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인
- 감독
- 유철용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이병헌, 지성, 송혜교, 박솔미, 이덕화, 선우은숙, 임현식, 조경환, 김태연, 허준호, 최준용, 최정원, 정유석, 진구
사진: 정기성 맨몸으로 다가오는 것들이 좋다. 불필요한 수사도 허세도 없이 알몸으로 돌진해 오는 영화가 좋다. 그런 영화들은 대개 허망하지 않다. 표층과 심층의 분리도 없고 잔망스러운 기교도 없다. 잔꾀를 부린 요사스러운 이미지로 결국은 뻔한 메시지를 전하며 맥 빠지게 하지 않고, 메시지에만 복무하거나 고결한 영화인 척하며 시간과 공간에 관한 대단한 사유라도 하는 것처럼 누가 찍었는지도 분간하기 어려운 풍경을 지겹게 비추지도 않는다. 이는 물론 영화가 아니라 내가 영화에 다가서서 느끼는 감상에 가깝다. 그러나 실상 무엇이 무엇에게 다가선다고 분별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서로 만난다. 그렇게 말하고 나면 영화비평이란 영화와 내가 만난 후기와도 같아진다. 나름의 고된 노동으로 생산했으나 세상에 별 이로운 가치를 남기지 않는 생각들의 언어. 오래도록 불편했던 질문 중 하나는 ‘비평가의 역할’에 관한 것이다. 글쟁이 동료들과 대화 나눌 때면 비평가의 역할이 화두가 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무언가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가져야 할 듯해 자리를 피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다 보면 일말의 사명감이라도 생길까 싶어서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한다. 어떤 영화에 대해 느낀 바를 표현하고 싶어 날뛴 결과가 내 비평문이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몇 가지 문제가 생긴다. 적든 많든 독자가 있는 지면에 자기 욕망에 못 이겨 쓴 글이 실릴 자격이 있을까? 원고료를 받을 가치가 있을까? 미리 밝히자면 나는 이 문제에 대해 길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 어찌 되었든 노동력을 들이면 대가를 받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고, 욕을 하든 공감하든 누군가 한 명은 내 글을 보며 반응하고 해당 영화에 대한 감상을 다시금 들여다보는 계기가 생기리라고 뻔뻔하게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반복하자면 글에 반응하는 이가 꼭 한 명은 있어야 한다. 편집진이든 독자든 단 한 명이라도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지면을 얻을 자격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 제발 한 명은 있어라, 하는 마음이 든다. 일인칭으로 글을 써달라는 원고청탁서 내용이 반가워 평소 조심스럽게 쓰곤 하는 ‘나’란 말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사용하고 있는데, 정작 내 이야기에 누구도 관심이 없다면 민폐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독자의 문제만은 간과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글을 조금, 아니 어쩌면 많이 꼬장꼬장하게 쓸 생각이다. 글은 쓰는 모든 사람은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 더군다나 고료를 받고 글을 쓰는 이에게 그건 의무 사항이다. 실상 독자를 고려하지 않고 원고를 작성하는 평론가는 없다. 만약 있다면 그이는 자격 상실이라고 본다. 적어도 고료를 받고 쓰는 이로서는 그렇다. 물론 많은 이들이 내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상 모든 것에 관한 견해는 각기 다르고, 달라야 하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역할은 거기까지다. 어떤 영화에 대한 견해가 한결같아지지 않도록 최대한 많이 떠드는 일이다. 다만 말로만 떠들면 흩어지고 마니까 정제된 언어로, 글로 남기는 거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지지 선언도 하고 공을 들여 비판도 하는 것이다. 고루한 이야기를 길게도 했다. 하지만 지루해질지라도 이야기의 과정이 필요할 듯했다. 결코 이 코너의 이름을 향해 하는 말은 아니지만, 비평의 안위에 대해 질문하거나 걱정하는 일을 기피한다. 간혹 ‘비평의 위기’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참을 수가 없다. 솔직히 위기가 아니었던 적은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순조로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새로운 일이 아니지 않은가. 세상사에서나 예술계에서 자식들이 아버지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잔존의 싹을 제거하려 하거나 흔적을 지우려 드는 일은 지속되어 왔다. 새로운 아버지를 받들려고 하거나 자신이 새로운 아버지가 되려고 하는 시도도 언제나 있어 왔다. 이는 언제 어느 때고 저마다의 문제는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기득권 세력이라고 여겨지는 이들이 보통 원인 제공자로 지목되어 공격받는다. 그런데 심한 개인주의자의 나쁜 전형인 나로서는 이런 생각을 자주 한다. 이 세상엔, 특히 영화계엔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고 제거하려는 이들이 왜 이리도 많을까.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인데 왜 신경을 쓰는 걸까. 아니 애초에 진짜 혈육도 감당하기 힘든데 굳이 아버지와 같은 존재를 또 두려는 걸까. 물론 게으르고 무기력한 인간의 안이한 생각이라는 걸 인식하고 있다. 혁명적인 선언이 없이는 활동의 동력을 얻기 어렵다는 점도 안다. 그럼에도 생각을 멈출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싫어 할아버지의 유산을 이어받으려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국내에선 아니라 할지라도) 몇십 년 전에 유행했던 이론을 마치 새로이 발견하거나 정립한 이론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평문에 적용하거나 한참 전에 유행이 몰아쳤던 유형의 영화가 마치 이 시대에 새롭게 등장한 것처럼 추앙하기도 하는데, 그런 상황을 지켜보자면 이건 발전이 아니라 도태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다른 이의 말을 빌자면 도태되었던 건 나였던 모양이다. 세상 거의 모든 것은 유행을 탄다. 옷과 마찬가지로 이론에도 유행이 있고, 비평의 유형 역시 마찬가지다. 한때는 이론 비평이 일었으나 천편일률적이라며 텍스트 비평에 힘이 실렸고, 이후에는 또 텍스트 비평보다 테마 비평이나 이론 비평에 관심이 쏠린 지 한참 되었다. 그 사이, 가까이 지내는 후배 평론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내가 속한 평론가협회 회원들은 도태되었단다. 거칠게 요약하면 텍스트 비평을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협회 평론가들 모두가 텍스트 비평만 하는 것은 아닐뿐더러, 작품마다 그에 어울리는 비평문을 쓴다. 그럼에도 그런 인식이 생기는 이유는 확실히 특정 이론을 접목하는 글보다 작품 분석을 기본으로 하는 비평문이 많이 나오는 데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도태된 평론가라는 후배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적잖이 충격받았다. 도태되었다는 말보다 그 말이 후배에게서 스스로 인정하듯이 나왔기 때문이다. 다른 이에게 그 말을 들었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론을 인용하거나 정립하지 않는다고 해서 지성이 없는 글이라 할 수 없고, 이론에 대해 빽빽이 열거하거나 레퍼런스를 줄줄이 나열한 글이 지적이거나 비평에 맞는 글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간혹 비평해야 하는 영화 이야기보다 자신이 인용한 문구나 레퍼런스로 삼은 영화들에 더 몰두하는 글을 보면 혹은 그런 글들이 더 각광받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난 기꺼이 도태되고 실패한 평론가가 되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실상 틀린 말도 아니다. 지면을 계속 확보하기 위해서는 독자들이 혹할 말한 주제로 기획을 잘해서 글을 써야 한다는 업계 선배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그럴 능력도 없어서 결국 지면 싸움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엄청난 팬을 모은 몇 영화들에 어떠한 흥미도 비평 의지도 일지 않아 원고를 거절하면서 때를 놓쳐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순수하게 글을 너무 못 썼던 적도 많다. 말하자면 능력은 부족한데 오만했다고 할까. 그런데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 나는 이 글을 쓰면서도 인용하려고 발췌해 놓은 문구들을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쓰지 않기로 결심했는데, 완전히 확신이 있어 책임질 수 있지 않는 한 함부로 다른 이의 글을 인용해선 안 된다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지식한 생각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 여러모로 무능력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주절대는 이유는 모종의 오기가 생겨 이런 유형의 평론가도 있다는 점을 설득하고 싶어서이고 (반복할수록 화가 나 이 말을 한 후배들의 입을 가만두고 싶지 않고 선배였다면 더더욱 그러고 싶지만) 도태되었다고 여겨지는 평론가에게도 그만의 의지가 있어 그 길을 선택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서다. 시네필이나 평론가들이 즐겨 사용하거나 좋아하거나 혹하는 단어들이 있다. 물질성, 물질적, 즉물적, 육체성, 신체, 유령, 운동성, 운동감, 생동감, 리듬 등등. 근간에 유행하는 단어를 노골적으로 밝힐 수는 없고, 어쨌든 이외에도 많다. 나는 한때 ‘유령’이라는 단어 혹은 ‘물질성’이라는 단어가 만능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기저기 난무하는 것 같아 불편하게 여긴 적은 있으나, 평론가들이 자주 사용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체로 대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물며 몸을 ‘신체’로 쓰느냐 ‘육체’로 쓰느냐에 따라 글을 조금 이론적으로 발전시킬지 감각과 감정에 몰두해 쓸지에 관한 방향성이 달라지기에, 모든 글은 저마다의 근거와 존재 이유가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종종 유형 혹은 계파를 나누는 행위를 즐기지만 세부에서 파생되는 힘을 넘어서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전술한 이야기를 이어가자면 어떤 유형의 비평문을 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잘 쓰는 게 중요하다. 물론 그 해답을 알고 있으면 매번 끙끙대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글을 쓰면서 어떻게 하면 잘 실패할 수 있을지 고민했더니 결코 좋은 글은 나오지 못했어도 가슴은 시원하다. 이 글의 독자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난 이렇게 제멋대로 글을 써본 적이 없다. 원고청탁서에는 이런 요청이 있었다. “국내 영화 비평계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면서 한국(고전)영화 1~2편에 대한 비평을 곁들”이라는 (정확히는 코너 설명이지만) 요청이었고, 밑줄까지 그어 강조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어떤 구체적인 영화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코너를 즐겨보는 이라면 왜 아직도 영화 이야기를 하지 않는지 의아했을 것이다. 이유는 서두에 있다. 알몸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 작품들은 대체로 비평이 실패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혹은 나의 재능과 능력이 모자라서 뿐만 아니라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게 만든다. 사진: 정기성 내게 그런 영화 중 한 편이 임권택 감독의 < 개벽 >(1991)이다. 나는 오래전부터 이 영화에 대해 결코 길게 말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고, 말을 할수록 이 영화와 멀어질 것임을 예감했다. 처음엔 동학 2세 교조 해월 최시형( 이덕화 )의 긴 이야기를 거의 도주의 형태로 보여주는 영화의 군더더기 없고 강력한 형식에 홀딱 반했다. 그런데 그보다 영화를 볼수록 사무치는 감정을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지 몰라 더욱 끌렸고, 그 앞에서 나의 언어는 실패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직감했다. 영화를 보고 있자면 해월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도 해월의 육체성이 강하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슬픔이라고만 하기에는 더 깊은 곳에서 오는 감정, 그러나 결코 눅눅하거나 무겁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사무치는 감정 혹은 그 감정에 진동을 주는 무언가가 해월이 있는 풍경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 지점을 풀어야 글을 제대로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가망이 없어 보였다. 이미 오래전 이야기다. 그리고 한참 후 KMDb에서 임권택 감독에 관한 자료를 찾다 정성일 평론가와 허문영 평론가의 대담을 보았고 그 대담 속에서 영화가 주는 인상에 가장 근접한 표현을 찾았다. 허문영 평론가는 <개벽>을 두 번째 보며 “이 영화가 인물을 찍은 게 아니구나, 인물이 이 영화의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찍었구나, 라는 느낌”을 받았고 “인물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이 되기에 실패한 영화구나, 그 실패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영화가 대답해 주지는 않지만, 그 패배의 불가피성에 대해 풍경이 대답을 해야 하는데, 풍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덧붙인다. 나는 이 이상 <개벽>이 안기는 느낌에 관해 정확히 표현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욱이 이 말은 임권택 감독 영화의 풍경에 조금 더 다가갈 모종의 영감을 준다. 사진: 정기성 이는 대담의 일부이긴 하지만 포괄해 말하면 좋은 비평문은 글을 쓰는 데 영감을 준다. 그러나 이 맥락에서 나 혹은 우리가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지 굳이 묻지는 않을 테다. 허무한 자문자답도 역량에 어울리지도 않는 반성 또한 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혹시나 기회가 되어 임권택 감독의 작품에 관해 길게 글을 써야 할 일이 생기면 또 머리 쥐어뜯으며 말들을 쥐어짤 것이다. 그게 나의 비평이 조금이나마 안녕해지는 길이다. 홍은미(영화평론가) l 2018년 《씨네21》 영화평론상 당선. 《필로》, 《씨네21》 등 여러 지면에 글을 써왔고 현재 부산영화평론가협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가 청년 문화와 만나면서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 하길종 , 1975)을 낳았다면, 그 반대편엔 당대의 하이틴 문화를 담은 < 고교얄개 >( 석래명 , 1976)가 있었다. 전자가 유신 시대와의 불협화음이었다면, 후자는 순응적인 화음에 가까웠다.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 등 ‘국책 영화’가 창궐했던 1970년대, 이른바 ‘얄개 영화’는 십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명랑 드라마로 사랑 받으면서 한편으론 ‘어른’들의 가치관을 별 저항 없이 수용했다. 여기엔 ‘우수 영화 제도’라는 미끼도 있었다. 좋은 영화로 선정되면 제작사에게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 하나가 주어졌던 것. 이후 심사 대상에서 하이틴 무비가 제외되자 이 장르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75년 < 여고 졸업반 >에서 시작해 1978년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까지, 고등학생들의 로맨스와 일상을 다루었던 그 영화들은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쏟아지다 갑자기 사라졌던 시한부 트렌드였던 셈이다. 그 중심은 임예진 - 이덕화 커플의 '진짜진짜' 시리즈와, 이승현 - 김정훈 콤비의 '얄개' 시리즈였는데, 전자가 순애보라면 후자는 코미디에 가까웠고, 특히 <고교얄개>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간판 스타 같은 영화였다. 귀여운 반항아들의 요절복통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유신 시대라는 시대 배경을 감안할 때 <고교얄개>는 의외로 복잡한 텍스트다. 이 영화는 1970년대 국가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담아내면서, 한편으론 그 시절 억눌린 청소년들을 위한 작은 해방구 역할을 했다. 체제 선전과 대리 만족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묘한 프로파간다 영화였던 셈이며, 그 어떤 국책 영화보다 순수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첫 신은 예배 장면이다. 주인공 두수(이승현)는 미션 스쿨에 다니는데, 이때 강당을 가득 채운 까까머리 교복 차림 남학생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집단주의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두수는 돌발적 행동을 하는 개인이다. 낙제 때문에 유급을 한 두수는 입시나 교칙 같은 제도를 거부한다. 그저 학교 생활이 지루하기에 매일처럼 장난을 일삼고, 우연히 알게 된 여학생 인숙( 강주희 )과의 로맨스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두수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 십대이다. 하지만 유신 시대의 세계관에서 두수는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꿈도 없는 '잘못된' 청소년이다. 그러기에 '교화(敎化)의 서사'가 시작된다. <고교얄개>의 이야기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은 두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주변 인물들의 노력이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부모와 국어 교사인 백상도( 하명중 )와 그의 하숙집 딸인 인숙 그리고 같은 반 친구인 호철(김정훈)까지 이 과정에 동원된다. 특히 호철과의 관계는 핵심이다. 두수의 장난으로 안경이 깨진 호철은 다리를 다쳐 학교를 나오지 못한다. 어떤 죄책감을 느낀 두수는 호철의 집을 찾아간다. 이층 양옥에 사는 부잣집 아들 두수와 달리,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고 있는 호철. 이때 호철이 두수에게 하는 말은, 영화의 테마를 지나칠 정도의 직설법으로 전한다. “두수야, 저길 좀 봐. 저 장관을 이룬 즐비한 고층 건물들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겠니. 모두가 피와 땀이 이뤄놓은 기적이야. 난 비탈진 언덕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어. 발길은 가볍고 마음은 늘 무럭무럭 자라지. 난 열심히 공부해야지, 어서 자라야지, 그리고 저 많은 빌딩 속에 뛰어들어 주인공이 되어야지. 난 늘 이렇게 결심한단다.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다만 불편할 따름이지. 얄개야, 우리에겐 밝고 희망찬 내일이 있어. 그 풍요한 내일의 세계를 이룩하려면, 학생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이 시기 청소년들을 길들이기 위한 산업화 이데올로기의 성공 신화와 성장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화한 호철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버지의 법'을 체득한 소년이다. 여기서 <고교얄개>는 호철을 두수가 따라야 할 인간형으로 설정한다. 두수는 호철처럼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호철처럼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며 '호철화'된다. 이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두수를 '유신 청소년'으로 교화하며, 그 대가로 '인숙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이성애적 로맨스의 성공을 선사한다. 두수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고교얄개>는 밝은 구석이 많은 영화다. 두수가 만들어내는 악의 없는 유머의 에피소드들은 관객을 미소 짓게 하며,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 같은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될 정도로 재치 있는 언어 유희였다. 남녀 학생들의 하이킹이나 운동회의 차전놀이는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을 즐기다가도, 학교 건물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표어(“오늘의 안보 없이 내일의 번영 없다”)나 “북괴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이나 '근대화 연쇄점'이라는 동네 구멍가게 간판을 맞닥트리게 되면, 군대식 사회였던 '1970년대'를 환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고교얄개>는 분열증적이면서도 순응을 요구하는, 당대의 시대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 고교얄개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지옥화>(1958)의 촬영을 맡아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12편을 촬영 후, 1962년 개봉한 <북극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액션스릴러 혹은 범죄추리물에 특기를 보여 ‘아주 타프한 작품을 만드는 신인’ 1) , “액션 감독으로 정평이 높은 준재 강범구 감독” 2) 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의 초기작들이 1960년대 초반 대만에서 흥행에 성공하였고, 1966년에는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대만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강범구 감독 작품의 대만 흥행은 이후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강범구는 일제강점기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척이 운영하던 사진관을 드나들며 카메라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해방 후 홀로 월남하여 한국전쟁을 겪고, 휴전 이후 국민대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연극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박상호 감독이 영화 <젊은 그들>(신상옥, 1955)의 조감독을 맡았는데, 강범구에게 엑스트라 출연 및 동원을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영화 현장을 처음 접하게 된 그는 영화 촬영 카메라의 작동 원리가 자신이 다루던 사진 카메라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다른 관심을 갖는다. (사진1) <해정>(박상호,1956) 포스터.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촬영부로 참여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6년 박상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해정>에서 촬영부 일을 시작했고, 이어서 유현목 감독의 작품에서 김명제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한다. 김명제는 미국의 미첼(Michell) 카메라를 모방하여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한 ‘코첼’이라 불린 카메라를 만들어 사용했다. 강범구는 김명제와 같이 손수 촬영 기재를 고안해낼 정도로 기술력이 출중한 영화인 밑에서 촬영 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일본영화촬영자협회에서 펴낸 『 일본영화촬영편람 』 을 보면서 영화 전문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그가 촬영 조수로 참여한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와 <잃어버린 청춘>(1957)은 전후 한국영화의 새로운 수준을 이룩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3) “카메라 앵글에도 많은 노력의 자취가 보인다”, “한국영화의 공통적인 폐단인 느린 템포가 시정되어 있어 유쾌”하고 “이동촬영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화면에 안정성이 있고 매끈”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잃어버린 청춘>은 ‘묘사가 착실’하고 ‘모방에서 독창으로’, ‘수준에 이른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강범구는 전후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인 “현대극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젊은이들” 4) 의 일원으로 작업하며 영화인으로 단련되었다. (사진2) <지옥화>(신상옥, 1958)의 한장면. 왼쪽부터 배우 최은희(쏘냐 역), 김학(영식 역), 조해원(동식 역) 강범구는 1958년 <지옥화>(신상옥)의 촬영을 맡아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다. 전후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위험을 무릎 쓰고 달리는 기차 위에서 액션 장면을 찍었다. 덕분에 속도감 있는 기차 추격 장면이 박진감을 더 했고, 촬영 데뷔작에서부터 대담하고 힘 있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3) <지옥화>(신상옥, 1958) 기차 액션 장면. 영식 일당이 미군 수송 열차를 털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 것을 기차 지붕 위에서 찍은 화면 이어서 강범구는 신상옥 감독의 첫 번째 멜로드라마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을 안정감 있게 촬영하였고, 이 작품은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한다. 그는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 후 1961년까지 약 3년 동안 총 12편의 영화들을 촬영하는데, 그 중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1961)을 촬영하면서 이 작품을 제작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와 연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한흥영화사가 제작한 <지평선>(정창화,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슬픔은 없다>(김묵, 1961)를 촬영했고, <북극성>(1962)으로 감독 데뷔하여 연출작 <동굴 속의 애욕>(1964)까지 최관두가 제작한 8편의 작품을 함께 한다. (사진4)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갱스터 범죄물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가 제작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사진5)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크레딧 (사진6)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만주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의 활약을 담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액션 장면을 속도감 있는 몽타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지평선>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거대 제작비를 들여, 우이동에 4만 평의 대지를 잡고 건평 3천의 오픈 세트를 세워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만주의 한 소도시를 만들고,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5) 강범구는 영화제작자 최관두를 “한국영화 액션 원조”라고 칭했는데, 그가 운영한 한흥영화사는 “한국 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6) 이라고 불렸다. 한흥영화사는 주로 대륙물과 액션, 범죄 스릴러물 제작에 주력했다. 최관두는 특히 만주 대륙물의 효시인 <지평선>(정창화, 1961)부터 대륙 액션물의 완결판이라 불리는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까지 제작한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초부터 당시 주류 멜로드라마 장르와는 다른 궤적을 그린 작품들을 개척해온 한흥영화사에서 강범구도 자신의 감독작들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강범구는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연출자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되는 점을 체감하고, ‘카메라맨’ 역할에만 만족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작품을 지휘할 수 있는 ‘연출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북극성>(1962)을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주동운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것으로 한흥영화사 이름으로 개봉되었지만 눈에 띄는 반응은 얻지 못했다. (사진7) <북극성>(강범구, 1962) 포스터. 강범구가 제작하고 연출한 감독 데뷔작이다. 강범구가 두 번째로 연출한 <검은 꽃잎이 질 때>(1962)는 이경재 원작의 서울중앙방송국(HLKA) 라디오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신문기자인 주인공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간첩을 쫓는 이야기로 “본격 추리영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라 불리며 평단과 흥행 면에서 두루 성공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7) , “강범구는 처녀작 <북극성>에서 평조하였으나 <검은 꽃잎이 질 때> 한편으로 이를 완전히 만회해서 기염을 토했으며” “지난날의 명 ‘카메라맨’답게 훌륭한 카메라워크를 보여주고”, “우리 영화풍토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본격적 추리극을 시도”하여 “제법 박력 있게” 연출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사진8) <검은 꽃잎이 질 때>(강범구, 1962) 포스터. 하단에 경찰기동대 오토바이와 백차가 등장하는 추격 장면이 보인다.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기존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총격전과 차별되는 새로운 액션 스펙터클을 선보이길 원하던 차에, 당시 서울 시경에서 외제 오토바이를 새로 장만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수도경찰청은 경찰의 기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1년에 미국에서 사십 대의 오토바이를 들여왔으며, <검은 꽃잎이 질 때>의 엔딩에 해당하는 간첩 추적 장면은 시경의 협조로 백차 5대, 시경 특별기동대 오토바이 20대, 세단 2대 등을 동원하여 서울 을지로, 종로, 돈암동을 빠져 의정부, 포천까지 내달리며 백주의 추격을 카메라 세 대로 촬영했다. 8) 감독 입장에서는 작품의 스펙터클 연출과 홍보 면에서 이득이었고, 경찰 입장에서는 방첩 의식 고취 및 시경을 선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상업극영화를 통해 대중성과 정부 시책 양쪽을 만족시키는 협상이 흥행 성공으로 이어진 경우이다. 그리고 강범구는 <검은 꽃잎이 질 때>의 흥행으로 인해 “액숀·스릴러의 총본산”인 한흥영화사의 ‘감독’으로 입지를 얻게 된다. 다음 작품 <안개낀 거리>(1963)는 그가 한국전쟁 및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연출한 영화이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한 전우가 전후 복귀한 사회에서 범인과 형사로 조우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서 범인(이향 역)은 뛰어난 사격술로 형사(황해 역)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현재 형사는 지난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체포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기차 승강구 결투씬’이 백미로 꼽히는데, 형사와 범인이 서로의 손목이 수갑으로 묶인 채 달리는 기차에 매달려서 결투를 벌이는 액션 장면이다. (사진9)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포스터. 중앙에 두 주인공의 손목이 묶인 수갑이 빨강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안개낀 거리>는 196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수갑(手銬)>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우수한 흥행 성적을 올렸으며, 당시 대만 언론에서 강범구 감독을 ‘액션·스릴러’의 귀재로 주목했다. 대만에서 발간된 영화 서적 『 세계영화감상 』 (1967) 한국 편에는 <안개낀 거리>에 대해 “인물의 심리와 성격부터 감정의 노출 등이 전편에 걸쳐 긴장감 있게 그려지고, 인간의 인지상정의 모순된 점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기교가 훌륭하다. 카메라 워크와 컷트의 극적 운영이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 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 9) 고 평하고 있다. 강범구는 <창살없는 감옥>(1963)에서도 전쟁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겪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전작 <안개낀 거리>의 인물 설정 및 주제가 변주된 것으로 보이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형사(황해 역)가 범인(이향 역)을 쫓는다. 범인은 수사망을 피해 한국전쟁 유격대로 잠입하는데, 형사가 뒤따라 자원입대하여 그를 추적한다. 둘은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조우하고 목숨이 걸린 딜레마 상황에 처한다. 영화 제목은 동족상잔의 전쟁터를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처지로 비유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창살없는 감옥>을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대는 단순한 아이언 오거니제이션(철의 조직체)이 아니라 인간의 결합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들고 있는 점은 무척 대견한데, 나는 지난 2년동안 3천만 인구가 모두 군복 착용을 강요당하는 듯 한 환각에서 이런 작품들을 본 것은 적으마한 위안으로 여기고 있다.” 10) (사진10) <창살없는 감옥>(강범구, 1963) 포스터. 배경에 낙하산 부대가 보인다. <창살없는 감옥>에서도 강범구는 특색 있는 액션 스펙터클을 연출하길 원했고, 그 결과 당시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낙하산 부대가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적진에 투입되는 인물들이 진격하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수직 낙하 이미지에 착안하여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낙하산 부대를 촬영했고, 비행기와 카메라 두 대를 동원하여 공중 촬영을 진행했다. 이 작품 또한 대만에서 <제3특공대(第3特攻隊)>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더불어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불렀던 주제가도 중국어로 번안되어 동남아 지역까지 인기를 끌어모았다. 이듬해, 1964년 강범구는 연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전후 사회에 지속되고 있는 문제를 짚어내는 작품들을 연출한다. 원제가 ‘목격자의 증언’이었던 <당신만을 위하여>(1964)는 가부장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 주인공이고, <동굴 속의 애욕>(1964)은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빨치산 생활을 하게 된 여성을 그려냈다. (사진11)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왼쪽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옥녀(배우 김난영)와 오른쪽 끝에 동록(배우 박노식)이 공모하여 옥녀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에 관해 심문이 진행된다. <동굴 속의 애욕>은 권순영 판사의 수필집 『법창의 봄』(1955)에 실린 같은 제목의 재판 실화가 원작이다. 한국전쟁 당시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주민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로, 이 지역은 본래 북한 땅이었다가 휴전 이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역이다. ‘수복(收復)’의 사전적 의미는 잃었던 땅이나 권리 따위를 되찾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복 지구’가 대한민국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본래 북한 주민이고 본인의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분단선의 이동이라는 순전히 외부적 요인 때문에 남한 사람으로 귀속이 변경된 비자발적 월남인들이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공식화된 월남 동기인 ‘북괴가 싫어서’나 ‘자유를 찾아서’라는 반북·반공주의가 적용될 수 없는 사례이다. 강범구는 이러한 수복 지구 주민의 경험을 자신의 월남인 의식에 빗대어 설명한다. “난 이북사람이고 그래서. (중략) 그게 굉장히 가슴에 사무친다고. 그건 우리의 그 사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거던, 예. 그 권력 잡은 사람들이 자기네들 권력 싸움 위해서지, 우리하곤 아무 관계 없는 거야. 내가 지금 해석을 해도 그래요. 그래서 인제 그걸 바탕에 두고 인간의 그 본성을 한번 그려볼라구 했던 거죠. 그 굉장히 그땐 새롭드라구, 그 책을 보니까.” 11) <동굴 속의 애욕>은 젊은 부부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살인용의자 옥녀의 재판을 구경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재판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옥녀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피고인인 동록과 옥녀 및 증인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과거시점의 액자 구성으로 재현된다. 즉 액자 구성의 가장 안쪽에서 재현되는 이야기가 옥녀와 같은 북한 인민이 겪은 한국전쟁이고, 이들이 전후 현재 시점에서는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고 있는 남한 주민이다. 영화는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들의 전사(前事)를 액자 속으로 들여다보도록 배치함으로써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신문 헤드라인이 담지 못한 진실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사상 때문이 아니라는’ 감독의 의도와 같이, 옥녀를 북괴의 꾀임에 속고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빨치산으로 도식화하지 않고, 전쟁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무고한 양민의 전쟁 경험으로 열어둔다. 강범구는 <동굴 속의 애욕>이 한국전쟁을 그리는 데 있어 오래 남을만한 이야기라고 여기며, 기회가 된다면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12)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옥녀의 재판을 보러 온 사람들이 법원에 모여있다. 영화의 오프닝을 여는 젊은 부부를 비롯한 ‘재판 구경’ 대중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주인공을 이해와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진13)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 옥녀. 극한 상황에서 분투하는 인물의 생존 본능과 욕망, 그에 따른 복잡한 심리를 표현해낸 배우 김난영의 연기가 돋보인다. <소만국경>(1964)은 강범구가 다시 액션 연출의 특기를 살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활약을 담은 영화이다. 소련과 만주 접경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과 일본군, 비적떼 등이 출몰하여 다양한 액션을 펼치는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사진14) <소만국경>(강범구, 1964) 포스터 <탈출명령>(1966)은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가 강범구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만든 한국·대만 합작영화이다. 고인하는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계와 교류하며 한국영화들을 대만에 소개하는 데 관심을 쏟았고, 강범구가 연출한 작품들이 대만에서 흥행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앞서 언급한 <창살없는 감옥>을 수입하여 대만에서 <제3특공대>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고,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역에서도 큰 수익을 거둔 인물이 바로 고인하이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강범구 감독과 함께 대만에서 대규모 전쟁 액션 영화를 만들길 원했다. 한국 측에서는 기획자 박민이 대영영화사 소속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감독과 배우, 조감독 등이 대만으로 향했다. <탈출명령>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본군이 세운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인물들을 탈출시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대만 아리산(阿里山) 밑에 야외세트장을 짓고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여, 일본에서 필름 현상을 했다. 대만 촬영현장에서 강범구와 주요 대만 영화 스태프들은 일제식민지 시기 성장 배경을 공유하는 동년배들이었고, 서로 일본어로 소통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만 중앙전영공사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와 최신 영화 기재, 일본 영화인들과의 기술 교류 등을 접하고 당시 한국영화계에 비해 격차를 느꼈다고 한다. <탈출명령>은 <최후명령(最後命令)>이라는 제목으로 대만에서 개봉했으나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만 영화인 고인하는 이후 강범구를 비롯한 한국영화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과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15) <탈출명령>(강범구, 1966) 포스터. 배우 신영균, 박노식, 이대엽, 손미희자 그리고 대만배우 왕모초(王莫愁) 등이 출연했다. <탈출명령>의 필름 현상 작업이 일본 도에이 현상소에서 진행될 때, 이곳에 들렸던 신상옥 감독이 <탈출명령>의 해외 로케 촬영 화면을 보고 강범구에게 베트남전 영화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제작하는 <여자베트콩 18호>의 연출을 맡아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당시 베트남전에 파병된 국군 비둘기부대의 협조를 받아 촬영했다. 촬영 중 전투 장면을 위해 묻어둔 폭탄이 뜻하지 않게 폭발하여 조명기사 이계창이 현장에서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고, 강범구 역시 부상을 당하여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다. (사진16) <여자베트콩 18호>(강범구, 1967) 포스터. 전시 중에 제작된 영화이고, 베트콩 등장 장면을 촬영 중 실제 베트콩으로 오인 받아 미군으로부터 포위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후 강범구는 가수 남진 주연의 <울려고 내가 왔나>(1967)부터 직접 제작한 <항구의 왼손잽이>(1971)까지 음악영화, 검객영화, 반공영화, 갱스터 범죄영화 등의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한다. (사진17) <울려고 내가 왔나>(강범구, 1967) 포스터. 당시 가요계의 스타 남진이 주연을 맡았다. (사진18) <대검객>(강범구, 1968) 포스터. 당시 홍콩무협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이른바 ‘칼싸움 액션’이 펼쳐지는 검객영화가 유행했다. 이 작품은 정통검술을 익힌 배우이자 무술감독인 안일력이 검술지도를 맡고 고증에 충실하여, 한국 검객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진19) 1960년대 활동 당시의 강범구 감독 출처:“한국감독의 50인”,[1970 영화연예연감], 국제영화사, 1969 1974년에 개봉한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은 한국의 동아수출공사와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가 합작으로 만들었다. 동아수출공사는 강범구와 대만 영화인 고인하를 통해 골든하베스트에서 제작한 이소룡 주연작 <맹룡과강>(이소룡, 1972)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골든하베스트와 돈독한 거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대표 이우석과 이웃 관계로 일찍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초중반 동아수출공사 기획실에 근무한다.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일대영웅>의 홍콩측 감독 팽장귀는 한국어에 능숙한 화교였고, 한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사진20)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 1974)의 한장면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작품 기획, 시나리오 작가 섭외 및 완성, 감독과 스태프 구성, 캐스팅, 제작 현장 및 후반작업 진행 등 작품을 구상하여 완성하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였다. <마지막 다섯 손가락>(김선경, 1974)부터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까지 9편을 기획했는데, 그 중 <남사당>(이규환, 1975)은 이규환 감독의 은퇴기념영화로 제작되었다. 이규환 감독은 일제강점기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데뷔하여 한국영화사 초창기부터 활동한 원로 감독이었고, <남사당>은 선배 영화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기획된 작품이다. 같은 해에 강범구는 김기영 감독이 <만추>(이만희, 1966)를 자기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김기영, 1975)을 기획하였고, 정소영 감독의 <애수의 샌프란시스코>(1975)를 기획하여 미국 로케 촬영까지 담당했다. 또한 <걷지말고 뛰어라>(1976)로 소설가 최인호를 감독으로 데뷔시키는가 하면, 1976년에 개봉한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는 관객의 호응을 얻어 ‘진짜 진짜 시리즈’로 후속편이 이어지며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다. (사진21)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의 배우 임예진, 이덕화. 이후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를 떠나 해외로 눈을 돌려 국내보다 나은 영화제작 여건을 찾고자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만 광고영화 프로덕션 회사에서 활동 중에, 한국영화진흥공사 홍콩 법인과 연계되어 대만에 수출하는 한국영화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당시 <증언>(임권택,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1974), <섬개구리 만세>(정진우,1972) 등의 한국영화들이 대만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만에서 만난 로웨이(羅維) 감독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도 거주하며, 중화권 작품 거래를 위해 서울-홍콩-대만을 오가며 지냈다. 강범구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를 비롯한 중화권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거래를 중개하는 역할을 했으며 골든하베스트 대표 레이 초우, 홍콩에서 활동한 제작자이자 감독 로웨이, 이한상, 오사원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 대만 영화 감독 유가창 등의 아시아 영화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강범구는 1980년대에도 한국과 홍콩 혹은 한국과 대만 영화사와 연계된 일종의 합작 형태의 작품들에 참여한다. 1988년에 개봉한 <칠소여복성>(강범구·맥담웅)까지 협업하고, 1986년경부터 1995년경까지 중화권 외화 수입 거래 중개자 역할을 해왔다. (사진22) <괴시>(강범구, 1981)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라고 불리는 미스터리 공포물 강범구가 홍콩에서 관람했던 서구 좀비영화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연출했다고 한다. 대만 배우 유광옥, 강명이 출연했다. 강범구는 1960년대 초반 “액숀·스릴러의 본산” 한흥영화사에서 활동하면서 일찍이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해외 활동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냉전 시기 분단된 영토 안에 국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다른’ 영화 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6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편을 넘어가면서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을 찍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상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작품들과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영화인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신 이후 1970년대 국가주의 영화 제도 및 규제 하에서 영화 제작 환경이 더욱 악화되자 그는 한국을 떠나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를 비롯하여 홍콩과 대만에서 영화계 네트워크를 형성한 강범구는 ‘한국의 중국통’이라고 불리우며, 한국영화와 중화권 및 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본격적인 교류에 앞장섰다. 한국영화계에 1960년대 후반부터 홍콩 검객물과 무협물이 인기를 끌면서 액션영화가 부상되었지만 정부의 영화시책 제도 관점에서는 저속, 저질영화로 저평가되었다. 하지만 관객의 부응은 이와 반대였기 때문에 한·홍 합작 액션 영화 등이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제작되었다. 이 시기 강범구의 연출작 목록을 살펴보면 당대 한국영화 시장에 홍콩 무협물과 액션물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경험을 통해 과거 한국-홍콩-대만 간 다양한 방식의 합작 혹은 협업 제작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과 경위에 관해 들여다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제작 관행이 각자 정책적으로 혹은 자본력 측면에서 자국 영화시장 내에서 부족한 지점들을 보완하는 자구책으로 기능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각기 합작 주체의 입장에 맞게 완성한 작품들은 자국 영화로 변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무국적성이 비난 받기도 하지만, 이들은 애초 기획부터 내셔널시네마 범주에서 미끄러져 비본질적이며 경계가 없고, ‘경계 없음’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위장 합작이라는 명명으로 단정하기 보다는, 당시 영화 제작 환경과 영화 시장을 둘러싼 생동하는 문화 경제 및 다층적인 문화 협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강범구는 문화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영역이나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인 문화 규제 및 정책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전쟁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신의 영화 인생에 있어 ‘풀지 못한 숙제’로 품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반공이 국시’인 시대에 활동하면서 남북관계에 관한 성찰적인 영화 창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차 그는 이북으로 교류하며, 여전히 영화를 통해 폭넓은 시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아무쪼록 그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1) 이영일,「특집 한국영화 1963년」,《국제영화》 1964년 1·2월호, 63쪽. 2) 『 1970 영화연예연감 』 , 국제영화사, 1969, 434쪽. 3) 〔신영화〕 묘사 착실한 멜로드라마/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 《한국일보》, 1957년 9월 21일; “[단평] <유전의 애수>”, 《경향신문》, 1956년 7월 30일; “[신영화] 모방(模倣)에서 獨創(독창)으로/ <잃어버린 청춘>”, 《조선일보》, 1957년 9월 21일; “[신영화] <잃어버린 청춘> 수준에 이른 작품”, 《서울신문》, 1957년 9월 22일 참고. 4) “[신영화] <유전의 애수>, 한성영화사에서 제작 완료”, 《조선일보》, 1956년 6월 13일. 5) “1천만환의 오픈·센 본격화하는 제작태도”, 《경향신문》, 1960년 11월 14일 4면 참고. 6) “재재정비된 영화사순력(巡歷) ① 한국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 , 《영화세계》, 1962년 11월호, 92쪽. 7) 《영화세계》, 1962년 8월호, 45쪽; “[새 영화] 처음 시도된 본격 추리극 /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 1962년 6월 7일 4면; “[새영화] 본격적인 추리극의 시금석 / 강범구 감독 <검은 꽃잎이 질 때>”, 《서울신문》,1962년 6월 6일 4면; “본격적인 스릴러물 기획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1962년 3월 30일 4면 참고. 8) “[방울새] 때 아닌 기동대/ 영화촬영에 총동원”, 《경향신문》, 1962년 4월 29일 4면; “[스타디오 소식] <검은 꽃잎이 질 때>/ 경찰기동대도 등장/ 백주의 추격전“, 《동아일보》, 1962년 4월 29일 4면 참고. 9) 魯稚子(LU CHIH-TSE), 『世界電影欣賞 APPRECIATION OF THE WORLD FILMS』, BOOK WORLD CO., 1967, 61~62쪽. 10) 이영일, 앞의 글, 1964년. 11) 박진호,「강범구」,『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009, 한국영상자료원, 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