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와이라잇
- 감독
- 로버트 벤톤
- 제작년도
- 1998
- 출연
- 폴 뉴먼, 수잔 서랜든, 진 해크만
“그녀는 어머니 역할을 많이 하여 한국의 어머니란 소리를 들을 정도지만 그러나 그녀가 표현하는 어머니는 시츄에이션에 따라 모두 다르다. 말하자면 누구보다 제대로 변신을 할 줄 아는 배우인 것이다.” -연출가 이해랑, 1967년“ 1) 2014년 연기자 황정순이 타계했을 때, 세상은 ‘한국영화의 영원한 어머니’가 떠난 것을 추모했다. 그녀는 1940년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래로 연극, 라디오드라마, 영화, TV드라마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활동을 펼쳤다. 10대에 연기를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80세까지(2005년)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했다. 그녀가 평생을 바친 연기 인생을 단지 ‘어머니’ 전문 배우라는 한가지 인상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황정순은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감성을 개성 있는 연기를 통해 선사했다. 황정순은 1925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손윗 남매들도 일찍 세상을 떠나 오빠만 남게 되었다. 홀로 된 어머니가 막내 외동딸은 오래 살길 바라며 위해준 덕분에 귀하게 자랐다. 학창시절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서 영화를 처음 본 것이 <타잔>이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스릴과 장관 그리고 특히 여자주인공 ‘제인’의 활동적인 모습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 후로부터 거주하던 인천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으로 영화 구경을 다니기 시작했다. 영화 바람이 난 것이다. 어릴 적 몸이 약했던 그녀는 오빠 등에 업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미국 배우 타이론 파워(Tyrone Power)를 흠모하기도 하고, 배우 문예봉이 연기하는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연기자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이듬해, 16세가 된 그녀는 연기자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해 동양극장 배우모집에 응시한다. <장화홍련전> 낭독 시험을 통과하고,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입단하여 연기자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선배들의 심부름과 무대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엑스트라를 맡고, 마침내 대사 있는 단역으로는 처음 출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마디 있는 대사의 문장을 앞뒤로 바꿔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관객들로부터 얼뜨기라는 야유를 받으며 호된 무대 신고식을 치렀다. 눈물 바가지를 쏟으며 속상했지만 이내 포기하지 않고, 극단을 따라 전국 순회 및 중국 만주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동양극장에서 9년을 활동하는 동안 홍해성, 박진, 김영수, 나웅 등의 연출가들로부터 연기 지도를 받았다. 맡은 역할의 과거사와 현재, 미래까지 꿰뚫으며 충실하게 성격 분석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인물을 부각시켜 연기해야하는 대목과 극의 맥락이 되는 지점을 찾아 강조해야하는 점을 익혔다. 그리고 상업극단의 숨가쁜 일정에 맞춰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극을 완성하는 훈련을 했다. 2) 이러한 경험은 황정순이 연기 실력을 다지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연극 <대지의 어머니>에서 비중 있는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고 주연급 연기자로 발돋움했다. 극중 대감의 하녀로서 두 아들을 낳아 기르는 역을 맡았는데, 그녀의 나이 19세에 해낸 어머니 역할이었다. 3) 황정순의 영화 데뷔작은 단역으로 출연한 일본영화 <그대와 나(君と僕)>(허영, 1941)이다. 영화 현장을 처음 경험한 그녀는 인물 사진 찍듯이 자꾸 카메라를 봐서 NG를 냈고, 결국엔 영화에 뒷통수만 출연하게 되었다. 그 뒤 몇 년간 ‘카메라를 쳐다보는 배우’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고 한다.“ 4) 극단 지방 공연 중에 해방을 맞이했고,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성우로도 활동하면서 1947년 라디오드라마 <청춘행로>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화한 <청춘행로(촌색시, 一名 며누리의 설음)>(장황연, 1949)에서 황정순은 첫 주연을 맡는다. 또한 같은 해에 영화 <파시>(최인규, 1949)와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출연하였다. (그림1) <청춘행로>(장황연, 1949)에서 주인공을 맡은 황정순 (그림2) <여성일기>(홍성기, 1949) 출연 당시 황정순(앞줄 오른쪽)과 배우 주증녀(앞줄 왼쪽) 1950년,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 된 신협에서 활동하면서 국립극단 정기공연 첫 작품 <원술랑>과 2회 작품 <뇌우>에 출연했다. 한국전쟁 직전에 공연한 이 작품들은 각각 5만명, 7만5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고, 덕분에 황정순은 연극배우로서 성장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9.28 수복 이전까지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있다가 납북될 뻔한 위기를 겪고, 1951년 1.4 후퇴 당시 신협 단원들과 함께 국군을 따라 대구로 피난 갔다. 피난 시절, 신협은 군예대 소속으로 전선 위문 공연을 다녔고 여주인공은 황정순이 도맡았다. 낙하산 천으로 의상을 만들어 입고, 군용 트럭 여러대를 동원하여 트럭 헤드라이트를 켜서 무대를 밝혀 연극을 했다. ‘탱크부대’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공연에 열의를 쏟아부었고, 황정순의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환도 후에도 공연을 이어가며 연극 무대에서 주연 배우로 주목 받았으나 전후 50년대 중반부터는 연극이 침체되고 영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연극인이 카메라 앞에 서면 무대 예술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영화 연기로 활동 범위를 넓혀야했다. 그녀 역시 연극인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했고, 같은 해에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3)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그림4)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그림5)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왼쪽), 김동원(오른쪽) 황정순은 무대에서 쌓은 기량을 발휘하여 영화계에서도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사랑>(이강천, 1957)에서 불치병에 걸린 현모양처를 연기하여 1957년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고, <인생차압>(유현목, 1958)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제2회(1959)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수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의 피고인 역으로 1959년 제1회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연달아 수상하며‘무대의 프리마돈나’에서‘은막의 스타’로 자리잡는다. 또한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愛情無限)>(전택이・도광계(屠光啓_홍콩측) 공동감독, 1958)에 출연하여 홍콩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림6)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순이(황정순)가 겨울밤 혼자 출산하는 장면 (그림7)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피고인 순이(황정순)가 변호인에게 진술하는 장면 (그림8)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전택이·도광계, 1958)의 한 장면,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황정순 그녀가 애착을 갖는 출연작 <청춘극장>(홍성기, 1959)은 김래성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사랑을 그렸다.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여 관객 14만명을 동원 5) 하며 1959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제작사 선민영화사와 전속계약을 맺어 황정순, 김동원, 최무룡, 김지미, 장동휘 등의 연기자와 홍성기 감독이 ‘선민군단’으로 불리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림9) <청춘극장>(홍성기, 1959) 포스터, 왼쪽에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황정순 (그림10) <청춘극장>(홍성기,1959) 출연진 및 제작진들과 함께, 왼쪽 4번째가 황정순 6) 이듬해 주연을 맡은 <귀거래>(이용민, 1960)에서는 월남한 전쟁 미망인을 연기했고,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에서는 1.4후퇴 때 헤어진 아들을 찾아 헤매면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맡아 전쟁의 비극을 표현했다. 한편 같은 해 출연한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는 배우 김승호와 부부 연기를 선보였고, 강대진 감독의 다음 작품 <마부>(1961)에서도 김승호와 커플 연기를, 또한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도 김승호와 부부로 출연하여 연기 호흡을 맞췄다. 이후로도 황정순은 김승호와 여러 차례 상대역으로 열연하면서 황정순·김승호 명콤비의 연기가 관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겹치기 출연으로 동시에 여러 작품을 소화해야했던 김승호와 황정순은 함께 역할에 대한 설정과 연결을 자세히 점검하고 연기 짜임새를 논의했다고 한다. (그림11)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오른쪽부터 배우 김혜정, 김진규 (사진 12)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 (사진 13) <마부>(강대진, 1961)에서 마부 춘삼(김승호)과 수원댁(황정순)의 극장 데이트 장면 삼십대 중반이었던 황정순은 <굴비>(김수용, 1963)에서도 김승호와 노부부를 연기했고, 그녀의 차분하지만 힘 있는 표현력을 눈여겨 본 김수용 감독은 다음 작품 <혈맥>(1963)에도 황정순을 캐스팅하여 김승호와 연기 대결을 펼치게 했다. 김 감독은 두 배우가 극 중 싸우는 장면을 연기하던 현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육탄전을 벌인다. 땅 위를 구르면서 엎치락 뒤치락을 여러 차례, 배우들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가 아니라 실기다. 카메라가 멎으면 서로 다시 한번 더 찍자고 한다.” 7) 황정순은 이 작품에서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강한 생존력을 보이는 월남민을 열연하여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3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7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림 14) <굴비>(김수용, 1963)에서 노부부를 연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그 뒤로 왼쪽부터 배우 김석훈, 조미령 (그림15) <혈맥>(김수용, 1963)에서 털보(김승호)와 다투는 복순 어머니(황정순) (그림1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황정순이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모습 황정순 영화 연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다수의 출연작에 후시 녹음을 직접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영화는 겹치기 출연으로 바쁜 배우들 대신 성우들이 목소리를 녹음 했다. 그러나 황정순은 촬영장에서 한 연기에 본인의 음성을 입혀야만 자신이 추구했던 연기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으로 여기고 직접 녹음까지 마쳤다. 왜냐하면 가지각색의 생활 감정을 나타낼 때, 그녀만의 연기 호흡과 대사 톤은 본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용 감독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가가 고심한 극 중 대사나 감독의 연기 표현이 가끔 그녀 앞에서 말끔히 정리되는 것을 보는 때가 있다. 관념에 흐르기 쉬운 한국영화의 대사가 그녀의 입에서 지극히 사실적인 일상 용어로 바뀐다.” 8) 는 것이다. 이처럼 맡은 배역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체적으로 소화하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빛을 발해 관객들에게 한층 호소력 짙은 연기로 다가왔다. (그림17)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에서 자식들을 보살펴달라고 고목에 기도하는 어머니(황정순) 또한 그녀는 언제나 배가 불룩이 나온 의상 가방을 들고 촬영 현장에 나타나 직접 의상 설정을 만들어서 입고 스스로 분장을 했다. <갯마을>(김수용, 1965)을 각색했던 극작가 신봉승은 촬영장에서 바닷가 촌부를 연기하는 황정순이 입은 빛바랜 베 치마에 수천 개의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낡은 치마를 어디서 구입했는지 묻자 그녀는 지난 밤, 집 마당에 새 치마를 펼쳐놓고 돌로 톡톡 찍어서 구멍을 낸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쓰듯 연기자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마땅히 뭔가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9) 평소 그녀는 맡은 배역에 대한 탐구가 풀리지 않으면 마치 숙제를 못 끝낸 기분이 들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기에 대한 집념과 헌신 덕분에 황정순이 펼치는 아내, 편모, 계모, 과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등의 ‘어머니’ 연기의 입체성과 고유성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자하고 정감있는 어머니인 한편 고난과 운명에 맞서 감정을 패배적으로 과잉하지 않고, 체념과 포용을 모두 담아낸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할 극 중 인물을 생생하게 체화했다. (사진 18)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아들을 바다에 잃은 어머니(황정순)는 혼자 된 며느리가 인습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길 바란다. 황정순은 이 작품으로 제5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제9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인들은 황정순씨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연령으로 쳐도 어머니뻘이 되고도 남음이 있지만 결코 그러한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녀가 스크린 위에 새겨 놓은 어머니의 상은 거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배우가 악역마저 무난히 소화할 수 있으니, 그녀를 연기파의 일인자로 손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10) 고 평한 김수용 감독은 그녀의 연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①인자한 어머니 ②쾌활하고 코믹한 중년부인 ③악의에 찬 변덕스러운 여인 ④육감적인 요부 등과 같이, 연기자 황정순에게는 “한계선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연기 폭이 넓다는 점을 극찬했다. 11) 이렇듯 어머니 역할 외에도 그녀는 <유정>(김수용, 1966)의 사감, <월급봉투>(김수용, 1964)의 올드미스,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의 주모와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정력적인 아내 역할을 맡아 손색 없는 희극 연기를 선보였고, 스스로 “심각한 역보다는 즐겁고 재미있는 역을 좋아했다” 12) 고 밝혔다. (그림19)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 출연한 황정순과 박암 (그림20)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부부관계를 주도하는 아내를 코믹하게 연기한 황정순 (그림21)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백말띠 딸을 출산하길 바라는 말띠 신부들(가운데 황정순) 그런가하면, 배우 황정순을 떠올리면 주로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한 전통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흙>(권영순, 1960)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산부인과 의사 ‘닥터 현’으로 출연한다. 그녀는 주인공이 멘토로 따르며 의지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올드 미스’를 자칭하며 비혼을 선택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전문직 여성을 연기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1회 공보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림 22) <흙>(권영순, 1960)에서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는 닥터 현(황정순) 그리고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에서는 각각 양공주와 조폭 두목이라는 그늘진 정체를 숨기고, 자식을 위하느라 분투하는 모성의 복잡한 심성을 연기했다. 특히 주연을 맡은 <육체의 고백>은 연기자 황정순의 다면적인 매력을 접할 수 있는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3)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 조직폭력배 두목을 연기한 황정순(하단 왼쪽) (그림 2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부산 텍사스 거리의‘프레지던트’라 불리는 마담(황정순) (그림 25)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매춘부들이 섬기는 “정의감 강하고 인정 많은 대통령 엄마”(오른쪽, 황정순)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세 딸들에게는 양장점 주인인 척하며,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밀수까지 감행한다. (그림 26)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실명으로 출연한 황정순의 집에서 촬영한 장면, 방에 보이는 트로피도 실제로 황정순이 받은 상들이다. <팔도강산>(배석인, 1967)은 배우 김희갑과 황정순이 노부부로 출연하여 전국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황정순은 자녀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어머니를 연기하여, 근대화의 피로감 속에서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모성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크게 흥행하여 이후 <팔도강산(속)>(양종해, 1968),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돌아온 팔도강산>(정소영, 1976)까지 총 5편이 더 제작되었다. 황정순은 팔도강산 시리즈의 성공으로 국민 배우이자 ‘국민 어머니’로서 널리 사랑받는 연기자가 되었지만, 1970년대 KBS 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까지 역할이 지속되면서 이미지가 더욱 굳어져 이후 어머니 역할로 배역이 고정되는 면도 있었다. 그녀는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든 1970년대 이후 TV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로 가족 드라마에서 다정한 어머니나 할머니로 분하여 원숙한 연기를 펼치는 한편, 사극 <사모곡(思母曲)>(신봉승 작, 동양텔레비전)에서는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역을 맡아 실권을 갖춘 대비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 27) <장마>(유현목, 1979)에서 동란 중에 아들을 잃고 천둥 번개치는 하늘에 토로하는 어머니(황정순) (그림 28) <장남>(이두용, 1984), 고향집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서울의 장남 집에 온 어머니(황정순)가 딸과 통화하는 장면. 마치 다큐멘터리 속 인물을 보는 듯한 황정순의 생생한 자연스러움에 빠져들게 된다. 연출의 존재가 전혀 의식되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연기를 보여준다. (그림 29) <장남>(이두용, 1984)에서 어머니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 1972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 황정순장학회를 설립하여 서울예술대학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1984년에는 극단 신협 ‘황정순 연기생활 45주년 기념공연’ <안네의 일기>를 공연했다. 1988년에는 혜화동에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을 개관했고, 2005년에 뮤지컬 <팔도강산>에서 노부부의 어머니 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녀는 2007년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을 수상하였는데, 주최하는 여성영화인모임은 “여성영화인의 큰 숙제 중 하나는 부침 많은 영화계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살아남는 것” 이라며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와 연극, TV를 넘나들며 ‘한국의 어머니’가 되어준 그녀의 열정과 성실함에 박수를 보낸다” 고 밝혔다. 13) 황정순은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를 찾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 “특별히 영역을 두어 벽을 쌓지 않고”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역을 소화하며 배우 인생을 사랑했다.“ 14) ‘카메라를 보는 배우’는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여, 촬영 첫 날 반드시 현장에 모셔야 작품 운이 트인다는 ‘크랭크 인 배우’로 각광받았고, 60여년 동안 400편에 가까운 영화와 200여편의 연극, 수십편의 방송 드라마 등을 통해 꾸준히 활동했다.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이라고 여겼던 그녀의 혼신을 다 하는 연기자로서의 열정을 떠올리면서, 이 뛰어난 예술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림 30)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 개관식(1988년)에서 황정순(왼쪽에서 두 번째) 15) “온 몸과 맘으로, 온 정성으로 연기에 취해 정신없이 지나온 젊은 시절, 그러나 시간은 붙들어 맬 수 없는 것.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연기자가 되고 싶다.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 황정순 16) 1) 명사가 본 한국배우의 실루엣”, 《여원》, 1967년 3월, 225~226쪽. 2) 김남석,“배우로 보는 한국연극사|황정순 선생과 함께 1”,《(국립극장)미르》,2004년 3월호, 39쪽 참고. 3) 유민영,「무대와 영상에 표현된 한국의 전형적 모상/ 황정순」,『한국 인물연극사 1』,태학사, 2006, 687쪽 참고. 4) 나의 데뷰시절⑥ : 황정순”,《Screen》,1988년 12월1일, 251쪽. 5) 「작년도 방화의 수지결산서」,《국제영화》,국제영화사, 1960년 4월호, 81쪽. 6)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3쪽. 7) 김수용,「배우의 변신」,한유림 외,『위대한 여배우 황정순』,한국영화인복지재단, 2007, 138쪽. 8) 김수용,“한국배우론① : 황정순”,《신여성》 제1호, 1970년 4월, 272쪽. 9) 신봉승,「한국의 어머니 황정순 선생」,한유림 외, 위의 책, 132쪽. 10) 김수용, 앞의 글, 271쪽. 11) 김수용, 앞의 글, 270쪽. 12)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4쪽. 13) 강병진,“올 한해 영화계를 빛낸 여성들_2007 여성영화인축제서 공로상 수상한 배우 황정순 외”,《씨네21》, 2007.12.17. 14)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앞의 글, 82~84쪽 참고. 15) “〈그의 생활〉 만년 어머니 배우 황정순의 예술과 삶”,《오늘의 한국》통권72호, 1989년 1월, 77쪽. 16) 황정순,「다시 태어나도 여배우의 길을 가련다」, 한유림 외, 위의 책, 2007, 119쪽.
“어떻게 보면 가짜 인생이지요. 스크린 의상은 모조품이니까요. 진짜 옛날 장군복을 배우가 입으면 무거워서 움직이지도 못해요.” (의상 이해윤) 1) ‘진짜’가 아닌 ‘가짜’를 관객이 진짜‘처럼’ 느끼게 하는 매체인 영화. 영화에서 의상은 의복으로서의 기능을 넘어서 등장인물의 나이, 직업, 성별을 드러내주는 이미지 기호이다. 더 나아가 영화 의상은 등장인물의 심리와 내면을 시각화하고 장면마다의 분위기, 즉 사랑, 환희, 갈등, 절망을 담아내는 도구이기도 하다. 영화 의상은 이렇게 미학적 기능을 하는 동시에 영화가 불러일으키는 경제적인 효과의 확산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1920년대 할리우드 영화가 산업화되기 시작할 무렵부터는 영화 의상도 전문적인 부서로 독립했다. 인기 있는 배우를 만들어 내고, 스타가 된 배우를 관객이 지속적으로 보러 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멋진 이미지를 만들어 줄 아름다운 의상을 입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국영화에서 배우 스스로가 주먹구구식으로 만들어 입던 영화 의상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인력이 생겨난 것은 1950년대 중반이다. ‘가짜 인생’을 위한 ‘모조품’이라고 자조하지만 삼오장 저고리와 금관조복으로 스크린에 조선 시대를 그럴싸하게 펼쳐놓은 이는, 충무로에서 ‘짱구’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이해윤(1925~ )이었다. 그녀가 일을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사극 영화나 시대물에서 이해윤의 의상을 가져다 쓰지 않은 영화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녀는 400여 편의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성격에 맞게 대본을 쪼개어 의상을 구상하는 것은 물론, 대규모 몹신(mob scene)을 위해 삼백 명, 사백 명 의상을 준비하는 일도 도맡았다. 50여 년 동안 배우에게 옷을 해 입힌 이해윤은 남성들이 주로 활동하는 충무로에서 몇 안 되는 여성영화인이었다. (사진1) <춘향전>(이규환, 1955)의 포스터. 이해윤은 동대문 성터에서 촬영하는 변 사또 부임행차에 기생 역할로 영화배우(?) 데뷔를 했다. (사진2) <자유전선>(김홍, 1955) 광고. 김홍의 조감독 백호빈과 알게 되어 <자유전선>에서는 비중 있는 조연으로 활약했다. 이때 배우 임운학을 알게 되어 이후 영화 의상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해윤은 어릴 때 어머니에게 바느질을 배웠는데 남달리 여기에 손재주가 있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일본군 병참군 사령부에 취직해서 군복 수리하는 일을 했고, 한국전쟁 중에는 대전으로 피난을 갔다가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빨랫감을 받아 세탁소를 차린 적도, 편물점을 운영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영화계에서 일하던 친구를 통해 이규환의 조감독이던 유현목, 김홍의 조감독이던 백호빈과 알게 되었다. 2) 동대문 성터에서 몹신을 촬영하던 <춘향전>(1955, 이규환) 구경을 갔다가 변 사또 행렬에 동원된 기생 역할로 카메라 앞에 서고, <자유전선>(김홍, 1955)에서는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아 배우로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역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것보다는 바느질에 재주와 관심이 있던 터, 그녀는 <단종애사>(1956, 전창근)부터 영화 의상을 담당하게 되면서 평생을 재봉틀 앞에서 실, 바늘과 함께 했다. (사진3)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어린 단종을 연기한 배우 황해남 (사진4) <단종애사>(전창근, 1956)에서 단종비를 맡은 엄앵란. 황해남과 엄앵란은 이 영화를 통해 데뷔했다. 당시 영화에서 의상이란 배우가 자신의 출연료의 일부를 할애하여 옷감을 끊어다가 역할에 맞도록 바느질집이나 의상실에서 직접 맞추어 입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해당되는 것이었고, <단종애사> 같은 사극에서는 힘든 일이었다. 이광수 원작의 작품을 유치진이 각본화하고, 전창근 연출, 한형모 촬영의 <단종애사>는 가히 초호화 캐스트를 동원했던 당시 사극영화 상 최대 규모로 이루어진 대작이었다. 바느질 솜씨만 좋았던 이해윤은 연극과 영화를 넘나들던 배우 임운학과 김일해의 지도와 도움으로 잿물에 머리카락을 삶아 직접 망건을 뜨고 수염을 만들었으며, 또 배우들을 머리 빗기고 분장하는 일까지 직접 도맡아 해냈다. 제작부장의 소개로 운현궁 나인 출신을 만나 실물 크기의 도복과 관복, 당의 등을 얻어 확실한 고중을 거쳐 궁중 의복을 재현해냈다. 이 작품을 위해 이해윤은 제작사였던 삼일영화사에서 꼬박 1년을 살았다. 1950년대 후반 한국전쟁 이후 안정을 찾은 영화계는 이규환의 <춘향전>이 흥행에 성공한 후현대극(물론 <자유부인>(한형모, 1956)이 있었지만)보다 사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1956년부터는 명승고적에서 주먹구구식으로 야외 촬영하던 방식에서 벗어나, 정교하고 거대한 세트에서 화려한 의상으로 스크린을 수놓아 관객을 사로잡는 볼거리를 만들어내는 기획들이 나타났다. 조선시대는 물론 상고시대까지 시대적 배경으로 등장하는, 가히 사극 전성시대였다. <단종애사>를 시작으로 이 해에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마의태자>(전창근), <논개>(윤봉춘), <사도세자>(안종화)에 이르기까지 노장과 중진들이 총동원되면서, 사극 영화는 오락성과 대중성을 장착해 관객의 눈과 귀를 충족시켰다. 비록 16미리이긴 했지만, 1958년 안종화가 국내의 기술과 시설로 <춘향전>을 컬러영화로 제작하면서부터 사극 영화는 점점 더 의상과 소품에도 세심한 배려를 기울였다. (사진5) <춘향전>(안종화, 1958) 포스터. 사극이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점점 더 의상에 세심한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이 영화는 이해윤이 의상을 처음 담당한 <춘향전>이다. 역사적 인물이나 사건을 다루는 사극은 기본적으로 해당 시대의 민속, 언어, 음악은 물론 의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고증이 필요한 것이었고, 여기에 의지한 작품이라야 예술성도 살릴 수 있는 법이었다. 이해윤이 그 시작부터 사극 의상을 전문으로 하다 보니 의상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 영화의 예술성과 ‘역사적 고증’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익숙한 서사와 화려한 볼거리로 관객들이 구름같이 모이는 “사극이 과연 한국영화예술의 어떠한 위치에서 우리들의 현실에 무엇을 제시해 주고 무슨 예술적인 감명을 줄 수 있느냐”는 비평적 문제 제기 속에서, 종종 고증이 부족하거나 결여된 영화 의상은 해당 작품의 예술적 결점으로 치부되었다. 3) 오늘날까지도 사극 영화 제작에 있어서의 완벽한 ‘역사적 고증’은 고질적인 딜레마로 남아 있다. 박물관과 도서관의 고서적을 파헤치고 궁중 나인의 도움을 어렵게 받더라도, 이해윤에게 그나마 조선시대는 고증을 통해 제작하기 수월(?)했다. 별 자료 없이 벽화를 들여다보고 무한한 상상력을 발휘해야하는 상고시대의 의상들은 특히 그녀를 힘들게 했고, 종종 각각 감독들의 까다로운 미학적/경제적 요구와 좀 더 아름다운 의상을 입고자하는 배우들의 욕망 어딘가에서 ‘역사적 고증’과 절충해야만 하는 이해윤의 난제는 단 한 번도 속 시원히 해결된 적이 없었다. (사진6)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 장면. 이해윤이 이 영화의 의상을 담당했지만, 주인공 춘향의 의상은 최은희가 직접 지어 입었다. (사진7,8) <춘향전>(홍성기, 1961) 이 영화에서는 춘향 역의 김지미 의상을 비롯, 모든 등장인물의 의상을 이해윤이 담당했다. 홍성기 감독은 이후 이 영화에서 제작한 의상을 모두 이해윤에게 주었다. 1961년은 홍성기와 신상옥의 ‘춘향전 경작’이 단연 화제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제작되는 이 두 영화의 춘향, 당대 최고의 인기를 누리는 최은희와 떠오르는 스타 김지미를 두고 ‘어떤 춘향이 연기를 더 잘할 것인가, 어떤 옷을 입고 나올 것이냐’에 관심이 쏠렸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작품의 의상을 모두 이해윤이 담당했다는 것이다! 최은희는 직접 옷을 지어 입어 신상옥의 <성춘향>에서 이해윤은 엑스트라의 옷만을 담당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에서 김지미의 의상을 비롯해 모든 출연자의 의상을 담당했다. 이 경작에서 신상옥이 성공적인 흥행결과를 얻었지만, 이해윤은 의상만큼은 김지미의 것이 아름답고 정교했다고 자부한다. 이렇듯 혼신의 힘을 들여 의상을 제작했지만, 홍성기의 <춘향전>이 실패하는 통에 그녀가 손에 쥔 것은 무더기의 한복뿐이었다. (사진9,10,11) <연산군(장한사모편)>(신상옥, 1961) 이해윤이 신필름에 입사해 금관조복을 제작해 촬영한 장면들. (사진12,13,14)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 1962) 이 영화에서도 역시 수려한 의상 덕분에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연출했다는 평을 받았다. ‘춘향전 경작’ 이후 다시 활기를 띤 사극영화의 황금시대에 그녀는 역사적 고증이 확실히 된 의상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녀가 홍성기 감독이 건네 준 의상을 손에 쥐고, 본격적으로 영화 의상에 매진하리라 다짐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성춘향>이 끝난 후, 신상옥은 이해윤에게 신필름 의상부 소속으로 함께 일하기를 제안했다. 그렇게 신필름에 들어가 처음 촬영한 작품이 <연산군>(1961)과 <폭군 연산>(1962)이었다. 두 영화는 실물에 가까운 세트에서 당시의 풍속, 기예, 생활을 고증을 통해 잘 살렸고, 특히 소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역사적 사실을 과감하게 재현하고 수려한 의상으로 인해 꽉 짜인 화면 분위기를 조성했다는 호평을 받았다. (사진15) <왕자호동>(한형모, 1962)에서 사열해 있는 고구려 병사들의 장면 (사진16) <인목대비>(안현철, 1962)의 한 장면. <왕자호동> 병사들의 옷에 단을 대어, 다음날 <인목대비>의 조선 병사들이 입고 찍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이해윤이 의상을 담당했다고 하면 주요 등장인물들 것만을 짓는 것이 아니었다. 사극의 경우 조연을 비롯한 엑스트라까지 포함하여 기본 200벌(많으면 500벌) 정도의 다양한 의상을 손수 만들어야했다. 한해에 영화 의상을 열 편 이상 담당하는 그녀에게 ‘의상 바꿔치기’(그리고 세탁)는 시간과 공간을 고려해 머리를 써야하는 고난도 기술이었다. 1962년 한해를 예로 들면, 그녀는 <왕자호동>(한형모), <인목대비>(안현철), <폭군 연산(복수, 쾌거편)>(신상옥)의 의상을 동시에 맡았다. <왕자호동>은 삼국시대, 나머지는 두 영화는 조선이 배경이었다. 수백 벌의 의상을 영화마다 각각 제작할 비용도 시간도 부족했기 때문에, 한 영화에 쓰인 의상을 조금 다듬어 다른 영화에서 촬영하고, 다시 가져와서는 고쳐서 또 다른 영화에 빌려주는 식이었다. 조선시대 의상은 바지나 저고리, 두루마기에 단을 대는 게 특징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단이 없었다. <폭군 연산>을 위해서는 손바느질로 단을 대고, 같은 의상으로 <왕자 호동>을 찍을 때는 부지런히 그 단을 떼야했다. 그리고 다시 촬영 일정에 따라 <인목대비>를 찍는 수원성에서는 단을 붙인 채로 찍고, 밤새워 단을 없애 다음날에는 남한산성의 <왕자 호동> 현장으로 의상을 날라야 했다. (사진17, 18) <칠공주>(정창화, 1962)의 포스터와 스틸 사진. 통일신라의 일곱 공주가 등장하는 이 영화의 의상을 각각 다르게 개성을 살려 만드는 일이란, 의상 담당자 이해윤에게 녹녹치 않은 일이었다.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표준이 되자 관객의 시각적 쾌락을 위해 사극 배우의 의상은 특히나 중요해졌다. 신라 왕위 계승을 둘러싼 음모의 희비극인 정창화의 <칠공주>(1962)는 무려 일곱 공주(문정숙, 이빈화, 전계현, 방성자, 차유미, 김명희, 엄앵란)가 주인공이라 의상이 까다로울 수밖에는 없었다. 조선이 시대적 배경이었다면 치마저고리 일곱 벌의 색깔만 달리해 공주 각각에게 입혔겠지만, 신라가 배경인 컬러 시네마스코프였기 때문에 색감은 물론 옷깃이나 장식 모양을 조금씩 달리해 각 공주들의 성격을 반영하면서 복식을 재현해야 내야했다. (사진19, 20)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이만희, 1965)>의 군인 복장. 이만희 감독과의 논의 끝에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만들었던 이해윤 역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한 군사영화에서도 오랫동안 군복을 수선하던 이력의 소유자 이해윤의 바느질 솜씨가 필요했다. 반공법 위반으로 신문지상에서 화제가 되었던 이만희의 <돌아온 여군(7인의 여포로)>(1965)>은 감독 뿐 아니라 의상 담당이던 이해윤까지도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조사를 받았다. 남한 출신 여자 포로들을 호송하는 인민군 장교의 인간적인 면을 묘사한 이 영화에서 이해윤이 인민군 의상을 근사하게 지었기 때문이었다. 기세등등한 공산당과 인민군을 표현하기 위해 하얀 망이 아닌 새 망으로 탱크 위장망을 치고, 장교 군복을 멋지게 지어 세무(suede) 반장화까지 신겼던 것이 문제였다. 중앙정보부는 이해윤의 의상 창고도 샅샅이 조사하고, 인민군과 중공군 의상에 대한 교육을 한 달이나 받게 해 향후 의상 제작에 있어 반영하도록 했다. (사진21) <하얀전쟁>(정지영, 1992)의 베트남 현지 로케이션 장면. 급히 필요한 미군 작업복을 현지 인력을 직접 고용해 만들어 촬영을 했다. 그 후에도 <8240 K.L.O>(정진우, 1966), <증언>(임권택, 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 1974), <아벤고 공수군단>(임권택, 1982)을 비롯한 수십 편의 군사영화에서 이해윤은 국군과 인민군, 미군과 중공군의 옷을 지었다. 베트남에서 촬영했던 정지영의 <하얀 전쟁>(1992)에서는 예순이 훌쩍 넘은 이해윤은 홀로 로케이션 현장에서 의상을 챙겼다. 필요한 장면에 따라 연기자들의 의상을 모두 제작해 갔지만 막상 현지에서 미군 작업복이 필요했고, 무작정 사이공 시장으로 내달린 그녀는 말도 통하지 않는 현지 여성들을 고용하여 의상을 만들어 촬영을 진행하기도 했다. (사진22,23) <난중일기>(장일호, 1977) 이해윤이 쇠미늘을 오리고 두드려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꿰매 만든 갑옷을 볼 수 있다. 장일호의 <난중일기>(1977)는 그녀로 하여금 영화 의상에 대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 작품이었다. 사극과 군사영화를 전문으로 20여 년간 의상을 담당했다지만 이 영화에서 이순신의 갑옷을 제작하는 일은 새로운 도전이었다. 갑옷을 입고 호령하는 모습을 통해 당당한 영웅의 면모를 표현하고 올곧은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연구의 연구를 거듭했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기 때문이었다. 참고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우선 광화문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을 뜯어보며 흉내는 내봤지만 어쩐지 입체감이 영 살지 않았다. 생각 끝에 프레스 공장을 찾아가 갑옷에 달 쇠미늘(鐵札)을 오리고 두드린 다음 하나하나 구멍을 뚫어 무명실로 엮어 철갑 두 벌을 만들었다. 한 커트를 찍고 나면 날카로운 쇠미늘에 무명실이 끊어져, 이순신 역의 김진규가 한 벌을 입고 찍고 있는 동안 이해윤은 촬영장 한편에 앉아 나머지 한 벌의 쇠미늘을 다시 꿰매야 했다. 이때의 연구와 노력이 스크린에 고스란히 새겨져 관객 앞에 펼쳐진 그 순간, 그녀는 영화 의상 담당으로서 새삼 긍지를 갖게 되었다. (사진24) <나그네 검객 황금 108관>(정창화, 1968) 포스터 (사진25) <소림사의 결투>(채양명, 최현민, 1975) 포스터 (사진26) <무림악인전>(김정용, 1980) 포스터 합작이 시작되고 중국, 홍콩영화가 들어오면서 ‘참바라(ちゃんばら)’ 또는 ‘으악새’로 불리던 검술영화가 많아지면서, 이해윤은 영화 의상에서 ‘고증’은 유명무실해졌다고 토로했다. 4) 공보부에서는 사극이나 시대극영화에서 사학을 전공한 인력을 고증 담당 스태프로 참여시켜 근거 없는 언어, 의상, 풍습을 시정하라고 지시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상영허가를 내주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아보기도 했지만 지켜질 리 만무했다. 5) 궁중을 배경으로 했던 이전의 정사극과 달리 시대적인 배경만을 빌린 야사나 서민들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는 이들 영화에서는 화려한 액션과 오락성이 더 강조되었기 때문이었다. 때마침 이시기 보편화되기 시작한 새로운 옷감 나일론(nylon)은 빨아도 구겨지지도 않고 색깔도 선명했다. 면이나 비단처럼 툭하면 찢어지고 구김이 심해 관리가 힘들었던 기존의 의상과 달리 나일론으로 제작한 의상은 공중을 날아 차고 칼을 휘둘러야하는 액션 연기자들이 활동하기에는 적격인 소재였다. 이해윤 역시 ‘중국 건지, 한국 건지, 현대 건지’도 모르게 의상을 만들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나일론 같은 소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연기자들이 연기하기 편한 의상을 만들고자 했다. (사진27,28) <토지>(김수용, 1974) 이 영화에서 이해윤은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하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지었다. 특정한 장르 영화 제작에서 의상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해내고 있었지만, 오랫동안 영화계 내에서 그런 수고를 인정받기는 어려웠다.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여러 영화제에서 공로상과 의상 부문의 수상 트로피에 그녀의 이름이 새겨졌다. 그중 그녀가 자랑스럽게 꼽는 의상상은 <토지>(김수용, 1974)로 받은 파나마국제영화제 의상상이다. 19세기 말에서부터 20세기 초까지 경남 하동의 만석지기 가문을 지켜가는 서희의 일생을 그린 이 영화에서 주인공 김지미는 어린 서희에서 나이든 서희까지 연기해야 했다. 주인공 서희의 나이에 따른, 또 시대 변화에 따른 의상을 준비해야 했고, 역사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일본군, 농민, 양반 옷 할 것 없이 다양한 의상을 공들여 지어야만 했다. (사진29,30) <어우동>(이장호, 1985) 이해윤은 이 영화에서의 의상에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를 주어 개성을 가미하려 시도했다. (사진31)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내면을 드러내 주는 팥색 저고리 그녀에게 <어우동>(이장호, 1985)의 의상은 화려하면서도 작은 변주들을 주어 신선한 개성을 가미하려고 애썼던 것이라, <서편제>(임권택, 1994)에서 한 서린 송화의 붉은 팥색 저고리는 두루마기를 뜯어 방망이로 종일 다듬어 반질반질한 비단의 느낌을 살려서 만든 것이라 소중하다. 한 겨울 장면이라 엑스트라들 안에 입는 옷들까지 모두 누벼 주어야 해 너무나 고생스러웠던 작품 <개벽>(임권택, 1991), 그리고 연일 40도를 웃도는 멕시코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했던 작품 <애니깽>(김호선, 1996) 역시 이해윤에게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다. (사진32,33,34) <개벽>(임권택, 1991) 이해윤이 빛을 보지 못한 안타까운 영화라고 소회하는 <개벽>은 겨울 장면이 많고 엑스트라가 다수 등장해 특히 공들여 의상을 지었다. (사진35,36) <애니깽>(김호선, 1996)은 1900년대 초 멕시코로 이주 노동을 해온 조선인들의 생활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해윤은 현지에서 재봉틀을 돌려 의상을 수선해 가며 촬영에 임했다. 이해윤처럼 많은 영화에서 꼭 필요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스크린의 뒤에 또 영화사의 뒤안길에만 존재했던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현장에서 이들은 ‘뒷 스태프’(편집, 미술, 특수효과, 소품, 녹음, 의상 등)라고 불렸는데 오랫동안 이들은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을 가지고 있음에도 연출, 촬영, 연기 분야에 종사하는 이들만큼 대우받지 못했고, 정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과 작가 위주의 연구 경향으로 인해 영화사적으로도 거의 주목받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뒷 스태프’에 대한 문헌자료도 충분치 않은 것은 물론 그에 대한 연구는 미미하다. 2004년부터 한국영상자료원은 ‘원로영화인 구술사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가려져있던 많은 ‘뒷 스태프’의 역사가 발굴, 기록되고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이해윤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2』,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이채, 2006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영상 뒤에 숨은 여성마술사들, 의상전문가 이해윤 씨’, 《경향신문》 1986년 1월 29일 7면. 2) 「이해윤 : 바늘 하나로 영화를 아름답게, 40여 년간 충무로를 지켜온 영화의상 디자이너」, 『이야기 여성사: 한국여성의 삶과 역사2』, 여성신문사, 2000, 263~264쪽. 3) ‘신영화 : 사적 고증이 결여 「왕자호동과 낙랑공주」’, 《한국일보》 1956년 6월 14일 4면. 4) <이해윤 은막의 스타, 그 날개를 달다>(나윤희, 부동산 TV, 2001).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해윤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www.koreafilm.co.kr에서 볼 수 있다. 5) ‘[연예계스냅] 사극 고증 철저히’, 《경향신문》 1967년 12월 23일 4면.
' 김기 감독님..' 얼마 전에 만났는데도 오늘 또 다시 그리워지는 이름... 30여 년을 충무로 거리를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한 감독님, 매일 목욕하고, 식사하고, 술마시고 수없이 많은 작품을 디스커션하면서 그림자처럼 함께하던 충무로 시절...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 충무로를 이따금 찾는 감독님을 자주 만날 수 없어 송구스럽고 아쉬워서 그리워지고 넉넉한 그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가슴이 뭉클해 질 때가 많다. 그만큼 충무로는 많이 변해가고 있다. 정도 세월 따라 많이 떠나갔고 낭만도 찾기 어려운 거리 충무로, 많은 영화인들이 젊음을 함께 해온 충무로는 이름만 그대로이지 지금은 삭막한 거리에 삭풍만이 흩고 지나간다. 한때 화려했고 아름다운 얼굴들과 마주치고 정이 넘쳐 흘렀고 꿈과 희망이 명멸했던 거리 충무로에 김기 감독이 발을 디딘 것은 1957년경이다. 192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기 감독은 흥남화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민족의 비극 6,25전란 당시 단신으로 월남한 실향민이다. 김기 감독은 피난지 부산에서 동아대학 이종인 박사의 소개로 영화감독 이봉래 를 만나게 됐고 이감독의 조감독 써드로 영화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단신 월남해 사고무친이였던 김기 감독은 그때부터 이봉래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고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온몸에서 피가 터질 것 같은 열정으로 김기 감독은 영화에 매달렸고 그때 그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길이 쏟아지는 듯 했다고 한다. 그런 김감독의 열의에 애정을 가졌던 이봉래 감독은 다음 작품에서는 그에게 기록을 맡겼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당시에 기록이란 직책은 조감독 퍼스트에 버금갈 만한 위치였으니까.. 그렇게 조감독으로 끗발을 날리면서 오직 이봉래 감독 한 분을 일편단심 영화의 스승으로 모시고 7년여를 영화 속에 인생을 건 김기 감독에게 마침내 데뷔할 기회가 온다. 김기 감독의 영화감독 데뷔는 1964년, 영화계와 가요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온다. 김기 감독이 첫 연출한 극영화 ' 동백아가씨 '는 1964년도 흥앵기록에서 2위를 멀찍이 따돌리고 흥행 톱이라는 획기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멜로영화의 거장이 되는 빛나는 앞길을 약속 받았다. 동시에 가요계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여가수 이미자 가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오늘날 국민가수 이미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한 명의 걸출한 영화감독과 국민가수를 떠오르게 한 ' 동백아가씨 '는 드라마작가 추식이 집필한 라디오 연속극이 원작이였다. 당시 영화 기획자였던 노헌조 는 라디오 드라마를 사들고 시나리오작가 윤석주 에게 시나리오를 맡겼고 감독으로 기대주였던 조감독 김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원한 스승 이봉래 감독도 김기 감독의 데뷔를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부산 다대포에서 ' 동백아가씨 '를 크랭크인 하는 날 이봉래 감독은 부산까지 내려와 김기 감독이 연출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김기! 잘해라!' 하며 격려를 보냈고 ' 고맙습니다, 선생님!' 얼마나 멋진 스승과 제자의 모습인가? 영화 속에서 '동백아가씨'주제가는 이미자 의 노래를 립 싱크해서 바의 마담이 된 엄앵란 이 불렀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대학생 신성일 이 학습자료(꽃과 식물채집) 조사차 섬마을에 들어왔다가 실족하게 되고 섬처녀 엄앵란의 아버지 김승호 가 그를 구출해주면서 엄앵란과 신성일의 사랑은 싹튼다. 신성일은 기약없이 서울로 떠나고 엄앵란은 임신한 배가 불러오자 아버지 김승호의 눈을 피해 신성일을 찿아 서울로 올라온다. 갈 곳 없던 엄앵란이 깡패두목 황해 를 만나 보호를 받으면서 애를 낳고 바의 인기 마담이 돼서도 신성일을 못잊어 '동백아가씨' 노래를 부르는데 마침 바에 온 신성일이 엄앵란을 보게되고 다시 둘의 사랑은 뜨겁게 불붙는데.. 깡패두목 황해의 순정적인 사랑이 얽혀드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지금으로선 진부한 스토리보드지만 1960년대 당시로선 손수건을 몇 개씩 적셨던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 동백아가씨 '로 화려하게 데뷔한 김기 감독은 1965년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를 연출하면서 멜로 감독의 위치를 확고히 해놓고 세 번째 영화로 공군영화 ' 성난 독수리 '를 연출했다. 멜로 영화에서 갑자기 군사영화로 장르를 옮긴 것은 '동백아가씨'의 제작자 노헌조 의 친구였던 공군장교가 많은 소재를 제공하면서 공군영화제작을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해에 ' 첫사랑 ' 1967년에 ' 독거미 ' ' 남매 ' 1968년에 ' 연상의 여인 '에서 내가 시나리오에 참여한다. 소설가 곽학송 의 시나리오에 윤색으로 가담하면서 난 김기 감독과 바늘과 실처럼 30여년 가까이 소중고 행복한 인연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한성영화사 정진모 사장이 제작한 '장마루촌의 이발사 '에 김기 감독과 내가 동승했다.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제작되면서 참으로 희한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내 친구 중에 도봉산 암자에 은거한 도사 한사람이 있었다. 김기 감독과 정진모 사장이 부인을 동반하고 나의 안내를 받아 유난히 더운 여름날 도사를 찾아간 것이다. 무더운 한여름 산행으로 땀에 훔뻑 젖은 우리 일행은 암자 앞에서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고 있을 때 도사가 나타나서 대뜸 나를 가르키며 한다는 말이 '야, 너 왠 거지하고 같이 다니냐?' '거지라니? 임마! 한국영화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사장님을 거지라니?' 정진모 사장은 육척 거구에다 한여름에도 신사복에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 신사이며 명동 주먹왕 이화룡 의 왼팔이었다. 한주먹에 내 친구 도사는 사망할 수도 있었다. 점을 보기는커녕 일촉즉발 험악한 사태를 김감독과 내가 기적적으로 진정시킨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뒤 도사의 말이 씨가 됐는지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그때 연일 계속된 한일협정 반대 데모로 인해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 연출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이에 탄력을 받은 김기 감독은 그 다음해에는 무려 7편을 연출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 설녀 ' ' 초심 ' ' 목메여 불러봐도 ' ' 가슴에 맺힌 눈물 ' ' 울지도 못합니다 ' ' 한발은 지옥에 ' ' 용호7협 '등 다양한 작품들 일곱 편을 맹렬히 연출해 낸 것이다. 연이어 1970년에 ' 천사여 옷을 입어라 ' ' 울고간 여인 ' '' 일등사장 ' ' 돌아온 남아 ' ' ' 사랑에 목숨걸고 ' 등 5편을 연출하면서 김기 감독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1971년에는 ' 욕망의 사나이 ' ' 두남자 ' 1972년 ' 토요일 오후 '' 어머님전상서 ' ' 내실 사모님 ' 그리고 1973년 ' 어머니의 영광 '을 연출하고 김기감독은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 행운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 동백아가씨 '로 감독 데뷔를 한 것이 첫 번째 행운의 시동을 건 전환기라면 1973년 ' 여로 '를 제작과 감독을 겸한 것이 두 번째 행운의 신호탄이었다. ' 여로 '의 흥행은 가히 천문학적 인파를 동원했고 김기 감독은 마침내 황금마차를 탄다. 김기 감독이 감독 데뷔작이 라디오 드라마였고 그의 첫 번째 감독 겸 제작한 작품은 TV연속 드라마였다. TV 연속극으로 인기가 폭발했던 '여로'를 TV가 없어서 보지 못해 목이 탔던 사람들이 '여로'가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개봉이 되자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말았다. 연속극에서 천정부지로 주가를 올렸던 인기스타 태현실과 장욱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해서 웃기고 울리자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연속극으로 '여로'는 일년여 긴 시간을 웃기고 울렸다면 영화 '여로'는 단 두 시간 안에 울리고 웃기고 다해버리자 그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전국의 흥행업자들이 ' 여로 '속편을 만들어 달라고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와 턱바치게 졸라댔다. 물론 김기 감독은 '여로'속편도 제작감독을 겸해서 발표했다. '여로'속편도 전편 못지 않게 대박을 터트렸다. 이때가 김기 감독의 영화인생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김기 감독의 잘다져진 연출력은 재력과 함께 빛을 더하면서 제작 겸업에서 떠나 연출에만 전념해서 수십 편의 명작들을 감독해 낸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어렵게 명작들을 골라낸다면 우선 1978년에 언어의 마술사라는 드라마작가 김수현 이 소설로 발표한 '상처'를 김기 감독이 영화로 주옥처럼 빚어낸 것이다. 김자옥 과 이영하 가 주연을 한 ' 상처 '는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다시 한번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탈렌트였던 이영하는 '상처'에서 은막의 스타로 첫데뷔를 힌다. 그리고 탈렌트였던 원미경 이 영화배우로 데뷔한 첫작품이 김기 감독이 연출해서 대박을 터트린 ' 청춘의 덫 '(1979년)이었다. '청춘의 덫' 역시 김수현이 TV드라마로 발표하면서 인기 절정을 향해 달리던 중 방송심의위에서 방송중단 선고를 받은 작품이였다. 인기 드라마였으나 중도하차한 드라마라서 중반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뭉텅 없었다. 김기 감독과 나는 '청춘의 덫'의 하체 만들기에 돌입했고 거의 몇 달을 목욕탕에 들어 앉아 땀을 빼가며 디스커션을 했다. 영화 ' 청춘의 덫 '에서 가난한 한진희는 회사원인 유지인 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나 한진희 는 출세욕에 불타 유지인을 버리고 회장의 딸 원미경 유혹한다. 배신당한 유지인은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고 회장의 큰아들에게 접근해서 한진희를 잘라버리려고 계략을 꾸민다. 여가서부터 드라마에 하체가 없는 거였다. 나는 시나리오에서 하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진희는 유지인의 계략을 간파하고 우여곡절 끝에 유지인을 선제공격키로 하고 유지인을 살해한뒤 시체를 유기한다. 그리고 돌아오던 한진희는 흥분한 나머지 차의 핸들을 잘못 꺽어 차가 천길 벼랑으로 굴러 사고사를 당한다. 며칠 후 한진희의 무덤에 목례를 하고 떠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유지인이였다. '청춘의 덫'도 극장개봉에서 대박을 터트려 제작회사를 돈방석에 올려 놓는다. 실향민인 김기 감독은 남북 문제를 심층 있게 다뤄낸 문제작 ' 남과북 '를 1984년 연출해서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고 여세를 몰아 1985년에는 문예작품 ' 화녀촌 '을 만들어 예술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한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출한 극영화가 51편 군홍보영화 걸작들이 30여편 모두 80여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마지막 작품으로 이광수 원작 ' 유정 '을 만들고 조용히 충무로에서 비켜난다. 김기 감독 그의 인생 사전에 '실례'란 단어는 찿기 어렵다. 좀처럼 남한테 실례를 하지 않는 영화감독 김기. 그를 처음 사귀기는 좀 어렵다는 사람이 있다.그러나 한번 알게 되면 영원불멸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다정다감한 충무로의 신사이다.단언할 수 있는 것은 김기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 영화인은 없다. 그만큼 그는 인간관계의 폭이 넓다.그중에도 이미 고인이 된 김응천 감독, 그리고 설태호 감독, 조문진 감독, 문여송 감독과도 교분이 두터웠고 시나리오작가로는 내가 김기 감독의 곁을 가장 많이 지키지 않았나 싶다. 많이 변했고 많이 좋아졌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화려했던 충무로 시절, 주인의 한사람이었던 김기 감독이 이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비켜섰지만, 언제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충무로에 자주 보이시기를 소망한다. 문상훈(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29년 2월 15일 함흥 출생 흥남화학전문학교 졸업 1964년 < 동백 아가씨 >로 데뷔 <작품 연보> 1964 동백아가씨 1965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 성난 독수리 1966 첫사랑 1967 독거미 / 남매 1968 연상의 여인 / 장마루촌의 이발사 1969 설녀 / 초심 / 목메어 불러봐도 / 가슴에 맺힌 눈물 울지도 못합니다 / 한발은 지옥에 / 용호칠협 1970 천사여 옷을 입어라 / 울고 간 여인 / 일등사장 / 돌아온 남아 사랑에 목숨걸고 1971 욕망의 사나이 / 두 남자 1972 토요일 오후 / 어머니 전상서 / 내실사모님 1973 어머니의 영광 / 여로 / 배뱅이 1974 속 여로 / 가버린 사랑 / 설야 1975 형사 배삼룡 / 반수반인 1976 졸업생 1977 별삼형제 / 병사와 아가씨들 1978 상처 1979 돌의 초상 / 청춘의 덫 1980 여자이기 때문에 / 마지막 밀애 1981 겨울에 내리는 봄비 1982 유혹 / 겨울사냥 1983 약속한 여자 1984 남과 북 / 도시에서 우는 매미 1985 초야에 타는 강 / 화녀촌 1987 유정 외 80 작품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