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갚은 까치
- 감독
- 박건웅
- 제작년도
- 1999
*영화의 전개 과정을 마구마구 적어놓은 글입니다. 딱히 반전이 있는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아직 보지 않은 분은 나중에 읽는 게 낫겠습니다. < 에듀케이션 >을 보면서 따로 제목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다. 교육에 관한 영화? 그렇게 읽으면 좀 웃겨지지 않나. 그런데 김덕중이 만든 두 번째 장편의 제목이 < 컨버세이션 >이니까 제목을 유심히 보게 된다. 이 감독이 제목에 영어 한 단어를 계속 붙이는 이유는 뭘까. 생각만 계속하니 제목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일까? 그래서 대화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고, 대화하는 내용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굴레가 덫이 되고, 대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거나 들리지 않고, 이상한 지경에 빠졌다. 기억해 보니 이 영화를 여러 번 본 것도 아니고, 딱 한 번 봤을 따름이다. 그런데 그들의 대화의 경연에 여러 차례, 그것도 줄곧 눈과 귀를 대고 있다는 착각까지 일어난다. 이건 무슨 주술 같은 것에 빠진 건가. 슬슬 피곤함이 몰려와 영화에 대해, 정확하게는 그들의 대화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날 즈음 나는 다시 이 영화를 꺼냈다. <컨버세이션>은 대화에 관한 영화다, 이런! 역시나 나는 같은 생각으로 이 글을 쓰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로 페이드인하면, 세 명의 여자 – 은영, 명숙, 다혜가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중이다. 환한 햇살이 그들 사이로 비친다. 아무리 봐도 나이 차가 나 보이는데, 그들은 친구처럼 말을 놓는다. 대화의 내용으로 미뤄 그들은 모두 파리에서 유학하며 살았던 모양이다. 그들의 대화 내용을 만약 프랑스인이 듣는다면 콤플렉스에 빠진 아시아인이라고 코웃음 칠 테고, 한국인이나 아시아인이 듣는다면 별로 친근하게 지내고 싶지 않은 재수 없는 인간이라고 흉볼 것 같다. 10분이 지나고, 다음 장면에서 명숙과 다혜가 어둑어둑해진 아파트 비상계단에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한다. 대화 속 관계의 영역이 더 넓어지는데, 한 번 박인 밉상의 인이 더 깊어진 탓인지 특히 명숙과 다혜에 대한 비호감은 좀체 회복되지 않는다. 대화를 마치고 은영의 집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비상문이 열리지 않아 추위에 떠는 모습을 보면서 깨소금 맛이라고 여기면서도 미안하지 않다. 다음 장면은, 술에 취한 은영이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이동하는 걸 보여주는데, 앞선 장면과 시간상 연결이 되지 않는다. 기사와의 대화 내용으로 보아 프랑스로 떠나기 전날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은영과 명숙이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대화를 나누다 성가신 상황을 겪고, 다음 장면은 다시 현재(대화 도중 ‘한남’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로 돌아와 한밤에 은영과 두 친구가 대화하는 모습을 담는다. 첫 시퀀스에서 대화의 주제로 나온 대로 그들은 프랑스어로 이야기하기를 시도한다. 은영은 곁에 있는 아기가 깨지 않도록 신경이 쓰인다. <컨버세이션>은 챕터로 나뉜 영화가 아니지만, 인물이 들어가고 나가는 시점을 기준으로 편의상 몇 개의 장으로 구분할 수 있다. 44분까지 전개되는 첫 번째 챕터는 은영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사건이랄 게 없거니와 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도 친절하지는 않다. 한 예로, 이 챕터는 대략 다섯 개의 시퀀스로 이루어져 있는데, 쇼트의 숫자로 쳐도 여섯 개에 불과하다. 두 개의 쇼트로 이뤄진 첫 시퀀스를 빼면, 전부 하나의 쇼트로 하나의 시퀀스가 구성되며, 제목 그대로 대화하는 모습만을 기록하고 있어서 정적이란 인상을 준다. 압권은 제일 긴 쇼트인 택시 내부 장면이다. 은영과 기사의 대화가 주 내용인데, 영화는 오직 은영만을 보여준다. 나는 화면 바깥에 있는 기사의 모습을 10분 넘도록 상상만 해야 한다. 현재의 어느 하루의 낮, 저녁, 밤 시퀀스와, 그 사이에 낀 과거의 두 시퀀스가 부드럽게 연결된 편도 아니다. 시간과 시간이 불쑥 드나드는 까닭에, 과거의 장면이 현재를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이러한 특징들이 평범한 영화는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하지만, 온갖 괴상한 영화가 설쳐대는 요즘에 <컨버세이션>의 형식이 유달리 신선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택시 장면에서 문득 설렘을 느꼈으나, 첫 번째 챕터가 끝날 때까지 나는 <컨버세이션>에 깊이 빠져들지는 않았다. <에듀케이션>을 만든 영민한 감독의 소포모어징크스인가, 그런 생각만 했더랬다. 감기려고 하던 눈이 반짝 떠진 것은 44분까지의 은영 챕터가 끝나고, 갑자기 낯선 인물들로 두 번째 장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한동안 은영은 스크린 밖으로 사라져 나오지 않는다. 여기선 승진과 필재의 씁쓸한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다면 은영이 나중에 그들 사이로 어떻게 들어온단 말인가. <컨버세이션>은 별개의 이야기로 나뉜 옴니버스영화일까. 그런저런 예상을 하면서 영화를 보게 된다. 첫 장의 스타일은 이후에도 바뀌지 않는다. 쇼트의 길이는 길고, 인물(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라곤 없으며, 시간과 시간 사이로 갑자기 그와 그녀가, 그와 그녀의 이야기가 들어왔다 나간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바깥 공간의 개입에서 비롯되는데, 첫 장에서 갇혀 있던, 그래서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만 대화하던 인물들이 바깥의 공간에서 움직인다는 점이다. 두 번째 장의 인물인 승진과 필재는 대화하면서 움직이는 존재다. 승진이 “걸을까”라고 말한 뒤 유모차를 끌며 앞장서 걸으면, 필재가 그를 따라 공원 한 귀퉁이를 도는 장면이 그러하다. 몸의 움직임과 함께 대화가 끌려 나오고, 그들은 원래 위치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 움직인다. 이러한 신체의 움직임은 인물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동시에, 대화에 에너지를 부여한다. ‘인물이 느끼는 감정, 인물 관계의 변화’ 같은 것들에 대화가 어떻게 관여하는가, 그것이 신기하게 눈에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과거는 기억 속에서 미화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이런 작품에선 더욱 그러하다. 첫 번째 장에서 은영이 딸 라온을 둔 시점을 현재로 상정한다면, 이후에 튀어나오는 것들은 대부분 과거의 언제일 확률이 높은데, 묘하게도 과거의 어떤 이미지들이 뜻 모를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어느 날 밤, 집 앞에 차를 주차하지 못한 필재가 좁은 공간을 배회하는 장면이 그 중 하나다. 그는 차를 몰고 어디를 다녀온 길일까, 골목을 왔다갔다 하면서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이 장면은 저 뒤에 나올 열차 장면과 쌍을 이룬다. KTX 안, 아마도 필재와 만나고 돌아오는 길인 듯한 승진은 종이를 꺼내 편지를 쓴다. 그의 말대로 그건 아주 슬픈 편지다. 골목을 오가던 필재는 그런 편지를 받을 줄 모르고 있을 테지. 그런저런 생각들로 두 개의 이미지를 엮는 일은 곧 ‘애통의 미를 관조’하는 것을 뜻한다. 마찬가지로 아름답지만, 다른 정서와 마주하게 하는 장면은 승진과 필재가 버스킹을 구경할 때다. 여기서도 공연하는 가수는 화면 밖에서 목소리만 들려줄 뿐, 나는 승진과 필재만 쳐다볼 수 있다. 무심한 듯 앉은 필재에 비해, 승진의 앉은 자세는 어딘가 어색하다. 그는 안절부절못한다. 마침내 뒤로 누운 그의 손길은 가슴 속에서 주문하는 행동을 옮기지 못해 허공을 맴돈다. 짧은 아스라함이지만, 나는 이 장면에서 <모리스>를 처음 보았을 때의 감정이 전달됨을 느꼈다. 이 장면과, 승진과 은영이 산행에 나선 마지막 시퀀스는 대구를 이룬다. 앞선 장면과 달리, 승진의 태도는 자연스럽고 대담하다. 앞의 버스킹 장면이 있기에, 산행 장면의 승진을 보며 나는 미소 지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사이에 놓인 열차 장면이 승진에게 어떤 확신을 준 것일까, 이 영화의 대다수 장면이 그러하듯 ‘그렇다’고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어쨌든 <컨버세이션>의 인물들은 적절한 단어와 몸짓을 갈구한다. 자기 마음속 어떤 감정을 표현할 단어가 쉬 떠오르지 않아, 그것을 마음껏 밖으로 내뱉지 못해 답답해할 때도 있다. 현재의 은영은 결혼과 출산 이후 외로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편과의 관계에서 사랑의 감정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컨버세이션>은 어쩌면 그런 그녀의 감정이 찾아 나선 시간의 해법에 대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시간이 돌고 돌아 그녀는 끝내 산행에 나섰던 그 날로 되돌아간다. 은영과 승진은 여전히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하고, 그들의 대화는 다시 한 번 엇갈린다. “말을 해야 진짜인지 가짜인지 안다”고 자신 넘치게 말했던 은영은 “내가 너 사랑한다”는 승진의 말에 말문이 막힌다. 대화의 영화에서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 그렇게 오지만, <컨버세이션>은 그 대화의 끝에서 풍성함을 거둔다. 흡사 영화 내내 쏟아져 나오던 수많은 단어들이 하나의 순간을 위해 달려가는 양, 이리저리 맞서고 뒤엉켜 싸우던 감정의 선들이 대화의 결을 따라 정리된다. 하나의 원이 완성되는 순간, 하지만 이것은 진실과는 또 다른 문제다. 버스킹 장면의 승진이 산행 장면의 승진보다 덜 혹은 더 진실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다만, 그들의 관계가 커다란 원을 돌아 하나의 지점에 도착했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의 대화가 진실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승진이 편지에 썼던 것처럼, 우리는 맞는 길을 걷는 게 아니라, 각자 맞다고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것이며, 산행에서 돌아오는 그 순간에 은영과 승진은 적어도 맞다고 여긴 길을 선택했을 것이다. 대화의 영화라는 점에서 <컨버세이션>은 대화가 주를 이루는 몇몇 프랑스 영화와 근친 관계를 맺는다. 근래 등장한 프랑스 영화 중에 대화가 중심에 선 작품으로 < 러브 어페어: 우리가 말하는 것, 우리가 하는 것 >이 있다. 그런데 <러브 어페어>의 대화와 <컨버세이션>의 그것은 다르다. <러브 어페어>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빌려 대화하는 형식의 영화다. 여기서 대화는 구애의 방식이다. 누군가의 비밀을 전달하는 것처럼 대화하면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감정 속으로 접근하고, 그러한 접근은 결국 두 사람의 관계로 매듭지어진다. 대화는 직접적으로 인물과 인물에게 영향을 주는 수단이며, 진실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야기라는 형식을 빌린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와 차별화된다. <컨버세이션>에서 은영과 승진이, 혹은 그들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는 시간 순서대로 배치되지 않는다. 이 말인즉 그들의 대화는 이후의 감정에 어떤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영화의 엔딩에서 은영과 승진은 곧장 맺어질 듯이 대화와 감정의 연결점을 취하지만, 그것은 이미 흘러간 몇 년 전의 한 장면에 불과하다. 즉, 이 영화의 엔딩에서 벌어지는 대화의 손길은, 영화의 첫 번째 장에서 부부의 애정을 절감하는 은영에게 직접적인 은혜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만약 그랬다면 은영은 현재의 외로움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테지만, 그것은 자기 영역 밖의 일이다. 현재의 은영은 여전히 외로운 아내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상담할 때는 이런저런 조언을 풀어놓는 그지만, 정작 그 자신의 답은 찾지 못할 것이다. 영화가, 아니면 김덕중이, 그들 – 은영과 승진이 산을 찾아 대화를 나누었던 어떤 시간을 찾아간 것이지, 현재의 은영이란 인물이 과거 어느 시점의 자기 대화를 찾아낸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엔딩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무엇이라 설명하든 – 진실이든 풍성함이든 찬란함이든 신비함이든 농담이든 – 그것은 은영이란 인물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며, 굳이 말하자면 영화가 창조해낸 어떤 것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러므로 은영에 대해 안타까워할 이유 또한 없다. 누군가 <러브 어페어>의 리뷰에서 알랭 레네가 연상된다고 써놓은 것을 읽었다. 글쎄다, 레네가 영화적 생명의 중후기에 쌓아 올린 형식적인 경지를 감안한다면, <러브 어페어>보다 <컨버세이션>을 들이미는 게 더 적합해 보인다. 예를 들어, <스모킹 노스모킹>에서 각 인물이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말하느냐, 에 따라 알 수 없는 수많은 결과를 낳는 것과, 이런 길과 저런 길을 오가는 은영과 승진의 삶의 양태가 닮아도 더 닮았다. 김덕중은 대화에 관한 영화로 <컨버세이션>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 그가 완성한 것은 ‘대화의 영화, 영화의 대화, 대화의 작동 원리’에 대해 고심한 결과물로서의 영화다. 나는 말장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말했던 공원 장면에서, 승진이 물었다. “그래서 애수가 뭔데?” 필재가 대답했다. “슬픔과 비슷한 건데 설명하긴 어려워” 나중에 승진은 또 말한다. “너도 애 생기잖아, 아마 애수가 철철 넘쳐흐를걸?” 대화가 다 풀어놓지 못하는 것, 그것을 기어코 대화를 통해 이뤄내도록 창조해내는 것, 그것이 곧 인물의 관계를 만들어내고, 이윽고 인물이 대화를 통해 도달한 미지의 공간이 <컨버세이션>이다. 어느 날, 김덕중 앞으로 은영이란 인물이 도착한다.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그는 결혼해 딸 하나를 두었다. 겉도는 친구들의 대화 속에서 유일하게 자기의 외로움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사람이 그다. 김덕중은 다른 시간의 레이어에 놓인 그를 상상한다. 때론 그를 시간 밖으로 내던지기도 한다. 그가 부재하는 시간 동안, 그와 인연을 맺을 다른 사람들의 레이어가 겹겹이 쌓이다, 다시 은영의 레이어와 교차한다. 다른 시간과 다른 공간 속에서 다른 머리를 하고 다른 옷을 입은 여러 은영과 여러 승진이 그 사이를 떠돈다. 그 작업을 통해 김덕중은 은영에게 하나의 순간이 될 시간과, 그 시간의 대화를 빚어낸다. 현재에서 과거의 가능한 결과를 찾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이 영화에선 가능하다는 것을 김덕중은 영화적으로 설명하고 구현해 낸다. 어떤 서두름도 없어서 더욱 놀랍다. *무슨 까닭인지 글을 마칠 즈음 < 스프링 피버 >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두 영화를 비교하는 짓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김덕중은 로예와 전혀 다른 감성의 감독이다.
장윤미 감독으로부터 구미에 있는 KEC 기업의 민주노조를 촬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순간을 선명히 기억한다. 그녀가 만들 노동 다큐멘터리가 어떨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KMDb를 통해 두 차례 소개한 장윤미 감독 영화의 뚜렷한 특징은 감각적이고 직관적이며 자유로운 카메라의 운용이다. 종종 찾아오지만 소박하거나 찰나적이기에 붙들기 어려운 아름다운 순간을 그녀의 카메라는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 < 어머니가방에들어가신다 >(2014)의 거미줄이, < 늙은 연꽃 >(2016)에서 불쑥 틈입한 할머니의 미소가, < 공사의 희로애락 >(2018)의 아카시아가 흩날리는 순간이 그랬다. 궁금했다. 그녀의 카메라가 투쟁의 현장을 만나면 무엇을 보여줄까. 금속노조 KEC지회는 2010년 파업 이후 정리해고, 친기업 복수노조 설립, 손배가압류 등 사측의 지속적인 탄압에 굴하지 않고 민주노조를 지켜왔다. KEC지회는 교섭 대표 노조의 지위를 잃었지만, 2018년 임단협에 참여하기로 한다. < 깃발, 창공, 파티 >(장윤미, 2019)는 이 과정을 1년여 동안 기록한 다큐멘터리다. KEC지회의 전략은 교섭 단체인 친기업 노조가 사측과 협의한 내용을 전해 듣고 이를 분석하여 전체 조합원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친기업 노조의 조합원들까지도 설득해내는 것이었다. 전략은 성공했다. 사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나온 임단협 잠정합의안에 대한 전체 조합원 투표에서 60%의 반대를 끌어낸 것이다. 물론 이는 곧 새로운 싸움으로 이어진다. 같은 달, 교섭 대표 노조와 사측이 투표 결과를 따르지 않고 잠정 합의안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노동 운동과 노동 다큐멘터리의 차원에서 볼 때, <깃발, 창공, 파티>의 중요성은 현 KEC지회를 이끄는 노조 간부이자 작품 주인공의 다수가 여성들이라는 데 있다. KEC지회의 지회장, 부지회장, 수석 부지회장 모두 여성 조합원이며 임원급 회의 자리에 참석한 대다수 또한 여성이다. 투쟁의 방식을 고민하고 전략을 짜는 브레인 역할도 여성이자 민주노총 경북본부 교육국장인 배태선이 맡고 있다. KEC의 노조 간 차별, 임금 차별은 물론 이 차별들의 보다 근본적인 요인으로 작용하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이들의 목소리로 인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화적 차원에서 볼 때, 흥미로운 점은 역시 장윤미 감독이 택한 형식이다. 영화는 상당히 불친절한 방식의 재현을 시도한다. KEC지회가 처해있는 상황에 대한 짧은 설명과 이 영화가 KEC지회의 입장에서 전개된다는 언급 외에 다른 설명적인 정보들은 없다. 정리와 요약 대신, 관객은 그저 그 상황에 던져진다. 이 회의가 무슨 회의이고 날짜가 언제인지, 발언하는 조합원의 직위는 무엇이고 이름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는다. 개별 인물들의 인터뷰도, 상황을 설명해주는 내레이션도 없다. 카메라를 든 그녀 자신이 그랬을 것처럼, 회의를 하고 연대 투쟁을 하고 함께 산책하는 그들의 옆자리에 관객을 위치시킨다. 시간이 걸린다. 복숭아, 감, 귤. 계절마다 다른 과일을 먹는 조합원들을 보며 시간의 흐름을 정직하게 체험해야 한다. 관객들에게 뉴스를 보듯 상황을 단번에 파악하고 싶다는 조급함을 버리고, 인내심을 가지라고 요구하는 영화.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게 163분(최초 상영이었던 부산영화제 버전은 168분이다)을 보내고 나면 가랑비에 옷이 흠뻑 젖어있듯, 전체가 한꺼번에 느껴진다. 그녀는 누구이고 그 마음이 어떠한지, 10년이 넘도록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큰 승리 혹은 패배에 초점을 둔 노동 다큐멘터리들에서는 삭제되었을 작은 승리와 세세한 고민이 전해진다. 이 모든 것들이 인터뷰를 통한 말로 발화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결을 간직한 덩어리 채 다가온다. 기존의 장윤미 감독의 영화에서 마주할 수 있었던 경이로운 순간은 한두 개의 솟아오른 이미지 혹은 쇼트에서 비롯한 마법 같은 것이었다. <깃발, 창공, 파티>에서 그녀는 자신의 장기를 절제한다. 대신에 KEC지회 사람들과 함께하길, 이들에게 익숙해지길 관객에게 요청한다. 쉽지 않다. 그러나 그 긴 여정을 끝내고 나면 몇 가지가 선물처럼 주어진다. 연대, 존엄, 믿음과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이는 기존에 그녀가 선사해준 영화적 순간들과 다르지 않다. 희미하고 찰나적이지만, 보석처럼 빛난다는 점에서 말이다.
첫 키스 신의 수혜자에서 이완용 단골 배우로 해방 후 미군정기(1945년 9월 9일~ 48년 8월 15일)까지 제작된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독립전야>(1948)까지 29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 경찰의 지원 아래 만든 정책 계몽영화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愁雨)>(안종화, 1948), <여명>(안진상, 1948) 등 세 편이다. 이향(李鄕)은 이 가운데 <밤의 태양>(1948)으로 영화계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 ‘7’이라는 별명을 가진 불량배 역할이었다. 그는 영화를 찍는 동안 박기채 감독의 유난스런 호각 소리를 여러 번 들어야 했다. 박 감독은 일반적으로 쓰는 ‘레디고’대신 먼저 ‘레디’라 외친 뒤 호각을 불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 모조품이 아닌 각종 총기가 소품으로 사용되었다. 특수효과 기술이 빈약해 실탄을 넣고 쓰다 보니 배우들이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향, 「예(藝)에 살다, 연기일생(12)」 , 『일간스포츠』, 1980.1.18) 그는 <밤의 태양>에 이어 김성민 감독의 <사랑의 교실>(1948)과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마테오 팔코네」를 번안 각색한 <심판자>(1949)에 출연했다. 이렇게 조연에 머물렀던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 고학생으로 위장한 방첩대 대위 신영철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는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됐을 때 자신을 구해준 술집 종업원 마가렛(윤인자)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가 위장 대남 간첩(정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권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향은 그 여간첩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결말 부분의 키스 신을 찍기 위해 감독과 함께 1주일 동안 상대역인 윤인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스라고 해야 겨우 입술만 댔을 뿐인 어설픈 이 장면이 한국 최초의 키스신이 된 배경이다. [사진] 최초의 키스신으로 알려진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한 장면 이향은 <운명의 손> 이후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마의태자>(전창근, 1956),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 <형제>(김성민, 1958) 등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인생역마차>에서는 암흑가의 두목과 신문기자 1인 2역을, <마의태자>에서는 타이틀 롤을, <검사와 여선생>에서는 은혜를 입은 옛 은사를 법정에 세워야하는 검사 역을 맡고, <형제>에서는 남의 아내가 된 옛 애인 앞에 살인강도가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이와 같은 기회를 준 것은 <사랑의 교실>부터 <형제>까지 네 편에 불러준 김성민 감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 후의 배역들이 앞의 작품들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거나 비호감형, 악역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멜로드라마 보다 시대극이나 활극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진] <형제>(김성민, 1958)에 출연한 이향_사진제공 김종원 그 예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의 일본 경찰 주임,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윤봉춘, 남홍일, 1959)의 강압적인 일본 사신 하야시, <아아, 백범 김구 선생>(전창근, 1960)의 저격 미수범 한태구, <안개 낀 거리>(강범구, 1963)의 살인 청부 역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1959) 이후에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등 이완용 배역만 무려 여섯 번이나 맡아 ‘이완용 단골 배우’가 되었다 .(이향, 「예에 살다, 연기일생」 (19) 『일간스포츠』, 1980.1.27) 그는 1964년 한 해 동안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등 11편에 출연, 최다기록을 세우며 1991년 7월 29일 알츠하이머로 77세의 삶을 마칠 때까지 <원점>(이만희, 1967), <검은 장갑을 껴라>(이상언, 1971), <악인의 계곡>(김묵, 1974), <족보>(임권택, 1978),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초대받은 성웅들>(최하원, 1984) 등 모두 131편의 영화를 남겼다. [사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의 한 장면 단련된 몸으로 이미 맛본 단역 경험 독특한 저음이 만들어내는 광물성의 강한 목소리, 날카로운 눈매로 36년 동안 한국영화계의 길목을 지킨 이향은 1914년 2월 8일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근식(李根植)이다. 그는 아홉 살 때까지 강원도 홍청군 서면 동막리에서 자랐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자신은 일본 사람을 상대로 모피 장사를 했다. 이 소년은 집근처인 연동교회에 다니며 뒷날 부통령이 된 함태영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풍족한 아버지 덕에 서울주교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경신(儆信)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학기 초에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축구선수로 스카우트되는 바람에 학교를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축구가 싫어졌다. 이 학교를 나와 들어간 곳이 연희전문학교 별과(別科)였다. 별과란 축구와 야구선수로 구성된 일종의 특기 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연극에 있었다. [사진] <이름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 출연한 이향 이 무렵 낭만좌(座)라는 극단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조연 배우가 나가는 바람에 급히 자리를 메워야 한다며 출연을 권했다. 그 대타로 나가게 된 것이 <아편전쟁>의 쿠리 역이었다. 작은 역할이었으나 칭찬을 받게 되자 학업마저 중단했다. 연극 일이 늘면서 한 선배가 그에게 “고향을 그리듯이 조국을 잊지 말라”며 시골 향(鄕)자가 들어간 예명을 지어 주었다. 이향은 <밤의 태양>에 앞서 해방 전 눈에 안 띄는 배역이지만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스물다섯 살 때였다. 하루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작부장(이백산)이 불러 만났더니 영화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맡겨진 배역은 갑, 을, 병 세 명의 농부 가운데 한 명인 농민 역, 김유영 감독의 <수선화>(1940)였다. 의정부 촬영장으로 나갔더니 감독의 지시라며 바지저고리부터 입게 하고는 4, 5일 동안을 땅바닥에서 지내게 했다. 그래야만 농부의 분위가 몸에 밴다는 것이었다. 황달병을 앓고 있던 김 감독은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와서도 극성스럽게 현장을 지휘했다. (이향, 「예에 살다, 연기 일생(8)」 『일간스포츠』, 1980.1.14) 이향은 그 뒤 연극계의 선배인 극작가 이광래의 소개로 연극지망생인 처녀와 사귀었다. 1949년 ‘제3무대’라는 극단을 만들어 공연 준비에 한창 바쁠 때였다. 손 씨인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대한통운의 전무였고 오빠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선 그들의 교제를 적극 반대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동거로 맞섰다. 첫딸이 네 살이 되어서야 겨우 승낙을 받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1970년 이향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병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그런 아내도 6남매를 남긴 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