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 감독
- 이강현
- 제작년도
- 2010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는 가능한 문제일까? 사사로운 기분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지면에 어울리지 않는 난데없고 거창한 질문이다. 하지만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치는 이 시점에 짚어볼 만한, 그리고 한국 독립영화의 관객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불투명한 질문이라고 느낀다. 대체 2020년대는 무엇일까? 2010년대를 여는 첫해에 낯설고도 특별한 다큐멘터리 < 보라 >(2010)를 공개한 이강현 감독은 2010년대의 마지막 해에 낯설고 특별한 극영화 < 얼굴들 >(2017)을 개봉한다. 개봉 당시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 영화는 2023년 3월에 사망한 이강현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그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미완의 기획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얼굴들>이 개봉한 이듬해 세계는 대규모 전염병이 일으킨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통과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도래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전면 봉쇄, 흰 마스크가 표상하는 대면의 불가능성과 접촉 금지는 우리를 불투명한 얼굴(들)과 비대면의 세계로 이끌었다. 텅 빈 영화관과 차단된 연결. 전염병의 유행은 수많은 얼굴을 차단하는 형태로 세계를 재구성했다. 한 영화감독의 때 이른 죽음과 전 세계를 뒤흔든 전염병 사태는 물론 서로 무관한 사건이다. 하지만 우연히 맞물린 두 사건을 겹쳐두는 데서 2020년대 한국 독립영화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은 것의 틈새가 있다. 그것은 얼굴이다. 이강현이 포착한 ‘얼굴들’과 전염병이 봉쇄하고 차단한 ‘얼굴(들)’을 몽타주하는 것은, 영화 속의 얼굴이라는 공통의 기반이 무너진 시대의 표상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마련할 수 있다는 가설을 소환한다. 세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하고 미스터리한 대상이 되었다. 영화가 여전히 얼굴과 또 다른 얼굴을 결합하는 것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장치라면, 두 얼굴을 결합할 수 없는 시대의 영화는 무엇을 표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한낮의 공원에서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풍경의 변화를 묘사하는 손구용 의 < 공원에서 >는 인간의 얼굴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마치 곤충학자 같은 시선으로 비인간적이고 비인칭적인 장소의 단면을 소묘한다.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서 시집을 읽고, 한 남자는 나무 근처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와 배회는 명확한 목적을 갖는 행위로 결정되지 않고 끝없이 지연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시집을 읽고 나무 근처를 움직인다. 공원에는 빛이 드리운 잔디밭과 나무, 물을 내뿜는 분수, 돌아다니는 고양이,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이 있다. 영화는 장면들 사이에 오규원의 시 「뜰의 호흡」의 텍스트를 삽입한다. 얼핏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공원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단면을 무작위적으로 이어 붙이는 듯 보인다. 영화의 카메라는 엇비슷한 몇몇 장면의 연쇄로 세계를 정밀하게 포착하는데, 미묘하게도 연속된 장면들이 영화에 도입하는 효과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눈에 비치는 세계의 불확실성을 덧씌운다. 카메라는 정밀하게 단면을 포착하지만 그럴수록 영화가 지각하는 세계의 총합은 모호해진다. 관객은 장면의 구체적인 세부를 하나씩 지켜볼수록 카메라 앞에 놓인 공원이 어떤 공간적 구조로 이루어진 것인지, 장면과 장면이 어떤 시간 관계로 접속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까다로워진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숏은 그 자체로 투명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다른 모든 숏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모호한 비결정의 상태에 위치한다. 세계는 한없이 열린 미확정적인 상태로 팽창하는데, 팽창하는 시공간은 물리적으로 닫혀 있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정작 어느 것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손구용은 다큐멘터리적인 상상의 세계라는 형용 모순의 가능성을 발명한 것 같다. <공원에서>는 오후의 공원이라는 일상적 시공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단순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들을 반복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배치해 방향감각을 상실한 영화적 시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추상적 실천이기도 하다. 정독도서관 전경이라는 구체적 현실은 영화가 새롭게 창출한 허구적 질서 속에서 픽션화된다. 영화는 현실의 정돈된 질서를 훼손하고 현실의 단면을 프레임 안에 집어삼킨다. <공원에서>의 허구적 프레임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흉한 구도가, 현실의 기록과 추상적 형상이, 빛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이, 문학의 문장과 영화의 화면이, 물리적으로 선행하는 시간과 감각적으로 멈춰 있는 시간이 공존한다. 장면이 하나씩 덧붙여질수록 <공원에서>의 고정된 지각은 거듭해서 위태로워진다. 화면에 담기는 풍경은 카메라에 포착된 장소의 이미지이지만, 물이 튀기는 수면을 가까이에서 찍은 장면처럼 구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이미지의 한 단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창안하는 공간은 깊이감이 부여된 실제 공간이지만, 구름이 지나가는 흑백의 하늘을 찍은 장면처럼 깊이가 제거된 모노크롬의 평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인 분류를 따르자면 이 영화는 세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에 속하지만,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업은 아니다. 손구용은 반복된 숏의 조합 아래서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행위를 지속하는 세계를 창조한다. <공원에서>는 일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장면을 조각내어 배열함으로써 한없이 느리게 지속되는, 마치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직면하게 한다. 영상 매체인 영화의 시간은 불가피하게 장면 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인물의 행위와 공원 전경의 총합은 달라지지 않는다. 흐르는 물과 움직이는 빛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장면은 계속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질문은 영화의 근원적인 속성으로 향한다. 화면의 움직임에 기반한 영화는 정말 변화하는 시간을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얼굴 없는 영화는 한 뼘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를 지우고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던 또 다른 규칙의 영화를 창조하는 작업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공원에서>의 매혹은 단지 구조적이고 개념적인 영화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측면에만 달려 있지 않다. 이 영화는 영화적 프레임 안에서 재구성된 세계의 풍경을 눈으로 보게 만들고, 세계의 소음을 귀로 듣게 하는 지극히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기서 이미지를 보고 사운드를 들으며 영화의 가장 기초적인 실천을 생경하게 다시 마주한다. 이 영화는 얼굴이라는 공동의 기반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영화가 지탱할 수 있는 장소가 감각적 공동체의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환기한다. 한국 독립영화의 2020년대가 얼굴의 투명한 결합을 상실한 비대면의 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얼굴이 아닌 다른 매개로 영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몸짓을 발명할 수밖에 없다. <공원에서>는 인간 중심적 서사의 습관이 달라붙은 장면을 활용하는 동시에 공원 곳곳에서 생겨나는 비인간적인 얼굴들의 생경한 표정을 나란히 배열한다. 이로 인해 영화가 다루는 얼굴과 장소의 초점은 다수의 형상으로 분리되고 인간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의 질서는 무너진다. 숏이 창출하는 순열과 조합의 수학적이고 감각적인 질서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손구용은 단 하나의 현실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리지도 않고, 극단적 감각으로 채워진 현실이 카메라 앞에 존재한다고 강변하지도 않으며 세계에 대한 지각적 반응을 매 순간 조정하고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비인격적이고 비인칭적인 시각을 매개로 인간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한다. 카메라와 풍경을 매개로 지켜본 시각에서 공원 속 인간의 표상은 마치 영화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모습처럼 낯설어진다. <공원에서>는 한 편의 영화가 단독적인 얼굴과 얼굴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풍경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허구적 공간 위에 배합하는 것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혹은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손구용은 인간중심적 감각에서 이탈한 낯선 얼굴들의 결합을 통해 불투명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영화의 몸짓을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의 수단을 동원해 인간적인 얼굴의 특권을 무너뜨린다. 나는 작년에 공개된 한국영화 가운데 정재훈 의 < 에스퍼의 빛 >(2024)과 더불어 <공원에서>가 보고 듣는 감각의 경험을 낯설게 재배치하는 얼굴 없는 영화의 연대기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이 영화들로부터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를 다시 가늠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
고(故) 이강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라>는 제조공장에서 현장보건관리를 받는 과정을 차근차근 기록한다.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르면 상시고용 50인 이상 300인 이하 사업장은 3개월에 한 번씩 보건관리를 받도록 되어 있다. 영화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관점을 따라가기보다는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병원>(1970), <내셔널 갤러리>(2014), <시티홀>(2020) 등을 만든 프레드릭 와이즈먼 감독처럼 시스템이 굴러가는 과정을 일정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인터뷰 장면이 서너 차례 등장하지만 제작진이 직접적으로 사건에 참여하거나 등장인물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상황은 전혀 그려지지 않는다. 스타일적으로도 거의 모든 장면에서 롱쇼트나 풀쇼트를 유지한다. 시스템에 관계하는 인간과 비인간 요소 모두를 고르게 관찰하려는, 휴머니즘적이지 않은 태도는 역설적으로 노동 시스템과 그 속에서 만들어진 인간의 삶의 고통을 지근거리에서 감각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그 거리는 피부 위의 보라색 멍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정도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 기법적인 클로즈업은 사용되지 않지만 시스템 내부와 고통의 지속시간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비유적 혹은 사후적 클로즈업을 체험하게 된다. 시스템 관찰은 당연하게도 관리 및 운영 체제를 돌아가게 만드는 다양한 역할과 위치의 사람들을 포함한다. 노동자, 안전보건을 담당하는 회사 관리직과 사원, 산업의학 전문의와 연구자, 산업안전보건감독관, 노조활동가, 관련 부서 행정 공무원 등이 그들이다. 영화는 사이사이에 1980년대 초에 석면을 다루는 공장에서 단 2년 일했을 뿐인데도 그 여파로 평생 폐병을 앓고 있는 나이 든 노동자의 인터뷰와 한국산업안전공단에서 주관한 한국타이어공장 역학조사 보고회를 삽입한다. 짧은 인터뷰에도 숨 쉬기 어려워하는 석면공장 노동자 그리고 노동자 사망사례와 공장의 유해환경 간에는 연관성이 없다고 발표하는 보고회의 배치는 인과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없이도 산업재해를 증명하고 인정받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석면처럼 오래전에는 그 유해성이 대중에게 밝혀지지 않거나 난청이나 근골격계 통증처럼 장기간에 걸쳐 유해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병증의 문제가 있다. 노동은 반복과 지속시간 속에 있는 것이기에 산업보건관리는 제조과정뿐 아니라 그의 일상과 일생을 심도 있게 추적관찰 해야 한다. 술과 담배는 강도 높은 긴 시간의 노동 스트레스와 관련이 있을 수 있지만 현실은 그저 몇 개의 문답으로 끝난다. 보건관리 전문의가 작업현장에서 노동 패턴과 유해환경을 관찰하며 애쓰지만 하루 몇 시간 관찰로 문제를 충분히 파악하기는 힘들다. 이강현 감독은 공장 전경을 보여줄 때는 롱쇼트로, 안전보건 감독관과 보건관리 전문의들이 노동자들에게 질문을 던질 때는 풀쇼트나 미디엄 쇼트로 거리를 두고 다큐멘터리를 진행한다. 심지어 철골이 노출되어 있는 공장은 때로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포착되기도 한다. 거기에 고통을 직접적으로 토로하는 노동자들은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 기법적인 클로즈업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청각적인 클로즈업이 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즉흥적으로 붐마이크와 휴대용 녹음기를 들이댔던 전형적인 미국 다이렉트 시네마의 장면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산업현장에서 대화를 나눌 때면 붐마이크가 한 프레임 안에 늘 등장하곤 한다. 등장인물들은 무선 마이크를 차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붐마이크를 사용해 상황의 대화를 포착한다. 그로 인해 어떤 상황에서도 갑자기 대화가 진행되어도 매우 선명하게 들린다. 공장의 소음들과 함께. 대부분의 경우 롱쇼트로 멀리서 포착하기 때문에 붐마이크가 보일 수밖에 없는데 영화는 이를 애써 치우거나 지우지 않는다. 노동자들과 산업관리 감독관이 나누는 대화, 관리직원과 보건 전문의가 나누는 대화들은 시스템을 돌아가게 만드는 행위자들이지만 또한 그것에 제약받는 이들임을 알게 해준다. 청각적 클로즈업뿐 아니라 친밀성에 있어서도 영화는 흥미로운 방식으로 클로즈업을 시도한다. 그것은 바로 경험에 대한 경험이다. 영화 중반 즈음에 노동자들이 보건관리를 위해 검사받는 자신들의 장면을 촬영한 영상을 강당에서 함께 감상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노동자들은 관객으로서 영화화된 자신의 신체를 경험한다. 여기서 관객은 이미 앞서 해당 장면을 보았기 때문에, 프레임 안의 프레임으로서 반복해서 이 장면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장면에 나오는 등장인물이 관객으로 경험하는 것을 함께 보게 된다. 따라서 이 장면은 경험에 대한 경험이다. 영화 속 스크린에서 난청이 있는 노동자는 귀가 잘 들리지 않아 의사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올 해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의사가 묻자 나이든 노동자는 “으응, 소주 두 병 정도 먹지”라고 대답한다. 이 장면에서 당사자를 비롯해 다른 노동자들은 자지러지게 웃는다. 사실 정보 차원에서 이 장면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장면이다. 이 장면은 관객에게도 당사자에게도 반복이다. 관객은 이미 앞서 본 장면이고, 당사자들은 일차적으로 자신들이 행한 것을 스크린 상에서 재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장면은 어떤 면에서 모든 영화 상영은 곧 ‘재연(re-enactment)’이며, 더 중요하게는 자신들의 신체가 어떻게 영화의 질료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한다. 붐마이크의 지속적 등장이 영화 만들기라는 노동을 각인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여러 영화사의 중요한 운동들을 떠올리게 된다. 자신의 신체와 일상을 영화의 질료로 내어준 오데사, 키이우, 하르키우, 모스크바의 시민들을 영화 생산과정에서 소외시키지 않기 위해 오프닝과 엔딩에 관객과 극장상영 과정 자체를 포함시킨 지가 베르토프의 < 카메라를 든 사나이 >(1929)의 실천 그리고 그러한 마르크스주의적 영화운동을 계승했던 제3 영화운동의 순간들 말이다. 특히 제3 영화 운동이 일어났던 1970년대 쿠바에서 훌리오 가르시아 에스피노자(Julio García Espinosa)는 ‘미완의 영화(imperfect cinema)’를 주장한 바 있다. 1960년대 탈식민적인 정치적 영화를 주장했던 남미의 영화감독과 이론가들은 형식적으로 보수적이고 제국주의적인 할리우드 영화를 제1 영화로, 미학적으로 혁신적이고 계급의식을 갖고 있지만 제국주의에 대해서는 무감각했던 유럽 영화를 제2 영화로, 탈식민적인 계급의식을 갖고 미학적 혁신을 꿈꾸는 영화를 제3 영화로 규정한다. 제3 영화의 변증법적인 실천 개념 중 하나로 주장된 ‘미완의 영화’는 텍스트 내적으로 완결되지 않는 영화를 뜻한다. 형식적으로든 서사적으로든 열려있는 영화는 언제나 상영과 그 이후의 토론을 통해 ‘매번’ 완성된다. 다시 말하면, 영화는 언제나 과정 중에 있다. 각기 다른 관객들은 동일한 영화를 매번 다르게 감상한다. 재연이 기원을 보존하려 하지만 동시에 반복을 통해 그 기원의 완벽한 보존이 불가능함을 제시하며 반복된 수행의 단독성을 주장하는 것처럼, ‘미완의 영화’ 개념에서 영화 상영은 매순간 반복될 때마다 참여자들이 그 상영의 의미를 결정짓고 따라서 반복된 상영은 단독성을 갖고 개별적 사건으로 의미화 된다. 독립영화 혹은 작은 영화라는 개념으로 범주화되었던 한국의 정치적 다큐멘터리는 제3 영화의 선언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제작되었던 정치적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노동현장을 중심으로 해서 구성되었고, 관객 역시 노동자 당사자들과 활동가들이었다. 대중을 타겟 관객으로 할 때조차도 일차적으로 영화를 시사하고 그 영화의 가치를 의미화하는 이들은 노동자 당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야기와 신체를 화면에서 보는 것이 익숙했다. 다큐멘터리 감독들은 대부분 자신을 활동가의 위치에 놓았고, 자신들이 스크린에 옮긴 이미지의 주체를 영화생산자-관객의 위치에서 소외시키지 않는 것이 윤리적 태도라 믿었다. <보라>에서 약 50초 동안 지속되는 이 롱테이크는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이제는 노동 현장을 다룬 많은 다큐멘터리들 역시 노동자 공동체에게만 소구되는 것을 넘어 일반 대중으로 관객층을 확장하고자 한다. 다큐멘터리가 화이트박스라 불리는 미술관 같은 극장 외의 다른 플랫폼에서 상영되면서 새로운 관객층이 형성되고 있다. 한편, 과거에 영상을 함께 공동제작하고 감상했던 노동자들의 공동체 혹은 노동조합은 예전만큼 공고하지 못하다. 그러한 가운데 삽입된 이 장면은 과거 노동 현장을 다룬 한국의 정치적 다큐멘터리들이 주요하게 상영되던 방식을 재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이 장면은 한국 노동 다큐멘터리 영화의 역사쓰기이자 관객층 변화에 대한 논평이 된다. 이 장면은 또한 개인적으로 고전 할리우드 영화인 < 설리반의 여행 >(프레스턴 스터지스, 1941)의 유명한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영화에 대한 영화인 <설리반의 여행>에서 유명한 코미디 영화감독인 존 설리반은 자신의 영화경력을 반성하며 가벼운 코미디보다는 현 시대를 보여주는 사실적인 민중의 모습을 그린 영화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떠돌이로 위장해 가난을 체험하려 하지만 줄곧 실패한다. 그러다 신분증을 빼앗기고 싸움에 휘말려 법정에서 6년의 중노동을 구형받는다. 그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하층민이 된다. 설리반은 강제 수용소에서 죄수들을 위한 영화 상영회에 참석하고, 수감자들이 고된 노동 후 디즈니 만화 <장난기 많은 플루토>(1934)를 보며 박장대소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깨달음을 얻은 설리반은 우여곡절 끝에 영화감독의 신분으로 돌아가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코미디를 만들며 꿈의 공장인 고전 할리우드 시스템을 재승인한다. 하지만 설리번은 <플루토>가 코미디라는 것 외에 중요한 것을 놓쳤다. 그 영화가 신체극이었다는 사실이다. 슬랩스틱의 과장된 그리고 때로는 폭력적인 신체 사용은 몸을 쓰는 노동자들이 그들 자신을 투영할 수 있게 만든다. 그 영화는 누구에게 말 거는가? 이 질문은 노동 영화에서 늘 중요한 쟁점이었다. <보라>에서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하는 몸’을 검사받는 장면을 보며 박장대소하는 장면은 <설리반의 여행>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며 즐거워하는 노동자들의 장면과 어떤 면에선 중첩된다. 노동자들은 그들 자신이 나오는 영화를 보고 충분히 즐거워할 수 있다. 그들의 삶을 다룬 영화들이 지루하고 음울할 것으로만 상정하는 것 역시 편견이다. 노동자들이 자신의 삶과 고통을 담은 영화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역시 편견이다. 노동하는 신체의 전시, ‘보라(고통의 색)’의 스펙터클은 그들 자신의 신체의 고통을 감각하게 하면서도 즐겁게 만든다. ‘보라’는 단순히 트라우마가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에게 있어 산업재해와 관련해 성찰하고 고민하고 행동해야할 지점이며 반복된 일상이다. 재연(재상영)을 통해 과거 사건의 당사자이자 목격자가 되는 노동자-관객, 그리고 그 목격자들을 바라보는 스크린 밖의 관객은 ‘보라’를 신체적으로 체험하는 동시에 그 이미지에 대해 성찰한다. 동문서답의 대답이 유발하는 웃음은 소음과 먼지, 유해화학물질 그리고 반복된 팔과 어깨의 사용으로 인한 병증과 고통, 즉 산업재해에 대한 인식을 경유한다. <보라>는 50인 이상 규모의 공장 노동자들로 시작해, 네트워크 서버 관리자, 딸기 농장의 노동자들, 취미 사진촬영이 전문가 수준에 이른 이들까지 오늘날 자본주의 노동의 양태를 기록한다. 영화는 농부와 제조공장 노동자들의 육체노동을 전시하고 가상 디지털 네트워크 역시 노동자들의 밤샘 노동을 통해 관리되고 있음을 보여주면서, 디지털 정보화의 시대에도 여전히 물질 노동이 비물질 노동을 떠받치고 있음을 드러낸다.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의 형태는 진화론적이거나 단절적인 방식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주류 산업이 서비스, 금융, 디지털 플랫폼 같은 비물질 노동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해서 근대적 형태의 공장 노동, 농장 노동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디지털 산업에서도 노동자 없이 컴퓨터와 가상시스템으로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근대적이고 전근대적인 노동의 형태들은 여전히 포스트포디즘 체제하에서도 공존한다. 그래서 전문적인 사진 취미처럼 놀이와 노동이 구분되지 않는 새로운 생산양식까지 치밀하게 최신의 변화를 포착하면서도, 감독은 여전히 지속되는 노동자들의 고통 받는 몸을 스크린에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로 표현한다. 이러한 강조가 과거의 생산양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다만 오늘날 지워지고 비가시화 되고 있지만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고유한 노동자의 몸을 역사 속에 기입하려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삶은 안간힘이다.”
한국 독립영화는 80년대 민주화운동 시기에 태동하였다. 서울영화집단과 서울영상집단, 민족영화연구소, 노동자뉴스제작단, 장산곶매와 같은 단체들은 소형영화, 작은영화, 민중영화와 같은 분류의 영화들을 내놓았다. ‘독립영화’라는 명칭이 PD(민중민주)와 NL(민족해방) 사이에서 나름대로 중립적인 용어였기 때문에 무난히 수용되었다는 견해 1) 가 있을 정도로, 초기 한국 독립영화는 반독재 투쟁 및 민주화운동과 결부되어 있었다. 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대통령 직선제가 도입되었고, 93년 김영삼의 문민정부가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와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연이어 들어서며 민주화운동은 완전한 결실을 맺은 것처럼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면의 그늘 또한 존재한다. 반독재투쟁이 한참이던 시기 촬영된 < 상계동 올림픽 >(1988)의 풍경은 < 그들만의 월드컵 >(2002)에서 다른 방식으로 반복되었다. 제도적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한국 사회는 경제, 노동, 인권, 소수자 등의 문제에서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IMF 외환위기 극복, 경제성장, 한류 등으로 되는, 소위 ‘국뽕 서사’의 이면에는 여전히 고통받는 이들이 놓여 있다. 외환위기 극복 이후의 일상적인 출근길, 희망과 낙관을 품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여전히 산재하는 문제들을 주목한 이강현의 < 파산의 기술記述 >(2006)과 같은 작품은 그것을 선구적으로 포착해내고 있다. 사진작가 홍진훤의 첫 다큐멘터리 작업이라 할 수 있는 < 멜팅 아이스크림 >(2021)은 그러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최신의 작업 중 하나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창고에서 ‘수해필림’이라고 적힌 의문의 필름 뭉치가 발견된다. 당시 현장을 기록하던 사진 집단들을 찾아가 이 필름의 흔적을 따라가며 복원을 시도한다.” 홍진훤의 기존 작업을 잘 모르는 관객들에게, 이 영화의 시놉시스는 과거의 사진을 복원하고자 하는 열망에 관한, 작가보다는 아키비스트의 지위를 지닌 이의 작업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영화는 수해를 입어 필름 위의 유광제가 녹아내릴 위기에 처한 사진들을 복원하는 한편, 사진을 찍었던 이들이 기억하는 당시에 관한 인터뷰를 담아낸다. 더 나아가, 홍진훤은 ‘미디어 참세상’ 아카이브에 있던 2000년대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기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 및 이주 노동자 투쟁 현장이 담긴 이미지를 포개어 놓는다. 사진에 담긴 ‘민주화운동’, 2000년대의 투쟁현장, 그리고 인터뷰와 사진 복원이 벌어지는 현재, 이 영화에는 세 개의 시간축이 공존하고 있다. 세 개의 시간축을 몽타주하는 <멜팅 아이스크림>은 “수해필름의 복원”이라는 말이 풍기는 뉘앙스와는 달리 민주화운동의 시간을 기념비적인 것으로 추켜세우지 않는다. 민주화운동 당시 각각 민족사진연구회, 사진통신, 사회사진연구소에서 활동했던 박승화, 서영걸, 이정용의 인터뷰는 민주화운동 시기의 영웅담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이야기는 어느 순간 ‘A컷’을 얻는 것에 몰두하게 된 자신과 동료들에 대한 성찰과 비판이다. 그들의 말을 빌리자면, “반독재투쟁이라는 추상적인 말”에 매몰된 민주화운동 속에서 계급과 경제의 문제는 뒤편으로 사라졌고, “반독재는 알지라도 경제는 모르는” 이들에 의해 IMF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는 가속화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영웅들이 대통령을 지내던 시기의 투쟁들은 맹렬하게 짓밟혔다. <멜팅 아이스크림>이 인용하는 2000년대 초중반의 투쟁 현장 푸티지들은 폭력과 욕설과 절규와 눈물로 가득하다. <멜팅 아이스크림>에서 복원되는 사진은 민주화운동 투사들의 영웅적인 모습이 담긴 A컷들이 아니다. 과거의 기록을 들춰보고 복원하려 할수록, 이미지는 필름에서 지워진다. 이미지가 지워진 필름은 그저 투명할 뿐이다. 영화의 인터뷰이들은 386세대의 민주화운동이 그러한 성질을 띠고 있음을 보여준다. 당시의 기록을 들춰볼수록 그것은 투명한 공백이 된다. 수해로 훼손된 필름은 녹아내린 물감이나 아이스크림처럼 이미지를 뭉개버린다. 비디오 캠코더와 저화질 디지털카메라로 촬영된 2000년대의 투쟁현장 또한 디지털 이미지의 픽셀이 그대로 노출되는 ‘깍두기 현상’으로 가득하다. 열화된 이미지들, 열화된 기록들은 필름에서 이미지가 지워지듯 공백으로 돌아간다. 홍진훤 감독은 촬영감독에게 김대중 대통령의 동상을 “최대한 이상하게”, “녹아내리듯 그리고 추락하듯” 찍어달라고 요청했다 말했다. 2) 과거의 영웅들이 담긴 이미지가 흘러내린 공백엔 신자유주의, 비정규직 차별, 우경화 등이 새겨진다. 2000년대의 투쟁현장이 담긴 푸티지들의 일그러진 영상은 영화 후반부로 향할수록 점점 선명한 이미지들로 채워진다. 이것은 민주화운동 영웅들의 이미지 밑에 잠들어 있던 공백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를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 공백은 현재까지도 진행되는, 당시와 같으면서 다른 투쟁을 일으킨다. 공백이었던 계급, 경제, 노동, 소수자의 문제는 2022년에도 여전히 산재해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 공백 위로 행인들의 모습이 담긴 슬로우모션과 다양한 이유로 투쟁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삽입한다. 이 음성은 2021년 하반기 총파업에서의 음성이다. 팬데믹 시기에 물류를 책임진 화물연대, 가장 큰 타격을 입었던 보건의료노조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공백을 채우는 새로운 투쟁으로 새로운 세계가 기록된다. 새로운 세계에서는 공백 없는 운동이 가능할까?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만, 촛불혁명을 거쳐온 지금 무언가 반복되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지난 5년간 투쟁현장을 기록하고 < 골목의 이야기 >(2016), < 피와 재 >(2016), < 례 >(2018) 등을 만들어온 다큐멘터리스트 권순현의 단편영화 < 농몽 >(2020)은 그러한 인상을 풀어놓는다. 이는 지난한 투쟁의 결과에 대한 반성과 소회라기보단 그 과정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을 토로하는 것에 가깝다. 권순현은 "‘현장’은 나를 통째로 집어삼켰다"며, "현기증 속에서 나는 그 어떤 사건도 그 어떤 사물의 위치도 제대로 그려낼 수 없었"고, "(지난) 세 편의 다큐멘터리는 모두 망향의 기록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3) <농몽>은 이 모든 것을 겪은 이후, 그리고 촛불혁명 이후 감독 스스로가 느낀 공허함에 관한 것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자기연민과 자기비하로 가득하다. 감독은 A, B, C라 명명되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꺼낸다. 함께 투쟁한 사람, 2008년 촛불시위를 제안한 사람,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 감독의 내레이션은 세 사람의 말과 그들과 나눴던 대화를 끌어온다. 촛불은 2008년 당시 20대였던 A의 ‘팔뚝질’을 대체하는 사회운동의 장신구일 수도, 더 큰 민주주의 같은 것을 꿈꾸었으나 자초한 논란으로 인해 실패해버린 B의 바람이 담긴 무언가일 수도 있다.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2016년의 촛불은 평화의 상징이었다는 것이다. 2016년 박근혜 퇴진 시위 당시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나선 이들은 이 시위가 무엇보다 '평화'시위일 것을 주장하며 기존의 운동권으로 불리던 이들이 전개하던 투쟁 방식에 반대한다. 그때의 '평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거제도 조선소의 투쟁을 기록하던 감독은 그곳에 위장취업할 것을 제안받지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하고 만다. 하지만 그는 위장취업에 실패한 것에 안도한다. 얼마 뒤 조선소에서 크레인 붕괴사고가 발생하고 노동자들이 죽거나 다쳤다. 그는 다시 한번 안도한다. C는 크레인 붕괴사고를 겪었다. 그의 트라우마 앞에서 감독은 안도할 수 없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폭력을 동원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폭력이 전도된 것임을 망각하는 것이다. 촛불을 들고 평화시위를 주장하며 거리에 나서는 행위는 투쟁하는 이들에 대한 연대임과 동시에 시위현장에서의 폭력을 시야에서 치워버리고자 하는 모순적인 행위다. 투쟁현장을 기록하던 감독이 느끼는 자기모순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농몽>은 투쟁현장과 방식에 대한 불쾌감과 반항, 혐오를 담은 영화가 아니다. 촛불혁명 이후의 회고담 같은 것은 더욱 아니다. 학생운동이 종말을 맞이하고 모든 것이 망해버리거나 끝나버린 것 같은 순간 현장으로 향한, 노동자도 운동가도 아닌 위치에 서있으면서 투쟁현장에 뛰어든 어떤 사람의, 다소 질척이는 자기고백이다. <농몽>이라는 자기고백은, 그 결은 조금 다르지만 <멜팅 아이스크림>이 보여준 공백 이후의 세계와 공명한다. 공백 이후의 세계, 한쪽에서는 승리의 서사를 써내려 가지만 다른 한쪽에선 항구적인 투쟁 속으로 사람들이 내던져지는 세계, 이 세계는 마치 모든 사람의 기력이 소진되길 기다리는 지옥인 것만 같다. 물론 두 영화가 그 지옥에 머물고자 하는 냉소에 파묻힌 작품이라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그러한 냉소를 딛고 일어나 희망찬 미래를 이야기하는 작품은 더더욱 아니다. <멜팅 아이스크림>과 <농몽>은 녹아내린 시대와 소진된 마음에 관한 솔직한 이야기들이며, 이 이야기들이야 말로 그 이후를 조금이나마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 1) Young-a Park, Unexpected aliances: Indiependent Filmmakers, the State, and the Film Industry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Stanford University Press, 2014, p.50(이도훈, "이름의 부재와 경험의 빈곤", 「독립영화」, 한국독립영화협회, 제49호, 2020에서 재인용). 2) 홍진훤, "서신교환: 장윤미X홍진훤, 「마테리알」, 7호, 마테리알, 2022, p.48. 3) 권순현, 「2021 독립영화 쇼케이스」, 한국독립영화협회, 2022, p.158~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