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판 위의 여인
- 감독
- 구로사와 기요시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타하 라힘, 올리비에르 구르메, 마티유 아말릭
지금 말하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지극히 사적인 영화들의 목록이다. 만들고 싶은 영화, 꿈꾸는 영화들, 마음으로 두고 싶은 영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열 편의 작품은 굳이 말하자면 각별히 올해 내 마음에 다가왔던 영화들이다. 그러니 작품을 평가하거나 가치를 나열할 생각 대신에 마음이 동했던 몇 가지 이유들을 적으려 한다. 먼저, 최근에 세상을 떠난 두 작가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 >(1993), 그리고 샹탈 아커만의 < 노 홈 무비 >(2015). 이 두 편의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기획한 추모전의 일환으로 상영했다(사실 이들을 추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삶과 죽음을 간결하면서도 대담하게 다룬 작품들인데, 두 편 모두 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올리베이라는 영화가 예술이 아니며, 인생도 아니고, 그 둘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 말했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영화는 늘 그 사이에 있고, 우리 또한 영화들 사이에 있다. 집을 보여준다는 것은 관객을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공간에 초대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초대받을 만한 친밀한 이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우리들의 방문이 작별을 통고받는 자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장례식에 초대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실은 우리가 함께할 시간을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이라 생각한다. 후카다 코지의 < 사요나라 >(2015)와 필립 그랑드리외의 < 밤임에도 불구하고 >(2016)는 바라보는 것의 불안을 오래간만에 느낀 작품들이다. 후카다 코지의 영화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자면,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대전아트시네마에서 개최한 영화제에서 두 차례 상영했다. 히라타 오리자의 안드로이드 연극을 원작으로, 이른바 ‘포스트 3.11 영화’의 계열에 자리 잡을만한 작품이다. 미래의 어느 때, 원전사고가 일어난 일본에서 해외 이주정책이 발표되고, 폴란드 난민 출신의 여인은 이제는 더 이상 떠날 곳을 찾지 못해 예정된 죽음을 기다린다. 하루하루의 소멸될 시간에서 유일한 말벗은 시를 읽어주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창가의 소파에 누워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여인은 마침내 숨이 꺼지고, 시간이 흘러 그녀의 피부는 썩어들어 가고 한 줌의 뼈로 남게 된다. 그 모든 시간을 그녀 앞에서 꼼짝 않고 바라보던 이는 그녀의 로봇이다. 우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게 될 세계에서 우리의 죽음을 지켜볼 시선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파멸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매혹적인가. 이어지는 세 편의 영화는 특별히 나이의 감각을 예민하게 느끼게 했던 영화들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민하고 자숙한다. 자기 자신으로 남는 피로감과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야 할 욕구 사이에서 주저하고 용기를 내기도 한다. 주아옹 니콜라우의 < 존 프롬 >(2015)은 십 대들의 욕구와 환각 모험을 그리는데, 여전히 이런 경쾌한 움직임이 영화에서 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몹시 반가웠던 영화다. 이제 서른인 대만의 여성감독 위에이산의 < 어린 부모 >(2015)는 내가 꼽는 올해의 데뷔작 중의 한 편이다. 이 영화의 라스트는 당분간 잊지 못할 것 같다. 안이한 결말로 쉽게 끝나지 않으면서, 얇지만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서늘한 느낌이 오래 남았던 영화다. 비극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한 번 더 기회가 여전히 주어진다는, 그럴 기회가 있음을 믿게 하는 영화다. 사실 이 두 편의 영화는 이 작품을 본 소수의 관객들과만 대화를 나누고 싶은 ‘나만의 리스트’로 남게 될 것이다. 미아 한센 러브의 < 다가오는 것들 >(2016)은 유일한 개봉작이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만든 성숙한 영화라는 점에서 공감했다. 생 말로의 고요한 섬, ‘파도와 바람 소리만을 듣고자 했다’는 샤토브리앙의 무덤에서 시작하는 오프닝이 영화가 끝난 뒤 다시 생각난다. 영화는 어머니의 죽음을 거쳐,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여인의 고립과 분리를 마치 섬의 고립처럼, 조수간만의 물결처럼 밀려오고 떠나가게 한다. 한때 급진적인 생각을 지녔던 주인공 여인은 학생들의 파업에 반발하고, 변모하는 철학 서적 마케팅 시장의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지어 급진적인 사상의 제자에게서 사고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듣는다. 나도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자각! 그녀는 “난 변했다”고 말한다. 제자는 그녀에게 “그런데 세상은 그대로인 걸요. 더 나쁘기만 해요”라 반문한다. 변한 게 없는 변화의 삶이라니. 삶의 변화란 어떤 마음의 결심을 하는 것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대신 다른 곳에 가고,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른 것을 듣고, 다른 책을 읽고,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것으로나 가능할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켄 로치의 두 작품은 영화라는 노동을 떠올리게 한다. < 은판 위의 여인 >(2016)에서 한 컷을 촬영하는데 몇 시간 내지 하루가 걸리는, 노출 시간이 긴 촬영을 고집하는 은판사진작가의 강박적인 작업은 이미지에 대한 어떤 기대가 없다면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위험하고 지루한 노동일 것이다. 영화작업이란 여전히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노동이다. 켄 로치의 영화는 이제는 작가적 접근보다는 어떤 하나의 사상이 작동하는 영화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외에 다른 불만을 내세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미 사상이 되어버린 예술가의 견해라고 할까. 다니엘 블레이크, 그는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본디 그에게 속한 존엄을 되돌려 받기 위해 주장한다. 행복에의 기대, 그 이미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켄 로치에게 영화라는 노동은 시민에게 존엄을, 시민권을 되돌려주는 예술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마도 나 홀로 이야기하게 될 한 작품이 남았다. 케이타 무카이의 < 초콜릿 케이크와 호류지 >(2016)가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이들은 내가 아는 한 서너 명에 불과하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제주영화제에서 두 차례 상영한 바 있으니, 제주 시민들 백여 명 정도가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나라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작은 미술관 강당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보느라 서다 앉기를 반복하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했다. 나라에는 사슴은 많지만 국제영화제가 개최될만한 영화관은 없다고 한다. 나라시의 지원도 끊겨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어 개막식 레드 카펫 행사에 나섰다. 영화제의 중심에는 알다시피 가와세 나오미가 있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내게 영화제 방문은 그녀에 대한 어떤 선입견들을 깨는데 충분한 기회였다. 그녀의 수고와 노력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였다. 아무튼, 이 작품은 실은 큰 기대 없이 보았던 영화다. 그때 그 시간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였을 뿐이다. 영화 경험이 전무한 스물네 살의 청년이 만든 자전적인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아 아동 양호시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카탈로그에 실린 짧은 소개 글을 읽으며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될까, 염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몸을 뒤척거리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는데, 첫 내레이션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석양에?물든 호류지(나라현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절이라고 한다)가 보이면서 배경에는 희미한 종소리가 울린다. “호류지의 종은 두 시간마다 울린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금속의 울림은 온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울려 퍼지다가 사라져 간다. 내 어린 시절, 하루의 끝에서 울리던 그 소리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호류지의 종소리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아동 양호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재촉하는 불안한 소리였다. 양호시설의 통금시간은 여섯 시. 밤 아홉시에는 소등이 된다. 화면에는 마치 수용소를 보여주는 것 같은 몇 장의 사진들이 슬라이드 화면처럼 지나가고, 날마다 똑같은 고아원에서의 반복적인 일과들이 설명된다. 그나마 특별한 날이라면 달이 바뀔 때마다의 생일잔치였다고 한다. 파티 장식도 없고, 음악도 없었고, 늘 똑같은 축축한 버터크림의 초콜릿 케이크가 전부였던 생일잔치이다. 그런데 이 달콤한 초콜릿은 프루스트의 마들렌과도 같아 그에게 어두운 과거를 단박에 떠올리게 한다. 감독 케이타 무카이는 이 작품으로 양호시설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을 찾아가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18세가 되면 아이들은 양호시설을 떠나 자립해 살아가야만 한다. 그는 이제 성인이 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가고, 양호시설에 자신을 맡긴 아버지와 힘겨운 대화를 시작한다. 같은 처지의 아이들에 관심을 두어 양호시설 자원봉사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촬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영화작업은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의 열등감, 부모에 대한 분노, 가난과 학대받은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말하게 하고,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예전의 친구들과 교류하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들에게 기억은 그러므로 일종의 이중구속으로, 어떤 끔찍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들은 양호시설에서의 삶을 비판하되 부정하지 않는다. 비록 수용시설의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 기억과 시간은 이제 간신히 긍정할 수 있게 된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를 한편으로는 달콤하고 씁쓸한 기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든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표현한다. 초콜릿 케이크와 호류지의 종소리는 이 둘의 특별한 결합이다. 기술적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케이타 무카이의 촬영이 가장 탁월한 표현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반 이후의 장면부터는 내내 서서 보아야 할 정도로 몹시 감동을 받기도 했다. 나라국제영화제에서의 첫 상영 후 잠깐 감독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작품이 상영되기를 기원한다고 말을 건넸다. 그 자리에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그의 친구들도 함께했다. 때마침 올해 제주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상영할 수 있었고, 상영 후 그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해외에서의 첫 상영에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공개될 만한 작품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했고, 더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가 국내에서도 더 상영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그를 한 명의 작가로서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삶이 영화라는 것을 통해 더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떻든 나는 그의 다음을 기대하고 있다.
# 구로사와 기요시는 걸작을 만드는 감독이 아니라 명장면을 만드는 감독이다. 물론 이건 다소 과잉된 진술이다. 하지만 < 은판위의 여인 >을 보고 나면 과도함을 감수하더라도 그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했고 기요시의 작품들 중에서는 하위에 속할 만한 < 크리피: 일가족 연쇄 실종 사건 >조차 몇몇의 밀도 높은 명장면을 보유한다. 특히 살인마가 피해자들을 가둬 놓은 감금실 장면은 보는 이의 신경을 온통 곤두서게 한다. 분위기와 결이 현격하게 다르지만 <은판위의 여인>에는 명장면들이 훨씬 더 많고 무엇보다도 이 점이 이 영화의 마력이다. 그러니 이 영화를 걸작이라고 부르는 건 다소 부정확하거나 싱거운 표현이 될 것 같다. <은판 위의 여인>은 명장면들의 영화다. # 따라서 다음은 해당 장면들에 관련된 몇 가지 메모다. 하지만 먼저 양해를 구해야 할 것 같다. 미개봉작이므로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작품의 줄거리와 분위기를 최소한이나마 정리해야한다는 필요를 느꼈지만, 결국 그렇게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방식으로 쓰고 싶어졌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걸맞게 사사로운 형식으로 써보는 것이 좋겠다고 구실로 삼았다. 영화를 보고 떠올린 단상 몇 가지를 거칠지만 짧게 적었다. < 은판위의 여인 >을 관람한 이들에게는 해당 장면을 다시 떠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고, 아직 관람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다소 난감하더라도 도리어 이 영화의 장면들을 상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 저 카메라는 왜 저렇게 큰 것일까. 실제로 저렇게 큰 카메라가 있었다는 말일까. 있다고 해도 저 대형 카메라의 존재는 내게 지금, 실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상상적인 것으로 느껴지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스테판(올리비에 구르메)의 사진 작업 조수로 온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 장(타하르 라힘)조차 스테판에게 이렇게 묻지 않았던가. “이게 뭔가요?”라고. 스테판은 무뚝뚝하게 말해준다. “카메라야”라고. 그러니 이것은 촬영 장비에 관한한 기초적인 지식이 있을 법한 사진 조수조차도 못 알아보는 카메라가 아닌가. 영화 속 스테판의 대형 카메라를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스테판은 19세기 은판 사진술인 ‘다게로타입’을 현대에 와서도 고수하는 사진작가다. 그런데 그의 카메라의 몸체는 성인 남자 키에 맞먹을 정도로 높고 길이는 훨씬 더 길다. 이런 카메라가 실제로 존재하는지(했는지) 아닌지, 그 실존 유무가 중요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 나는 이 비상식적으로 큰 카메라를 처음 마주했을 때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 크기 때문이고, 크기 때문에 강조된 형상 때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화에 음산함이 깃들어 있다면 그건 대저택이라는 흔한 공포영화의 장소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서 처음 봤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이 구형의 대형 카메라 때문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카메라라고 말했지만 이건 카메라가 아닐 수도 있다. 이건 차라리 괴수(괴물)가 아닐까. 기요시는 구식으로 오랫동안 찍어야 하는 은판 사진술과 자신의 영화 만들기의 유사성을 시사했는데, 그런 건 사실 아무래도 괜찮다. 이 카메라가 외눈박이에 주글주글한 검은 거죽의 형상을 지닌 대형 괴수처럼 느껴진다는 게 더 중요하다. 스테판은 이 괴수-카메라 앞에 딸 마리(콘스탄스 루소)를 모델로 세워 자신의 예술을 실현한다. 스테판이 마리의 몸을 고정기에 묶고(그 고정기란 중세 시대의 고문 기계를 또한 연상시킨다) 장시간 노출로 사진을 찍을 때, 마치 괴수가 재물의 육체와 영혼을 서서히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함을 느끼게 되는 것은 과연 나의 상상이기만 한 것일까. # 어떻게 된 일이었던가. 이상하게 기억이 명확하질 않다. 아버지가 실수로 밀었던가. 마리가 실수로 미끄러졌던가. 이유는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기요시의 영화답게 사건은 화면 바깥에서 벌어지고 그 사건의 결과는 프레임 안으로 밀려들어온다. 카메라는 계단을 정면으로 잡고 있다. 그런 뒤에 계단 주위를 천천히 얼마간 가로 지르며 서성인다. 이 카메라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궁금해질 무렵, 갑자기 와르르 무언가 쏟아져 내린다. 마리의 몸이 계단을 따라 굴러 내려온다. 화면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쏟아지듯이 혹은 던져지듯이 추락한다. 기요시는 이 장면에서 드라마의 전환이 일어난다고 말했지만 그것보다 그 추락의 급작스러운 물리적인 충격이 더 강력하다. 물론 이 상황은 기요시의 다른 영화에서도 본 적이 있다. < 도쿄소나타 >에서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이층에서 혼내고 있었고 카메라는 1층에 있었다. 그 때 계단을 따라 어린 아들의 몸이 갑자기 거꾸로 추락한다. 하지만 < 은판 위의 여인 >에 이르러서야 계단-추락의 장면은 마침내 절정에 이르렀다는 느낌을 준다. 어쩌면 이것과 유사한, 즉 위에서 아래로 쏟아지고 내리 꽂히는 기요시의 운동적 충격은 여러 영화에 다양하게 배치, 전개되어 왔을 것이다. 예컨대 < 회로 >를 다시 보다가 이런 장면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의 후반부다. 허공, 즉 프레임의 위쪽에서 아래쪽으로 수직강하 하면서 한 남자를 저승으로 끌고 들어가는 붉은 옷의 유령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 기요시가 갑작스런 물리적 충격 뿐 아니라 은근한 심리적 표현에도 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이 하나 있다. 장과 마리가 함께 살기로 한 뒤의 일이다. 하지만 마리가 사람인지 유령인지 장은 혼란스러울 것이다. 관객은 그렇게 짐작할 수 밖에는 없다. 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때 그는 강가의 수색 작업을 목격하고는 그곳에서 서성거린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마리의 시체가 떠오르지나 않을까 생각했을 수도 있다. 바로 그 때다. 물속에서 서서히 잠수부가 떠오른다. 마리의 시체 대신 혹은 그 누구의 시체 대신 잠수부의 떠오른 상체를 장은 잠시 공허하게 바라보게 된다. 이 장면에는 사실상 아무런 설명이 없다. 물속에서 떠오른 잠수부와 그를 바라보는 장의 시선 밖에는 없다. 그 둘 사이의 뚜렷한 관계도 없다. 하지만 이 장면에는 의심과 두려움이 가득하며 심리적 목소리가 만연하다. 내가 같이 살고 있는 그녀가 혹시 유령은 아닌가 하는 장의 두려운 심리를 이 장면은 간결하고도 특별하게 외재화 해낸다. # 장과 마리가 떠나고 스테판은 혼자 남겨진다. 아니 사실은 죽은 아내의 유령과 둘이 남겨진다. 그리고는 그가 화원에 머무를 때 아내-유령이 마침내 스테판을 덮친다. 이 장면에 등장하는 아내-유령의 형상과 운동의 기이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요시 영화의 유령의 형상과 운동은 여러 가지다. 그들은 명확하고 빠르기도 하고 흐리고 왜곡되고 느리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유령(성)은 처음 본 것 같다. 이걸 무엇이라고 불러야 마땅할까. 괴이한 정지 쇼트들이 몇 개 연이어졌던 것 같고 아내-유령은 각 쇼트마다 정지된 포즈로 박혀있었던 것 같다. 정지되어 있는 그녀의 얼굴, 정지된 채 팔을 뻗은 그녀의 몸,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것들이 스테판에게 달려든다. 그 때 이런 질문이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 같다. 왜 그녀의 모든 몸짓들은 정지되어 있는 것일까. 이것을 아내-유령이 달려든다기보다는, 아내-유령이라는 사진들이 달려드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면 유령이 달려든다기보다 사진이 달려든다는 인상이 더 확실하다. 어쩌면 그럴 지도 모른다. 이 유령의 형상은 마치 빛 번짐 현상이 일어나 망쳐진 사진 혹은 하얗게 화이트 아웃 되어 버린 사진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스테판의 사진술 혹은 재현에의 집착이 낳은 부작용이 이런 유령의 형상과 운동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우린 짐작하게 된다. # 스테판이 아내-유령의 형상과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면 장은 마리-유령 이라는 형상과 운동에 관련되어 있다. 가령 이런 장면이 있다. 아침인 것 같다. 장은 침대에서 눈을 뜬다. 그런데 곁에는 있어야 할 마리가 없다. 장이 시선을 돌리면 카메라는 서서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패닝하고 방의 저 구석 문 뒤에 마리가 하얀 속옷을 입고 우두커니 서 있다. 이 간단한 패닝은 간단한데도 불구하고 놀랄 정도로 우아함과 불길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이것이 < 회로 >에서 시도되었던 한 장면을 질적으로 집중 도약시켜 이뤄낸 장면이라는 것은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이 장면이 유령과 벽이라는 기요시 영화의 유령성에 대한 우아한 터치임은 이 장면을 보는 순간 느꼈던 것 같다. 기요시의 유령들은 종종 벽에서 출현하여 벽으로 사라져간다. 그 벽에 마리가 몸을 바짝 붙이고 얼어붙은 채로 서 있을 때 거기에서는 기이한 슬픔이 느껴진다. 화면 바깥의 저 비가시적 무언가에 이르는 그 힘의 방향과 세기가 우아하고 불길하다. 혹은 장의 두려움과 의심의 지점으로부터 마리의 불안정하면서도 위축된 몸이라는 지점으로 공기를 몰아가며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패닝해가는 카메라의 그 움직임이 일으키는 힘의 방향과 세기만으로도 이 장면은 더 없이 아름답다. 이런 장면은 쉬운 것 같지만 흔치 않다. # 써놓고 보니 < 은판위의 여인 >은 기요시 영화의 명장면들 모음집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하지만 재활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보다는 여러 제약된 조건 때문에 시도는 했으나 집중하지 못했던 부분을 지금 여기서 마음껏 힘주어 세공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하다. 최근의 기요시는 인간과 유령의 대립이 아니라 인간과 유령의 공존의 세상을 자주 그린다. 그럼에도 대립의 세계에서 공포를 극화할 때 사용했던 미학을 이 공존의 장 안에서도 재등장시킨다. 공존이라는 주제와 공포를 극화했던 미학적 효과 사이에 원활한 접점이 찾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단언하지 못하겠다. 사실은 기요시의 길에 대해서는 언제나 낙관도 비관도 할 수 없다. 그는 차라리 그의 영화 < 회로 >의 그 유명한 유령처럼 멈추지 않고 걸을 뿐이다. 천천히 흐느적거리며 한 번 크게 휘청 거려 넘어질 뻔 하다가도 또 다시 일어나 걸으면서 끈질기게 영화를 만든다. 때문에 그에게는 걸작의 행진 같은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그의 필모그래피가 휘청거린다 해도 각 영화에는 잊을 수 없는 명장면들이 꾸준히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은판위의 여인>은 가장 중요한 일례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