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워드
- 감독
- 박성범, 박성현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손병호, 권오중
1970년대 대중영화를 통해 관객에게 깊이 기억된 세 여성의 이름은 < 별들의 고향 >( 이장호 , 1974)의 경아, < 영자의 전성시대 >( 김호선 , 1975)의 영자, 그리고 < 겨울여자 >(김호선, 1977)의 이화다. 세 작품은 공히 소설로 먼저 성공을 거두고 영화로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다(<별들의 고향>과 <겨울여자>는 소설로 발간되기 전 신문에 연재된 바 있다). 1) 그리고 당대의 영화는 물론 1980년대까지 여성영화의 어떤 기준을 만들어냈다. 혹자는 호스티스 장르에 무슨 여성영화냐고 물을 테지만, 그건 1980년대의 변질된 장르에 들이댈 질문이다. 특히 <겨울여자>는 호스티스 장르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한 인식은 안타깝게도 당대의 대중영화를 경험하지 않은 채 당연히 그러리라고 짐작하는, 그리고 쉽사리 범주화하는 데서 기인한다. 세 영화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1970년대 여성의 어둡고 외면당한 부분을 대중적으로 각색한 경우이며, 비록 한계는 분명할지언정 당시 여성의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한다는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하다. 잘못된 선입견을 또 하나 말하자면 현재 관객들이 1970, 80년대 한국영화의 수준이 낮을 거라고 여긴다는 거다. 조금 유치한 영화에 “요즘이 1980년대도 아니고” 라는 반응하는 걸 볼 때마다 과연 그 시대의 영화를 제대로 경험했는지 의심스럽다. 표현 기법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런 걸 감안하지 않고 냉소와 비웃음으로 예전 영화를 보는 관객이 적지 않다. <겨울여자>도 그런 선입견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이 예상된다. 성우가 맡은 이화의 목소리, 순진한 건지 판단지 서지 않는 인물의 태도 등에 헛웃음을 터뜨릴 관객이 빤히 그려진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성공을 재연하려던 김호선과 당시의 제작진이 기울인 노력을 생각하면 억울한 일이다.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전성기에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원작을 바탕으로 윌리엄 포크너가 각본을 썼듯이, 한국에도 그런 자세로 영화를 대하던 때가 있었다. <겨울여자>의 원작은 조해일이며,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김호선과 호흡을 맞췄던 김승옥이 각본을 썼다. 본격적인 사운드트랙의 출발점인 <별들의 고향>의 음반이 큰 반응을 불러일으킨 터라 <겨울여자>도 이에 부응했다. 김승옥처럼 김호선과 다시 작업한 음악가 정성조는 영화의 흐름에 맞춰 음악을 구상했고, 조해일, 김승옥이 직접 작사에 참여한 노래들도 대중의 사랑을 얻었다. 전체적인 톤은 프란시스 레이 풍의 유러피안 경음악이었으나, 익숙한 고전음악과 오리지널 사운드를 영화 전체에 펼쳐놓은 것은 인정할 만한 시도였다. 김호선은 여자 주인공을 ‘갇힌 존재’로 파악했다. 철조망을 근경으로, 서울의 고급 주택가를 바라보는 시점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주택 중 하나의 계단을 오르면, 굳게 닫힌 철문 너머에 이화가 산다. 김호선은 그런 인상으로 이화의 공간을 그렸다. 그녀는 보호받고 있음과 동시에 폐쇄된 공간에 머무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러한 인상은 이후 영화의 전개 과정에서 중요한 전제 조건을 형성한다. 그녀가 어떻게 변하는가, 그것이 <겨울여자>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여고생 이화는 누군가가 보낸 편지를 엄마에게 ‘고발’한다. 그녀는 자신의 행실이 단정하지 못해 이런 일이 벌어졌다고 여기며, 편지를 보낸 누군가를 불편한 감정으로 대한다. 임예진 의 ‘진짜진짜 시리즈’ - < 진짜 진짜 잊지 마 >(1976), < 진짜 진짜 미안해 >(1976), < 진짜 진짜 좋아해 >(1977) - 가 나올 때임을 감안하면 이화의 태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혼자 뾰로퉁한 표정을 지으며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고민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영화는 그녀가 어떻게 자라 왔는지 드러낸다. 그런데 여기서 폐쇄성을 사회적인 의미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영화는 이화가 갇혀 있는 상황을 사회적인 조건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딸의 태도에 웃음을 지으며 ‘이런 편지는 혼자 간직하는 것이’라 일러두는 엄마의 태도에서 보듯, 이화가 지닌 도덕, 윤리관은 바깥에서 주어진 것이라기보다 그녀 스스로 지키고 세운다는 느낌을 준다. 그 시기의 다른 여성 영화와 비교해, 이화라는 인물에게 바깥 상황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대적으로 얕다. 이것은 이화라는 인물의 특성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가 제작된 시기 탓이기도 하다. 이화에게 영향을 끼치는 두 인물 – 요섭과 석기가 아버지와 맺는 관계는 사회적으로 읽을 여지가 다분하다. 요섭 부의 폭력성과 석기 부의 죽음은 1970년대의 사회정치적 특성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지만, 영화에 가해질 검열을 의식해 영화화 과정에서 삭제되었을 확률이 높다. 특히 이화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주는 석기의 경우, 그가 하는 대사의 많은 부분은 ‘묵음’으로 처리돼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없도록 처리되었다. 정학을 당했다는 부분에서는 소리가 거칠게 튀고, 강제로 징집을 당한 부분도 스스로 입대하는 것으로 알게끔 했다. 외출 중 교통사고로 죽은 것에도 의문사의 의혹이 끼어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원작에서 이화가 형이라고 부르며 따르던 광준이란 인물을 영화에서 아예 제거함으로써 그녀의 사회적 변신을 읽지 못하게 만들었다. 영화에서는 이화가 군인인 석기에게 보내는 편지에 “석기씨 덕분에 훌륭한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어요. 이 친구들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난 꼭 알아야 할 것을 모른 채 대학을 졸업하고 말았을 거에요”라고 쓰는 것이 다다. ‘꼭 알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영화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시대를 반영한 이러한 각색으로 인해, 원작에서 드러나는 이화의 수동성이 오히려 상쇄되고 그녀의 내면과 자립적인 부분이 두드러지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화의 청춘 시대가 몇몇 남자를 거치면서 전개된다는 점에서 <겨울여자>는 얼핏, 남자들 사이를 전전하는 여성을 그린 당대 여성영화와 별로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고등학생이었던 이화는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반에 이를 동안 요섭, 석기, 민이란 남자를 만나게 된다. 별장으로 초대한 요섭이 육체적으로 접근하자 당황한 그녀는 “이게 뭐예요”라고 말하며 뛰쳐나간다. 그 일로 상처를 입은 요섭은 자살하고, 이듬해 이화는 석기의 구애를 받아들인다. 운동권 학생이었던 그는 입대 후 죽음을 맞는다. 다시 이 년 뒤 이화는 고등학교 은사였던 민과 조우하는데, 이혼 후 혼자 살던 그는 이화의 등장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남자를 거치는 과정은 다를 게 없으나, 여성을 착취하는 남성은 이 영화에 없으며 영화 또한 그들의 시선 아래 이화를 두지 않는다. 거꾸로 영화는 이화의 시선으로 남성을 바라보는 형식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전개는 상당 부분 이화의 출신 계급과 상관이 있다. <별들의 고향>의 경아는 좋은 남자를 만나 아이를 키우고 싶었으나 육체적으로 착취당하고 벼려지는 과정을 반복한다. <영자의 전성시대>의 영자는 기술을 배워 돈을 벌고 싶었는데, 버스 안내원을 하다 팔을 잃은 뒤 뒷골목에서 몸을 팔며 살아간다. 그들에게 비극적 삶이 되풀이 되거나 비극적 삶에서 벗어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과 달리, 이화는 과잉 보호를 받으며 자랐으나 자기 삶의 결정권을 지닌 인물이다. 두 명의 남자가 맞는 죽음도 그녀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지 않는다. 그녀는 그것을 오히려 삶과 사회를 깨닫고 성숙해지는 계기로 삼는다. 기실 세 남자 - 미성숙한 요섭, 삶의 열정이 넘치지만 아직 젊은 석기, 그리고 상처를 맛보고 중년을 앞둔 민 – 의 구성은 이화의 내면이 점자 성숙해지는 단계를 은유하는 것 같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남자가 아닌 이화 자신이다. 이화는 과연 독립적인 여성인가. 최소한 이전의 여성영화에서 보던 편한 상대는 아니다. “난 남자가 곁에 없으면 잠시도 살 수가 없어요, 난 그래요. 난 그런 여자에요.“라던 경아는 요즘 여성 관객에게 ’속 터지는‘ 인물로 비칠 것이며, 남자들은 그런 경아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다 버린다. 이화는 그 시대의 영화가 꾀할 수 있는 나름의 방책이 아니었을까. <겨울여자>는 멜로드라마 장르의 특성 상 어쩔 수 없는 강요된 슬픔과 비극에 의존하지 않는다. 이화의 위대한 점은, 사랑의 상처로 인해 뒤로 후퇴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녀는 매번 더 큰 사랑의 힘을 얻어 앞으로 나아간다. 한국 멜로드라마로선 아주 드문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다. 웹을 둘러보다 한 관객이 ’<겨울여자>의 장르가 대체 뭔가요‘라고 질문한 것을 읽었다. 그만큼 전통적인 멜로와는 다른 영화다. 사실 <겨울여자>가 1970년대 관객에게 그렇게 사랑을 받았다는 게 신기한 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건 좀 이상한 멜로다. 세 남자와의 관계는 기능적으로 연결된 느낌이 강하다. 그녀가 새로운 관계로 진입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일종의 의식처럼 누드 신을 삽입한 것도 그러하다. 인물 사이에 깃든 애정의 촉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이야기인 것이다. 자신은 가부장제를 거부해 결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민의 재결합을 도모한다는 설정도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거기에서 역으로 이화의 정체를 더듬어야 할 것 같다. <겨울여자>는 세 남자와의 관계가 진행될 때마다 전혀 다른 톤으로 바뀌는 영화다. 흡사 세 편의 영화를 붙여놓은 듯하다. 그건 그 사이에 이화라는 인물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화는 성숙의 다른 이름이다. 그녀는 지속적인 성숙의 단계를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이화는 대담한 존재이며 자신이 믿는 바를 의심하지 않는다. 죽음과 상처에 주눅들지 않으며 남의 시선 같은 게 선택을 가로막지 못한다. 첫 외박을 한 다음 날, 이해심을 갖추었으나 목사로서 보수적인 인물인 아버지가 충고를 하려고 하자 이화는 “친구 집에서 자지 않았어요. 그렇다고 사람이 자면 안 되는 곳에서 잔 건 아니에요.”라고 답한다. 성인이 돼 만난 옛 선생이 친구가 되자고 해도 서슴지 않는다. 당황해 거리를 두려는 건 도리어 선생 쪽이다. 그녀는 윤리나 도덕을 따르기보다 진실을 발견해 직시하기를 원한다. 여기서 윤리나 도덕은 관습으로서의 의미를 지니는데, 인간다움을 최선의 길이라 생각하는 그녀에게 그건 때론 거추장스러운 존재다. 그런즉, 가족 이기주의를 이유로 결혼 제도에 거부감을 표현한다. 21세기의 관객의 시선으로 보기에, 이화는 빈 구석이 많은 인물이다. 그러나 요즘 만들어지는 한국영화의 여성과 비교해 봐도 그녀의 독립적인 기질은 신선하다. <겨울여자>가 한때 사랑받았던 옛날 영화가 아니라 여전히 흥미로운 텍스트인 건 그래서다. 1) 기록에 따르면 서울에서 세 영화가 거둔 관객의 수는 <별들의 고향>이 46만명, <영자의 전성시대>가 40만명, <겨울여자>가 58만명이다. 전산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때임을 감안하면 실제 관객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보인다. >> 겨울여자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나는 인간이며, 그것만으로도 비참하기에 충분하다 - 메난드로스 말할 곳을 찾다 인간이기에 그것만으로도 비참하다, 기원전 4세기 아테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말이다. 기원전부터 인생이 이랬으니, 우리는 안심해도 될지 모른다. 현대는? 미국의 ‘흑인’ 사회학자, 시카고학파의 프랭클린 프래지어(Franklin Frazier)는 이렇게 말했다. “(미국 문화 속에서) 살 만한 동기를 찾든지 죽든지.” 일단, 태어났다면 힘들다. 기본적으로 본인의 생로병사가 있고, 사랑하는 이들의 생로병사를 겪어내야 한다. 게다가 불평등, 부조리, 악의 승리, 차별, 미세 먼지, 양진호 같은 사람들……. 이제는 오래된 뉴스가 되었지만 브래드 피트가 제니퍼 애니스턴과 헤어지고 안젤리나 졸리와 ‘시끄러운’ 연애 중일 때였다. 그즈음 유명 잡지(<배니티 페어>라고 기억한다)가 애니스턴을 표지 모델로 실었다. 커버스토리의 제목은 “제가 외롭냐고요? 그래요! (Am I lonely? Yes!)” 그래, 나 당신들 생각처럼 외롭다, 그래서 어쩔래? 그런 말투 같았고, 나는 대중 매체가 잔인하다고 느꼈다. 누구나 슬퍼할 상황에다, 유명 여배우만이 겪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녀는 누구에게 고민을 말했을까? 인생에는, 배타적인 연인 관계가 아니더라도 사회로부터 혹은 구체적인 누군가에게 따돌림당하고 망신스러운 기분, 어딘가에 하소연하기에도 자존심 상하는 인간관계, 견뎌야만 하는 시간이 있는 법이다. 실연, 상실, 시련……. 이러한 상황이 아주 심할 때는 영화도 책도 음악도 잡히지 않는다. 오로지 이불 속이 우주다. 우울과는 다른 고립감(powerless)이 나를 휘감는다. 누구라도 손을 내밀어주었으면……. 내가 먼저 전화하기는 엄두가 안 나고 스팸 전화라도 왔으면 싶다. 남들 퇴근 시간 즈음에야 직장 생활을 하는 지인에게 “오늘 만날 수 있어(요)?”, 혹은 심야에 “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 이렇게 전화할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충분한 경청과 공감, 위로, 대안 제시까지 가능한 사람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단언컨대, 세상에 이런 친구는 없다. 상담자도 없다. 있더라도 찾기 힘들다. 비용과 시간이 들고, 비밀 유지 걱정 등 다른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 SNS가 있다. 트위터를 공개하지 않고 일기장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좋은 기능이다. 나는 간혹 내 메일 주소로 일기를 보낸다. 실은, 그냥 끄적거리다 만다. 커서는 깜박이며 재촉하지만, 왠지 모니터 앞에서는 구체적으로 쓰기가 쉽지 않다. 페이스북에서 맺을 수 있는 친구가 최대 5천 명이라고 알고 있다. 온라인에서 5천 명을 ‘달성한’ 이들도 있지만, 지구상에서 진짜 친구가 5천 명인 사람은 없다. 인생에서 모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셋만 있어도 성공이라는 말이 있는데, 내 생각에는, 한 명도 힘들다고 본다. 이야기를 들어줄 가장 좋은 대상 간혹 자신을 나의 “독자”라고 소개하는, 모르는 사람의 편지를 받는다. 내게 E메일을 하는 사람들의 글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지금 제가 힘든 상황입니다. 어디 말할 곳이 없어서 선생님께 씁니다. 양해를 바랍니다.” 그들은 쓰고 나는 읽는다. 그리고 나는 그들과 그들의 사연을 잊는다. 편지가 오고 가거나 ‘현실에서’ 만나는 일은 없다. 나, 아니 나의 아이디는 익명의 수신처일 뿐이다. 타인에게 말하는 행위는 자기 마음의 가시를 돌보는 일과 비슷하다. 어떤 종류의 침묵은 마음속의 가시와 같아서 같이 살 수 없다. 가시가 움직일 때마다 몸을 찌른다. 말하기(speech)를 수치스럽게 생각하거나 억압하는 문화에서는 자살률이 높다. ‘표현의 자유’가 표현의 폭력이 된 시대지만, 여전히 말하기는 중요하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 시대의 문제, 혐오 발화(ex/citable speech)를 일종의 주인 없는 퍼포먼스라고 본다. 혐오 발화는 말하기(citing)를 초과하고, 남용하고, 선을 넘어선(ex/citable) 상황이다. 말하고 싶은 심정이 간절할 때는 말의 초과는커녕, 하고 싶은 말의 용량에 미치지 못한다. 혐오 발화는 그렇지 않다. 넘친다. 차별주의자들은 그 상황을 즐긴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가 없(었)다” 흔히 듣는 말이다. 고전 < 피고인 (The accused )>(조나단 카프란, 1988)은 지금 봐도 ‘교과서’다. 작품 자체로도, 성폭력 사건을 다루는 방식과 시각에 있어서도.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 조디 포스터와 페미니즘…… ‘나의 영웅 조디’(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그때는 몰랐다. 나는 20대 초반, 더러운 동시 상영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심지어 쥐가 돌아다녔다). 극장 간판은 선정적이었다. 시간 때우는 ‘싸구려 영화’인 줄 알았다. 조디 포스터가 ‘밑바닥 인생’을 사는 윤간(gang rape) 피해 여성으로, < 탑 건(Top gun) >(토니 스콧, 1986)의 캘리 맥길리스가 그를 돕는 변호사로 나온다. 작품 속 ‘조디’는 가난한 여성의 전형이다. 일찍 가출하여 거리를 전전한다. 술, 마약, 섹스, 길거리의 폭력을 감수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그녀는, 성폭력 피해 여성이 겪는 고통과 편견을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젠더, 성폭력 이런 이슈들이 아니라 그녀의 외로움과 통화 장면이었다. 그녀 자신도 당하고서야 깨달은 이 상황. 자신도 정리가 안 되고 이해할 수 없고 분노로 미칠 것 같다. 누가 지금 자기 처지를 알아줄 것인가. 영화에서 주인공이 엄마나 지인, 가족에게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 짧은 대화를 나누거나 울먹거리며 바로 끊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마음 둘 곳 없는 ‘우리의 조디’도 커튼이 드리워진 어두운 방에서 오래전에 떠나온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의 삶도 고달플 것이다. 미국 대륙 내 시간 차, 그리고 갑작스런 딸의 전화에 엄마는 “웬일이니”, “잘 지내니” 외에는 할 말이 없다. 조디는 눈물을 훔치며, “아니, 별일 아냐, 엄마 사랑해.” 정도의 대화를 나누고 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기력도 없고, 말해봤자 엄마는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두 모녀를 합친 몸만큼 상처도 두 배로 커질 것이다. 이럴 때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거나 그냥 아는 정도의 사람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 무심한 사람, 무심한 관계가 낫다. 어차피 인생에 해결은 없으므로. 그저 들어주며, 나를 판단하지 않고, 내 걱정을 하지 않을 사람. 내 이야기를 듣고 아무 말도 안 하는 사람. 내 말을 잊어버릴 사람. 내가 가장 원하는 경청자는 내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다. 정리하면, 듣는 이에는 두 종류가 있다. 공감과 수용이 가능한 적극적 청자(active listener), 더 나아가 치유(talking cure)가 가능한 소위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로, 대가가 따르고 찾기가 어렵다. ‘전문가’들과 비슷한 범주에서 안전한 사람들이 있다. 이해력과 인간애가 깊은 친구나 멘토 등이 그들이다. 그러나 매번 이들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민망하고, 아는 사이이기 때문에 빚을 진 느낌을 떨치기 힘들다. 아는 사이라면 여전히 비밀도 걱정되고, 완전하게 안전한 관계란 없기 때문에 상대방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도를 한다. 기도는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그것이다. 기도가 그것이다. “주님은 내 안에.” “부처님은 온 천지에.” 벽에게 말하자 내 안의 무엇인가를 - 주로 괴로움 - 꺼내 놓으면, 짐이 덜어지고 상황도 객관화되고 안정이 된다. 쓰기도 마찬가지다. 고민, 고통, 외로움, 스트레스 같은 일일수록, 말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된다. ‘부정적’ 감정이 나쁜 것이 아니다. 괴로움은 삶의 조건이다. 문제는 그것을 제대로 표출하지 못할 상황이고, 언제나 고민은 누구에게 말할까이다. 소통의 소중함이라느니, 대화를 통한 해법, 털어놓으라……. 나는 이런 말을 신뢰하지 않는 편이다. 어쨌든 아예 모르는 이에게 그리고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이에게 말할 때가 상호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다. 반응이 없는 것이 좋다. 나는 이 ‘반응 없음’이 훨씬 관계를 좋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실제로 자주 경험한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두 사람의 딸’이지만, 엄마와는 ‘여성으로서’ 관계였고 아빠는 그냥 ‘아는 사람’이었다. 엄마는 나와 겹치는 젠더 문제에다 개인적으로 극히 예민하신 분이고, 아빠는 그 반대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게 전화하는 것이 편했다. 아빠는 내가 아무리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충격적인 이야기를 해도 “그러냐.” 한 마디뿐이셨다. 그러고 나서 오로지 당신 일상, 당신 주장만 하셨다. 나는 아빠의 무반응과 철저한 이기주의가 좋았다. 아빠랑 통화하면, 내가 ‘문제’가 아니라 아빠가 문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로받았다. 가족? 절친? 파트너? 그들은 나를 잘 아는 사람인가? 의외로, 대부분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에게 ‘벽창호’니 ‘벽하고 이야기하는 게 낫다’고 말하지만, 정말 벽에게 말하는 것은 효과가 있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축복이다. 말이 통하면 나중에 상대방에게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라는 공치사나 직접적으로는 아니더라도 “넌, 아직도...? 지겹다”는 핀잔을 들을 가능성이 많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나는 ‘걱정거리’인 인간이 된다. 나는 매일 고민이 있을 뿐이지, 트러블 메이커가 아니란 말이다! 조디 포스터가 <피고인>에서 엄마에게 전화할 때의 심정.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인생의 곤경에서 고립되어 있을 때, 타인과 연결 자체만으로 상황이 ‘정리된다’. 전화를 끊고, 세수를 하고, 마음을 다잡아본다. 화양연화 왕가위의 < 화양연화(花樣年華) >(왕가위, 2000). 쓸 자신이 없다. 포기. 다만 <피고인>과 <화양연화>는 무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결정적인 공통점이 있다. 두 영화에서 주인공이 말하는 방식과 상대는 영화의 주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인생의 고통, 고독, 고립, 말할 수 없음, 어쩔 수 없음……. 내 생각에 <화양연화>의 주제는, 인생의 본질인, ‘어쩔 수 없음’이다. 두 사람, 어쩌겠는가. <피고인>에서 조디 포스터는 타인과 다름없는 엄마에게, <화양연화>에서 양조위는 벽에 대고 말한다. 민폐도 없고, 누구에게도 부담 주지 않으면서 말하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앙코르와트에서. ‘들어 달라’가 아니라 ‘나는 말했다’가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이야기보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훨씬 많다. ‘국가 안보’ 문제여서 말하지 못하는 코미디 영화가 얼마나 많은가. “말하자면 복잡한” 이야기(미국 영화 대사 중에 가장 많이 나오는 말 중 하나가 “complicate”다), 말하면 안 되는 나의 불법 행위……. 진실에 목을 매는 상대방이 알면 안 되는 진실이 얼마나 많은가. 이때는 이야기를 못 알아듣는 상대가 가장 좋다. 아는 사람보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이 낫다. 타인을 찾기보다 나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다. 사족이지만, 두 작품의 공통점이 또 있다. 모든 영화 감상은 자의적이고, 보는 이의 상황에 따라 감동도 크게 다르다. 둘 다 외롭고 아플 때 보면, 더 많이 보이는 영화다. 작품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더욱 좋다’. 난 동일시했다. <피고인>, <화양연화>를 보고 나는 머리가 흔들리도록 울었다. 인생에는 ‘안 되는 일’이 천지다. (어떤 말은) 말해서 무엇하리. 지금 나는 말할 사람을 찾기 전에 숨을 고르고 글을 쓰거나 청소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