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형
- 감독
- 서성조
- 제작년도
- 1971
- 출연
- 신성일, 윤정희, 백일섭, 김창숙, 박암, 조덕성, 박병호, 장훈, 조학자, 김웅, 성소민, 이영호, 장정국, 박부양, 박병기, 이강조, 임성포, 지방열, 김왕국
천만 관객을 돌파한 < 변호인 >(2013)을 시작으로 < 강철비 >(2017)와 < 강철비2; 정상회담 >(이하 <강철비2>, 2020)로 이어지는 양우석 감독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느끼는 점은 이른바 ‘대중영화’라는 이름의 덕목이다. 그는 흔치 않게 선명한 장르에 기대기보다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 그중에서도 ‘정치’라는 영역으로부터 소재를 끌어올리는데, 세 작품 모두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물론 우민호 감독의 < 내부자들 >(2015) 이후 한재림 감독의 < 더 킹 >(2017)을 거쳐 ‘검사’가 주된 캐릭터로 등장하는, 굳이 표현을 갖다 붙이자면 ‘정치 스릴러’ 영화들이 한때 적잖이 붐을 이루긴 했으나, 그의 영화들은 이들과도 궤를 달리 한다. 특히 <강철비> 시리즈는 < 공동경비구역 JSA >(2000) 이후 < 웰컴 투 동막골 > < 의형제 > < 간첩 > < 용의자 > < 베를린 > < 공조 > 등으로 역시 붐을 이뤘던 ‘인간적인 얼굴을 한 북한 사람’이 등장하는 남북 소재 영화들의 연장선에 있는 것처럼 보이나, 그런 캐릭터보다 남북 관계라는 역학 관계에 더 치중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로 궤를 달리 한다. 그런 점에서 악착같이 자기만의 길을 걸으려 노력하며 동시대 대중영화가 쉽게 품기 힘든 스토리텔링으로 향한다는 뚝심의 감독이라고나 할까. <강철비>가 쿠데타 발생으로 치명상을 입은 북한 1호(김정은으로 예상되지만 실명을 쓰지는 않는다)가 남한으로 오게 된다는 가정에서 출발했다면, <강철비2>는 2021년을 배경으로 남북미 세 지도자를 한 곳에 모은다. 북미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대한민국 대통령( 정우성 ), 북한의 최고지도자인 위원장( 유연석 )과 미국 대통령(앵거스 맥페이든)간의 남북미 정상회담이 북한 원산에서 열린다. 북미 사이에서 좀처럼 이견이 좁혀지지 않는 가운데, 핵무기 포기와 평화체제 수립에 반발하는 친중 성향의 북한 호위총국장( 곽도원 )의 쿠데타가 발생하고, 납치된 세 정상은 북한 핵잠수함에 인질로 갇힌다. 그렇게 좁은 함장실 안에서 예기치 못한 진정한 정상회담이 벌어지게 된다. <강철비>의 전략과 마찬가지로 <강철비2>도 가정법의 상상력으로 밀어붙인다. 흥미로운 지점은 영화 속 사건의 발생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강철비>가 보다 현실적이지만 낯설었던 반면, <강철비2>는 오히려 비현실적이지만 왠지 낯설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벌어진 사건과 무관하게 영화 속 남북미 세 지도자가 현실의 그 세 지도자를 직접적으로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빨간 넥타이의 미국 대통령은 누가 봐도 트럼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고(식성부터 성격까지 구구절절 유사점을 찾는 것 자체가 피곤할 정도로 싱크로율이 높다), 외모는 상당히 다르지만 북한 위원장 또한 김정은으로 연결짓는 것이 적절하며, 하늘색 넥타이의 대한민국 대통령도 외모나 연령대는 다르지만 ‘빨갱이 북에 가서 돌아오지마라’라는 글이 청와대 게시판에 올라왔다는 설정만 봐도 대략 속한 정당과 투영된 인물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게다가 지금의 우리 관객은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먼저 만나고, 싱가포르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난 뒤인 2019년 6월 30일,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 군사분계선에서 김정은 위원장과 함께 북측으로 넘어가 기념촬영을 마치고 다시 남측으로 내려와 문재인 대통령과 3국 정상이 얼굴을 맞대는 모습을 연출한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처럼 <강철비2>의 픽션은 현실의 논픽션과 어우러져 힘을 발휘한다. 북한의 내부 붕괴라는 시나리오가 1편과 2편을 모두 관통하고 있다면, 2편에서는 미국까지 끌어들여 현실의 트럼프 대통령이 최초로 북측 땅을 밟은 것처럼 ‘(또 하나의) 최초로 해외에서 죽은 미국 대통령을 얻을지도 모른다’는 상상력이 끼여든다. 그것이 오히려 소속 정당에 대한 이미지 개선과 동정론에 힘을 실어줄 것이란 얘기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황당하게 느끼는 관객이라면 ‘만화적 상상력’이란 표현을 떠올리게 되겠지만, <강철비2>는 통역가나 비서관도 없이 남북미 세 정상이 강제적으로 한 방에 갇혀 동고동락하는 설정을 밀어붙이는 모양새가 꽤 쓸모 있는 풍자란 생각이 들게 한다. 방귀를 뀐 누군가를 질타하고, 실내 흡연 문제로 다투는 모습을 보자면 그야말로 ‘애들 싸움’이나 다름없다. 이제껏 보아온 근엄한 ‘정상회담’이란 온데 간데 없다. 사실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은 보통의 북한 병사들이다. 순수하게 ‘공화국 영웅’을 꿈꾸며 마음 한구석에서 평화를 향한 열망이 있는 그들은 폭주하는 호위총국장에 대한 반감으로 가득 차 있다. 어쩌면 이 팽팽한 밀실 스릴러가 보여주는 미덕의 대부분은 바로 거기 있다. 앞서 얘기한 것처럼 ‘인간적인 얼굴을 한 북한 사람’이 등장하는 남북 소재 영화는 많았으되, 그 영화들의 북한 사람은 하나같이 대한민국 주인공의 시선에서 관찰당하는 북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강철비2>는 <강철비>의 최정예요원 엄철우(정우성)보다 더 그 북한 사람들의 시점을 담아낸다. 북한 잠수함에서 벌어지는 일이기에 어쩌면 처음으로 북한 그 자체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았다고 해도, 혹은 북한에 가서 로케이션 촬영을 한 영화라고 적당히 거짓말을 보태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다. 이제껏 보아온 남북 소재 영화들처럼 대한민국으로 온 누군가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거기 사는 그들의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영화 속에서 북한 사람들이 얘기할 때 그 자막을 넣어준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른바 ‘서울 표준말’로 자막을 넣지 않고 그냥 ‘북한말’을 소리 나는 그대로 썼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소 어색했으나, 가령 한국영화에서 제주도 사투리 장면이 나올 때 서울 표준말 자막을 쓰는 것처럼, 북한영화에서 북한 타 지역 사투리 장면에서 평양 표준말 자막을 쓰는 것이라도 봐도 될 것이다. 그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과 북의 영화가 서로의 영화관에서 자유롭게 동시 개봉을 하게 될 때, 평양 사람들이 <강철비2>를 보게 되면 어떤 마음이 들까.
최근 개봉한 < 강철비 >를 본 후 떠오른 질문이 있다. 남과 북의 관계를 소재로 한 영화들, 구체적으로 말해 6.25 같은 전쟁을 회고하는 영화가 아니라 남북대치상황을 토대로 상상한 한국영화 가운데 비극이 있었던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선뜻 떠오르지는 않았다. < 쉬리 >(1999)의 마지막은 비극이기는 했지만, 주인공 유중원( 한석규 )은 더 거대한 비극을 막기 위해 자신의 비극을 선택한 경우다. < 이중간첩 >(2003)의 비극 또한 크게 다른 느낌은 아니다. 장르적으로 보면 주인공 림병호( 한석규 )는 그렇게 죽는 게 어울리는 캐릭터다. 이들에 비하면 < 의형제 >(2010)와 < 공조 >(2017)는 완벽한 해피엔딩으로 기획된 영화다. 그리고 < 베를린 >(2013)처럼 다음 이야기를 기약하는 엔딩도 있었다.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대부분의 한국영화들은 사실상 장르영화이고, 그래서 이들이 선택한 엔딩 또한 장르적이다. 비극적인 엔딩이라고 해도 거기에서 한반도의 비극을 떠올리기보다는 주인공의 장르적인 최후나 파멸, 혹은 필연적인 희생을 보게 되는 것이다. < 강철비 >의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다. 그의 죽음은 더 큰 무언가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고, 그의 희생을 통해 영화는 해피엔딩을 맞는다. 그의 죽음에서 관객은 비극이 아닌 감동을 경험한다. 물론 이건 대중영화로서 당연한 선택이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에서 흥미로운 기억은 1990년 후반 이후 남북관계를 바라보는 한국영화의 태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 중 하나인 < 공동경비구역 JSA >의 비극이다. 이 비극은 장르적으로 규정하기도 쉽지 않지만, 매우 차갑고 불편한 비극이다. 더 흥미로운 건, < 공동경비구역 JSA >가 비극으로 기억하는 게 낯설게 느껴지는 영화라는 것이다. < 공동경비구역 JSA >는 지난 2000년에 개봉했고, 케이블 TV에서도 수차례 방영된 덕분에 반복 관람한 사람이 많은 작품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 영화의 비극보다는 남과 북의 병사들이 나누는 우정의 미담을 더 강렬하게 기억한다. 함께 김광석의 노래를 듣고, 닭싸움하고, 술을 마시며 서로를 형 동생으로 부르는 남자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4번 정도 보았던 나 또한 마찬가지다. 지난 2015년 개봉 15주년 기념으로 재개봉했을 때 극장을 찾아간 게 4번째였다. 그렇게 보고나서야 이 영화가 정말 차가운 비극의 영화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지금 주위에 과거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있다면, 이런 질문을 던져보자. 이 영화에 등장한 4명의 군인 가운데, 누가 제일 먼저 죽었는가. 그는 누구의 총에 맞아 죽었는가. 그리고 이 4명의 군인 중에서 유일하게 죽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 공동경비구역 JSA >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내 돌아오지 않는 다리 북측 초소에서 발생한 북한 병사와 장교의 사망 사건을 추적하는 이야기다. 당시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 사이에 교전이 있었는데, 양쪽 병사들의 주장은 다르다. 남한 병사들은 북한 병사들이 자신들을 납치했다고 진술한다. 북한 병사들은 갑자기 남한 병사들이 초소로 침입했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이들의 진술 이면에 가려진 진실은 사실 이들이 꽤 오랫동안 우정을 쌓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총격전이 벌어진 걸까? 그날 밤의 사건을 드러내는 영화의 서사는 ‘방어기제’와 같은 정신분석학적 용어를 연상시킨다. 이수혁 병장( 이병헌 )과 남성식 일병( 김태우 )이 사건을 회고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그들은 모두 그날의 일을 잊으려 애쓰는 동시에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기억으로 재조립한다. 그럼에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남성식은 자살한다. 이후 소피( 이영애 )에 의해 밝혀지는 진실. 북측의 오경필 중사( 송강호 )와 정우진 전사( 신하균 ), 그리고 남측의 이수혁과 남성식이 비밀리에 어울렸다는 사실이 북한군 장교에 의해 발각된다. 그들은 그 순간 서로 총을 겨누었다. 오경필의 중재로 동시에 총을 내려놓으려는 순간, 김광석의 노래를 울리던 카세트 데크가 ‘찰칵’ 소리를 낸다. 그 소리에 북한군 장교는 다시 총을 빼려 하고, 그걸 본 남성식도 총을 빼서 그를 쏜다. 그걸 본 정우진이 총을 쏘자, 남성식은 그에게도 총을 쏜다. 그는 총질을 제어하지 못한다. 동생처럼 아꼈던 정우진은 그가 난사하는 총을 계속 맞는다. 여기까지도 비극이지만, 더 큰 비극은 이것이 사실 이수혁의 거짓말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정우진에게 먼저 총을 쏜 건, 이수혁 자신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숨기려 했을 뿐만 아니라 잊으려 했을 것이다. 끝내 잊지 못하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떠올린 이수혁 역시 죄책감에 자살하고 만다. < 공동경비구역 JSA >는 이수혁의 사망 후 바로 4명의 군인이 함께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끝난다. 이 사진은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장면으로 기억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방금 전 이수혁의 죽음에서는 어떤 장르적인 파멸이나, 장렬한 희생, 그로인한 감동 같은 걸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형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결국 우린 적이야.” 이수혁의 극중 대사처럼 < 공동경비구역 JSA >가 보여주는 건, 남과 북이 서로에게 품고 있는 두려움과 공포다. 그리고 그런 공포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더 무서운 결론이다. 돌이켜보면 이 비극의 정서는 당시 박찬욱 감독의 다음 작품이었던 < 복수는 나의 것 >과도 통한다. 극 중 동진( 송강호 )의 딸만 죽지 않았다면, 류( 신하균 )와 영미( 배두나 )는 동진에게 돈을 받고 아이를 건강한 상태로 돌려주면서 그들이 말한 “착한 유괴”를 완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JSA의 남북한 군인들 또한 먼저 총을 쏘지 않을 정도로 조금만 더 용감했다면, 얌전히 본진으로 돌아와 제대 후에는 그날 밤을 잊지 못할 추억으로 간직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영화의 인물들 모두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비극에 휘말리면서 모두 파괴되고 만다. 이토록 가혹한 비극이었는데도 < 공동경비구역 JSA >의 비극이 잘 기억되지 않는 건, 나를 포함한 관객들 모두 이수혁과 같은 심정이었기 때문일 거다. 너무 차갑고 아픈 비극이라 관객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들의 아름다운 우정만 기억하고 싶었던 걸 수도 있겠다. 혹시 그렇게 바래진 기억 덕분에 이후 < 의형제 >나 < 공조 > < 베를린 > 그리고 < 강철비 > 같은 남북한 남자들의 콤비플레이가 가능했던 걸까? 흐름으로만 보자면 한국영화 속 남북의 우정이 서로를 믿지 못한 남북한 군인들의 공포에서 시작된 셈이다. < 공동경비구역 JSA >가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도 남북관계를 다룬 그 어떤 영화보다 더 강렬하게 기억되는 이유다.
1969년 1월 27일 한 남자가 어린 조카와 함께 여권을 위조해서 홍콩을 거쳐 캄보디아를 경유한 다음 베트남 하노이 공항에 도착했다. 하지만 여기서 미리 대기 중이었던 중앙정보국 직원들에게 체포되었고 서울로 송환되었다. 당시 베트남은 전쟁 중이었고 한국은 이 나라에 파병 중이었기 때문에 모든 절차는 양국 간의 협력하에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이 남자의 이름은 이수근. 북한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이었던 그는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극적으로 남한으로 귀순하였고 이 사건은 냉전 관계였던 남북한의 긴장 속에서 남한 체제의 우위에 대한 전리품처럼 보도되었다. 이수근은 귀순한 다음 중앙정보국 판단관 대우를 받으면서 반공강연과 북한체제 비판을 위한 홍보대사로 활동하였다. 북한에 아내가 있었지만 새로 결혼을 했고 이 귀순은 대대적인 언론보도와 함께 거의 영웅적인 사건이 되었다. 하지만 이수근은 북한에 두고 온 아내의 조카 배경옥과 남한에서 탈출할 결심을 했고 하노이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중앙정보국은 이수근이 이중간첩이었으며 남한에 위장 귀순한 다음 고급정보를 북한에 전달하기 위해 출국 시도를 했다고 발표했다. 1969년 5월 10일 이수근은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죄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 과정에서 이수근의 출국을 돕거나 관련된 자들은 모두 유죄판결을 받았다. 이수근은 판결에 대해 항소했지만 형이 확정되었고 그로부터 2개월만인 1969년 7월 2일 사형을 집행했다. 또한 이수근과 동행한 조카 배경옥은 무기징역을 언도 받았고 이에 항소하여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 한국사회는 간첩이라는 단어 앞에서 창백해졌다. 간첩 이수근 약간 우회를 해보자. 장르는 약속의 세계이지만 동시에 그것이 생성되고 재편된 다음 수많은 텍스트들의 시행착오들로 이루어진 이합집산의 과정 끝에 하나의 양식(mode)을 갖게 된다. 물론 처음 시작은 시장 안에서 박스 오피스 목록에 올라온 영화의 성공을 재생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시장 안의 비즈니스는 이 성공에 어떤 법칙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합리적인) 가정을 하였다. 반복 어구. 어떤 법칙. 그런데 정말 그런 것이 있을까. 이때 이 과정에는 반복적으로 영화가 시장에 던져진 다음 대중들과의 (이윤을 사이에 둔) 협상 과정을 거쳐 끊임없이 펼쳐나가는 자기 운동 과정이 포함된다. 여기서 핵심은 장르 안에서 그 스스로 발전하는 선형진행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수없이 많음 모델들이 도전을 해오고 그 과정 안에서 아슬아슬한 균형이 이루어진다. 영화에서 (특별하게 뮤지컬) 장르를 연구해 온 스티브 닐은 장르의 원형이란 이론적으로만 존재할 뿐 모든 장르 영화들은 그 자체로 모두 예외적인 사례라고 푸념을 했다. 이때 장르 영화들은 약속 안에 영화 바깥으로부터 그 약속 자체를 기형적으로 비틀기 시작하거나 혹은 예상치 않은 블랙홀, 때로는 긴장할만한 새로운 코드들과 만나게 된다. 영화가 제작되고 있는 그 순간의 시끄러운 사회적인 사건이나 위협적인 혹은 흥분할만한 정치적인 분위기, 지적학적으로 가까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하여튼 역사의 계기와 토픽으로부터 장르는 자유로울 수 없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러오는 대중 관객들은 극장에 들어설 때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로부터 잠시 멀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잘 알려진 사례. 로빈 우드는 1970년대 공포영화들이 다루는 ‘타자’들이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흑인, 여성, (청바지를 입은) 노동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1960년대 대항문화들, 그중에서도 인종 인권운동, 페미니즘, 좌파 정치운동에 대해 전통적인 WASP 보수적인 사회가 느끼는 두려움의 도상화(iconography)라고 설명했다. 김소영은 좀 더 흥미로운 제안을 하면서 한국 공포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결의 패턴으로 며느리 귀신과 시어머니의 대립을 한 쌍으로 제시했다. 이것은 장르가 지역 문화의 정치학에 따라 새로운 계열을 만들어내는 이접적 종합의 한 예가 될 것이다. 블리스 쿠아 림은 이 논쟁을 좀 더 멀리 밀고 나아가면서 판타스틱 영화들은 어떻게 장르 안에 서로 다른 시간을 공존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탈구시키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말하자면 장르 안에서 유령들은 언제 귀환하고 또한 어떻게 존재하며 그런 다음 결국 그들은 누구에게 추방되는가, 에 의해 멜랑콜리해진다. 나는 이 말을 전적으로 벤야민에 기대서 하는 중이다. 간첩 좀 이상한 말이지만 스파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이 말이 왠지 낭만적으로 들리지만 간첩이라고 하면 무언가 오싹해진다. 간단한 실험. 존 르 카레의 고전적인 ‘스파이 스릴러’인 「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The Spy who came in from the cold 」를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간첩」이라고 번역한다면 단지 그 차이를 뉘앙스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반공 국가 남한에서 북한으로부터의 현실적인 위협은 세대마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학습되었다. 한국전쟁 세대에게는 그 공포가 재침(再侵)이라면 다음 세대에게는 우리들 사이에 스며든 ‘그림자 같은’ 간첩과 거의 ‘슈퍼맨’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것으로 ‘코스프레’ 한 무장공비로 이원화되었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두 개의 오랜 시간에 걸쳐 학습된 전형성은 여전히 ‘남한’ 영화 안에서 작동하고 있다. 이를테면 < 은밀하게 위대하게 >의 ‘북한에서 남파한’ 세 명의 ‘간첩’ 주인공들) 역사의 우여곡절. 1980년 5월 광주 ‘이후’ 남한에서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자생적’ 사회주의자들이 정치운동과 (현장 참여의 전술을 학습하기 위하여) 실천적 투쟁을 전개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자기학습을 통해 ‘주체사상’을 수용하는 세대가 나타나면서 간첩이라는 반공 ‘어젠다(agenda)’는 묻혀 버렸다. 그 유명한 학생운동권 내부의 NL과 PD의 사상노선투쟁.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후 세습한 김정일은 김영삼과 김대중을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긴장 관계 안에서 평화정책을 유지했고 그 기간 동안 남한의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하면서 점점 북한은 ‘종이 늑대’로 그 이미지가 변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의 성장이라는 국제관계 안의 복잡한 정치 공학이 작동하고 있으며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으로 상징되는 교류도 큰 몫을 차지했다. < 쉬리 >와 < 간첩 리철진 >을 거쳐 이데올로기를 탈색시켜나간 21세기 간첩의 이미지는 그래서 < 의형제 >처럼 거의 위협적이지 않거나 (심지어 매력적이거나) 혹은 <은밀하게 위대하게>처럼 우스꽝스러워졌다. 좀 더 간단하게 말하겠다. 간첩은 더 이상 괴물이거나 추악하거나 교활하기는커녕 순정파 ‘꽃미남’(들)이다. 하지만 한국전쟁 휴전 ‘직후’인 1954년에 만들어진 간첩영화 < 운명의 손 >을 보고 있으면 간첩은 ‘미스터리’ 하거나 ‘스릴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포영화에 나타나는 존재처럼 유령이면서 동시에 멜로드라마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악한들이다. 여기서 그들은 장르 안에서 활동하는 약속의 기호가 아니라 공기 속의 비-존재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의 생활의 일부이다. 간첩을 점점 이야기의 바깥으로 밀어낸 것은 그만큼 남한 사회에서 타자가 스며들 수 없을 만큼 촘촘하게 네트워크를 이루고 일상생활이 안정적인 구조로 들어섰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면서 간첩 영화는 액션 ‘다찌마와리’ 영화와 공포영화 사이에서 교집합을 이루며 그 하위 장르(sub_genre)가 되어갔다. 물론 1970년대에 나타난 일련의 ‘여간첩’ 영화들, < 특별수사본부 기생 김소산 > < 특별수사본부 배태옥사건 > < 특별수사본부 김수임의 일생 >은 멜로드라마의 하위 장르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나는 세 개의 서로 다른 층으로 이루어진 삼각형을 제시하였다.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복잡한 이데올로기의 네트워크를 담은 영화는 아니지만 1970년은 이 영화를 그 자리에 가져다 놓는다. 이때 임권택 은 자신이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언제나, 언제나라고까지 말하고 싶어지는데, 임권택은 자신의 영화가 북한과 어디선가 만나게 될 때 갑자기 움츠러든다. 나는 단지 그의 전기적 측면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은 이따금 영화 안에서조차 자기가 어떤 상황에 반복적으로 다시 불려간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때 어떻게 해서든 그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 보기를 회피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때 임권택은 그 안에서 수동적 주체의 자리를 찾기 위해서 필사적이 된다. 게다가 1970년은 모든 상황에서 불리했다. 베트남을 경유하여 새로운 냉전의 분위기가 사회를 덮쳤고 박정희는 제7차 대통령 선거를 그 이듬해 목전에 두고 있었다. 김대중과 김영삼은 어쩌면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자신의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영화산업은 그 안에서 정치 공학적으로 가냘픈 부문에 지나지 않았다. 임권택은 그럴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최대한 수축시켰다. 거기에는 어떤 은유나 상징의 자리도 없다. 그 안에서 상상력은 몸을 숨겨야만 했다. 현재라고 가정된 순간. 그 안에 멈춰서야 할 때 장르는 안전한 보호 장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아마 틀림없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임권택은 장르의 규칙에 따르는 것을 바깥의 법칙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라고 받아들인 것 같다. 그는 종종 장르 안에 머물 때 사유가 불가능한 것처럼 말하곤 했다. 물론 그것은 오해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영화의 장르와 달리 충무로에서 장르란 대부분의 경우 대중적인 유행이 만들어내는 일시적인 ‘법칙 없는’ 법칙이라는 것을 계산에 포함시켜야 한다. 임권택은 수동적인 반복 안의 반복에 몸을 맡겼다. 그러나 반복이란 본질상 상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임권택이 반복이라고 생각한 것 안에는 이미 그 내부를 차지하고 있는 자극과 반응이 그를 바라보고 있다. 장르 안에서 반복하는 것은 차이를 재현하는 것이다. 이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재현 사이를 차지하는 불화의 활동이다. 리오타르라면 규칙이 명령대로 수행되지 않을 때 거기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라고 물어볼 것이다. 나는 소박하게 질문하고 싶다. 무엇이 영화를 피곤하게 만드나요. < 그 여자를 쫓아라 >는 잘 설명되지 않는 침묵과 우울한 명랑함이 기묘하게 서로 얽혀 들어가는 영화이다. 침묵? 그렇다. 이상할 정도로 이 영화는 인물들이 대사를 자제한다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그게 미학적인 의도라기보다 무언가 말실수를 두려워하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좀 더 이 영화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의도적인 명랑함이다. 그들은 마치 자신의 우울함을 숨기기 위해서이기라도 하듯 명랑한 척한다. 아버지의 죽음이 감춰놓은 비밀을 찾기 위해 홍콩에서 귀국한 딸 아미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명랑함. 왜 그녀는 단 한 순간도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현하지 않는 것일까. 그녀를 뒤쫓으면서 비밀을 파헤치고 한편으로는 사랑에 빠지면서 위기에 처할 때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나타나는 남 형사의 과장된 명랑함. 나는 이 세계가 1970년이라는 사실을 일깨우고 싶다. 이미 결정된 상황. 이때 이 우울한 기분의 바탕에는 운명이 무겁게 드리워진다. 이미 되돌이킬 수 없는 운명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일까. 장르에서 조합은 운명을 결정한다. 이때 이 명랑함은 마치 그들의 운명에 대한 방어술처럼 보인다. 영화의 시작 영화가 시작했을 때 먼저 긴 침묵이 이어진다. 임권택 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면) 1970년을 “거의 성의 없이 그저 주문이 들어오면 영화를 찍어내는 어떤 목표도 없던 시절이”라고 말했지만 이 시퀀스는 적어도 영화를 연출한다, 는 문제에서는 자신감을 과시하는 순간이다. 시작하자마자 우리들의 기대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시골 초등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하굣길에 나서는 장면. 그런 다음 텅 빈 교정에 어둠이 내리자 이 학교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내들이 한 명씩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시내들은 서로 잘 알고 있다는 듯 아무 대사가 없다. 그저 서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것은 영화를 보는 우리들뿐이다. 그들은 각자의 임무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건 그들뿐만 아니라 영화의 동선과 쇼트들의 방향도 망설임이 없다. 펼쳐지는 시퀀스. 그 안에서 이야기는 아직 아무 기능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지, 어떤 목표를 갖고 있는지, 그러므로 어디로 흘러갈지에 대해서 여전히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오직 동선의 탐색만이 있다. 임권택은 시작하자마자 13분 40초에 이르는 (구태여 부르자면) ‘금괴 프롤로그’를 최소의 대사로 진행시킨다. 이때 그 대사가 너무 적어서 이 시퀀스를 보고 나면 거의 대사가 없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영화의 시작을 대사 없이 진행시키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아무 준비가 안 되었고 영화 안의 인물들은 이야기의 네트워크를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우리들과 너무 많이 알고 있는 그들. 이 간극은 생각보다 커서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다. 임권택은 분명히 그걸 즐기는 중이다. 그래서 그걸 더 벌려놓으려고 한다. 이 사내들은 조심성 없이 움직일 뿐만 아니라 심지어 교장실에 방문하여 자신들의 정체를 드러낸 다음 밤늦게 교무실에 남은 교장과 (아마도) 수위를 망설임 없이 총으로 쏘아 죽인다. 그런 다음 장비를 꺼내 바닥에서 무언가를 찾는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적을 숨길 생각이 추호도 없다. 이미 옆방에는 두 구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걸 어딘가에 숨길 생각도 없이 여기저기 뒤져나가던 그들은 무언가를 찾자마자 즉각 마룻바닥을 뜯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서 금괴를 찾아낸다. 이때서야 비로소 이들은 이 금괴를 찾기 위해서 잠시 모인 것뿐이지 그들이 한 패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시선을 통해서이지 여전히 어떤 대사도 없다. 임권택은 주의 깊게 금괴를 발견하는 순간 우두머리의 처분을 바라보는 대신 그들로 하여금 그저 금괴만을 탐욕스럽게 바라보게 한다. 그건 이들 사이에 우두머리가 없다는 뜻이다. 시선을 잡아당기는 힘. 하지만 그다음이 문제가 될 것이다. 그들은 각자 모였지만 각자 헤어질 수는 없다. 왜냐하면 금괴를 각자의 몫에 따라 아직 분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여섯 명이고 자동차는 다섯 명이 탈 수 있을 뿐이다. 그러자 한 사내( 장동휘 )가 제안한다. 자, 여기서 누구 한 명이 내려야 할지를 카드로 결정하지. 우리는 장르 영화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음을 잊으면 안 된다. (장르의 약속에 따라) 여기서 내리는 단 한 명이 금괴를 차지할 것이며, (스타의 법칙에 따라) 내리는 사람은 장동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그 내기의 쇼트를 찍지 않았다. 빈 쇼트의 술래잡기. 할리우드가 발명한 천재적인 빈칸. 임권택의 고전적인 배움의 편집. 여기서 각자의 계열은 그대로 유지되면서 오로지 동선만 활동하기 시작한다. 임권택은 이 대사의 쇼트에서 한밤중에 자동차가 달리는 장면을 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이 한 쇼트가 빠지면서 누가 이겼는지 혹은 졌는지, 누가 내렸는지 남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 대신 금괴를 차지한 자동차는 황급하게 달려가다가 길목에서 기다리던 누군가에 의해서 폭발하고 만다. 여기까지가 이 영화의 첫 번째 시퀀스이다. 그리고 거의 말이 없는 이 도입부는 (다소 놀랍게도) 영화 전체의 6분의 1에 해당한다. < 그 여자를 쫓아라 >는 이상할 정도로 균형 감각을 잃은 영화이다. 이 위태로운 균형이 미학적으로 의도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결국은 그러해야 한다, 는 연출의 결론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작한 영화는 내내 이 간극을 줄일 생각이 없다. 폭발로 인해 시체를 분간할 수 없는 그 여섯 명 속에 아버지 민충식이 포함되어 있었고 홍콩에서 귀국한 딸 아미는 아버지의 생사를 놓고 그 행방을 찾아 나선다. 계속해서 아미를 위협하며 그녀를 암살하려는 악당들이 나타나고 그때마다 아미를 구하려는 남 형사가 개입한다. 한편으로는 아미와 남 형사의 (감정적인) 간격을 좁혀들어 오면서 다른 한편으로 아버지 민충식은 점점 오리무중이 되어간다. 한쪽은 가까워지고 다른 한쪽은 점점 뒤로 물러난다. 아미는 두 번 아버지와 보낸 시간을 떠올린다. (flash_back) 한 번은 범죄자들을 불러들인 다음 금괴와 함께 아버지가 사라졌다는 경찰의 조사 결과를 들으면서 자신이 돈 가방을 들고 집을 떠나 홍콩으로 가던 날이다. 그때 아버지는 아미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현금으로 바꾼 가방을 건네면서 “아버지는 돈이 필요 없는 사람”이라는 말을 건넨다. 다른 한 번은 커튼 뒤에 숨은 누군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10센티 빗나가게 총을 쏘아 그녀를 덮치려던 사내를 살해한 현장에서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때 아버지는 그저 아무렇게나 허공에 던진 맥주 캔을 빠짐없이 명중시킨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사격술을 가르쳐준다. 이 두 개의 에피소드는 몹시 이상해서 아미의 아버지 민충식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심중조차 헤아릴 수 없게 만든다. 지금은 (다시 한 번 당신을 환기시키지만) 1970년이다. 국내에서 총기는 불법 소지이며 영국령이었던 홍콩에서 총기를 소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왜 아미에게 사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한 가지 더. 그런데 왜 아미는 홍콩에 간 것일까. 그녀는 거기서 무엇을 한 것일까. 임권택 은 미스터리 장르를 불합리한 세계라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그가 지나칠 정도로 역사의 무게와 자본의 운동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상식적이며 합리적인 세계 안에 사람들이 던져져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무자비하게 어떤 합법칙성의 규칙에 따라 부서져 가는 것을 수없이 보아왔다. 여기에는 슬픔도 동정도 없다.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의 잔인한 동어반복. 임권택은 영화와 현실 세계 사이의 거리가 아주 가깝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더 좋다고 믿는다. 그것은 단순하게 세계를 재현하려는 방식으로서의 리얼리즘에 대한 믿음이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그것만이 허구에 불과한 자기 영화의 이야기를 보증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자발적으로 거의 불투명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희미하게 보이는 관계 속으로 빠져든다. 마치 안개와도 같은 상황. 이 세계에는 어떤 비밀이 있으며 그건 끝내 밝혀져서는 안 된다는 약속을 지키기라도 해야 하는 것만 같다. < 그 여자를 쫓아라 >를 둘러싼 것은 아무리 사방을 둘러보아도 초점을 놓친 것만 같은 그 희미함이다. 어쩌면 이것은 임권택이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응하는 한 방식일 지도 모른다. 자기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잃어버린 관심. 아무것도 바라보아야 할 대상이 아닐 때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력을 잃어가는 자발적인 포기.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해요, 그저 영화를 만들고 있을 뿐이에요. 냉전 체제하에서 묵묵히 자기 임무를 수행하기라도 하듯이 어떤 불평도 없이 영화를 만들어나가는 감독. 하지만 지금 그가 만들고 있는 이야기는 아무 것도 모르는 딸을 데리고 10억 원이나 하는 금괴를 들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려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이수근이라는 그림자. 아주 희미한 그림자. 하지만 그때 <그 여자를 쫓아라>를 보면서 어떻게 일 년 전의 그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떠오르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이 영화는 모른 척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마치 자기 자신이 (존 르 카레의 소설 속의) 앨릭 리머스같은 태도를 취한다고나 할까. 희미해지는 시야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그렇게 괴상해지는 것은 이야기가 절반을 지날 때이다. 아버지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찾아가던 아미는 전문 내기 도박꾼들이 모이는 (이른바) ‘하우스’를 방문한다. 여기서 한눈에 사기도박을 알아채고 비밀을 밝힌 다음 아미는 마담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물론 마담은 그녀에게 알려줄 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는다. 마담은 아미가 아버지와 함께 공모하여 마치 그녀도 행방을 모르는 척하면서 진정한 행방을 숨기기 위해서 일부러 제 발로 ‘하우스’를 찾아왔다고 생각한다. 그때 남 형사가 악당들로부터 아미를 구해내고 ‘하우스’로부터 탈출한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심야에 탈출한 남 형사와 아미의 차를 뒤쫓아 검은 세단이 황급히 따라붙는다. 고문에서 깨어난 아미는 쫓기는 차 안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둘러보는데 갑자기 그녀가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의 장면(point_of view_shot)들이 모두 초점이 안 맞는다.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한다. “앞이 보이질 않아요” 거의 결정적인 한 마디. 나는 이 시기의 임권택 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신체 훼손의 테마가 등장하고 있음을 눈여겨본다. 종종 임권택의 주인공들은 망설임 없이 상대방에게 신뢰의 표현으로 망설임 없이 팔을 잘라 내주거나(<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원한의 두 꼽추 >) 혹은 눈이 먼다. (< 돌아온 왼손잡이 > < 애꾸눈 박 >) 이것은 액션 장르 영화의 규칙이 아니다. 물론 이 시기의 충무로 액션 활극 영화들은 과도할 정도로 홍콩 쇼 브라더즈 무협영화인 장철의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에 영향을 받았고 신체적인 불구가 되는 것이 마치 활극을 위한 주인공의 영웅적 시련을 거치는 정화 과정처럼 다루어졌다. 몇 번이나 반복된 질문에서 임권택 감독님은 약간 거리를 유지하면서 “거, 하늘을 날고 하는 액션들은 전혀 동의할 수 없었지만 그 영화에 알 수 없는 힘이 넘쳐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죠. 그땐 영화 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 영화를 보고 왔으니까요”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주인공을 따라가는 영화에서 주인공의 눈이 멀면 단지 주인공의 일부 기능을 상실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화의 기능 일부를 손상당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영화는 매우 제한적으로만 활동하기 시작할 뿐만 아니라 주인공의 역할은 수동적인 상태에 놓이거나 누군가의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 나는 < 그 여자를 쫓아라 >가 < 서편제 >가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좀 더 까다로운 조건. 아미가 눈이 머는 이 시퀀스는 거의 정확하게 영화 절반에 해당한다. 이미 절반을 넘긴 이 영화에서 일직선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를 멈출 방법은 없으며 아미가 자신의 잃어버린 시력을 대신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익힐 수 있는 시간도 마찬가지로 부족하다. 영화에서 절반이란 애매한 시간이다. 히치콕이 < 사이코 >에서 절단시킨 이 이상한 시간. 게다가 아미는 지금 당장 수술을 받으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는데도 자신이 아버지를 찾는 일이 급하다는 이유를 들어서 그걸 거절한다. 우리는 즉각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만일 앞이 보이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만났을 때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대답은 정반대로 이루어져야 한다. 임권택 은 절반의 시간에 이르렀을 때 누구보다도 이제 아미가 아버지를 대면할 시간이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만큼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장르에서의 운명의 시간. 비밀은 밝혀질 것이고 조각난 정보들은 하나가 될 것이다. 하지만 아미는 그것을 미루려고 하는 중이다. 이때 이 대면에서 무언가 불균형한 사태가 발생할 것이다. 아미가 눈이 멀자 정작 그녀와 함께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어진다. 그녀는 더 이상 이동이 자유롭지 않고 또한 작은 동선조차 위험해진다. 게다가 그녀는 갑작스레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조그만 활동도 할 수 없다. <그녀를 쫓아라>는 액션 활극 영화이고 ‘그녀’ 아미는 시력을 잃고 거동조차 불편해진다. 사실상 이 영화에서 아미의 시력을 놓고 벌이는 게임의 시퀀스는 거의 없다. 이를테면 1968년 6월 28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 어두워질 때까지 >에서 장님 오드리 헵번은 해가 진 다음 자신을 죽이려고 찾아온 악당을 물리치기 위해 모든 방의 불을 끄고 방의 배치를 알고 있는 자신의 지각을 이용하여 힘겹게 싸운다. 어둠 속에서 진행되는 기나긴 마지막 시퀀스. 하지만 임권택 은 그런 시퀀스를 제시할 생각이 전혀 없다. 혹은 불가능하다. 아미는 갑자기 눈이 멀었고 홍콩에서 돌아온 그녀가 머무는 곳은 거의 숨을 데가 없는 호텔 방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둘 중 하나이다. 그저 호텔에 머물면서 사건이 올바르게 돌아가기를 기다리거나 아니면 자신이 인질이 되어 이야기의 미끼가 되는 것이다. 미끼? 그렇다. 스스로 해결의 일부가 되어 이야기를 다른 차원으로 작동시키는 것이다. 구조의 일부가 된 희생. 차라리 음모의 잉여와도 같았던 그녀가 (끊임없이 아미의 주변 인물들은 그녀에게 홍콩에게 돌아가기를 권한다) 비로소 빈자리를 채우는 순간을 맞이해야 할 것이다. 구조 안에서 오작동하고 있던 자기의 올바른 역할. 이때 이야기는 갑자기 추락하듯이 마지막 시퀀스를 향해서 곤두박질친다. 물론 아미의 아버지는 죽지 않았으며 그녀가 끌려온 곳은 아버지 민충식의 지하실이다. 더없이 적절한 장소. 이제 비밀이 밝혀질 시간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는 왜 아미가 앞을 보지 못하는 수난을 선택했는지 알게 된다. 물론 아미는 이 결정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미처 알지 못하면서 내린 이 결정은 마치 이미 운명이 알고 있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히스테리로 반응하는 선택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미 알고 있는 운명. 나는 지금 장르 안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한 번 더 환기시키고 싶다. 아미는 자기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미 주어진 자기 자신의 자리에 대한 혐오를 표현하는 중이다. 이때 아미는 앞을 보지 못하면서 자기의 주체를 포기한 채 오로지 수동적인 자리에서 어쩔 줄을 모른다. 거기서부터 약간 줄거리를 더듬어보자. 아버지 민충식은 금괴를 들고 서해안을 거쳐 북한으로 갈 계획이다. 그는 자신이 모은 범죄자들을 모두 죽였을 뿐만 아니라 아미를 데려온 수행자들도 죽인다. 이때 민충식은 간첩이 아니라는 사실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그는 금괴를 찾는 임무를 가지고 북한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자기 힘으로 가까스로 찾은 금괴를 들고 북한으로 올라갈 생각인 것이다. 여기서 미처 생각지 않았던 장면이 아미와 민충식 사이를 새롭게 매개한다. 사건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이야기.(flash_back) 일제 식민지 강점하에서 민충식은 독립운동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일본군에 체포된 다음 동지 박만수를 밀고하고 살아남는다. 이때 박만수의 갓난아기인 딸이 그의 시신 곁에서 울고 있고 민충식은 “속죄의 뜻으로 길러”야 한다고 결심한다. 물론 갓난아기인 그 딸이 아미이다. 민충식과 함께 살아남아 회사를 경영하는 김 사장은 함께 북으로 올라가자는 요구에 거절하지 못하면서 계속 “이 돈이면 외국에 가서도 살 수 있는데”라고 조심스럽게 말하자 민충식은 단호하게 대답한다. “자네는 영웅이 되고 싶지 않나?” 민충식은 영웅이 되고 싶어서 북한에 가고 싶어 한다. ‘인민영웅’이 된다는 것. 우리는 한국 근대사 안에서 이루어진 충무로 장르영화의 규칙에 따라 민충식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 민충식은 좌익계 독립운동의 노선을 따랐을 것이며 한국전쟁 중에 휴전이 되면서 북한에 올라가지 못하고 남한에 남아 머물면서 언제든지 ‘귀환’할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남한에서의 민충식은 (그의 직업이 무언지는 설명이 없지만) 사회적인 성공을 거두어 큰 부를 축적했으며 (그는 별장에 가까운 집에 살고 있다) 남한에서 오로지 아미만을 키우면서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 (그는 어떤 가족도 없다) 민충식은 전형적인 부르주아의 삶을 살고 있는 중이다. 그런 그가 단지 “영웅이 되기” 위해서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북한에 가고 싶어 한다. 민충식은 완전히 모순된 목표를 향해 접근하는 중이다. 우리가 민충식을 이해할 수 없는 만큼 이수근을 1969년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둘 사이의 우울한 공명현상. 이때 임권택 이 여기서 수행하는 연출의 목표는 민충식과 아미의 대면을 최대한 미루는 것이다. 아미는 이미 민충식의 수중에 들어왔고 민충식은 김 사장과 함께 금괴를 영구차에 실은 다음 서해로 향할 때까지도 눈앞에 있는 아미에게 자신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는다. 반대로 실려 가는 아미는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 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누군지 알지 못한다. 아미가 자기를 영구차에 실어 데려가는 사람이 아버지 민충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그 차를 가로막고 나선 남 형사와 그의 동료의 차와 카 체이스를 벌이는 순간 내뱉는 욕설의 음성 때문이다. 아버지의 욕설. 그건 이제까지 아미의 기억 속에서 항상 다정하고 온화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아니다. 보지 못하는 아미가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 그때 아버지는 같은 목소리로 두 인물이 된다. 여기에는 찢어진 아버지, 서로 다른 아버지, 두 명의 아버지가 분간할 수 없게 희미한 모습으로 아미의 눈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민충식을 보지만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아마 이보다 더 장르 안에서 이중간첩에 대한 창백한 두려움을 나타내는 1970년 그해 영화의 순간은 달리 없을 것이다. 아버지에게 조준하기 임권택 은 이 순간을 좀 더 거북하게 만든다. 거북하게? 그렇게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 남 형사가 몰고 온 자동차를 피해 달아나던 영구차는 탈선해서 시냇가에 빠진다. 그런 다음 민충식과 남 형사가 그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 총격전을 벌이다가 한 자루를 시냇가에 떨어트리고 난 다음 남은 한 자루를 놓고 ‘주거니 받거니’ 대결을 벌인다. 주인을 옮겨가는 총의 운동. 전형적인 서부극의 컨벤션. 어쩔 수 없이 여기서 임권택은 안소니 만의 영화를 품고 있다는 감상이 떠오른다. 나는 좀 더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를 느낀다. 아미는 차가 시냇가에 처박힐 때까지 정확하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때 민충식과 함께 북한으로 가려던 김 사장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아미에게 비밀을 털어놓는다. “미안하다, 아미야. 저놈은 네 아비가 아니다. 민가 놈은 네 아버지를 죽인 원수다” 총을 놓고 싸우느라 잠시 잊어버린 아미는 차에서 천천히 걸어 나와 민충식과 남 형사를 향해 걸어가다가 시냇가에 던져져 우연히 발에 밟힌 총을 들어서 그들을 향해 겨눈다. 그때 그녀가 겨누는 사람은 (당연히!) 남 형사가 아니라 아버지 민충식이다. 이제까지 떠돌던 임권택 의 의도는 비로소 도착한다. 민충식은 아미를 버리지 않고 기른 유일한 사람이다. 그가 아미의 아버지를 배신했지만 자신의 배신에 대해서 민충식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이를 키우겠다는 말에 깜짝 놀란 김 사장의 반문에 “속죄라도 해야지”라는 대답을 하는 것이다. 긴 세월 동안 여기에 어떤 다른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아미는 아버지에게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있고 민충식은 아버지로서의 의무 이외의 어떤 것도 아미에게 요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지막 순간 아미에게 두 가지 요구의 명령이 내려진다. 하나는 어떤 조건 없이 매번 아미를 위기에서 구해주면서 그녀가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남 형사가 지금 민충식의 총구 아래 있다는 것이다. 앞선 한 발은 빗나갔지만 이번에는 명중할 것이다. 지금 당장 결정하지 않으면 남 형사는 그 총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김 사장이 좀 전에 알려준 대로 민충식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다. 하지만 그녀의 결정을 방해하는 것은 물론 민충식이 이제까지 아미를 키워준 아버지라는 사실이다. 아미는 지금 당장, 아주 빠른 시간 내에, 미처 망설일 틈도 없이, 결정해야 한다. 여기서 아미의 곤궁과 임권택 의 그것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아미는 두 개의 층위에서 결정을 망설이고 있다. 하나는 사랑하는 사람이냐, 사랑했던 사람이냐, 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김 사장의 말을 믿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아미는 장르 안에서만 작동하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임권택으로 옮겨가면 질문은 까다로워진다. 그때 이 곤궁은 정확하게 아미와 반대의 차원에서 오작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임권택이 저항감을 느끼는 것은 민충식이 또 다른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미가 민충식을 쏘는 것은 이제까지 자기를 길러준 아버지를 부정하는 행위이다. 이때 그런 행위를 해도 괜찮은가, 라는 질문은 도덕적이지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결정을 내려버리면 윤리적인 결정이 되는 곤궁에 떨어진다. 도덕과 윤리 사이의 간극. 이때 임권택의 입장에서 아미가 민충식을 총으로 쏘아서 아버지의 죽음을 선택했을 때 얻는 이득에서 남 형사를 구하는 것은 철저하게 부차적인 자리로 물러난다. 본 적도 없는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서 방아쇠를 당겨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기른 아버지를 위해서 포기해야 할 것인가. 이때 아버지란 무엇인가. 두 명의 아버지. 아버지는 딸의 첫 번째 사랑의 (불가능한) 대상이자 욕망의 전술을 기입하는 (주인으로서의) 타자이다. 약간 따분하지만 비유를 가져와야 할 것 같다. 나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아미의 두 개의 회상 속에서(flash_back) 하나가 그녀에게 사격을 가르쳐준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정작 이 순간이 올 때까지 아미는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총을 쏜 적이 없다. 그리고 마침내 총을 쏘아야 할 순간 아미는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 아이러니한 설정. 장르 영화 안에서 총을 남근에 비유하는 것은 거의 클리셰에 가까운 해석이다. 하지만 이 상투적인 비유가 여기서 이상하게 뒤틀리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민충식은 아미를 아들로 키우고 싶어 한다. 혹은 아들의 기표를 부여한다. 그 비유를 고스란히 이어받으면서 약간 반격하듯이 반문을 하고 싶다. 만일 아미가 여기서 여자가 아니라 남자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물론 가장 바보 같은 대답은 남 형사가 아미를 도와줄리 없다는 것이다. 그 대답은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그래도 남 형사는 아미를 도와줄 것이다. 정말? 물론이다. 왜냐하면 남 형사는 연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으로 월북하려는 민충식을 추적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당신의 오해가 핵심이다. 아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전체 이야기를 덮어씌우면서 이야기의 논점을 흐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대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총은 아미가 끝내 아들이 되지 못하는 것을 증명하는 기표이다. 그녀는 남근을 부여받았지만 그걸 사용하지 않으며 또한 사용할 줄 모른다. 그렇다면 왜 이야기의 논점을 흐릿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던 것일까. 임권택은 어떻게 해서든 이 영화가 북한으로 월북하는 이야기라는 사실을 피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 그 여자를 쫓아라 > 를 보았을 때 첫 인상은 마치 아미와 남 형사의 로맨스 활극처럼 보일 정도이다. 위장하는 주인 기표. 하지만 우리는 경우의 수를 모두 셈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가장 이상한 계산이 하나 더 남아있다. 쏘는 대신 쏘지 않는 것을 선택하는 것과 달리 처음부터 쏠 생각이 없는 결정이 하나 더 있다. 이 순간 아미가 가진 곤궁과 달리 임권택을 갑자기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데려간다. 그것은 북한에 아미를 데려가려는 민충식을 긍정하는 정치적 제스처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갑자기 음산한 그림자가 떠돌기 시작한다. 민충식의 죽음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보자. 그런 다음 이 모든 기괴한 수익과 손실의 계산 안에서 벌어진 활동을 한 자리에 모아보자. 임권택 은 이 짧은 순간의 셈이 얼마나 복잡한 것이지를 알아챈 다음 그 결정적인 순간을 비껴간다. 어떻게?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그 셈을 치를 역할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린다. 그저 아미는 남근의 기표를 손에 들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녀가 이 영화에서 한 역할의 사실상의 전부이다. 마치 자기 차례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뒤이어 한발 늦게 도착한 남 형사의 동료는 자기 기회를 놓치지 않고 민충식을 총으로 쏘아 쓰러트린다. 임권택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쉰 다음 다시 장르의 마무리 안으로 돌아간다. 사랑하는 딸 아미의 품에 안긴 아버지 민충식은 자신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고 아미는 기다렸다는 듯이 기른 아버지도 아버지라는 말로 안심을 시키며 그가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와준다. < 그 여자를 쫓아라 >는 분명히 1970년이라는 상황의 영화이지만 임권택 은 자기와의 사이에 놓인 긴장을 피해가기 위하여 장르의 장치 안으로 들어간 다음 영화를 결정 불가능한 지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이것이 보기에 따라서는 회색의 안갯속으로 들어간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임권택이 원하는 것이다. 그는 이수근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알지는 못할망정 (그때 누가 그 사건의 내막을 모두 알 수 있었겠는가) 무엇이 다가오는지를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수근은 남한에서 모든 걸 얻었다. 새로운 아내. 새로운 가정. 새로운 집. 새로운 삶. 새로운 일. 하지만 그는 여기를 다시 떠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실패했다. 그 곁에 민충식을 가져다 놓고 싶다. 민충식은 남한에서 모든 걸 얻었다. 새로운 좋은 집을 가졌고 자본주의 남한에서 별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끝내 어떤 새로운 가족도 구하지 않았다. 그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으며 그저 (남의) 딸 아미와 사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럼에도 그는 북한에 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실패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임권택의 어떤 계략을 읽는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목표로 하는지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렵다. 여기서 한 걸음을 잘못 내디디면 소설이 시작된다. 다만 한 가지는 말할 수 있다. 임권택은 연출의 계략을 동원해서 성공적으로 곤궁을 빠져나왔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직 1970년은 끝나지 않았다. 혹은 막 박정희의 70년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시작. (계속) 아직 남은 이야기. 이수근 사건에 대한 후일담. 1980년대 말부터 지속적인 의문 제기 과정 속에서 일부 중앙정보국 관리들의 증언을 통하여 이수근은 위장 귀순한 것이 아니며 지나친 중앙정보국의 감시와 북한에 두고 안 가족들의 안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제3국으로 다시 망명할 계획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만일 그가 다시 북한에 돌아갈 생각이었다면 홍콩에서 캄보디아로 경유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증언에 따르면 이수근은 제3국에 가서 남북한 체제 모두를 비판하는 증언 활동을 할 계획이었으며 이에 당황한 중앙정보국이 그를 이중간첩 사건으로 조작했다는 것이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관련자 증언 및 관련 자료 재검토를 통해 2006년 12월 “중앙정보부가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조작 처형한 것으로 판단하며 이에 피해자들과 유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위해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과 법원에서의 재심 심판을 요청”한다고 권고하였다. 이에 2008년 12월 19일 서울고등법원은 “이수근을 위장 간첩으로 판단할 근거가 없다”고 판단하고 21년간 감옥 구금을 한 조카 배경옥에게 무죄판결을 내렸다. 이것이 우리의 근대사이다.(계속) 1970년 86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한국영화사 각본 나한봉 촬영 이문백 조명 정경희 편집 장현수 음악 황문평 김희라 윤정희 장동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