첩혈군영
- 감독
- 유준휘
- 출연
- 전소호
꿈. 이라는 글자를 적어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모양에서 조금 묘한 느낌이 든다. 또 모양만큼이나 발음 역시 묘하다. 꿈. 꿈. 의뭉스럽기도 하고 초탈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여튼 뭔가 꿈꿈한 느낌이랄까. 또 하나 재미난 점이 있다. 우리가 ‘꿈’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보통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된다. 잠을 자면서 나타나는 어떤 정신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꿈’(꿈1)과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을 나타내는 ‘꿈’(꿈2). 이 두 가지 의미는 언뜻 봐선 직접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 같진 않지만, 같은 모양의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신기한 점은 우리나라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거다. 영어에서 Dream이라는 단어 역시 꿈1과 꿈2의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 일본어에서도 꿈을 나타내는 ‘유메(ゆめ)’라는 단어가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꿈’이라는 단어를 함께 공유하고 있는 두 가지 의미는, 인류학적으로 뭔가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지 않을 수 없다. 이광국 감독의 두 번째 장편인 < 꿈보다 해몽 >을 보며 나는 꿈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두 가지 의미의 연관성에 대해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더 이상 관객이 찾지 않는 연극을 때려치우고 나온 한 여배우( 신동미 분)가, 과학수사보다는 꿈 해몽에 능한 형사( 유준상 분)를 만나며 영화는 시작된다. 영화는 여배우가 꾸었던 꿈으로 들어갔다가 그것을 해석해주는 형사의 이야기와 형사 누나가 꾼 꿈으로 다시 들어간다. 그리고 여배우가 1년 전에 헤어졌다는 전 남자친구 ( 김강현 분)의 꿈이 등장하기도 하는 등, 영화는 쉴 새 없이 현실과 꿈 사이를 들락날락거린다. 나는 우연한 기회로 영화를 두 번 보았는데, 처음 볼 땐 자연스레 꿈1에 집중하며 보았다. 즉, 꿈1의 관점으로 꿈과 현실의 모호한 경계와 그 경계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드는 이야기에 자연스레 집중되었다. 꿈과 현실의 불분명한 경계와 그 상호작용이 꽤나 흥미로웠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 인셉션 >이 비교적 논리적인 체계 아래에서 꿈속의 꿈으로 들어간다면, < 꿈보다 해몽 >은 논리적 전개과정이 무의미한, 말 그대로 꿈에 가깝게 꿈을 그려낸다. 그리고 얼마 뒤 두 번째로 영화를 보았다. 같은 영화였지만 다른 영화였다. 이번엔 꿈2에 포커스를 맞춰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연기라는 꿈을 박차고 나온 여배우, 그녀와 헤어진 뒤 자신의 꿈을 버리고 현실 세계로 사라져버린 전 남자친구,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는 소년과 그것을 끊임없이 지우려고 하는 소년의 엄마. 영화 속에 등장하는 이들 모두 표면적으로 꿈1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모두 자신의 꿈2에 대해 갈등하고 성찰한다. 영화는 연기를 그만두겠다며 무대를 박차고 나온 여배우의 모습으로 시작해, 곧 시작될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다시 분장실 거울 앞에 앉은 여배우의 미소에서 끝을 맺는다. 그 미소에서 느껴졌던 긍정의 에너지가, 결국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꿈(1+2)에 대한 해몽이 아니었을까. 이 영화를 처음 보았을 때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이야기 구조에 이끌렸다면, 영화를 다시 보며 더욱 깊게 다가왔던 건 각박한 현실 속에서 꿈2에 대한 용기를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감독의 따뜻한 시선과 응원의 메시지였다. 꿈1을 통해 비로소 다시 만나게 된 꿈2라는 존재. 꿈2에 대한 자각을 통해 새롭게 경험하는 꿈1의 모습들. 비록 아직 현실에서 일어나진 않았지만, 어떤 기대감을 갖고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을 가진 꿈이라는 존재. 서로 마주 보며 닮아가는 두 개의 꿈은 하나의 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며 했다. 어쩌면, 꿈의 어원에 대한 영화적인 답변일지도.
많은 사람들이 김수용 감독에게 문예영화의 대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만큼 그는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고, 그 성취 또한 뛰어났다. 그러다보니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문예영화들이 차지하고 있다. 더불어 김수용 감독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도 고영남 감독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세계는 멜로, 코미디, 드라마를 비롯, 심지어 국책영화까지 실로 다양한 장르가 혼재하고 있다. 이토록 다양한 그의 필모그래피의 정글에서 60년대 창작의 황금기에 발표된 혈기왕성한 예술세계에 경탄했고, 70년대 후반 < 야행 >, < 화려한 외출 >, < 웃음소리 >등에서 보여준 스타일 실험에 감탄했다. 하지만 대표작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의 틈바구니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진 몇 몇 작품들을 통해 받았던 감동은 짙다. 1980년 작품 < 하얀 미소 >가 바로 그 영화들 중의 하나다. 젊은 날의 금보라와 김영철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이혜숙의 앳된 미모를 새삼 느껴보고, 조금 더 눈썰미가 있다 싶으면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최종원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는 덤이다. < 하얀 미소 >는 정규학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전수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70년대 후반 대세였던 하이틴 영화의 모양새로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판타지와 코미디로 점철되고 말았던 하이틴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당대 한국사회의 폐부를 직시한다. 당시 한국사회는 국가적 경제성장에 한창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약자를 보듬을 수 있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이런 아이들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반항심으로 축소해 단순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즉,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 하얀 미소 >는 명문대학을 졸업했지만 다리를 절고 있다는 이유로 정규학교로 발령받지 못하고 전수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유선희 선생( 금보라 )과 반항아 권투선수 김종팔( 김영철 )의 스토리를 중심에 두고, 학교라는 공간과 같은 반 아이들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당시 한국사회의 문제였던 가난과 열등감, 차별의식을 보여준다. 김수용 감독은 전수학교 뒤로 서울시가지를 배치시키지만, 그 빌딩숲은 그들에게 희망을 꿈꾸게 만들진 못한다. 오히려 서울이라는 공간으로 대표되는 한국이라는 사회는 그들에게 폭력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무관심하다. 석래명 감독의 < 고교얄개 >가 가난한 호철( 김정훈 )의 옥탑방 문밖으로 보이는 빌딩숲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방식이다. 하이틴 영화가 동세대의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아마도 막연하다 할지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용 감독은 막연한 희망 대신 그 희망 속에 감춰진 사회의 비정함을 먼저 보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일에의 희망을 저 너머에 있는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땅위에서 피어 올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전수학교 아이들의 스토리는 리얼리티로 다가오게 된다. 그렇게 김수용 감독은 젊은 관객들에게 희망을 판타지가 아닌 살아있는 현실로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멋지게 시각화하고 있다. 나는 그 어떤 외국의 유명한 영화에서도 < 하얀 미소 >에 등장하는 해바라기만큼 아름답고, 예쁜 해바라기를 보지 못했다고 감히 생각한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영화에 등장했던 그 압도적인 해바라기 숲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포기의 해바라기의 아름다움엔 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장면이다. 정학을 맞은 종팔이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본. 몇 포기의 해바라기는 바로 종팔의 순수함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집에는 유선희 선생이 해바라기 같은 미소로 종팔을 기다리고 있다. 종팔은 비로소 열등감과 패배감 대신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종팔이 선생을 배웅하는 버스정류장 장면에서 질서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해바라기 꽃은 어떤 컴퓨터 그래픽도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감성을 향기 대신 풍기는 명장면이다. 그야말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장 멋진 미장센 중의 하나다. < 하얀 미소 >는 김수용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문제작들 틈바구니에서 잠시 호흡을 위해 쉬면서 툭 던져놓은 작품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흥행에도 대참패를 했고,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잊혀진 작품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한 개인의 맑은 심성에 기대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감독의 관점은 역시 시대의 검열이 심어놓았던 한계였던 것일까? 아니면 김수용 감독의 세계관인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이런 작품들 속에서 진정한 감독의 무의식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금보라 김영철 이영호 이대로 감독 김수용 각본 정지영 촬영 안창복 음악 강근식 미술 김유준 편집 김희수 1980년 95분 칼라 판매원 한양비디오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058
홍상수 의 목표는 매우 단순하고 한결같다. 그는 우리가 감각하는 매일의 현실을 영화로 옮기려고 한다. 영화가 삶을 구태여 비유를 거치지 않고 재생할 수 있는 매체라는 점에서 자연스런 선택이다. 하지만 정작 순수하게 이 목적을 추구하는 영화는 드물다.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편의적 현실- 달력으로 구획되고 인과 관계로 정리된 현실과 다르다. 홍상수에게 형식은 그것들을 뛰어넘어 영화와 삶이 맨 살을 맞대고 만나게 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제도와 서사의 압박을 배제하는 홍상수의 영화의 디제시스는, 꿈이나 회상을 태연히 아우르고 영화와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의 혼이 육체를 잠시 이탈해있는 시간을 별도의 경계 표식없이 포함하며 365일, 24시간의 도량 체계를 무시한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배우가 캐릭터라기보다 ‘패턴’으로 표현되는 것도 유사한 이유에서다. 현실에서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그의 특정한 면모를 필터링하여 하나의 유형으로 기억하지 않던가? < 극장전 > 이전, 대체로 홍상수의 영화는 시간을 배치하는 ‘수열’의 구성을 통해 위 목표를 간접적으로 실현했다. 이후 필모그래피에서는 홍상수는 보다 과감한 수단을 택하기 시작하는데 첫 비약은 < 옥희의 영화 >(2010)다. 4부 구성을 취한 <옥희의 영화>는 인물의 동일성이라는 내러티브영화의 금과옥조를 깬다. 한 배우가 연기하는 같은 이름의 사람인데도 인물의 동일성은 파괴된다. 4부의 옥희는 2부의 옥희와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일 수 있으며 극중극의 감독이기도 하다.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의 모든 전작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고 단숨에 그 여집합이 돼 버렸다. 자연히 <옥희의 영화>를 본 사람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온 감독이 다음에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 북촌방향 >의 성준(유준상)은 서울에서 활동하다 지방으로 이사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영화감독이다. 절친한 선배 영호( 김상중 )와 만난다는 명분으로 서울 북촌으로 짧은 겨울여행을 감행한 성준은 영호와 곧장 만나지 못하고 실패하고 혼자서 모르는 학생들과 술을 마시다가 만취해 과거의 애인 경진( 김보경 )의 집을 찾는다. 다시 인사동으로 돌아온 그는 영호와 영호의 후배인 영화과 교수( 송선미 )와 과거에 함께 영화를 찍었던 배우( 김의성 )과 어울리게 되고 ‘소설’이라는 술집에 몇 차례 들른다. 거기서 성준은 놀랄 만큼 경진과 닮은 가게 주인 예전(김보경)에게 끌려 접근한다. 인물의 동일성을 파괴한 < 옥희의 영화 >에 이어 <북촌방향>(2011)이 지워버린 원소는 시간의 동일성이다. 극중 사건은 얼핏 단선적으로 진행되지만 관객은 어느 지점에 이르면 불현듯 하루와 그 이튿날 사이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소거됐음을 깨닫게 된다. 한 차례 베드신을 빼면, 이 여정에는 성준의 숙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은 내내 똑같은 옷차림이고 반복되는 상황에 처음처럼 반응하기도 한다. 예컨대 ‘어제’로 짐작했던 날에 성준이 먹은 생선구이 냄새를 오늘 만난 영호가 맡아낼 때 우리는 두 장면이 같은 날에 속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받는다. 반면 일정한 시퀀스 안에서 <북촌방향>은 최소한의 선후관계가 보존한다.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요약한다. “(<북촌방향>에는)감정이나 정보가 축적되어가는 축이 있고, 매일이 첫 날처럼 보이는 축이 있다.” 매번 처음인 것 같으면서도 기시감을 발생시키는 이 시간 구조는 여행자인 동시에 과거 서울 주민이었던 주인공 성준의 중간자적 상태와 어울린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는 객지의 여행자다.) 그는 이 도시에 과거의 인연과 기억이 없지 않으면서도, 낯설어하면서 재빨리 (성준은 영화 첫 머리에 “슝슝”이라는 표현을 쓴다) 북촌을 겉핥고 통과하고 싶어한다. 감정과 기억이 축적되는 축과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는 축, 둘의 엇갈림이 팽팽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이 특이한 시도는 모호함을 위한 모호한 술책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북촌방향>은 기적적인 균형을 지탱한다. 밤 골목에서 성준이 키스를 받고 예전이 느닷없이 경진의 언어로 “오빠!”라고 외치는 찰나, 두 시간대는 마침내 선로가 겹친 열차처럼 충돌하며 터진다. 이 정점에서, <북촌방향>은 놀랍게도 이 영화가 전혀 무심해보였던 파토스와 감정의 울림을 끌어낸다. 성준의 미묘하게 굳은 마지막 표정의 클로즈 쇼트에는, 같은 얼굴을 한 두 여자 가운데 한 명을 간절히 원하고 한 명으로부터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사랑의 역설, 그리고 해방감과 폐소공포증이 교차하는 현대인의 일상감각이 담겨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긴 그림자를 남긴다. 프로덕션의 부피를 극단적으로 줄인 < 옥희의 영화 >(총 6회차 촬영) < 북촌방향 >(총 7회차 촬영)에 이르러 홍상수 감독은 < 해변의 여인 >의 극중 감독 중래( 김승우 )가 말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느다란 우연의 실’에 관한 이론을 어느 때보다 직접적으로 실천한다. 4부 중 1부만 구상하고 출발한 <옥희의 영화>와 한 인물이 같은 장소에 세 번 간다는 설정만 손에 쥐고 시작된 <북촌방향>은, 철저히 제1자(mover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만 던져놓고 일련의 우연-촬영 당일의 상황과 배우의 상태, 감독 자신의 발견-이 붙어 영화가 몸을 불려가는 식으로 완성됐다. 이와 같은 생산양식에 관한 사고의 전환은 불비한 자본으로 부득이한 선택을 뛰어넘어 홍상수 영화의 독창적 서사와 인물 만들기 방법론에 밀착한다. 아니, 유기적으로 맞물려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영화 제작의 첫 번째 조건이 예측가능성임을 상기할 때, 캐스팅부터 심지어 컬러로 만들지 흑백으로 만들 지까지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홍상수 영화는, 일종의 ‘위원회’에 의해 기획과 조정, 포장을 통해 나오는 주류 영화의 반대말이다. 전진하지도 상승하지도 않으면서 정해진 구역 안에서 빙빙 돌며 이동하고 같은 지점에 가서 다른 걸 발견하는 남자의 여정을 그린 <북촌방향>은, 홍상수 영화의 핵심이 목적이라는 ‘허위’를 철저히 배격한-목표를 피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소요의 쾌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훗날 홍상수 영화 만들기의 엠블럼으로 회고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