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 감독
- 윤삼육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장동직, 이진우, 김수진, 장항선, 김학철, 윤소정, 남포동, 정경배, 이원희, 권철호, 김인수, 길다로, 봉두개, 송인혁, 박영진, 남상우, 김형근, 강경희, 이신, 김혜영
“한국영화의 얼굴들”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재개하게 됐다. 이 연재에선 한국영화에서 얼굴이 된 클로즈업(close-up) 쇼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려 한다. 클로즈업으로 프레이밍된 인간의 얼굴뿐 아니라 동물, 사물, 풍경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응시(gaze)를 돌려주며 기어이 얼굴이 되는 클로즈업까지 포괄하려 한다. 클로즈업은 영화사 초기부터 어떤 다른 영화 쇼트보다도 영화이론가들을 사로잡아 왔다. 특히 클로즈업은 이전의 시각매체가 보여준 적 없는 시점과 크기를 표현하면서 영화 고유의 매체성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평가되곤 했다. 영화학자 매리 앤 도앤은 이러한 매혹에 대해 클로즈업이 양가적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클로즈업은 근접성, 내밀함, 디테일, 부분, 정서, 인칭화된 시점, 닮음, 연속성, 인간화, 주체화, 의미작용의 집중화 공간이면서, 반대로 거대함, 외부성, 총체성, 디제시스로부터의 자율성, 비례에 맞지 않음, 노출, 탈인칭화된 응시, 낯선 기이함, 불연속성, 비인간화, 객체화, 의미화 할 수 없는 잔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아이콘으로서의 스타를 표현하는 주된 기법이자 높은 주목도 때문에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상품-물신이 될 수 있는 반면, 압도와 경외감을 일으키는 낯선 타자로서 탈약호화된 기호가 될 수도 있다. < 국가의 탄생 >(1915)의 미국감독 D.W. 그리피스와 < 전함 포템킨 >(1925)의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은 두 대립된 관점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그리피스는 친밀감과 정서적 집중을 활용해 멜로드라마적 순간과 영화스타를 창조했고, “롱 쇼트의 코끼리떼보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더 무섭게 보인다.”고 피력했던 에이젠쉬쩨인은 일상을 넘어선 낯선 충격으로 계급화된 현실을 깨닫고 혁명의 깃발을 들게 만들었다. 이 연재는 클로즈업의 양가성 중 어느 한쪽을 옹호하기 보다는 이 대립된 잠재성이 교차하면서 혼란과 붕괴를 야기하고 무너져 내린 파편더미들 속에서 영화적 응시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더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보다는 휴대가능한 스몰 스크린이 지배적인 상영 플랫폼으로 부상하면서 영화의 개념과 범주가 달라지는 가운데 위에 언급한 클로즈업의 잠재성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로 다룰 클로즈업은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 >(1991, 이하 <이태원 밤하늘>)의 마지막 쇼트로, 샤니라는 인물의 얼굴이다. <이태원 밤하늘>은 < 고교우량아 >(1977), < 깊은 밤 갑자기 >(1981), < 장군의 아들 >(1990) 등의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윤삼육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태원으로 오게 된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린다. 여기서 이태원은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받아주는 포용적 공간이자 미국이라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탈)식민적 공간이다. 미군에게 성판매를 하는 기지촌 클럽의 ‘양공주’, 클럽댄서로 일하는 트랜스젠더 여성들, 조직폭력배들, 미군과 ‘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가진 것 없지만 기성세대에 질린 젊은 청춘들이 그곳에 산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 마지막 순간에 도청을 탈출해 동두천 기지촌으로 숨어든 대학생이 민중의 삶을 지척에서 경험하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가 취했던 반제국주의 관점과 1980년대 상업영화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절묘하게 섞는다.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씬은 “미국 UPI 영화 직배저지투쟁에 앞장서온 모든 영화인에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당시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1988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허용되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10%대로 떨어지는 가운데 한국영화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투쟁이 영화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었다. ‘한국영화 위기’의 감각은 이 영화에서 민족-국가 및 이성애중심의 ‘정상’가족 위기와 남성성 재건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샤니가 있다. 다수의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클럽댄서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레즈비언으로서 애인 금자(임주연)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샤니는 마지막까지 영화의 주제를 운반하는 동시에 비트는 인물이다. <이태원 밤하늘>이 제작된 시기는 사회 진보운동이 통일, 계급, 민주화 운동에서 인권운동으로 확장되어가던 시기였다. 현실과 스크린 모두에서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은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민중 또는 시민으로 소환되기 시작한다. 일부 용어나 관점이 문제적이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제도적 문제들을 인권적 관점에서 조명했던 <PD수첩>의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들-‘게이’들의 삶」(1995.5.9.)이라는 에피소드가 방영되고, < 개 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는 가정폭력에 항의하며 옥상에 올라가게 된 여성들 중 트랜스젠더를 포함시켜 시스젠더(cisgender, 사회에서 지정받은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한다고 인지하는 사람) 중심의 여성범주를 해체했으며, <이태원 밤하늘>과 < 마스카라 >(이훈, 1994)는 트랜스젠더 여성 캐릭터에 각각 오윤희와 하지나라는 트랜스젠더 당사자 배우를 캐스팅했다. 샤니는 애인 금자의 만류에도 둘의 미래를 위해 미군을 상대로 성판매를 한다. 그러던 중 금자가 샤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오래전부터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호르몬치료를 받아온 샤니는 금자의 임신을 믿을 수 없다. 금자의 임신은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선배는 호르몬 치료에도 불구하고 간혹 “어떤 자극에 의해” “죽어있던 남성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 자극이 무엇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민족-국가의 미래가 있으려면 반드시 이성애 부부에 의한 생물학적 친자가 있어야 한다는 목적론적 암시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샤니가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달라는 금자의 청을 거절하자, 금자는 홀로 자신의 시골 고향집으로 떠난다. 결국 샤니는 고민 끝에 남장을 하고 금자를 만나러가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이 영화에는 샤니와 금자 외에도 아이가 있는 또 다른 대안 가족이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클럽의 다른 ‘양공주’ 여성들과 달리 젊은 커플인 유진(최진영)과 상희(전세영)는 동생을 학대하는 엄마와 청년들을 착취하는 조폭 두목 아버지 장포 모두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이 셋은 “대안을 찾아 떠나겠다”는 분명한 선언에도 친자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민족-국가를 맡길 수 있는 이상적 가족으로 선택되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샤니에게서 제국인 미국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의 미래 서사를 찾는다. 트랜스젠더인 샤니를 강제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재성전환 하는 혹은 드랙킹(drag king) 수행을 하게 만드는 과정은 ‘식민화되고 여성화되었던’ 민족-국가의 재건/재남성화로 은유화 된다. 이성애 부모와 친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로 맺어진 규범적 가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산부인과 의사의 증언처럼 죽은 줄 알았던 민족적 자존심인 ‘남성’이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샤니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분법적 대립과 위계화가 형성된다. ‘근대/도시/여성/비규범적 트랜스젠더 신체/동성애/(탈)식민화된 공간/오염/헤테로토피아’인 이태원과 ‘전근대/자연/남성/규범적 시스젠더 신체/이성애/주권적 민족-국가/순수/유토피아’인 고향으로 이원화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성장서사처럼 진행된다. 샤니는 심신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자르고, 깨진 거울을 응시하고, 양복을 입으며 남장을 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사각앵글로 이뤄진 짧은 쇼트들이 몽타주씬으로 구성되며 그야말로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엄청난 폭력과 고통을 가시화한다. 이것은 단순히 샤니에게 보존되어 있던 남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으로의 강제된 (재)성전환이자 강압적인 이성애로의 교정이다. 또한 거칠게 이어 붙어진 몽타주는 그 자체로 프랑켄슈타인의 몸처럼 남성성의 편집이 된다. 남성성이 편집된 자국과 인공성은 사라지지 않고 드랙킹 공연처럼 샤니 혹은 오윤희 배우의 신체의 표면에서 이질적으로 겉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몽타주씬 이후 쓸쓸하고 황폐해 보이는 이태원 낮의 거리를 걷던 중 샤니는 남자 행인에게 부딪혀 욕을 먹는다. 남자는 “야 임마! 똑바로 보고 다녀, 이새끼야!”라고 소리친다. 순간 샤니는 자신이 남성으로 패싱(passing,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겉보기 성별)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샤니는 옅은 미소를 띤다. 이중의 성전환 속에서 분명히 정체성과 존재가 파괴되고 분열되는 고통을 겪지만 또한 그녀의 (재)성전환 혹은 드랙이 제대로 통했다는 복잡한 트랜스젠더의 쾌감을 보여준다. 품이 커서 어색해 보이는 남자 양복을 입은 샤니는 산으로 둘러싸인 금자의 시골 고향에 도착한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비교되는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풍경 속에서 놓인 샤니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뒤쫓는다. 금자는 전통적인 초가집 가옥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금자의 신체는 샤니가 트랜스 여성으로서 동일시하는 여성 신체인 동시에 레즈비언으로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말에서 원초적으로 보이는 그 젖가슴은 오직 가부장제-이성애 중심적인 재생산만을 위해 거리를 두고 타자화해야 할 자연적 신체로 묘사된다. 재생산이 가능한 모성성으로 환원된 시스젠더 여성의 신체는 트랜스젠더 여성은 근접할 수 없는 원본의 환상을 만든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신체화된 금자와 대비되게 카메라는 역쇼트로 손을 허리에 얹고 우뚝 서며 역광을 받고 있는 샤니를 로우앵글을 시각화하며 남성성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로우앵글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잡힌 샤니 얼굴 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고 전통음악이 깔린다. 샤니의 얼굴은 모성적 자연 풍경에 빨려 들어가며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이자 남성적 민족-국가의 얼굴로 이론의 여지없이 알레고리화 된다. 여기서 샤니의 여성 정체성과 퀴어한 섹슈얼리티는 폭력적으로 부정되고 제거되며 남장을 한 샤니는 한국영화와 민족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구원해내고 동질화하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완전히 의미화 되지 않는 잔여가 남는다. 줌인 클로즈업의 순간 샤니의 얼굴에는 찡그린 미소가 각인된다. 이 미소는 다시 줌아웃하며 풍경 속에 작게 남아있게 되는 샤니와 독립되어 부유한다. 샤니/오윤희 배우의 얼굴은 산으로 병풍 쳐진 자연, 즉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뜯겨져 나와 자율성을 갖는다. 어떤 고정된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 미소는 샤니가 남장을 하고 패싱된 후 짓는 미소, 오윤희 배우가 느끼는 잘 수행된 드랙킹의 쾌락, 그리고 여성성을 지워내고 남성성을 인공적으로 편집하는 쇼트들의 봉합솔기와 겹쳐진다. 그 미소는 감독이 설정한 엔딩씬의 샤니 캐릭터를 떠나와 이물감을 느끼고 있는 오윤희 배우의 트랜스젠더 신체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찡그린 미소는 가부장적 민족-국가의 시스젠더 응시 아래 억눌리지만 곧 슬며시 고개를 들며 벌어진 봉합 솔기를 비집고 되돌아오고 마는 트랜스젠더의 응시로 전치된다. 누구의 모습과 수행으로, 어떤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로, 어떤 마음으로 짓는 미소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얼굴이 레이어된 마지막 클로즈업은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를 재건하려는 욕망과 끊임없이 오염되고 변용되며 이질적인 장소로서의 트랜스 신체성이 교차하는 마디점(nodal point)이자 영화적 응시가 된다. * 샤니의 남장 혹은 재남성화를 드랙킹으로 보는 아이디어는 김일란 감독과의 대화중에 나온 것임을 밝힌다.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의 해석은 필자의 논문 「헤테로토피아 공간과 트랜스젠더 여성 재현-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중심으로」(『한민족문화연구』, 2023.3)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이두용 감독의 <뽕>은 1980년대 ‘토속적 에로티시즘’의 대표작으로 각인된 영화다. 이 영화는 당대 흥행에 크게 성공한 것은 물론 국내외 영화제에서도 여러 상을 탔음에도 불구하고, 비평에서는 ‘오락적 흥미 본위의 성애물’로 분류되며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이후 <뽕2>(1988), <뽕3>(1992), <1996 뽕>으로 이어지면서 ‘뽕’이라는 말이 지닌 원초적 어감이 강화되어 ‘성애 영화’로서의 이미지가 고착되었고, <변강쇠>(1986) 시리즈와 함께 계보를 형성하는 희극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뽕>은 왜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나 그러나 따지고 보면 <뽕>은 나도향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문예영화다. 게다가 이두용 감독은 <피막>(1980)으로 1981년 베니스영화제에서 특별감독상을 수상하고, <물레야 물레야>(1983)로 1983년 칸영화제의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입선한 ‘국제적인’ 감독이었다. 또한 주연배우 이미숙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1984)로 여우주연상을 휩쓸고, <고래사냥>으로 흥행의 아이콘으로 부상한 여배우였으며, 각색자 윤삼육은 특히 사극 장르에서 재능을 발휘한 당대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다. 요컨대 이 영화는 좋은 원작을 저본으로 삼아 당대 최고의 영화 인력들이 모여 만든 야심작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토속적 에로티시즘 영화의 계보는 1960년대 <산불>(김수용, 1967)이나 <내시>(신상옥, 1968) 등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데 그것이 1970년대에 제대로 발로되지 못하며 도착성으로 저류하다가 1980년대 3S정책과 컬러TV 보급의 영향, 그리고 ‘국풍(國風)’의 흐름 속에서 전근대(적) 사회 여인의 수난을 알리바이로 삼는 성애영화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를 비롯해 <물레야 물레야> <자녀목> <땡볕> <어우동> <씨받이> 등이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제작된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은 한결같이 비극으로 점철되며 비민주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 자세를 취했고 나름대로 진지한 시선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에 비해 <뽕>은 웃음을 주조로 삼으며 뚜렷한 주제의식을 표출하지 않는다는 점에 차이가 있었다. 한국영화사에서 웃음을 유발하는 코미디 장르는 예술로 평가되지 못하는 경향이 있어 왔다. 웃음은 ‘단순한 오락’이고 의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가벼운 해소’로 인식되며 코미디 영화는 언제나 ‘예술’의 범주에서 쉽게 제외되곤 했다. <뽕>이 문예영화임에도 불구하고 ‘통속적 성애물’로 자리매김한 것은 그러한 인식에 연유하는 바 크다. 그리고 이 지점이 다른 영화들에 비해 <뽕>이 가볍게 취급되거나 본격적인 분석의 대상이 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다.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의 병치 그러나 ‘웃음’이야말로 <뽕>에서 공존하기 힘든 불균질한 요소를 결속하는 아교이자 영화에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으로 기능하며 이 영화가 성취하는 신선함의 중추를 담당한다. <뽕>은 웃음을 기반으로 이전 영화에서 결속되기 힘들었던 두 요소, 즉 ‘화냥녀 아내 안협집’과 ‘독립운동가 남편 삼보’를 병치해 의외의 효과를 창출한다. 원작에서 삼보는 그저 “땅딸보 오리궁둥이 투전꾼”으로, 삼돌에 의해 마당에 패대기쳐지고 그 화풀이를 아내에게 하는 못난 인물이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삼보를 도인의 품격을 풍기는 정체불명의 룸펜으로 만든다. 삼보는 무심한 듯 사내답고, 초연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비애에 젖어 있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다. 그가 나타날 때마다 뒤따르는 일본 헌병은 그가 일제강점기 요주의 인물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암시는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확증에 가까워지고, 이에 따라 영화는 후반부로 갈수록 에로티시즘보다는 안협집이 처한 현실적 맥락, 즉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여자의 상황이 부각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전환된다. 이에 대해 개봉 당시에는 “분망한 섹스 행각과 시대상이 상치”되고, “뜨거운 장면 뒤에 각박한 생활을 연결시킴으로써 섹스 장면을 포장”하고 있으며, 이는 “사실성이나 예술성과는 처음부터 거리가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생활인이자, 팜므파탈이자, 억척스러운 그러나 프랑스혁명 직전 귀족사회의 ‘위험한 관계’를 19세기 조선사회의 ‘스캔들’로 가져왔을 때 의외의 결과가 빚어지며 조선사회를 새롭게 상상할 수 있는 지평이 열렸듯이, 이 영화도 웃음을 수반하는 성애놀이로 식민지 시대를 투과시킴으로써 ‘엄숙한 독립운동의 시대’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조망을 가능케 한다. 존경받아야 하는 독립운동가는 아내의 성매매로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는 ‘못난 남편’이 되고, 남자가 제 구실을 못하는 시대에 정조를 파는 일은 비단 비천한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독립운동’의 의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초반에 삼보를 뒤따르는 헌병이 등장하자 삼돌(이대근)이 나서서 정중하게 인사하는 장면이 있다. 삼돌은 안협집이 한사코 마다하는 사내로 끝에 가서 삼보에게 안협집의 행실을 고해바치는 비루한 인물이다. 이러한 삼돌의 패배는 초반 장면에서부터 암시되는 셈이며, 이는 삼보의 행동이 지니는 명분에 대한 공인, 그리고 그에 따라 안협집의 행동에도 정당성이 부여되는 연관 고리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명분과 정당성을 강화하는 것은 삼보의 존재감과 안협집의 매력이다. 삼보는 영화의 맨 앞과 맨 뒤에 등장해 방랑시인과 같은 카리스마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삼보의 등장은 전체 구조에서 수미상관을 이루며 영화의 몸통을 이루는 안협집의 행동에 강한 존재감을 드리우고 동시에 그것을 감싸 안는 역할을 한다. 한편 안협집은 특유의 당당함으로 영화 전체를 주도한다. 한국문학사에서도 안협집은 두드러지는 여성 인물이다. <뽕>과 동시대에 나온 단편소설에는 ‘복녀’(<감자>), ‘계집’(<물레방아>), ‘아내’(<소낙비>) 등의 이름으로 무능한 남편과 돈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아내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상대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돈에 매달리는 데 비해 안협집은 “정조가 헤프기로 유명한 만치 또 매몰스럽기도 유명하여 한번 맘에 들지 않는 것은 죽어도 막무가내여서 만 냥 금을 주어도 거들떠보지 아니하고”, “맘에 드는 서방질은 부정한 일이 아니요, 죄가 아니요, 모욕이 아니나 마음에 없는 놈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당하는 것은 무서운 모욕”으로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러한 안협집이 영화에서는 잇속과 셈속에 밝은 생활인이자, 계층과 연령에 상관없이 마음만 먹으면 남성을 좌지우지하는 팜므파탈이자, 자신의 매력을 질시하는 동네 아낙들의 횡포에 맞서는 억척스러운 여성으로 거듭난다. 햇발 아래 던져놓은 여성의 생명력 이 독보적인 캐릭터가 시대와 만나면서 흥미로운 충돌과 균열을 드러내는 장면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삼보는 안협집의 행실을 폭로한 삼돌을 곤죽으로 만들고 나서 아내를 때리며 뽕밭에 몇 번 갔느냐고 다그친다. 이에 안협집은 ‘딱 한 번’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웃지 않을 수 없는 정황을 연출하며 ‘무게 있는 남편’, 혹은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권위에 가려져 있던 삼보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다. 그리고 안협집의 개성과 생명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해준다. 마지막에 남편이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안협집의 뒷모습은 비극적 수난 여성의 정조를 풍기기는 하나, “뽕을 따야 님도 따지”라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사라지는 삼보의 뒷모습 위로 흐르는 타령의 활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협집의 생명력이 변함없이 지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이로써 이 영화는 민족, 독립과 같은 엄숙한 영역에 대해 다시 생각케 하는 동시에 음화와 같은 밀실의 상상력으로만 저류했던 성적 욕망을 여성의 생명력과 중첩시켜 햇발 아래 던져놓는다. 이분법의 균열과 교란, 그리고 역사의 엄숙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냉전체제의 종식 이후 그것도 2000년대 들어서야 ‘퓨전’ 혹은 ‘혼성’의 이름으로 본격화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영화에서 불균질한 요소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는 지점은 이질성의 모순과 충돌이 빚어내는 포스트모던적 의외성의 선취라 할 만하다.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에서 이두용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액션’이 주종목이었지만, 경력 초기의 멜로드라마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1980) 같은 미스터리나 <귀화산장>(1980) 같은 호러 스릴러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병태의 감격시대>(1975)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기도 했고, <경찰관>(1978), <장남>(1984) 같은 리얼한 톤의 드라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대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궁중 사극인 <내시>(1986)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같은 엄격한 형식미와 <뽕>(1985) 같은 서민 희극을 오가며 수작을 뽑아냈다. <초분>(1977), <물도리 동>(1979), <피막>(1980) 등에선 샤머니즘이라는 테마를 다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리랑>(2003)은 흑백 무성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감독은 흔치 않다. 물론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는 생존을 위해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야 했던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모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하강기를 맞이했다. 1973년에 제정된 ‘유신영화법’은 국책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시켰다. 외화 수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 산업은 흥행성이 보장된 외화 쿼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허가제에 의해 살아남은 몇몇 영화사들은 쿼터 확보를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었고 ‘방화’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스템에 철저히 적응해 기능공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도대체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일관성이 없는” 필모그래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흥행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데뷔 초기 합동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반복되는 장르 영화 속에서 서서히 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작가의 영역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인생과 영화 경력을 살펴보면, 그에겐 때론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개척자 정신이 있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는 산업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이두용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당대의 트렌드였던 신파 멜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발차기 액션 영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액션 연출력을 발판으로, 다른 영화인들은 모두 충무로라는 우물 안 개구리던 시절에 <아메리칸 방문객>(1976)으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다.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한국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한 <침묵의 암살자>(1988)를 내놓았다. 1980년대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고 이후 영화 수입과 극장 경영까지 겸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1980년대엔 충무로 감독으로서 TV 영화를 연출하려 시도했고, <아리랑>을 들고 북한에 건너가 남북 합작 프로젝트를 논의하기도 했다. 흥행성과 작품성,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장르 영화와 작가 영화…. 그의 좌충우돌 영화 인생은 언제나 양 극단 사이에서 진동했다.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IMF로 극장 사업을 접어야 했으며, 제작자의 외화 쿼터를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두용의 영화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이 부분, 즉 장르 영화 장인으로서 지녔던 생명력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영화제에 의해 먼저 발견된 후 한국의 평단에 의해 평가되었다. ** 이두용 감독은 1941년(호적엔1942년)에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고, 아버지는 간장 공장 기술자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극장에 몰려다니던 활극 영화광이었고,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학생이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점점 키워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충무로의 일원이 된다. 당시 미술 선생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는데, 심부름으로 동성영화사의 만리동 스튜디오에 갔다가 처음으로 영화 현장을 접한 것. 이후 그는 이강천 감독 연출부에서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고, 1950년대 말에 몇 편의 영화를 거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짧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감독을 꿈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거의 집 한 채 값의 거금을 받아 <여승>이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던 것. 하지만 극장 배급을 책임지기로 한 흥행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서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교훈은 있었다. 제대로 영화를 배운 후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제대 후 이두용 감독은 세 명의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웠다. 전홍직 감독은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기획자’였다. 일본 유학파인 김수동 감독은 콘티의 정확성과 압축해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정소영 감독은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무려 7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소영 감독은 이두용 감독의 데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정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신파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는데, 이두용 감독의 첫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1970)도 그 계열이었던 것. 기획자 방규식은 정소영 감독의 제작부장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김수현도 정소영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영화로 시작해 <작은 새>(197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멜로는 당대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성애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대신 여성의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고, 그 기저에 ‘가난’이라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테마는 <초분> 이후 일련의 샤머니즘 영화와 사극으로 이어지며 변형된다. 여성의 비극을 개인사의 차원이 아닌, 역사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된 모순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전성기는 액션 장르와 함께 찾아온다. 변화의 원인은 신파 멜로에 대한 염증이었고, 좀 더 영화적인 기능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액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외국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것도 액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영세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액션 밖엔 없었다. 박노식이 출연하는 <날벼락>(1971), 호러와 무협이 결합된 <야오귀>(1971), 범죄 액션 <체포령>(1972), 전쟁 액션<홍의장군>(1973) 등이 있었지만, 진짜 시작은 <용호대련>(1974)이었다. 그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액션 배우를 꿈꾸는 전국의 유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재미 교포인 ‘챠리 셸’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 액션 영화를 발명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그리고 <배신자>까지 한용철 주연의 액션 영화 6편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의 신드롬이었다. 하지만 한용철은 이두용 감독과 결별했고, 이후 이두용 감독은 강대희와 <무장해제>(1975)를, LA의 태권도 사범인 정준(준 청)과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찍는다. <비밀객(속)>(1976)부터 <해결사>(1981)까지는 신우철과 안태섭이 액션을 맡았고, <돌아이>(1985)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전영록을 카메라 앞에 세워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건 이두용 액션이 지닌 사회적 의미였다. 유신 헌법 이후 갈수록 엄혹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호쾌한 발차기가 작렬하는 그의 액션은 대중에게 정서적 탈출구였고, 오승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뭔가에 억눌린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배우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나뒹군다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두용 표 액션’의 힘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무장해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제 왕궁에서 촬영되었으며, <해결사>는 세트 없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액션을 보여준다. <돌아이>는 카 체이스 같은 현대적 액션을 시도했다. *** 액션은 이두용 감독을 대표하는 장르지만 그는 종종 회의를 느끼곤 했다. 액션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시선은 멸시에 가까웠다. 이때 우연히 제안 받은 <초분>(197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무속적인 소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 영화들을 통해 ‘억압 받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극에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을 통해 그 테마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대표적이며, 특히 이 영화의 정제된 스타일은 이두용 감독의 미장센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계무대에 알려진 것도 <초분> 이후 영화들 덕분이다.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에 수상하는 I.S.D.A.P 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는다. 서구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한국영화는 바로 이두용의 작품들이었으며, 혹자는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와 비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지만, 이전까지 국내의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두용 감독의 텍스트는 서구를 경유해 비로소 자국의 평단을 자극했다. <경찰관> 같은 리얼한 톤의 서민 드라마나 가족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접근한 <장남>,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한 <청송으로 가는 길>(1990), 그리고 노부부의 삶을 다룬<애>(1999) 등 장르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직하게 드라마로 승부할 때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은 빛난다. 특히 <장남>은 가족을 다룬 한국영화의 계보에 아직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유산은 <최후의 증인>일 것이다. 당대 충무로의 최대 역량이 결집되었던 이 영화는 누군가의 밀고로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작자와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상영되었고, 개봉 날 극장에 들어갔던 이두용 감독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져있던 이 영화는 2006년 감독판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의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전설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2002년에 만든 60번째 영화 <아리랑>를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났다. 대사 없이 초당 18프레임의 동작으로 진행되며 변사의 설명이 곁들여진 흑백 영화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월광무> 프로젝트를, 남북 합작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추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애증이랄까…. 영화 때문에 겪은 갖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는 안 하지만, 이젠 뭔가 내 직업에 대한 어떤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고, 내 존재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 영화로 내 삶의 큰 매듭을 짓고 싶다.” 부디 노장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사진1] 조감독 시절의 이두용 감독. <속 미워도 다시 한 번>(1969) 현장이다. 오른쪽부터 주연을 맡은 신영균, 정소영 감독,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정소영 감독 연출부로 7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사진2]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한 동안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든다.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는 두 번째 영화로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배우 문희, 황정순과 스태프들 그리고 이두용 감독(맨 왼쪽)이 함께 했다. [사진3] 1974년 한 해 동안 이두용 감독은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여섯 편의 태권도 영화를 내놓았고, 그 모든 영화에서 발차기의 주인공은 ‘차리 셸’ 한영철이었다. 사진은 <돌아온 외다리>(1974)의 한 장면. [사진4]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는1977년 <초분>부터 변화한다. 이전까지 액션을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영화부터 그는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의 세계로 접어들며 샤머니즘과 ‘한’의 테마를 다룬다. [사진5] 당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는 액션 전문 감독 이두용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경찰관>(19789)과 <선배>(1979)를 통해 장동휘의 진짜 매력을 드러냈다. [사진6] 이두용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최후의 증인>(1980). 하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감독판으로 대중과 늦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2016년 4K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사진7] <피막>(1980)은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이 영화는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를 수상했다. [사진8] <피막>(1980) 현장의 이두용 감독과 주연을 맡은 유지인. <생사의 고백>(1978)으로 이두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인은 이 영화에서 강렬한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사진9] <해결사>(1981)는 세트를 벗어나 리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도시 액션이다. 신우철과 황정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숨겨진 걸작 중 하나이며, <돌아이>(1985)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1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는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외국 평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통역 옆의 왼쪽이 이두용 감독이다. [사진11]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로 하와이영화제를 찾았을 때 해외 영화인들과 함께 한 이두용 감독. 왼쪽부터 홍콩의 임호 감독,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중국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감독,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그리고 이두용 감독. [사진12] <낮과 밤>(1984)은 말 그대로 5대양6대주를 누비는 영화였고, 해외 로케이션에 강한 이두용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현장에서 마사이족과 함께 촬영하는 모습. [사진13]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남>(1984)은 이두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한국 가족 영화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형제로 나오는 신성일, 김희라와 함께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14] 1970년대 ‘발차기’에서 시작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 연대기는 1980년대 이르러 <돌아이>(1985)에 도착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카 액션과 패션 감각을 선보였던 영화로,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새로운 액션 히어로가 된다. [사진15] <뽕>(1985)에서 ‘안협네’ 역을 맡은 이미숙. 나도향의 단편을 각색한 윤삼육의 시나리오는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니다가 이두용 감독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져 큰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도 꾸준히 언급되는 ‘컬트’ 영화다. [사진16] 자신의 제작사 ‘두성영화’를 차린 이두용 감독은 창립 작품으로 <내시>(1986)를 만든다. 그의 최고 흥행작으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을 그린다. 당국의 정치적 해석으로 심의가 나지 않아 개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사진17] 한국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초청 받아 연출한 <침묵의 암살자>(1988) 현장. 미국에선 <Silent Assassins>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교포 배우인 정준(준 청)과 필립 리가 출연한다. [사진18] 밑바닥 삶을 사는 인간을 향한 리얼한 시선. 걸레 스님 중광을 캐스팅 한<청송으로 가는 길>(1990)은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사진19] IMF 시기, 두성영화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든<애>(1999). 남궁원과 이경희가 노부부로 등장한다. <장남>에 이은 또 하나의 가족 영화로, 제대로 된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묻혀 버린 수작이다. [사진20] 2002년에 만든 <아리랑> 현장의 이두용 감독. 나운규 시절의 영화 미학, 즉 흑백과 무성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노장의 녹슬지 않은 솜씨가 돋보인다. 이두용 감독의 60번째 영화다. * 이 글은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가 공동 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도서 『장르의 해결사 : 이두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