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티 뉴스 제345호
- 제작년도
- 1960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 특히 민간의 문화영화제작현장에서 40여년을 활동한 감독이다. 드물게 극장 흥행을 한 문화영화를 감독, 제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생소한 용어인 ‘문화영화’ 1)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가 제작, 유통되던 시기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화법을 제정하여 영화를 산업화하고자 하였다. 당시 제정된 영화법을 살펴보면 문화영화를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2) 또한 영화법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문화영화를 상영할 것을 고지하고 있다. 3) 1961년 발족한 국립영화제작소는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영화들을 제작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부터는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들을 제작, 유통하였다. 박희준 감독이 문화영화제작 분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를 졸업하고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하면서 부터이다. 박희준 감독은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 배치, 군악병 생활을 하였던 박희준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는 달에 제대를 하였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에 성공, 육군사관생도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할 당시 앞에 있던 군악대에 있었으며 이 행진을 마지막으로 구술자는 군을 제대하였다. 제대 후에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김기영 프로덕션에 연구생으로 잠시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당시 공보원에서 실시한 ‘공보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연기자의 꿈을 접고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를 결심하였다. 당시 문공부에서는 대대적인 모집을 하였는데 이는 병역기피자들을 단속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퇴사, 공석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00여명이 응시한 가운데 5명이 선발되었는데 입사 당시 직급은 ‘연예사’였다. 입사 동기로는 다보문화사 대표인 황왕수 씨와 김학수 감독, 박정근 감독 등이 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5명이 최종 합격하였고 이중에서 4명이 감독의 보직을 받았다.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당시 시라큐스에서 파견한 교육인원들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은 이들로부터 연출 등의 강의를 들었다. 국립영화제작소 근무 당시 양종해 감독, 배석인 감독 등 선배 감독들의 조감독 생활을 3년 정도 한 뒤에 1967년 <삼천만의 불침번>부터 직접 감독을 하게 되었다. 박희준이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감독한 작품인 <가요잔치>는 당시 유명 가수인 이미자, 김부자 등이 출연한 영화로 농촌 계몽영화의 순회상영 당시 활용되었는데 새마을 영화 등 문화영화 가 너무 경직되었다는 의견이 있어 오락성 있는 영화도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림 1) 국립영화제작소 출신들의 모임인 문영회 회원들과 2007년 기념 촬영한 사진. 오른쪽부터 임학송, 양종해, 이은덕, 신병운, 최봉암, 이성철, 박희준, 봉상균, 박익, 윤기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과 함께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기업들은 기업 홍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기업홍보영화의 제작은 주로 문화영화 감독들에게 맡겨졌고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민간 문화영화 제작사들이 등장하였다. 대부분이 국립영화제작소 출신의 감독들이 설립하였다. 사진2) 탄광촌에서 촬영한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정암골에 새봄이>(1984)의 촬영현장 사진. 영화는 공장 새마을의 성공사례를 담고 있다. 사진 오른편에 연출 지도를 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박희준 감독 역시 1964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여 민간문화영화제작자,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방송사인 동양방송 CM제작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많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이 방송국으로 이직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희준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동양방송을 그만두게 되는데 여기에는 광고영화를 낮게 평가하는 당시의 풍토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였다. 동양방송 퇴사 후 민간에서 문화영화 감독으로 활동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장편문화영화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 <극동의 왕자 김일>(1966), <허리케인의 대혈투>(1967), <황금의 이마>(1967)을 제작, 감독하였다. 텔레비전의 보급이 시작되던 시기에 스포츠 중계는 텔레비전 콘텐츠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레슬링의 인기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역도산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대중들에게 김일 선수의 활약상을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 보여주면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4)5) 박희준 감독은 보다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위해 실제 경기를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기 아나운서의 해설을 덧붙였다. 김일은 프로레슬러 1세대 선수로 1960년대 일명 ‘박치기 왕’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였다. 박희준 감독은 김일 선수의 경기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극장에서 상영하였는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이다. 박희준은 직접 실제 경기를 촬영하고 여기에 보태어 김일 후원회에서 촬영한 영상과 스포츠 전문 사진작가인 장점동 씨의 자료를 첨가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박희준은 판권을 미리 팔지 못해 사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고, 완성된 영화를 지방 흥행업자들에게 보여주고 판권을 팔아 대구의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였다. 영화의 호응이 좋아 서울의 아세아 극장에서도 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1편의 흥행으로 이후의 시리즈는 지방흥행업자들에게 판권을 팔아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3)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그림 4)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대본 표지. 하단에 대명제작사인 신영문화영화사의 이름이 보인다. 김일 시리즈의 2편에 해당하는 <극동의 왕자 김일>은 1편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이 개봉한 해에 제작, 상영되었다. <극동의 왕자 김일>의 포스터를 보면 ‘일본현지촬영’, ‘시네마스코프’ 등의 문구가 보인다. 영화는 일본에서 치러진 김일 선수의 경기 모습을 담고 있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 상 박희준이 직접 현지에서 촬영을 하지는 못한 채 김일 선수 측에서 촬영한 분량을 사용하였다. 좀 더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였고 마치 실제 경기를 중계하는 듯한 실감나는 내레이션을 입혀 상영을 하였다고 한다. 그림 5) 김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극동의 왕자>(1966)의 포스터 ‘시네마스코프’, ‘해설 이광재’, ‘일본현지촬영감행’, ‘2탄’ 등의 문구가 보인다. 김일 시리지의 마지막 편인 <황금의 이마>(1967)는 김일 선수의 세계헤비급 챔피언 쟁탈전을 담고 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경기의 현장감을 최대한 담기 위해 4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을 하였고 현장음도 마치 동시녹음을 하듯 녹음을 해 후반 작업에 사용하였다.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으며 흥행을 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박희준 감독은 <황금의 이마>를 끝으로 김일 선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권리를 다른 문화영화제작업자에게 양도하고 이후 다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복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 복직한 그는 <가요잔치>를 감독하였다. 조금 딱딱한 계몽 영화를 틀어주기에 앞서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위해 오락적인 요소가 가미 된 영화의 제작이 요구되어 만들어진 영화인 <가요잔치>에는 이미자 등 당대의 유명가수 등이 출연하였다.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구비하고 있던 동시녹음 카메라인 미첼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계몽적인 성격이 강한 문화영화만 보아오던 관객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경험을 되살려 박희준은 관광과 콩트를 접목한 형식의 영화를 구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문화재 관련 영화 촬영차 전국을 누볐던 그는 관광과 노래, 그리고 콩트가 결합된 문화영화를 만들면 흥미로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박희준은 국세청에서 의뢰한 국세청 홍보영화 <신영균 씨의 하루>를 마지막으로 본격적으로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였다. 퇴사 후 박희준 감독은 1972년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를 시작으로 1973년에는 <노래 실은 금수강산>과 <노래 실은 관광여행>을 1975년에는 <가요대행진>을 제작, 감독하였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는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동기인 김학수 감독이 운영하던 문화영화제작사 삼진영화제작소에서 대명제작을 한 작품이다.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197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가요프로그램도 인기가 높았다. 당대 최고의 가수는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들 인기가수들을 조그만 텔레비전 화면이 아닌 커다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에 보태어 좀 더 다양한 오락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콩트를 삽입하였다. 백남봉과 남보원 콤비를 등장시켜 이들이 유명 관광지에서 콩트를 하고 가수가 등장해 노래를 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소양강 처녀>, <금산 아가씨> 등 노래에 등장하는 공간들이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장소와 장소를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두 명의 코미디언이 등장하여 콩트를 하였다. 그림 6) 김일 시리즈의 3편인 <황금의 이마>(1967)의 검열대본 대본의 크레디트에는 ‘신영영화사 작품’, ‘시네마스코프’, ‘기획 김윤모’, ‘녹음 이재웅’, ‘음악 정윤주’, ‘구성․ 편집 손익동’ 등이 적혀 있다. 그림 7) 국제극장에서 상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만원사례 봉투이다. 그림 8)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김일 선수의 챔피언 쟁탈전을 촬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을지극장에 개봉한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았다. 문화영화로는 드물게 극장에서 흥행을 하였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등장하는 장면에 장발이 문제가 되어 검열에서 잘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반인들에게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던 워커힐 쇼 장면 역시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삭제되는 일도 겪어야 했다. 그림 9)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검열대본 대본을 보면 ‘삼진영화제작소 작품’, ‘칼라 시네마스코프’, ‘후원 한국연예협회, 한국경제일보사’ 등의 문구가 실려 있다. 그림 10)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초대권 을지극장에서 상영을 하였는데 ‘파라마운트 SHOW'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영화 상영 전 쇼를 하였던 당시의 관행을 알 수 있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흥행으로 박희준 감독에게 극영화 연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유림흥업주식회사에서 대명제작한 극영화 <그녀>에는 남진, 하춘화, 신성일 등 당대의 스타들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아쉽게도 완성되지 못했다. 대명제작에 대해 엄격해지는 영화계 분위기와 문화영화와는 다른 극영화의 제작과정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편 극영화 <그녀>는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 시리즈 2편에 대한 제작과 함께 제작비를 투자 받은 것이었고 때문에 장편극영화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그 남은 제작비로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후속편인 2편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림 11) <노래실은 금수강산>(1973)의 촬영현장.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제작, 감독한 <노래 실은 관광여행>과 <노래 실은 금수강산>은 아쉽게도 전편의 흥행에 미치지 못하였다. 1편 격인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에 출였던 백남봉, 남보원 콤비의 섭외에 실패하여 서영춘, 남성남 콤비를 등장시켰지만 전편의 인기를 넘어서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영춘, 남성남 콤비의 인기에 힘입어 지방에서 꽤 흥행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영화에는 한려수도, 부산, 경주, 제주도 등 전국의 유명 관광지가 등장한다. 박희준 감독은 당시 관광 책자에서 장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림 12)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장면. 은방울 자매가 ‘삼천포 아가씨’를 노래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옆에서 연출을 지도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박희준 감독은 당대의 청년문화의 스타들을 대거 등장시켜 <가요대행진>(1975)을 만들었다. 영화에는 조영남, 김세환, 송창식 등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콩트가 빠진데다가 지방에서 통기타 가수들의 인기는 트로트 가수보다는 덜 대중적인 탓에 영화의 흥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림 13)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 현장. ‘안동 놋다리 밝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쇼와 같은 오락, 흥행적 요소를 가진 문화영화를 제작한 문화영화의 흥행감독이다. 문화영화는 주로 계몽, 교육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가요, 콩트, 공연 등 당시의 관객들이 흔히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스스로 이들 영화들의 흥행이유에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시리즈는 워커힐 쇼, 당대의 인기 가수, 전국 팔도의 경관 등의 볼거리가 재미의 요소였다고 설명을 하였다. 6) 극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줄 수 없는 시각적인 스펙터클, 가요와 스포츠라는 대중문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새로운 레져로 떠오른 관광 등 이러한 시대적 요소들이 박희준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75년 <가요대행진>을 끝으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의 제작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스포츠와 가요를 극장에서 즐기기 보다는 가정에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후 기업 홍보 영화와 전통문화를 담은 문화 영화의 연출에 주력하였다.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어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 까지 박희준은 12년 간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림 14) 박희준 감독이 한일홍보에 근무하던 시절 사진. 감독 뒤로 마네킹들이 보이는데 한일홍보의 투자사가 마네킹 제조업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만들었던 영화들로는 부산시청 민원 창구 계몽영화인 <민원서류는 이렇게 처리됩니다>(1975),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어떤 휴일>(1976), 전라북도 산업 및 관광홍보영화 <밝아오는 내 고장>(1977), 농촌새마을 홍보영화 <꿈이 열리는 땅>(1981), 리비아 수출 홍보 영화 <동아콘크리트>(1982), 대구시 홍보 영화 <대구의 향기>(1982)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영화로는 <돌의 문화>(1984), <한국의 목조 건축>(1985)등이 있다. <한국의 목조 건축>은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에서 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그림 15)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이다. 그림 16)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 그림 17) 1988년 <돌과 한민족>으로 제5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을 수상할 당시의 사진 그림 18) 1985년 <한국의 목조 건축>으로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 한 뒤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영화업이 등록제로 바뀌면서 박희준은 희보영상을 설립하여 2008년까지 운영하였다. 제6회 금관상영화제 홍보영화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독립기념관>(1989)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함께 열린 세계청소년캠프의 기록영화도 제작하였다. 그림 19)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 국제청소년 캠프의 기록영상을 촬영할 당시 박희준 그림 20) 1986년 아시안게임 주관 방송사인 KBS와 계약을 하고 아시안게임 기록영상을 제작할 당시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가 박희준. 1970년대 활발하였던 문화영화제작사들은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사라졌다. 박희준 감독은 텔레비전이라는 거대한 미디어의 등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필름이 사라지면서 필름을 기반으로 하였던 문화영화사들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영화가 국가 및 기업의 주요 흥보 미디어로서 기능하던 시기에 민간의 문화영화는 성장하였다. 자연히 문화영화는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졌고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박희준 감독은 이러한 환경에서 드물게 극장상영용 문화영화를 만들어 흥행을 하였다. 스포츠, 관광, 쇼 등의 요소를 활용한 볼거리들은 당시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한 미디어의 등장이 이러한 볼거리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담아가기 전까지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시도였다.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의 조금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1) ‘문화영화’란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공개하는 극영화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논픽션 필름(nonfiction film), 다큐멘터리 필름(documentary film), 기록영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 이하나, 「정부수립기~1950년대 문화영화와국가정체성」, 역사와 현실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 12, 521쪽. 2) 1962년도에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2조에서는 문화영화와 극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④본법에서 극영화라 함은 배우를 출연시켜 연극화한 영화로서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이외의 영화를 말한다. ⑤본법에서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이와 같은 법령상의 정의는 문화영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인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의 정의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를 국어사전에는 ‘극영화가 아닌 영화를 통틀어 이르는 말. 학술영화, 교육영화, 기록영화 따위가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영일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편영화로 픽션을 곁들인 극영화와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다. 독일어 Kultur film을 직역한 말에서 왔으며 대체로 다큐멘터리영화의 총칭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극영화・뉴스영화를 제외한 모든 비극영화(非劇映畫)의 총칭으로 쓰여 왔다. 그러나 교육영화・계몽영화 등 그 제작 목적에 따라 명칭이 세분화되기 시작한 뒤부터는 점차 문화영화라는 말이 소멸된 감이 있고, 기록영화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역사적으로 문화영화의 효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만든 위생영화(衛生映畫)이며, 독일은 그 뒤 UFA사가 Kultur Film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의 과학영화를 잇따라 제작하여 문화영화의 전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기록영화는 1919년 당시의 서울 시가지 풍경을 수록한 <경성 전시(全市)의 경(景)>이다. 문화영화와 기록영화라는 용어는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어 왔는데, 문화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공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73년 전면개정된 영화법에 보면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경제・문화 등 제 분야에 있어서 교육적・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 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따라서 문화영화의 범주에 광고와 만화영화가 포함된 배경에는 이러한 극영화와 비극영화의 구분과 정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3) 1962년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11조 (문화영화동시상영)에는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고 고지되어있다. 4) 1965년 3월 9일《경향신문》4면의「연예메모」에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일본 수입 영화인 <역도산>에 대한 안내 기사가 실려 있다. 5) 박희준 감독이 제작 ,감독한 김일에 관련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박희준, 1966, 신영문화영화제작사), <극동의 왕자, 김일>(박희준, 1966, 민양프로덕션 제작), <허리케인의 대혈투>(박희준, 1967), <황금의 이마>(박희준, 1967, 신영문화영화제작사). 6) 이정아,「박희준·김청기·한호기」,『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한국영상자료원, 2012, 114~152쪽 참고.
영화 <오발탄> 검열 과정 개요 유현목에 따르면 영화 <오발탄>의 제작은 4.19 발발 직전에 기획되었다. 이범선의 단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그 암울한 내용 때문에 제작자가 나타나지 않아서 감독 유현목, 촬영기사 김학성, 그리고 조명을 담당했던 김성춘이 동인 프로덕션을 구성하고 어려운 여건 하에서 제작을 시작했다. 제작비 조달 문제 때문에 제작 기간이 길어져서 결국 영화는 제작이 시작된 지 1년 여가 지난 1961년 2월에 와서야 완성되었다. 당시는 4.19의 발발로 출범하게 된 영화윤리전국위원회에 의한 ‘민간 자율심의’가 시행되던 때였기 때문에 <오발탄>은 영화윤리전국위원회(이하 영윤)의 심의를 거쳐 1961년 4월 13일에 국제극장에서 개봉되었고 같은 달 20일까지 8일간 상영되었다. 4.19 이후의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개봉을 마쳤지만, 1961년 5월 16일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오발탄>은 상영금지 영화가 된다. 내무부의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로부터 시작된 대대적인 재검열의 결과 1962년 3월에 <오발탄>을 포함한 7편의 영화에 대한 상영금지 처분이 최종 확정되었다. <오발탄>의 제작자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을 시작으로 6월 11일(7월 8일), 8월 1일, 8월 21일 등 총 다섯 차례에 걸쳐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다. 8개월에 걸친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노력은 일부 장면을 삭제하고 자막 및 화면을 추가하는 등의 자진 개작을 포함한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영화 <오발탄>은 여섯 군데 화면을 삭제하거나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8월 23일 상영을 다시 허가받았다. 이렇게 개작된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어 25일까지 14일 간 총 5만여 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10월 말에는 샌프란시스코영화제에 출품되었다. <오발탄>은 4.19와 5.16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국면들을 통과하였고, 이 영화에 대한 검열서류들에는 그와 같은 정치적 격변에 따른 영화검열 제도 및 운영 방식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오발탄> 검열 서류는 매우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사료라고 하겠다. 검열 서류를 통해 본 영화 <오발탄>의 검열 과정 첫 번째 국면 1961년 2월 9일자로 작성된 “국산영화 상영신고서”부터 첫 번째 개봉을 마친 4월 말까지를 첫 번째 국면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서류는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1961년 2월 9일) (2)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3)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4일, 문화 제1623호) 및 “국산영화 심의 의뢰의 건”(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등 세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1) “국산영화 상영신고서”에는 원작자 이범선과 작곡자 김성태가 작성한 저작권 관련 서류와 한국은행이 발행한 국채소화증명서가 첨부되어 있다. 상영신고서는 (사)한국영화제작가협회를 경유(2월 13일)하고 영윤의 심의(2월 13일 접수)를 거쳐 문교부 장관에게 제출되었다. (2)의 서류는 (1)의 상영신고서를 접수한 후 문교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여기에는 영윤의 “심사논평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심사논평서에서 영윤은 “개천 하수도에서 어린이를 업은 여인이 목 매단 장면을 삭제하기를 희망”한다는 소견을 피력했다. 이와 같은 영윤의 의견은, 그것이 민간의 자율심의기구였기 때문에 명목 상으로는 행정적 강제력을 갖지 않았지만, 문교부는 이 권고사항을 수용할 것을 전제로 상영허가를 내주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강제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림 1]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 신고의 건 (1961년 2월 14일, 문화 제665호) 첫 번째 국면에서 쉽게 해명되지 않는, 그래서 더 흥미로운 것은 영화가 상영 중이던 4월 14일에 문교부가 내무부 치안국장과 법무부 검찰국장 앞으로 <오발탄>에 대한 심의를 의뢰했다는 사실이다. 당시는 영화에 대한 정권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했던 4.19 이후의 국면이었다. 이러한 시기에 이미 적법한 절차를 거쳐 상영하고 있는 영화에 대한, (영화검열의 주무부처도 아닌) 내무부와 법무부의 사후 심의가 왜 필요했던 것일까? 특히 “사회윤리적인 책임성이 전무“하고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선전자료가 되는 것으로 관취“되므로 ”추천키 난“하다는 내무부의 부정적인 의견이 <오발탄>의 상영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했다는 흔적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의아할 수밖에 없다. [그림 2] 국산영화 <오발탄> 심의 의뢰의 건 (1961년 4월 19일, 내치정 제2948호) 다만 당시 영화계의 상황을 살펴보면 이에 대해서 한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오발탄>이 아직 개봉하기 전이었던 1961년 3월 31일에 문교부는 국제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을 심사, 결정하는 국제영화 심사위원 12명을 위촉했다. 정부 관료가 다수 포함된 이 심사위원회 1) 에서는 4월 21일 베를린영화제에 출품할 작품으로 <마부>(강대진, 1961)를 선정했다. <오발탄>을 제치고 <마부>가 선정된 것은 무지한 관제 심사가 낳은 불공정한 결과라는 영화계의 여론이 형성되면서 국제영화제 출품을 둘러싼 논란이 일었다. 문교부가 내무부와 법무부에 <오발탄>의 심의를 의뢰한 4월 14일은 베를린영화제 출품을 위한 심사가 진행되던 시기였고 영화 <오발탄>이 영화계 내에서는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유력시되었기 때문에, 문교부로서는 공식적인 심사위원회를 개최하고 출품작을 결정하기 전에 내무부와 법무부의 의사를 미리 타진해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공식적으로는 국가기관에 의한 영화의 사전검열이 폐지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오발탄>에 대한 내무부의 부정적인 견해가 영화의 상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칠 수는 없었겠지만 국제영화제 출품작을 결정하는 데는 반영되었다고 추론해볼 수 있다. 이 추론이 맞다면 4.19 국면이 야기한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는 별개로, 관이 주도하는 국제영화제 출품작 선정은 사실상 또 다른 검열의 관문으로 여전히 작동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 국면 5.16 쿠데타가 발발한 지 일주일만인 1961년 5월 23일에 내무부는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라는 문서를 문교부에 보냈다. 이 문서로부터 촉발된 대대적인 재검열이 한국영화 <오발탄>을 비롯한 총 7편의 상영금지 처분으로 마무리될 때까지가 두 번째 국면이다. 두 번째 국면에서 <오발탄>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문제는 상당히 복잡한데, 그것은 <오발탄>의 재검열이 내치정 제3846호 문서에서 언급한 총 57편(한국영화 35편, 외국영화 22편)의 영화들에 대한 재검열과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발탄>의 재검열 과정을 담은 서류는 <오발탄> 검열서류철 뿐 아니라 외국영화 <폭력교실 Blackboard Jungle>(1955) 검열서류철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쿠데타 세력에 의한 대대적인 재검열 과정의 전체상은 문제가 되었던 57편 영화들의 검열서류철 모두를 검토함으로써만 구성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일단 <오발탄> 검열서류철에 남아 있는 이 시기의 서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불순영화 금영조치 요망에 대한 여론 보고”(1961년 5월 23일, 내치정 제3846호) 및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그림 3] 한국영화 <오발탄>에 대한 여론 통보 (1961년 5월 28일, 내치정 제3971호) 내치정 제3846호 서류에서는 1958년 이후 개봉된 국산영화 35편과 외국영화 22편이 이른바 “불순영화”로 분류되어 있다. 재검토 대상의 광범위함과 문건 작성에 소요된 짧은 시간을 감안한다면 이 “불순영화” 목록에서 드러나는 지향점은 놀랄 만큼 분명하다. 대상에 오른 외국영화는 대개 영윤 시절에 풍속의 차원에서 문제가 되었던 작품들이었다. 한국영화의 목록을 보면 당대의 정치적 맥락에서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이승만과 김구의 전기영화 두 편과 ‘의적’을 다룬 <의적 일지매>(장일호,1961)를 제외한다면 사극은 배제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다시 말해서 당대의 사회상이나 서민의 일상생활을 다룬 영화들이 집중적인 재검토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지옥화>(신상옥,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아름다운 악녀>(이강천, 1958), <종말 없는 비극>(이강천, 1958), <철조망>(조긍하, 1960)처럼 한국전쟁의 여파를 다룬 영화들, 그리고 <돈>(김소동, 1958)과 <오 내 고향>(김소동, 1959), <하녀>(김기영, 1960), <3등 과장>(이봉래, 1961)처럼 1960년대 초 가족 드라마의 보수적 관점으로부터 어떤 식으로든 벗어나 있는 영화들이 포함되었다. 5.16 직전에 베를린영화제 출품작으로 결정되었던 <마부>까지 포함된 것은 다소 의외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이 도시 빈곤층의 일상을 다룬다는 점이 중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밖에 <춘희>(신상옥, 1959), <쟌발쟌>(조긍하, 1961), <카츄샤>(유두연, 1960) 같은 외국 번안물과 외국으로부터 유래한 ‘투명인간’을 소재로 한 작품이 ‘사회불합리’의 이유로 문제가 되었다. 장르적으로는 미국 갱영화의 영향을 현저하게 받은 범죄영화들이 다수 포함되었다. 내치정 제3971호의 서류는 불순영화 목록을 전달한 지 5일 만에 다시 내무부 치안국장이 문교부 문화국장에게 보낸 <오발탄>에 대한 별도의 의견서이다. 이 서류가 지적하는 <오발탄>의 핵심적인 문제는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심”의 조장과 “반미감정의 극단화”, 그리고 사회에 대한 절망적 비전으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당시 <오발탄>이 왜 문제가 되었는지를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다. (2)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및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보류의 건”(1961년 7월 20일, 문화 제2412호) [그림 4] 국산영화 <오발탄> 재검열의 건 (1961년 7월 18일, 문화 제2412호) 7월 18일자 서류에서는 내치정 제3971호에 표명된 내무부 치안국장의 의견에 따라 <오발탄>의 재검열을 위한 시사회를 열기로 결정하고 이에 대한 재결을 요청한다. 1961년 7월 20일 3시에 문교부 시사실에서 열릴 시사회에는 내무부 치안국장, 법무부 검찰국장(정보과장), 중앙정보부 제3국장, 재건국민운동본부 예능과장, 문교부 문화국장 등이 참석할 예정이었다. 7월 20일자 서류는 시사회 결과 <오발탄>의 상영보류가 결정되었음을 보고하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시사회에 참석했던 법무부,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정보부의 관계관들이 제출한 “검열 의견서”가 첨부되었다. 내무부는 5월 28일에 제출한 내치정 제3971호의 견해로 검열의견서를 갈음하였다. (3)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1962년 3월 22일) [그림 5] 상영보류 작품 합동심사 결과보고 (1962년 3월 22일) 영화 검열 사무가 문교부로부터 공보부로 넘어온 후이기 때문에 이 서류는 공보국 영화과에서 작성하였다. 이 서류는 1961년 5월 23일 내무부에서 작성한 총 57편의 “불순영화” 가운데 공보부에서 재심을 결정한 11편(국산영화 3편, 외국영화 8편)에 대하여 1962년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실시한 심사의 결과를 담고 있다. 내무부의 “보류 작품 영화 심사결과 통보”(1962년 2월 10일, 내치보 제65호)와 중앙정보부의 “검열의견서(종합 재검열 분)”(1962년 2월 6일로 추정)가 첨부되어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당시 공보부의 재심 대상으로는 한국영화 <하녀>, <고바우>(조정호,1959), <오발탄>, 그리고 외국영화 <템페스트 La Tempesta>(1958), <챠타레부인의 사랑 Lamant De Lady Chatterley>(1960), <로마의 여성 La Romana>(1954), <적과 흑 Le Rouge Et Le Noir>(1954), <폭력교실>, <위험한 고빗길 Les Tricheurs>(1958),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J'irai cracher sur vos tombes >(1959), <비트 걸 Beat Girl>(1961) 등이 올랐다. 이 가운데 재심에 참석했던 내무부, 문교부, 중앙정보부, 공보부 등 네 기관 가운데 다수가 상영불가 의견을 낸 7편, 즉 <오발탄>, <템페스트>, <챠타레 부인의 사랑>, <로마의 여성>, <적과 흑>, <위험한 고빗길>, <그 무덤에 침을 뱉어라> 등이 최종 상영 금지 처분을 받았다. 세 번째 국면 <오발탄>의 제작사인 대한영화사 대표 김성춘은 1963년 1월 26일 첫번째 탄원서를 제출한 것을 시작으로 1963년 8월 23일 마침내, <오발탄>의 상영금지가 해제될 때까지 총 네 차례에 걸쳐 탄원서를 제출했다. 이 기간 동안 일부 화면의 삭제와 자막 및 몇몇 화면의 추가 등의 자진 개작을 하고 탄원서를 제출한 외에, 제작자 김성춘은 감독 유현목과 함께 여러 비공식적인 루트로 로비를 펼치는 등 <오발탄>의 상영금지 해제를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했다. 서류들에 나타나는 공식적인 발화의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김성춘과 유현목의 ‘비공식적인 노력’이 어떻게 펼쳐졌는지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 글에서는 구술자료 및 여타의 자료들을 참조함으로써 공식적인 서류가 발화하지 않는 이면의 맥락까지 가급적 살펴보고자 한다. 세 번째 국면의 검열 서류들은 다음과 같다. (1) “국산영화 재심사 신청의 건”(1963년 1월 23일 김성춘 작성, 26일 공보부 접수) 및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1963년 2월 25일, 435호) [그림 6] 국산영화 <오발탄> 재심사 신청의 건 반려 (1963년 2월 25일, 435호) 첫 번째 탄원서는 접수된 지 한 달 만에 반려되었다. 제435호의 “반려” 서류에서는 “해(該) 기간 중에 재심사에 불응한 작품 및 불허가 조치된 작품은 일체 재심 청구를 접수치 않기로 하였으므로 재심이 불가”하다고 밝히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재심 신청과 반려 사이에 <오발탄>의 재심이 있었던 사실은 외국영화 <폭력교실>의 검열서류철에 철되어 있는 <오발탄>의 재심 관련 서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서류에 따르면 공보부는 2월 13일 외국영화 <폭력교실>과 <오발탄>의 재검열 시사를 열었고 재심위원으로 참석한 최유현과 백영석은 두 작품 모두 상영을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했다. (“재검열 의견서”, 1962년 2월 13일) 그런데 두 작품 모두 상영보류 판정이 내려진 지 3일 만인 2월 16일에 문교부 문화국장은 <폭력교실>은 2개 처를 단축하고 상영을 인정해도 무방하지만 <오발탄>은 “현실과는 너무나 부합되지 않은 비참한 스토리”라면서 상영보류 의견을 표명하는 공문을 공보부 공보국장 앞으로 보냈다. (“<폭력교실> 및 <오발탄>의 재검 시사의 건”, 1962년 2월 16일) 결국 <오발탄>은 상영보류가 해제되지 않았고 두 차례의 합동심사를 거쳐 외국영화 <폭력교실>은 7개 처를 삭제 또는 단축하는 것을 조건으로 상영이 허가되었다. (2)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진정서”(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1963년 7월 8일 중앙정보부 접수), “부전지”(1963년 6월 13일), “민원서 이첩”(1963년 7월 10일, 중비서 060), “부전지”(1963년 7월 22일),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날짜 및 작성자 불명) “국산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01),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내무부),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민원서 처리결과에 대한 통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2),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에 대한 진정서 회신”(1963년 7월 25일, 분류기호 1733.01 3041) [그림 7] 진정서 (1963년 6월 11일 김성춘 작성, 공보부 접수) [그림 8]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 (1963년 7월 22일, 분류기호 1733, 중앙정보부) 김성춘이 작성한 진정서 두 통이 공보부(6월 13일)와 중앙정보부(7월 8일)에 접수되었다. 이 진정서에서 노모의 “가자” 대사를 “저 푸른 벌판의 양떼를 따라가자”로 바뀌는 개작이 처음 언급되었다. 이 진정서 이외의 서류들은 이 진정서가 접수되고 나서 이루어진 공보부와 중앙정보부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6월 13일자 “부전지”는 진정서를 공람 처리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특기할 만한 것은 1962년 1월 26일~29일 사이에 있었던 재심결과 불허가 조치되었지만 “영화내용은 건전하다”는 담당관의 견해가 피력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 담당관은 공보국 영화과 행정서기로 근무하고 있던 신봉승으로, 그는 검열관이라는 자신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역시 신봉승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7월 22일자 “부전지”는 제작자 스스로의 개작과 “예술적 가치”에 대한 “신문 및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맥칸 박사 등”의 견해를 언급하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를 해제할 것을 주장한다. 이 “부전지”의 내용을 참조하면 “영화 <오발탄>에 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 또한 같은 시기에 신봉승이 작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신봉승은 자신이 <오발탄>의 해금을 위해 신문기사 등 각종 자료들을 수집하여 서류 기안 당시 첨부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첨부 자료 가운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리처드 다이어 맥칸(Richard Dyer MacCann)이 당시 공보부 공보국장 이성철 앞으로 보낸 “베니스영화제 출품작(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이라는 문서다. 미국 남가주대학교(USC) 영화과 교수였던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다큐멘터리를 전공한 학자로서 미국무성의 지원을 받아 1963년 4월부터 8월까지 4개월 간 한국에 체류하고 있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와 중앙대학교 등지에서 강의를 하고 한국의 여러 영화인들과 접촉했다. (박익순 구술증언, 김정옥 구술증언) 신봉승은 국립영화제작소의 감독인 배석인이 소개하여 리처드 다이어 맥칸과 만났고, 특히 그와 <오발탄>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구술하고 있다. (신봉승 구술증언) 리처드 다이어 맥칸은 베니스영화제에 출품할 한국영화에 대한 의견을 제시해달라는 공보부의 요청에 따라 정부 추천 두 작품(<굴비>(김수용, 1963)와 <돌아오지 않는 해병>(이만희, 1963))과 사적인 경로(미국으로 돌아간 후 맥칸이 쓴 글에 따르면 <오발탄>을 그에게 추천한 것은 극작가 이근삼이었다.)를 통해 보게 된 <오발탄>에 대한 평가를 적은 보고서를 냈다. 이 글에서 맥칸은 <굴비>는 일본 영화 <도쿄 이야기 東京物語>(1953)를 표절한 작품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돌아오지 않는 해병>은 미국의 전쟁영화와 너무 비슷하기 때문에 베니스영화제 출품작으로 적당하지 않다고 썼다. 대신 그는 <오발탄>이야말로 “세계 수준에 있는 작품”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 뿐만 아니라 <오발탄>에 대한 맥칸의 견해를 인용한 기사들이 여러 신문에 게재되었고 한국영화의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가 해제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조성되었다. “영화 <오발탄>에 대한 각계의 의견”이라는 문서에 첨부된 것은 당시의 이 같은 여론을 보여주는 기사들 중 일부이다. [그림 9] Feature Film Entry for Venice Film Festival (발신 : Richard Dyer MacCann, 수신 Lee Sung Chul) 요컨대, 1963년 7월 당시에 검열관 신봉승, 국립영화제작소 배석인을 포함한 공보부 내 인력들, 그리고 이근삼을 비롯한 문화계 인사들, 그리고 미국의 영화평론가까지 합심하여 <오발탄>의 해금을 위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공보부는 7월 22일 노인의 “가자” 대사 및 화면 삭제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을 단축할 것을 조건으로 상영을 허가하는 공문을 작성했다. <오발탄>의 상영을 허가한다는 결정은 제작자 김성춘, 그리고 이미 7월 10일자 “민원서 이첩”(중비서 060)에서 “상연 허가함이 가할 것”이라는 의견을 표명한 바 있던 중앙정보부와 <오발탄>의 상영금지를 결정하는데 참여했던 내무부에도 통고되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불과 3일 후, 결정이 뒤집혔다. 중앙정보부와 제작자 김성춘을 수신인으로 한 7월 25일의 서류 두 종에는 <오발탄>의 상영을 불허가한다고 적혀 있다. 전후 맥락을 이해할 만한 다른 서류들이 없기 때문에 이처럼 갑작스럽게 결정을 번복한 것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이 사례는 검열제도가 일관된 원칙에 따라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서 작동하기보다는 여러 우연적 요소들(예컨대, 검열관의 자의적 판단이나 외부의 정치적 압력, 또 피검열자와 검열자 간의 협상 등과 같은)이 결합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자의성’은 사실 검열제도가 작동하는 근본적 방식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3)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극영화 <오발탄> 상영에 대한 탄원서 회신”(1963년 8월 5일, 분류기호 1733.01 3226) [그림 10] 탄원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1일 공보부 접수) <오발탄> 상영보류 해제를 위한 탄원서가 한국영화인협회에 의해서 제출되었으나, 공보부는 7월의 재심 결과에 따라 상영허가를 내줄 수 없다고 회신하였다. (4) “탄원서”(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윤봉춘 제출, 1963년 8월 21일 공보부 접수),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 해제”(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극영화 <오발탄> 상영허가증 교부”(1963년 8월 21일 작성, 23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01 3473), “국산영화 <오발탄>에 대한 상영허가 보류해제 통고”(1963년 8월 23일 작성, 28일 장관 결재, 분류기호 1733. 3543과 1733. 3544) 8월 21일 한국영화인협회가 탄원서를 제출하자 곧바로 공보부는 <오발탄>의 상영허가 보류를 해제하고 상영허가증을 교부했다. 이어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결정에 참여했던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에 이같은 사실을 통고한다. 상영허가 보류 해제 문서에서는 미국 MGM 및 영화업자들이 <오발탄>의 수출을 희망하고 있다는 것, 리처드 다이어 맥칸의 고평과 국내 언론들에 의한 상영허가 여론 등이 해금의 이유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유로 든 사실들과 관련한 근거 자료는 이미 1963년 7월에 제출된 바 있고 8월 21일에 한국영화인협회가 제출한 탄원서도 이미 거부되었던 8월 1일자 탄원서와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그리고 시사 및 재평가 같은 재심의 절차 없이 탄원서가 제출된 날 바로 허가증교부 절차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오발탄>의 상영금지 조치 해제에는 어떤 다른 힘이 작동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 다른 힘이 무엇이었든 간에, 최종 허가 당시에 제한사항은 여섯 군데의 화면 및 대사 삭제와 화면 단축이다. 이전부터 문제가 되었던 “가자” 대사와 미군이 명숙을 희롱하는 장면 외에 상이군인이 소변을 보는 장면이 추가로 삭제되었는데, 감독인 유현목은 이 삭제 처분이 소변을 보는 장소가 한국은행 앞이었고 그것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4) “영화상영허가 신청서”(1963년 10월 18일), “국산영화 <오발탄> 복사판 상영허가”(1963년 10월 19일, 분류기호 1733.12 4096), “영화상영허가증”(1963년 10월 19일) 상영을 허가받은 <오발탄>은 1963년 10월 12일 을지극장에서 재개봉되었다. 이 서류들은 재개봉에 사용된 프린트 외에 별도로 한 벌의 프린트(복사판)의 상영허가를 받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식민지시대 이래 한국의 검열제도에서는 같은 영화라 할지라도 그 복사판은 원칙적으로 별건으로 처리되어왔다. 이는 원본과 복사판이 서로 다를 수 있다는 우려와 더불어, 영화 검열이 내용에 대한 검토 뿐 아니라 프린트의 상태를 점검하는 것까지 포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4. 재개봉 이후의 서류들 1963년 10월의 재개봉 이후에 작성된 서류들은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첫째는 대한영화사 김성춘으로부터 영화 <오발탄>에 대한 일체의 권리를 양도받은 동원영화사 김진문이 이를 공보부에 통보하고 새롭게 상영허가서를 받는 과정에서 생산된 서류들이고 둘째는, 세계문화자유회의에서 유현목 감독이 이만희 감독의 영화 <7인의 여포로>(1965)를 옹호하는 발언을 한 일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받던 당시에, 서울지방검찰청에서 과거 <오발탄>의 상영금지 이력과 관련한 사실조회를 요청하는 문서이다. 1.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한 위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권순영(서울지법 소년부 지원장), 이병일(제협 회장), 김은우(이대 교수), 홍승면(한국일보 편집국장), 오종식(영륜위원장), 오영진, 서정덕(문교부 문화국장), 최운조(외무부 방교국장), 노태준(문교부 예술과장), 문총사무국장, 법무부 국사처 영화과장. 《동아일보》, 1961.03.31.석간 3면.
지금 내가 난처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는 < 몽녀 >를 보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3D로 보지 못했다. 차라리 이 영화가 사라진 다른 영화들처럼 어딘가에 숨어있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그냥 피해가면 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볼 수가 없다. 내가 먼저 할 일은 그에 관한 과정에 대해서 당신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과 첫 번째 인터뷰를 했을 때, 그러니까 1987년, <몽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갑자기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면서 대답을 한참을 미루었다. 나는 기억할 수 있다. 매 편마다 한편씩 이야기를 진행했기 때문에 그 순간에 느껴보는 공기를 나는 지금도 차례로 떠올릴 수 있다. <몽녀>는 우리의 대화를 잠시 멈추었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저 감독님의 말씀을 기다려야만 했다. 대답은 매우 간결했고,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며, 내용은 거의 텅 빈 채, 그저 기술적인 몇 가지 사실만을 열거한 다음 더 이상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피했다. 좀 더 질문을 했을 때, 그저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이며 촬영을 한 장석준 씨에게 물어보라, 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감스럽게 이미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은 세상에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멈춘 질문. 하지만 어떤 망설임. 내가 지금 추리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대답은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씀을 하시다 말고 그냥 문득, 나는 이 영화를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만났어요, 그냥 억지로 그런 장면을 만드는 거 말이에요. 이 말을 한 사람은 임권택이다. 당신은 영화가 가져야 하는 미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 부서져 가는 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에 대해서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예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임권택을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때 무심코 지나갔다. 그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영화에 대해서 충분히 질문을 던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질문은 계속해서 내게 머물렀다. 어떤 표시. 나는 무언가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 말과 영화 사이의 지탱이라는 버팀목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 다음 차례로 영화와 기술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영화에 대한 여정 중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롯셀리니와 ASA 500, 니콜라스 레이와 시네마스코프. 더글라스 서크와 테크니칼라. 누벨바그와 보렉스 카메라. 등등. 그리고 지금 디지털 카메라와 (누구보다도 먼저) 고다르, 마지막 베르이만, 데이빗 린치, 키아로스타미, 소쿠로프, 라스 폰 트리어, 지아장커, 페드로 코스타, 왕빙, 김기덕 과 홍상수 . 그리고 다시 임권택. (< 달빛 길어 올리기 >). 하지만 그런 다음 누구도 < 몽녀 >라는 영화 제목을 꺼내 들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 제목을 거의 잊었다. 아마 감독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2010년에 제임스 캐머런의 < 아바타 >가 ‘출현’했을 때 모두들 각자의 방식으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3D 영화가 21세기 영화를 새로이 열었다. 아니, 나는 이 말을 다소 수정하고 싶다. <아바타>가 새롭게 열어놓은 것은 21세기 영화 산업이었다. 종종 3D라는 문제를 미학의 자리로 끌고 가고 싶어 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 문제는 잉여가치의 이윤율의 문제이다. 제작 자본과 배급 자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이한 이윤율 사이의 평균 이윤율에서 최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새로운 진동으로서의 자본 투하는 가치의 전환형태로서의 새로운 연장을 위하여 시장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새로운 가격을 구현하도록 요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도입의 증가. 하지만 잉여가치가 증가했다고 과연 항상 이윤이 증가할까. 이제 새로운 유기적 결합의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평균이윤율의 저하. 여기는 자본의 전쟁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한 편에 2억불이 걸려있는 게임이다. 나는 사태를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자리는 영화의 정치경제학을 전개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3D는 갑자기 한 나라의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지나가 버린 한국영화사의 잊혀진 입체영화들의 계보가 호명되었다. <몽녀>는 갑자기 다시 불려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 이 영화를 말해야 한다. 여기서는 세계 영화사 안에서 3D 영화의 계보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 몽녀 >의 자리에 대해서는 다시 그 위치를 찾은 다음 그 자리가 취하게 될 의미를 물어볼 것이다. 위치? 왜 그런 것이 필요해졌을까. 우리는 여기서 그만 3D라는 소란스러운 논제에 걸려들어서 논점을 벗어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가교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 의 영화 안에서 다른 것을 중단시킨 기술에 대한 호기심. 그런 다음 마주치게 된 생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 그 무엇. < 심야의 별장 >(1959), 경향신문 광고(1960.7.30.) 한국 영화에 3D는 늦게 도착하였다. 1960년대 한국에서 입체영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 1960년 8월 25일 을지극장에서 개봉한 윌리엄 캐슬의 < 심야의 별장 (House on Haunted Hill) >이 “안경이 필요 없는 (眼鏡不要)” 입체영화라는 광고 카피를 달고 개봉하였다. 몇몇 자료는 이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된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삼 주 후인 9월 14일 경향신문에는 “극장윤리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가 “입체영화라고 관객을 속였”다면서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3D 사기라는 사실은 이미 광고 카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입체영화를 보기 위한 안경이 필요 없는 기술적 수준을 1960년에 이루었다면 2013년에 다시 안경을 끼고 3D 영화를 볼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심야의 별장>은 입체영화 기술로 찍은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무슨 재주로 수입을 해서 한국에서만 입체영화로 상영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사 안에서 첫 번째 ‘立體映畵’가 만들어진 것은 1968년 2월 8일 동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웅 의 < 천하장사 임꺽정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먼저 1963년 9월 26일 동아일보에는 “입체영화 제작 상영 간편화, (카메라) 한 대로 촬영에 성공”이라는 제목 아래 이성휘 촬영감독이 (당시 제일기공사에서 근무하던) 이교학, 이내원과 함께 입체영화 제작에 성공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방식은 피사체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서 반사하는 분상(分像)장치를 통해서 이미지를 둘로 나눈 다음 하나는 아나모픽 렌즈로, 다른 하나는 표준렌즈로 촬영해서 그 둘을 하나의 필름에 현상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방식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천하장사 임꺽정>에 사용된 촬영방법은 이 영화를 촬영한 장석준 촬영감독에 의해서 ‘발명’된 판스코프 방식이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천하장사 임꺽정>은 개봉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고, < 몽녀 >는 두 번째 ‘입체’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두 편의 개봉 시기는 서로 매우 가깝다. <몽녀>는 그해 8월 1일에 개봉하였다. 이 말은 <천하장사 임꺽정>이 흥행에 성공하자 새로운 기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몽녀>는 뒤이어 바로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두 편 모두 같은 영화 제작사인 제일영화사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을 제외하고 스텝들이 그대로 넘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이 두 편 사이에서 두 가지 공통점과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두 가지 공통점. <천하장사 임꺽정>과 <몽녀> 두 편 모두 같은 촬영감독인 장석준이 찍었다. 기록에 따르면 두 편 모두 같은 방식의 판스코프로 찍었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편 모두 동아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점이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서울에서 동아극장만이 입체영화 상영이 가능한 극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1960년대 극장 상영 시스템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그저 추론일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한 가지 사실. 한국에서 입체영화 기술을 주도한 것은 제작자나 감독이 아니라 촬영이었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이때 입체영화는 산업이나 미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적으로) 순수하게 기술적인 이미지의 기계적인 운동과 그 재현에 따른 질적 변화에 더 기울어질 수도 있다. 물론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몽녀>로 이어질 때 그 둘 사이에서 단지 두 편의 입체영화라고 말하는 대신 사극 액션영화에서 반공 액션영화로 옮겨오면서 입체 화면의 효과에 대한 데이터에 관한 수집의 선택적 이행처럼 보인다. < 악마와 미녀 >(1969) 세 번째 입체영화는 시간을 좀 기다려야 했다. 이용민 이 연출한 < 악마와 미녀 >는 1969년 4월 10일에 개봉하였다. 이용민은 한국영화사에서 부당하게 대접받은 공포영화의 시네아스트이다. 이용민이 만든 두 편의 영화, < 목 없는 미녀 >와 < 살인마 >는 종종 진행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괴작이다. 그가 만든 입체영화 <악마와 미녀>를 볼 수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세 번째 입체영화로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도 장석준 촬영감독이 찍었다. 이 영화는 (제일영화사가 아니라) 안양필름에서 제작했고,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에는 극장들이 ‘프리미어’ 개봉 여부를 놓고 서로의 위계질서가 있었는데) 개봉관에서 상영하지 못하고 6개의 재개봉관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대중들은 벌써 입체영화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변덕스러운 대중들. 사극영화, 반공영화, 그리고 공포영화라는 데이터. 세 개의 효과. 그 중 어느 선택이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술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입체영화의 역사에 관해서만 말해야 한다면 1971년 4월 3일에 개봉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이 가장 궁금하다. 이 영화는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고 촬영을 한 영화이다. 장석준은 여기서 세 가지 모델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또 다른 모델로서 만주 웨스턴 장르를 만들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장석준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지지하루의 흑태양>이 만들어질 무렵 만주 웨스턴이 한국영화사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을 유행의 일부로 폄훼하는 것은 지나치게 상황 속에 맥락 짓는 것이다. 만주 웨스턴은 이미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그런 다음 정창화를 거쳐서 < 무숙자 >( 신상옥 , 1968), < 황야의 독수리 >( 임권택 , 1969), < 황야의 외팔이 >( 김영효 , 1970), < 당나귀 무법자 >( 안일남 , 1970), < 쇠사슬을 끊어라 >( 이만희 , 1971)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나는 많은 중요한 영화 제목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차라리 <지지하루의 흑태양>은 그 장르의 마지막 레퀴엠처럼 보인다. 입체영화 3D 만주 웨스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작별인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영화는 동양영화사에서 제작되었고, 다시 한 번 동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하지만 장석준 의 이름은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 입체영화의 역사는 거의 끝났다. 그런 다음 1976년 두 편의 입체영화가 개봉하였다. 한 편은 7월 23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 킹콩의 대역습 >이고, 다른 한 편은 9월 8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한 <홍길동>이다. 합작영화로 알려진 <킹콩의 대역습>은 (약간 놀랍긴 하지만) < Ape >란 제목으로 지역코드 1번으로 (미국에서) 2001년 10월 30일에 영어 더빙된 DVD로 출시되었으며 IMDb에서는 스텝과 배우들에 관해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료원 KMDb에서는 촬영기사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지만 IMDb에 따르면 토니 프랜시스와 다니엘 L 시머스가 공동 촬영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신은 이게 다소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DVD를 판매하고 있는 아마존.com 에 들어가서 유저들의 영화평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그러면 당신도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질지 모른다. 이 영화는 킹콩이 나온 역대 영화 중 ‘최악의 영화’의 반열에 올랐으며, 수많은 영화광들 사이트에서 영화사상 ‘최악의 영화 100편’의 목록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상해야할’ 만신전의 자리에 올랐다. 말하자면 에드 우드의 계보. (이쯤 되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최영철 과 폴 레더의 공동연출로 KMDb에 기록되어있는 이 영화는 IMDB에서는 감독으로 폴 레더의 이름만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인 < 홍길동 >은 최인현 이 연출하고 최길선 이 촬영하였다. 예고편에 따르면 한국에서 개발된 분광식(分光式) 촬영에 따른 세계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홍길동>이 판스코프와 또 다른 방식을 개발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장석준은 그해 그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을 때 다른 다섯 편의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 여자들만 사는 거리 >( 김호선 ), < 불 꺼진 창 >( 권영순 ), < 바다의 사자들 >( 이재웅 ), < 집념 >(최인현), < 마지막 밤의 탱고 >( 이성구 ).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자. 결국 나는 < 몽녀 >를 3D로 본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것도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상태가 아니라 어제 본 것처럼 너무나 생생해서 그 효과의 구석구석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효과의 기술적인 구현 과정과 발전 단계, 더 나아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3D 영화의 테크놀로지와 비교하면서, 거의 ‘사라져가는’ 한국영화 안의 입체영화들에 관한 계보를 설명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한국영화사. 영화가 기억을 저장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참조하고 조립하고 창조하는 뇌의 스크린이라면 한국영화사는 종종 그 일부를 상실한 채 치매의 진술을 하는 중이다. 나는 단지 3D에 한정 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영화들이 사라졌으며, 너무 많은 자료들이 사방에 흩어져있거나 말소되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지나가 버린 시간 속의 영화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건 단지 영화만이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하부 토대들, 카메라와 영사기, 조명, 녹음, 더 나아가 그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들의 시스템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때 부서지는 것은 한국영화사이다. 나는 질문을 임권택 의 <몽녀>에 한정 짓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몽녀>를 둘러싼 한국영화사 속의 입체영화의 계보에 관한 맥락을 알아야만 했다. 아마도 그 순간, 그러니까 1968년, 임권택 감독님도 이 맥락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공동체라기보다는 기술적 공동체로 묶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 이해 없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내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질문지를 들고 한국영상자료원 장광헌 부장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정성일 _ (깜짝 놀라 둘러보면서 감탄사와 함께) 이 카페는 누가 찾으신 거예요? 장소를 찾아낼 때마다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장소들을 내미셔 가지고, 이게 자료원이니까 가능한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웃음) 먼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 중인 < 몽녀 >의 3D 복원과정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2002년도에 임권택 감독님 인터뷰를 진행할 때, 벌써 십 년 전이군요, 저는 <몽녀>를 3D로 본 적이 없으니까 임권택 감독님께 질문 드릴 방법이 없어서 자료원에서 볼 수 있는지 문의를 했는데 필름 상태 자체가 볼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거예요. (인터뷰를 진행할 때 당시 스크리닝이 가능한 영화들은 자료원에서 모두 다시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거의 3D 영화들이 복원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하지만 아직 저는 <몽녀>를 3D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과정이 어떤지 아는 게 순서 같습니다. 장광헌_ (아이폰을 꺼내 들면서) 제가 조금 따왔습니다. (그런 다음 몽녀의 포지 필름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실제로 이것은 영화가 보여지는 상태가 아니고 영화 필름을 찍은 거예요. 한 프레임에 딱 들어오는 영상인데, 테크니스코프처럼 두 개의 프레임이 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테크니스코프와 다른 점은, (한국에서 개발한) 판스코프(Panscope)라는 것이, 그러니까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3D 영화는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그런 형식인데 한국의 판스코프는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두 개의 렌즈가 한 카메라에 붙어있는 겁니다. 마가진도 두 개가 붙어있고. 이건 저도 상상을 해보니까, (잠시 생각) 당시 어렵게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원래 입체라는 건요, 사람들이 누구나 볼 때, 어 이건 굉장히 어지러워, 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 이건 괜찮다, 라고 얘기하는 분이 있어요. 그게 가장 효과적인 입체를 보려면 (양 눈의 두 개의) 동공의 수정체 사이에서 11센티의 간극을 가지고 만든 입체영화가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렌즈 두 개를 어떻게든 딱 붙여서 그 거리 차이를 11센티로 만들어야 되는 거죠. 요새 나오는 카메라들이 점점 컴팩트해지는데, 이게 작아야지만 그만큼의 거리를 서로 붙일 수 있는 거지요. 렌즈가 예전의 ENG 카메라처럼 크면 절대로, 절대로, 이게 아무리 서로를 딱 붙여놔도 렌즈의 간격이 15센티에서 20센티 이상 나와 버리는 거죠. 그래서 컴팩트하게 만드는 요즘은 가능한 일일 텐데, 당시 1968년도의 카메라라면 굉장히 부피가 크고, 그래서 거기에 구멍을 내서 만든 다음 렌즈를 붙여서 만들지 않고서는 이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현재 자료원이 보유하고 < 몽녀 >의 필름은 원래 프린트 필름 단벌 하나만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저희가 입수한 필름인데, 원로 영화인으로부터 기증받은 프린트입니다. 그분이 < 천하장사 임꺽정 >과 그 다음에 <몽녀> 프린트필름 단벌, 각 한 벌씩 80년대에 자료원에 맡기셨어요. 당시에는 누가 기증했는지 출처가 없다가 2000년대 초반에 저희가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한테 확인을 하고, 다시 재정리를 해놨는데, 그러다보니까 처음엔 저희가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때는, 그냥 지금 이 프린트가 이 영화의 유일본 프린트였구나, 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보니까 어, 이거는 테크니스코프 같아. 왜냐하면 보시는 바와 같이 테크니스코프처럼 (아이폰의 필름을 가리키면서) 4 포퍼레이션 안에 2 프레임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상을 자세히 보면 위와 아래 두 개의 상이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거든요. 위에 있는 프레임과 아래에 있는 프레임이 영상이 동일한 이미지인데 그 크기가 서로 똑같지가 않아요. 필름검색기로 본 자료원 보유 < 몽녀 > 포지티브 필름 화면 정성일 _ 네, 지금 이 작은 프레임으로 보아도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네요. 장광헌_ 그게 이제 차이가 나는 건데, 테크니스코프 필름은 4 퍼포레이션 안에 두 개의 프레임을 나눈 것은 필름의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일부러 만든 거고, 똑같은 두 개의 프레임이 4 퍼포레이션 안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런데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는 두 개의 프레임이 서로 크기의 차이가 있는 같은 이미지인 거예요, 그래서... 정성일 _ 그럼 이걸 두 번 찍었다는 뜻이에요? 장광헌_ 두 번이 아니고요, 한 번을 찍을 때, (카메라에) 렌즈 두 개, (필름이 들어있는) 마가진 두 개가 달려 있는 거죠. 그렇게 한꺼번에 찍는 겁니다. (아이폰의 영상을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상을 찍을 때, 카메라가 팬 하게 되면 (왼쪽에 있는 렌즈로)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과 (오른쪽에 있는 렌즈로 찍는) 다른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이 서로 다르겠죠. 지금 기술과 비교를 하자면 굉장히 어지럽거나, 좀 더 전문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광원이 들어가는 부분, 고스트(ghost) 현상이라고 해서 중간에 안개처럼 스모그 현상들이 생기는 현상이 있는데, 그런 현상들을 처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완전한 입체라고 보기가 어렵다, 는 것이 오직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 몽녀 >만이 아니고 다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필름이 다섯, 여섯 편 정도 되는데요.... < 천하장사 임꺽정 >(1968), 경향신문 광고(1968.2.5.) / 영화기재국산화 필름도 50% 절약, 경향신문(1968.7.27.) 정성일 _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 장광헌_ 네,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죠. 다 확인을 했어요. 일일이 다 확인을 하고 왔는데, 방식이 다른 게 딱 하나가 있어요. 2000년대에 만들어진 < 평화의 시대 >라는 필름은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필름과는 다른 방식, 다른 방식이란 게 조금 더 말씀드리면, 독일의 뮌헨 박물관장이 입체영화에 굉장히 전문가신데, 그분이 한 번 방문을 하셔서 우리나라에서 입체영화를 찍은 게 있으면 보여 달라 해서 샘플을 그때 보여 드렸어요. 그랬더니 이거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동유럽에서 찍었던 방식과 같다, 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만 해도 할리우드는 50년대에 한 해 60편씩 엄청나게 입체영화를 찍었어요, 그리곤 확 죽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유행이 지나고 나서 들어오게 된 거죠. 지금 기록을 보면 59년에서 6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처음 입체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제작을 1968년도에 하게 됐는데, 장석준 촬영 감독님이 4년 정도를 고민하시고 만드셨대요.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걸 보고 그때부터 효과에 굉장히 호기심이 많이 있으셨던 거죠. (다른 사람들, 감독들이나 특히 제작자들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상태로 해서 (3D를 구현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실은 저희가 굉장히 이 영화에 대해 확인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원본 필름, 원본 네가 필름이 없으니까 어떤 형식인 줄을 몰랐던 거예요. 당시 기록들도 많지 않아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원로 영화인들을 통해서 확인했을 때는 당시에는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마가진 두 개로 두 개의 필름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좌우완 네가 필름이 존재를 했겠죠. 그냥 구술만 있는 상태에요. 게다가 할리우드는 우리나라 방식하고 여기서 달라지는 것이,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그렇게 만든 것을 가지고 레프트(left) 필름과 라이트(right) 필름으로 나눈 다음에 그걸 각각 프린트 인화해서 영사기 두 대로 교차상영을 해서 그 효과를 냅니다. 그게 원래의 할리우드의 3D (표준) 방식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건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두 개의 네가 필름이 존재하면서 인화를 할 때 하나의 필름으로 합쳐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까 두 개의 상이 생긴 것, 아래에 하나 위에 하나가 (할리우드와 비교하자면) 위에 좌, 밑에 우, 이런 식으로 해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내고 상영 시스템을 바꾼 겁니다. 상영 시스템, 영사기에, 제가 본 것은 영사기에 렌즈가 있으면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 안을 반쪽으로 나누어 두 개의 상을 보여주는 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래 위 필름이 내려갈 때 두 개의 프레임을 다 잡아 내는 거죠. 그렇게 영사를 하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 몽녀 >를 가지고 우리가 재현을 못 하느냐, 라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2007년에서 2008년까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테스트를 많이 했고 당시 디지털로도 할 수 있다고 해서 디지털로도 5분 정도를 테스트 했죠. 두 가지 결과를 먼저 말씀 드리면, 아날로그는 너무 상태가 안 좋으니까 필름이 불안정해서 이걸 보존용 필름으로 만드는 것도 과연 잘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결과였고 그리고 당시에는 원본 필름이 어떤 상태로 되어있는지 몰랐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실제로는 레프트 네가 필름과 라이트 네가 필름이 있어야지 정확한 복원이 되는 거잖습니까, 자료원은 원래의 원본을 복원하는 것이 목표이지 그걸 수정해서 상영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걸 모르니까 저희는 이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 필름을 그대로 밀착인화를 해서 찍어낸 거예요. 그게 가장 필름에 손상을 덜 가게 하는 거고 이 품질을 그대로 받아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그렇게 받아낸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그렇게 되면 이건 나중에 아날로그적으로 다시 재현하기는 어렵고, 디지털 방식으로서 나중에 이 프레임을 나눠서, (잠시 생각) 쉽게 말씀 드리면 번호를 매겨서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나눕니다. 나눠서 디지털로 볼 때는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두 개의 네가 필름 형태로 만드는 거죠. 저희가 로직을 그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하는 게 가장 맞는 방법인데 그때 당시에는 또 이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어요. 정성일 _ 그렇죠. 두 편의 영화를 찍는 꼴이 되니까. 장광헌_ 그렇죠.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를 하고, 단지 이제 디지털 복원의 방법으로서 테스트를 한 것은 과연 그렇게 디지털로 했을 때 품질이 어느 정도 나올까, 이거였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프로덕션에 당시 참여했던 분들하고, 그때 그분들은 (다른) 디지털 입체 영화에 대해서 테스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 영화를 테스트할 때 저희가 이거 한 번 테스트해보자, 해서 샘플을 드리고 스캔 작업해서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스크래치마저도 입체로 나와 버렸어요. (웃음) 정말로 기가 막히더라고요. 스크래치가 입체로 확 보여요. 정성일 _ 오히려 스크래치가 가장 효과적이었겠네요. (웃음) 장광헌_ 그러니까 저희는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해서 복원을 한다, 그러면 괜찮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스크래치라던가 (필름에 달라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해야만 하는 복원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건데, 저거는 도저히 손을 못 대겠다, 라는 결론이었죠. 왜냐하면,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저희가 디지털복원을 하면서 한 편을 복원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있는데 < 몽녀 >는 적어도 2.5배 내지는 3배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 거라는 계산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세 편 정도를 하는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는, 안 그래도 두 편으로 나누면 계산상으로는 서로 다른 두 편인데 거기다 난이도에 있어서도 최고의 난이도인 영화인 거죠. 정성일 _ 복원 작업도 현재의 기술과 함께 항상 경제적인 문제군요. 장광헌_ 그런데 당시 이런 게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 아바타 >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3D 영화에 대한 붐 아닌 붐이 일어나면서 저는 엄청난 압박을 받았어요. 당시에... 정성일 _ 아, 한국에는 왜 3D 영화의 역사가 없느냐는, (웃음) 사실 그때는 전 세계 모든 영화제가 갑자기 수준과 상관없이 3D 영화를 우대했었고, 시네마테크들은 3D 영화의 복원 사업에 매달리기도 했죠. 장광헌_ 한국에 있는 (입체) 고전영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하자. 영진위에서도 저희 보고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전에 아카이브로써 표준 영사 시스템을 갖추는 것과 복원의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항상 테스트를 하게 되는데 테스트를 한 결과를 놓고 복원을 여기서 이만큼 작업해 들어가는 건 우리가 지금 하기엔 현재의 기술과 역량으로서 힘들다, 라는 판단을 이야기해줬어요. 근데 계속 하자는 거예요. 계속 하는 것이 소모성으로 비친다 할지라도 꼭 해야 한다면 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필름을 몇 번이고 되 만져서 작업을 하면 이 필름은 나중에 정말 만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까, 그러면 나중에 정말 기술이 원하는 수준의 작업이 가능해졌을 때 만져볼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리니까, 그렇게 우리가 투자하기엔 이건 모험이다. 그래서 일단 미룬 거예요. 현재로서는 그렇게 미뤘지만 후회되진 않아요. 이 필름이 현재는 이렇게 있지만 지금 만약에 멋모르고 (작업을) 했다가 그러면 많은 부분에서 효과를 못 보고 낭비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차원에서는 지금의 저희 자료원의 보존기술센터에서는 잠시 보류해둔 상태이지만, 앞으로 어찌 되었건 다시 만져야 할 때는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다시 판단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좀 더 손쉬운 방법들이 생겨날 거예요. 정성일 _ 그러면 지금 < 몽녀 >는 어떤 상태입니까? 장광헌_ 현재는 원본 프린트 필름이 있고요 거기서 듀프 네가 필름, 밀착 인화를 해서 동일하게 밀착 인화된 테크니스코프처럼 생긴 듀프 네가 필름이 존재합니다. 거기까지. 그래서 재현되는 필름은 없다고 할 수 있죠. 전에 보여드렸다시피 중간에 텔레시네 작업을 하면서 2D로 만든 영상만 있습니다. 일단 저희가 확인을 하기 위해서 만든 영상이죠. 지금 현재로서 볼 수 있는 미디어로는 그거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볼 수 있는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중요하니까, 2D 방송용 규격으로 만든 것도 그게 무슨 내용인지 나중에 기록으로서도 남겨야 하니까 지금 형태의 미디어를 만들어야겠다, 해서 중간 결과물을 만들게 된 겁니다. 정성일 _ < 몽녀 >의 현재 복원 상태와 판스코프의 원리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뿐만 아니라 매우 오랬동안 이 상영방식을 입체영화라고 불렀습니다. 3D 라는 말은 한참 뒤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이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디즈니랜드에서 마이클 잭슨의 <캡틴 EO>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단지 표현의 차이 이상으로 자료원의 입장에서 영화 기술사의 관점에서 입체영화와 3D 영화를 어떻게 분류하고 있습니까? 장광헌_ 저도 한참을 고민해 봤는데, 제가 정답이라 말씀은 못 드리겠고, 입체영화라는 것이, 공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입체영화라는 개념이 나와서 기술적으로 구현이 되었고, 그러다 삼차원 영화, 3D라는 것이 삼차원이라는 것이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면 아이맥스 3D도 나왔고, 4D도 나왔고, 그리고 조금 더 발전적으로, 아직 이건 영화다, 라고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홀로그램 자체도 광고성 영상부터 해서 굉장히 많은 발전이 있는 분야 중 하나에요. 그렇다면 홀로그램도 나중에 영화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렇게 봤을 때는 삼차원 영화라고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거고, 우리는 예전에는 입체영화를 삼차원 영화라고 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입체영화라는 것이, 그게 평면적인 영화보다는 입체감을 주는 영화의 통칭이다, 라고 말하고 싶고요, 그 종류 중에 여러 가지, 3D영화, 아이맥스 4D 이런 것들이 입체영화를 표현하는 표현방식으로, 용어를 설명하는 게 맞지 않나.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정성일 _ 그렇게 말한다면, 테크놀로지의 개념 분류에만 한정 지어서 말한다면 한국 최초의 3D 영화는 < 7광구 >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그 전까지는 입체영화고.... 장광헌_ 그렇죠. 좀 더 논의의 필요성이 있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장석준 촬영감독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직접 설명한 판스코프 방식에 관한 인터뷰나 기록이 혹시 남아있나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80년도에 돌아가셨어요. (1980년 8월 15일에 별세하셨다) 그런 기록이 제가 알기로는 없고 그 이후에 그분과 함께 작업했던 분들의 기록, 어떤 구술 기록이라든지, 그런 것들로만 그 분이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외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어떤 영화를 모델로 삼았다던가, 하는 기록은 없고요. 입체영화라고 보여지는 것이 있었으면 국내든 해외든 어디든 가셨데요. 그런 기록은 있습니다. 정성일 _ 그 당시에요? 굉장하군요. 그때는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든 시기였는데요. 장광헌_ 그걸 4년간을 연구하셨다는 걸 보면, 어디든 가셔서 연구를 하셨다는 것이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죠. 정성일 _ 그럼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뮌헨 영화박물관장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때 유럽으로 흘러나온 동구 영화들을 보셨을 가능성이 크군요. 만일 할리우드 영화만을 참고했다면 사실 구태여 외국까지 나갈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장광헌_ 가능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죠. (잠시 생각) 그런데 그 부분은 정확하진 않아요. 기록상 할리우드 쪽으로 가신 기록은 있는데, 유럽 쪽에 가셔서 이게 맞다, 라고 하셨던, 이게 우리에게 적합할 거다, 라고 하셨던 기록은 현재 없거든요. 단지 테크니스코프가 만들어질 때 영화의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사실은 테크니스코프가 우리나라에서는 70년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이 만들어 나온 거지만, 61년에서 62년, 그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나온 거예요. 원래 있던 기술을 우리 식으로 맞춰서 만든 거니까.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이걸 최초로 만들었느냐. 몇몇 분들의 기록을 보면 최초로 만들어서 일본에 수출을 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까 이렇게 만든 형태는 이미 있었어요. 40년대 러시아에도 있었고, 50년대에도 동유럽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한국형으로 실용적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할리우드 쪽에서도 공감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참 잘 만들었다라고, 오히려 일본을 통해 수출을 하셨다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기술을 밖으로 수출하는 것에 대한 많은 관심을 안 갖고, 일본 쪽은 그런 영화 기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으니까 일본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출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원로영화인분들은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쪽에 관심을 갖지 않은 점, 그게 아쉽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정성일 _ < 몽녀 > 프린트를 CGV에서 시사를 하셨다고요. 장광헌_ 네, 용산 CGV에서 했습니다. 정성일 _ 그때 보셨을 때 입체 효과는 어땠어요? 장광헌_ 효과는요, 정말 좋았어요. 정성일 _ 아, 그래요? 장광헌_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아날로그로 보는 거와는 차이가 확실히 많이 났어요. 예상을 하긴 했는데, 저희가 < 몽녀 >를 보기 바로 직전에 뭘 봤냐면, 액션스쿨에서 제작한, 액션을 주로 취하는 영상이 효과가 많이 나니까 그걸 영상으로 찍은 다음 입체 영화로 만들어서 테스트를 했거든요. 그걸 보고 <몽녀>를 봤어요. 봤는데 못지않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시에는 저는 그걸 몰랐죠. 입체를 의식하고 연출을 하느냐 마느냐 이것도 많이 좌우를 하는데,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만약 풀 3D라면 전체가 공간적인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 연출을 했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때에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입체영화들의 대부분은, 이를테면 주먹이 날아온다거나 도끼가 날아온다든가 이런 쪽에만 표현을 3D로 한 거예요. 나머지는 2D로 한 거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실제로. 지금도 그때 <몽녀>가 완전히 표현이 되진 않지만 3D처럼 표현이 되는 부분, 머리가 확 나온다든가 이런 부분들을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효과는 아날로그로 보던 것과는 많이 차이가 났죠.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스크래치가 3D로 쫙, 그러자 화면에 기둥 하나가 탁! (웃음) 정성일 _ (웃음) 먼지 속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장광헌_ 놀랐습니다. 저 기둥은 뭐냐. 딱 봤더니 스크래치에요. (웃음) 새벽 3시에 비몽사몽간에 보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당시 3D에 대해 국산화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떠들썩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는 그런 쪽에 관심 있는 게 아니었고 고전영화에 입체영화가 있다는 데, 그걸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그게 되느냐. 그게 관심거리였어요. 효과는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거죠. 이런 것들이 저희들에게 걸림돌이었죠. 기술적으로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그냥 스크래치를 다 지우는 것이 완전히 복원이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영상을 다 뭉개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요. 최대한 그걸 가능한 많이 손대지 않는 쪽으로 하는 게 사실은 복원의 방법인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깨끗하고 선명하고 이런 것들을 좋아해서 외국, 유럽 쪽의 복원영화와 우리나라의 관람객들이 보는 복원영화의 눈높이는 그런 데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정성일 _ 제가 어렸을 때 입체영화들을 볼 때의 안경이 기억나는데요. 지금이랑 완전 딴판의 안경이었잖아요. 그 당시의 판스코프 비전을 보려면 그 당시의 안경이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지금의 안경으로 봐도 효과가 같은 건가요? 장광헌_ 그 당시의 안경으로 봐야 해요. 정성일 _ 그럼 디지털 복원 테스트 시사에서는 그걸로 보셨어요? 장광헌_ 우리가 만들었죠. 그러니까 당시 기록에 따라 셀룰로이드를 사서 저희 직원이 그대로 만들었어요. 할 수 있는 한 그대로. 테스트를 하려고 안경을 두 개를 만들었어요. 진짜 되더라고요. 그건 아날로그 방식을 보려고 했던 거고요. 저희가 아날로그 테스트를 하려면 기존의 영사기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식으로 생겼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래 보면 반이 쪼개져 있어요. 그 프레임을 (위 아래로 있는)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잡아내는 그런 렌즈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테스트할 때, 우리나라에 (그 렌즈가) 6개밖에 없었거든요. 그 중 3개를 어찌어찌 빌렸어요. 그 중 하나는 고장이 나서 또 안 됐고 두 개를 가지고 했는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영화 중에 < 공포의 축제 >라고 86년도 영화가 있습니다. 그 프린트가 가장 온전한 상태로 있어서... 정성일 _ 그 영화도 판스코프 방식인가요? 장광헌_ 네, 그렇죠. 그걸 봤죠. 그걸 보면서 안경을 만들었고, 편광안경을 만드는데,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편광방식을 패시브(passive) 방식이라고 하는데 리얼D, 돌비3D 이런 것들이 있는데, 처음에는 이 방식들이 같은 편광안경인 줄 알았는데 각자 다 다르더라고요. 리얼D면 리얼D 안경으로 만들어진 걸로 봐야 하는. 그리고 액티브 글래스(active glass) 방식이라는 것은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주는 방식이어서 안경이 비싸죠. 수신 장치가 따로 있고. 이런 건 프로젝터가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여도 보이는 거죠. 그런데 옛날 영사기는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예전에 < 몽녀 >를 만들어놓고 보니까 영사가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미러 박스를 만들어서 영사기에 장착해서 영사를 하셨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지방을 다니며 영사를 할 때는 장석준 기사가 직접 다니면서 미러 박스를 설치하고 영사까지 했답니다. 정성일 _ 순회공연이었네요. (웃음) 장광헌_ 직접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영화촬영을 못 했다, 그런 기록도 봤습니다.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그때의 배급 방식이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네요. 지금처럼 동시 개봉하고 그러면.. 장광헌_ 지금과 같은 엄청난 스크린이 있었으면 못했죠. 정성일 _ 기록에 의하면 < 몽녀 >는 유영길 과 장석준 , 두 분이 찍은 걸로 되어 있습니다. 장광헌_ 아, 유영길 촬영감독은 그때 보조역할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조역할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론 장석준 기사님께서 메인을 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성일 _ 저는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를 모두 3D 스크린으로 구현된 것을 보지 못해서 궁금합니다. 두 영화 사이의 기술적 차이는 어떻습니까? 단지 경험적 차이인지요? 장광헌_ < 몽녀 >가 두 번째 작품이잖아요. 저는 기술적인 적용치는 동일하다고 보고요. 방식은, (잠시 생각) 입체영화를 찍으면서 실제로 이 장비로 찍어서 잘 찍힌다, 이런 것보다 엔지니어의 노하우로 많이 좌지우지 하거든요. 신문 기사라든가, 당시의 구술 기록을 보면 < 천하장사 임꺽정 >을 찍어서 효과는 확실히 보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몽녀>를 찍을 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있다, 라고 하시고 계세요. 그래서 <몽녀>를 찍었을 때 카메라의 잘못 찍혔을 것에 대한 부분적이 보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경험치가 많이 업그레이드가 되었다고 보지,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신 영화까지도, 70년대 영화까지도, 동일한 방식이라고 알고 있어요. 정성일 _ 네, 그럼 하여튼 당시의 판스코프 방식을 보려면 지금의 관객들에게 옛날 방식의 편광안경을 만들어서 나눠줘야만 한다는 거군요. 장광헌_ 맞습니다. 그때 당시의 필름을 어찌어찌해서 복원을 해서 그 필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안경도 그렇게 만들어서 보여줘야겠죠. 정성일 _ 영사기의 문제도 또 있는 거죠? 장광헌_ 있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된 렌즈를 구해서 영사기에 장착을 해서 영사를 해야겠죠. 정성일 _ 한국영화사 안에서는 거의 저주받은 역사로군요. 6편의 역사라고나 할까? 장광헌_ 시도를 했다는 차원에서 많이 긍정적으로 봐주시죠. (웃음) 그런데 정말 손을 많이 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제가 전반적으로 봤을 때 (양팔을 크게 벌리면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손봐야 하는데, 이런 걸 장석준 촬영감독님은 하셨어요. 하신 걸 보니까, 정말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일을,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으면.... <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 입체 영상 정성일 _ 지난 5월에 자료원에 자리한 시네마테크에서 알프레드 힛치콕의 < 다이알 M을 돌려라 >를 3D 방식으로 상영하였습니다. 이 판본은 일종의 복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광헌_ 이번에 상영된 < 다이얼 M을 돌려라 >는 디지털 시네마 형태로 만들어진 3D 영화입니다. 1954년에 처음 개봉했을 때 어떤 시스템으로 상영되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연간 60편의 입체영화를 제작한 할리우드 방식을 봤을 때, 영사기 두 대를 돌려서 상영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그게 가장 유력한 방식이죠. 지금 상영하는 디지털시네마는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간편해졌죠. 둘 사이에 동일한 거는 찍어서 원 소스가 되는 영상은 좌우 영상 두 개가 존재합니다. 근데 만들어서 일종의 프린트 역할을 하는 디지털 시네마 패키지라고 하는 DCP 형태의 데이터는 그 영상을 디지털 기술로 합쳐서 보여주는 거예요. 대신에 데이터가 합쳐진 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고요, 관건이 되는 건 그렇게 합쳐진 데이터와 영사하는 시스템이 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영사기에 렌즈를 장착하고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다시피, 아날로그식으로는 영사 시스템이 간편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디지털은 또 영사 시스템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지금 나와 있는 것이, 아까 잠깐 설명 드린 것처럼, 크게는 패시브 방식과 액티브 글래스 방식 두 가지가 있고요, 액티브 글래스 방식은 어떤 특허 기술을 내서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 주는 겁니다. 기존의 디지털 프로젝트가 있는데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로 그 데이터를 DCP 영상으로 상영하게 되면 그 앞에 분배기 같은 역할을 하는 장비를 그 앞에 놔둬요. 분배기와 같은 수신기가 있는데요, 일종의 수신기를 놓으면 관객석에 있는 사람이 끼고 있는 안경 가운데 수신 장치가 있거든요, 그 수신 장치로 찰칵찰칵, 실제로는 여러 번 프레임을 나눠주면서 양쪽에 영상을 수신하면서 받아주는 역할을 해요, 그렇게 보여주는 방식이 있는데, 이 방식은 안경이 굉장히 고가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디지털 일반 프로젝트를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장단점이 있고요, 반면에 패시브 방식은 디지털 프로젝터를 가공해야 해요. 뭔가 앞에 렌즈 두 개를 붙이거나, 리얼D 방식은 렌즈 두 개가 나와 있는 방식이고요. 지금 일반적으로 CGV에 소니의 장비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소니 장비는 입체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리얼D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앞에 렌즈가 두 개 달려 있어요. 그래서 프로젝트 하나에 렌즈 두 개가 붙어있는 방식인 거죠. 그 외 다른 건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마스터 이미지란 것이 있고, 돌비3D란 것이 있는데, 이거는 그 기종에 해당되는 것만 되지, 다른 기기와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3D가 아직은 그렇게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아요. 디지털 3D 기술이 제작에 있어서는 간편해졌는데, 상영 시스템은 좀 복잡해요. 아날로그와 다른 점이 그런 겁니다. 정성일 _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보면서 이안이 참 영리한 연출자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 영화는 사실 3D 화면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걸 종종 여러 화면 사이즈로 다시 분할한 다음 시각적 효과라는 것을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힛치콕의 < 다이얼 M을 돌려라 >에서도 부분적으로만 3D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인 연출이라기보다는 기술적 한계라는 측면을 포함해서 < 몽녀 >의 입체 연출 장면은 영화 전체의 어느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지요? 장광헌_ 전체를 3D로 재현해서 보질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은 안 되지만 당시 기록을 봤을 때 풀 3D는 전혀 아니었어요. 연출자의 연출에 의해서 그런 장면만 3D 형태로 구현을 하는 방식이었고,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를테면 80년대에 만든 < 공포의 축제 >는 확실히 말씀하신 것처럼 2D 부분이 있고, 어느 부분은 갑자기 3D 부분이 있고 그런데, (잠시 생각) 3D 부분이 많지 않았어요. 대충 어림잡으면 많아 봐야 4분의 1 정도가 3D 정도일까, 그런 효과를 내는 장면을 만드는 거죠. 근래 영화들도 실사 영화들은 풀 3D로 만드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고요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거의 풀 3D로 만들죠. 정성일 _ 당시 기사를 보면 < 몽녀 >는 이재웅 녹음기사가 입체음향으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건가요? 장광헌_ 아, 그건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입체 영화니까 사운드도 입체감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확인해 보니까 당시 < 몽녀 >를 제작했을 때는 3트랙으로 만드는 녹음 방식을 취하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4트랙이 스테레오인데 스테레오와 비슷한 형태였던 거죠. 웃음이 나오는 부분은, 당시 그렇게 만들었는데 극장에서 상영할 때 구현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석준 촬영감독이 당시 동아극장, 그러니까 나중에 아세아 극장이죠. (아세아 극장은 지금의 세운상가에 자리했다가 2001년에 문을 닫았다) 아세아 극장에서 입체음향을 내기 위해서 영사기에다 3트랙을 읽어 들이는 영사장치를 또 개발해서 붙이셨어요. 그렇게 해서 상영을 했다고 합니다. 정성일 _ 트랙이야 필름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실제로 테스트 영사를 했었을 때 현대의 극장에서 구현된 사운드의 느낌이 어땠어요? 장광헌_ 아, 그거를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래 원본은 없고, 사운드 필름도 없었고,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를 만들었는데, 갖고 있는 원본 프린트는 모노입니다. 정성일 _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거군요. 장광헌_ 그렇죠. 그런데 80년대에 저희에게 들어온 프린트도 원래 당시의 사운드를 낼 수 있는 필름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저희가 생각 하건데 3트랙짜리 사운드가 아니고 이건 그 이후에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프린트가 아닐까, 라고 추정하는 겁니다. 정성일 _ 만약에 추론컨대, 그 방식을 그 시스템으로, 실제로 들었으면 어떤 사운드가 들렸을 거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지금으로 따지면요, (잠시 생각) 그냥 스테레오죠. 스테레오와 비슷하게, 라는 거죠. 완전한 스테레오는 아니지만 모노의, 단방향의 센터에서 보내는 음향이 들리는 것보다는 양쪽에서 들리는 부분은 굉장히 낫겠죠. 모노보다는. 레프트 라이트로 나눌 수 있었을 겁니다. 정성일 _ 그럼 복원을 하게 되면 음향도 복원 대상이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사운드도 복원 대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제까지 저희가 복원했던 작품들은 대체로 사운드가 모두 모노였어요. 모노였기 때문에 굳이 그 트랙을 나눠서 다시 맞춰가면서 하진 않았어요. 단지 포커스를 맞춘 부분은 노이즈 쪽이었죠. 노이즈가 많은, 여러 가지 불편한 음향들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 쪽에 포커스를 맞췄지, 실제 마스터링을 다시 하는 쪽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5.1채널, 7채널 같은 거야 이후에 그걸 복원한다면 그렇게 다시 나눠야겠죠. 일본의 경우 음향과 대사를 분리해 고전영화 사운드를 리마스터링 하긴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럴 여건이 못 되는 게 현실입니다. 정성일 _ 문제는 < 몽녀 >같은 작품은 장석준 촬영감독님이나 이재웅 녹음기사, 모두 세상에 지금 계시지 않으니 복원을 할 때 가이드 라인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군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은 1980년에 돌아가셨고, 이재웅 기사는 2010년까지 생존해 계신 걸로 확인했는데 그 이후는 지금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 지지하루의 흑태양 >(1971), 경향신문 광고(1971.4.1.)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도 보셨습니까? 장광헌_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프린트는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성일 _ 그럼 그 이후의 입체영화로 자료원에는 어떤 영화가 있는지요? 장광헌_ < 홍길동 >입니다. 근데 이 <홍길동>이, 오늘 아침에 제가 확인했는데, 그게 현재까지도 네가 필름만 있는데 필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이걸 프린트로 옮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3D였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맞는데 2D 영상은 하나만 있으니까 그게 분명히 레프트, 라이트 중 하나만 저희가 갖고 있는 거고요, 하나의 영상이 없는 겁니다. 네가만 존재하고 기록이 없으니까 이제까지 저희 직원들은 모두 이게 3D 영화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은 3D 영화로 분류하되, 하지만 좌, 우중에 하나다, 라고 확인을 한 정도입니다. 정성일 _ 그럼 < 천하장사 임꺽정 >, < 몽녀 >, < 홍길동 > 이렇게 순서대로 보면서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모두 판스코프로 촬영했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요? 이 문제는 미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촬영의 입장에서는 기술의 개선이라는 문제로 먼저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스코프의 촬영방식에서 어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나요? 장광헌_ 그런데 이게, (잠시 생각) 제가 계속 말씀 드리는데, 그 전에 < 악마와 미녀 >도 있고, 전부다 똑같이 지금 3D로 재현한 필름이 없어요. 그러니까 본 사람이 없는 거고, 본 사람이라고 해봤자 80년대 초반, 그 이후에는 본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저희가 보기에는. 그래서 이게 어디가 어떻게 변천되면서, 뭐가 고쳐졌다, 라고 확인할 길이 없는 거죠. 저희가 봤을 때 방식은 같아요. 대체로 지금 디지털 3D 기술도 마찬가지지만 찍는 사람의 노하우가 많이 좌우를 하거든요. 얼마나 빨리 찍고 얼마나 잘 찍을 수 있는지, 고스트 현상을 없앨 수 있는지 촬영기사와 지금의 스테레오그래퍼 라는 특수한 직업의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양각과 음각, 들어간 것과 나오는 것을 연출하면서 촬영 감독과 같이 보고 모니터링을 함께 해요. 그래서 모니터를 할 때 예전에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이렇게 보다가 입체영화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스테레오그래퍼 이렇게 같이 보는 거죠. 3D 기술은 그렇게 바뀌었는데, 물론 장비의 개선을 하시려고 했겠죠. (잠시 생각)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렌즈가 크면요, 아무리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아요. 렌즈와 렌즈 사이의 간극이 11센티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옛날 방식의 카메라들은 분명히 다 크니까 렌즈가 그 간극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모두 크잖아요, 아무리 둘 사이를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을 테니까 이걸 어떻게 하면 컴팩트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관심이 집중되었겠죠, 이런 면에서 줌 렌즈를 쓰는 것이 또한 개선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성일 _ 아, 줌 렌즈요... 만약 그 방식이라면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거의 동시에 발생하지 않습니까. 결국 카메라를 가능하면 세워 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3D 효과를 구현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좀 더 까다로운 기술적 난점과 만나게 될 텐데... 장광헌_ 아 조금 더 말씀 드리면요. 왜 장석준 촬영감독이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찍으려고 하셨을까, 를 한번 생각해 봤어요. 지금 3D 영화들은 트라이포트처럼 생긴 곳에 받침대 같은 게 있습니다. 그 받침대에 카메라 두 대를 장착해서 찍습니다. 근데 이게 수평이 정확하게 맞거나 간극도 정확하게 맞아야 해요. 근데 요 받침대가, 실제로 리그라고 합니다만, 이 리그를 어떻게 정밀하게 깎느냐가 기술이에요. 그런데 카메라가 한 쇼트만 찍는 게 아니고 계속 움직이면서도 찍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돌아가면,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의 상이 겹치는 상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걸 고스트 현상이라고 해요. 또 광원이 들어갔는데 우완 영상에는 햇빛이 없는데, 좌완 영상에는 햇빛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날로그로 찍으면 절대 고칠 수가 없거든요. 디지털로 찍게 되면 그건 디지털 소프트웨어로 고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솔루션화 해서 만들어진 게 요 근래 디지털 3D의 발전적인 기술인데, 생각을 해보면 그때 아날로그적인 기술로 봤을 때는 두 대의 카메라로 찍으면요, 왼쪽 렌즈와 오른 쪽 렌즈로는 상을 같이 맞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추정하건데, 카메라 한 대로 만드신 게, 카메라 한 대에 렌즈가 붙어있으니까 (둘 사이의 서로 다른) 움직임은 적어도 없지 않았을까 라는 거죠. 생각해볼수록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이거 정말 괜찮은 생각을 하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는 지금의 3D 기술에서 가장 난점이 되고 고도화 기술이 되는 부분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카메라 한 대로 렌즈 두 개를 장착해서 찍었다. 그게 오, 저는 굉장히 일리 있는 기술적인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_ < 몽녀 >와 주변의 입체 영화들을 복원하는 과정의 경험치가, 한편으로는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 3D 영화들에서 프린트 이외에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 거네요. 안경과 영사기, 말하자면 관람방식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문제. 장광헌_ 안경은 당시의 그 방식에 대한 기록만 있으면 만들 순 있어요. 데이터만 있으면 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그 데이터가 없으면 정말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죠. 근데 저희가 알았던 것은 일본 쪽에서 그런 옛날 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로 하니 딱 맞는 거예요. 당시 장석준 촬영 감독이 그렇게 만든 카메라가 거꾸로 일본으로 가서 많이 쓰였다고 하니까, 60년대 괴수영화를 보면 일본 기술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많이 찍었다고 하는데, 근데 입체영화는 거꾸로 수출을 하게 된 거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큰 공을,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상할 정도로 그 시기에 임권택 감독님이 미학적 관심보다는 기술적 관심에 대해 크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 몽녀 >에서는 3D 촬영을, 그리고 <증언>에서는 미니어처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쫓아가고 있으면 마치 앞으로 자신의 연출이 가야할 하나의 방향이라는 느낌이 든달 까요, 장광헌_ < 천하장사 임꺽정 >이 68년 초에 만들어진 거고 이 < 몽녀 >가 그해 여름에 찍은 걸로 알고 있어요. 3D 영화로 두 번째 찍은 건데, 정말 저는 개인적으로 감독님께 궁금한 게 왜 갑자기 입체 영화를 찍으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기술적인 관심이 있어서 한번 이거 해볼까 라고 생각하신 건지. 지금은 보조 역할을 하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당시에 완전 3D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연출하시는 분이 아, 여기는 입체감을 줘야겠다, 라고 연출을 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거든요. 말하자면 당시의 3D 영화는 전적으로 연출자의 연출과 촬영하는 쪽의 기술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거죠. 정성일 _ < 몽녀 >에서 3D 테스트 시사를 할 때 선택한 장면은 그걸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장광헌_ 아 테스트 장면이요. 자동차 신, 움직이는 신, 저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가장 움직임이 많은 쪽을 하려고 했어요. 복원을 할 때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손상이 많이 간 부분과 덜 간 부분을 샘플로 골라서 작업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이건 입체 영화니까, 입체 효과가 많이 나는 부분, 자동차가 확 앞으로 지나가는 신이었던가, 이 장면을 선정했어요. 사실 저희가 그 장면을 선택해서 이야기한 건 아니고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입체 작업을 할 때 가장 이 부분이 낫겠다, 라고 그쪽과 이야기해서 정한 거죠. 정성일 _ < 홍길동 >도 보셨나요? 장광헌_ 볼 수 있는 매체는 현재 없습니다. 정성일 _ 기록상으로 < 홍길동 >은 일본 제작진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이전 방식과 다른 빙식을 취한 건가요? 장광헌_ 기록상에 보면, 신상옥 감독이 일본 기술진과 (협력)해서 기술 개발을 했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확인할 길은 근데 없어요. 제 생각으로 오히려 기술개발을 했다면 촬영기술 쪽에 기술개발을 한 게 맞지 않을까 추정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판스코프 방식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갖고 있는 게 포지티브가 있는 게 아니고 네거티브가 있는데, 그 네거티브 중에서 좌완, 우완이 있는 게 맞는 데 그 둘 중 하나만 있는 거니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판스코프 방식은 좌완, 우완 네거티브가 있고 이걸 프린트 인화할 때 프린트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이 기술인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죠. 만약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면 그것도 동일하게 판스코프 방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정성일 _ 만약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한국에는 두 가지 입체 시스템이 있었던 셈이군요, 추정컨대, 혹은 기록상으로 이것 말고 또 다른 방식이 있나요? 장광헌_ 지금 2000년대 들어서 만든 영화는 < 평화의 시대 >라고 해서 HOT 나오는 영화가 있었어요. HOT 팬들을 위해서 만든 29분 길이의 영화인데요, 이걸 만든 방식은 판스코프 방식이 아니고, 프린트가 레프트 프린트, 라이트 프린트가 따로 있어서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프린트만 특이하게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중에 할리우드에서 촬영하고 영사하는 방식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홍길동 >은 확인이 안 되고요. 판스코프 카메라 정성일 _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가 현재 보존되어 있나요? 장광헌_ 카메라는 없고요.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영화진흥공사 시절에 기증을 하셨어요. 그 카메라를 종합촬영소에 전시를 했었어요. 그게 90년대까지는 보셨대요. 그런데 현재는 어떤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실되었습니다. 그 카메라가 있으면, 작은 카메라는 아니고요, 독특하게 생긴 카메라죠, 카메라 박스에 마가진 두 개. 달린. 정성일 _ 혹시 사진이 남아 있나요? 장광헌_ 사진은 지금 저희에겐 없고요.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면 러시아에서 나온 사진기 자체가, 그 원리를 알 수 있는 사진기는 (볼 수) 있어요. 저도 이게 어떻게 생긴 건진 본적이 없으니까. 영진위에는 찍어놓은 사진이 있겠죠. 분실돼서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됐는데, 이게 어디 가지는 않았을 텐데... 정성일 _ < 홍길동 >은 장석준 촬영감독이 관여하지 않은 3D 영화입니다. 기술 판권문제는 제가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영화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누차 이야기한 것처럼 3D 촬영에는 단지 기술만이 아니라 경험치가 필요하다면 더더구나 거의 유일한 촬영 전문가인 장석준 촬영감독의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활동 중이었습니다. 장광헌_ 약간 까다로운 문제가 있어요. 실제로는 신상옥 감독이 < 홍길동 > 제작에 참여했다고 했잖아요. 우리 기록에는 그 필름 크레딧이 있는데 거기엔 삼영필름이에요. 정성일 _ 아 신필름이 아니고요? 장광헌_ 네, 그래서 저도 그게 의아해서 자료를 맞춰보았어요. 그때는 (다른 영화사 이름을 빌려서) 대명(代名)제작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게 76년도 영화이고, 그럼 신필름이 폐업한 이후의 일이니까 혹시 신상옥 감독님이 제작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대명제작을 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럼 보통 대명제작을 하게 되면 제작은 아니더라도 기획에 대명제작을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도 야, 이건 좀 이상하다. 확인을 해봐라, 이러는 중입니다. 이게 과연 신상옥 제작이냐, 현재 기록상으로는 삼영필름 강대진 제작으로 돼있어요. 그게 좀,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개발 방식이 판스코프 방식이냐 아니냐, 그것도 반반인 거 같아요. 판스코프방식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정성일 _ 그 사이에 일본 쪽에서도 계속 개발을 하고 있었을테니까, 장광헌_ 그런데 그 시간에, 공존하는 시간에 장석준 촬영감독님이 판스코프 방식을 계속 유지하고 계실 때였어요. 그러니까 만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 홍길동 >을 촬영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판권을 주장했을 수 있었겠네요, 이를테면 내가 찍지 않는 영화는 허용할 수 없다, 그 정도 열정을 갖고 3D 촬영에 임했다면 그 정도 자부심을 갖고 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장광헌_ 그게 이번에 조사하면서, 우리도 데이터가 부족하니까, 이건 좀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라고 생각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정성일 _ 그렇군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전 < 몽녀 >를 3D로 볼 수 없는 상태로 보면서, 하여튼, 역설적인 상황 안에서 제 일을 수행해야겠군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인터뷰_ 2013년 6월 21일 날씨 가끔 흐리고 참 더웠음 대담_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서비스부 부장 장광헌 진행, 정리, 사진_ 유성관 진행,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