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
- 감독
- 유지인
- 제작년도
- 2020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 ' 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1980년대 초반의 서울은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GNP)이 1천 달러를 넘어서면서 적어도 보릿고개는 면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1988년 하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면서 ‘세계도시’의 말석에 자리하게 된 시점이 바로 이 무렵이다. 1974년 최초의 지하철 개통으로부터 불과 10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2, 3, 4호선이 거의 동 시기에 착공되었으며, 1979년 800만 명을 돌파한 서울의 인구는 단 4년 만에 다시 100만 명이 증가하는 등, 1980년대 초반의 서울은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하루가 멀다 하고 발전과 팽창을 거듭하는 도시였다. 이 시기에 형성된 서울의 도시구조, 다양한 건축과 교통, 토목 인프라 시설은 2020년대의 서울에도 상당 부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서울의 팽창을 지탱한 이들은 더 나은 삶을 찾아 지방에서 상경한 노동자들이었다. 1981년에 개봉한 김수용 감독(1929-2023)의 < 도시로 간 처녀 >는 바로 이 시기, 1981년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실존하는 미아운수라는 시내버스 회사를 배경으로, 지방에서 상경한 버스 여차장(안내양)과 버스 기사, 그 주변인들을 중심으로 당대 노동자들의 희로애락을 그려낸 이 작품은, 영화진흥공사가 선정한 우수 영화로 대종상 작품상 후보에까지 오르는 등 당대에 이미 가치를 인정받은 영화였다. 한편으로는, 첫 개봉 당시 운수업 종사자의 실상을 왜곡했다는 이유 등으로 한국노동조합총연맹으로부터 상영 중지 요청을 받고 일단 극장에서 내려진 후, 문제 장면의 삭제와 재촬영 등을 통해 재개봉이 이뤄졌다는 특이한 일화를 가진 영화이기도 하다. 개봉으로부터 40년이 흐른 지금, 이 영화를 둘러싸고 다양한 평이 존재하지만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당시로서는 시의적절하고, 제법 화제가 되었던 영화였다는 총평에는 아마 많은 이들이 공감할 것이다. 서울 시내의 안내양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답게, <도시로 간 처녀>의 카메라는 영화의 러닝타임 내내 버스의 움직임을 쫓아서 1981년 상반기의 서울 구석구석을 담아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명 안내양들이지만, 그들의 일터이자 이 영화의 공간적 배경인 1981년의 서울 또한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감을 발휘한다. 이미 1960년대부터 서울의 모습은 총천연색 컬러로 영화 속에 담기기 시작했으나, 1981년이라는 시점은 현재의 서울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 이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 여전히 또렷한 기억을 가지고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도시로 간 처녀> 속 서울은 ‘가까우면서도 살짝은 멀게 느껴지는’ 과거의 서울과 현재의 서울을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더욱 깊이 들여다볼 가치를 지닌다. 청량리역 구 역사 영화는 주인공인 문희( 유지인 )가 기차를 타고 청량리역에서 내리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1분경에 등장하는 청량리역의 모습과 지금의 청량리역 주변을 비교해 보면 과연 같은 역이 맞나 싶을 정도이다. 영화가 촬영되던 시기엔 영동선, 중앙선의 열차가 반드시 청량리역에서 시종착을 했지만, 지금은 많은 열차가 서울역까지 연장 운행을 하고 있다는 점 또한 청량리역이 가지는 의미를 상당 부분 변화시켰다. 지방에서 출발한 열차가 서울역까지 직통 운행을 하면서, 돈을 벌기 위해 상경한 이가 청량리역 광장에 내렸을 때의 느끼던 두려움과 낯섦은(여전히 존재하기는 하지만) 과거만큼은 못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 장충단 입구 교차로의 시내버스 (하) 남대문 부근의 시내버스 2분 40초경에서 3분에 걸쳐서, 카메라는 장충단 입구와 남대문 부근의 버스 행렬을 훑는다. 지금도 이 일대는 버스로 넘쳐나기는 하지만, 지금보다도 버스의 대중교통 분담률이 높았던 시대답게, 도로를 빼곡히 메우는 버스의 행렬은 가히 장관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스카라극장의 내부. 특유의 둥근 파사드가 눈에 띈다. 19분경, 영옥( 이영옥 )은 사귀던 남자친구에게 바람을 맞고 돌발적으로 극장 구경에 나선다. 이 장면이 촬영된 극장은 실존하던 스카라극장 (1935년 준공, 2005년 철거)으로, 특유의 둥근 전면 파사드가 인상적인 근대건축이었다. 이 무렵에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는 당연히 익숙한 공간일 테지만, 이 시기를 살아보지 않았던(특히 199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에게, 총천연색으로 담긴 스카라극장 내부의 모습은 정말로 소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상) 시청 방면에서 바라본 서대문 고가차도의 시점부 (하) 지하철 공사 바리케이드 36분경에는 서대문 고가차도를 미끄러지듯 내려온 버스의 주변에 서울시의 공식 휘장과 ‘지하철’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바리케이드가 화면에 잡힌다. 이 일대(지금의 아현역-충정로역 사이)가 1980년부터 시작된 지하철 2호선 공사 현장이었음을 드러내는 의도하지 않은 미장센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여전히 시내버스는 서울시 대중교통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지만, 지하철 1호선과 2호선 일부 구간만이 운행되던 40년 전에는 아침 출퇴근길에 있어서 시내버스의 존재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살포시 등장하는 지하철 공사 바리케이드는, 시내버스의 절대적인 존재감이 점차 옅어지는 과도기를 나타내는 상징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성수대교 49분에서 50분에 걸쳐서, 문희와 광석( 김만 )이 조각배 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곳은 지금의 강변(뚝섬한강공원 일대)으로, 한강 건너편의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성수대교가 배경으로 잡힌다. 이 무렵 압구정현대아파트는 이미 준공되어 입주가 완료된 때였지만, 한강종합개발사업(1983년 착공)이 이뤄지기 전 무언가 삭막한 한강변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이 장면에 담긴 푸른 빛깔의 성수대교는 영화 촬영으로부터 불과 13년이 지난 1994년 10월, 성수대교 붕괴사고를 일으키면서 완전히 철거되어 현재는 전혀 다른 새로운 교량으로 거듭났다. (상) 고속터미널 청사와 아치 (하) 고속터미널 아치의 2011년 모습 (필자 촬영 및 제공) 66분부터 69분에 걸쳐서, 문희가 원양어선을 타고자 하는 광석을 데리고 부산으로 내려가는 장면에서는 1981년 10월의 전면 개업을 코앞에 둔 강남 서울고속버스터미널(이하 고속터미널)의 웅장한 모습이 곳곳에 담겨있다. 특히 69분 언저리에서, 광주고속 소속의 벤츠 고속버스가 거대한 고속터미널의 청사를 배경으로 옛 랜드마크였던 거대한 출입구 아치를 통과하는 모습은, 당시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하던 이들에게 서울 입성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순간이기도 했다. 고속터미널의 아치는 이후 터미널을 본뜬 구조물로 바뀌었고, 2011년 말 2012년 초 사이에 철거되어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다. 압구정현대아파트와 주변의 미개발지 영화의 말미, 86분에서 88분에 걸쳐서 카메라는 다시 압구정현대아파트를 찾아가 그 옆의 빈곤층 거주지를 훑는다. 1980~81년 무렵만 해도 강남 일대는 토지구획정리만 진행되었을 뿐 주택이 들어서지 않은 땅이 지천에 존재했으며, 이들 지역에는 개발 이전부터 살아온 원주민 혹은 구 도심에서 떠밀려 온 저소득층이 곳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난한 가정의 실상을 담아내기 위한 감독의 의도였을까, 카메라는 시종일관 판잣집을 겨우 면한 가옥과 뒷배경의 산뜻한 압구정현대아파트, 그리고 새로운 아파트 공사장을 원경으로 잡으면서 대비를 시도한다. 이렇듯 <도시로 간 처녀>는 경관과 건물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서울 곳곳의 경관을 비춰주면서 빠져들도록 한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눈에 익은 곳이 등장할 때, 기뻐하지 않을 관객(특히 서울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40년 전 노동자의 일상과 다면적인 서울의 모습을 미디어의 발달을 통해 언제 어디서든 총천연색으로 즐길 수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낀다. 참고문헌 송아름, “ 두번의 검열과 <도시로 간 처녀>(2) : 어떻게 버스안내양들의 고난이 감추어졌는가?(1970년대)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18. 4. 16.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 중인 < Archives Korea 1930-1940 >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한 기록영상 필름이다. 이 영상은 이미 2021년에 기록영상 컬렉션 의 일부로서 심층 해제와 함께 공개됐고 VOD 기획전 에서도 짧게 다룬 바 있지만, 1928년부터 1941년경까지의 방대한 시기를 촬영하고 두서없이 묶어놓은 꽤 불친절한 영상인 탓에 전체적인 맥락을 한 번 더 소개해 보려 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트램 회사 ‘Market Street Railway’의 부매니저로 일하던 모리스는 28세가 되던 1899년에 서울로 건너와 한성전기회사가 부설한 전차 운행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여권(1910.2, 1918.4.)에 기재된 바대로 애초에 조선에 온 것은 '사업 목적의 임시거주'였지만, 근대적 시간 및 경제 개념이 부족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출생의 미국인 여성과 결혼(1902)도 하고 딸도 낳아(1905)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듯하다. 결국 그는 서울 정동의 외국인 공동체 속에서 정확히 40년을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1938년에 돌아가게 된다. 조선에 올 때는 중간 경유지인 일본 고베에서 제물포까지 이동하는 데만 해도 11일이 걸렸지만, 고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23시간 정도면 가능해졌을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1899년에 조선에 온 J. H. 모리스씨는 40년간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밀브래 하이랜드의 엘더 애비뉴 30번가입니다. 모리스 부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배려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 “Contributor's Column”, The Korea Mission Field 36 , no.2 (1940년 2월호) 그는 긴 조선 체류기간 동안 광산업, 자동차 수입 및 정비업, 램프 등 생필품 수입 판매업 등을 하며 미국, 일본, 중국 등을 수시로 오갔다. 한편으로는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재정 임원을 역임했고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RASKB)의 회원(회보 속 회원록 기준으로 1915년부터 1940년까지)이기도 했으며, 그가 1924년에 마련한 강당 공간을 외국인 대상의 초교파 연합 교회인 서울유니온교회(Seoul Union Church) 및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의 각종 예배 및 행사 용도로 제공하는 등 정동의 선교사 모임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리스 홀(Morris Hall) 앞 미국 장로교 조선선교회 연례 모임 기념 사진(1939)> 사진: Moffet Korea Collection (Photograph, Series 5, Box 33) “서울외국인학교협회는 작년에 매입한 건물 2층에 새로운 강당을 완공했다. 이 강당은 300명의 청중을 편히 수용할 수 있으며, 협회는 건립위원회 위원장 J. H. 모리스 씨의 봉사와 관대함을 기려 환호 속에 이 새로운 강당을 "모리스 홀"로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서울유니온교회는 준비되는 대로 이 강당에서 정기 주일 예배를 거행하기로 했다.” - “Notes and Personals” , The Korea Mission Field 20, no.4 (1924년 4월호), p.80 <정동 21번지, 모리스 상회(J. H. Morris & Co. Seoul) 전경> *주1 모리스 상회가 취급하던 물품은 자동차 및 부속들, 타이어, 모터사이클, 램프, 화재보험 등 다양했다. (좌)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20 no.2 (1924년 2월호), (우)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13 no.8 (1917년 8월호) 무엇보다도 사진광이었던 그는 유니버설 필름의 조선 내 수입 배급업을 하면서 필름 촬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을 떠나는 순간까지의 왕성한 활동들을 필름 길이 기준으로 3시간 30분 가량(16mm 필름 7권), 적정 속도로 영사했을 때의 기준으로 5시간 15분 가량의 방대한 촬영본으로 남기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2년 2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니, 거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상으로 기록했던 셈이다. 4일 월요일. 구름. 쌀쌀함. 서울 집. 하디(Hardie) 박사의 집에서 케른(Kern) 및 그 일행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모리스(Morris)씨가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줬는데, 동쪽 궐 내, 금강산, 필리핀, 백두산의 모습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9시 반 경에 귀가했다. -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0권 중 12월 4일 일기 J. H. 모리스의 일대기와 그를 둘러싼 정동의 선교사, 외교관, 사업가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은 이 뜬금없는 푸티지 모음집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1930년대 초중반 전주와 함흥 일대의 선교 활동 모습, 뜬금없이 중국에서 촬영된 푸티지들(1920년대 중후반부터 선교공동체가 모색했던 중국 선교와의 관련성 등), 1936년 5월 28일 이화학당 개원 50주년 행사 등이 촬영됐던 이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194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됐던 “Bowl of Rice" 퍼레이드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인근의 풍경들이 1940년에서 1941년 즈음에 촬영됐던 동기 등 대략적인 맥락은 이제 그의 생애와 그가 속했던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rchives Korea 1930-1940> 중, 1940~1941년에 촬영된 푸티지들 (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Redwood) 공원, (우) 샌프란시스코 “Bowl of Rice” 퍼레이드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상 속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극동의 한 나라에 자리를 잡고 서로 의지하고 갈등하며 3세대에 걸쳐 함께 했던 60여 년의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들은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선교지의 발전과 그 국민들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고민했던 흔적들이 기록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던 공동체로서 서로 간의 유대감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은 서로를 ‘Korea Kids’라고 칭했고, 1940년대 초 일제의 압박에 밀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최소 50여 년 이상 조선에서의 추억담과 서로의 근황을 Korea Klipper 라는 이름의 월간 소식지로 엮어 구독했으니 말이다. <J. H. 모리스의 사위(딸 Marion의 남편)인 스테판(C. H. Stephan)이 최근에 사망했다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전언> 사진: The Korea Klipper vol.39, no.2 (1980년 2월호), 첫번째 소식. 모리스의 영상을 보면 이렇듯 서로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이 언뜻 비춰지는 장면들이 있다. 중일전쟁 직전의 긴장감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인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 영사관에서 열린 1937년 5월 24일 대영제국 기념일(Empire Day) 행사 중의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고 공동체 친구들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1935년 3월에 경복궁 후원이 특별 개방되면서 열렸던 야외 연회장에서는 붐비는 방문객들 사이로 다른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이때 카메라와 이들의 정서적 거리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Archives Korea 1930-1940> : 모리스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사람들 (상) 1935년 경복궁 후원 (3:48:24), (중) 같은 장면, 구세군 모자를 쓴 새뮤얼 모팻 선교사? (3:48:05), (하) 1937년 영국 영사관, 대영제국의 날 행사 (4:46:32) [참고] 이하 제시되는 타임코드(시:분:초)는 적정 속도로 조정한 KMDb VOD 버전 기준의 시간입니다. 모리스의 이 방대한 기록영상 필름은 모리스 사후 그의 딸 매리언(Marion)이 간직하고 있다가 친분이 있던 로스 H. 맥도널드(Ross H. Macdonald) 토론토 대학 교수에게 전달했고, 그의 사망 후 아내 리스(Leith Macdonald)가 캐나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에 기증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모리스의 손녀와 친분이 있던 다큐멘터리 영화작가 마티 그로스(Marty Gross)의 도움을 통해 <Archives Korea 1930-1940>는 드디어 어언 80여 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도착했다. 진면목이 드러난 모리스 필름의 이모저모를 짧은 글 하나에 모두 설명하기란 무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 건물, 인물, 상황에 대한 식별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16mm 필름 품질 상의 한계도 있지만, 기록영상 속 정보를 새롭게 하나 식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우리의 주인공 모리스 씨의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만 해도 여러 근거자료를 교차 검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마저도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추정은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미 감리교 디지털 컬렉션의 자료 를 함께 참고해 볼 수 있다.) (좌) J. H. 모리스의 여권(1918.8.21.) 속 가족사진 : 순서대로 모리스(47세), 딸 매리언(14세), 아내 마벨(45세) (우) 마벨(Mabel Clair Perkins)의 여권(1923.11.5.) 속 사진 <서울유니온 50주년(1939년) 기념사진 속 모리스(68세)> 사진: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위 사진 중 모리스 부분 확대>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 추정 인물 - (상) 3:21:18 (하) 3:16:17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의 가족들 (상) 모리스의 딸 매리언 부부로 추정되는 인물들 (3:14:08), (하) 맨 오른쪽은 모리스의 아내로 추정 (3:17:36) ※ 참고 문헌 Morris, J. H. “Early Experience with the Seoul Street Railway”,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Seoul: 26-27. Macdonald, Leith, “Rare Film Footage Captures: Korea in the '30s”, Korean Culture , vol.8, no.2. (Summer 1987). 33-37. Underwood, H. G. “An American Boy in Yesterday's Seoul - 'Golden Days' Fondly Recalled”, KOREANA vol.5, no.1, (Spring 1991), 19-26 Clark, Donald N. “Impermanent Residents: The Seoul Foreign Community in 1937”,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 vol.64, (1989) 19-37. *** 주1. 사진: Cameron, W. H. Morton. Present Day Impressions of Japan; the History, People, Commerce, Industries and Resources of Japan and Japan’s Colonial Empire, Kwantung, Chosen, Taiwan, Karafuto. Edited by W. Feldwick. Chicago: Globe Encyclopedia Co., (1919) p.854
옛날 한국영화를 보려고 하는 현대 관객들의 발목을 잡는 것 중 하나는 이런 영화 속 남자주인공들이 대부분 끔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형표의 < 아가씨 참으세요 >가 남자주인공 김민욱을 등장시키는 첫 장면을 보자. 조깅을 하고 있던 민욱은 여자주인공 진리화가 타고 있는 차를 아무 이유도 없이 가로 막는다. 항의하는 리화에게 리화의 폴크스바겐을 달구지라고 놀려대더니 어떻게든 빠져나가려는 리화의 차 지붕 위로 뛰어오른다. 여기에 어떤 이유가 있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남자주인공에게 이런 짓을 시키면 재미있는 놈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게 겨우 1981년 일이다. 이 ‘재미있는 놈’을 연기한 사람은 당룡이다. 본명이 김태정인, < 사망유희 >에서 이소룡의 대역으로 나왔던 배우다. 당룡의 캐스팅은 ‘홍콩영화’가 되려고 하는 이 영화의 욕망을 반영한다. 당룡의 무술은 이 영화의 상당히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그렇다고 그게 영화에 엄청난 긴장감을 부여하는 건 아니다. 일단 이 영화는 코미디이고 둘째로 코미디라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악당들이 너무 무능해서 주인공들이 잘못될 거라는 생각이 안 든다. 예를 들어 진리화와 리화의 친구는 둘 다 영화 초반에 납치되지만 모두 남자주인공의 도움없이 탈출에 성공한다. 리화의 친구는 태권도 유단자로 설정되어 있고 액션신도 많기 때문에 보고 있으면 ‘그냥 남자주인공 없이 가도 되는 이야기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진리화라고 하는 홍콩인 교환학생을 여자주인공으로 내세운 건 ‘홍콩영화’가 되려는 욕망의 또다른 표현이지만, 이 캐릭터를 연기한 사람은 당시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7,80년대 한국 여자배우 3대 트로이카였던 정윤희다. 그렇다고 이 영화에서 정윤희의 ’외국인‘ 연기를 기대하면 곤란하다. 그런 것에 신경을 썼던 시대가 아니다. 전문성우가 후시녹음을 하던 시절엔 언어의 사실성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1981년작이니 정윤희의 두 영화 대표작인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와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와 같은 시기에 나왔다. 정윤희는 이 두 편의 영화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연달아 받았으니 배우로서도 절정기였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먼저 기억나는 정윤희의 연기는 대부분 명연기와 거리가 멀다. 나는 진리화가 친구 앞에서 태권도 도복을 입고 발레, 또는 발레라고 우기는 무언가를 하는 장면을 먼저 뽑을 거 같은데, 이건 어느 각도로 보더라도 그냥 유치원 재롱 잔치다. 정윤희는 그렇게까지 몸을 유연하게 잘 쓰는 배우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는 그걸 코미디의 재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어떤 내용인가. 한국에 교환학생으로 와 있는 홍콩 재벌 딸인 진리화를 납치하려는 악당들이 있고 남자주인공과 주변 사람들이 리화의 재산을 빼앗으려는 이 음모를 격파한다는 이야기다. 아, 그리고 < 애마부인 >으로 뜨기 직전인 안소영이 악당의 여자로 나온다. 아무도 신경 안 쓸 스포일러를 건드리자면 나중에 주인공들을 돕는 착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동기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는 성폭행 회상 장면을 넣는다. 당연하지만 이 이야기는 코미디와 액션을 엮기 위해 간신히 존재하며 얼마든지 다른 무언가로 교체될 수 있다. 대부분 액션은 코미디에 휩쓸리며 코미디의 일부는 여장한 민욱이 악당들을 속이는 장면처럼 종종 보기 고통스럽다. 하지만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에서 악당들이 튕겨져 나가고 나중에 필름이 거꾸로 돌면서 함께 모두 다시 엘리베이터에 빨려들어가는 장면처럼 초현실적인 개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가씨 참으세요>는 누가 봐도 정윤희의 영화이고 결국 이 배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다. 영화는 어떻게든 당대 최고 스타였던 주연배우의 외모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하는데, 당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은 액션 장면 중에 원피스를 찢어 배우의 엉덩이를 노출시키는 것과 같은 것이 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이 민망함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비슷한 시기에 나온 토착 에로티시즘 영화들과는 다른 식으로 정윤희의 캐릭터와 몸을 바라보며 여기에는 여러가지 다른 가능성이 보인다. 그리고 현대 관객들은 왜 그 가능성들이 적극적으로 이용되지 않았는지, 왜 당시 영화 만드는 사람들의 여자 몸에 대한 상상력이 딱 그 정도에서 멈추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