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 감독
- 윤단비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최정운, 양흥주, 박현영, 박승준, 김상동, 이현서, 김인철, 정태성, 장근영, 강석원, 신희철, 김진구, 김사훈, 채완민, 김정란, 박재현, 박철응, 박향나, 오현식, 황옥영, 김나경, 정해성, 송아영, 김동하, 박경민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은 이젠 거의 멸종위기라고 전해지는 ‘시네필’의 영화다. 시네필은 영화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 장소, 인물, 움직임, 빛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영화적 이미지와 조우하면 흘러가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절박한 몸짓으로 반복적으로 관람하는 물신주의자다. 실제로 영화를 재생해볼 뿐만 아니라 기억에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를 꺼내 가상적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시네필의 반복강박을 야기하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파편적이고 비인과적이며 그래서 자주 서사와는 상관없이 떠오른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그의 저서 『1초에/24번의 죽음』에서 이러한 시네필을 ‘소유적 관객(possessive spectator)’이라 칭한다. 필름 시대를 지나 디지털 환경에서도 시네필은 돌려보고, 뜯어보고, 반복해 보는 매체의 특징을 맘껏 누리며 “텍스트 본래의 응집력을 공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리는 즐거운 회상을”(35) 가져오고 그 과정에서 사색의 여지를 마련한다. <남매의 여름밤> 역시 인과적이고 극적인 서사보다는 여름밤의 빛과 공기, 냄새와 소리를 감각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아빠(양흥주)는 살던 집을 빼고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 남매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 양옥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이어 부부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고모가 이들에 합류한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그렇게 여름 한 계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은 캐릭터에 대한 서사적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아빠와 고모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부부 갈등이 무엇인지, 왜 옥주는 엄마를 미워하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옥주는 남자친구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의 사연은 극도로 절제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감각적이고 중첩적인 감각과 단편적 기억의 환기를 통한 다중적 시간성이다. 관객들은 여러 겹으로 이뤄진 감각과 시간의 미장아빔(mise en abym)에 포획된다. 그러면서 감각과 시간은 공간화 되고 관객은 남매와 함께 ‘영화-집’에 머물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빛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빛이 된다. 한낮의 뜨거운 빛은 끈적이는 장판에서 맨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되고,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밤공기는 오래된 이층 양옥집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냄새가 되며, 환하게 열어젖힌 창으로 흘러나오는 저녁밥 냄새는 안팎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섞이고, 마당의 풀벌레 소리는 어두운 밤 잠 못 드는 할아버지가 켜놓은 낡은 전축 스위치의 초록색 전구불빛이 되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 소리는 할아버지의 삶과 그 삶이 가꾸고 거주해온 집이 된다. 그리고 커다란 마루 창문 덕택에 안이 훤히 다 보이는 집, 시시각각 다르게 빛이 들어오며 변신하는 집은 그 자체로 네모난 프레임의 영화가 된다. 그 ‘영화-집’에서 옥주와 동주 남매가 보낸 여름방학은 아빠와 고모의 지난 추억과 중첩되고, 그 시간이 옥주와 동주 남매가 성장해서 기억하게 될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암시로 이어진다. 심지어 아빠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장난(방학인데도 학교 갈 시간이라고 깨우기)을 동주에게 반복하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오는 길에 옥주 남매가 자신이 병이 들면 동일하게 처리할까봐 걱정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 꾸었다던 고모의 꿈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만난 옥주의 꿈으로 반복되며 옥주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연극처럼 상연된다. 시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각인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삶의 시간을 담담히 관조한다. 하지만 시간의 반복을 통달하고 희미한 회한만 남은 노년의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즈의 영화와 달리, <남매의 여름밤>에는 그 시간의 초입에서 허우적대는 생경함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한다. 그 시간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주체가 사춘기 소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흔한 짝패인 장난기 많고 철없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아닌,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한다. 이제 막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 옥주와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삶의 주기에서 가장 사색적인 시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옥주는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시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센 옥주는 자기 영역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기장으로 자기 영역을 확실히 주장하는 만큼,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락받았는지 아빠한테 반복해 확인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아빠와 고모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처리해버리려는 것에 반발한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이 있고 도움을 주고 싶지만 독립된 개체로서의 그의 삶에 무례하게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옥주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깃들여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 그 집을 포함해 맨들맨들해진 재봉틀, 오래된 사진첩과 담금주, 사용하기 편하게 나무에 묶어둔 정원용 가위와 물뿌리개, 방울토마토와 포도나무, 낡은 액자와 전축은 그와 함께 나이 들어 온 것이다. 아빠와 고모는 나이가 많고 병든 할아버지의 시간을 앞서 계산한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계산하는 순간, 그의 현재는 덤이 된다. 하지만 옥주는 다르다. 현재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소중하듯이, 할아버지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어색하고 낯설지만 잘 해드리고 싶은 옥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일선물을 준비한다. 옥주는 할아버지가 생일선물인 모자를 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옥주의 태도는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나와 홀로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미련>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특별한 순간을 만든다. 노래 소리를 듣고 이층에서 내려온 옥주는 거의 말이 없고 가족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순수한 즐거움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여행을 하며 노래를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옥주는 더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 이층 계단으로 올라와 앉는다. 옥주는 그 노래를 함께 듣지만 그의 시간과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맥주 한 병을 탁자에 놓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그야말로 시네필적인 태도다. 앞뒤의 시간(서사적 맥락)을 계산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하기,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면서도 자기만의 이미지를 소유하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 없는 시간을 만들기. 그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게 <미련>의 노래 소리는 전축에 켜진 작은 초록색 전구불빛과 전기 연장선 스위치의 주홍색 불빛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도 그 장면을 보지만, 그 불빛들도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여름밤의 공기를 전한다. 옥주가 자기 공간을 고집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고모와 동주에게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고 할아버지의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소유적이면서도 공유적인 체험을 사색하게 한다. 낯선 거리를 두고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관이 새삼 그리워진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작년 한 해는 뭐 하는 한 해였는지 모르겠다. 코로나19 판데믹 때문에 영화업계는 불안과 침체가 주였던 것 같은데 그나마 이래저래 만난 한국 영화들이 2020년을 관통하는 한 줄기 빛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1월 말, 2월 초 참가했던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는 윤단비 감독의 < 남매의 여름밤 >이 밝은 미래 부문 상을 탄 것, 같은 곳에서 다른 한국 영화들의 활약과 함께 작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이 흑백 버전 월드 프리미어와 마스터클래스를 엄청난 열기 속에 마친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 곧이어 2월 초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전례 없이 비영어권 영화로 <기생충>이 최고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 상을 휩쓴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였다. 세계인이 감탄한 가운데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LA 현지 시각 2월 9일) 끝나고 이틀인가 사흘 후, 연상호 감독과 < 반도 > 단독 인터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는 투자배급사의 밀폐된 유리 상자 같은 회의실 안에서는 마크스를 벗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옮겨진 일상에 오늘도 Zoom 화상 인터뷰가 잡혀있다.) 어쨌든 한국 안팎으로 2016년작 < 부산행 >이 이례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에 이어 그 후속작인 <반도> 역시 칸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후 여름 성수기 텐트폴 개봉의 수순을 밟을 것에 국제적인 기대가 이미 모아졌던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2020년은 정말 신나는 한 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11월 말, 12월 초 시점에서는 이게 다 올해 얘기 맞나 팩트 체크를 해야 할 정도로 다른 세상의 먼 과거 얘기가 돼버린 것 같다.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 이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19)’라는 말이나 ‘판데믹이 영화업계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한 얘기가 빠지는 기사는 거의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극장 관객 수는 폭락했고 영화사들은 극장 개봉을 미루거나 OTT로 직행했고, 칸 영화제도 취소한다 만다 한참 끌다가 결국 6월에서야 선정작 발표만 하고 물리적 영화제 자체는 취소하는 형태가 됐고, 앞으로 영화 제작과 상영은 잘해나갈 수 있을까 계속 불안하고 우울한 2020년이 돼버렸다. (그래도 일찍부터 세계 여름 동시기 개봉을 준비했던 <반도>는 그나마 코로나19 방역 조치를 잘 취한 한국 외 아시아 몇 개국 중심으로 개봉을 과감히 실행하면서 얼어 있었던 극장가를 어느 정도 녹여주었다. 칸 영화제는 열리지 않았지만 공식 선정작 목록에 오른 <반도>는 그것과 별 상관 없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례적인 흥행기록을 또 세웠고, 국제 영화업계는 그 행보에 주목했다.) 그리고 수개월 간 개막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부산 국제영화제는 조심스럽게 사회적 거리두기 및 방역 조치를 강화한 상태의 축소된 행사를 10월에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스크린 인터내셔널>에서는 영화제에 선정된 떠오르는 한국 영화 신인들 몇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됐고, 덕분에 신선한 장편 데뷔작들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그 중 뉴 커런츠 부문에 선정된 이란희 감독의 < 휴가 >가 기억에 가장 남는 영화 중의 한 편이다. 보통 취재를 위한 스크리너 링크를 받으면 당장 관람하지 못한다. 다른 일이 좀 없는 늦은 밤이나 주말에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때 가서 링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경우, 보내준 이에게 연락하기 곤란한 타이밍이다. 그래서 이메일로 받으면 “잘 받았습니다” 답신을 하기 전에 먼저 스크리너를 잠깐씩 틀어본다. 앞부분 크레딧과 첫 장면 몇 초가 잘 나오나 보고, 무작위로 중간쯤 계속 문제없이 나오나 한두 군데 정도를 틀어본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2-5초씩만 틀어본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맨 끝은 피한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번 부산 영화제 기대작으로 받은 스크리너들은 거의 다 불과 그 몇 초 안에 ‘아, 이 영화 좋을 것 같다’ 싶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다 보고 났더니 실제로 이 불안하고 침체된 시기에 영화에 대한 희망을 주는 작품들이 맞았다. 신기해서 주로 취재 기자로 일하는 나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보고 평가하는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와 평론가 친구들에게 SNS상으로 물었다. 어떻게 몇 초 안에 영화가 좋다는 게 티가 나지? 무슨 연출력의 힘이나 미쟝센의 요소들이 결합하면 총 5초 내에 느낌이 오게 할 수 있을까? 쟁쟁한 영화제 프로그래머들도 제대로 답을 못 해준 건지 안 해준 건지 그저 좋은 영화를 봤다니 기뻐해 주고, 기껏 해 봤자 ‘많이 보다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정도였다. 주인공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3초 동안 나오는데 ‘뭐 하나 동행해 보고 싶다’,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배경과 소리가 나오는 장면을 2초 동안 보는데 ‘저 안에서 호흡해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무슨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그런 느낌을 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휴가>도 분명히 그런 영화 중 하나다. <휴가>는 중년의 해고 노동자 재복이 동료들과 함께 1,882일째 농성하는 날 해고 무효 소송에서 최종 패소하고, 일단 장기 농성을 하던 차가운 노상의 텐트를 떠나 며칠간 재충전의 시간, 남들처럼 ‘휴가’를 가자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엉망이 된 집에 들어간 재복은 밀린 청소와 정리를 시작하는데 딸들은 너무 오랫동안 가정을 비웠던 아빠가 반갑지 않다. 농성장에서 식사 담당인 재복은 집에서도 따뜻한 밥을 차리지만 애들은 외면하고 늘 먹었던 듯한 라면을 알아서 해 먹는다. 고3인 큰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합격한 대학에 낼 예치금이 필요하고, 작은딸은 롱 패딩 코트를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재복은 얼마 없는 휴가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친구가 관리자로 있는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전에 단편 영화 < 파마 >, < 천막 > 등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외 다수 영화제에서 기대주로 떠올랐던 이란희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감독은 2012년 실제로 어떤 기타 공장 해고 노동자 밴드 공연을 보고 그 멤버들에 관한 시나리오를 쓸 생각으로 취재하다가 결국 단편 영화를 몇 편 찍게 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장기 농성자들 중에 12년간 투쟁한 사람이 농성장을 중간에 떠났다가 몇 번이나 돌아온 것을 보면서 궁금해하다가 어떤 일을 하다가 왜 돌아왔는지 이해하려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할 일이 있고 ‘일정이 있어서’ 그랬다고 한다. 이렇듯 재복도 가깝게는 함께 지낸 공장 동료들과 멀게는 더 큰 노조 조직들과의 연대 의식과 책임감으로 농성에 성실히 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재복은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 억울한 일, 어려운 일을 당한다 생각하면 없는 처지에도 발 벗고 나서서 도우려 한다. 말주변이 없는 듯하면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소신을 갖고 말할 때는 사람들이 당황해하면서도 설득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봉하 배우는 성실한 곰 같으면서도 섬세한 면을 드러내는 재복을 연기하는데 가슴을 천천히 미어지게 한다. 이 영화 전체가 그런 것 같다. 덤덤하게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을 따라다니는데 섬세한 순간순간과 사건들이 모여서 조용히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게 있다. 스포일러를 쓰지 않고 이란희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칭찬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쨌든 시나리오를 받쳐준 노신웅 촬영감독과 한동훈 동시녹음 기사와 이연정 편집자의 역할도 꼽을 만할 것 같다. 분명 처음에 2~5초씩 스크리너를 돌렸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한 그 모습들이나 소리들도 감독의 연출 아래 그들의 공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 큰딸 현희를 연기한 김정연 배우, 작은딸 현빈을 연기한 이승주 배우, 그리고 작업장의 젊은 동료 준영을 연기한 김아석 배우를 보면서 계속해서 한국 영화의 자라나는 연기자 풀이 메마르지 않음에 희망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영화는 10회차, 2월 18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촬영했다고 한다. (‘코로나19는 저희가 촬영을 마치자마자 한국이 난리 났었다’는 감독의 기억이 있다.) 주로 인천에서 촬영했는데, 한 회차는 서울 강남역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농성장에서 찍었다고 한다. 노조를 만들려다가 해고돼 복직을 위해 355일 동안 고공농성한 김용희씨가 아직 철탑 위에 있을 때의 농성장인데, 그 로케이션이 영화 속에 제대로 활용된다. 감독은 '노동 이슈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고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나도 평생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것 같다. 허투루 살지 않고, 최대한 성실하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도리를 지키며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을 보살피려는 재복도 그런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양극화로 ‘좋은 인성까지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안에서 세습되고 있는 생각이 들더라’ 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도 하지만, 어쨌든 제도가 바뀌든 안 바뀌든 살아야 하니까 그럼 우리는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뭘 가지고 여유가 있어서 나오는 에티켓 같은 것이 아니라 힘든 와중에도 이 일은 하는 내가 사람이니까 잘하려고 하는 고민’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도 재복은 누가 보든 말든 착실하게 정성껏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농성하느라 묵혔던 기술과 경력을 살려 가구 만드는 아르바이트에 임할 때 나름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들처럼 휴가 때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아픈 등에 파스를 붙여가면서 노동하는 것인데도 나름 품위가 있어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대충 감이 왔겠지만 <휴가>는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가 아니다. 저예산 독립 영화다. 인천영상위원회, 한국영상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전주영화제작소 등 여러 단체의 기획개발, 제작, 후반 작업 등 각 단계별 지원뿐만 아니라, 밥을 날라다 주고 장소를 빌려준 지역 주민들의 성원 등 여로모로 지원이 들어간 작품이다. 영화업계 역시 양극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휴가>와 같은 독립영화들도 품위 있게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족한 글을 몇 자 적어봤다. 가장 인간적인 작은 단위의 관찰과 동조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문제와 함께 좀 더 넓은 폭의 사회 문제도 곱씹어 볼 수 있게 하는 영화는 지원해줄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지역이나 국가의 단체로서든, 개인 극장 입장권을 예매하는 관람객으로서든, 밥을 날라다 주는 이웃으로서든 말이다.
90년대생 감독이 쓸쓸한 유년의 기억을 담아내는 방식 처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며 신기해 했다. 포스터엔 2층 양옥집에 가족들이 밥을 먹고 있는데, 집은 아주 크게, 사람들은 작게 배치돼있다. 영화를 보니 역시 주인공이 집이었다. 아름답고 넓은 마음으로 가족들을 받아 준 할아버지를 닮은 낡은 2층 양옥집. 고1 옥주는 아빠 병기( 양흥주 )와 남동생 동주(박승준)와 함께 철거되는 동네를 뒤로 하고 할아버지(김상동) 댁으로 거처를 옮긴다. 손주들의 인사에도 별 대답 없던 할아버지는 “애들 방학 동안만 지낼게요” 라는 아빠의 말에 처음으로 입을 연다. “좋을 대로 해.” 곧이어 이혼을 앞두고 있는 고모 미정(박현영)도 이 집에 들어 온다. 할아버지와 낡은 집, 두 쌍의 남매가 함께 하는 시간. 이 영화는 집의 시점에서 4명의 남매가 겪는 여름을 지긋이 바라보듯 담는다. 나이든 남매(병기와 미정)는 이혼이나 사업 실패 같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미정은 “날 괴롭히려고 태어난 요괴” 같은 남편을 떠나려 하고, 병기는 두 아이의 생계를 위해 가짜 브랜드 운동화를 팔며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 노력 중이다. 어린 남매(옥주와 동주)은 헤어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 부딪친다. 옥주는 첫사랑의 생채기도 안고 있다. < 남매의 여름밤 >은 각자의 폭풍 같은 시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힘든 일이 있어도 식구끼리 콩국수, 잡채, 비빔국수 같은 요리를 해 먹으며 덤덤히 살아내는 시간. 각자 삶의 다음 구절로 옮겨가는 여름의 시간. 이 영화의 영제는 <Moving on>이다. 이러한 ‘성장의 기억’이라 주제는 최근 약진하는 젊은 여성 감독 영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김보라 감독의 < 벌새 >, 윤가은 감독의 < 우리집 >,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까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훌쩍 커버린 한 시절을 영화에 박제한다. 이를 시대적 감수성 혹은 노스탤지어를 경유해 묘사하는 경향을 두고 송경원 평론가는 “이 기억들을 반영하는 형태에 구체성이 결여돼 있어 결과적으로 안전한 방식, 그러니까 추억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평했다. <남매의 여름밤>을 두고 파생된 여러 질문 중 나를 사로잡은 건 ‘기억과 추억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였다. 시공간의 구체성과 통찰의 메시지를 담은 건 기억이고, 구체성을 뭉개고 예쁜 필터를 넣어 보정한 건 추억인가? 그렇다면 추억은 아름답고 아스라한 미장센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혹은 에드워드 양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오즈 야스지로 같은 동아시아의 걸출한 영화 작가의 영향이 느껴지는 연출에서 오는 것인가? 물론 <남매의 여름밤>에선 위의 언급한 작가 감독들의 영향이 짙게 보인다. 인물의 클로즈업을 지양하고 인물의 움직임을 고요히 응시하는 촬영, 인물이 프레임을 나가도 당장 끊지 않은 편집 등등. 하지만 이 영화의 이런 연출은 그저 감독 개인이 좋아해온 고전영화를 흉내내거나, 그런 영화들을 그리워하는 감상으로 쓰인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대사나 연기 조율 같은 1차적인 연출 외의, 그 이상의 고전영화의 영화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인상을 준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 문법을 차용해 영화의 시선을 쉼없이 양옥집으로 돌려놓는다. 양옥집이 보고 있는 두 쌍의 남매를 관객도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중심은 ‘양옥집’이고 관객도 이 공간을 향유하길 바란다고, <남매의 여름밤>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양옥집의 존재감은 포스터에서 보이던 것만큼 대단하다. 윤 감독이 오랜 시간을 쏟아 인천에서 찾아냈다는 이 집은 원래 한 노부부가 살던 곳이다. 말하자면 너무도 현실적인 ‘남의 집’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그대로 썼다. 오래된 옥색 시계, 하회탈이 담긴 액자, 무심히 걸린 달마도까지. 현실에서 곧장 튀어나온 것 같은 이 곳은 극영화의 배경이라기엔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 영화가 실재와 재현 사이를 오가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에 있는 듯 느껴지는 이유다. 병기와 미정을 연기한 양흥주와 박현영의 놀랄 만큼 뛰어난 일상 연기도 여기에 힘을 보탠다.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가 가장 관심있는 지점이자, 궁극적으로 달려 가는 지점은 양옥집의 소멸과 집 주인인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이 나른한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가장 덜컥하게 하는 순간은 할아버지가 바지에 똥을 쌌을 때와 아빠와 고모가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신 후 집을 팔려고 할 때다. 어쩌면 이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정서는 잃어버린 것의 그리움이 아니라, 곧 잃어버릴 것에 대한 슬픔일 것이다. 그 슬픔이 <남매의 여름밤> 전체를 관통한다. 첫 장면, 옥주가 살던 반지하 집의 동네 자체가 철거되는 상황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좋아했던 것을 부단히 잃어버리고 또 다른 소중한 것을 만들면서 성장한다. 옥주는 이미 엄마와 반지하 집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생긴 소중한 것은 할아버지와 바로 이 집이다. 엄마와의 재회를 두고 옥주와 동주가 크게 다투던 순간,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2층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꺼이꺼이 우는 동주를 아무 말 없이 데리고 내려간다. 아이들이 겪는 상실의 상처를 조용하고 따뜻하게 보듬는 어른. 이 존재의 소중함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 관객은 그 역시 사라질 것임을 직감한다. 다시 양옥집 얘기로 돌아가보자. 자신의 정서적 기억을 영화에 풀어내려던 젊은 감독은 영화의 핵심 요소로 왜 ‘남의 집’을 선택했을까? 인천에 오래 살았던 한 노부부의 손때 묻은 이 집은 지금은 실재하지만, 멀지 않은 어느 시기에 곧 사라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영화의 상상력과 실재하는 공간이 만나 이뤄낸 새로운 파동. 정리하면 <남매의 여름밤>은 타인의 공간을 빌려와, 소중한 것들을 잃으며 자란 쓸쓸한 기억을, 고전 영화의 문법을 능숙하게 구사해 말한다. 솔직하고 자유롭고 대담한 선택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 세대에게 고전영화는 너무 소중히 여기며 승계할 게 아니라, 감독 개인이 좋아하고 친숙한 여러 영화 언어 중 하나인 듯 싶다. 이렇게 21세기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개인이 기억을 구체화하는 방식은 유연하고 자유로워 지고 있다. 이 흥미로운 변화의 흐름이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