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각
- 감독
- 김민경
- 제작년도
- 2022
학교에 관한 두 가지 장면이 있다. 운동장을 가득 채우는 수백명의 학생들. 이들은 모두 똑같은 자세로 똑같은 구령을 외고 있다. 유독 한 아이의 우렁우렁한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들을 제압하듯 뻗어나온다. 당신은 우연히 그 아이와 시선이 얽혔다. 그 살기등등한 눈빛. 한편으로, 밤중에 복도를 걷고 있는 당신의 곁을 슥 지나치는 누군가가 있다. 불현듯 이 시간쯤 학교에 출몰한다는 어느 여학생 귀신의 얘기가 떠오른다. 소름이 돋아 다시 뒤를 돌아본다. 등을 보인 채 멀어져가는 그 애는 낯익은 옆 반 학생이다. 아니 잠깐, 그런데 그 애의 머리가 단발이었던가? 두 단편적인 이미지는 학교라는 공동체-공간이 품고 있는 매혹과 공포의 서로 다른 뿌리다. 전자가 존재증명을 향한 분투와 같이 획일적으로 도열된 이미지의 표면을 뚫고 나오는 우상 신화의 폭발적인 에너지를 표상한다면, 후자는 또다른 원천을 나타낸다. 바로 모두의 외양이 서로의 복사판처럼 유사한 상황 속에 불쑥 유령적인 징후가 들이밀어지는 순간이다. 새로 출현한 우상을 구심점으로 한 집단이 다시 질서지어지는 과정과는 반대로, 이는 유사 판본들의 차원에서 경쟁과 유희의 장이 열리는 원심적인 작용을 의미한다. 진본으로 이름 붙여진 것은 유실되었거나,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다만 상호 유사성 가운데 태어난 판본들은 계속적인 인력과 척력 작용으로 서로를 반영하면서 유기적 관계망을 형성해나간다. 올해로 개봉 20주년을 맞이하는 김태용, 민규동 감독의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 김태용 , 민규동 , 1999)는 시리즈의 첫 번째 영화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관객과 평단을 사로잡으면서 본격적으로 이 '여고를 배경으로 삼은 공포영화' 시리즈를 대중의 인상 속에 고유명사처럼 안착시킨 작품이다. 그런데 이렇게 '여고괴담' 시리즈를 떠올릴 때마다 흥미로운 것은 여고라는 장소와 괴담이라는 소재 사이에 어떤 친화성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연결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남고, 혹은 10대 남성들의 세계를 경유하곤 하는 학원-조폭물 계보의 영화들이 사회 구조나 권력의 무의식을 드러내는 우화로서 독해되는 데 비해, 여성집단의 공간은 주로 괴담이나 불가해한 사건들의 발원지로 묘사되어온 것은 한국 영화가 만들어온 어떤 하나의 경향성 여기에서 그 계보를 다루는 것은 목적이 아니고, 또 모두 다룰 수도 없는 광대한 주제이지만, 한국영화에서 가장 시원적인 ‘여고’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면 김기영 감독의 < 하녀 >(1960)에서 중간중간 등장하는 여공들의 야학까지도 고려할 수 있을 것이다. ‘하녀’라는 강렬한 캐릭터의 모태공간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여공 집단은 언제나 입을 모아 합창하고, 중년의 중산층 남성 주인공 동식의 등 뒤에서 끊임없이 가십과 저들만의 은밀한 눈빛을 주고 받으며 주인공에게 무의식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드러난다. 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 가운데 '여고괴담'을 위치시키고자 한다면, 시리즈의 다른 편들과는 달리 당시의 10대 여성의 문화는 물론 여성 퀴어 주체들에게까지도 시선을 확장하면서 '여고'라는 실제적인 장소성을 세밀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아온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야말로 우리가 다시금 주목해야 할 작품이 될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의 관계와 그 화학작용에 집중하며 통상적인 학원 공포물의 기획을 넘어서고 있다는 기본적인 인상들에 더해, 이 영화는 왜 '여고'는 '괴담'으로 대중에게 먼저 읽혀져야 했는가를 근원적인 지점에서 재질문하며 적극적으로 여고라는 공간의 공포를 성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의 진입, 몸의 배반] 늦은 등교길, 지각생 민아(김규리)는 수돗가에서 숨을 돌리다 우연히 빨간색 교환 일기장 한 권을 발견한다. 그 일기장의 주인은 어딘가 재수 없는 아이로 소문 나 있는 효신(박예진)과 민아의 동급생인 시은(이영진)이다. 호기심에 일기장을 들춰보기 시작했던 민아는 점차 빨간 일기장에 담긴 효신과 시은의 관계 속으로 깊이 몰입해 들어가고, 그에 따라 같은반 단짝인 지원(공효진), 연안(김재인)과 공유하는 학교에서의 평범한 일상들 위로 겹쳐지는 또다른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피처럼 빨간 일기장 속에는 효신과 시은 사이의 이끌림과 갈등, 그리고 효신의 외로움이 선명하게 맺혀있다. 효신의 투신을 기점으로 학교에 일어나기 시작하는 기이한 사건들 틈에서 섬뜩하게도 계속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면서, 민아는 이 파국의 진실을 좇아 학교를 누비게 된다. 단순한 줄거리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민아는 틈입자이자 매개자로서, 현재와 과거, 나와 타자, 효신과 시은, 학교에 공존하는 일상적 세계와 유령적 세계 등의 대립쌍을 자연스레 포개어 놓는 역할을 담당한다. 제 3자의 눈을 경유해 풀려나가는 이야기 구조는 흔히 접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 영화에서 특히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민아와 비교할 만한 또다른 대칭쌍이 함께 제시된다는 것이다. 학교의 국어선생님인 고형석 역시 이야기의 언저리를 맴돌고 있으며, 효신과 시은의 사이를 잠시나마 비집고 들어갔던 전적이 있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에 비해 형석이 이야기 안에서 하고 있는 역할은 크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는 효신과의 관계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야기 공간으로부터 끊임없이 거부당하고 있는 것처럼 무력해보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마도 이렇게 질문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두 명의 틈입자, 민아와 형석 중 왜 한 명은 이야기의 매개자로서 승인되고 한명은 외부자로 밀려나는가? 다시 말하면, 왜 민아는 효신과 시은의 관계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며, 형석은 관계의 바깥에서 사멸하는가? 우선, 타이틀 시퀀스 이후로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알리는 영화의 도입부, 수돗가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가볍게 인사를 나누는 민아와 형석은 여기서 교차하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이 행동 경로를 자세히 살피면 두 사람이 자연스레 어떤 공통분모를 형성하면서도 서로 빗겨나며 대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돗가에서 물의 세례를 받듯 얼굴을 흠뻑 적시다 우연히 효신과 시은의 교환일기장을 발견하는 민아와, 쓰레기를 주워 버리고 간단히 한 쪽 손만을 씻어낸 뒤 화면 밖으로 사라지는 형석 사이의 평행선은 이후로도 영화에서 몇 차례 반복된다. 민아가 별다른 의식 없이 효신의 '약'을 삼켜버리는 데 비해, 형석은 효신과 어울리고 싶어 하지만 그와 마시는 술을 모두 게워내고 마는 체질이다. 효신의 소지품을 경유해 환영을 만나는 장면에서도 같은 패턴을 볼 수 있다. 민아가 온몸으로 침투해오는 효신의 손길로 인해 기절할만큼 강렬한 빙의를 경험하는 반면에, 형석은 효신의 환영을 겨우 귓가로 불러들여 무언가 속삭이게 했을 뿐이다. 그리곤 목숨을 끊고 만다. 이러한 차이들이 나타나는 이유에 대해 분명 여러 차원을 아우르는 복잡한 설명 역시 가능하겠지만, 의외로 가장 유력한 해답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외연이다. 고형석은 선생-남성이고, 민아는 학생-여성이라는 가시적인 차이 하나. 영화의 초반부에 생기를 불어넣는 지원과 캠코더 소동은 이 당연한 차이를 재확인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먼저 달려와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며 웃는 민아와 달리 형석은 지원의 짝사랑 대상이자 멀리 떨어진 타자로서 암시된다. 지원은 그의 사적인 공간을 엿보려 캠코더를 들지만, 창과 창이 마주보는 건물구조를 통해 지원과 형석 사이에 놓인 물리적 거리가 정사-역사의 관계로 간신히 봉합되었을 때조차, 그의 얼굴이 아웃포커스로 새겨진 역사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결코 섞일 수 없는 이질적 이미지로서의 형석의 외연이다. 반면에, 민아는 '동등한 몸'으로 효신-시은의 관계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얻는다. 이것은 공동체-연결망을 유지하는 유일하고도 암묵적인 규칙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즉, '외적인 유사성' 속에서만 여기-이-공동체의 몸으로 귀속될 수 있음. 같은 원리로 효신의 죽음 이후 학교의 옥상, 복도, 화장실에서 출몰하는 유령들이 화면을 스칠 때, 우리의 시각이 판별할 수 있는 정보는 하나 뿐이다. 이들의 외양을 교복을 입은 그 주변의 친구들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공포인 동시에 매혹이다. 그러므로 왜 상관도 없는 타자의 일에 개입하냐는 친구 연안의 말에 "너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라고 응수하며, 효신의 죽음에서 자신의 얼굴을 발견하는 민아의 뛰어난 공감적 상상력은 이 유기적 네트워크의 본질적인 측면으로 확대하여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효신이 자신의 창작시를 통해 우리에게 넌지시 던지는 힌트 그대로다. "나는 누구도 될 수 있다. 진실이 거짓이 되듯.“ [재수 없는 것들] 그러나 이러한 네트워크-몸에도 언제나 정상성의 기준이 요구된다. 주요 사건들이 벌어지는 7월 9일은 효신과 시은의 생일이자 신체검사일이기도 하다. 낭만적이면서도 냉소적인 시선을 가진 효신은 키나 몸무게를 표지하는 숫자들이 진짜 성장에 대해 무엇을 알려줄 수 있겠냐고 반문하지만, 의외로 아이들의 몸은 쉽게 그러한 분별과 통제의 수단을 전유하고 뛰어넘는 것처럼 보인다. 사적인 신체적 특징과 정보를 교실이라는 공동의 공간에서 기록하는 이 신체검사 의례는 학교 시스템의 폭력적인 면을 상기시키지만, 또한 교실은 다시 그 수치들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폭로하는 놀이터로 전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키를 잴 때 슬쩍 까치발을 드는 아이를 통해 신체검사의 경직된 절차들이 느슨하게 풀어지며 일상적인 층위로 해체되어가는 순간, 비명소리로 먼저 암시되는 효신의 투신은 정상성의 폭력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공표하며 우리를 뒤흔들어놓는다. 영화에서 연안을 비롯한 아이들은 제 마음에 들지 않게 튀는 것들을 볼 때마다 여지 없이 "재수 없어"라고 반응한다. 효신과 시은이 자석처럼 서로를 끌어당길 때, 마치 반작용처럼 교실은 이들을 밀어낸다. 재밌는 것은 남학생 집단을 다루는 영화에서 주로 시선을 장악하는 것은 전적으로 힘이 있는 인물인 데 비해, 여기서는 '비정상'으로 낙인 찍히고 고립되는 인물들이 오히려 이목의 중심에 선다는 점이다. 이미 고형석을 '외부자'로 날인한 바 있는 이 유사한 이미지들은 이렇게 자신들만의 협화음을 쌓으면서 그 내부의 주파수를 넘어서는 '다른 음'들을 다시 예민하게 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래서 청력 문제로 음악시간에 노래를 함께 부르지 못하는 시은과, 어른들 아이들도 지겹다는 듯 아웃사이더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효신에게는 늘 눈총이 따라다닌다. 그런데 진정한 역설은 이 척력 작용이 강하면 강할수록, 거부된 이미지들은 거꾸로 집단 내부에 음각처럼 깊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효신은 물론이고 효신의 죽음을 자기 일처럼 받아들이는 민아에 대해서까지 과할 정도의 적개심을 표출하는 연안은 사실상 그 누구보다 '재수 없는 애' 효신의 존재감을 지워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시은이 홧김에 찢어버린 교환 일기장의 페이지들이 결코 사라지지 않은 채 무언가 사라져버렸다는 사실만을 덧붙이며 되돌아와 더 날카롭게 마음을 할퀴어대는 것처럼, 효신의 존재와 부재는 어떤 의미로든 강력한 것이 된다. 이때 학교는 공간 속에 배어든 과거의 기억들을 뿜어내며 효신의 자취와 반향을 이룬다. 그렇게 효신을 향했던 배제의 원리는 학교와 아이들의 무의식 속으로 다시금 어떤 유령적 판본을 불러들인다. 특히나 여러 사람이 이미 너무 갑작스럽고 돌출적인 이미지라고 지적한 바 있는 ‘욕조씬’(욕조에 앉아 혼자 울고 있는 효신)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참조하면 이 지점은 더욱 흥미롭다. 원래는 시은과 효신이 욕조에서 나누는 대화가 여러 씬 있었는데, 이후 편집 과정에서 대중의 정서에 맞지 않는 거북한 장면들로 받아들여져 결국 모두 강제로 잘려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그 가위질이 놓친 장면 하나가 살아 남아 영화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고의 공포, 그것은 '여고'라 이름 붙은 무신경한 묶음 속에서 유사 이미지로 귀속되는 몸들이 다시 파악 가능한 지평을 넘어서는 돌출물을 내밀기 시작할 때 한 번, 그리고 집단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우리가 온몸으로 밀어내어 온 이미지들이 불현듯 기억들 속에서 재활성화 될 때 또 한 번 세워진다. 이 유기망을 이루는 개별적 몸이자 결절점이었던 우리는 그것을 아직도 몸으로 기억한다. 영화 초반 시은에게 관심을 드러내며 눈 속에 담기는 인영, '눈부처'를 언급한 효신은 어느날 불안감에 이렇게 다시 묻는다. "내가 안 보여? 내가 개미야?" 그리고 중간중간 삽입된 이질적인 질감의 화면들을 통해 암시되던 효신의 유령적 시점이 마침내 강당의 지붕 위로 드리운 거대한 효신의 눈동자로 현신하여 학교 공간 자체를 눈부처로서 담아낼 때, 우리는 효신의 얼굴을 눈과 마음에 새기며,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너의 죽음을 잊을 수가 없다고. 어떻게 잊겠냐고. 이제, 모든 것은 밝은 빛으로 산화된다. 우리는 유령적 시간인 과거로 돌아가 그들과 자리를 바꾼다. 기억들이 주체가 되고, 우리는 유령적 시선으로서 그곳에 머문다.
“집중, 집중.” < 저지 프리스트 > 첫 장면에서 초상화처럼 정면으로 찍힌 윌리엄 프리스트 판사(윌 로저스)는 의사봉을 두들기며 카메라를 향해 꾸짖듯 말한다. 그런 다음 정작 자신은 쥐고 있던 신문으로 눈을 돌린다. 다소 당황스런 이 장면은 이어진 크레딧 시퀀스 다음 장면에서 흑인 제프 포인덱스터(스테핀 펫칫)의 닭 절도 재판이 벌어지고 있는 법정 시퀀스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프리스트 판사는 검사의 열띤 논고가 이어지는 동안 방청객에게는 잘 들으라고 호통을 치면서도 자신은 재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태평스럽게 신문 읽기에 계속 몰두하고 있다. “포드는 가장 브레히트적 영화감독이다. 그는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제시한다.”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이 말을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보다 더 잘 예시하는 장면도 드물 것이다. 방청객에게 경청을 요구하면서 자신은 경청하지 않는 판사, 사건 자체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과시하듯 딴청을 피우는 판사, 피의자가 실제로 절도를 했는지 여부보다 그가 메기 낚시 미끼로 뭘 썼는지가 더 궁금한 판사. 피의자가 자리에서 졸고 있자 “깨워. 이 법정에서 잘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라고 태연하게 말하는 판사. 첫 장면에서 프리스트 판사가 카메라를 보며 호통 칠 때, 그 호통은 법정의 방청객을 향한 것이면서 동시에 이 영화의 관객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자신이 성실한 책무 이행자가 아님을 노골적으로 선언하는 이 장면은, 프리스트가 성직자를 뜻하는 그의 이름이 암시하는 대로 자신을 법 위의 존재, 도덕적 확신의 존재, 그리고 서사적 규율 밖의 존재로 제시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엉뚱한 희극처럼 보이는 첫 재판 시퀀스는 법정 공방도 생략된 채, 프리스트 판사와 피의자가 낚시를 가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어눌한 흑인이 어떻게 절도 혐의를 벗게 되었는지, 아니 혐의를 벗었는지 여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프리스트 판사처럼 존 포드도 재판에 무관심하다. 서사 전체를 통틀어 프리스트의 관심사는 두 가지밖에 없다. 낚시(혹은 크리켓 게임)와 조카의 로맨스. 존 포드는 이 게으른 판사를 주인공으로 삼아 그의 직무태만을 고스란히 드러낸 뒤, 사랑의 중재자로서의 면모에 서사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19년 뒤에 만들어진 이 영화의 리메이크이자 걸작 < 태양은 밝게 빛난다 >(1953)에 필적한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저지 프리스트>는 포드의 이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영화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이 영화엔 소란과 신명에 대한 포드의 도취가 처음으로 온전히 표현되어 있다. 주인공이 자신의 직분과 임무를 잊은 듯 혹은 서사가 자신이 제시한 사건을 잊어버린 듯 발산되는 디오니소스적 파토스의 원형이 여기 있다. 이 도취는 역시 윌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이듬해의 < 굽이도는 증기선 >(1935)에서 폭발하듯 분출하며, 이후 포드 영화에서 가까스로 억압될지언정 결코 삭제되지 않는 정념의 용암이자 영화적 활력의 원천으로 쉼 없이 작동한다. 이와 연관된 다른 하나는 포드의 주인공의 도덕적 이중성이 이 영화에서부터 뚜렷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포드의 주인공에게는 공동체로부터 도덕적 책무가 부과돼 있지만, 그는 자신의 책무에 은밀히 저항한다. 그는 신성한 책무를 훼손(< 젊은 날의 링컨 >)하거나 일시적으로 망각(< 황야의 결투 >)하거나 그로부터 도피(< 도망자 >)하려 한다. 하지만 이 시도는 대개 갖가지 방식으로 실패한다. 포드 영화에서 공동체적 도덕과 사적 윤리는 끝없는 내적 교전을 벌이며, 그의 서사에는 임무의 완수를 향한 필연적 전개라는 표면 아래, 이 내적 교전의 자의적 혹은 우연적 해소로 귀결되는 부조리와 비합리가 음각되어 있다. 프리스트 판사의 이중성이야말로 공동체의 의무를 짊어진 이후 포드의 주인공들의 숨겨진 분열증을 예기하는 것이다. 줄거리는 이렇다. 윌리엄 프리스트는 순회재판소 판사(선출직)로 30년간 일해 왔지만 요즘은 낚시와 크리켓이 일과의 대부분이다. 죽은 형의 아들 제롬이 법률공부를 마치고 뉴욕에서 돌아온다. 제롬은 엘리 메이를 사랑하지만, 제롬의 어머니는 엘리 메이가 아버지도 알 수 없는 고아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주 상원의원이자 법률가 호레이스 메이듀의 딸 버지니아와 결혼시키려 한다. 프리스트는 제롬과 엘리 메이를 맺어주기 위해 갖은 꾀를 낸다. 그러던 중 폭행 사건과 재판이 벌어지고, 프리스트는 피의자 밥 길리스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카 제롬과 함께 프리스트는 판사가 아닌 변호사로 법정에 나서 그를 변호한다. 영화의 배경은 1890년대, 켄터키 주의 한 소도시다. 남북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흘렀지만 프리스트를 포함한 이곳 주민들은 전쟁의 기억과 더불어 살아간다. 정확히 말하면 이들은 북군(Union)과 맞서 싸웠으나 패배한 남부 연합(Confederate)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프리스트는 남부인의 기질을 발휘하고 이용해 밥 길리스의 방면 및 제롬과 엘리 메이의 결합이라는 숙제를 해결한다. 몇몇 포드 영화뿐만 아니라 남북전쟁을 소재로 다룬 미국 영화를 볼 때, 우리 같은 외국 관객이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남부적인 것에 대한 동경에 가까운 향수다. 미국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전쟁으로만 바라보면 이 향수는 노예제도 옹호와 같은 터무니없는 태도로 보인다. 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단순할 리는 없다. 여기엔 제도의 선악과 무관하게 남부 연합이 표상하는 모종의 모럴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미국 학자의 견해를 빌려야 할 것 같다. 노예옹호론자들 뿐만 아니라 남부 충성파들의 생각은 대체로 이러하다. “북부인들은 기록과 돈에만 눈이 먼 야비하고 궤변적인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이고 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며 반면 남부인들은 “관대하고 기사도 정신이 뛰어나며 친절하고 명예를 존중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남부 연합에 대한 향수에는 성문법이 지배하는 북부의 합리적이며 근대적인 생활방식에 대항해 명예와 관습법을 존중하는 “남부의 생활방식에 대한 옹호”라는 면이 개입되어 있는 것이다.(다니엘 부어스틴, <미국사의 숨은 이야기>, 범양사) 켄터키 주는 남북 전쟁 때 중립을 표방했으나 결국 전쟁의 소용돌이를 피할 수 없었고 주민들은 남부와 북부로 갈라져 싸웠다. 하지만 켄터키 주엔 남부 연합에 대한 호의를 지닌 주민들이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프리스트 판사와 주민들 대부분은 남북 전쟁 때 남부 연합에 소속돼 싸웠으며, 남부 연합 참전군인에 대한 거의 무조건적인 친밀함을 지니고 있다. 그 친밀함은 프리스트 판사에겐 법리는 물론 사건의 사실관계에도 앞서는 것이다. 반면 웅변하기 좋아하고 사실관계를 중시하는 엄격한 법률가의 태도를 지니고 있으며 프리스트의 자리를 노리는 야심가 호레이스 메이듀는 북부의 태도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표상한다. 요컨대 프리스트의 남부적 모럴(관습법과 명예)과 판사라는 직책(성문법과 합리)은 불화가 예정된 것이며, <저지 프리스트>의 첫 장면은 이 불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그가 엄격한 사실에 근거해 판정해야 하는 판사의 책무를 방기하거나 위반하면서까지 흑인 혹은 사회적 소수자에 편에 선다는 점에서 그를 일반적인 노예제도 옹호론자와 같은 부류에 포함시킬 수는 없다. 우리로선 긍정적인 의미의 남부적 모럴을 황야의 율법에도 문명의 규율에도 속할 수 없는 서부사나이의 모럴과 겹쳐놓고 보는 것이 맞을지 모르겠다. 프리스트의 정치적 모호성은 곧 존 포드의 모호성이다. 이 영화에서 위대한 남부인의 초상을 그린 포드는 5년 뒤에 가장 위대한 북부인의 초상을 담은 <젊은 날의 링컨>을 만든다. 아마도 포드의 서부사나이는 포드 자신의 범주화할 수 없는 이런 내적 모순을 투영한 인물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포드의 첫 유성 서부극 < 역마차 >보다 5년 전에 만들어졌지만, <저지 프리스트>를 포드의 또 다른 유사 서부극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재판 시퀀스로 시작한 <저지 프리스트>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재판 시퀀스로 끝난다. 앞서 말했듯 첫 재판에서 프리스트 판사는 제프의 절도 여부는 무시하고 그가 옛 북군 장군의 하인이었다는 것과 메기 낚시를 잘한다는 것에만 관심을 갖는다. 이후의 서사 전개는 마지막 시퀀스인 두 번째 재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다. 내 생각에 두 번째 재판은 포드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통틀어 가장 멋진 시퀀스의 상위에 오를만하다. 이 재판의 피고는 “많이 일하고 말이 없는” 타지 출신의 일꾼 밥 길리스이다. 프리스트와 목사 외엔 그가 엘리 메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엘리 메이 자신을 포함해, 알지 못한다. 밥은 엘리 메이에 대한 동네 남자들의 험담을 참지 못해 주먹을 휘두르고 이 때문에 법정에 선다. 프리스트 판사는 주먹다짐 현장에서 밥의 편을 들었다는 이유로 판사석에 앉지 못한다. 증인석에 앉은 밥은 왜 주먹을 휘둘렀는지에 대한 질문과 그의 살인 전과와 종신형 선고 전력을 알아낸 검사의 심문에 일체 답하지 않는다. 이때 프리스트가 변호사로 등장해 기막힌 계략을 실행한다. 증인석에 앉은 목사는 비밀엄수 약속을 깨고 입을 연다. 전쟁 당시 남군의 포병대 대위였던 목사는 남군의 패색이 짙어지자 종신형 선고자들로 부대를 충원했다. 목사는 그들 중 한 사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가 군인으로서 인간으로서 훌륭한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목숨을 걸고 전우를 구출한 경험담 그리고 이제껏 그가 딸을 위해 매달 생활비를 자신을 통해 전달해온 사실이 목사의 입으로 진술된다. 대부분 남군 병사였던 노인들로 채워진 배심원석은 목사의 증언이 진행되면서 술렁이기 시작한다. 이때 프리스트의 신호에 따라 재판소 바로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제프는 하모니카와 북으로 남군의 행진가였던 ‘딕시’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목사가 일어서서 그 병사가 바로 밥 길리스라고 지목하자, 배심원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제프 데이비스(남군 연합의 대통령) 만세’ ‘밥 길리스 만세’를 외치고 재판은 중단된다. 법정은 난장판이 되고, 흑인들은 흥겨운 딕시 연주를 계속하며, 이 소란은 곧바로 남군 베테랑들의 떠들썩한 축하 행진으로 이어진다. 행진하던 베테랑들은 주민들 틈에 있던 밥 길리스를 행렬에 끌어들이고 행진을 계속한다. 이것이 영화의 끝이다. 부동의 재판은 역동의 난장으로 바뀌고, 작은 사실들의 오점은 큰 정신적 우위로 무화된다. 엄격한 정신이 소유자라 해도 이 벼락같은 난장의 활기와 신명에 마음을 뺏기지 않기란 힘들 것이다. <저지 프리스트>는 세부적 규칙과 사소한 사실관계에 집착하는 북부인의 모럴 혹은 근대적 합리주의에 침 뱉는다. 이것은 포드 중기작에서 ‘주정뱅이 천사’라는 전형적 역할로 등장해온 포드의 형 프랜시스 포드의 침 뱉기로 구현된다. 호레이스 메이듀가 언성을 높일 때마다 멀리 떨어진 타구(침통)에 정확히 침을 명중시켜 법정을 번번이 웃음바다로 만들던 이 주정뱅이 배심원은 남부군 베테랑들의 행진에 경의를 표하는 호레이스의 모자 안에 다시 한 번 정확히 침을 명중시킨다. 포드는 예의와 매너로 자신을 치장하는 호레이스 같은 인간을 포용할 생각이 없다. 오늘의 눈으로 이 마지막 재판 시퀀스의 결함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이 재판에서는, 첫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폭행 사건에 대한 법률적 판단이 피의자의 삶에 대한 도덕적 판단으로 대체된다. 이는 사실상 근대적 법체계에 대한 부정이다. 더구나 이 도덕적 판단은 이성적 판단이라기보다 일종의 선동으로 이뤄진다. 두 재판에서의 프리스트의 선택이 모두 약자를 구하기 위한 시도라 해도 이건 위험한 포퓰리즘 아닐까. 또 다른 문제는 딕시를 연주하는 사람들이 모두 흑인이라는 것과 연관된다. 흑인들이 자신들의 해방을 반대한 남부 연합의 군가를 연주함으로써 남부인의 찬미에 가담하는 이 장면에는 만든 사람의 인종주의적 시각이 작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저지 프리스트>에는 이런 비판을 논박할 증거가 없다. 태그 갤러거에 따르면, 이 영화에는 분노에 사로잡힌 주민들의 흑인 린치 장면과 프리스트가 린치 중단을 호소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스튜디오에 의해 삭제되었다고 한다.(<존 포드>, 이모션북스) 리메이크 작인 <태양은 밝게 빛난다>에서 되살아난 린치 장면이 삭제되지 않았다면 이 영화는 보다 모호하고 복합적인 텍스트가 되었을 것이고 그 장면이 변호의 근거가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저지 프리스트>는, 개봉 당시 상업적 성공을 거두긴 했어도, 당대의 진보적 관객이라면 온전히 긍정하는 게 거의 불가능한 영화였을 것이다. 80여년이 지난 오늘의 관객 그리고 외국 관객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능한 대답은 존 포드가 오히려 결함과 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길을 택했다는 것이다. 첫 장면에서부터 판사의 직무 태만을 통해 근대적 재판에 대한 무관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딕시의 연주를 굳이 흑인들에게 맡김으로써, 포드는 결함을 최소화하거나 위장하는 게 아니라 장 마리 스트라우브의 말대로 자신을 ‘벌거벗은 모순’으로 드러낸다. <저지 프리스트>는 엄숙한 재판을 신명의 축제로 순식간에 탈바꿈시킨다. 이 축제는 얼룩과 오점을 고스란히 노출한다. 누군가는 그 얼룩과 오점 때문에 이 영화를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같은 이유로 이 영화를 그 얼룩과 오점의 성찰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느 쪽이라도 해도 최종적 판단은 미루는 게 좋을 것이다. 존 포드의 본격적인 필모그래피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지금 내가 난처한 자리에 서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 나는 < 몽녀 >를 보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면 나는 이 영화를 3D로 보지 못했다. 차라리 이 영화가 사라진 다른 영화들처럼 어딘가에 숨어있었다면 문제는 간단해진다. 나는 그걸 핑계 삼아 그냥 피해가면 된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볼 수가 없다. 내가 먼저 할 일은 그에 관한 과정에 대해서 당신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다. 내가 임권택 감독님과 첫 번째 인터뷰를 했을 때, 그러니까 1987년, <몽녀>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냈을 때, 갑자기 잠시 무거운 침묵이 흐르면서 대답을 한참을 미루었다. 나는 기억할 수 있다. 매 편마다 한편씩 이야기를 진행했기 때문에 그 순간에 느껴보는 공기를 나는 지금도 차례로 떠올릴 수 있다. <몽녀>는 우리의 대화를 잠시 멈추었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저 감독님의 말씀을 기다려야만 했다. 대답은 매우 간결했고, 목소리는 무미건조했으며, 내용은 거의 텅 빈 채, 그저 기술적인 몇 가지 사실만을 열거한 다음 더 이상 그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피했다. 좀 더 질문을 했을 때, 그저 그건 내가 알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이며 촬영을 한 장석준 씨에게 물어보라, 는 대답이 돌아왔다. 유감스럽게 이미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은 세상에 없었다. 나는 더 이상 나갈 수 없었다. 멈춘 질문. 하지만 어떤 망설임. 내가 지금 추리소설을 쓰는 것은 아니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대답은 무언가를 망설이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그 말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말씀을 하시다 말고 그냥 문득, 나는 이 영화를 기술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시작한 것이에요, 그런데 거기서 내가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을 만났어요, 그냥 억지로 그런 장면을 만드는 거 말이에요. 이 말을 한 사람은 임권택이다. 당신은 영화가 가져야 하는 미학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이 아니라, 역사 앞에서 부서져 가는 몸에 대해서가 아니라, 한국전쟁에 대해서가 아니라, 조선 시대의 예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화라는 테크놀로지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그 영화를 만들었다고 말하는 임권택을 단 한 번이라도 상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때 무심코 지나갔다. 그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영화에 대해서 충분히 질문을 던질 줄 몰랐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이 질문은 계속해서 내게 머물렀다. 어떤 표시. 나는 무언가 그 사이에서 갈피를 잡기 위해 말과 영화 사이의 지탱이라는 버팀목을 찾아야만 했다. 그런 다음 차례로 영화와 기술 사이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나의 영화에 대한 여정 중의 하나이다. 이를테면 롯셀리니와 ASA 500, 니콜라스 레이와 시네마스코프. 더글라스 서크와 테크니칼라. 누벨바그와 보렉스 카메라. 등등. 그리고 지금 디지털 카메라와 (누구보다도 먼저) 고다르, 마지막 베르이만, 데이빗 린치, 키아로스타미, 소쿠로프, 라스 폰 트리어, 지아장커, 페드로 코스타, 왕빙, 김기덕 과 홍상수 . 그리고 다시 임권택. (< 달빛 길어 올리기 >). 하지만 그런 다음 누구도 < 몽녀 >라는 영화 제목을 꺼내 들지 않았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이 영화 제목을 거의 잊었다. 아마 감독님도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새로운 사건이 벌어졌다. 2010년에 제임스 캐머런의 < 아바타 >가 ‘출현’했을 때 모두들 각자의 방식으로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3D 영화가 21세기 영화를 새로이 열었다. 아니, 나는 이 말을 다소 수정하고 싶다. <아바타>가 새롭게 열어놓은 것은 21세기 영화 산업이었다. 종종 3D라는 문제를 미학의 자리로 끌고 가고 싶어 한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 문제는 잉여가치의 이윤율의 문제이다. 제작 자본과 배급 자본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상이한 이윤율 사이의 평균 이윤율에서 최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한 새로운 진동으로서의 자본 투하는 가치의 전환형태로서의 새로운 연장을 위하여 시장에서 실제로 구현되는 새로운 가격을 구현하도록 요구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기술도입의 증가. 하지만 잉여가치가 증가했다고 과연 항상 이윤이 증가할까. 이제 새로운 유기적 결합의 과정이 시작될 것이다. 필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평균이윤율의 저하. 여기는 자본의 전쟁터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 한 편에 2억불이 걸려있는 게임이다. 나는 사태를 과장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자리는 영화의 정치경제학을 전개하기에 적절한 장소가 아니다. 하지만 3D는 갑자기 한 나라의 국가적인 사업이 되었다. 그런 다음 갑자기 지나가 버린 한국영화사의 잊혀진 입체영화들의 계보가 호명되었다. <몽녀>는 갑자기 다시 불려 나왔다. 그리고 나는 이제 다시 이 영화를 말해야 한다. 여기서는 세계 영화사 안에서 3D 영화의 계보를 다시 반복하지는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 몽녀 >의 자리에 대해서는 다시 그 위치를 찾은 다음 그 자리가 취하게 될 의미를 물어볼 것이다. 위치? 왜 그런 것이 필요해졌을까. 우리는 여기서 그만 3D라는 소란스러운 논제에 걸려들어서 논점을 벗어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가교를 떠올리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 의 영화 안에서 다른 것을 중단시킨 기술에 대한 호기심. 그런 다음 마주치게 된 생리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킨 그 무엇. < 심야의 별장 >(1959), 경향신문 광고(1960.7.30.) 한국 영화에 3D는 늦게 도착하였다. 1960년대 한국에서 입체영화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 1960년 8월 25일 을지극장에서 개봉한 윌리엄 캐슬의 < 심야의 별장 (House on Haunted Hill) >이 “안경이 필요 없는 (眼鏡不要)” 입체영화라는 광고 카피를 달고 개봉하였다. 몇몇 자료는 이 영화가 한국에서 상영된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로부터 삼 주 후인 9월 14일 경향신문에는 “극장윤리 어디로?”라는 제목으로 이 영화가 “입체영화라고 관객을 속였”다면서 탄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3D 사기라는 사실은 이미 광고 카피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입체영화를 보기 위한 안경이 필요 없는 기술적 수준을 1960년에 이루었다면 2013년에 다시 안경을 끼고 3D 영화를 볼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게다가 <심야의 별장>은 입체영화 기술로 찍은 영화가 아니다. 그런데 그걸 무슨 재주로 수입을 해서 한국에서만 입체영화로 상영할 수 있을까. 한국영화사 안에서 첫 번째 ‘立體映畵’가 만들어진 것은 1968년 2월 8일 동아극장에서 개봉한 이규웅 의 < 천하장사 임꺽정 >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보다 먼저 1963년 9월 26일 동아일보에는 “입체영화 제작 상영 간편화, (카메라) 한 대로 촬영에 성공”이라는 제목 아래 이성휘 촬영감독이 (당시 제일기공사에서 근무하던) 이교학, 이내원과 함께 입체영화 제작에 성공했다고 소개하고 있다. 이 방식은 피사체를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서 반사하는 분상(分像)장치를 통해서 이미지를 둘로 나눈 다음 하나는 아나모픽 렌즈로, 다른 하나는 표준렌즈로 촬영해서 그 둘을 하나의 필름에 현상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방식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천하장사 임꺽정>에 사용된 촬영방법은 이 영화를 촬영한 장석준 촬영감독에 의해서 ‘발명’된 판스코프 방식이다. 임권택 감독님은 이 영화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천하장사 임꺽정>은 개봉하고 큰 성공을 거두었고, < 몽녀 >는 두 번째 ‘입체’ 영화로 제작되었다. 이 두 편의 개봉 시기는 서로 매우 가깝다. <몽녀>는 그해 8월 1일에 개봉하였다. 이 말은 <천하장사 임꺽정>이 흥행에 성공하자 새로운 기술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사라지기 전에 <몽녀>는 뒤이어 바로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두 편 모두 같은 영화 제작사인 제일영화사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촬영을 제외하고 스텝들이 그대로 넘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이 두 편 사이에서 두 가지 공통점과 한 가지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두 가지 공통점. <천하장사 임꺽정>과 <몽녀> 두 편 모두 같은 촬영감독인 장석준이 찍었다. 기록에 따르면 두 편 모두 같은 방식의 판스코프로 찍었다. 내가 신기하게 생각하는 것은 두 편 모두 동아극장에서 상영되었다는 점이다.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서울에서 동아극장만이 입체영화 상영이 가능한 극장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일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오늘날 1960년대 극장 상영 시스템에 대한 자료는 전혀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이건 그저 추론일 수밖에 없다. 그런 다음 한 가지 사실. 한국에서 입체영화 기술을 주도한 것은 제작자나 감독이 아니라 촬영이었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한 사실이 아니다. 이때 입체영화는 산업이나 미학의 문제라기보다는 (어떤 의미에서는 부정적으로) 순수하게 기술적인 이미지의 기계적인 운동과 그 재현에 따른 질적 변화에 더 기울어질 수도 있다. 물론 나는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몽녀>로 이어질 때 그 둘 사이에서 단지 두 편의 입체영화라고 말하는 대신 사극 액션영화에서 반공 액션영화로 옮겨오면서 입체 화면의 효과에 대한 데이터에 관한 수집의 선택적 이행처럼 보인다. < 악마와 미녀 >(1969) 세 번째 입체영화는 시간을 좀 기다려야 했다. 이용민 이 연출한 < 악마와 미녀 >는 1969년 4월 10일에 개봉하였다. 이용민은 한국영화사에서 부당하게 대접받은 공포영화의 시네아스트이다. 이용민이 만든 두 편의 영화, < 목 없는 미녀 >와 < 살인마 >는 종종 진행을 종잡을 수 없게 만드는 괴작이다. 그가 만든 입체영화 <악마와 미녀>를 볼 수 없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세 번째 입체영화로 기록하고 있는 이 영화도 장석준 촬영감독이 찍었다. 이 영화는 (제일영화사가 아니라) 안양필름에서 제작했고, 유감스럽게도 (그 당시에는 극장들이 ‘프리미어’ 개봉 여부를 놓고 서로의 위계질서가 있었는데) 개봉관에서 상영하지 못하고 6개의 재개봉관에서 첫 상영을 하였다. 대중들은 벌써 입체영화에 대해서 흥미를 잃어가고 있었다. 언제나 변덕스러운 대중들. 사극영화, 반공영화, 그리고 공포영화라는 데이터. 세 개의 효과. 그 중 어느 선택이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에서 가장 성공적인 기술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런 의미에서 오로지 입체영화의 역사에 관해서만 말해야 한다면 1971년 4월 3일에 개봉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이 가장 궁금하다. 이 영화는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고 촬영을 한 영화이다. 장석준은 여기서 세 가지 모델 중의 하나를 선택하지 않고 또 다른 모델로서 만주 웨스턴 장르를 만들었다. 물론 이건 전적으로 장석준의 결정이라기보다는 <지지하루의 흑태양>이 만들어질 무렵 만주 웨스턴이 한국영화사에서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하지만 이 선택을 유행의 일부로 폄훼하는 것은 지나치게 상황 속에 맥락 짓는 것이다. 만주 웨스턴은 이미 1950년대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장르가 되었고, 그런 다음 정창화를 거쳐서 < 무숙자 >( 신상옥 , 1968), < 황야의 독수리 >( 임권택 , 1969), < 황야의 외팔이 >( 김영효 , 1970), < 당나귀 무법자 >( 안일남 , 1970), < 쇠사슬을 끊어라 >( 이만희 , 1971)로 이어지고 있었다. (아마 나는 많은 중요한 영화 제목을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차라리 <지지하루의 흑태양>은 그 장르의 마지막 레퀴엠처럼 보인다. 입체영화 3D 만주 웨스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작별인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영화는 동양영화사에서 제작되었고, 다시 한 번 동아극장에서 개봉하였다. 하지만 장석준 의 이름은 거기까지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한국 입체영화의 역사는 거의 끝났다. 그런 다음 1976년 두 편의 입체영화가 개봉하였다. 한 편은 7월 23일 국도극장에서 개봉한 < 킹콩의 대역습 >이고, 다른 한 편은 9월 8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한 <홍길동>이다. 합작영화로 알려진 <킹콩의 대역습>은 (약간 놀랍긴 하지만) < Ape >란 제목으로 지역코드 1번으로 (미국에서) 2001년 10월 30일에 영어 더빙된 DVD로 출시되었으며 IMDb에서는 스텝과 배우들에 관해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자료원 KMDb에서는 촬영기사의 이름이 확인되지 않지만 IMDb에 따르면 토니 프랜시스와 다니엘 L 시머스가 공동 촬영한 것으로 되어있다. 당신은 이게 다소 의외라고 생각될지 모른다. 그렇다면 이 DVD를 판매하고 있는 아마존.com 에 들어가서 유저들의 영화평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그러면 당신도 이 영화가 보고 싶어질지 모른다. 이 영화는 킹콩이 나온 역대 영화 중 ‘최악의 영화’의 반열에 올랐으며, 수많은 영화광들 사이트에서 영화사상 ‘최악의 영화 100편’의 목록을 채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감상해야할’ 만신전의 자리에 올랐다. 말하자면 에드 우드의 계보. (이쯤 되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알 수 없지만) 최영철 과 폴 레더의 공동연출로 KMDb에 기록되어있는 이 영화는 IMDB에서는 감독으로 폴 레더의 이름만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인 < 홍길동 >은 최인현 이 연출하고 최길선 이 촬영하였다. 예고편에 따르면 한국에서 개발된 분광식(分光式) 촬영에 따른 세계 최초의 입체영화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말은 <홍길동>이 판스코프와 또 다른 방식을 개발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장석준은 그해 그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을 때 다른 다섯 편의 영화를 촬영하고 있었다. < 여자들만 사는 거리 >( 김호선 ), < 불 꺼진 창 >( 권영순 ), < 바다의 사자들 >( 이재웅 ), < 집념 >(최인현), < 마지막 밤의 탱고 >( 이성구 ). 원래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자. 결국 나는 < 몽녀 >를 3D로 본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것도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지워져 가는 상태가 아니라 어제 본 것처럼 너무나 생생해서 그 효과의 구석구석을 설명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그 효과의 기술적인 구현 과정과 발전 단계, 더 나아가 지금 진행되고 있는 3D 영화의 테크놀로지와 비교하면서, 거의 ‘사라져가는’ 한국영화 안의 입체영화들에 관한 계보를 설명해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잃어버린 한국영화사. 영화가 기억을 저장하고 그 안에서 시간을 참조하고 조립하고 창조하는 뇌의 스크린이라면 한국영화사는 종종 그 일부를 상실한 채 치매의 진술을 하는 중이다. 나는 단지 3D에 한정 지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너무 많은 영화들이 사라졌으며, 너무 많은 자료들이 사방에 흩어져있거나 말소되었으며, 지금 이 시간에도 지나가 버린 시간 속의 영화들이 사라지고 있다. 그건 단지 영화만이 아니다. 영화를 만드는 하부 토대들, 카메라와 영사기, 조명, 녹음, 더 나아가 그 영화를 상영했던 극장들의 시스템들이 사라져가고 있다. 그때 부서지는 것은 한국영화사이다. 나는 질문을 임권택 의 <몽녀>에 한정 짓지 않았다. 그보다 먼저 <몽녀>를 둘러싼 한국영화사 속의 입체영화의 계보에 관한 맥락을 알아야만 했다. 아마도 그 순간, 그러니까 1968년, 임권택 감독님도 이 맥락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종종 미학적 공동체라기보다는 기술적 공동체로 묶일 때가 더 많다. 우리는 그 이해 없이 한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런 질문에 대해서 내게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 나는 질문지를 들고 한국영상자료원 장광헌 부장에게 이야기를 청했다. 정성일 _ (깜짝 놀라 둘러보면서 감탄사와 함께) 이 카페는 누가 찾으신 거예요? 장소를 찾아낼 때마다 제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훌륭한 장소들을 내미셔 가지고, 이게 자료원이니까 가능한 거야,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웃음) 먼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진행 중인 < 몽녀 >의 3D 복원과정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2002년도에 임권택 감독님 인터뷰를 진행할 때, 벌써 십 년 전이군요, 저는 <몽녀>를 3D로 본 적이 없으니까 임권택 감독님께 질문 드릴 방법이 없어서 자료원에서 볼 수 있는지 문의를 했는데 필름 상태 자체가 볼 수가 없다는 대답을 들은 거예요. (인터뷰를 진행할 때 당시 스크리닝이 가능한 영화들은 자료원에서 모두 다시 볼 수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과거의 3D 영화들이 복원과정을 밟기 시작했고, 하지만 아직 저는 <몽녀>를 3D로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 과정이 어떤지 아는 게 순서 같습니다. 장광헌_ (아이폰을 꺼내 들면서) 제가 조금 따왔습니다. (그런 다음 몽녀의 포지 필름을 찍은 사진을 보면서) 실제로 이것은 영화가 보여지는 상태가 아니고 영화 필름을 찍은 거예요. 한 프레임에 딱 들어오는 영상인데, 테크니스코프처럼 두 개의 프레임이 있는 걸로 되어 있어요. 테크니스코프와 다른 점은, (한국에서 개발한) 판스코프(Panscope)라는 것이, 그러니까 할리우드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3D 영화는 카메라 두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그런 형식인데 한국의 판스코프는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두 개의 필름을 만들어내는 식이었어요, 그러니까 두 개의 렌즈가 한 카메라에 붙어있는 겁니다. 마가진도 두 개가 붙어있고. 이건 저도 상상을 해보니까, (잠시 생각) 당시 어렵게 만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하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원래 입체라는 건요, 사람들이 누구나 볼 때, 어 이건 굉장히 어지러워, 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는 반면에, 어 이건 괜찮다, 라고 얘기하는 분이 있어요. 그게 가장 효과적인 입체를 보려면 (양 눈의 두 개의) 동공의 수정체 사이에서 11센티의 간극을 가지고 만든 입체영화가 가장 효과가 좋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렌즈 두 개를 어떻게든 딱 붙여서 그 거리 차이를 11센티로 만들어야 되는 거죠. 요새 나오는 카메라들이 점점 컴팩트해지는데, 이게 작아야지만 그만큼의 거리를 서로 붙일 수 있는 거지요. 렌즈가 예전의 ENG 카메라처럼 크면 절대로, 절대로, 이게 아무리 서로를 딱 붙여놔도 렌즈의 간격이 15센티에서 20센티 이상 나와 버리는 거죠. 그래서 컴팩트하게 만드는 요즘은 가능한 일일 텐데, 당시 1968년도의 카메라라면 굉장히 부피가 크고, 그래서 거기에 구멍을 내서 만든 다음 렌즈를 붙여서 만들지 않고서는 이 효과를 내기 어렵다는 거죠. 그래서 굉장히 어려운 일을 하셨다고 볼 수 있는 거예요. 현재 자료원이 보유하고 < 몽녀 >의 필름은 원래 프린트 필름 단벌 하나만 있었습니다. 80년대에 저희가 입수한 필름인데, 원로 영화인으로부터 기증받은 프린트입니다. 그분이 < 천하장사 임꺽정 >과 그 다음에 <몽녀> 프린트필름 단벌, 각 한 벌씩 80년대에 자료원에 맡기셨어요. 당시에는 누가 기증했는지 출처가 없다가 2000년대 초반에 저희가 확인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분한테 확인을 하고, 다시 재정리를 해놨는데, 그러다보니까 처음엔 저희가 확인할 방법이 없었을 때는, 그냥 지금 이 프린트가 이 영화의 유일본 프린트였구나, 라고만 생각하다가 나중에 보니까 어, 이거는 테크니스코프 같아. 왜냐하면 보시는 바와 같이 테크니스코프처럼 (아이폰의 필름을 가리키면서) 4 포퍼레이션 안에 2 프레임이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상을 자세히 보면 위와 아래 두 개의 상이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거든요. 위에 있는 프레임과 아래에 있는 프레임이 영상이 동일한 이미지인데 그 크기가 서로 똑같지가 않아요. 필름검색기로 본 자료원 보유 < 몽녀 > 포지티브 필름 화면 정성일 _ 네, 지금 이 작은 프레임으로 보아도 그 차이가 명확하게 드러나네요. 장광헌_ 그게 이제 차이가 나는 건데, 테크니스코프 필름은 4 퍼포레이션 안에 두 개의 프레임을 나눈 것은 필름의 제작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그렇게 일부러 만든 거고, 똑같은 두 개의 프레임이 4 퍼포레이션 안에 존재하는 것이죠, 그런데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는 두 개의 프레임이 서로 크기의 차이가 있는 같은 이미지인 거예요, 그래서... 정성일 _ 그럼 이걸 두 번 찍었다는 뜻이에요? 장광헌_ 두 번이 아니고요, 한 번을 찍을 때, (카메라에) 렌즈 두 개, (필름이 들어있는) 마가진 두 개가 달려 있는 거죠. 그렇게 한꺼번에 찍는 겁니다. (아이폰의 영상을 가리키면서) 그러니까 사람이 이렇게 상을 찍을 때, 카메라가 팬 하게 되면 (왼쪽에 있는 렌즈로)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과 (오른쪽에 있는 렌즈로 찍는) 다른 이쪽에서 찍히는 영상이 서로 다르겠죠. 지금 기술과 비교를 하자면 굉장히 어지럽거나, 좀 더 전문적으로 이야기한다면 광원이 들어가는 부분, 고스트(ghost) 현상이라고 해서 중간에 안개처럼 스모그 현상들이 생기는 현상이 있는데, 그런 현상들을 처리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완전한 입체라고 보기가 어렵다, 는 것이 오직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 몽녀 >만이 아니고 다른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예요.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필름이 다섯, 여섯 편 정도 되는데요.... < 천하장사 임꺽정 >(1968), 경향신문 광고(1968.2.5.) / 영화기재국산화 필름도 50% 절약, 경향신문(1968.7.27.) 정성일 _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 장광헌_ 네, < 천하장사 임꺽정 >을 포함해서죠. 다 확인을 했어요. 일일이 다 확인을 하고 왔는데, 방식이 다른 게 딱 하나가 있어요. 2000년대에 만들어진 < 평화의 시대 >라는 필름은 지금 저희가 가지고 있는 필름과는 다른 방식, 다른 방식이란 게 조금 더 말씀드리면, 독일의 뮌헨 박물관장이 입체영화에 굉장히 전문가신데, 그분이 한 번 방문을 하셔서 우리나라에서 입체영화를 찍은 게 있으면 보여 달라 해서 샘플을 그때 보여 드렸어요. 그랬더니 이거는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에 동유럽에서 찍었던 방식과 같다, 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때만 해도 할리우드는 50년대에 한 해 60편씩 엄청나게 입체영화를 찍었어요, 그리곤 확 죽어버렸거든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 유행이 지나고 나서 들어오게 된 거죠. 지금 기록을 보면 59년에서 60년 사이에 우리나라에 처음 입체영화가 들어오기 시작하고, 제작을 1968년도에 하게 됐는데, 장석준 촬영 감독님이 4년 정도를 고민하시고 만드셨대요.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온 걸 보고 그때부터 효과에 굉장히 호기심이 많이 있으셨던 거죠. (다른 사람들, 감독들이나 특히 제작자들도 아무도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상태로 해서 (3D를 구현할 수 있는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사실은 저희가 굉장히 이 영화에 대해 확인하기가 어려웠던 것이, 원본 필름, 원본 네가 필름이 없으니까 어떤 형식인 줄을 몰랐던 거예요. 당시 기록들도 많지 않아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원로 영화인들을 통해서 확인했을 때는 당시에는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마가진 두 개로 두 개의 필름을 만들었는데, 그래서 좌우완 네가 필름이 존재를 했겠죠. 그냥 구술만 있는 상태에요. 게다가 할리우드는 우리나라 방식하고 여기서 달라지는 것이,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는, 그렇게 만든 것을 가지고 레프트(left) 필름과 라이트(right) 필름으로 나눈 다음에 그걸 각각 프린트 인화해서 영사기 두 대로 교차상영을 해서 그 효과를 냅니다. 그게 원래의 할리우드의 3D (표준) 방식이라고 볼 수가 있는 건데 우리나라는 그렇게 한 게 아니고 두 개의 네가 필름이 존재하면서 인화를 할 때 하나의 필름으로 합쳐버린 거예요. 그래서 아까 두 개의 상이 생긴 것, 아래에 하나 위에 하나가 (할리우드와 비교하자면) 위에 좌, 밑에 우, 이런 식으로 해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내고 상영 시스템을 바꾼 겁니다. 상영 시스템, 영사기에, 제가 본 것은 영사기에 렌즈가 있으면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 안을 반쪽으로 나누어 두 개의 상을 보여주는 식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아래 위 필름이 내려갈 때 두 개의 프레임을 다 잡아 내는 거죠. 그렇게 영사를 하는 그런 방식이었습니다. 여기서 왜 < 몽녀 >를 가지고 우리가 재현을 못 하느냐, 라는 것에 고민을 많이 했어요. 2007년에서 2008년까지 아날로그 방식으로 테스트를 많이 했고 당시 디지털로도 할 수 있다고 해서 디지털로도 5분 정도를 테스트 했죠. 두 가지 결과를 먼저 말씀 드리면, 아날로그는 너무 상태가 안 좋으니까 필름이 불안정해서 이걸 보존용 필름으로 만드는 것도 과연 잘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결과였고 그리고 당시에는 원본 필름이 어떤 상태로 되어있는지 몰랐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실제로는 레프트 네가 필름과 라이트 네가 필름이 있어야지 정확한 복원이 되는 거잖습니까, 자료원은 원래의 원본을 복원하는 것이 목표이지 그걸 수정해서 상영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걸 모르니까 저희는 이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 필름을 그대로 밀착인화를 해서 찍어낸 거예요. 그게 가장 필름에 손상을 덜 가게 하는 거고 이 품질을 그대로 받아낼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저희가 그렇게 받아낸다고 결정을 내린 것은 그렇게 되면 이건 나중에 아날로그적으로 다시 재현하기는 어렵고, 디지털 방식으로서 나중에 이 프레임을 나눠서, (잠시 생각) 쉽게 말씀 드리면 번호를 매겨서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나눕니다. 나눠서 디지털로 볼 때는 홀수 번호의 프레임과 짝수 번호의 프레임을 두 개의 네가 필름 형태로 만드는 거죠. 저희가 로직을 그렇게 만들어서 이렇게 하는 게 가장 맞는 방법인데 그때 당시에는 또 이게 엄청난 비용이 들어갔어요. 정성일 _ 그렇죠. 두 편의 영화를 찍는 꼴이 되니까. 장광헌_ 그렇죠. 그래서 그건 일단 포기를 하고, 단지 이제 디지털 복원의 방법으로서 테스트를 한 것은 과연 그렇게 디지털로 했을 때 품질이 어느 정도 나올까, 이거였습니다. 그래서 포스트 프로덕션에 당시 참여했던 분들하고, 그때 그분들은 (다른) 디지털 입체 영화에 대해서 테스트를 하고 있었어요. 그 영화를 테스트할 때 저희가 이거 한 번 테스트해보자, 해서 샘플을 드리고 스캔 작업해서 했는데, 우스갯소리로 스크래치마저도 입체로 나와 버렸어요. (웃음) 정말로 기가 막히더라고요. 스크래치가 입체로 확 보여요. 정성일 _ 오히려 스크래치가 가장 효과적이었겠네요. (웃음) 장광헌_ 그러니까 저희는 있는 그대로 그렇게 해서 복원을 한다, 그러면 괜찮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스크래치라던가 (필름에 달라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해야만 하는 복원작업에 들어가야 하는 건데, 저거는 도저히 손을 못 대겠다, 라는 결론이었죠. 왜냐하면,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저희가 디지털복원을 하면서 한 편을 복원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있는데 < 몽녀 >는 적어도 2.5배 내지는 3배 정도의 비용이 들어갈 거라는 계산이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세 편 정도를 하는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는, 안 그래도 두 편으로 나누면 계산상으로는 서로 다른 두 편인데 거기다 난이도에 있어서도 최고의 난이도인 영화인 거죠. 정성일 _ 복원 작업도 현재의 기술과 함께 항상 경제적인 문제군요. 장광헌_ 그런데 당시 이런 게 있었어요. 아시겠지만 < 아바타 >가 들어오면서 우리나라에 3D 영화에 대한 붐 아닌 붐이 일어나면서 저는 엄청난 압박을 받았어요. 당시에... 정성일 _ 아, 한국에는 왜 3D 영화의 역사가 없느냐는, (웃음) 사실 그때는 전 세계 모든 영화제가 갑자기 수준과 상관없이 3D 영화를 우대했었고, 시네마테크들은 3D 영화의 복원 사업에 매달리기도 했죠. 장광헌_ 한국에 있는 (입체) 고전영화를 디지털로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하자. 영진위에서도 저희 보고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미 이전에 아카이브로써 표준 영사 시스템을 갖추는 것과 복원의 방법을 결정하기 위해 항상 테스트를 하게 되는데 테스트를 한 결과를 놓고 복원을 여기서 이만큼 작업해 들어가는 건 우리가 지금 하기엔 현재의 기술과 역량으로서 힘들다, 라는 판단을 이야기해줬어요. 근데 계속 하자는 거예요. 계속 하는 것이 소모성으로 비친다 할지라도 꼭 해야 한다면 할 수는 있겠죠. 그런데 문제는 지금 이 필름을 몇 번이고 되 만져서 작업을 하면 이 필름은 나중에 정말 만질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니까, 그러면 나중에 정말 기술이 원하는 수준의 작업이 가능해졌을 때 만져볼 수 없는 지경이 돼버리니까, 그렇게 우리가 투자하기엔 이건 모험이다. 그래서 일단 미룬 거예요. 현재로서는 그렇게 미뤘지만 후회되진 않아요. 이 필름이 현재는 이렇게 있지만 지금 만약에 멋모르고 (작업을) 했다가 그러면 많은 부분에서 효과를 못 보고 낭비를 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그 차원에서는 지금의 저희 자료원의 보존기술센터에서는 잠시 보류해둔 상태이지만, 앞으로 어찌 되었건 다시 만져야 할 때는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다시 판단해야 할 겁니다. 그러면 좀 더 손쉬운 방법들이 생겨날 거예요. 정성일 _ 그러면 지금 < 몽녀 >는 어떤 상태입니까? 장광헌_ 현재는 원본 프린트 필름이 있고요 거기서 듀프 네가 필름, 밀착 인화를 해서 동일하게 밀착 인화된 테크니스코프처럼 생긴 듀프 네가 필름이 존재합니다. 거기까지. 그래서 재현되는 필름은 없다고 할 수 있죠. 전에 보여드렸다시피 중간에 텔레시네 작업을 하면서 2D로 만든 영상만 있습니다. 일단 저희가 확인을 하기 위해서 만든 영상이죠. 지금 현재로서 볼 수 있는 미디어로는 그거 하나밖에 없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전에는 그게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볼 수 있는 방법도 없었으니까, 그것도 중요하니까, 2D 방송용 규격으로 만든 것도 그게 무슨 내용인지 나중에 기록으로서도 남겨야 하니까 지금 형태의 미디어를 만들어야겠다, 해서 중간 결과물을 만들게 된 겁니다. 정성일 _ < 몽녀 >의 현재 복원 상태와 판스코프의 원리에 대해서는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뿐만 아니라 매우 오랬동안 이 상영방식을 입체영화라고 불렀습니다. 3D 라는 말은 한참 뒤에 사용하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이 표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디즈니랜드에서 마이클 잭슨의 <캡틴 EO>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가 아닌가, 합니다. 단지 표현의 차이 이상으로 자료원의 입장에서 영화 기술사의 관점에서 입체영화와 3D 영화를 어떻게 분류하고 있습니까? 장광헌_ 저도 한참을 고민해 봤는데, 제가 정답이라 말씀은 못 드리겠고, 입체영화라는 것이, 공간 감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입체영화라는 개념이 나와서 기술적으로 구현이 되었고, 그러다 삼차원 영화, 3D라는 것이 삼차원이라는 것이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보면 아이맥스 3D도 나왔고, 4D도 나왔고, 그리고 조금 더 발전적으로, 아직 이건 영화다, 라고 말은 하고 있지 않지만, 홀로그램 자체도 광고성 영상부터 해서 굉장히 많은 발전이 있는 분야 중 하나에요. 그렇다면 홀로그램도 나중에 영화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보거든요. 그렇게 봤을 때는 삼차원 영화라고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는 거고, 우리는 예전에는 입체영화를 삼차원 영화라고 봐도 그 이상의 무엇이 없었으니까, 지금은 입체영화라는 것이, 그게 평면적인 영화보다는 입체감을 주는 영화의 통칭이다, 라고 말하고 싶고요, 그 종류 중에 여러 가지, 3D영화, 아이맥스 4D 이런 것들이 입체영화를 표현하는 표현방식으로, 용어를 설명하는 게 맞지 않나.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정성일 _ 그렇게 말한다면, 테크놀로지의 개념 분류에만 한정 지어서 말한다면 한국 최초의 3D 영화는 < 7광구 >라고 하는 편이 맞겠군요. 그 전까지는 입체영화고.... 장광헌_ 그렇죠. 좀 더 논의의 필요성이 있긴 하지만, 어찌 보면 그렇게 볼 수가 있는 거죠. 장석준 촬영감독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직접 설명한 판스코프 방식에 관한 인터뷰나 기록이 혹시 남아있나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80년도에 돌아가셨어요. (1980년 8월 15일에 별세하셨다) 그런 기록이 제가 알기로는 없고 그 이후에 그분과 함께 작업했던 분들의 기록, 어떤 구술 기록이라든지, 그런 것들로만 그 분이 어떻게 작업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 외에는 어떤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특별하게 어떤 영화를 모델로 삼았다던가, 하는 기록은 없고요. 입체영화라고 보여지는 것이 있었으면 국내든 해외든 어디든 가셨데요. 그런 기록은 있습니다. 정성일 _ 그 당시에요? 굉장하군요. 그때는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든 시기였는데요. 장광헌_ 그걸 4년간을 연구하셨다는 걸 보면, 어디든 가셔서 연구를 하셨다는 것이 충분히 공감이 되는 부분이죠. 정성일 _ 그럼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뮌헨 영화박물관장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때 유럽으로 흘러나온 동구 영화들을 보셨을 가능성이 크군요. 만일 할리우드 영화만을 참고했다면 사실 구태여 외국까지 나갈 필요가 없지 않았을까요. 장광헌_ 가능성이 있다고도 볼 수 있죠. (잠시 생각) 그런데 그 부분은 정확하진 않아요. 기록상 할리우드 쪽으로 가신 기록은 있는데, 유럽 쪽에 가셔서 이게 맞다, 라고 하셨던, 이게 우리에게 적합할 거다, 라고 하셨던 기록은 현재 없거든요. 단지 테크니스코프가 만들어질 때 영화의 제작비 절감 차원에서 만들어진 것처럼. 사실은 테크니스코프가 우리나라에서는 70년 그때 장석준 촬영감독이 만들어 나온 거지만, 61년에서 62년, 그 사이에 이탈리아에서 나온 거예요. 원래 있던 기술을 우리 식으로 맞춰서 만든 거니까.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이걸 최초로 만들었느냐. 몇몇 분들의 기록을 보면 최초로 만들어서 일본에 수출을 했다,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저것 찾아보다 보니까 이렇게 만든 형태는 이미 있었어요. 40년대 러시아에도 있었고, 50년대에도 동유럽에 있었어요. 그런데 그걸 한국형으로 실용적으로 만든 것에 대해서는 할리우드 쪽에서도 공감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참 잘 만들었다라고, 오히려 일본을 통해 수출을 하셨다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기술을 밖으로 수출하는 것에 대한 많은 관심을 안 갖고, 일본 쪽은 그런 영화 기술에 대해서 많은 관심이 있으니까 일본을 통해 적극적으로 수출했다는 그런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당시의 원로영화인분들은 당시 한국에서는 그런 쪽에 관심을 갖지 않은 점, 그게 아쉽다 그런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정성일 _ < 몽녀 > 프린트를 CGV에서 시사를 하셨다고요. 장광헌_ 네, 용산 CGV에서 했습니다. 정성일 _ 그때 보셨을 때 입체 효과는 어땠어요? 장광헌_ 효과는요, 정말 좋았어요. 정성일 _ 아, 그래요? 장광헌_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아날로그로 보는 거와는 차이가 확실히 많이 났어요. 예상을 하긴 했는데, 저희가 < 몽녀 >를 보기 바로 직전에 뭘 봤냐면, 액션스쿨에서 제작한, 액션을 주로 취하는 영상이 효과가 많이 나니까 그걸 영상으로 찍은 다음 입체 영화로 만들어서 테스트를 했거든요. 그걸 보고 <몽녀>를 봤어요. 봤는데 못지않다는 생각이었어요. 당시에는 저는 그걸 몰랐죠. 입체를 의식하고 연출을 하느냐 마느냐 이것도 많이 좌우를 하는데,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해왔거든요. 만약 풀 3D라면 전체가 공간적인 입체를 표현하기 위해 연출을 했겠는데, 그렇지 않다면 그때에는 60년대에서 80년대까지 입체영화들의 대부분은, 이를테면 주먹이 날아온다거나 도끼가 날아온다든가 이런 쪽에만 표현을 3D로 한 거예요. 나머지는 2D로 한 거죠.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실제로. 지금도 그때 <몽녀>가 완전히 표현이 되진 않지만 3D처럼 표현이 되는 부분, 머리가 확 나온다든가 이런 부분들을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효과는 아날로그로 보던 것과는 많이 차이가 났죠.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스크래치가 3D로 쫙, 그러자 화면에 기둥 하나가 탁! (웃음) 정성일 _ (웃음) 먼지 속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장광헌_ 놀랐습니다. 저 기둥은 뭐냐. 딱 봤더니 스크래치에요. (웃음) 새벽 3시에 비몽사몽간에 보면서도.. 재미있는 경험이었죠. 당시 3D에 대해 국산화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대해 떠들썩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는 그런 쪽에 관심 있는 게 아니었고 고전영화에 입체영화가 있다는 데, 그걸 디지털로 전환했을 때 그게 되느냐. 그게 관심거리였어요. 효과는 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거죠. 이런 것들이 저희들에게 걸림돌이었죠. 기술적으로 이걸 다 할 수 있을까. 그냥 스크래치를 다 지우는 것이 완전히 복원이라고 하지는 않거든요. 그러면 영상을 다 뭉개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요. 최대한 그걸 가능한 많이 손대지 않는 쪽으로 하는 게 사실은 복원의 방법인데,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깨끗하고 선명하고 이런 것들을 좋아해서 외국, 유럽 쪽의 복원영화와 우리나라의 관람객들이 보는 복원영화의 눈높이는 그런 데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정성일 _ 제가 어렸을 때 입체영화들을 볼 때의 안경이 기억나는데요. 지금이랑 완전 딴판의 안경이었잖아요. 그 당시의 판스코프 비전을 보려면 그 당시의 안경이 필요한 건가요, 아니면 지금의 안경으로 봐도 효과가 같은 건가요? 장광헌_ 그 당시의 안경으로 봐야 해요. 정성일 _ 그럼 디지털 복원 테스트 시사에서는 그걸로 보셨어요? 장광헌_ 우리가 만들었죠. 그러니까 당시 기록에 따라 셀룰로이드를 사서 저희 직원이 그대로 만들었어요. 할 수 있는 한 그대로. 테스트를 하려고 안경을 두 개를 만들었어요. 진짜 되더라고요. 그건 아날로그 방식을 보려고 했던 거고요. 저희가 아날로그 테스트를 하려면 기존의 영사기 앞에 시네마스코프 렌즈식으로 생겼지만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아래 보면 반이 쪼개져 있어요. 그 프레임을 (위 아래로 있는)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잡아내는 그런 렌즈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저희가 테스트할 때, 우리나라에 (그 렌즈가) 6개밖에 없었거든요. 그 중 3개를 어찌어찌 빌렸어요. 그 중 하나는 고장이 나서 또 안 됐고 두 개를 가지고 했는데, 저희가 가지고 있는 영화 중에 < 공포의 축제 >라고 86년도 영화가 있습니다. 그 프린트가 가장 온전한 상태로 있어서... 정성일 _ 그 영화도 판스코프 방식인가요? 장광헌_ 네, 그렇죠. 그걸 봤죠. 그걸 보면서 안경을 만들었고, 편광안경을 만드는데,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런 편광방식을 패시브(passive) 방식이라고 하는데 리얼D, 돌비3D 이런 것들이 있는데, 처음에는 이 방식들이 같은 편광안경인 줄 알았는데 각자 다 다르더라고요. 리얼D면 리얼D 안경으로 만들어진 걸로 봐야 하는. 그리고 액티브 글래스(active glass) 방식이라는 것은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주는 방식이어서 안경이 비싸죠. 수신 장치가 따로 있고. 이런 건 프로젝터가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여도 보이는 거죠. 그런데 옛날 영사기는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예전에 < 몽녀 >를 만들어놓고 보니까 영사가 제대로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미러 박스를 만들어서 영사기에 장착해서 영사를 하셨다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지방을 다니며 영사를 할 때는 장석준 기사가 직접 다니면서 미러 박스를 설치하고 영사까지 했답니다. 정성일 _ 순회공연이었네요. (웃음) 장광헌_ 직접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는 영화촬영을 못 했다, 그런 기록도 봤습니다.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그때의 배급 방식이었으니까 가능했던 일이네요. 지금처럼 동시 개봉하고 그러면.. 장광헌_ 지금과 같은 엄청난 스크린이 있었으면 못했죠. 정성일 _ 기록에 의하면 < 몽녀 >는 유영길 과 장석준 , 두 분이 찍은 걸로 되어 있습니다. 장광헌_ 아, 유영길 촬영감독은 그때 보조역할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보조역할이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는데 제가 알기론 장석준 기사님께서 메인을 잡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정성일 _ 저는 < 천하장사 임꺽정 >과 < 몽녀 >를 모두 3D 스크린으로 구현된 것을 보지 못해서 궁금합니다. 두 영화 사이의 기술적 차이는 어떻습니까? 단지 경험적 차이인지요? 장광헌_ < 몽녀 >가 두 번째 작품이잖아요. 저는 기술적인 적용치는 동일하다고 보고요. 방식은, (잠시 생각) 입체영화를 찍으면서 실제로 이 장비로 찍어서 잘 찍힌다, 이런 것보다 엔지니어의 노하우로 많이 좌지우지 하거든요. 신문 기사라든가, 당시의 구술 기록을 보면 < 천하장사 임꺽정 >을 찍어서 효과는 확실히 보았다고 되어 있어요. 그리고 신문 인터뷰에 따르면 <몽녀>를 찍을 때 <천하장사 임꺽정>에서 잘못된 점을 개선하고 있다, 라고 하시고 계세요. 그래서 <몽녀>를 찍었을 때 카메라의 잘못 찍혔을 것에 대한 부분적이 보완이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러한 경험치가 많이 업그레이드가 되었다고 보지, 방식이 바뀌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그 이후에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하신 영화까지도, 70년대 영화까지도, 동일한 방식이라고 알고 있어요. 정성일 _ 네, 그럼 하여튼 당시의 판스코프 방식을 보려면 지금의 관객들에게 옛날 방식의 편광안경을 만들어서 나눠줘야만 한다는 거군요. 장광헌_ 맞습니다. 그때 당시의 필름을 어찌어찌해서 복원을 해서 그 필름을 그대로 보여주는 방식이라면 안경도 그렇게 만들어서 보여줘야겠죠. 정성일 _ 영사기의 문제도 또 있는 거죠? 장광헌_ 있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그렇게 된 렌즈를 구해서 영사기에 장착을 해서 영사를 해야겠죠. 정성일 _ 한국영화사 안에서는 거의 저주받은 역사로군요. 6편의 역사라고나 할까? 장광헌_ 시도를 했다는 차원에서 많이 긍정적으로 봐주시죠. (웃음) 그런데 정말 손을 많이 타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제가 전반적으로 봤을 때 (양팔을 크게 벌리면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손봐야 하는데, 이런 걸 장석준 촬영감독님은 하셨어요. 하신 걸 보니까, 정말 이렇게 손 많이 가는 일을, 그렇게 열정적이지 않으면.... < 다이얼 M을 돌려라 >(1954) 입체 영상 정성일 _ 지난 5월에 자료원에 자리한 시네마테크에서 알프레드 힛치콕의 < 다이알 M을 돌려라 >를 3D 방식으로 상영하였습니다. 이 판본은 일종의 복원으로 알고 있습니다. 장광헌_ 이번에 상영된 < 다이얼 M을 돌려라 >는 디지털 시네마 형태로 만들어진 3D 영화입니다. 1954년에 처음 개봉했을 때 어떤 시스템으로 상영되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연간 60편의 입체영화를 제작한 할리우드 방식을 봤을 때, 영사기 두 대를 돌려서 상영하는 방식이었을 겁니다. 그게 가장 유력한 방식이죠. 지금 상영하는 디지털시네마는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것보다는 굉장히 간편해졌죠. 둘 사이에 동일한 거는 찍어서 원 소스가 되는 영상은 좌우 영상 두 개가 존재합니다. 근데 만들어서 일종의 프린트 역할을 하는 디지털 시네마 패키지라고 하는 DCP 형태의 데이터는 그 영상을 디지털 기술로 합쳐서 보여주는 거예요. 대신에 데이터가 합쳐진 것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고요, 관건이 되는 건 그렇게 합쳐진 데이터와 영사하는 시스템이 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그러니까 아날로그 영사기에 렌즈를 장착하고 봐야 한다고 말씀드렸다시피, 아날로그식으로는 영사 시스템이 간편할 수 있었어요. 하지만 디지털은 또 영사 시스템이 굉장히 복잡합니다. 지금 나와 있는 것이, 아까 잠깐 설명 드린 것처럼, 크게는 패시브 방식과 액티브 글래스 방식 두 가지가 있고요, 액티브 글래스 방식은 어떤 특허 기술을 내서 안경 자체가 입체를 구현해 주는 겁니다. 기존의 디지털 프로젝트가 있는데 일반 디지털 프로젝트로 그 데이터를 DCP 영상으로 상영하게 되면 그 앞에 분배기 같은 역할을 하는 장비를 그 앞에 놔둬요. 분배기와 같은 수신기가 있는데요, 일종의 수신기를 놓으면 관객석에 있는 사람이 끼고 있는 안경 가운데 수신 장치가 있거든요, 그 수신 장치로 찰칵찰칵, 실제로는 여러 번 프레임을 나눠주면서 양쪽에 영상을 수신하면서 받아주는 역할을 해요, 그렇게 보여주는 방식이 있는데, 이 방식은 안경이 굉장히 고가입니다. 하지만 기존의 디지털 일반 프로젝트를 써도 상관이 없습니다. 이런 장단점이 있고요, 반면에 패시브 방식은 디지털 프로젝터를 가공해야 해요. 뭔가 앞에 렌즈 두 개를 붙이거나, 리얼D 방식은 렌즈 두 개가 나와 있는 방식이고요. 지금 일반적으로 CGV에 소니의 장비가 많이 들어가 있는데, 소니 장비는 입체를 상영하기 위해서는 리얼D 방식으로 되어 있어서 앞에 렌즈가 두 개 달려 있어요. 그래서 프로젝트 하나에 렌즈 두 개가 붙어있는 방식인 거죠. 그 외 다른 건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마스터 이미지란 것이 있고, 돌비3D란 것이 있는데, 이거는 그 기종에 해당되는 것만 되지, 다른 기기와는 호환이 되지 않는다는 거죠. 그렇게 3D가 아직은 그렇게 표준화가 되어있지 않아요. 디지털 3D 기술이 제작에 있어서는 간편해졌는데, 상영 시스템은 좀 복잡해요. 아날로그와 다른 점이 그런 겁니다. 정성일 _ < 라이프 오브 파이 >를 보면서 이안이 참 영리한 연출자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죠. 이 영화는 사실 3D 화면을 부분적으로 사용하면서 그걸 종종 여러 화면 사이즈로 다시 분할한 다음 시각적 효과라는 것을 구현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힛치콕의 < 다이얼 M을 돌려라 >에서도 부분적으로만 3D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의도적인 연출이라기보다는 기술적 한계라는 측면을 포함해서 < 몽녀 >의 입체 연출 장면은 영화 전체의 어느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지요? 장광헌_ 전체를 3D로 재현해서 보질 못했기 때문에 정확히 확인은 안 되지만 당시 기록을 봤을 때 풀 3D는 전혀 아니었어요. 연출자의 연출에 의해서 그런 장면만 3D 형태로 구현을 하는 방식이었고, 제 눈으로 확인한 것은, 이를테면 80년대에 만든 < 공포의 축제 >는 확실히 말씀하신 것처럼 2D 부분이 있고, 어느 부분은 갑자기 3D 부분이 있고 그런데, (잠시 생각) 3D 부분이 많지 않았어요. 대충 어림잡으면 많아 봐야 4분의 1 정도가 3D 정도일까, 그런 효과를 내는 장면을 만드는 거죠. 근래 영화들도 실사 영화들은 풀 3D로 만드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고요 애니메이션 같은 경우는 거의 풀 3D로 만들죠. 정성일 _ 당시 기사를 보면 < 몽녀 >는 이재웅 녹음기사가 입체음향으로 녹음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정확히 뭘 말하는 건가요? 장광헌_ 아, 그건 입체음향 녹음이란 게 입체 영화니까 사운드도 입체감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게 있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확인해 보니까 당시 < 몽녀 >를 제작했을 때는 3트랙으로 만드는 녹음 방식을 취하셨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4트랙이 스테레오인데 스테레오와 비슷한 형태였던 거죠. 웃음이 나오는 부분은, 당시 그렇게 만들었는데 극장에서 상영할 때 구현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장석준 촬영감독이 당시 동아극장, 그러니까 나중에 아세아 극장이죠. (아세아 극장은 지금의 세운상가에 자리했다가 2001년에 문을 닫았다) 아세아 극장에서 입체음향을 내기 위해서 영사기에다 3트랙을 읽어 들이는 영사장치를 또 개발해서 붙이셨어요. 그렇게 해서 상영을 했다고 합니다. 정성일 _ 트랙이야 필름에 들어가 있는 거니까, 실제로 테스트 영사를 했었을 때 현대의 극장에서 구현된 사운드의 느낌이 어땠어요? 장광헌_ 아, 그거를 말씀드리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래 원본은 없고, 사운드 필름도 없었고, 프린트에서 듀프 네가를 만들었는데, 갖고 있는 원본 프린트는 모노입니다. 정성일 _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거군요. 장광헌_ 그렇죠. 그런데 80년대에 저희에게 들어온 프린트도 원래 당시의 사운드를 낼 수 있는 필름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어요. 저희가 생각 하건데 3트랙짜리 사운드가 아니고 이건 그 이후에 70년대 후반이나 8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프린트가 아닐까, 라고 추정하는 겁니다. 정성일 _ 만약에 추론컨대, 그 방식을 그 시스템으로, 실제로 들었으면 어떤 사운드가 들렸을 거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지금으로 따지면요, (잠시 생각) 그냥 스테레오죠. 스테레오와 비슷하게, 라는 거죠. 완전한 스테레오는 아니지만 모노의, 단방향의 센터에서 보내는 음향이 들리는 것보다는 양쪽에서 들리는 부분은 굉장히 낫겠죠. 모노보다는. 레프트 라이트로 나눌 수 있었을 겁니다. 정성일 _ 그럼 복원을 하게 되면 음향도 복원 대상이라 생각하세요? 장광헌_ 사운드도 복원 대상입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제까지 저희가 복원했던 작품들은 대체로 사운드가 모두 모노였어요. 모노였기 때문에 굳이 그 트랙을 나눠서 다시 맞춰가면서 하진 않았어요. 단지 포커스를 맞춘 부분은 노이즈 쪽이었죠. 노이즈가 많은, 여러 가지 불편한 음향들에 대해서 그런 것들을 제거하는 작업 쪽에 포커스를 맞췄지, 실제 마스터링을 다시 하는 쪽은 아니었습니다. 최근에 만들어진 5.1채널, 7채널 같은 거야 이후에 그걸 복원한다면 그렇게 다시 나눠야겠죠. 일본의 경우 음향과 대사를 분리해 고전영화 사운드를 리마스터링 하긴 하지만 한국은 아직 그럴 여건이 못 되는 게 현실입니다. 정성일 _ 문제는 < 몽녀 >같은 작품은 장석준 촬영감독님이나 이재웅 녹음기사, 모두 세상에 지금 계시지 않으니 복원을 할 때 가이드 라인을 해줄 사람이 없다는 게 문제군요. 장광헌_ 장석준 촬영감독은 1980년에 돌아가셨고, 이재웅 기사는 2010년까지 생존해 계신 걸로 확인했는데 그 이후는 지금 확인이 안 되고 있습니다. < 지지하루의 흑태양 >(1971), 경향신문 광고(1971.4.1.)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이 직접 연출한 < 지지하루의 흑태양 >도 보셨습니까? 장광헌_ 아뇨, 보지 못했습니다. 그 영화의 프린트는 현재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정성일 _ 그럼 그 이후의 입체영화로 자료원에는 어떤 영화가 있는지요? 장광헌_ < 홍길동 >입니다. 근데 이 <홍길동>이, 오늘 아침에 제가 확인했는데, 그게 현재까지도 네가 필름만 있는데 필름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지 이걸 프린트로 옮기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게 3D였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었어요. 오리지널 네거티브는 맞는데 2D 영상은 하나만 있으니까 그게 분명히 레프트, 라이트 중 하나만 저희가 갖고 있는 거고요, 하나의 영상이 없는 겁니다. 네가만 존재하고 기록이 없으니까 이제까지 저희 직원들은 모두 이게 3D 영화인지 모르고 있었어요. 지금은 3D 영화로 분류하되, 하지만 좌, 우중에 하나다, 라고 확인을 한 정도입니다. 정성일 _ 그럼 < 천하장사 임꺽정 >, < 몽녀 >, < 홍길동 > 이렇게 순서대로 보면서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모두 판스코프로 촬영했다 할지라도 무언가를 개선하려고 노력했던 부분이 있지 않았나요? 이 문제는 미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촬영의 입장에서는 기술의 개선이라는 문제로 먼저 다가왔을 것 같습니다. 그 과정에서 판스코프의 촬영방식에서 어떤 기술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나요? 장광헌_ 그런데 이게, (잠시 생각) 제가 계속 말씀 드리는데, 그 전에 < 악마와 미녀 >도 있고, 전부다 똑같이 지금 3D로 재현한 필름이 없어요. 그러니까 본 사람이 없는 거고, 본 사람이라고 해봤자 80년대 초반, 그 이후에는 본 사람이 없는 거 같아요. 저희가 보기에는. 그래서 이게 어디가 어떻게 변천되면서, 뭐가 고쳐졌다, 라고 확인할 길이 없는 거죠. 저희가 봤을 때 방식은 같아요. 대체로 지금 디지털 3D 기술도 마찬가지지만 찍는 사람의 노하우가 많이 좌우를 하거든요. 얼마나 빨리 찍고 얼마나 잘 찍을 수 있는지, 고스트 현상을 없앨 수 있는지 촬영기사와 지금의 스테레오그래퍼 라는 특수한 직업의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양각과 음각, 들어간 것과 나오는 것을 연출하면서 촬영 감독과 같이 보고 모니터링을 함께 해요. 그래서 모니터를 할 때 예전에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이렇게 보다가 입체영화는 감독, CG슈퍼바이저, 스테레오그래퍼 이렇게 같이 보는 거죠. 3D 기술은 그렇게 바뀌었는데, 물론 장비의 개선을 하시려고 했겠죠. (잠시 생각) 그런데 제 생각으로는, 렌즈가 크면요, 아무리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아요. 렌즈와 렌즈 사이의 간극이 11센티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하는데 옛날 방식의 카메라들은 분명히 다 크니까 렌즈가 그 간극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모두 크잖아요, 아무리 둘 사이를 붙이려 해도 붙여지지가 않을 테니까 이걸 어떻게 하면 컴팩트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런 것들에 관심이 집중되었겠죠, 이런 면에서 줌 렌즈를 쓰는 것이 또한 개선의 효과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정성일 _ 아, 줌 렌즈요... 만약 그 방식이라면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거의 동시에 발생하지 않습니까. 결국 카메라를 가능하면 세워 놓아야 한다는 문제와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3D 효과를 구현할 수 있는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있어서 좀 더 까다로운 기술적 난점과 만나게 될 텐데... 장광헌_ 아 조금 더 말씀 드리면요. 왜 장석준 촬영감독이 카메라 한 대를 가지고 찍으려고 하셨을까, 를 한번 생각해 봤어요. 지금 3D 영화들은 트라이포트처럼 생긴 곳에 받침대 같은 게 있습니다. 그 받침대에 카메라 두 대를 장착해서 찍습니다. 근데 이게 수평이 정확하게 맞거나 간극도 정확하게 맞아야 해요. 근데 요 받침대가, 실제로 리그라고 합니다만, 이 리그를 어떻게 정밀하게 깎느냐가 기술이에요. 그런데 카메라가 한 쇼트만 찍는 게 아니고 계속 움직이면서도 찍기도 하고 돌아가기도 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이게 돌아가면,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사람의 상이 겹치는 상이 생길 수도 있어요. 그걸 고스트 현상이라고 해요. 또 광원이 들어갔는데 우완 영상에는 햇빛이 없는데, 좌완 영상에는 햇빛이 들어가 있는 거예요. 이거는 아날로그로 찍으면 절대 고칠 수가 없거든요. 디지털로 찍게 되면 그건 디지털 소프트웨어로 고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솔루션화 해서 만들어진 게 요 근래 디지털 3D의 발전적인 기술인데, 생각을 해보면 그때 아날로그적인 기술로 봤을 때는 두 대의 카메라로 찍으면요, 왼쪽 렌즈와 오른 쪽 렌즈로는 상을 같이 맞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추정하건데, 카메라 한 대로 만드신 게, 카메라 한 대에 렌즈가 붙어있으니까 (둘 사이의 서로 다른) 움직임은 적어도 없지 않았을까 라는 거죠. 생각해볼수록 카메라 한 대에 렌즈 두 개, 이거 정말 괜찮은 생각을 하신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저는 지금의 3D 기술에서 가장 난점이 되고 고도화 기술이 되는 부분이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카메라 한 대로 렌즈 두 개를 장착해서 찍었다. 그게 오, 저는 굉장히 일리 있는 기술적인 해결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성일 _ < 몽녀 >와 주변의 입체 영화들을 복원하는 과정의 경험치가, 한편으로는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 3D 영화들에서 프린트 이외에 두 가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교훈을 준 거네요. 안경과 영사기, 말하자면 관람방식의 기록과 보존이라는 문제. 장광헌_ 안경은 당시의 그 방식에 대한 기록만 있으면 만들 순 있어요. 데이터만 있으면 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그 데이터가 없으면 정말 어떻게 만들었는지 알 수가 없는 거죠. 근데 저희가 알았던 것은 일본 쪽에서 그런 옛날 방식을 아직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로 하니 딱 맞는 거예요. 당시 장석준 촬영 감독이 그렇게 만든 카메라가 거꾸로 일본으로 가서 많이 쓰였다고 하니까, 60년대 괴수영화를 보면 일본 기술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많이 찍었다고 하는데, 근데 입체영화는 거꾸로 수출을 하게 된 거죠.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굉장히 큰 공을, 어려운 일을 하신 거죠. 정성일 _ 필모그래피를 보면 이상할 정도로 그 시기에 임권택 감독님이 미학적 관심보다는 기술적 관심에 대해 크다, 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 몽녀 >에서는 3D 촬영을, 그리고 <증언>에서는 미니어처 촬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걸 쫓아가고 있으면 마치 앞으로 자신의 연출이 가야할 하나의 방향이라는 느낌이 든달 까요, 장광헌_ < 천하장사 임꺽정 >이 68년 초에 만들어진 거고 이 < 몽녀 >가 그해 여름에 찍은 걸로 알고 있어요. 3D 영화로 두 번째 찍은 건데, 정말 저는 개인적으로 감독님께 궁금한 게 왜 갑자기 입체 영화를 찍으려고 했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로 기술적인 관심이 있어서 한번 이거 해볼까 라고 생각하신 건지. 지금은 보조 역할을 하는 여러 사람이 있지만 당시에 완전 3D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연출하시는 분이 아, 여기는 입체감을 줘야겠다, 라고 연출을 하지 않고서는 되지 않거든요. 말하자면 당시의 3D 영화는 전적으로 연출자의 연출과 촬영하는 쪽의 기술의 경험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거죠. 정성일 _ < 몽녀 >에서 3D 테스트 시사를 할 때 선택한 장면은 그걸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장광헌_ 아 테스트 장면이요. 자동차 신, 움직이는 신, 저도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는데 가장 움직임이 많은 쪽을 하려고 했어요. 복원을 할 때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 손상이 많이 간 부분과 덜 간 부분을 샘플로 골라서 작업을 하더라도 그렇게 하거든요. 그래서 이건 입체 영화니까, 입체 효과가 많이 나는 부분, 자동차가 확 앞으로 지나가는 신이었던가, 이 장면을 선정했어요. 사실 저희가 그 장면을 선택해서 이야기한 건 아니고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입체 작업을 할 때 가장 이 부분이 낫겠다, 라고 그쪽과 이야기해서 정한 거죠. 정성일 _ < 홍길동 >도 보셨나요? 장광헌_ 볼 수 있는 매체는 현재 없습니다. 정성일 _ 기록상으로 < 홍길동 >은 일본 제작진 기술의 도움을 받았다고 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홍길동>은 이전 방식과 다른 빙식을 취한 건가요? 장광헌_ 기록상에 보면, 신상옥 감독이 일본 기술진과 (협력)해서 기술 개발을 했다, 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확인할 길은 근데 없어요. 제 생각으로 오히려 기술개발을 했다면 촬영기술 쪽에 기술개발을 한 게 맞지 않을까 추정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판스코프 방식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갖고 있는 게 포지티브가 있는 게 아니고 네거티브가 있는데, 그 네거티브 중에서 좌완, 우완이 있는 게 맞는 데 그 둘 중 하나만 있는 거니까요.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판스코프 방식은 좌완, 우완 네거티브가 있고 이걸 프린트 인화할 때 프린트 하나를 만드는 거예요. 이 기술인데 어떻게 만들었는지는 모르죠. 만약 그렇게 만들었다고 그러면 그것도 동일하게 판스코프 방식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는 거죠. 정성일 _ 만약에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다면 한국에는 두 가지 입체 시스템이 있었던 셈이군요, 추정컨대, 혹은 기록상으로 이것 말고 또 다른 방식이 있나요? 장광헌_ 지금 2000년대 들어서 만든 영화는 < 평화의 시대 >라고 해서 HOT 나오는 영화가 있었어요. HOT 팬들을 위해서 만든 29분 길이의 영화인데요, 이걸 만든 방식은 판스코프 방식이 아니고, 프린트가 레프트 프린트, 라이트 프린트가 따로 있어서 영사기 두 대로 상영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프린트만 특이하게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입체영화 중에 할리우드에서 촬영하고 영사하는 방식의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할 수 있어요. < 홍길동 >은 확인이 안 되고요. 판스코프 카메라 정성일 _ 판스코프 방식의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가 현재 보존되어 있나요? 장광헌_ 카메라는 없고요.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님께서 영화진흥공사 시절에 기증을 하셨어요. 그 카메라를 종합촬영소에 전시를 했었어요. 그게 90년대까지는 보셨대요. 그런데 현재는 어떤 과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분실되었습니다. 그 카메라가 있으면, 작은 카메라는 아니고요, 독특하게 생긴 카메라죠, 카메라 박스에 마가진 두 개. 달린. 정성일 _ 혹시 사진이 남아 있나요? 장광헌_ 사진은 지금 저희에겐 없고요. 인터넷으로 찾아보게 되면 러시아에서 나온 사진기 자체가, 그 원리를 알 수 있는 사진기는 (볼 수) 있어요. 저도 이게 어떻게 생긴 건진 본적이 없으니까. 영진위에는 찍어놓은 사진이 있겠죠. 분실돼서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됐는데, 이게 어디 가지는 않았을 텐데... 정성일 _ < 홍길동 >은 장석준 촬영감독이 관여하지 않은 3D 영화입니다. 기술 판권문제는 제가 잘 알지 못하지만 이 영화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을 때는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누차 이야기한 것처럼 3D 촬영에는 단지 기술만이 아니라 경험치가 필요하다면 더더구나 거의 유일한 촬영 전문가인 장석준 촬영감독의 도움이 필요했을 텐데 말입니다. 게다가 그 당시에 장석준 촬영감독은 현장에서 활동 중이었습니다. 장광헌_ 약간 까다로운 문제가 있어요. 실제로는 신상옥 감독이 < 홍길동 > 제작에 참여했다고 했잖아요. 우리 기록에는 그 필름 크레딧이 있는데 거기엔 삼영필름이에요. 정성일 _ 아 신필름이 아니고요? 장광헌_ 네, 그래서 저도 그게 의아해서 자료를 맞춰보았어요. 그때는 (다른 영화사 이름을 빌려서) 대명(代名)제작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게 76년도 영화이고, 그럼 신필름이 폐업한 이후의 일이니까 혹시 신상옥 감독님이 제작을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하셨을까, 라는 생각도 했어요. 대명제작을 하셨을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그럼 보통 대명제작을 하게 되면 제작은 아니더라도 기획에 대명제작을 한 사람의 이름이 들어가잖아요. 그런데 그것도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우리도 야, 이건 좀 이상하다. 확인을 해봐라, 이러는 중입니다. 이게 과연 신상옥 제작이냐, 현재 기록상으로는 삼영필름 강대진 제작으로 돼있어요. 그게 좀, 그리고 아까 말씀하신 개발 방식이 판스코프 방식이냐 아니냐, 그것도 반반인 거 같아요. 판스코프방식이 아닐 수도 있어요. 정성일 _ 그 사이에 일본 쪽에서도 계속 개발을 하고 있었을테니까, 장광헌_ 그런데 그 시간에, 공존하는 시간에 장석준 촬영감독님이 판스코프 방식을 계속 유지하고 계실 때였어요. 그러니까 만일 다른 촬영감독이 찍었다면 다른 방식으로 < 홍길동 >을 촬영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드는 거죠. 정성일 _ 장석준 촬영감독께서 판권을 주장했을 수 있었겠네요, 이를테면 내가 찍지 않는 영화는 허용할 수 없다, 그 정도 열정을 갖고 3D 촬영에 임했다면 그 정도 자부심을 갖고 계실 수 있지 않을까요? 장광헌_ 그게 이번에 조사하면서, 우리도 데이터가 부족하니까, 이건 좀 의심해볼 여지가 있다, 라고 생각되는 게 바로 이 부분입니다. 정성일 _ 그렇군요. 처음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결국 전 < 몽녀 >를 3D로 볼 수 없는 상태로 보면서, 하여튼, 역설적인 상황 안에서 제 일을 수행해야겠군요. (1부 끝, 2부에서 계속) 인터뷰_ 2013년 6월 21일 날씨 가끔 흐리고 참 더웠음 대담_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서비스부 부장 장광헌 진행, 정리, 사진_ 유성관 진행,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