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의 강
- 감독
- 유두연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이민자, 김동원, 노경희, 정애란, 엄앵란, 나애심, 최삼, 유계선, 김석훈, 김의향, 김미선, 김신재, 황정순, 박암, 이대엽, 박정은, 이경자, 유근애, 이은주, 이창, 임운학, 신동훈, 정철, 박영태, 남가실, 강진환, 이해룡
<여명> 이후 ‘과부’ 전문 배우로 전환 이민자(李民子)는 이향이나 김동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배우가 되었다. 일본 도호(東寶)영화사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안진상(安鎭相)이 처음 메가폰을 잡은 <여명>(1948)을 통해서였다. 해방 후 <안중근사기(史記)>(이구영, 1946)로 한국영화사의 서막을 연 후 34편째 제작된 작품이다. 뇌물을 받고 밀수를 묵인하려던 경찰관(이금룡 분)이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나머지 이 사실을 자백, 밀수범을 일망타진케 한다는 밀수 근절용 계몽영화로, 이민자는 여기에서 어촌의 처녀 역을 맡았다. ‘이민자의 섬세한 표정은 앞날이 촉망된다’ (정용배, 「영화평 ‘여명(黎明)을 보고’」, 『자유신문』, 1949.3.25) 는 고무적인 평을 들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인천의 건설영화사 대표 최철(崔鐵)은 뒷날 배우가 된 최불암의 아버지이다. [사진] 데뷔작 <여명>에서의 이민자 이민자는 2년 후 신상옥의 감독 데뷔작 <악야>(1952)에 여주인공 양공주 역으로 기용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작이 무산될 뻔했으나 피난지 대구에서 촬영돼 부산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환도 후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1953)을 출발점으로 <미망인>(박남옥, 1955)을 비롯한 <마의태자>(전창근, 1956), <마인>(한형모, 1957), <유혹의 강>(유두연, 1958), <생명>(이강천, 1958), <어머니의 길>(안현철,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행복의 조건>(이봉래, 1959) 등과 <과부>(조긍하, 1960), <내일의 태양>(오영근, 1962),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여인천하>(윤봉춘, 1962), <피리 불던 모녀 고개>(강찬우, 1962),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모녀 기타>(강찬우, 1964), <갯마을>(김수용, 1965), <산호의 문>(엄심호, 1966), <슬픔은 파도를 넘어>(김효천, 1968) 등 모두 140여 편에 출연하게 된다. 절반 이상이 주연이었다. 이 가운데 신경균 감독의 <화심(花心)>(1958), <애모>(1959), <유정무정>(1959), <회정>(1959), <그대 목소리>(1960), <울지 않으련다>(1960), <정조>(1961), <여자의 일생>(1962), <형부와 새 언니>(1964) 등 9편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단골배우가 되었다. [사진] <내가 낳은 검둥이>에 출연한 이민자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에서는 사회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쟁미망인의 삶을, <유혹의 강>에서는 납북된 남편을 잊지 못해 수절하는 여자의 고행을, <내가 낳은 검둥이>에서는 혼혈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차별의 비애를, <마인>에서는 복수를 위해 위장 결혼한 여성의 마성을, <모녀 기타>에서는 모진 삶의 시름을 노래로 사르는 극단 가수의 사연을, <아낌없이 주련다>에서는 연하의 청년에게 모성애적 사랑을 쏟는 30대 미망인의 열정을,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초혼에 과부가 된 큰딸(용숙)의 빗나간 배금주의적 면모를, <갯마을>에서는 풍랑 속에 주체하지 못하는 과부 해녀의 애욕을, 그리고 <산호의 문>에서는 가정교사와 도색행각에 빠진 과부의 회한을 특유의 농염한 몸매와 감정선으로 표출해냈다. 그 대부분이 박복한 미망인, 과부 캐릭터였다. [사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연출작 <미망인>에서의 이민자, 오른쪽은 이택균 이와 같은 그녀의 욕망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배역이 바로 <아낌없이 주련다>의 댄스홀 마담 우정원이였다. “어마! 사내 냄새.” 파도가 밀려오는 송도 바닷가에서 막냇동생과 같은 11세 연하의 지배인 하지송(신성일 분)의 품에 안기며 놀란 듯이 쏟아낸 우 마담의 대사는 육감적인 그녀의 개성을 함축한 것으로, 제6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의 트로피를 쥐게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사진] 이민자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현한 <아낌없이 주련다>의 한 장면 학업마저 포기하고 들어선 배우의 길 이민자는 1929년 4월10일 서울에서 한의사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이용량(李容瑯)이다. 다음은 그녀가 언급한 과거 회상기. “우리 집은 11대 선조가 충무공 할아버지였다는 사실 때문에 가정적으로 항상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편이었다. 그러기에 귀여움을 받는 초등학교 때도 나는 쾌활하고 성미 급한 버릇 때문에 항상 어른들의 꾸중을 많이 들었다. 물론 내적으론 무척 귀여워했겠지만 외형적으로는 항상 근엄한 아버지였다. 내가 서울에서 방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학여중(경성 무학여자고등보통학교 : 필자)을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밤 친구들과 같이 한복으로 옷을 바꿔 입고 부모님 몰래 극장에서 현대극장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 마음속으로 “저렇게 화려한 배우가 되어 보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현대극장을 찾아가서 책임자를 만났는데 의외로 반가워하면서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는 소양이 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의 길을 선택한데는, 선천적으로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민자. 「나의 데뷔 시절을 회상한다」 , 『스크린』, 1964년 9월호) 이용량이 학업을 중단하고 찾아간 곳이 현대극장 연구부였다. 1944년이었다. 현대극장은 1941년 유치진이 함세덕과 함께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며 설립한 극단이다. 이민자라는 예명이 알려질 무렵 영화 <태양의 아이들>(최인규, 1944)에 출연하게 된다. 종을 치는 학교급사로 두세 컷에 불과한 단역이었다. 16세 때였다. 이 영화는 섬마을 초등학교 여교사(김신재)가 학생들에게 내선일체 교육을 시켜 군 입대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제작(1944년 11월4일 명치좌 상영)된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해방 이듬해, 서울 동양극장에서 조선악극단의 뮤지컬 <카츄샤>의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의 음악 지휘를 맡은 김형래는 김진규와 숙질간이었다. 그는 조카를 단역으로 출연시키고 이민자를 발탁했다. 그녀는 잇따라 같은 해 6월 현대극장과 아랑이 통합해 만든 낙랑극회의 창단공연 <산적>(함세덕 작, 연출)에 황철, 이해랑 등과 함께 출연하고 2개월 후 <산홍(山紅)아, 너만 가고>에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눈이 크고 살결이 고운 이민자는 이 무렵 7살 연상인 김진규와 결혼하고 첫 아들을 낳았다. 이 같은 행복감 속에서 영화 <여명>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배우나 다름없던 남편(김진규)이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로 부각돼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녀는 두 아들을 둔 채 이혼하게 되는 시련을 겪는다. 1959년이었다. 30대 중반에 이른 남편이 영화 <옥단춘>(1955, 권영순)으로 배우의 길에 나선 열아홉 살 처녀 김보애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에바 가드너’로 불렸던 고혹적인 관능미의 소유자 이민자는 1968년 은퇴 후, 5년 만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룸살롱을 경영하며 재일 한국인과 재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했으나 이혼 끝에 198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영화사의 비평세대는 비평의 ‘주체’와 ‘주요비평담론’, 그리고 ‘비평매체’와 이들을 둘러싼 영화산업의 역사적 맥락 등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1950년대는 한국영화사에서 비평집단의 조직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활동은 미미했지만 1950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출발한 ‘영화평론가협회’를 필두로 전후비평이 시작되었고, 1957년 일간지 연예담당 기자들을 중심으로 ‘시네펜클럽’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대말에서 1960년대초는 ‘일간지 영화평의 최전성시대’였다. 樹( 임영 ), 雄(임영웅), 秀(최일수) 明( 이명원 ), 湖( 호현찬 ), 振(김진찬), 植(신우식), 軒(황운헌), 英( 정영일 ) 등 신문에 고정란을 두고 자신의 이니셜을 새겼던 이들은 영화비평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일간지 중심의 저널리즘 비평은 본격적 담론을 이끌어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중흥과 함께 <신영화>, <영화세계>, <국제영화>와 같은 영화잡지들이 발간되면서 비평지면이 늘고, 비평적 실천의 대상인 한국영화 자체도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영화와 지면(매체)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비평은 텍스트중심의 비평보다는 위기에 봉착한 영화계의 현실을 진단하고 정책제언을 하는 시평이나 인상비평이 많았다. 국산영화 면세조치 이후 해마다 제작면에서의 양적 급증이 있었지만, 산업적으로나 제도적, 기술적으로 미비한 상태에서 전후의 공백을 메우고 세계영화의 흐름에 조응하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했다. 전후 한국사회 곳곳에 세계주의, 실존주의가 확산되던 이 시기에 유두연 은 한국영화 부흥의 허약한 ‘이면’을 강조하며 ‘한국영화 위기론’(경향신문 1956년 상반기/연말 결산 연재기사)을 역설하고, 네오리얼리즘을 모델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을 주창했다. 1950년대 활발한 활동을 했던 몇몇 비평가들( 허백년 , 오영진 , 이봉래 등)과 마찬가지로 그는 일본의 대학에서 서구문학이론을 전공했고, 30여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 유혹의 강 >(1958)으로 감독데뷔 후 총 8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조춘 > 1959, < 카츄샤 > 1960 등). 이전 시대의 비평가들과는 다르게 전후 평론가들은 전근대적 한국영화를 비판하거나 문제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연출 및 제작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두연은 군정청 예술과 근무나 조선영화사 간부 이력에서 드러나듯 시스템이나 정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았다. 그는 국제영화제 진출을 문화교류나 예술성 획득의 측면에서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협소한 내수시장의 한계를 해외시장의 개척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예술과 산업의 균형발전 시각에서 일찌감치 접근했다(경향신문 1955년 1월 23일 ‘영화의 예술?상업성’). 또한 유두연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오리지날 씨나리오에 의한 현대극영화”가 위기의 한국영화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주장하며 빠른 템포의 현대극 멜로물을 주로 만들어 ‘전후 멜로드라마의 초석을 닦은 작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1957년 2월 <영화세계> 특집이었던 ‘코리안 대 이타리안리즘의 비교’(필자: 유두연 , 허백년 , 황영빈 )는 ‘코리안 리얼리즘’이 네오리얼리즘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굴절 및 변용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네오리얼리즘을 매개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이 이전 시기 한국의 리얼리즘 담론전통과 어떤 지점에서 개념적, 이데올로기적 단절의 선을 긋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국의 네오리얼리즘 수용시기가 이미 사조자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195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초기작(< 자전거도둑 >, < 무방비도시 > 등)을 선택적으로 정전삼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비평가들이 이상적으로 상정했던 ‘한국적’이고도 ‘새로운’, 또한 ‘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한’ 리얼리즘의 모습이 드러난다. 유두연이 1954년 네오리얼리즘을 소개하던 글(‘영화기법의 신경향: 네오 레아리즘에 관하여’)의 경우에서도 다큐멘터리적인 방법론이나 스타일적 요소보다는 “전후의 긴박한 사회정세에 대한 영화작가의 현실직시 정신”이나 이태리문화의 전통적 특질에 기반한 “지방주의”에 주목했던 것은 본격적 논의라 할 수 있는 3년 후의 ‘코리안 리아리즘 단상’과도 연결된다. 유두연 은 영화예술에 있어 리얼리즘을 외형적인 측면(방법론, 스타일)과 내면적인 내용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외형적 리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카메라 렌즈의 리얼리티”로서 간단히 전제하고 “이타리안 리얼리즘의 작가정신에 대한 동경”을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인 리얼리즘담론과 연관짓는다. 그는 일제시대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없는 나룻배 >의 저항정신과 해방 후 < 자유만세 > < 마음의 고향 > 등에 산발적으로 계승되던 리얼리즘의 전통을 전후의 한국영화가 상실한 상태에서 이태리 작가들처럼 “코리안 리아리즘도 오늘의 현실(“네오적”)과 대결하는 인간의 진실을 내용으로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을 “레지스땅스 의식과 로칼 칼라의 스타일”로 규정한다. 또한 그는 지방주의와도 연결되는 로칼 칼라 스타일은 한국영화의 국제적 진출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국적인 동시에 세계, 이것이 궁극의 목표이고 영화의 마음이요 예술의 마음일 것”) 이렇듯 유두연 이 제창한 코리안 리얼리즘은 네오리얼리즘을 동경했던 전후 비평가들의 세계화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상적 담론이자 대안이었다. 그러나 코리안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저항의 ‘내용’을 포함했으되 다른 제 3세계 국가들에서처럼 유물론적 방법론이나 미학, 정치적 실천 및 운동 등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또한 네오리얼리즘 감독 중 급진적 맑시스트였던 비스콘티의 작품은 수입이 금지된 채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일부 작품들이 수용되고 상찬된 것에는 전후의 비평들과 리얼리즘 담론이 이전시기 한국의 좌파 리얼리즘을 배제시키고 선택적으로 계승한 것과 유사한 한계가 드러난다. 비평의 장에서 이러한 (우파) 민족주의적 리얼리즘 담론의 지배는 1960년대로 가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 글: 이선주
50~60년대의 인기 영화배우이자 김진규 의 전부인이었던 이민자 씨가 뇌일혈로 19일 하오 6시 숨졌다. 향년 58세. 이씨는 지난1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일본의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날 타계했다. 장례식은 21일 상오 많은 동료와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의 고단다의 한 절에서 있었다. (서울신문 1986년 1월22일) < 생명 > < 유혹의 강 > < 모녀기타 >등 90여편의 영화에 출연, 50~6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했던 배우 이민자 씨가 지난 19일 저녁8시 일본 동경대부속병원에서 뇌일혈로 별세했다. 향년57세. 이씨는 46년 배우 김진규 씨와 결혼했다가 59년 이혼하고 68년 일본에서 재혼, 사업을 해왔다. 이씨의 유해는 25일경 서울로 운구될 예정이다. (동아일보 1986년 1월22일) 이민자 는 이렇게 쓸쓸하게 갔다. 새해가 열리는 정월 초하룻날 쓰러졌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스무날을 못 채우고 그냥 갔다. 그것도 현해탄 건너 이국땅에서. 장례도 그곳에서 치러졌다. 그렇게 많은 갈채를 받던 고국에 핏기없는 주검으로 돌아왔다. 60을 채우지 못한 이민자 의 일생은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쓸쓸하고 복잡다단했다. 그래서 일까. 이민자는 그녀의 일생을 그대로 영화에 반영 하다시피 했다. ‘미망인의 세계. 어쩌면 이것으로 이민자의 영화경력을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딘지 청초하고 수심에 잠긴 듯 한 모습의 이민자는 영화계에서 ‘과부형 배우’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그의 출연작을 살펴 보더라도 대부분 과부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고 그런 역에서 성공을 거두어 왔음을 알수 있다… (여성영화인사전- 여선정 ) 이민자 의 다섯째 작품이 < 미망인 >(1955)이다. 이 영화는 이민자의 ‘미망인의 세계를 그렸다는 점 말고도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크게 기록되고 있다. 한국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이 연출한 영화가 바로 이 <미망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감독데뷔작품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전쟁미망인이 도덕윤리와 욕망의 늪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좋은 점수를 받았다. 53년 이민자는 네번째 작품 < 최후의 유혹 >에 출연했다. 유현목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이민자는 바 마담역을 맡았다. 김 화의 <이야기 한국영화사>는 …이민자는 이 때부터 술집 마담역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쓰고 있다. 52년에 만들어진 < 악야 >는 거장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품인데 여기서 이민자는 작가( 황 남 )와 하룻밤을 지내는 양공주역을 맡았다. 56년 < 마의태자 > ( 전창근 감독) , < 사도세자 > ( 안종화 감독)등 2편의 사극에 출연하고 57년에도 < 마인 > ( 한영모 감독), < 오해마세요 > ( 권영순 감독)등 2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1958년. 이 해부터 1964년까지를 한국영화 중흥기로 구분 ( 호현찬 의 <한국영화100년>)하는 만큼 이민자의 출연영화는 5편으로 늘어난다. 한국최초의 시네마스코프 < 생명 > ( 이강천 감독)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이민자는 뒤이어 < 어머니의 길 > ( 안현철 감독), < 자유결혼 > ( 이병일 감독), < 유혹의 강 > ( 유두연 감독), < 소낙비 > ( 이경식 감독)등 모두 5편에 출연했다. 111편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진 59년 이민자 는 모두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아름다운 여인 > ( 유현목 감독), < 청춘극장 > ( 홍성기 감독), < 행복의 조건 > ( 이봉래 감독)등이었다. 60년에는 < 울지 않으련다 > ( 신경균 감독), < 사랑해선 안될 사랑 > ( 이봉래 감독), < 과부 > ( 조긍화 감독)등 모두 9편,61년 2편, 62년에는 < 이십구세의 어머니 > ( 이강원 감독 ), < 여자의 일생 > ( 신경균 감독), < 여인천하 > ( 윤봉춘 감독), < 아낌없이 주련다 > ( 유현목 감독)등 모두 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에서 이민자 를 크게 부각시키고 여러모로 화제를 뿌린 작품은 단연 < 아낌없이 주련다 >라 하겠다. 교양있는 연상의 미망인과 먹물 든 연하의 청년사이의 사랑이야기로 물론 멜로드라마 이지만 6촵25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고뇌를 그렸다는 점에서격조높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말할 나위없이 이민자는 고민하는 연상의미망인상을 훌륭히 표출해 냈다. 이 작품은 또한 영화기자 출신 호현찬이 기획촵제작(극동영화사와 합작)하여 흥행면에서도 아낌없이 주는 반응을 얻었다는 기록을 누렸다. 이민자 는 63년에도 59년과 마찬가지로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총 제작편수는 148편). < 언니는 좋겠네 > ( 이형표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 유현목 감독), < 오색 무지개 > ( 조긍하 감독), < 남자조종법 > ( 정일몽 감독), < 자문밖 설마담 > ( 한상훈 감독), < 율곡과 그 어머니 >( 이종기 감독)등이다. 이 가운데서<김약국의 딸들>은 < 미망인 > < 생명 > <아낌없이 주련다>등과 함께 이민자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김약국의 네딸 중 큰 딸 역을 맡은 이민자는 과부의 삶과 심리를 밀도 있게 연기함으로써 이 작품을 문예영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일조를 했다. 64년에는 < 모녀기타 > ( 강찬우 감독), < 청춘은 목마르다 >( 박상호 감독), < 학사주점 > ( 박종호 감독)등 모두 11편의 영화에 이민자 는 출연했다. 65년에는 < 장보고 > ( 안현철 감독), < 7인의 여포로 > ( 이만희 감독), < 모녀봉 > ( 권영순 감독), < 갯마을 > ( 김수용 감독)등 9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어떤 기록에는 14편으로 되어있다. 이는 아마도 주연 또는 주요역할을 중심으로 했느냐 여부에 따른 차이일것이다. 실제로<갯마을>의 주연은 이민자가 아니다. 이 작품의 과부는 고은아이고 시어머니역은 황정순이다. 이민자는 66년에는 < 친청 어머니 > ( 김기덕 감독), <특급 결혼작전> (유현목 감독)등 4편, 67년엔 <빙우> (고영남 감독) 68년에는 <슬픔은 파도를 넘어> (김효천 감독)에 출연했다. 광복전인 1944년< 태양의 아이들 >( 최인규 감독)에 데뷔한 뒤로 24년동안 9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이민자 는 < 슬픔은 파도를 넘어 >를 끝으로 한국영화와 작별할 뿐만 아니라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모국도 떠난다. 50년대 후반 60년에 전반 한국영화 전성기에 이민자 는 한국의 에바가드너로 불렸다. 저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사랑의 여신 에바가드너로승격을 시킨 것이다. 입소문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호현찬 의 <한국영화100년>은 < 아낌없이 주련다 >대목에서 …여주인공은 한국의 에바가드너라고 불리는 이민자를 …이라고 못박았다. 이민자는 좋은 연기자였다. 거기에 에로티시즘의 화신이랄까,섹스 어필 만점의 연기자였다. 한국의 에바가드너라는 칭호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에바가드너와 달리 이민자 는 유복한 집안, 한의사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무학여중 2학년때 극장 구경을 갔다가 배우가 되는 계기에 부딪혔다. 44년 동랑 유치진이 이끄는 현대극장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무대에서 주목을 받은 어린 이민자는 같은 해에 < 태양의 아이들 >로 영화데뷔를 한다. 뒤이어 48년 두번째 영화< 여명 >( 안종화 감독)에 출연한다. 데뷔작품에서는 단역을 맡았기 때문에 이민자의 데뷔작으로 첫 주연인 <여명>을 흔히 든다. 이 연극-영화와의 인연은 이민자 에게 인생의 인연을 안겨주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해, 16세때 이민자는 같은 극단 같은 무대에 선 김진규 를 만나 그 다음해인 45년 정식결혼을 했다. 광복전의 일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14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이민자를 둘러싼 사랑의 기쁜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이것은 그대로 그녀의 배역과 직결되었다. 그래서 미망인전문배우가 되다시피 한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는지, 이민자 는68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 해에 재일교포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18년뒤 이민자는 미소가 사라진 주검으로 돌아왔다. 60년대초 퇴계로의 아스토리아 호텔의 밀실에서 이민자 와 인터뷰한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 졸문을 쓰면서 그때의 기사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한 이민자의대표작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사뭇 안타깝다.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이용랑 출 생 : 1929년 4월10일 서울 1986년 1월 19일 사망 데 뷔 : 1944년 최인규 감독 < 태양의 아이들 > 주요 작품 : < 미망인 >, < 유혹의 강 >, < 아낌없이 주련다 >, < 생명 >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