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림대협
- 감독
- 김선경
- 제작년도
- 1978
- 출연
- 왕룡, 장망, 서영란, 안소영, 아평, 한응, 이장미, 냉화유, 박희진, 이동영, 강영철, 강문호, 권성영, 최광수, 오지만, 호억철, 주강, 맥비홍, 이경려, 권일수, 김월성
경성은 식민지 조선의 최대 도시이자, 가장 많은 극장이 ‘밀집’된 곳이었다. 오늘날과 견주어 보면 ‘밀집’이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으나, 전국적인 극장의 분포 정도를 살펴보면, 식민지 시기 내내 경성은 극장의 도시였다. 1930년대 전쟁이니 불황이니 해도 경성의 영화 인구는 계속 늘었고, 그럴수록 경성과 지방 사이의 격차는 벌어졌다. 부산이나 평양 정도의 도시에는 규모가 있는 영화상설관들이 꽤 있었고 필름의 순환도 제법 빠른 편이었지만, 경성과의 물리적 거리가 일종의 ‘문화 지연’ 감각으로 전환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본에서 본 영화를 경성에서 다시 보며 ‘지금 여기’에 묘한 회상의 감각을 덮어보는 엘리트 관객의 시간 감각만큼이나, 경성에서 본 영화를 지방 어느 극장에서 다시 보는 영화팬의 속내 또한 복잡했을 것이다. 카프(KAPF)의 직속 극단 ‘신건설(新建設)’ 창단을 주도했던 신고송은 1932년에 이른바 ‘『우리 동무』 배포 사건’으로 검거되었다가 석방된 후 교사인 아내의 근무지였던 김해군 김해읍으로 이주했다. 김해에 살면서 1936년 『조선영화』 창간호에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을 기고하는데, 이 글은 경성의 지인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식을 취했다. 『조선영화』에는 한때 그와 함께 했던 ‘형들’―송영, 나웅, 최일숙, 고경흠 등―이 글을 싣고 있었는데, 그중 나웅이 이 글의 수신인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사진2.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중에서 신고송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읍내 극장에 영화나 연극이 ‘올’ 때마다 극장에 갔던 모양이다. 그리고 그 극장에서 <암로(강호, 1929)>와 <혼가(김유영, 1929)>,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양철, 1930)> 등 자신의 과거 어느 시절을 추억하게 하는 영화들을 보았다고 한다. 김유영이 연출하고 임화가 주연했던 영화 <혼가>는 엉뚱하게도 ‘나웅’ 주연의 영화 ‘어두운 거리’라고 광고되기도 했는데,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이런 영화들에서 임화의 맵시를 보고, ‘형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자신에게는 위락이 된다고도 적었다. 경성의 영화팬들은 기억도 못할 수년 전의 무성영화가 그가 사는 곳에서는 신작처럼 상영되는 것이다. 김해는 부산에서 가까워 갓 일본에서 들여온 ‘신작’들도 구경할 수 있었는데, 어떤 영화들은 경성의 ‘형들’보다도 신고송이 먼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발성영화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을 무성영화 영사기로 상영하는 낙후된 극장 시설은 ‘경향의 시차’를 더욱 뚜렷하게 각인시킨다. 비슷한 무렵, 시인 이상은 평안남도 성천에서의 영화 경험을 기록해 놓았다. 1935년 9월의 어느 저녁, ‘공기는 수정처럼 맑고, 별빛만으로도 누가복음을 읽을 수 있을 듯한’ 평안남도 성천에 요양 차 머무르던 그는 금융조합 주최의 선전활동사진회 구경을 갔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들”이 모여든 밤,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이라곤 본 적 없는 성천 사람들에게 움직이는 영상은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에 비할 것이며, 영화를 보기 위해 학교 마당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때문이 아니라 축음기 그 자체가 신기해서 모여드는 펭귄처럼, 성천 사람들은 영화의 내용을 알거나 이해할 수 있어서가 아니라 영화 장치 그 자체에 매혹되어 모여든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액션이 화려한 극영화도 아니고, 부산 잔교, 모란봉, 압록강 철교 등 그저 조선의 실경(實景)을 담은 필름의 영사가 끝난 것인데도, 성천 사람들은 마치 서양 명감독의 영화를 접한 듯 우레와 같은 박수를 쏟아냈다. 도회라는 ‘화려한 고향’에서 일상적으로 영화를 경험해온 그에게는 퍽 이질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으리라. 그럼에도 이 상영의 장에서 그 역시 성천의 ‘촌민’들과 더불어 ‘백성’ 혹은 ‘동포’라는 이름의 공동체로 일체화되었던 경험을 짧게 적는다. 사진3.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중에서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조선에서 경성과 지방, 도시와 농촌 사이의 문화적 격차는 경성을 떠나야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터였다. 영화는 과학 기술이 탄생시킨 복제 미디어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사운드 도입 이후에도 조선에서의 영화 이동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1벌, 많아도 겨우 몇 벌의 프린트가 경성에서 지방으로, 도시에서 농촌으로 돌고 도는 식이었다. 더 많은 관객에게 영화 경험을 제공하기 위한 순회 영사는 지역에 따른 경험의 차이도 계속 생성해갔다. 일제가 식민지 주민을 전쟁에 동원하기 위해 문화 선전 활동을 구상할 때, 경향 간 문화 경험의 차이는 더욱 문제가 되었다. 문화 기반 시설이 부족한 농산어촌과 공장 및 광산 지대의 주민에게 영사대를 파견하여 집단적으로 영화를 감상하게 하는 이동영사가 전시체제기에 기획되고 치밀한 조직과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음에도 단시간 내에 수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서울과 지방 혹은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가 추동했던 문화 향유에 대한 갈망과도 깊이 관련된다. 이동영사의 관객들은 거의 대부분이 문화적 혜택으로부터 소외되어 있던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를 보려면 겨울에도 20~30리 길을 걸어야 상영장에 닿을 수 있었다. 이렇게 기꺼이 먼 길을 걸어 보러 올 만큼 이동영사에 대한 호응이 높았던 것은 선전과 교화 수단으로서 영화를 이용하려는 당국의 의도와 오락과 여가, 문화로서 영화를 경험하는 식민지 주민의 수용 사이에 간극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상단사진1. 평양 순회 영사 관련 기사 출처: 《동아일보》 1934년 7월 29일자 2면 (뉴스라이브러리)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서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신고송, 「항구에서 보는 영화들」, 『조선영화』 제1집(1936년), 118~119쪽. 형! 중앙을 떠난 지도 벌써 오래되니 나의 전문이던 연극에까지도 인연이 멀어진 것 같거든, 하물며 영화와는 더욱 남이 된 것 같소이다. 행(幸)으로 부산에 가까이 있으므로 한 달에 한번이라도 보고 싶은 영화는 보기가 됩니다. 그도 일본영화는 간혹 조선 첫 봉절도 있습니다마는 조선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서양 것들은 다, 형들이 감상하고 난 나머지를 얻어 보는 셈이지요. 형! 그래도 이런 시골에 파묻혀 있으면서도 얼굴이 간지러우며 진땀을 흘리면서도 추억의 거리가 되는 재미나는―중앙에 있는 형들은 못 보는―것을 구경합니다. 이 읍에도 명색 극장이 있어 한 달에 한 번은 영화나 연극이 오는데 이러한 한거(閑居)에서 무위의 날을 보내는 나는 우리집 앞 논둑길로 악대가 불고 지나가는 밤이면 꼭 극장에를 가보는 것입니다. 이 덕택으로 서울 사는 형들의 생각에는 어느 집 창고에 먼지에 파묻혀 있으리라고 할 <암로>와 <혼가>와 또는 <바다와 싸우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혼가>가 ‘어두운 거리’로도 되어 나오고 주연이 ‘나웅(羅雄)’이라고도 되어 광고됩니다. 그래 웃으면서 구경 갑니다. 가서 강호(姜湖)의 얼굴을 보고 임화(林和)의 맵시를 보고 형의 얼굴을 보는 것이 나에게 한갓 위락이 됩니다. 강호 군은 <암로> 이야기만 내면 아주 미안해하고 싫어합니다만 근 십년 전의 작품이오, 초기의 첫 작품이 그러하다는 것이 왜 강호의 불명예야 되겠습니까. 형! 이러한 시골 극장에서 얻는 에피소드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한번은 <부라커 대학생>이라는 광고로 영화가 상영되기에 나도 무심히 구경을 갔었지요. 그랬더니 ‘부라커’는 정히 저 ‘프라-그’이고 영화는 그 유명한 <프라하의 대학생[Der Student von Prag]>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벤갈의 창기병[The Lives of a Bengal Lancer, 1935]>이 왔기로 나는 그것을 전에 볼 기회가 없어 못 보았는지라 가보았더니 사일런트 기계로 무성으로 올리겠지요. 영화로서 효과는 전연 없어졌지마는 영화에 의하여 느끼어진 적이 최근에는 없는 나로서는 느껴지는 것이 있습디다. 어떻게 해서 영국이 토민을 학살하고 그들의 부를 축적했는가, 그것이었습니다. 소위 서부활극이라는 것에 있어서도 아메리칸 인디언을 취급하는 데서도 흔히 보는 것이지만 인종적으로 모욕해서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보니 분개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형! 이래도 부산서 형들이 먼저 보기 전에 서양영화를 첫 봉절에 하나 보았습니다. <춤추는 브로드웨이[Broadway Melody of 1936]>, 그 어이 없이 시끄럽고 날뛰는 영화 말입니다. 늙은이 코 고는 것이 ‘상승음계형’, ‘하강음계형’, ‘권태형’ 등등 수십 종의 형으로 유별(類別)하는 재주에는 경탄했습니다만, 양키들의 끝없이 □□[식별 불가]하는 광조난무(狂躁亂舞)는 아메리카 문화를 경조화(輕燥化)하는 것이 발성영화의 죄일는지요, ‘엘레지 오브 아메리카’의 죄일는지요. <톱 햇[Top Hat, 1935]>, <오페라 해트[Mr. Deeds Goes To Town, 1936]>, <함대를 뒤쫓아서[Follow the Fleet, 1936]> 등등 끝없이 재즈문화는 재즈화해가고 ‘폭스 트로트’는 ‘룸바’에 가지로 증후는 악화해 가는 모양입니다. 아메리카의 영화가 내용적으로 저열해지건, 불란서에서 <마주르카>니 <에키파-쥬>니 우수하다고 하는 영화들이 뒤이어 소개되건, 조선영화의 소조(蕭條)한 비발전(非發展)에는 경탄을 마지않습니다. 그 원인은 허다하겠지요마는 한심한 일입니다. 이곳 극장에서 발성영화 <××전>을 구경했습니다마는 그러한 거액의 돈으로 그것밖에는 만들지 못한 원인은 기술의 부족으로 보아야 옳겠지요. 기술이 있는 이들이 그냥 썩어져 있건마는 기회는 항상 그것을 찾아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은 데서만 방황하니 기회 그놈이 무심타고 하겠습니다. 일본영화가 장족의 발전을 하고 있고 중국의 영화도 최근 훌륭한 것들이 나온다고 하니 어이 남의 일만 같다고 하겠습니까. 이제는 아마 조선영화도 기업적으로 채산이 되는 듯하니 대중의 저속한 취미에만 영합하려는 통속화의 경향을 집어치우고 예술적 양심을 움직여 대중의 영화에 대한 감상안을 높여가야 영화문화의 진전이 있지 않겠나요. 외국영화 더욱이 불국(佛國) 영화를 보면 모든 것에 있어서 화면에 넘치는 여유작작한 것을 얻을 수 있는데 조선영화에 있어서는 시나리오 그것에 그러하고 연기에 그러하고 감독에 그러하여 모두가 여유가 없으니, 이것은 기술의 탈일까요. 저들의 생활에는 여유가 있고 우리의 생활에는 궁박(窮迫) 그것이 모든 것에 반영되어 그럴까요. 형! 지금 나의 경우에는 이것으로 영화에 대한 이야깃거리가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형의 건강을 빌고 마지않습니다. 2. 이상, 「산촌여정 - 성천 기행 중의 몇 절 (완)」, 《매일신보》, 1935년 10월 10일 및 11일 자, 조간 1면, 부분 발췌 이 마당[학교 마당]에서 오늘 밤에 금융조합 선전활동사진회가 열립니다. 활동사진? 세기의 총아—온갖 예술 위에 군림하는 ‘넘버’ 제8예술의 승리. 그 고답적이고도 탕아적인 매력을 무엇에다 비하겠습니까. 그러나 이곳 주민들은 활동사진에 대하여 한낱 동화적인 꿈을 가진 채 있습니다. 그림이 움직일 수 있는 이것은 참 홍모(紅毛) 오랑캐의 요술을 배워가지고 온 것 같으면서도 같지 않은 동포의 부러운 재간입니다. [...] 밤이 되었습니다. 초열흘 가까운 달이 초저녁이 조금 지나면 나옵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전설 같은 시민이 모여듭니다. 축음기 앞에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북극 ‘펭귄’ 새들이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짧고도 기다란 인생을 적어 내려갈 편전지(便箋紙)—‘스크린’이 박모(薄暮) 속에서 ‘바이오그래피’의 예비 표정입니다. 내가 있는 건너편 객줏집에 든 도회풍 여인도 왔나봅니다. 사투리의 합음(合音)이 마당 안에서 들립니다. 시작입니다. 부산 잔교가 나타납니다. 평양 목단봉입니다. 압록강 철교가 역사적으로 돌아갑니다. 박수와 갈채—태서(泰西)의 명감독이 바야흐로 안색이 없습니다. 십분 휴게시간에 조합 이사의 통역부(通譯附)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달은 구름 속에 있습니다. 금연—이라는 느낌입니다. 연설하는 이사 얼굴에 전등의 ‘스포트’도 비쳤습니다. 산천초목이 다 경동할 일입니다. 전등—이곳 촌민들은 XX행 자동차 ‘헤드라이트’ 외에 전등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 눈이 부시게 밝은 광선 속에서 창백한 이사는 강단(降壇)하였습니다. 우매한 백성들은 이 이사의 웅변에 한 사람도 박수치지 않았습니다—물론 나도 그 우매한 백성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마는—.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해방 직후 남한 영화 장을 설명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남아 있는 영화가 많지 않은데다 혼돈의 국내의 영화계 상황을 알 수 있는 사료의 존재가 미흡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이 시공간의 영화 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연합국 소속의 미국의 점령지 영화 정책과 미군정의 영화 정책의 기조를 참조해야하는 국제적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국외의 적극적인 사료 확보 노력을 통해 국내적 시각과 국제적인 정치·경제·문화의 중층적인 맥락 속에서 남한 영화계를 조망하는 시도와 연구 성과가 늘어나고 있다. 이 글은 그러한 흐름에 기여할 수 있는, 주목할 만한 사료를 널리 소개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미국과 소련 간의 한반도 분단 점령이 결정된 후, 남한에는 1945년 9월부터 미육군 24군단의 A. V. 아놀드 소장이 군정장관에 취임하면서 주한미군정청 체제가 본격 수립되었다. 미군정은 미국의 대외문화 정책과 문화 기조에 따라 남한의 영화 정책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정치적‧ 경제적 목적을 설정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치를 전파하면서 남한 내의 좌익세력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는 남한을 미국영화의 소비시장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한편, 이 시기 남한의 영화인들은 해방된 조국에서 ‘민족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희망을 품고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다. 물론 당시 남한 영화계의 현실은 영화인들의 노력 여하나 영화계 고유의 논리가 아닌 정치동향에 좌우되고 있었다. 초국적 냉전 구도에 돌입하면서 정부 수립은 더디게 진행되어, 미군정기 체제의 남한은 국제무역을 할 수 있는 ‘국가’ 자격이 없었고, 같은 이유로 국제무역시장에서의 환율도 결정할 수가 없으므로 국내 생산이 되지 않는 생필름을 비롯한 자재와 설비가 수입될 방안이 전무했다. 게다가 이 시기 영화계의 인재들이 좌우로 나뉘었고, 경제적 혼란으로 인해 제작 자본을 조달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미군정의 민간 대행 기관인 중앙영화배급사(Central Motion Picture Exchange, CMPE)가 들여오는 미국영화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은 물론이고 질적으로도 월등했기 때문에 남한의 극장은 미국영화로 가득했다. 새로운 영화와 ‘민족영화’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미군정기 남한 영화인들은 군과 관에서 흘러나오는 생필름을 공식‧비공식 루트를 통해 구해, 군과 관에서 잠시 빌려 온 카메라를 돌려써가며 16미리 극영화를 제작했다. 점령지 일본과는 달리, 영화 제작에 있어서 미군정의 정책적 지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남한 영화계는 이 시기 아무런 진전과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는 것이 당시 남한 영화인들의 중론이었다 1 . 이제 소개할 사료는 1949년 잡지 《상품의 세계동향(World Trade in Commodities)》에 실린 남한의 영화산업에 대한 세 편의 보고서 형식의 기사이다. 이는 영화 사진부서 부서장 골든(N. D. Golden)의 “영화와 장비(Motion Picture and Equipment)”를 특집으로 한 기획의 일부로 보인다. 1949년 1월 먼저 ‘남한의 영화산업(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이라는 4쪽 분량의 보고서가 실렸다. 이어 4월호에는 “남한”이라는 꼭지의 1쪽짜리 보고가 실렸고, 9월호에는 2쪽 분량의 “대한민국의 16미리 오락 영화(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가 소개되었다. 《상품의 세계동향》은 미국 워싱턴의 국내외통상부 국제무역사무소(Bureau of Foreign and Domestic Commerce, Office of International Trade)가 1947년에서 1950년까지 발행하던 정기간행물이다. 매호는 통상(Commodity exchanges)과 관련한 특별 기획을 주요하게 담고 있고, 나머지 부분에는 여러 형식의 다양한 내용이 섞여 있다 2 . 정부에서 발행한 기관지이지만 잡지 가격이 명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관 배포를 위한 목적과 함께 국내외의 일반 판매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해외 아카이브를 통해 수집되어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 장을 이해하기 위해 활용되는 사료는 대부분 주한 미군정청(U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나 미국 공보원(United States Information Service, USIS), 전쟁부(혹은 육군부)가 생산한 문서가 중심이 된다. 이들 사료는 점령지의 시민들을 재정향(re-orientation)하고 재교육(re-education)하기 위해 군과 관에서 제작한 계몽성과 교육성이 강한 다큐멘터리와 문화영화를 제작, 공급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이 과정에서 함께 유입되는 할리우드 영화는 군과 관에 있어 점령지 시민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관심을 끌기 위한 용도라는 면이 더 강했다. 이 사료의 생산주체는 미국 내 정부기관이지만 해방기 남한의 영화 산업의 현황을 철저히 ‘할리우드’ 즉 미국 시장과의 상관성을 염두에 두고 경제적 관점으로 미래의 투자자들을 위해 분석하고 기술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또 ‘인력, 자본, 설비와 기자재난이 심했다’는 정도의 서술로 남아있어 국내 사료가 포괄하고 있지 못한, 남한 내 영화 산업의 상세한 수치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그 분석 방법과 제공된 수치의 정확성을 교차 확인할 필요가 있겠지만) 그 존재 가치가 크다 하겠다.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ure Industry in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Part 4, No.1, January, 1949. 이 사료는 1949년 서울 소재의 미합중국 정치자문사무소(Office of United States Political Advisor)의 사무관 윌리엄 브라운(William B. Bruns)이 작성한 보고서 형태의 기사이다. 새롭게 정부가 수립된 대한민국이 과연 미국의 영화 및 각종 장비의 수입 시장으로서 얼마나 높은 가치를 지니는지 타진하기 위한 예비 조사서로 보인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이 보고서는 미군정이 대한민국 정부로 정권을 이양하고 난 뒤 남한의 영화 산업과 장비 현황을 몇 개월간(1948년 8월부터 1948년 12월)간 수집 조사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의 민간 영화사와 생필름이나 현상 관련 약품 회사, 영화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생산하는 기업의 남한 시장 진출에 도움을 주고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윌리엄 브라운은 이 보고서에서 제공하는 정보는 “미군정의 여러 기관들. 특히 남한의 영화산업을 통제하는 부서인 공보부 영화과를 통해서 얻은”내용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밝힌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고서의 정보를 따라가다 보면, 이것이 미군정기(1945년 9월 8일~1948년 8월 15일)간의 전체 현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인지, 1948년 8월 15일 이후 12월까지 4개월간 대한민국 정부 설립 이후의 상황을 보고하는 것인지 혼돈스럽다. 하지만 이후 4월 폴 스트럼이 작성한 “South Korea”에서 추가적으로 밝히는 바로 추측하면, 이 보고서의 내용은 전자, 즉 미군정기 남한의 영화산업 현황을 정리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보고자는 ‘서장(Introduction)’에서, “미국적 기준에서 보면, 한국은 빈곤했고 현대적인 삶에 필수적인 산업적 그리고 기계적 장비에 대한 중대한 결핍이 있다 …… 철수한 일본인들의 산업화의 공백이 메워지지 않는 한, 영화 산업에 있어서 물리적인 성장에 대한 희망은 거의 없다”고 부정적으로 전망한다. 동시에 그는 “영화산업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근대적 경제를 지원할 한국의 능력에 달려있다”고 전제한다. 이 보고서의 행간에는 당분간 남한 영화 산업의 성장에 대해서 매우 회의적이며, 할리우드의 완성된 영화 제품을 공급할 수 있는 시장으로 설정할 수 있겠지만 생필름이나 약품, 제작 기자재 및 상영 장비를 원활히 판매할 수 있는 무역대상국으로 설정하기는 다소 힘들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그럼 이 사료를 개괄적으로 훑어보자. 보고서가 중점적으로 담고 있는 내용은 우선 남한의 무역 제한(Trade Restrictions), 검열(Censorship), 배급(Distribution), 저작권 규제(Copy Regulation), 제작(Production), 세금(taxation), 상영(Exhibition), 광고(Advertising)의 현황에 대해 요약하고 미국의 상품 판매의 영향(Influence on Sales of United Merchandise)이 어떠할 것인지에 대한 것들이다. 그 다음으로는 16미리 극장 영화(16mm Theatrical Motion Picture)가 남한에서 어떤 식으로 무역제한, 배급, 상영, 제작이 진행되고 있는지와 장비(Equipment)의 보유 현황이 어떠한 지를 설명하고 있다. 마지막으로는 남한의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Visual Education and Equipment)의 현황에 대해서 기록하고, 남한 극장이 보유하고 있는 영화 시설(Theater Motion Picture Equipment)에 대해서는 영사 시설과 음향 시설(Theater Projection and Sound Equipment), 스튜디오 시설(Studio Equipment), 장비 생산과 판매(Production and Sales Equipment)로 나누어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림 1] William B. Bruns,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Motion Pictgure Industry in South Korea" 보고서 1쪽 ‘남한의 무역 제한’ 부분은 35미리 극장용 영화를 중심으로 설명한다. 1948년까지 미국영화를 들여오는 데에 있어서 수입허가는 필요하지만, “사실상 미국영화의 배급을 막거나 감소시킬만한 스크린 쿼터나 대표적인 규제는 없다”고 밝힌다. 그리고 당시까지 들여온 할리우드 영화는 미국의 다른 에이전시를 통해 들여온 것은 없고, “CMPE가 뉴욕을 거쳐 할리우드에서 한국으로 들여오는 미국 극영화는 연합국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의 지휘권 하에서 운용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법으로 모든 외화에 10%의 수입관세를 부과하고 있는데, 실제로 미국영화는 군을 통해 들여오는 셈이므로 세금을 내지 않았으며, 다른 외화 주로 중국영화가 수입관세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 역시 적고 있다. ‘세금’ 에서 보면, 관세 외에 영화에 붙는 유일한 세금은 극장 입장세로 30%라는 점을 명시한다. ‘검열’ 에서는 남한에 수입된 외화를 관할하고 검열하는 기관인 미군정 공보부 영화과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허가된 모든 영화는 검열을 거쳐야하고 허가권 없이는 상영이 금지된다. ‘검열위원회’는 한국인 1명, 보통 영화과장과 같은 책임의 미국인 1명으로 구성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들여오는 미국영화는 이미 미육군 부서에서 한국에서 미국의 점령과 민주주의에 해로운 내용에 대해서 기본적인 검열”을 실시하여 이미 “한국인의 감수성을 해칠 것 같은 내용”이 통제되고 있으므로, 공보부의 검열위원회는 “한국인에게 낯선 생활을 묘사하는 것들”만을 제한하고 있는 셈이 된다. ‘배급’ 부문은 1948년을 기준으로 한 남한 영화 배급 현황을 설명하고 있다. 기간 중 85편의 극영화, 뉴스릴 그리고 외화가 상영되었다는 점을 적으면서, 인플레이션과 노후한 기자재로 영화 배급이 원활하지 못하며 극장은 영화상영보다 무대공연이 더 이익을 발생시키는 오락이라는 난점이 있다는 점도 지적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론적으로 이 나라에 매년 150편의 극영화가 수입된다면 각 극장은 매주 다른 영화를 선보일 수 있다.” 상업적으로 배급되는 극영화는 대부분 포지티브로 공급을 받으며, 극장보다는 이동영사가 더 많은 다큐멘터리는 16미리로 프린트한다고 전한다. 1948년 남한에서 “미국영화에 대한 매표수익은 연간 60,000,000에서 70,000,000원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대한영화사(Korea Motion Picture Company), 조선영화사(Chosun Yun Wha Sa) 그리고 이 프로덕션(Lee Production)”, 남한의 영화 제작 조직은 3개가 있다고 ‘제작’ 에서 적고 있다. 이필우가 이끄는 “이 프로덕션은 현상, 녹음, 프린트 복사, 축소, 특수효과 그리고 자막 등을 한다. 다른 두 회사는 자신들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다. 이 부분에서는 남한 영화인들의 필름, 기자재, 인재 부족이라는 열악한 제작환경에 대한 묘사가 상세하다. “남한 내 극영화 제작비는 평균 2,000,000원에서 3,000,000원이 든다”는 서술이 인상적이다. ‘상영’ 에서는 한국인들이 뮤지컬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좋아한다고 밝힌다. 미국영화는 인기가 좋아 모두 단독으로 상영되었고, 한국영화와 다른 외화(주로 중국영화)는 동시상영으로 편성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적고 있다. 남한은 96개의 극장에 54,120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데, 미국인이 보기에 80%정도는 좋지 못한 상태였다. “주 평균 영화관객은 425,000명, 대도시 상영은 보통 1시에서 자정까지 연속으로 이어진다.” 입장료는 50원이 기본인데, 특별한 영화의 경우는 80원, 또 남한의 극장 연 수입은 300,000,000원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6미리 극장영화’에 대한 두 번째 부분의 보고는 앞부분 35미리 극장영화와 대동소이하다. “검열비용은 없지만 16미리 상영에 대한 허가비로, 3개 릴 이하에는 400원, 4~7개 릴은 700원, 7개 릴 이상은 900원이 부과”된다는 사실이 추가되어 있다. 또한 남한에서는 16미리로 된 외화는 사실상 상업적으로 이용되지 않으며, 개인 사업자나 사회단체가 사적으로 상영하는 정도가 가능하다. ‘제작’과 ‘장비’현황을 보면, 현재 남한에서 영화제작이 요원하고, 16미리 현상과 축소 기구는 정부가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상영’ 부분까지 포함해서 보면 남한에 16미리 상업 영화극장이 없으며, 인구 대부분이 농촌에 분포해 있음에도 극장 시설이 부재하고 극장 설치 역시 요원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런 곳들에 16미리 영화를 상영하고자 미군정 민사처는 전국 지부에 16미리 프로젝터 300개를 보유하고 이동영사단(mobile unit)을 운영하고 있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군정은 점령지의 재정향과 재교육을 위해 영화를 비롯한 시각 미디어를 적극 사용했는데, 관련 내용을 바로 ‘시각 교육과 16미리 장비’ 에서 확인할 수 있다. 미군정 당국은 시각 교육을 목적으로 16미리 교육영화와 슬라이드, 교사 매뉴얼을 수입하였다. 이와 관련한 법도 없는 상태였다. 특히 미군을 위한 영화는 허가도 허가비도 없다. “남한에 있는 3,415개의 초등학교, 425개의 중등학교, 29개의 대학”을 대상으로 한 시각교육 보조 수단들은 면세가 인정되는 분위기였다. 교육 영화들은 공보부 영화과 검열을 거쳐, 400원의 허가비를 내고 상영되었다. 민간 조직에 25개, 정부기관인 민사처에 300개 정도 있었지만, 16미리 영사기에 대한 요구는 당시 엄청났다. “교육에 영화가 사용되는 것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이 자료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하는 내용은 ‘극장의 영화 장비’로, 영사 및 음향 시설에 대해 상세히 언급하고 있다. 35미리 영사기, 아크 램프, 악세서리, 모터 발전기와 정류기, 커튼 트랙과 장치 등 전반적으로 너무 노후했고, 상당히 많이 수리되어 사용되고 있어 형편없는 상태이다. 96개의 극장 중에 서울에 있는 3개만 에어컨 설비(팬 유형의 강력 송풍기)가 설치되어 있다고 적고 있다. 남한에서 운영 중인 유일한 ‘스튜디오 설비’는 아마도 조선영화사를 의미하는 듯한데, 시설 상태가 좋지 않은 길이 65, 폭 35, 높이 40(인치)의 작은 무대가 2개 있다. 이 사료에서 살피는 바, 미군정기 및 초기 대한민국 정부 시절 남한의 영화 산업은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보고자가 보기에 남한의 외국 무역은 아직 충분히 신뢰를 얻어낼 만큼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영화산업에 있어서도 미국과 교류가 요원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의 외화 시장 점유에 있어서 중국영화의 유입을 민감하게 주시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당시 미국과의 영화 관련 무역 교류에서 가장 큰 난점은 “통화에 대한 환율이 설정되지 않았”던 데 있었다. 당시 “남한으로의 수입은 물물교환(barter) 기반”인데다가, 본국으로 송금이 허가되지도 않은 상황은 “CMPE가 자신들의 영화를 상영하는데 있어서 적지 않은 재정적 손실을 낳게” 했던 것이었다. 2. Paul J. Strum, “South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April,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의 미국사절단(United States Mission) 폴 스트럼이 4월호에 실은 1쪽 분량의 것이다. 이전의 보고서인 “남한의 영화산업” Vol. 7, Part 4, No.1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영화 관련 남한의 정치적 변화 상황을 짚으며 글을 시작한다. “남한이 자치를 하고 있고, 그 세법이 변화하는 중이며, 미국영화에 대한 수입관세와 검열이 부과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서는 지난 1월의 기사 내용과 달라진 점들을 중심으로 보충적으로 기술한다. 내용은 무역 규제, 배급과 검열, 세금, 상영, 제작 부분을 포괄하고 있다. [그림 2] Paul J. Strum, "South Korea" 보고서 ‘무역 규제’ 에서 보면 “CMPE는 1947년 4월 이래로 60,000,000원의 잔고”를 가지고 있지만 역시 환율도 정해지지 않았고 송금도 불가해 이전과 달라진 점은 없다. ‘세금’ 부문에서 기술하는 것처럼 “외화에 대한 세금 역시 유보된 외환문제의 해결에 달려있다.” 반면 남한 정부 수립 이후 관세에 변화가 생겼는데 “수입한 오락 영화는 임의로 피트 당 50원으로 임의로 계산한 후 여기에 10%의 관세에, 30%의 물품세가 더해져 매 피트에 부과되는 비용이 21.50원”이 되었다. 그러므로 미군정기와 달리 “최근 미국 영화에 대한 관세와 물품세는 극영화 당 175,000원에서 245,000원”에 이르게 되었다. 이전에는 없던 수입영화에 대한 소정의 검열비가 생겼고, 극장 입장권에는 1948년 6월부터 100%의 유흥세가 붙기 시작했다. ‘배급과 검열’ 에서도 미군정기와 비교해 미국영화에 대한 검열이 강화된 것을 볼 수 있다. “2편의 미국영화를 상영금지 시켰고, 다른 영화에서 200피트를 삭제했으며, 원칙적으로 폭동 장면과 탈옥 장면이 삭제”된 것이다. 그래서 1948년 동안 “66편의 미국 오락영화가 한국으로 수입되었고 41편이 배급”되었다. 이 보고서가 추론하는 바 한국영화의 수입은 “전체 수입의 15~20%” 정도이다. ‘상영’을 통해 1월의 보고서와 비교해볼 때, 55,110개의 좌석을 보유하고 있는 극장은 116개로 늘어났고, 주 평균 관객은 220,000명으로 줄어들었다. “입장료는 작은 상영관 50원에서 큰 도시 상영관 150원까지 분포”되어 있는데 이는 대중의 지불 능력을 따져볼 때 퍽 높은 편이라고 언급한다. 이 보고에서는 남한의 영화인에 대한 평가가 높지 않다. 제작자와 제작사를 통틀어 25개가 있는데, 이중 7개 정도가 실제적인 영화제작이 가능할 것이며 합리적이고 능숙한 영화기술자는 6명 정도라고 적는다. 35미리로 극영화 5편, 2~3개의 단편이 제작되고 10~11편의 16미리 영화가 제작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암시장에서 팔리는 생필름 가격이 피트 당 30~40원 정도라고 언급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이 보고서는 필자가 어떤 경로로 해당 부문들의 정보를 취합하고 조사했는지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아쉽다. 글의 말미에서 폴 스트럼은 스튜디오나 극장의 설비 대부분은 거의 폐기해야할 정도이고, 이런 상황에서 남한 영화산업에 투자 여부를 결정한다는 자체가 극도로 힘들 것이라 마무리한다.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World Trade in Commodities Vol. 7, No.26, September, 1949. 이 보고서는 서울 주재 미국대사관의 프란더가스트(O. M. Prandergast)가 작성한 것으로, 이제 활발하게 제작활동이 가속화되고 있던 남한의 극장용 16미리 오락영화에 대한 내용을 중점적으로 기술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보고서와 다르다. 이 시기 16미리 영화제작이 증가한 이유는 미공보원의 활발한 활동 때문이었다. 현재 확보된 사료의 분량은 1쪽인데 이전의 보고서들의 형식과 내용을 참조하면 전체 2쪽에서 1쪽이 유실된 것으로 보인다. 무역 제한, 배급, 상영, 제작 등 기술 항목과 형식은 4월의 보고서와 유사하다. 1949년 7월 드디어 환율이 책정되어 미국통화 1달러가 900원으로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남한 영화제작자와 상영업자들은 열악한 장비와 생필름 부족으로 여전히 애를 먹고 있고, 이 부족을 해결해 줄 외화 교환 방안도 없”는 상태였다. [그림 3] O. M. Prandergast, "Motion Picture and Equipment: 16mm, Entertainment Film in the Republic of Korea" 보고서 ‘무역 제한’ 에서 보면 수입 허가는 여전히 필수이고, “관세는 10%의 종가세, 30%의 국내소비세가 필름과 세금 가치의 합으로 부과되어 세금과 국내소비세는 총 43% 종가세”로 되었다. ‘배급’ 에서 남한 공보부 영화과의 검열을 문제 삼는다. “미국영화에서의 폭력과 열정의 장면들이 삭제당”하고 있는 반면 “한국이나 중국영화는 폭력을 그들 나름대로 그려내”고 있다면서 검열을 빠져나간다고 묘사한다. 게다가 “일본의 전쟁 범죄자들을 교수형 시키는 실제 처벌 장면을 보여주는 미국공보원의 뉴스릴은 한국 관객들에게 광범위하게 매우 인기가 있”어 검열을 피한다고 원칙 없는 검열에 대해 불만을 피력하고 있다. 검열비는 없지만 검열을 선행조건으로 하는 상영허가비용을 상세히 적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국영화 1-3릴 4,500원, 4-7릴 7,800원, 8-13릴은 10,200원. 외화의 경우는 1-3릴 6,500원, 4-7릴 11,400원, 그리고 8-13릴은 14,700원.” 1948년 1월 이후 미공보원에서는 “매달 15편의 영화가 제작되고 있고 각 영화는 12개에서 15개의 프린트를 뽑는다. 전후 미공보원의 생산량은 현재 총합으로 대략 330편정도”이다. 매달 생산하는 영화는 6개의 뉴스릴, 4,5편의 극영화, 나머지는 다큐멘터리이다. 미공보원의 영화는 무료로 배급되지만, 16미리 다른 오락영화의 대여료는 다양하다는 점도 명시하고 있다. 미국 영화 이외에 수입된 외화에 대해서도 기록하고 있는데, “1948년 11월 15일에서 1949년 7월 3일까지 공보부 영화과의 기록에는 일본영화 4편, 영국영화 1편, 독일영화 6편, 프랑스영화 2편, 이탈리아 영화 3편 그리고 스웨덴의 16미리 영화 1편의 극장용 영화가 상영허가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중국의 16미리영화도 한국에서 상영되었으리라” 추측하고 있다. 한국에서 해방 후 제작된 16미리 극장용 영화는 13편인데, 이중 8편이 1949년 1월 이후 조선영화사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며, “16미리 장편 제작에 소요되는 비용은 5,000,000원”이라고 설명을 덧붙인다. ‘상영’ 에서는 남한에 115개의 극장이 있고 모두 35미리 영사기를 가지고 있다고 적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대부분 “16미리 영화가 상영가능하다면 모두 16미리 장비를 빌리려고” 한다. 입장료는 지방 최고가 120원, 서울 최고가 200원이며, 마찬가지로 입장료의 100%가 흥행료라 기술한다. 이 자료의 작성자가 16미리 극장 영화 설비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지역사회의 기초시설로서 영화관 설립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농촌 인구 분포가 높은 남한은 미공보원의 이동영사대가 아니면 많은 이들이 1년에 영화 한 편을 볼 수 없으나, 근본적으로 한국 마을에 16미리 극장 장비가 부족하므로 영화관 설립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래서 미공보원의 “사륜구동과 윈치(winch: 밧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작은 크랭크)가 장착된 자동차는 일 년 내내 한국도로를 달리며 여행”한다. 1. 심혜경, 「안철영 텍스트를 통해 본 대한민국 설립 초기 ‘조선영화’ 연구」,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2, 14~20쪽. 2. 이 간행물의 서지는 호주국립도서관의 정보를 참조했다. National Library of Australia https://trove.nla.gov.au/work/31968523?q&versionId=38809543
1925년 진도군 출생인 박종민은 식민지시기 세무 공무원 부친을 따라 전남 지역 일대를 옮겨 다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목포시 목포극장에서 처음으로 영화 세계를 접하게 된다. 식민지 말기 당대 명필(名筆) 소전(素田) 손재형(孫在馨)이 박종민의 외가(外家) 인척(姻戚)이었기 때문에 목포극장을 자유롭게 들락거릴 수 있었다. 그리고 목포극장 직원들과의 인연은 1950년대 후반 시작된 박종민의 순업(巡業)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 박종민은 식민지시기 전남 화포(靴布) 배급조합 서기, 한국전쟁 와중 진도읍에 전력을 제공하는 전업(電業)회사 운영 그리고 휴전 이후 진도군 벽파진에서 염전(鹽田)을 운영하는 등 지역 내 사업가로 경험을 쌓았다. 지역 사정에 훤한 박종민은 1950년대 중반 목포극장 영사기사가 진도군에서 순업을 시작하자 그들의 편의를 봐주다가 직접 흥행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1950년대 후반 전라도 지역 연예계 흥행사들이 모이는 광주시 호남동 태평극장 옆 ‘일등여관’에 들리면서 인맥도 쌓았다. 박종민은 영화 상영 이외에 창(唱)을 선호하는 지역민의 특성에 맞춰 진도에 ‘소리꾼’을 불러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그가 영화 흥행으로 본격적인 수익을 올리게 된 것은 국산영화 작품수가 늘어나고 필름 간접 배급 체계 정착되면서부터였다. 1960년대 초반 진도군을 떠난 박종민은 한양영화사라는 상호를 걸고 전남 곡성군 곡성읍을 시작으로 전국 순업의 길에 올랐다. 그가 곡성에서 영화를 상영한 곳은 논밭이나 마을 공터가 아닌 흥미롭게도 곡성문화원 건물이었다. 곡성문화원을 임대하여 당시 군(郡) 지역 상설극장과 마찬가지로 이틀에 한 번꼴로 35mm 새로운 영화를 선보였으니 자연스레 손님을 많이 끌 수 있었다. 곡성읍은 1965년에 들어서야 단층짜리 중앙극장이 상설극장으로 개관했기 때문에 박종민의 한양영화사 활동을 대적할 경쟁자도 없었다. 곡성읍 다음으로 박종민이 찾은 곳은 충남 천안시 성환면(현 성환읍) 성환문화원이었다. 1958년 이미 천안시 천안극장이 개관하여 영업을 하고 있었지만, 천안극장은 천안시 동남쪽에 위치한 까닭에 천안시 서북쪽 지역인 성환면 주민들은 극장을 쉬이 찾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한양영화사의 주야 2회 정기 상영과 화질과 크기에서 앞섰던 35mm 영화는 이전까지 성환면에 간헐적으로 들렀던 16mm 노후한 영사기 소지 순업과 비할 바 아닐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하지만 박종민은 곡성과 성환 지역에서 각각 1년 동안만 흥행을 올리고 해당 지역을 떠나야 했다. 상설극장의 등장과 관객 숫자의 감소라기보다 지역 청년과 상이군인 단체의 ‘텃세’ 때문이었다. 한양영화사의 흥행을 지켜보던 지역 청년들이 문화원 건물에서 직접 흥행하겠다고 나서면서 연고(緣故)가 없는 ‘타지(他地) 사람’ 박종민은 계속 머물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박종민은 문자 그대로 며칠만 머무는 방랑의 순업 길에 오른다. 그는 충남과 충북 그리고 경기도 일대를 떠돌며 흥행을 계속해갔는데, 그의 이동 경로(route)를 보면 순업이 1960년대 영화 상영의 전국화를 달성하는데 톡톡히 기여했음을 알 수 있다. 박종민은 성환면을 떠난 이래, 천안시 입장면과 예산군 삽교읍과 덕산면 그리고 충남 당진군과 충북 옥천군 안남면 지수리 일대를 거쳤다. 또한 경기도 남쪽의 평택군(현 평택시)과 화성군(현 화성시), 동쪽의 양평군 용문면과 이천시 장호원, 그리고 북쪽의 남양주시 덕소리를 지나 연천군 군부대 마을까지 두루 거쳤다. 영화가 상영되면 가설극장이 열리는 지역을 중심으로 반경 8km 이내 부락민이 밤길을 걸어 몰려들었다. 박종민은 건강상의 이유와 진도군에 남아있던 가족의 요청으로 1970년대 후반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진도군 일대를 돌며 순업을 일삼았다. 박종민에게 순회 흥행은 때로 낭만이었고, 때로 남에게 말하기 ‘껄끄러운’ 일이기도 했다. 이동영사 일은 ‘건달 사업’이었기 때문이다. 건달은 해방 전후 등장하여 1960년대까지 명맥을 유지한 ‘놀고먹는 사나이’라는 뜻으로 사용된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그리 단순하게 정의내릴 수도 없는 말이었다. 박종민의 표현대로, 건달은 “다방면으로 유능한 사람들”이었다. “다방면으로 주먹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술도 잘 먹고 연애도 잘하고. 말하자믄 다방면으로 능숙한 사람들”이 건달이었고, 건달이 되어야만 영화 흥행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가 정의내린 건달이라는 말은 격동의 한국 현대사 가운데 순업을 하며 평생을 보낸 흥행사의 애환이 녹아들어 있었다. 그것은 반공과 지연(地緣)의 질서가 작동하는 한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흥행 보장을 위해 다양한 술수가 동원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의 반영이었다. / 글: 위경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