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없는 통합검색 결과
검색 결과 분류
총 513개
정확도 순 필터
영화정보
수집자료
이름없는 자들의 이름
- 자료유형
- 본편
- 종류구분
- DCP
- 파일형식
- MOV
이름없는
- 자료유형
- 본편
- 종류구분
- DCP
- 파일형식
- MOV
이름없는 별들
- 자료유형
- 본편
- 종류구분
- DSM
- 파일형식
- DPX
이름없는 영웅들 제01~02부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이름없는 영웅들 제19~20부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이름없는 영웅들 제01~02부
- 매체규격
- VHS
- 상영시간
- —
- 자막
- —
- 보관위치
- —
이름없는 가수 제2집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59:50
이름없는 가수 제2집-윤정희
- 매체유형
- LP
- 연주시간
- 59:50
일본(日本)서 돌아온 이름없는 가수 제1집
- 매체유형
- CCT 콤팩트카세트
- 연주시간
- 59:15
국산영화 "이름 없는 별들" 상영허가의 건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영화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학생관람 재심에 대한 회보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영화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학생관람에 대한 통보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심의서류
- 보관위치
- —
콘텐츠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경기도로 이사한 후 내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 한번 서울 밖으로 나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서울 서대문구에서 태어났고, 마포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으며, 독립한 후에는 줄곧 은평구에 살았다. 부산 금정구 금정경찰서에서 보낸 군생활을 제외하면 서울의 서북 3구, 그 안에서도 반경 10키로미터가 넘지 않는 좁은 장소에서 평생을 산 셈이다. 개굴개굴. 그런 내게 사람들의 말은 토머스 울프와 이문열을 떠올리게 할 뿐이다. 두 작가에게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그들 모두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제목의 소설을 썼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 경기도에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울로 돌아가고 싶기는커녕 오히려 꼭 서울에 살아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지만 그건 내가 (갈 곳 없는) 프리랜서이고, 이사를 통해 아내의 출퇴근길은 (조금이나마) 편해졌으며, 아내와 나 모두 문화생활(정확히 말하면 외출)을 즐기지 않는 성격이고, 아이의 학군이나 사교육 같은 걸 신경 쓸 필요가 (아직은) 없는 데다가, 가족 중에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녀야 하는 사람도 없기 때문이라는 걸 안다. 그렇지만 전보다 적은 주거비용으로 삶의 질은 비교할 수 없을만큼 높아졌고, 그것이 우리에게 무척 중요한 변화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게 요즘 제가 부동산에 꽂힌 이유에요. -그래서 이제 부동산 투자라도 하실 건가요. -아직은요. 대신 아내와 함께 일요일마다 ‘구해줘! 홈즈’를 챙겨보고 있어요. -그게 뭐지? 드라마에요? [셜록] 같은? -이사를 계획 중인 시청자가 사연을 보내면 연예인들이 대신 예산과 조건에 맞는 집을 보러 다니는 예능이에요. 열심히 보고 공부해서 부동산 전문가로 거듭나려고요. 지돈 씨도 나중에 이사 생각 있으면 말해요, 제가 잘 해드릴게요. -…그건 마치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출발! 비디오 여행’을 꼭 챙겨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지돈 씨, 저는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건 보지 않아요.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JD를 바라보았다.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접은 후로는요. 조셉 맨키위즈의 영화 <유령과 뮈어 부인>과 마그리트 뒤라스와 도미니크 노게즈의 대담집 [말의 색채]는 모두 부동산 이야기에서 출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영화의 시작과 함께 루시 뮈어는 독립을 선언한다.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1년 전에 죽은 남편까지 들먹이며 만류하지만 뮈어 부인의 의지를 꺾진 못한다. 부동산을 찾은 루시는 수상할 정도로 저렴한 바닷가 저택을 발견하고, 중개업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임대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성격 더러운 전 주인의 유령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뒤라스는 대뜸 자신을 매혹시켜 < 나탈리 그랑제 >를 만들게 한 집에 대한 이야기로 대담을 연다. 생애 처음 소유한 집. 정원에 창고까지 딸린 집은 당시 그녀의 주머니 사정을 생각하면 매우 비쌌지만, [태평양을 막는 방파제]로 벌어들인 수입으로 겨우 살 수 있었다고. 그러면서 대수롭지 않게 덧붙인다. "내 책을 각색한 영화들이 너무 좋지 않아서 내가 직접 해도 그 정도는 만들 수 있거나 그보다 더 잘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1) 두 가지 교훈이 있다. 하나. 싸고 좋은 매물은 없고 집과 사람, 사람과 유령 사이에도 궁합은 있다. 둘. 혹시라도 문필 활동으로 생계를 꾸릴 생각이라면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태어났어야 한다, 그것도 백 년쯤 전에, 되도록이면 마르그리트 뒤라스로… 한국에도 부동산을 다룬 작품은 많지만 부동산 이야기로 시작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 일단 떠오르는 건 이윤기 감독의 2008년 영화 < 멋진 하루 >다. 검은 화면 위로 오프닝 크레딧이 흐르면,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린다. -마석? 그게 어디야? -춘천 가는 길 어디라나 뭐라나? 아무튼 뭐 사자마자 두 배쯤 올랐대. 지금은 한 평당 70이라던데. -그럼 얼마나 번 건데? 걔는? -40에 샀다니까 30에 100해서… 삼 천? 그쯤 되겠네 -삼 천? (사이) 삼 천… -한 방에. 봐 봐, 얘 몇 주째 안 보이잖아. 전화도 잘 안 받아. 나는 구글에 '마석 땅값'을 검색한다. 가장 처음에 나오는 2019년 6월의 기사("'드디어 호재 터졌다!' 남양주 마석역 일대 땅값 후끈")에 따르면 GTX 건설과 지하철 6호선 연장 계획이 동시에 발표되면서 마석역 인근 당 평당 평균 가격은 2017년 250만원, 2018년 350만원이었던 것이 2019년에는 450만원으로 치솟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2020년과 2021년에는…? (알기 싫음) 담배를 나눠 피우며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크린 경마장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부동산과 경마, 그리고 1년 전 350만원을 빌리고 잠적한 남자(하정우)에게 빚을 받아내기 위해 경마장을 찾은 여자(전도연)에서 시작하는 영화인 셈이다. 과연 미국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촉발된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의 한복판에 개봉한 영화답다고 할까. 돈이 없다며 느물느물하게 잡아 떼던 남자는 돈을 받기 전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여자에게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친다. 어떻게? 다른 여자들의 돈을 빌려서… 남자를 믿을 수 없는 여자는 남자와 동행하기로 하고, 카메라는 그런 둘을 따라간다. 옛 연인에게 돈을 갚기 위해 다른 여자들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데도 어째선지 무사태평하기만 한 남자와 옛 연인에게 빌려준 돈을 받는데 어쩐지 본인이 직접 운전까지하며 돈을 꾸러 다니는 것만 같은 기분에 자꾸 울컥하는 여자의 하루. 그런데 나는 왜 여기서 영화의 줄거리를 꼬치꼬치 늘어놓고 있는 걸까? 서평가로 활동하던 시절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 있는 모양이다. 분량을 채우는 좋은 방법이기도 하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영화가 캐릭터 무비라는 것,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대책없이 낙관적이고 유연한 성격의 남자와 안 그래도 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이유없이 예민하고 불안한 성격의 여자가 티격태격 하면서도 그들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료하고 헤어져 다시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만 함께 했던 짧은 시간의 영향으로 그들 모두 그전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 거라는 여운을 남기는 종류의 영화라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변화하는 사람은 여자 한 명뿐이라고 해야겠지만. 이렇게 말해도 좋다면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을 남녀로 바꾼 다음 긴 이야기를 단 하루로 압축한 것 같은 이야기, '한국남자 조병운(하정우)' 같은 느낌으로… 영화가 중간을 지날 무렵, 경마장을 나설 때부터 남자가 들고 있던 커다란 가방의 비밀이 밝혀진다. 남자는 돈이 없어 전세금을 빼고 가방 하나에 살림을 넣은 채 친구 집을 전전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그렇다면 이 영화를 사업이 망하고 이혼까지 한 속편한 무주택자와 파혼하고 새로운 직장을 구하지 못해 언제 길바닥으로 나앉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하위 중산층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단지 그렇게 말하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한 마디로,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이런 종류의 문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답을 찾을 수 없고, 혹은 내겐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만한 시간이 허락되지 않았고, 어쩌면 이 문제는 인생보다 큰지도 몰라. 나는 머리도 식힐겸 <멋진 하루>가 담고 있는 2008년 서울의 이곳저곳 -- 개발 이전의 용산과 잠수교와 종로 뒷골목과 이태원 언덕길과 서소문 아파트와 연희동 사러가마트 등 -- 을 직접 둘러보면서 시간 속에 잠시 존재했던 어떤 것을 영원에 가깝게 붙잡아 고정시키는 이미지의 유령적인 성격에 대해 생각하며 그것이 우리의 에세이필름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찬찬히 고민해봐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으며 서울을 향하는 9701번 버스에 몸을 싣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 익숙한 얼굴을 마주치게 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 *** (편집자 주: 다음은 K정연이 JD에게 보낸 메일을 전재한 것이다. 시나리오를 위한 준비작업 중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부득이한 사정으로 K정연이 원고를 완성할 수 없는 상황에서, 비록 불완전한 메모의 형식이나마 독자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JD의 동의를 받아 여기에 올린다. 전체적인 내용이나 분위기 모두 본 원고와는 동떨어져 있어 구태여 읽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미리 밝힌다.) 서평을 쓰지 않는 서평가 K정연은 마감공포증 때문에 지금까지 그가 추구해오던 약간의 재치 있는 문필 활동을 그만두고 정지돈과 함게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기로 한다. 어느 날 그는 9701번 버스를 타고 서오릉을 지나던 중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영화 평론가 유운성을 우연히 마주친다. 구산역에서 내리는 유운성을 따라 충동적으로 버스에서 내리는 K정연. 구산동 도서관 마을에서 봉산의 이름없는 묘지로, 맘스터치에서 불광천으로 향하는 유운성의 행보를 쫓는 그의 머릿속에 어떤 목소리가 들린다. "희망 없이 말하는 것보다 침묵하는 편이 낫다. 희망 없이 수다를 떠는 데서도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전형적인 냉소주의자의 태도다. 다만, 희망을 낙관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낙관이란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을 둘러싼 요인들로 미루어볼 때 얼마간 바람직한 미래가 가능하다고 진단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주식시장이 낙관적이라거나 부동산 시장이 안정화도리 것이라고 전망하는 경제 전문가의 발언 따위를 떠올려보라. 희망은 여건에 비추어 미래를 낙관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바람직한 미래를 위한 가능성의 조건 자체를 응시하는 일이다. 희망은 낙관이라고 하는 타협을 용인하지 않으면서 미래를 긍정하는 일이다.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 대한 전망을 내놓기보다는 그것들을 없애버리자고 요구하는 것이 희망이다…" 2) 창백해진 얼굴로 가쁜 숨을 몰아쉬는 K정연.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문자 메시지 보낸다. -JD, 당신은 시네마가 인생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나요? 쏘옥, 문자가 발송되는 소리와 함께 K정연 쓰러지면 손에서 미끌어지는 핸드폰. 띵 하는 메시지 수신음과 함께 JD의 문자가 액정에 표시된다. -JD: ??? 시간 흐르면 비 내리는 밤의 불광천. 헤드랜턴을 쓴 JD가 수풀 사이를 뒤지고 있다. 아! 탄성을 지르는 JD. 정신을 잃은 채 반쯤 개천에 잠긴 K정연의 모습이 보인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담요를 뒤집어 쓰고 코코아를 마시던 K정연이 대답한다. -유운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유운성쌤 이요? 유운성 쌤은 어디 갔는데요? -모르겠어요. 천변의 벤치에 앉더니, 저 멀리 레인보우 브릿지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있잖아요, 과거의 문 같은 거. 움직이지도 앉고 한참을 앉아 있더군요. 저는 가야했어요. 마감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데 마감을 생각하자마자 갑자기 어지러워지더니 모든 게 깜깜해졌어요.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병원 진료실. 의사가 K정연에게 말한다.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한 마감공포증입니다. -선생님, 담당 편집자에게 제가 입원을 해야 해서 원고를 마감할 수 없다고 전화 한통만 해주시겠어요? 어딘지 알 수 없는 공간에서 끊임없이 중얼거리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K정연.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멍청이가 된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그런데 놀지도 않고 일도 안 한다면? 빠르게 교차 편집 되는 장면들. 다양한 시간, 다양한 날씨 아래 거리에 있는 K정연. 불안한듯 고개를 돌리면 시선 끝에 걸리는 빨간 체크무늬 남방을 입은 남성의 흐릿한 모습. 유운성이다. 쫓아가보지만 매번 잡히지 않고 사라지는 유운성. 절규하는 K정연. 캄캄한 공간. 푸른 조명이 켜지면 수백 수천 개로 보이는 K정연의 모습. 거울 방이다. 잠시 후 붉은 조명과 함께 거울 속 K정연의 모습이 유운성의 뒷모습으로 바뀐다. 다시 장면 바뀌면 다양한 시대, 다양한 공장을 나서는 퇴근하는 노동자들의 모습. 그런데 모두 유운성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의 유운성을 뒤쫓는 K정연. 정확한 시대도 장소도 알 수 없는 구불구불한 골목을 따라가다 마침내 유운성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는 데 성공한다! 벽을 보고 선 유운성에게 다가가는 K정연. 조심스럽게 손을 뻗는데 유운성의 셔츠를 쥐는데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유운성. K정연이 쥐었던 손을 펴면 손바닥 위에 놓여 있는 USB. -루시!!! 비명을 지르며 깨어난 K정연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JD. 서럽게 우는 K정연에게 묻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슬픈 꿈을 꾸었나요. -아니요. -그럼… -하룬 해도 파로키 하지 않는 꿈이었습니다… 지는 해를 바라보며 JD에게 속마음을 털어놓는 K정연. -지돈 씨, 저는 제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도무지 모르겠어요. 가끔은, 실은 자주, 너무 지겹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이요. -세상에는 두 부류의 평론가가 있습니다. 진과 성. 진 쪽의 평론가에는 이동진과 김영진이 있고, 성 쪽의 평론가에는 정성일과 유운성이 있는 식으로요. -그건 성명학인가요. -분류학이라고 해두죠. -하지만 저는 진도 아니고 성도 아닌 걸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는 법이죠. 이를테면, 진과 성의 사이 같은 곳이. -?? -진과 성의 사이에 있는 정. 그게 바로 정연씨의 자리랍니다. 자, 저를 따라해보세요. 진! 정! 성! -진 정 성…? -바로 그겁니다! 진정성!!! K정연이 JD에게 손을 내민다. 손바닥 위에 놓인 USB. 겉면에는 "cinema, 2004"라는 글씨가 흐릿하게 보인다. -이건…? -꿈 속에서… 제게… -2004년이라면, 라브 디아즈의 < 필리핀 가족의 진화 >일까요? -글쎄요… -리산드로 알론소의 < 죽은 사람들 >일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 도플갱어 >? 그건 2003년이지. 그럼 < 밝은미래 >? 아냐 그건 2002년이고. 아니면 홍상수의 <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보면 알겠죠. 조심스럽게 노트북에 USB를 꼽는 K정연. 곧바로 자동재생으로 영화가 재생된다. 주인공이 불분명한 예식장안 풍경 예식이 끝난 듯 신부의 부케를 받으려 한쪽으로 몰려서는 여자들 신부가 등뒤로 부케를 던지고 날아오르는 부케를 향해 손을 뻗는 여자들 부케가 첫 번째 손을 튕겨서 다음 손을 거쳐서 통통 튕겨나가고 이 손 저 손을 차례로 튕겨나가다가 허공을 뱅그르르 돌던 부케가 왠 막대사탕을 들고 있는 손안으로 쏙- 들어간다. 카메라 빠지면 겨드랑이에 목발을 끼고선 이빨이 빠진 여자 아이가 방긋하고 웃는다. 여자아이 손에 들린 부케를 놀란 눈으로 보는 여자들. 그 위로 타이틀. “어린신부” 3) 1) 마르그리트 뒤라스.도미니크 노게즈, [말의 색채], 유지나 옮김, 미메시스, 2006 2) 유운성, '시네마, 역량과 유령 사이에서', [씨네21] 1300호 3) 필름메이커스 커뮤니티에 올라와 있는 <어린 신부> 시나리오에서 인용했다. https://www.filmmakers.co.kr/koreanScreenplays/54717 *** 그 외에도 히치콕의 < 현기증 > 뤽 베송의 < 루시 > 하룬 파로키의 <110년 간의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황인찬의 시 '무화과숲' 중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등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힌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집념의 액션배우 이향
첫 키스 신의 수혜자에서 이완용 단골 배우로 해방 후 미군정기(1945년 9월 9일~ 48년 8월 15일)까지 제작된 영화는 최인규 감독의 <독립전야>(1948)까지 29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 경찰의 지원 아래 만든 정책 계몽영화가 <밤의 태양>(박기채, 1948), <수우(愁雨)>(안종화, 1948), <여명>(안진상, 1948) 등 세 편이다. 이향(李鄕)은 이 가운데 <밤의 태양>(1948)으로 영화계에 이름 석 자를 올렸다. ‘7’이라는 별명을 가진 불량배 역할이었다. 그는 영화를 찍는 동안 박기채 감독의 유난스런 호각 소리를 여러 번 들어야 했다. 박 감독은 일반적으로 쓰는 ‘레디고’대신 먼저 ‘레디’라 외친 뒤 호각을 불었다. 이 영화를 촬영할 때 모조품이 아닌 각종 총기가 소품으로 사용되었다. 특수효과 기술이 빈약해 실탄을 넣고 쓰다 보니 배우들이 부상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이향, 「예(藝)에 살다, 연기일생(12)」 , 『일간스포츠』, 1980.1.18) 그는 <밤의 태양>에 이어 김성민 감독의 <사랑의 교실>(1948)과 프랑스 작가 프로스페르 메리메의 「마테오 팔코네」를 번안 각색한 <심판자>(1949)에 출연했다. 이렇게 조연에 머물렀던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운명의 손>(1954)에 고학생으로 위장한 방첩대 대위 신영철 역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는 도둑의 누명을 쓰게 됐을 때 자신을 구해준 술집 종업원 마가렛(윤인자)을 사랑하게 되지만 그녀가 위장 대남 간첩(정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권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향은 그 여간첩이 자신의 품에서 죽어가는 결말 부분의 키스 신을 찍기 위해 감독과 함께 1주일 동안 상대역인 윤인자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키스라고 해야 겨우 입술만 댔을 뿐인 어설픈 이 장면이 한국 최초의 키스신이 된 배경이다. [사진] 최초의 키스신으로 알려진 <운명의 손>(한형모, 1954)의 한 장면 이향은 <운명의 손> 이후 <인생역마차>(김성민, 1956), <마의태자>(전창근, 1956),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 <형제>(김성민, 1958) 등에 주연으로 기용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인생역마차>에서는 암흑가의 두목과 신문기자 1인 2역을, <마의태자>에서는 타이틀 롤을, <검사와 여선생>에서는 은혜를 입은 옛 은사를 법정에 세워야하는 검사 역을 맡고, <형제>에서는 남의 아내가 된 옛 애인 앞에 살인강도가 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에게 이와 같은 기회를 준 것은 <사랑의 교실>부터 <형제>까지 네 편에 불러준 김성민 감독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그 후의 배역들이 앞의 작품들에 비해 비중이 떨어지거나 비호감형, 악역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이다. 멜로드라마 보다 시대극이나 활극이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사진] <형제>(김성민, 1958)에 출연한 이향_사진제공 김종원 그 예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의 일본 경찰 주임, <한말풍운과 민충정공>(윤봉춘, 남홍일, 1959)의 강압적인 일본 사신 하야시, <아아, 백범 김구 선생>(전창근, 1960)의 저격 미수범 한태구, <안개 낀 거리>(강범구, 1963)의 살인 청부 역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전창근, 1959) 이후에는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등 이완용 배역만 무려 여섯 번이나 맡아 ‘이완용 단골 배우’가 되었다 .(이향, 「예에 살다, 연기일생」 (19) 『일간스포츠』, 1980.1.27) 그는 1964년 한 해 동안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등 11편에 출연, 최다기록을 세우며 1991년 7월 29일 알츠하이머로 77세의 삶을 마칠 때까지 <원점>(이만희, 1967), <검은 장갑을 껴라>(이상언, 1971), <악인의 계곡>(김묵, 1974), <족보>(임권택, 1978), <바람 불어 좋은 날>(이장호, 1980), <초대받은 성웅들>(최하원, 1984) 등 모두 131편의 영화를 남겼다. [사진] <검사와 여선생>(윤대룡, 1958)의 한 장면 단련된 몸으로 이미 맛본 단역 경험 독특한 저음이 만들어내는 광물성의 강한 목소리, 날카로운 눈매로 36년 동안 한국영화계의 길목을 지킨 이향은 1914년 2월 8일 서울 효제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근식(李根植)이다. 그는 아홉 살 때까지 강원도 홍청군 서면 동막리에서 자랐다. 자수성가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농사를 짓게 하고 자신은 일본 사람을 상대로 모피 장사를 했다. 이 소년은 집근처인 연동교회에 다니며 뒷날 부통령이 된 함태영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풍족한 아버지 덕에 서울주교보통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경신(儆信)학교에 입학했으나 2학년 학기 초에 배재고등보통학교의 축구선수로 스카우트되는 바람에 학교를 옮겨야만 했다. 그런데 축구가 싫어졌다. 이 학교를 나와 들어간 곳이 연희전문학교 별과(別科)였다. 별과란 축구와 야구선수로 구성된 일종의 특기 반이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연극에 있었다. [사진] <이름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 출연한 이향 이 무렵 낭만좌(座)라는 극단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조연 배우가 나가는 바람에 급히 자리를 메워야 한다며 출연을 권했다. 그 대타로 나가게 된 것이 <아편전쟁>의 쿠리 역이었다. 작은 역할이었으나 칭찬을 받게 되자 학업마저 중단했다. 연극 일이 늘면서 한 선배가 그에게 “고향을 그리듯이 조국을 잊지 말라”며 시골 향(鄕)자가 들어간 예명을 지어 주었다. 이향은 <밤의 태양>에 앞서 해방 전 눈에 안 띄는 배역이지만 영화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 스물다섯 살 때였다. 하루는 조선영화주식회사의 제작부장(이백산)이 불러 만났더니 영화에 나오라는 것이었다. 맡겨진 배역은 갑, 을, 병 세 명의 농부 가운데 한 명인 농민 역, 김유영 감독의 <수선화>(1940)였다. 의정부 촬영장으로 나갔더니 감독의 지시라며 바지저고리부터 입게 하고는 4, 5일 동안을 땅바닥에서 지내게 했다. 그래야만 농부의 분위가 몸에 밴다는 것이었다. 황달병을 앓고 있던 김 감독은 눈이 퉁퉁 부은 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와서도 극성스럽게 현장을 지휘했다. (이향, 「예에 살다, 연기 일생(8)」 『일간스포츠』, 1980.1.14) 이향은 그 뒤 연극계의 선배인 극작가 이광래의 소개로 연극지망생인 처녀와 사귀었다. 1949년 ‘제3무대’라는 극단을 만들어 공연 준비에 한창 바쁠 때였다. 손 씨인 그녀의 아버지는 당시 대한통운의 전무였고 오빠는 아나운서였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에선 그들의 교제를 적극 반대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동거로 맞섰다. 첫딸이 네 살이 되어서야 겨우 승낙을 받고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1970년 이향이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병마에서 일어날 수 있도록 헌신적으로 보살폈던 그런 아내도 6남매를 남긴 채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
서부극은 기원적이다.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막 무언가 시작되었고 그것이 모종의 질서를 향해 꿈틀거리고 소용돌이치며 나아간다. 무언가는 새롭게 태어나 굳건해지며, 무언가는 조용히 혹은 몸부림치며 사라지고 잊혀간다. 남겨진 것들은 정말 남겨질 가치가 있는 것이었으며 사라진 것들은 정말 사라져 마땅한 것이었는가. 서부극은 기원을 기억하며 그렇게 묻는다. 서부극의 매혹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다루는 기원이 사료를 통해 재구성된 태고의 것이거나 이야기꾼에 의한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 기원이라는 단어에 어울리지 않는 아주 가까운 과거의 역사적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들 스스로 의식하진 못했을지라도, 영화사 초기와 고전기에 서부극을 만들었던(혹은 만들도록 요구받았던) 미국 감독들은 혜택받은 창작자들이었다. 18세기 말까지 세계 지도에 존재하지 않던 미국은 19세기를 거치며 유혈과 혼란을 대가로 거대 국가의 모습을 갖춰나갔고,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세대는 국가 형성과정의 고통과 불안과 희열을 직접 겪었다. 근대적 정체성이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와 직결된 건국의 역사가 그들의 가족사에 새겨져 있었던 셈이다. 자신의 가족과 이웃의 이야기를 돌아보는 것만으로 그들은 근대적 정체성이라는 복합적 의제의 사회적 기원에 이를 수 있었다. 서부극이라는 기억의 서사에서 개인, 가족, 민족, 지역 공동체, 국가는 자명한 것으로 주어져 있는 단위가 아니라 끝없는 교란과 충돌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고 다른 단위들과의 관계를 정립해야 하는 과도적이고 유동적인 단위였다. 서부극의 기원성에 대한 또 다른 면은 서부라는 장소에 있다. 서부는 미국의 서부지역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면서 동시에 미개척지, 무질서, 황야를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현대 미국의 형성과정에서 원주민 축출이라는 정복전쟁의 요소와 신세계 개척이라는 요소를 분리하기 힘들다 해도, 개척자들의 장소는 결국 미지의 위협과 희망을 품은 채 끝없이 펼쳐진 황야였다. 그들의 왜소한 공동체는 광대하고 텅 빈 공간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어야 했다. 기원의 자리에 버티고 선 무심하고도 냉혹한 황야의 풍경. 역사와 문명은 풍경을 내부로 끌어들였는가, 아니면 풍경은 문명의 서사를 넘어 초역사적 시간을 살고 있는가. 이것은 서부극의 또 다른 물음이다. 서부극은 지리적으로도 기원적이다. 기원에 놓인 풍경의 시간을 가장 영화적인 방식으로 납득시킨 사람은 물론 존 포드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The Man Who Shot Liberty Valance(1962) 태그 갤러거가 도덕의 시대(The Age of Morality)라고 이름 붙인 시기(1962~1966)의 첫 해에 68세의 존 포드는 후대의 평자들이 서부극의 만사(輓詞)라고 부르게 될 걸작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내놓는다. 포드는 이후에 < 도노반의 산호초 >(1963) < 샤이엔의 가을 >(1964) <일곱 여인>(1966) 등 세 장편을 더 만들었고 <서부개척사>(1962)의 한 에피소드와 TV 시리즈 한편을 연출했다. 이 영화는 두 가지 점에서 특별하다. 하나는 풍경이 없는 서부극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유례없는 영화적 풍경을 발명한 존 포드는 긴 이력의 마지막 단계에서 포드 서부극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고유한 풍경을 지우고 실내 서부극, 혹은 연극적 서부극으로 부를만한 이례적인 영화를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플래시백의 구성이다. 100여 편에 이르는 포드의 필모그래피에서 플래시백이 영화의 본론을 구성한 것은 이 영화를 포함해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1941) < 롱 그레이 라인 >(1955) 등 극소수다. 풍경 없는 플래시백, 내성(內省)과 회한, 사라진 것들의 침묵과 기억....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고요하고 섬세하고 아름답고 슬픈 영화다. 줄거리는 이렇다. 노년의 상원의원 랜섬 스토다드(제임스 스튜어트)와 아내 할리(베라 마일즈)를 태운 기차가 작은 서부 마을 신본에 도착한다. 몰려든 기자들에게 랜섬은 한 사람의 장례식 때문에 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에 관한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전 젊은 법률가 랜섬은 법률책 몇 권만 들고 명성과 부를 찾아 동부를 떠나 서부로 향한다. 신본 외곽에서 랜섬 일행이 탄 마차는 리버티 밸런스(리 마빈) 일당에게 강도를 당한다. 여성 승객을 보호하려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랜섬을 톰 도니폰(존 웨인)이 발견하고 신본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할리에게 데리고 와 치료받게 한다. 법으로 리버티를 응징하겠다는 랜섬, 랜섬의 방식을 비웃는 소목장주이자 강한 서부 사나이 톰, 톰과 랜섬 사이에서 갈등하지만 랜섬에게 마음이 기우는 할리. 세 남녀 사이엔 감정적 긴장이 높아간다. 대목장주에게 고용되어, 톰과 랜섬이 이끄는 신본 주민들의 주 편입(statehood) 시도를 저지하려는 리버티는 마침내 랜섬을 결투에 끌어들인다. 랜섬은 기적처럼 리버티를 쓰러뜨린다.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랜섬은 이후 정치가로 승승장구하지만, 기원의 진실은 다른 데 있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고전적 서사의 기술이라는 면에서 거의 완벽한 영화다. 존 포드 특유의 리듬감과 유머가 빚어내는 활력은 여전하지만, 사건들은 빈틈없이 맞물려 있고 매끈한 기승전결의 구성이 전개되며 인물들은 분명한 정체성으로 성격화되어 있다. < 황야의 결투 >의 산만하고 거의 어처구니없기까지 한 구성(17회 참조)을 감안하면 이 영화의 정교함은 놀라울 정도다. 역사적 사실과 장르적 관습이 교직된 이야기의 복잡성과 냉소와 감상과 격정이 중첩된 정조의 풍성함은 우리가 알고 있는 서부극 역사 전체를 통틀어도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다. 이야기를 꼼꼼하게 분석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긴 논문이 필요하리라. 서부극을 근대적 정체성의 기원에 대한 질문의 서사로 이해한다면,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는 아마도 최상의 서부극이 될 것이다. 하지만 존 포드의 세계를 탐색해온 우리를 숙고하게 만드는 것은 풍경의 실종이라는 이례적 사태다. 오슨 웰즈의 말대로 다른 감독의 영화에 나오면 표절처럼 보이는 모뉴먼트 밸리가 없는 존 포드의 서부극을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물론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지 않은 어쩌면 사소할 수도 있는 현실적인 이유가 궁금한 것은 아니다.(포드는 2년 뒤 < 샤이엔의 가을 >을 찍기 위해 다시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찾는다.) 우리의 관심사는 포드의 서부극에서 풍경이 사라지면 무엇이 달라지는가라는 문제다. 당겨 말하면 풍경의 실종은 단순히 이야기의 공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넘어 무언가 영원히 사라져버린 듯한 아득한 상실감을 불러일으킨다. 여기서 풍경의 실종과 플래시백의 구조는 모종의 내면적 연관이 있는 것 같다. 플래시백은 사라진 것들을 현재에 불러온다. 불려 나온 과거는 현재의 감정적 결핍을 메우는 향수의 대상이거나, 현재의 진실의 결핍을 메우는 결정적 사실이거나, 대개 둘 중 하나다. 전자의 경우(주로 멜로드라마에서) 현재는 계기적 시점일 뿐 과거가 완결된 서사로 등장하며, 후자의 경우(주로 필름누아르와 미스터리에서) 과거의 보충으로 현재가 완결된다. 존 포드는 드물게 플래시백을 사용하면서도 둘 중 하나를 택한 적이 없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는 전자처럼 보이지만 실은 불려 나온 과거 자체가 점점 망가져 가면서 플래시백의 마지막에 이르러도 회상 주체가 정박할 곳, 혹은 현재로 돌아올 수 있는 서사의 매듭이 보이지 않는다(8회 참조). 이 때문에 플래시백이 끝나도 현재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플래시백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기괴한 순환구조가 만들어진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후자처럼 보인다. 제목부터 ‘누가 리버티 밸런스를 쏘았나’라는 범죄 미스터리의 표제어로도 읽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랜섬이 마침내 고백한 과거의 결정적 사실(리버티를 쏜 사나이가 랜섬이 아니라 톰이라는)은 현재의 사실로 승인받지 못한다. 편집장은 “전설이 사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합니다.”라고 말하며 새로 밝혀진 사실을 기록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실은 애매하다. ‘사실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사실로 밝혀진다’는 것이 아니라 ‘사실로 유통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의 말은 사실상 동어반복이다. 하나의 전설이 충분히 힘 있고 광범한 전설이 될 때, 그 전설을 기록한다는 것이다. 사실의 진실성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다. 플래시백이 밝혀낸 진실은 무화되며, 현재는 플래시백의 진실 없이 완결된다.(마지막 대사는 워싱턴으로 돌아가는 랜섬 스토다드에게 기차 차장이 각별한 친절을 베풀며 하는 말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게라면 못 해 드릴 일이 없지요”이다. ‘그 사나이’는 여전히 랜섬이다.) 물론 이것은 극 중 현실 속에서 그러하다는 뜻이다. 관객인 우리는 플래시백을 거쳐 현재에 대한 교정되고 확장된 앎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앎의 정체는 무엇일까. < 아파치 요새 >(16회 참조)의 결말에서 써스데이 중령의 허황된 전설을 들었을 때처럼 전설의 허구성과 힘을 다시 알게 된 것 정도일까.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플래시백에서 우리가 본 것은 어떤 정보, 그러니까 톰 도니폰이야말로 어떤 대가도 없이 리버티 밸런스라는 절대악을 처단한 진정한 영웅이었다는, 극 중 현실이 사실로 수용하지 않은 사실뿐일까. 물론 그럴 리는 없다. 이 영화는 두 번 봐야 하고, 플래시백은 다시 플래시백 해야 한다. 옛 친구(연인)의 부고를 듣고 노부부가 먼 길을 왔다. 또 다른 두 옛 친구(링크, 팜피) 외엔 마을의 누구도 그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사내, 그리고 노부부와 두 친구가 조문객의 전부이며 관청의 지원금으로 만들어진 관에 놓인 외로운 노인의 죽음. 놀랍게도 여기엔 어떤 애도의 언사도 없고, 장례식은 등장하지 않으며 치러졌는지조차 알 수 없다. 네 조문객은 초라한 관에 담긴, 관객인 우리는 보지 못하는 시신을 볼 뿐이다. 그들의 유일한 애도 행위는 선인장꽃을 관 위에 두는 것이다. 그 관에 잠든 자가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플래시백의 마지막 시점에서부터 영화의 현재까지는 아마도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을 것이다. 악당 리버티 밸런스의 이름은 남았지만 그의 이름은 사라지게 만든 세월. 그 세월은 그 사내에게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영화의 서사는 단 하나의 단서도 주지 않는다. 이름도 삶도 완전히 잊힌 수십 년의 텅 빈 시간, 텅 빈 존재. 사내의 육신은 하루 전에 죽었지만 그의 존재는 오래전, 정확히 말하면 랜섬이 ‘그 사나이’로 오인되어 영예의 삶을 시작한 플래시백의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지워졌다. 부츠도 권총 벨트도 없이 누운 그의 시신, 그의 얼굴은 스크린에서도 가려져 지워졌다(등장인물이 보는 것을 특권적 시선을 지닌 관객이 보지 못하는 장면은 영화를 포함한 시각 매체가 가진 특별한 능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지금 부재하고 아주 오래전부터 부재했다. 이 플래시백의 가장 놀라운 점은 플래시백을 통해 알려진 사실이 아니라 현재 시점과 플래시백 시점 사이에 놓인 톰 도니폰이라는 인물의 완전한 공백의 시간, 공백의 삶이다. <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 >에서도 그 사이의 시간이 지워져 있지만, 플래시백이 플래시백의 시작 시점으로 되돌아가는 강박적 노스탤지어의 순환운동이 빚어내는 감상적 정조가 그 공백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유도한다. 하지만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에서는 현재의 사실과 과거의 사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고 있는 서사가 그 공백을 환기한다. 존 포드는 그 공백에 어떤 말도 바치지 않으며, 단 하나의 프레임도 할애하지 않는다. 마땅히 무언가 있어야 할 곳에 혹은 우리가 무언가 있기를 바라는 곳을 완전히 비워버린 것이다. 부재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곳에 구체적 실체로 존재하는 무언가이다. 랜섬이 톰의 시신을 보고 있는 장면에서 시신이라는 육체적 대상은 우리 눈에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거기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잠정적 부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다른 의미의 부재는 공백으로밖에 접근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무언가이며 이를 근원적 부재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지난 30년간의 톰의 시간이, 그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다시 말해 누구도 볼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서사 안에서 완전히 사라졌을 때, 그 시간은 이 근원적 부재의 차원에 놓여 있다. 현재 시점에 톰 도니폰은 영원히 떠났다기보다 근원적 부재에서 잠정적 부재(스크린에 등장하지 않는 시신)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신은 물리적으로는 짧은 시간만 지속할 뿐인 존재이므로, 그는 근원적 부재에서 죽음이라는 또 다른 근원적 부재로 이행했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우리는 잠정적 부재에 대해선 말할 수 있지만 근원적 부재에 대해선 말할 수 없다. <리버티 밸런스>에는 한 영웅의 죽음에 대한 동정과 슬픔이 있다.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감정은 일련의 사건들의 효과와 인물에 대한 동일시에서 비롯된 표면의 감정이다. 하지만 여기엔 동정적 슬픔과는 다른 차원의 쓰라린 상실감, 아득한 허무감이 있다. 영화를 보는 우리가 의식했던 의식하지 않았던, 그 상실감과 허무감은 근원적 부재의 차원과 연관될 것이다. 플래시백을 통해 불려 온 사실이 아니라 불려 오지 않은 혹은 불려 나올 수 없는 공백, 그 말할 수 없는 부재가 보는 이의 마음을 깊은 곳에서 흔든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를 보기 전까지는 이런 플래시백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나의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왜 톰 도니폰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도 근원적 공백으로 사라졌는가. 이 질문은 우리가 서부극을 보면서 해왔던 질문과 사실상 같은 것이다. 왜 서부사나이는 잘못을 바로잡고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떠나는가. 이 영화 제목을 변용한다면, 누가 톰 도니폰을 쏘았는가. 태그 갤러거는 흥미로운 대답을 제시했다. 그것은 랜섬 스토다드이다. 랜섬이 대변하는 법과 질서가 톰이 대변하는 힘과 자유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수긍할만한 해석이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답을 생각해볼 수 있다. 톰 도니폰을 쏜 것은 그 자신이다. 여기엔 얼마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그날 밤 랜섬과 리버티의 결투에서, 톰이 숨어서 리버티를 쏘지 않았다면 백면서생 랜섬이 쓰러졌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톰은 할리를 얻었을 것이다. 이 결투는 꽤 복잡한 게임이다. 결투의 승자는 법적 책임을 지지 않으므로 랜섬이 쏘았다 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다만 법의 배타적 신봉자이자 무력의 반대자로서의 자기 윤리는 붕괴된다. 톰이 쏜다면 정반대의 일이 벌어진다. 힘과 자유의 신봉자로서의 톰의 자기 윤리는 전혀 손상되지 않지만, 그는 결투자가 아닌 제3자이므로 명백한 살인자가 된다. 톰은 연적(戀敵)을 위해 살인자가 되는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살인자라는 사실을 발설할 수 없다. 톰의 선택이 정의감의 발로인지 사랑하는 할리의 간청 때문인지는 불분명하다. 결과적으로 톰은 힘의 영웅이라는 자리도, 연인 할리도 이미 법의 챔피언인 랜섬에게 모두 넘겨준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상실은 바로 악당 리버티다. 리버티가 살아있는 한 공동체는 톰의 총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리버티가 사라지는 순간, 톰의 자유(liberty)도 공동체 내에서의 존재 이유도 사라졌다. 리버티를 쏜 순간 그 총알은 결국 톰 자신을 향한 것이다. 왜 서부사나이는 잘못을 바로잡고도 떠나는가. 적어도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라면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다. 그는 ‘바로잡았기 때문에’ 떠난 것이다. 총으로 바로잡는 순간 그는 존재의의를 상실하거나 문명과 불화할 수밖에 없다. 링고 키드(< 역마차 >)는 복수에 성공하고 나면 영원한 감금 혹은 추방을 피할 수 없다. 이산 에드워즈(< 수색자 >)는 공동체도 더 이상 원치 않는 복수의 여정에 나선 동안 문명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며 복수가 완수되는 순간 쓸모없는 존재가 된다.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자 떠날 수밖에 없다. 전쟁 장르와 혼합된 기병대 서부극을 제외한 포드의 서부극은 서부 사나이의 자기 살해에 관한 이야기, 총알이 자신을 꿰뚫을 줄 알면서도 방아쇠를 당긴 사내의 이야기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는 은유적 죽음으로서의 떠남을 시신으로의 귀환으로 대체한 것이다. 풍경의 상실이라는 사태로 돌아오자. 앞서 풍경을 잃고 무엇이 달라졌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포드 서부극에서 풍경은 혹은 모뉴먼트 밸리는 문제를 해결한 서부사나이가 돌아가는 공백의 장소다. 그곳은 말해질 수 없고 묘사될 수 없는, 죽음과 같은 층위에 있는 비지(非知)와 무시간성의 심연이다(6, 7회 참조). 링고 키드도 이산 에드워즈도 닥 할러데이도 그곳으로 돌아갔다. 그 곳은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의 플래시백이 환기한 근원적 공백과 동질의 장소다. 하지만 이 은유적 해석은 어딘가 불충분하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무시간적 풍경에로의 떠남은 사건의 서사 너머의 장소, 지금 이곳 아닌 어딘가를 상정하기 때문이다. 거기엔 상상력을 응원하는 낭만적 바깥이 있다. 그러나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에는 바깥이 없다. 바깥이 있던 자리에 놓인 것은 지금 이곳의 관, 그리고 가려진 시신이다. 바깥은 이제 사라졌고 세계는 바깥 없는 폐쇄공간이다. <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 >가 실내 서부극이라면 그것은 많은 장면이 실내에서 촬영되었기 때문이라기보다 서사의 바깥이 사라진 서부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딱 한 장면을 꼽으라면 이 쇼트를 꼽을 수밖에 없다. 말 탄 사내가 무언가를 끌고 마을로 들어오고 있다. 조금 뒤에 알게 되지만 그 사내는 톰 도니폰이며 그가 달구지에 태운 것은 강도를 당한 뒤 심하게 다친 랜섬 스토다드이다. 그는 중상자를 구하려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천천히 움직인다. 우리는 포드의 영화에서 영웅이 처음 등장하는 순간을 수차례 만나왔다. 젊은 링컨(< 젊은 날의 링컨 >)이 마을에 처음 등장할 때, 그리고 이름없는 성직자(< 도망자 >)가 위험한 마을로 진입할 때, 그들은 마치 망설이듯 느리게 움직였다. 톰은 결국 랜섬을 위해 모든 것을 잃는 선택을 하게 될 미래를 예감이라도 하듯, 그래서 그 운명의 자리에 오기를 주저하듯 천천히 다가온다. 그는 이제 그를 위한 출구가 사라진 세상 속으로 그렇게 걸어온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