요하다. 글의 서두에 인용한 것처럼, 몸에 대한 은유는 인류의 오랜 인식 방법이었다. 그리고 몸은 사회적 해석을 반영한다. 그래서 머리(정신)와 몸(수족)의 위계라든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없다면 불가능한 수사가 많다. 서구 철학에서 흔히 말하는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공동체로서 조직을 유기체(하나의 몸)로서 조직으로 인지하는 데 결정적인 인식을 제공해 왔다. 사회 조직이 인간의 몸으로 비유되는 유기체일 때, 조직은 (지배-피지배) 관계/제도’가 아니라 실체로 간주된다. 권력은 도처에 있지만(is) 누군가가 가진(have) 것처럼 소유 관념으로 인식되어야,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대로, 오랜 역사 동안 인간은 만물의 척도였다. 몸은 모든 상징체계의 기본 도식을 제공해 왔고 서구 사상에서 정치 조직은 언제나 신체에 비유되어 왔다. 몸의 부분에 대한 의미 체계는 사회 규범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사회 조직에서 개인의 위치를 표현하는 ‘우두머리’, ‘수족’, ‘오른팔’ 같은 표현은 신체 기관이 위계화되어 있음을 말해준다. 『리바이어던』첫 페이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자연 중에서도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창작품이 ‘인간’인데 인체를 모방함으로써 창작품은 한결 더 고급품이 될 수 있다. 정치 공동체, 즉 ‘국가’는 바로 이런 솜씨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국가의 주권은 몸 전체에 생명과 동작을 주는 인공적 ‘혼’이며, 각부 장관이나 행정부·사법부의 관리는 인공적 ‘관절’이다. 보상이나 처벌은 ‘신경’…… 고문관(顧問官)들은 ‘기억’에 해당하며, 형법과 법은 ‘인공 이성’이며 ‘의지’이다. 조화는 건강이요, 반란은 병환이며 내란은 죽음이다. 끝으로 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합의나 동의는 우주를 창조할 때 신이 말씀하신 “이제 사람을 창조하자.”라는 명령과 같다고 하겠다. 이처럼 『리바이어던』은 전편에 걸쳐 국가를 ‘건강한 비장애인 인간’의 신체에 비유한다. “화폐는 국가의 혈액”, “식민지는 국가가 출산한 자녀”(제8장), “주권자에게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은 회충처럼 신체를 괴롭히는 자”, “피정복민은 종기”, “안일함은 기면증”, “폭동은 폐병”, “국가를 개혁하려고 불복종하는 사람들은 국가를 파괴하는 것, 이것은 마치 노쇠한 아버지의 회춘을 갈망하여 아버지의 몸을 절단하여 이상한 약초와 함께 끓였으나, 아버지를 젊은 사람으로 만들어내지 못한 펠레우스(Peleus)의 어리석은 딸들과 같은 것이다.”(제13장) 이처럼 국가를 유기체인 인체에 비유하면 국가 권력에 대한 비판과 저항은 인체를 절단하는 행위와 다름없게 된다. 모든 국가의 외부는 무정부 상태라는 전쟁 중에 있으므로 언제 침입할지 모르는 외부의 적을 생각할 때, 국론을 분열시키는 것과 같은 힘의 공백을 노출하는 행위는 있을 수 없으며 국가는 어떤 일이 있어도 보존되어야 한다는 논리다. 정상 국가는 장애인의 몸으로 표상되어야 한다 국가주의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행정부는 국가보훈처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국가주의에도 도달하지 못한 사회다. 한국 사회는 특히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에게 존경이 없는 기회주의자들의 나라다. 여기서 내가 반민특위 사건을 들먹이며 흥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윤리적이지 않다. 윤리적인 국가는 보훈(報勳)에 충실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해 희생한 이들에게 복지를 제공하고 경의를 표하는 것은 공동체 유지와 후세대 교육을 위해 필수적이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정상 국가는 건강한 비장애인 남성의 몸으로 재현되지만, 실제 정상 국가는 외적과 투쟁을 거쳐 쟁취한 공동체이므로 부상당한 몸이 정상이어야 한다. 다시 말해, ‘상이용사(傷痍勇士)’나 장애인의 몸이 정상 국가를 상징해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국가는 거의 없다. <작전명 발키리>의 주제는 반역이 탄로 날 듯한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제시된다. 관객의 심장은 쿵쾅거린다. 그때 슈타우펜베르크 역의 톰 크루즈는 자신의 신체를 ‘전시’함으로써 위기를 모면한다. 한마디로 “당신들, 나처럼 조국을 위해 눈과 팔을 잃었나? 감히 내 앞에서 할 말이 있는가?” 체포 직전의 그는 자신의 훼손된 몸으로 히틀러 측을 압도한다. 나는 이 장면에서 감동받았다. 나는 이런 상황이 가능한 사회를 꿈꾼다. 전통적인 국제정치학에서는 전쟁 없는 상태를 ‘현상 유지(the status quo)’라고 표현하는데, 부정적/비정상적인 의미로 쓰인다. 국가는 계속 전쟁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정체(政體, body politic)는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에 묘사된 비장애인의 몸이 아니라 부상당한 장애인의 몸이어야 한다. 지난번 이 지면에서 다룬 영화 < 설국열차 >(2013)에서 언급한 리더의 조건 중에, 다친 몸이 아닌 자는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도 같은 맥락이다. 한편 이 영화를 통해 독일은 또 한 번 뿌듯(?)했을지 모른다. 독일과 일본은 2차 대전의 전후 책임 문제를 두고 극단적 비교 대상이 되곤 한다. 하지만 이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이 글에서 다룰 사안도 아니다). 독일도 ‘군 위안부’나 전시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가해/피해 사안 모두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톰 크루즈의 아내 역으로 나오는 네덜란드 배우 카리서 판 하우턴이 열연을 펼친 폴 버호벤 감독의 <블랙북>은 2차 대전 후 연합군 국가들이 ‘적국의 남자와 섹스한 자국 여성’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잘 보여준다. 슈타우펜베르크의 존재는 독일의 자부심이다. 그의 이름을 딴 거리도 있다. 나치 정권은 대중의 협력 없이 불가능했고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 심리』를 통해 해석을 시도했지만, 어쨌든 히틀러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한 독일인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상기하는 일은 대단히 중요하다. 일제의 식민 지배에 사과하는 일본인, 베트남전에서 한국군이 벌인 만행에 문제 제기를 멈추지 않는 한국인, 나치에 항거한 독일인……. 자국의 범죄에 대해 사과와 반성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 인류가 국민이기 전에 인간인 이유다. 물론 최근 한국 사회의 일부 좌파와 페미니스트가 ‘난민 반대’를 주장하기도 했지만.
< 지구를 지켜라 >가 장준환 의 유일한 영화가 될 리는 결코 없겠지만, 장준환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가장 특이한 영화로 남을 가능성은 꽤 높다. 한국영화계가 한창 타오르던 시절에 만들어졌기에 <지구를 지켜라>는 저예산 영화를 뛰어넘은 기이한 상업영화가 될 수 있었다. 차승재 라는 탁월한 프로듀서의 힘도 컸다. 젊은 감독의 재능을 꿰뚫어본 노련한 프로듀서의 뚝심, 그리고 한국영화의 호시절이 괴상한 걸작 <지구를 지켜라>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지금도 이런 영화는, 이런 조합의 영화는 만들어지기 힘들다. 재능과 혜안과 타이밍이 제대로 맞물리기는 결코 쉽지 않다. 초저예산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 점에서 <지구를 지켜라>는 기묘한 걸작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유사한 영화를 찾기 힘든, 영화적으로나 산업적으로나 괴상한 곳에 위치한 ‘저주받은 걸작’으로서. 허무맹랑하고도 처절한 < 지구를 지켜라 >는 누가 보기에도 황당무계한 이야기다. 병구( 신하균 )는 외계인의 지구 침공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는다. 지구인으로 위장한 외계인들이 곳곳에서 암약한 채, 며칠 앞으로 다가온 개기 월식이 되면 인류는 멸망한다고 분석한다. 동춘서커스단에서 외줄타기를 하던 애인 순이(황정민)와 함께 병구는 강사장(백윤식)을 납치한다. 화장실 변기와 이발소 의자를 조립해서 만든 고문 의자에 강사장을 묶어놓고 심문을 시작한다. 안드로메다 왕자가 어디에 착륙하는지를 말하라는 것이다. 당연히 강사장은 답을 하지 못하고, 병구는 고문을 시작한다. 그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어느 순간 우리의 현실과 분명하게 얽혀든다. 현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즐거움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에 현실의 무게가 얹히고, 숨이 막힐 듯 처절해진다.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 장준환 감독은 공포와 유머라는 양날의 칼을 무지막지하게 휘두른다. < 지구를 지켜라 >에는 서로 상반된 것들이 이질감 없이 혼재한다. 현실과 비현실. 병구는 사람들을 납치해 외계인임을 실토하라고 하지만, 실제로 그들을 선택한 이유는 개인적인 원한이다. 정상과 비정상. 병구는 <유주얼 서스펙트>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이용해 스토리를 꾸며대는 강사장의 거짓말을 단번에 알아내지만, 코마 상태인 어머니를 살리는 약이 차 트렁크에 있는 벤젠이라는 주장은 그대로 믿는다. 이성과 광기. 병구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외계인을 물리쳐야 한다고 진지하게 믿고 있지만, 작업실에는 <양들의 침묵>처럼 잘라낸 손발과 장기가 가득 담긴 표본병이 널려 있다. 무엇이 진실인지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순간까지 <지구를 지켜라>는 본심과 너스레를 뒤섞어가며 관객을 혼란스럽게 한다. 망상을 통한 현실의 귀환 그러면서도 < 지구를 지켜라 >에는 고개를 끄덕일 만한 타당함이 있다. 병구가 왜 과대망상에 빠졌는지를 밝히기 위해 현실의 근거를 끌어들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병구의 과거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아버지는 사고로 죽고, 어머니는 식물인간이 되고, 애인은 파업을 하다가 맞아 죽었다. 병구는 선생에게, 불량한 친구들에게, 소년원의 교도관에게 무수하게 맞았다. 병구는 지옥에서 도망치기 위하여 ‘망상’을 택했고, 망상을 통해 다시 현실로 귀환한 것이다. 병구는 웃음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와 같은 과거를 지닌 인물이다. 황당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친구다. 신하균 과 백윤식 의 불꽃 튀는 연기 역시 그 모든 것을 농담이라고 돌릴 수 없게 만드는 요소다. 장준환 의 데뷔작 < 지구를 지켜라 >를 최고의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기이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을 자격은 충분하다. <지구를 지켜라>는 누구도 가지 않았던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섰던 한국영화다. 기존의 상식을 깨고, 자기만의 세계를 선언하는 진정한 데뷔작의 패기와 열정이 <지구를 지켜라>에는 시퍼렇게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