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의 약속
- 감독
- 봅 J. 로스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에바 그리말디, 레오나르도 트레비그리오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지옥화>(1958)의 촬영을 맡아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12편을 촬영 후, 1962년 개봉한 <북극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액션스릴러 혹은 범죄추리물에 특기를 보여 ‘아주 타프한 작품을 만드는 신인’ 1) , “액션 감독으로 정평이 높은 준재 강범구 감독” 2) 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의 초기작들이 1960년대 초반 대만에서 흥행에 성공하였고, 1966년에는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대만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강범구 감독 작품의 대만 흥행은 이후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강범구는 일제강점기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척이 운영하던 사진관을 드나들며 카메라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해방 후 홀로 월남하여 한국전쟁을 겪고, 휴전 이후 국민대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연극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박상호 감독이 영화 <젊은 그들>(신상옥, 1955)의 조감독을 맡았는데, 강범구에게 엑스트라 출연 및 동원을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영화 현장을 처음 접하게 된 그는 영화 촬영 카메라의 작동 원리가 자신이 다루던 사진 카메라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다른 관심을 갖는다. (사진1) <해정>(박상호,1956) 포스터.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촬영부로 참여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6년 박상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해정>에서 촬영부 일을 시작했고, 이어서 유현목 감독의 작품에서 김명제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한다. 김명제는 미국의 미첼(Michell) 카메라를 모방하여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한 ‘코첼’이라 불린 카메라를 만들어 사용했다. 강범구는 김명제와 같이 손수 촬영 기재를 고안해낼 정도로 기술력이 출중한 영화인 밑에서 촬영 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일본영화촬영자협회에서 펴낸 『 일본영화촬영편람 』 을 보면서 영화 전문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그가 촬영 조수로 참여한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와 <잃어버린 청춘>(1957)은 전후 한국영화의 새로운 수준을 이룩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3) “카메라 앵글에도 많은 노력의 자취가 보인다”, “한국영화의 공통적인 폐단인 느린 템포가 시정되어 있어 유쾌”하고 “이동촬영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화면에 안정성이 있고 매끈”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잃어버린 청춘>은 ‘묘사가 착실’하고 ‘모방에서 독창으로’, ‘수준에 이른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강범구는 전후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인 “현대극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젊은이들” 4) 의 일원으로 작업하며 영화인으로 단련되었다. (사진2) <지옥화>(신상옥, 1958)의 한장면. 왼쪽부터 배우 최은희(쏘냐 역), 김학(영식 역), 조해원(동식 역) 강범구는 1958년 <지옥화>(신상옥)의 촬영을 맡아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다. 전후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위험을 무릎 쓰고 달리는 기차 위에서 액션 장면을 찍었다. 덕분에 속도감 있는 기차 추격 장면이 박진감을 더 했고, 촬영 데뷔작에서부터 대담하고 힘 있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3) <지옥화>(신상옥, 1958) 기차 액션 장면. 영식 일당이 미군 수송 열차를 털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 것을 기차 지붕 위에서 찍은 화면 이어서 강범구는 신상옥 감독의 첫 번째 멜로드라마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을 안정감 있게 촬영하였고, 이 작품은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한다. 그는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 후 1961년까지 약 3년 동안 총 12편의 영화들을 촬영하는데, 그 중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1961)을 촬영하면서 이 작품을 제작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와 연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한흥영화사가 제작한 <지평선>(정창화,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슬픔은 없다>(김묵, 1961)를 촬영했고, <북극성>(1962)으로 감독 데뷔하여 연출작 <동굴 속의 애욕>(1964)까지 최관두가 제작한 8편의 작품을 함께 한다. (사진4)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갱스터 범죄물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가 제작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사진5)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크레딧 (사진6)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만주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의 활약을 담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액션 장면을 속도감 있는 몽타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지평선>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거대 제작비를 들여, 우이동에 4만 평의 대지를 잡고 건평 3천의 오픈 세트를 세워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만주의 한 소도시를 만들고,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5) 강범구는 영화제작자 최관두를 “한국영화 액션 원조”라고 칭했는데, 그가 운영한 한흥영화사는 “한국 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6) 이라고 불렸다. 한흥영화사는 주로 대륙물과 액션, 범죄 스릴러물 제작에 주력했다. 최관두는 특히 만주 대륙물의 효시인 <지평선>(정창화, 1961)부터 대륙 액션물의 완결판이라 불리는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까지 제작한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초부터 당시 주류 멜로드라마 장르와는 다른 궤적을 그린 작품들을 개척해온 한흥영화사에서 강범구도 자신의 감독작들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강범구는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연출자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되는 점을 체감하고, ‘카메라맨’ 역할에만 만족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작품을 지휘할 수 있는 ‘연출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북극성>(1962)을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주동운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것으로 한흥영화사 이름으로 개봉되었지만 눈에 띄는 반응은 얻지 못했다. (사진7) <북극성>(강범구, 1962) 포스터. 강범구가 제작하고 연출한 감독 데뷔작이다. 강범구가 두 번째로 연출한 <검은 꽃잎이 질 때>(1962)는 이경재 원작의 서울중앙방송국(HLKA) 라디오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신문기자인 주인공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간첩을 쫓는 이야기로 “본격 추리영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라 불리며 평단과 흥행 면에서 두루 성공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7) , “강범구는 처녀작 <북극성>에서 평조하였으나 <검은 꽃잎이 질 때> 한편으로 이를 완전히 만회해서 기염을 토했으며” “지난날의 명 ‘카메라맨’답게 훌륭한 카메라워크를 보여주고”, “우리 영화풍토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본격적 추리극을 시도”하여 “제법 박력 있게” 연출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사진8) <검은 꽃잎이 질 때>(강범구, 1962) 포스터. 하단에 경찰기동대 오토바이와 백차가 등장하는 추격 장면이 보인다.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기존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총격전과 차별되는 새로운 액션 스펙터클을 선보이길 원하던 차에, 당시 서울 시경에서 외제 오토바이를 새로 장만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수도경찰청은 경찰의 기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1년에 미국에서 사십 대의 오토바이를 들여왔으며, <검은 꽃잎이 질 때>의 엔딩에 해당하는 간첩 추적 장면은 시경의 협조로 백차 5대, 시경 특별기동대 오토바이 20대, 세단 2대 등을 동원하여 서울 을지로, 종로, 돈암동을 빠져 의정부, 포천까지 내달리며 백주의 추격을 카메라 세 대로 촬영했다. 8) 감독 입장에서는 작품의 스펙터클 연출과 홍보 면에서 이득이었고, 경찰 입장에서는 방첩 의식 고취 및 시경을 선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상업극영화를 통해 대중성과 정부 시책 양쪽을 만족시키는 협상이 흥행 성공으로 이어진 경우이다. 그리고 강범구는 <검은 꽃잎이 질 때>의 흥행으로 인해 “액숀·스릴러의 총본산”인 한흥영화사의 ‘감독’으로 입지를 얻게 된다. 다음 작품 <안개낀 거리>(1963)는 그가 한국전쟁 및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연출한 영화이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한 전우가 전후 복귀한 사회에서 범인과 형사로 조우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서 범인(이향 역)은 뛰어난 사격술로 형사(황해 역)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현재 형사는 지난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체포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기차 승강구 결투씬’이 백미로 꼽히는데, 형사와 범인이 서로의 손목이 수갑으로 묶인 채 달리는 기차에 매달려서 결투를 벌이는 액션 장면이다. (사진9)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포스터. 중앙에 두 주인공의 손목이 묶인 수갑이 빨강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안개낀 거리>는 196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수갑(手銬)>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우수한 흥행 성적을 올렸으며, 당시 대만 언론에서 강범구 감독을 ‘액션·스릴러’의 귀재로 주목했다. 대만에서 발간된 영화 서적 『 세계영화감상 』 (1967) 한국 편에는 <안개낀 거리>에 대해 “인물의 심리와 성격부터 감정의 노출 등이 전편에 걸쳐 긴장감 있게 그려지고, 인간의 인지상정의 모순된 점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기교가 훌륭하다. 카메라 워크와 컷트의 극적 운영이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 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 9) 고 평하고 있다. 강범구는 <창살없는 감옥>(1963)에서도 전쟁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겪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전작 <안개낀 거리>의 인물 설정 및 주제가 변주된 것으로 보이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형사(황해 역)가 범인(이향 역)을 쫓는다. 범인은 수사망을 피해 한국전쟁 유격대로 잠입하는데, 형사가 뒤따라 자원입대하여 그를 추적한다. 둘은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조우하고 목숨이 걸린 딜레마 상황에 처한다. 영화 제목은 동족상잔의 전쟁터를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처지로 비유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창살없는 감옥>을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대는 단순한 아이언 오거니제이션(철의 조직체)이 아니라 인간의 결합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들고 있는 점은 무척 대견한데, 나는 지난 2년동안 3천만 인구가 모두 군복 착용을 강요당하는 듯 한 환각에서 이런 작품들을 본 것은 적으마한 위안으로 여기고 있다.” 10) (사진10) <창살없는 감옥>(강범구, 1963) 포스터. 배경에 낙하산 부대가 보인다. <창살없는 감옥>에서도 강범구는 특색 있는 액션 스펙터클을 연출하길 원했고, 그 결과 당시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낙하산 부대가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적진에 투입되는 인물들이 진격하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수직 낙하 이미지에 착안하여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낙하산 부대를 촬영했고, 비행기와 카메라 두 대를 동원하여 공중 촬영을 진행했다. 이 작품 또한 대만에서 <제3특공대(第3特攻隊)>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더불어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불렀던 주제가도 중국어로 번안되어 동남아 지역까지 인기를 끌어모았다. 이듬해, 1964년 강범구는 연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전후 사회에 지속되고 있는 문제를 짚어내는 작품들을 연출한다. 원제가 ‘목격자의 증언’이었던 <당신만을 위하여>(1964)는 가부장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 주인공이고, <동굴 속의 애욕>(1964)은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빨치산 생활을 하게 된 여성을 그려냈다. (사진11)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왼쪽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옥녀(배우 김난영)와 오른쪽 끝에 동록(배우 박노식)이 공모하여 옥녀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에 관해 심문이 진행된다. <동굴 속의 애욕>은 권순영 판사의 수필집 『법창의 봄』(1955)에 실린 같은 제목의 재판 실화가 원작이다. 한국전쟁 당시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주민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로, 이 지역은 본래 북한 땅이었다가 휴전 이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역이다. ‘수복(收復)’의 사전적 의미는 잃었던 땅이나 권리 따위를 되찾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복 지구’가 대한민국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본래 북한 주민이고 본인의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분단선의 이동이라는 순전히 외부적 요인 때문에 남한 사람으로 귀속이 변경된 비자발적 월남인들이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공식화된 월남 동기인 ‘북괴가 싫어서’나 ‘자유를 찾아서’라는 반북·반공주의가 적용될 수 없는 사례이다. 강범구는 이러한 수복 지구 주민의 경험을 자신의 월남인 의식에 빗대어 설명한다. “난 이북사람이고 그래서. (중략) 그게 굉장히 가슴에 사무친다고. 그건 우리의 그 사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거던, 예. 그 권력 잡은 사람들이 자기네들 권력 싸움 위해서지, 우리하곤 아무 관계 없는 거야. 내가 지금 해석을 해도 그래요. 그래서 인제 그걸 바탕에 두고 인간의 그 본성을 한번 그려볼라구 했던 거죠. 그 굉장히 그땐 새롭드라구, 그 책을 보니까.” 11) <동굴 속의 애욕>은 젊은 부부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살인용의자 옥녀의 재판을 구경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재판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옥녀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피고인인 동록과 옥녀 및 증인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과거시점의 액자 구성으로 재현된다. 즉 액자 구성의 가장 안쪽에서 재현되는 이야기가 옥녀와 같은 북한 인민이 겪은 한국전쟁이고, 이들이 전후 현재 시점에서는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고 있는 남한 주민이다. 영화는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들의 전사(前事)를 액자 속으로 들여다보도록 배치함으로써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신문 헤드라인이 담지 못한 진실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사상 때문이 아니라는’ 감독의 의도와 같이, 옥녀를 북괴의 꾀임에 속고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빨치산으로 도식화하지 않고, 전쟁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무고한 양민의 전쟁 경험으로 열어둔다. 강범구는 <동굴 속의 애욕>이 한국전쟁을 그리는 데 있어 오래 남을만한 이야기라고 여기며, 기회가 된다면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12)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옥녀의 재판을 보러 온 사람들이 법원에 모여있다. 영화의 오프닝을 여는 젊은 부부를 비롯한 ‘재판 구경’ 대중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주인공을 이해와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진13)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 옥녀. 극한 상황에서 분투하는 인물의 생존 본능과 욕망, 그에 따른 복잡한 심리를 표현해낸 배우 김난영의 연기가 돋보인다. <소만국경>(1964)은 강범구가 다시 액션 연출의 특기를 살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활약을 담은 영화이다. 소련과 만주 접경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과 일본군, 비적떼 등이 출몰하여 다양한 액션을 펼치는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사진14) <소만국경>(강범구, 1964) 포스터 <탈출명령>(1966)은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가 강범구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만든 한국·대만 합작영화이다. 고인하는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계와 교류하며 한국영화들을 대만에 소개하는 데 관심을 쏟았고, 강범구가 연출한 작품들이 대만에서 흥행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앞서 언급한 <창살없는 감옥>을 수입하여 대만에서 <제3특공대>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고,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역에서도 큰 수익을 거둔 인물이 바로 고인하이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강범구 감독과 함께 대만에서 대규모 전쟁 액션 영화를 만들길 원했다. 한국 측에서는 기획자 박민이 대영영화사 소속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감독과 배우, 조감독 등이 대만으로 향했다. <탈출명령>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본군이 세운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인물들을 탈출시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대만 아리산(阿里山) 밑에 야외세트장을 짓고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여, 일본에서 필름 현상을 했다. 대만 촬영현장에서 강범구와 주요 대만 영화 스태프들은 일제식민지 시기 성장 배경을 공유하는 동년배들이었고, 서로 일본어로 소통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만 중앙전영공사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와 최신 영화 기재, 일본 영화인들과의 기술 교류 등을 접하고 당시 한국영화계에 비해 격차를 느꼈다고 한다. <탈출명령>은 <최후명령(最後命令)>이라는 제목으로 대만에서 개봉했으나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만 영화인 고인하는 이후 강범구를 비롯한 한국영화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과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15) <탈출명령>(강범구, 1966) 포스터. 배우 신영균, 박노식, 이대엽, 손미희자 그리고 대만배우 왕모초(王莫愁) 등이 출연했다. <탈출명령>의 필름 현상 작업이 일본 도에이 현상소에서 진행될 때, 이곳에 들렸던 신상옥 감독이 <탈출명령>의 해외 로케 촬영 화면을 보고 강범구에게 베트남전 영화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제작하는 <여자베트콩 18호>의 연출을 맡아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당시 베트남전에 파병된 국군 비둘기부대의 협조를 받아 촬영했다. 촬영 중 전투 장면을 위해 묻어둔 폭탄이 뜻하지 않게 폭발하여 조명기사 이계창이 현장에서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고, 강범구 역시 부상을 당하여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다. (사진16) <여자베트콩 18호>(강범구, 1967) 포스터. 전시 중에 제작된 영화이고, 베트콩 등장 장면을 촬영 중 실제 베트콩으로 오인 받아 미군으로부터 포위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후 강범구는 가수 남진 주연의 <울려고 내가 왔나>(1967)부터 직접 제작한 <항구의 왼손잽이>(1971)까지 음악영화, 검객영화, 반공영화, 갱스터 범죄영화 등의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한다. (사진17) <울려고 내가 왔나>(강범구, 1967) 포스터. 당시 가요계의 스타 남진이 주연을 맡았다. (사진18) <대검객>(강범구, 1968) 포스터. 당시 홍콩무협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이른바 ‘칼싸움 액션’이 펼쳐지는 검객영화가 유행했다. 이 작품은 정통검술을 익힌 배우이자 무술감독인 안일력이 검술지도를 맡고 고증에 충실하여, 한국 검객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진19) 1960년대 활동 당시의 강범구 감독 출처:“한국감독의 50인”,[1970 영화연예연감], 국제영화사, 1969 1974년에 개봉한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은 한국의 동아수출공사와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가 합작으로 만들었다. 동아수출공사는 강범구와 대만 영화인 고인하를 통해 골든하베스트에서 제작한 이소룡 주연작 <맹룡과강>(이소룡, 1972)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골든하베스트와 돈독한 거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대표 이우석과 이웃 관계로 일찍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초중반 동아수출공사 기획실에 근무한다.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일대영웅>의 홍콩측 감독 팽장귀는 한국어에 능숙한 화교였고, 한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사진20)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 1974)의 한장면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작품 기획, 시나리오 작가 섭외 및 완성, 감독과 스태프 구성, 캐스팅, 제작 현장 및 후반작업 진행 등 작품을 구상하여 완성하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였다. <마지막 다섯 손가락>(김선경, 1974)부터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까지 9편을 기획했는데, 그 중 <남사당>(이규환, 1975)은 이규환 감독의 은퇴기념영화로 제작되었다. 이규환 감독은 일제강점기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데뷔하여 한국영화사 초창기부터 활동한 원로 감독이었고, <남사당>은 선배 영화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기획된 작품이다. 같은 해에 강범구는 김기영 감독이 <만추>(이만희, 1966)를 자기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김기영, 1975)을 기획하였고, 정소영 감독의 <애수의 샌프란시스코>(1975)를 기획하여 미국 로케 촬영까지 담당했다. 또한 <걷지말고 뛰어라>(1976)로 소설가 최인호를 감독으로 데뷔시키는가 하면, 1976년에 개봉한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는 관객의 호응을 얻어 ‘진짜 진짜 시리즈’로 후속편이 이어지며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다. (사진21)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의 배우 임예진, 이덕화. 이후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를 떠나 해외로 눈을 돌려 국내보다 나은 영화제작 여건을 찾고자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만 광고영화 프로덕션 회사에서 활동 중에, 한국영화진흥공사 홍콩 법인과 연계되어 대만에 수출하는 한국영화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당시 <증언>(임권택,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1974), <섬개구리 만세>(정진우,1972) 등의 한국영화들이 대만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만에서 만난 로웨이(羅維) 감독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도 거주하며, 중화권 작품 거래를 위해 서울-홍콩-대만을 오가며 지냈다. 강범구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를 비롯한 중화권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거래를 중개하는 역할을 했으며 골든하베스트 대표 레이 초우, 홍콩에서 활동한 제작자이자 감독 로웨이, 이한상, 오사원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 대만 영화 감독 유가창 등의 아시아 영화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강범구는 1980년대에도 한국과 홍콩 혹은 한국과 대만 영화사와 연계된 일종의 합작 형태의 작품들에 참여한다. 1988년에 개봉한 <칠소여복성>(강범구·맥담웅)까지 협업하고, 1986년경부터 1995년경까지 중화권 외화 수입 거래 중개자 역할을 해왔다. (사진22) <괴시>(강범구, 1981)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라고 불리는 미스터리 공포물 강범구가 홍콩에서 관람했던 서구 좀비영화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연출했다고 한다. 대만 배우 유광옥, 강명이 출연했다. 강범구는 1960년대 초반 “액숀·스릴러의 본산” 한흥영화사에서 활동하면서 일찍이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해외 활동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냉전 시기 분단된 영토 안에 국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다른’ 영화 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6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편을 넘어가면서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을 찍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상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작품들과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영화인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신 이후 1970년대 국가주의 영화 제도 및 규제 하에서 영화 제작 환경이 더욱 악화되자 그는 한국을 떠나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를 비롯하여 홍콩과 대만에서 영화계 네트워크를 형성한 강범구는 ‘한국의 중국통’이라고 불리우며, 한국영화와 중화권 및 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본격적인 교류에 앞장섰다. 한국영화계에 1960년대 후반부터 홍콩 검객물과 무협물이 인기를 끌면서 액션영화가 부상되었지만 정부의 영화시책 제도 관점에서는 저속, 저질영화로 저평가되었다. 하지만 관객의 부응은 이와 반대였기 때문에 한·홍 합작 액션 영화 등이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제작되었다. 이 시기 강범구의 연출작 목록을 살펴보면 당대 한국영화 시장에 홍콩 무협물과 액션물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경험을 통해 과거 한국-홍콩-대만 간 다양한 방식의 합작 혹은 협업 제작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과 경위에 관해 들여다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제작 관행이 각자 정책적으로 혹은 자본력 측면에서 자국 영화시장 내에서 부족한 지점들을 보완하는 자구책으로 기능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각기 합작 주체의 입장에 맞게 완성한 작품들은 자국 영화로 변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무국적성이 비난 받기도 하지만, 이들은 애초 기획부터 내셔널시네마 범주에서 미끄러져 비본질적이며 경계가 없고, ‘경계 없음’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위장 합작이라는 명명으로 단정하기 보다는, 당시 영화 제작 환경과 영화 시장을 둘러싼 생동하는 문화 경제 및 다층적인 문화 협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강범구는 문화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영역이나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인 문화 규제 및 정책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전쟁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신의 영화 인생에 있어 ‘풀지 못한 숙제’로 품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반공이 국시’인 시대에 활동하면서 남북관계에 관한 성찰적인 영화 창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차 그는 이북으로 교류하며, 여전히 영화를 통해 폭넓은 시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아무쪼록 그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1) 이영일,「특집 한국영화 1963년」,《국제영화》 1964년 1·2월호, 63쪽. 2) 『 1970 영화연예연감 』 , 국제영화사, 1969, 434쪽. 3) 〔신영화〕 묘사 착실한 멜로드라마/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 《한국일보》, 1957년 9월 21일; “[단평] <유전의 애수>”, 《경향신문》, 1956년 7월 30일; “[신영화] 모방(模倣)에서 獨創(독창)으로/ <잃어버린 청춘>”, 《조선일보》, 1957년 9월 21일; “[신영화] <잃어버린 청춘> 수준에 이른 작품”, 《서울신문》, 1957년 9월 22일 참고. 4) “[신영화] <유전의 애수>, 한성영화사에서 제작 완료”, 《조선일보》, 1956년 6월 13일. 5) “1천만환의 오픈·센 본격화하는 제작태도”, 《경향신문》, 1960년 11월 14일 4면 참고. 6) “재재정비된 영화사순력(巡歷) ① 한국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 , 《영화세계》, 1962년 11월호, 92쪽. 7) 《영화세계》, 1962년 8월호, 45쪽; “[새 영화] 처음 시도된 본격 추리극 /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 1962년 6월 7일 4면; “[새영화] 본격적인 추리극의 시금석 / 강범구 감독 <검은 꽃잎이 질 때>”, 《서울신문》,1962년 6월 6일 4면; “본격적인 스릴러물 기획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1962년 3월 30일 4면 참고. 8) “[방울새] 때 아닌 기동대/ 영화촬영에 총동원”, 《경향신문》, 1962년 4월 29일 4면; “[스타디오 소식] <검은 꽃잎이 질 때>/ 경찰기동대도 등장/ 백주의 추격전“, 《동아일보》, 1962년 4월 29일 4면 참고. 9) 魯稚子(LU CHIH-TSE), 『世界電影欣賞 APPRECIATION OF THE WORLD FILMS』, BOOK WORLD CO., 1967, 61~62쪽. 10) 이영일, 앞의 글, 1964년. 11) 박진호,「강범구」,『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009, 한국영상자료원, 198쪽.
“어쩌면 세상은 자기가 바라는 남자는 멀어져만 가고 대수롭게 생각 않는 남자는 눈앞에 귀찮게 서성거릴까. 여자는 자기 배우자를 찾는 거로 인생이 정해진다. 정해진 남자에게 육체를 제공하고 동화돼서 그 사람의 자손을 이어주는 일로, 여자의 전부가 끝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에게 남자의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가. 또는 그런 긴 안목이 구비되어 있단 말인가. 어느 시대건 여자는 장님처럼 눈을 못 보고 남자를 골라 왔다.” 젊은 여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기로는 남자를 고를 때만은 아니었다. 직업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권유받는 일자리는 다방 레지. 막무가내로 선물을 안겨주고 그녀를 호텔로 끌고 가려는 남자에게 “싫어, 싫어, 나 안 갈래, 싫단 말이야” 라고 분명하게 거절해도, “내 육체를 들뜨게 했으면 가라앉혀줘야지, 이 도둑년아”라는 말과 함께 따귀를 맞는다. 이후 이어지는 강간 장면에서 그녀의 몸을 손에 넣고자 하는 남자들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기차에 앉아 고통뿐인 과거를 회상하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왜 여수로 향하는가.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거의 플래시백뿐인 이 영화에서, 여러 시간대의 과거를 액자처럼 늘어놓는 기억의 주체는 숙영( 김지미 )으로 보인다. 그녀가 열차에 타 과거를 회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내레이션 역시 그녀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숙영이 알 도리가 없는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긴 플래시백으로 거의 영화 본편이라 해도 좋을 3년 전 상황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숙영이 기다리는 사람과의 사연이 거기 있으며, 그녀가 살고자 하는 현재의 선체험과도 같은 시간여서다. 3년 전, 숙영은 다른 여성( 박정자 )과 함께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가고 있다. 옆자리의 여성은 숙영에게 사탕을 먹이고 그녀는 그것을 무력하게 받아먹는다. 맞은편 자리에는 훈( 이정길 )이 타고 있는데 그는 숙영에게 수작을 부린다. 숙영과 그 옆 여성의 관계는 곧 밝혀지는데, 옆자리의 여성이 훈을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은 교도관이며, 숙영은 죄수라는 것이다. 교도관이 훈을 설득하기를, 숙영이 자꾸 자살하고자 하니 내일 교도소로 돌아갈 때까지 “남은 시간 내에 여자는 남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이 말은 숙영이 없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왜 훈이 숙영에게 애초에 접근했는지를 숙영이 추측한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런 장면은 또 있다. 여수에 가서 그녀는 묘비도 없는 무덤에서 울부짖고, 그런 그녀에게 훈이 다시 접근해 다짜고짜 혼인을 올리자고 한다. 그러고는 남은 시간 동안 관광이라도 하자며 저녁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데 여기서 숙영이 알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더 등장한다. 훈은 친구를 만나 빌려준 돈을 돌려받고자 한다. 그의 친구는 택시 강도로 그 빚을 갚으려 하고, 훈이 기겁하자 자살해버린다. 칼에 찔린 택시기사도 도망친 상황, 약속시간으로부터 5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훈은 이전의 여유 많고 껄렁하던 태도와 달리 뭔가에 쫓기고 좌절한 모습이다. 왜 훈의 태도가 바뀌었는지, 숙영이 그 공백을 채워 넣고 있다. 숙영은 본 적 없으나 이 긴 플래시백에 등장하는 장면 마지막은, 결국 세 사람이 다시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 있다. 교도관은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비우는데, 그때 세 남자가 숙영을 따라붙는다. 자신들은 형사이며 훈을 잡으러 왔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서 교도관은 그들을 설득한다. 서울에 갈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이 설득하는 내용은 이후 교도관의 말을 듣고 숙영이 상상한 것에 가깝다. 본 적 없는 이 세 장면은 결국 그녀가 끊임없이 시도하던 자살을 포기하고 삶의 의지를 갖기까지, 타인들의 선의를 상상해낸 것들이다. 그녀의 수난이 다른 남성들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녀의 남은 삶 역시 다른 남성의 희생(훈이 붙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숙영의 교도소 앞까지 동행한)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그의 희생을 알고 나서야 숙영은 그를 “여보”라고 부르며, 사기당해도 매 맞고 그래도 믿음을 다시 가져보겠다며 “여보, 당신 이름 뭐야. 이름 말이야. 내 이름은 효순이, 효순이란 말이야.”라고 울부짖는다. 매년 그 날짜 여수의 그 벤치에서 기다릴 테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교도소 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절박한 마지막 만남 이후 훈은 사복형사들에게 끌려가는데 정작 그는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해버리겠어.”라며 반항한다. 훈 앞에서 자살한 친구가 “넌 감상적인 것이 실수야”라고 그를 비난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플래시백이 전부 마무리되면 영화의 첫 대목, 특징 없는 한 남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숙영을 서울역에 데려다주는 부분에서 이어지는 현재 그녀의 삶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숙영은 이제 새 출발을 하려 한다. 첫 대목에 잠시 등장한 남자는 이제 그녀가 신뢰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이 기나긴 플래시백은 마지막으로 훈을 기다려보기 위해 여수로 향하는 그녀가 떠올리는 마지막 작별 의식이었다. 자살을 몇 번이고 기도한 그녀가 살아보기로 마음먹기까지, 훈이 그녀에게 직접 보여준 행동은 사려 깊다기 보다는 그간 그녀를 착취해 온 다른 남성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앙탈을 부리는 건 봐줄 수 있지만 남자를 조롱하는 것은 못 참아!” 성관계가 강간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성욕과 고통을 구분하기 어려운 그녀의 세계에서, 그녀가 훈을 믿는 결정적 이유는 교도소 입소의 마지막 순간에 교도관이 하는 설득(그 젊은 남자가 이제 사형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과 숙영이 직접 기억의 빈틈을 상상으로 채워 넣은 훈과 관련된 사연이다. 숙영은 이제 자신의 서사를 완성한다. 플래시백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녀는 여수에 왜 갔을까. 재회하기 위해 갔을까, 완전히 이별하기 위해 갔을까. <육체의 약속>은 후자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숙영을 품평하고 학대하는 남성들의 언어가 전시되는 방식은 조롱에 가깝다. 그들의 권력은 이제 그 플래시백 안에 봉인되었으며, 이제 그녀는 그 시간에 이별을 고한다.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은 이만희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만추>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육체의 약속>은 <만추>가 (실물 없이) 상징적으로 갖고 있는 오리지널의 위치를 영화라는 육체로 대신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와 비교해보면 인물과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스산한 풍경으로 애나(탕웨이)의 내면을 외부에 전시하며 많은 부분을 상상에 맡기는 김태용의 <만추>와 달리,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흔히 <만추>와 그 리메이크 영화들의 여자 주인공을 설명할 때 ‘남성 혐오에 빠진’이라는 설명이 이어지곤 하는데, 김기영 감독은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의 과정을 전부 펼쳐 보인다. 쥐어뜯듯 선물의 포장을 벗겨내고 한번 가지고 놀면 흥미를 잃는 아이처럼, 남자들은 그녀를 갖고 버린다. 그녀는 그렇게 여러 남자에게 이용당했고, 낙태도 여러 번 경험한 듯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가게 되었고, 죄인의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교도관은 그녀의 입에 계속 사탕을 물린다. 입에 넣어주는 사탕을 수동적으로 받아먹던 퇴행적인 모습의 숙영이 마지막 순간, 훈의 희생을 알고 나서 스스로 사탕을 뱉는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사탕을 뱉으라는 말을 해 준 이가 훈이었음을 떠올려보라. 그녀가 플래시백을 통해 회고하고자 하는 기억은 적나라한 수난사와 훈이 개입된 구원의 순간뿐이다. 그녀가 교도소에 가게 된 살인 장면은 아예 플래시백에 등장하지 않는다. 일인칭 시점의 역사인 플래시백이 갖는 자기 기만성을 잘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만추>와의 연관성 외에도 1970~80년대에 많이 만들어진 호스티스 영화의 계보에서 <육체의 약속>을 살펴보는 일도 가능하다. 그래서 <육체의 약속>의 숙영은 김지미가 그 전에 맡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남자 때문에 팔자를 망친, 하지만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여성의 전형으로 그려지는 숙영은 남자를 죽이고서야 남자가 없는 곳(여자 교도소)으로 갈 수 있었지만, 결국 남자가 그녀를 살게 한다. 그런 이야기를 숙영은 플래시백을 통해 완성해낸다.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닌, 이별하는 이야기. <육체의 약속>의 흥미로운 점이다.
김기영 감독이 유일하게 타인의 영화를 리메이크한 < 육체의 약속 >(1975)은 이만희 의 < 만추 >(1966)를 원작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는 두 영화를 나란히 놓고 생각할 기회를 얻지 못한다. <만추>에 대해 구전되거나 활자로 남아 있는 증언, 듬성듬성 모인 자료집, 김지헌 의 시나리오를 성실하게 꿰맞추어도 온전한 ‘영화’로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육체의 약속>은 <만추>를 원전으로 삼은 네 편의 영화 중에서 가장 이질적인 태도로 한시적인 상황과 속박된 두 육체가 부여잡은 정념을 해체한다. 살인죄로 수감된 여성, 그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 짧은 여정에 불쑥 끼어든 남성과의 만남과 헤어짐은 김기영의 말처럼 ‘원작의 30%만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제한적인 상황으로 인해 더욱 애틋할 수밖에 없는 감정의 변화나 욕망과 약속 사이에 남겨진 스산한 정조와 무관하게 여성을 해부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영은 왕성하게 욕망하고 발산하기에 급급한 남성의 육체와 그들의 뻔뻔한 요구(자손번식과 양육)로 인해 피폐해진 여성의 수난기를 심판대에 올려놓는다. 기차 안에서 간수( 박정자 )와 젊은 남성( 이정길 )은 피해망상 혹은 남성혐오증에 걸린 여성( 김지미 )에게 인간성을 회복시킬 방안에 대해 논쟁한다. 또 간수는 죄인에게 베풀어져야 할 휴머니즘을 실행하기 위해 형사들을 설득한다. 즉 여수를 향해 달리는 기차 안은 굳게 입을 닫은 살인자와 그녀를 옹호하고 보호하는 간수의 말이 공존하고, 법을 어긴 자에 대한 막연한 증오가 끼어든다. 죄에 대한 형벌로서의 사형에 대한 의견이 충돌하고, 살인과 강도라는 범죄 행위에 대한 냉소가 흐르며, 자살보다는 삶을 택해야 한다는 회유가 넘나드는 말의 싸움터가 된다.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는 형사와 간수라는 법의 수호자/집행자가 선의를 베풀고 죄인들(젊은 남자 또한 죄인이 되었다)을 교화시킴으로써 세상이 아직까지 믿을만하며, 죽음보다 삶이 더 낫다고 믿도록 만드는 담합의 현장이 된다. 기껏해야 죽음을 유예시킬 뿐이지만 그들은 죄인에게 관대함을 베풀어주고, 그들이 살아갈 명분을 제공하기 위해 약속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 모든 사건의 중심인물인 여자는 무력하게 창밖을 응시하거나 간수가 입에 넣어주는 분홍 사탕을 받아먹을 뿐, 어떠한 항변도 하지 않는다. 간수는 어머니/변호인처럼 그녀를 외부로부터 보호함과 동시에 자신의 법으로 길들이고, 그녀는 양순한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게 망각의 도구로 제공되는 사탕을 오물거린다. 김기영은 왜 주인공을 이토록 무력하게 남겨두었을까. 그녀를 무화시키기로 작정한 것처럼 표정과 목소리마저 빼앗은 것일까. 김기영은 듬성듬성하고 불균질하지만 단호한 태도로 주인공의 몰락을 따라가다가 최후의 순간이 되어서야 그녀를 삶의 영역으로 돌려보낸다. 감독은 그녀의 삶을 매혹적인 육체로 인한 고난과 약속으로 인한 구원으로 축약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가 육체를 드러내는 방식과 약속을 보여주는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김기영은 뻣뻣한 얼굴과 무력한 육신의 표면에 머무름으로써 오히려 그녀를 살거나 죽게 만들 약속의 힘을 상기시킨다. 목소리-말의 내용, 표정-감정은 빈약하고 메마르지만, 약속은 의지를 들끓게 만들 위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교도소에 이르러서야 뚫고 나온 그녀의 간절한 표정과 거친 절규에 우리는 압도당한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더 나아가 그녀에게 주어진 현재의 삶으로 그녀를 돌려보낸다. 김기영은 강력한 영화적 표현을 과감하게 마감시키고 김지미라는 배우의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한기를 포기한다. 대신 마지막 쇼트를 통해 불멸의 삶, 약속으로 인해 가능한 삶을 붙박아둔다.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첫 쇼트는 한 테이크로 촬영되었고 누군가의 시선을 따라 펼쳐진다. 증기를 뿜어내는 기차에서 시작한 눈의 운동은 줄지어선 기차들, 복잡하게 얽힌 선로, 빈 플랫폼, 역사 너머로 보이는 도시, 높낮이가 다른 빌딩들과 막 지어지고 있는 대우 빌딩의 철근 구조물에서 멈춘다. 이어지는 쇼트는 택시에서 내리는 가족의 모습인데 주인공은 멀뚱하게 서 있는 남편과 매달리는 아이를 떼어놓고 역으로 향한다. 이 두 쇼트는 영화의 마지막 쇼트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여성의 고난-반항-억압-순응-죄-감시-교화-망각-삶에 대한 각성을 포착한다. 첫 쇼트에 등장한 시선의 주체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그녀의 삶을 관찰하는 감독이다. 마지막 신에서도 동일한 태도로 공간을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시선에 그녀는 포착되지 않는다. 주인공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역이라는 장소가 그녀의 삶을 지탱하고 있음을, 죽음에 사로잡혔던 그녀가 살아있기에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가 가능함을 각인시킨다. 그녀가 기차에 오른 후부터 액자구조로 플래시백이 시작된다. 서사는 현재(기차를 타고 떠난다)-대과거(그녀의 수난사)-과거(여수로 가는 기차 안에서 만난 남성과 동행한 간수와의 사건)-다시 현재(서울로 돌아온다)로 복귀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다. 그녀가 1인칭 내레이션을 통해 반추한 삶에 따르면 그녀의 육체가 소진되고 착취되는 과정은 대과거에 머물러 있고, 과거와 현재는 그녀가 한 약속(과거와 현재)이나 그녀에게 한 약속(과거)을 따라 구성된다. 흥미로운 것은 ‘서울역-도심 한복판-모든 기차의 출발지와 도착지’라는 물리적인 실체가 ‘여수-어머니 무덤-약속이 맺어진 장소’라는 관념보다 더 중요하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지독히 특징 없는’ 남자와 그의 딸에게 하루의 시간을 약속하고 여수로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나타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약속이기 때문에’ 그곳에 가야만 하고, 무용함을 알면서도 기다려야 한다. 삼 년 째 반복되는 여정의 시작과 끝 모두 덧없는 약속에 포위되었으며, 발버둥을 치며 살아가고 온 힘을 다해 기다린들 그는 나타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 사실을 기어이 확인하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여자는 다시 떠나기 위해 서울역으로 돌아와야만 한다. 남자가 시계를 채워주면서 한 약속(“6시까지 돌아오면 약혼과 결혼, 임신을 한꺼번에 해버리자”)과 간수가 자살로부터 그녀를 구해내기 위해 제안했을 법한 여수로의 여정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것은 그녀가 스스로 부여한 삶과의 약속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삶을 지탱해나가는 순수한 목적으로서의 약속은 숭고하며, 골몰하던 죽음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택한 순응과 망각마저 발악하듯 벗어던진 삶의 의지도 존엄하다. 또 무수한 ‘개새끼들’로부터 벗어나 ‘선택의 자유’를 행한 그녀가 과거의 것들과 결별하는 방식이기에 감동적이다. 영화의 마지막은 현재에 충실한 그녀, 그렇기 때문에 해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떠나 새벽에 도착하는 그녀, 순수하지만 무용하고, 의미로 풍요로워지기보다 약속을 지킨다는 행위에 온전히 바쳐진 시간만을 탐닉한 그녀, 그리하여 자신과 약속을 응시하는 그녀의 현재만이 반복되는 곳에서 멈춘다. 마지막 신은 철로로 들어오는 기차, 기차들이 서 있는 선로에서 줌아웃하면 서울역과 대우빌딩이 보이는 두 쇼트로 구성된다. 도입부에서 김기영의 카메라는 인물보다 먼저 역에 도착해 있고 기차와 어지럽게 얽힌 선로, 도시를 바라보았다. 이 시선에 담긴 것은 오로지 기차들과 빌딩들이고 사람의 흔적은 대우 빌딩 건설현장 멀리 보이는 노동자 두어 사람뿐이다. 기차를 탈 사람과 그가 지닌 사연보다 기차가 향하거나 멈추는 곳, 출발을 기다리는 기차의 행렬, 곧거나 휘어진 선로들의 얽힘, 배웅하거나 마중하는 사람들이 없는 플랫폼의 스산한 공기, 역을 빠져나가자마자 만나게 되는 도시의 빌딩들이 주인공 같다. 마지막 쇼트를 바라보는 카메라도 주인공을 마중하기보다 서울역 건너편의 건물을 오래도록 바라볼 뿐이다. 떠남의 끝과 돌아옴의 끝을 모두 도시의 빌딩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육체의 약속>의 시작부터 끝까지 완강하게 지켜온 김기영의 기이한 결단, 타협하지 않는 그의 시선처럼 보인다. 또 가로막힌 담벼락과 철문을 향해 온몸을 던진 그녀의 외침, 피폐한 삶을 뚫고 나온 ‘기다린다’는 그녀의 약속을 완결 짓는 김기영의 제스처 같다. 그는 주인공의 육체로 인한 고난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기억하고, 찾아가서, 기다린다는 행위가 그녀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는다. 삶이 있기에 약속이 행해지고, 약속 때문에 시간을 부여잡고 살아야 한다는 다짐이 갱신되는 곳은 역사가 아니라 도시 어딘가 여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