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들
- 감독
- 최용석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한수연, 김중기, 여현수, 김종수, 박윤서, 장기훈, 최진선, 김효인, 김근아, 유재명, 박다윤, 이민영, 김영덕, 이영미, 심지수, 이영윤, 양면숙, 유상흘, 김미경, 안성혜, 이상협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필름이 유령처럼 배회하다 떠난 자리를 상속받은 것은 극장이다. 영화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필름의 쇠퇴는 곧 영화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있었고, 그 서사의 효력이 다하자 극장의 위기론이 부상했다. 오늘날 극장은 베일을 두른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 지난날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그와 동시에 DVD, 불법 다운로드, 스트리밍 플랫폼에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유령과 같다. 어떤 이들은 극장에서의 유일무이한 영화 관람 경험이 사라지면 그때의 영화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극장이 영화의 위기와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극장의 경험을 포함하는 과거의 영화 경험을 상속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동시대 영화 관람 경험은 모순적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연속적인 것과 단절적인 것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모양새가 나타나고 있다.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를 바라보던 과거의 관람 방식은, 오늘날 노트북, 태블릿 PC, 핸드폰과 같이 이동과 휴대가 편리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관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모니터에 출력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 방식으로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는 자신의 책 『뤼미에르 은하계 : 도래하는 영화를 위한 일곱 개의 핵심어(The Lumière Galaxy: Seven Key Words for the Cinema to Come)』(2015)에서 이런 변화를 영화의 재배치 (relocation)라고 부른다. 그는 영화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기기를 통해서 재활성화 또는 재목적화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 영화를-넘어서는-영화의 경험 ’과 ‘ 영화로-회귀하는-경험 ’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여전히 영화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재배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관객의 실천 에 있다. 단순히 영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과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의 위치가 달라져도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고, 이전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영화를 기존의 영화처럼 바꾸어 놓기 위한 관객의 실천이 있다면, 여전히 영화는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극장이 아닌 장소에서도 극장의 경험을 복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기로 영화를 관람하면서 모니터의 밝기를 조정하거나 스피커의 볼륨을 조정하여 최대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관람 환경을 구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관객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극장과 같은 곳에서 보장되는 몰입의 환경, 즉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관객을 지킬 수 있는 실존적인 버블(existential bubble)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를 둘러싼 달라진 환경을 수리함으로써 본래의 영화적 경험을 복원한다. 카세티에 따르면, “영화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고 새로운 조건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로 인하여 영화는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카세티(좌)와 앙드레 고드로, 필립 마리온(우)의 저서 (사진: “ The Lumière Galaxy ”, “ The End of Cinema? ”, Columbia University Press) 극장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경험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앙드레 고드로(André Gaudreault)와 필립 마리온(Philippe Marion)이 『영화의 죽음?: 디지털 시대의 위기 속 매체(The End of Cinema?: A Medium in Crisis in the Digital Age)』(2015)에서 제시한 ‘영화의 이중 탄생 (cinema’s double birth)’이라는 개념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영화의 이중 탄생은 영화가 기술적으로 한번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탄생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는 사운드의 도입, 텔레비전의 발명, 비디오 기기의 보급, 디지털화와 같은 기술적 발전 속에서 위기와 변화를 겪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영화의 탄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영화의 탄생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는 영화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극장의 이중 탄생, 즉 극장 문화의 제도적 안착은 영화사 초기 30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유랑, 정착, 성전의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 1) 유랑 의 단계: 19세기 말, 카메라와 영사기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영화는 카페, 놀이공원, 박람회, 보드빌, 장터와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적 이벤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2) 정착 의 단계 : 1905년을 전후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작은 상점을 개조하여 만든 극장인 니켈로디언(Nickelodeon)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상설영화관으로서의 니켈로디언은 30석 내외의 좌석을 갖추고, 5센트의 입장료를 책정했고, 주 고객은 노동 계급이었다. 3) 성전화 의 단계 : 1920년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인종, 성별,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의 좌석, 화려한 외관과 실내 장식, 주차장과 매점과 같은 편의시설을 갖춘 영화 궁전(movie palace)이 등장한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 궁전이 오락을 숭배하는 공간이면서 고단한 현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관객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도피처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궁전이 정신적으로 거주할 곳을 잃은 자들을 포용하는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곳을 ‘집 없는 자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불렀다. (좌) 1908년부터 1914년까지 5센트의 입장료를 받고 운영되었다고 기록된 캐나다의 “Comique movie theatre” (우)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위치한 극장 “Majestic Theatre”. 스페인의 지중해풍 양식을 반영해 1929년에 지어졌다. (사진: “ Front of Comique movie theatre ”, City of Toronto Archives / “ The Venues ”, Majestic & Empire Theaters) 이런 역사적 사실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극장이 영화의 유일한 경험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경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극장의 경험은 영화의 역사와 대중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지시한다. 디지털화 이후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극장은 영화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적 경험의 회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근원적 장소이자 여러 영화적 경험이 참조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극장의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미 여러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건축적 공간,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관객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험은 극장이라는 건축적 공간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밀폐된 공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으로 구성된 기계적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세계, 그리고 좌석에 기댄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욕망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자신의 최근 저작인 『스크리닝 공포(Screening Fears)』(2023)에서 영화관 특유의 스크린 경험을 “ 투사/방어 복합체 (projection/protection complex)”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투사/방어 복합체는 기계적, 심리적, 사회적 장치들로 구성된 것으로, 물리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 관객을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를 통해서 관객을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사/방어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것은 영화적인 경험이 현실과의 연결/분리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같다. 이 모순은 관객의 심리적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관객은 영화 속 세계와 연결되거나 그 세계에 몰입 하고 싶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영화가 제시하는 환영을 거부 하고 자신이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꿈을 꾸면서 영화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이중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카세티는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아닌 것에서도 투사/방어, 즉 관객인 우리를 스크린 속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이중의 경험이 나타난 역사적 사례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이전(pre-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판타스마고리아는 숨겨진 영사기의 빛을 통해 죽은 자의 이미지를 안전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한 경우이다. 그리고 영화-이후(post-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화상 채팅과 같은 오늘날의 디지털 버블은 타인과의 접촉 없이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각각의 매체적 경험은 극장과 스크린을 매개로 여기와 저기의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적 경험과 친연성을 갖는다. 카세티는 이러한 계보학적 접근을 통해서 영화의 탄생과 발전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처를 갖길 바라는 대중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한 영화적 경험 속에서 극장은 현실의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대피소로, 스크린은 현실에 대한 모의실험을 매개하는 장치로, 영화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예방주사로 존재한다. 만약, 카세티가 말하는 영화적 경험의 기원적, 본질적, 근원적 속성이 관객의 실천과 함께 역사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제기되는 극장의 위기론이 지나친 기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극장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극장의 경험은 유령처럼 우리에게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없는 자리에서도 극장은 유령처럼 나타나 관객인 우리의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영화적이라고. 이도훈(영화평론가) l 대학에서 미디어, 대중문화,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느리게 보고, 느리게 쓰지만, 꾸준히 영화와 관련된 비평과 연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단독 저서 『이방인들의 영화 :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2023) 집필, 독립영화, 에세이영화, 포스트-시네마 등과 관련된 학술 논문 집필.
장률은 새로운 척도로 국경의 의미를 재창조하여 인간의 정체성 형성 과정에서 장소의 중요성을 형상화해 온 초국적 영화작가이다. 그의 작품 중 상당수가 특정 지명과 관련 있다는 것(< 중경 >(2007), < 이리 >(2008), < 두만강 >(2011), < 경주 >(2014), <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2018), < 후쿠오카 >(2020))은 그냥 우연이 아니다. 중국의 독립영화와 한국의 디아스포라 영화를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장률의 작품 목록 안에서 첫 번째에 해당하는 다큐멘터리이자 한꺼번에 여러 장소들이 등장하는 희귀한 사례가 < 풍경 >(2013)이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지원을 받아 단편영화로 기획되었다가 장편으로 확장된 이 영화는 아시아 전역에서 한국으로 와 이주노동자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는 외국인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이다. 아시아 지역 출신으로 한국으로 이주하였다는 것 외에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그들은 모두 다른 나라에서 하눆으로 이주하였고,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으며, 다른 언어로 말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런 이유로 영화에는 중국어, 타갈로그어, 베트남어 등 다양한 언어가 등장한다. 장률 그 자신도 조선족 출신으로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주 예술가’의 처지라는 점에서 저들과 상통한다. <풍경>은 이 노동자들의 개인사, 처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소재로부터 연상되는 르포르타주적인 접근법 대신 장률이 선택한 것은 저들의 꾸는 꿈의 내용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다. 꿈은 다큐멘터리 서사의 통례들을 초월한 독특한 서사의 영역으로 이 영화를 데려간다. 영화의 도입부는 꿈의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야심한 밤 영종대교를 달려 우리가 당도하는 곳은 인천공항이다. 사람들이 떠나고 떠나오는 장소인 공항에서 질문은 시작된다. 한국에서 꾼, 가장 기억에 남는 꿈은 무엇입니까?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을 떠나 동티모르로 돌아가게 된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에서 밤마다 어머니의 얼굴이 나오는 꿈을 꾸었노라고 고백한다. 장면은 전환되어 꿈을 꿀 때 하얗게 꺼져 가는 의식 마냥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안개의 숲을 이룬 영종대교 위를 미끄러져 가는 초현실적 광경이 펼쳐진다.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풍경>의 오프닝은 꿈의 입구를 지나 꿈의 세계로 깊어져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후부터 혼몽(昏懜)의 세계를 거니는 것 같은 로드무비가 시작된다. 무의식의 극장으로 해석되는 꿈은 희망(길몽)과 공포(흉몽)의 상반된 양태를 띄고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대부분은 사라지지만 기억에 남는 꿈에는 현실과의 특별한 연결이 존재한다. 기억하는 꿈에 대해 물었을 때 누군가는 사장님, 사모님, 직장 동료와 함께 고향 스리랑카의 아름다운 사원을 여행하는 광경을 떠올리고, 다른 누군가는 아내와 제주도에 가고 싶다는 소망을 피력하며, 또 다른 누군가는 한국에서 로또에 맞을 날을 상상한다. 반면 20년 동안 시름시름 앓은 아버지에게 회초리로 맞는 꿈을 꾸었다는 베트남 여인, 떨쳐지지 않는 유령의 악몽에 시달리는 태국 남자, 자신을 악독하게 다루었던 한국인 사장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반추하는 가구 기술자도 있다. 간질 치료를 위해 한국에 온 조선족 소녀는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이라고 포교를 일삼는 사진사 앞에서 여자 경찰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풍경>은 누군가의 시선에 의해 매개된 관점을 배제한 채 인간과 풍경을 객관적으로 기록하는 것에 몰두하는 관찰 다큐멘터리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장률은 객관적인 자리에 카메라를 두는 것을 초월하여 자신이 듣고 보았던 이미지를 흐릿한 기억에 의존하여 주관적으로 서술할 수밖에 없는 꿈의 서사라는 접근을 취한다. 이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은 실향과 선회, 유랑, 귀향의 경험, 간단치 않은 삶의 역정을 살아온 자들 앞에서 느껴지는 숙연함, 말과 이미지의 이율배반적 표현이다. 꿈에 관한 질문에 화답하는 이주민들의 실존적 억류상태는 철 대문 옆에 방치된 개나 골목 모퉁이에 버려진 쓰레기 봉지, 도살장에 뒹구는 잘린 소의 머리, 쓸쓸한 여공 모집 광고, 공터에 방치된 그네로 형상화되고 있다. 스리랑카, 필리핀, 태국, 방글라데시, 네팔, 타슈켄트에 두고 온 이주민들의 꿈은 먼 거리에서 물끄러미 응시된다. 사전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 이주민들의 꿈은 행복에 대한 인간의 보편 의식으로부터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장률은 <풍경>에서 꿈이 삶이 놓친 시간과 그 흔적의 축적이며, 소망충족의 욕망이 남루한 현실과 교차하는 풍경의 집적물이라는 생각을 보여준다. 대다수의 장면에서 장률은 정적이고 긴 쇼트를 용의주도하게 배치한다. 이주노동자들의 일상은 꿈의 맥락에서 분리되면서 그들이 거주하는 장소, 노동의 시간과 나란히 놓인다. 사람이 전혀 없는 동네의 무작위적인 스냅 쇼트는 기이한 인상을 만들어낸다. 스스로 움직이다가 멈추는 세발자전거, 지하철 역사(驛舍) 벤치에 앉았다가 열차가 지나간 뒤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두 명의 남자, 코끼리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 이 장면들은 어떤 이유로 그곳에 들어가 있는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현실 세계에 뚫린 구멍, 세계의 내부로부터 열린 미스터리한 출구로 표현할 수 있는 이 장면들에서 장률의 복화술사적인 능력은 발휘되고 있다. 이웃에 산다는 것은 그 이웃에 있는 물건을 지속적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풍경>의 카메라는 너무나 정적이고 자의적인 사물들에 집중함으로써 관객들이 서사와의 연결을 추정하기 힘든 사물과 순간들을 실제로 경험하도록 강요한다. 동질적 요소들을 나란하게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이질적인 특성을 함축한 쇼트의 충돌(몽타주)이 우세한데, 이를 위해 동원된 것은 말과 이미지 사이의 패러독스이다. 거대한 기중기의 운동, 염색 천을 뽑아내는 지루한 과정, 가구를 만들고 운반하는 일련의 행위들이 카메라에 기록된다. 꿈속의 장소들은 온기가 충만한 선량의 천국으로 기술되지만 그들이 놓인 장소는 냉혹한 현실이다. 제주도를 환상의 섬쯤으로 상상하는 남자의 이야기에 이어 우리는 황량한 제주의 풍경을 보게 되고, 아버지의 폭력을 두려워하는 여인의 이미지 뒤에는 단란한 가족의 저녁식사가 배치된다. 이쯤 되면 꿈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소망충족의 대리 기제라는 의미로 쓰이거나 현실의 평화를 위협하는 공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된다. <풍경>은 삶과 꿈의 아름다운 공생을 상상적으로 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그 공생의 사회적, 정치적 조건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장률은 꿈과 현실이 조화롭게 합치되는 삶이 이 땅에서 불가능한 소망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이유로 영화에는 안과 바깥, 이산과 귀향, 방랑과 정주(定住) 같은 극단적 풍경이 기록되어 있다. 이주민들이 꾸는 미몽과 현실, 실재와 상상 사이의 부조화, 균열의 찢김은 한국 사회의 패배이고 무능의 자인이다. 한 맥락에서 영화의 오프닝과 클로징은 공명한다. 서두에 이야기했듯이 오프닝은 떠나려는 자의 이미지로 열리고, 클로징은 무언가를 맹렬하게 좇다가 하늘을 응시하는 익명의 시선으로 닫힌다. 헐떡거리는 카메라의 격렬한 움직임 위에 비행기의 굉음이 입혀진다. 그러니까 떠나는 장소(공항)에서 시작하여 떠나는 행위(비행기 소리)로 끝이 나는 셈이다. 아마도 향수병에 시달리던 동티모르인 아우구스티노 씨는 한국을 떠났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어머님을 만나게 될 아우구스티노 씨에게 그것은 떠남이 아닌 귀향이다. 그러나 떠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몸이 놓인 장소와 정신이 열망하는 장소의 괴리는 자본주의적인 체제가 만들어낸 소외의 풍경이기도 하다. <풍경>에는 다시 꿰어맞추기에는 희미해진 삶의 흔적과 이방인들의 꿈, 그 소망을 배신하는 풍경이 한 프레임 안에 응축되어 있다. 이 충돌은 어느 곳에도 머무를 수 없는 영혼의 쓸쓸한 표류의 과정을 압축적으로 스케치하고 있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본 영화글은 한국영상자료원 강좌 <‘영화+글’ 시리즈 3: 영화 비평 쓰기> 과제 선정작입니다. 1. ‘아빠는 빅가든 하나 만들 거야’ 제이콥(스티븐 연)이 무성히 자란 풀 가운데 서서 그의 딸과 아들에게 선언하듯 외친다. 특히 ‘빅가든’이라는 단어를 뱉는 순간, 그의 유창한 발음 덕분에 이 장면은 오랫동안 관객의 기억에 남는다. 이 장면은 하나의 예시일 뿐이다. < 미나리 >에는 그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숨기려다 이내 관객들에게 들키고 마는 장면들이 몇몇 있다. 원어민임을 감안한다면 그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운 편이다. 다만 한국어보다 완벽한 영어 발음으로 인해 그의 언어적 정체성이 탄로나는 것이다. 이처럼 <미나리>는 관객들에게 이질감을 발생시킨다. 감독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우연히 발생한 이러한 이질감은 <미나리>가 전하는 주제와도 분명히 닿아있다. <미나리>는 한국인 이민자 1세대의 미국 정착기이다. 이들의 서사는 동양인 이민자들이 겪은 설움으로, 또 낯선 땅에서 고군분투했던 모든 이민자들의 고통으로 연이어 확장되며 보편성을 획득한다. 이민자들은 낯선 문화를 견디며 끊임없이 섞이는 과정을 겪어왔을 것이다. 언어는 그 중에서도 그들이 가장 먼저 부딪치는 벽이었을 테니, 어쩌면 관객들이 영화관에서 잠시 마주하는 이질감은 이민자들이 항상 경험했던 당황스러운 순간의 단면이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 이것을 극복해나간다. 화투나 한약처럼 ‘한국적인 것’이 등장하고, 처음에는 제이슨(앨런 김)이 이를 거부한다. 이내 순자(윤여정)의 설득이 이어지고 즐겁게 받아들이는 식이다. 정이삭 감독은 이렇게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을 섞어나간다.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은 이 섞임의 과정 안에 있다. 하지만 이내 물음이 생긴다. 이 섞임의 과정 뒤에 ‘무엇이 소멸되고 무엇이 남는가’라는 질문이다. 연일 이어지는 해외 영화제 수상 소식은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에 특별한 울림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글은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이 아니라 그로 인해 은폐되는 희생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2. 모니카(한예리)가 달리는 차 안에서 운전 중인 남편에게 푸념하듯 말한다. ‘일요일엔 그냥 일하는 게 낫겠어’. 두 사람의 얼굴은 스크린에 온전히 담기지 않는다. 제이콥의 운전하는 오른 손과 백미러에 비친 그의 두 눈, 그리고 보조석에 앉은 모니카의 뒷모습이 전부이다. 연이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제이슨과 순자의 모습이 보인다. 함께 동행한 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이 장면은 제이슨의 시선임을 쉽게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짧은 장면의 시선과 영화 전체의 시선은 일치한다. <미나리>는 제이슨이 바라 본 그의 가족사(史)인 것이다. 차 안의 시선은 차창 밖으로 향한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 폴(윌 패튼)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걸어간다. 제이콥이 차를 세우고 폴과 짧은 대화를 나눈다. 폴은 ‘십자가’가 자신의 교회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한다. 오랜만에 교회에 다녀오며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차 안에서 푸념을 하고 있는 모니카의 모습과 대조적이다. 여기서 또다시 물음이 생긴다. 미나리 가족에게 폴은 어떤 존재일까. 특히(어쩌면 감독의 눈이기도 한) 제이슨에게 폴은 어떤 존재로 비춰질까. 돌아온 주일에 제이콥과 모니카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앤과 제이슨이 덩그러니 교회에 앉아 예배를 드리고 있다. 목사의 설교가 이어진다. 그의 뒤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다. 앤마저 나가고 제이슨은 지루한 표정으로 혼자 남는다. 이어지는 장면은 폴이 자신의 교회인 십자가를 지고 마을을 지나는 장면이다. 파란색 하늘과 초록색 언덕이 정확히 1:1로 화면을 가르는 이 전경 샷은 유난히 수평적인 구도를 강조하고 있다. 교회버스 차창 너머로 폴을 발견한 제이슨이 반가운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이내 제이슨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버스 안의 아이들이 폴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정체성은 한마디로 기독교인(Christian)이다. 그는 첫 등장부터 매번 ‘예수의 이름으로’ 대화를 시작한다. 폴(Paul)의 이름이 성경 속 인물인 바오로(Paul)와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주일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고행을 재현하는 그의 모습은 유럽의 끝까지 건너가며 선교에 헌신한 바오로 사도의 삶과 닮았다. 미국은 기독교(Protestant) 정신 위에 세워진 국가이다. 또한 미국은 다민족이 공생하는 다양성 국가이기도 하다. 아칸소 교회는 마을 주류의 공간이며, 동시에 이주민들을 수용하는 공존의 장이다. 모니카는 한인교회에서 상처받은 기억이 있는 듯하다. 병아리 감별소에서 만난 한국인 동료는 그녀에게 ‘여기까지 온 한인들은 저마다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아칸소 교회는 미나리 가족을 열렬히 환영하지만 모니카는 결국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반면 폴은 마을에서 비주류에 속한다. 아이들이 교회버스에서 폴을 조롱하는 장면은 단번에 그가 처한 마을 내 위치를 보여준다. 하지만 감독은 정작 미나리 가족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가 교회 아닌 폴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감독은 그를 통해 진정한 기독교인은 주일에만 교회에 모이는 사람들이 아니라 주변의 이웃에게 끊임없이 건너가는(Cross)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 ‘십자가 아저씨’ 폴은 감독이 내세우는 이상적인 인간상인 것이다. 3. 영화는 폴에 대해 더 이상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그가 어디에 사는지, 가족은 있는지 관객들은 알 수 없다. 미나리 가족의 조력자로서 꽤 큰 비중을 차지함에도 그에 대한 소개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것이다. 그는 우연히 영화 안으로 투입되고선, 할 일을 마치고 홀연히 퇴장한다. 아마 감독에게 중요한 것은 폴이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영화 안에서 그가 수행하고 있는 기능인 듯하다. 그는 감독의 말을 전달하는 일종의 영화적 장치인 셈이다. <미나리>에 대한 현지의 반응을 살펴보면,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영화’라는 평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진실을 들춰보면 이민자들의 정착 역사에 폴과 같은 이상적인 조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종차별로 얼룩진 이방인 혐오의 역사가 현실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영화 안에서 폴은 가장 이질감이 느껴지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인위적인 말과 행동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를 현실에 있을 법한 인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영화 초반부의 이질감의 본질이 ‘낯선 땅’과 ‘한국적인 것’ 사이의 마찰에서 발생하는 것이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감독은 의도적으로 한국적인 것을 소멸시킨다. 한국에서 건너 온 친정 엄마 ‘순자’는 ‘한국적인 것’의 원천이다. 하지만 이내 중풍과 같은 병에 걸려 정신이 쇠약해진다. 순자는 천장에서 이상한 것을 본다. 뇌졸중 환자에게 발견되는 흔한 섬망 증상이다. 모니카는 이를 보고 다름 아닌 폴에게 퇴마 의식(Exorcism)을 부탁한다. 이 괴이한 의식은 감독이 폴에게 부여한 최종 임무이기도 하다. 미국에서 나고 자란 감독은 <미나리>를 통해 줄곧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익숙함을 벗어나 낯선 것에 몸을 섞어라.’ 이를 위해 감독은 제이슨의 ‘미국인’ 친구 손에 화투장을 쥐어주고, ‘한인’들을 위해 재배한 제이콥의 채소들을 불태운다. 또 미국인들은 하나같이 미나리 가족에게 친절하지만, 한인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된다. 이와 같은 설정의 정점에 있는 존재가 바로 ‘진정한 그리스도인’ 폴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민자들의 현실 속에 집집마다 헌신적으로 그들을 조력하는 폴과 같은 비주류 백인 남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폴’의 존재는 다양성을 수용하는 미국이라는 국가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또한 이방인들이 낯선 땅에 섞이며 감내해야 했던 수많은 차별과 수모를 고작 ‘한인들 사이의 따돌림’ 정도로 축소시킨다. 감독은 무엇을 위해 이러한 허구적인 존재 ‘폴’을 창조하였을까. 그리고 감독이 설치한 이 영화적 장치는 무엇을 옹호하고 무엇을 배제시키는가. 어쩌면 뇌졸중에 걸린 순자가 천장에서 봤던 ‘헛것’은 감독이 창조한 허상 ‘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미나리가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났다. 결국 <미나리>가 전하는 희망의 종착역은 ‘미국 땅에 단단히 뿌리내린 이방인’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독의 꿈은 미국의 가장 권위있는 영화 시상식에서 현실이 되었다. 영화의 밖에서 영화의 이데아(Idea)가 실현된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 미국 내 동양인 혐오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유난히도 미국 땅에서 열렬한 환대를 받은 영화 <미나리>. 이 영화가 전하는 희망은 진정 보편적인가, 아니라면 그것은 시기상 ‘그들’이 간절히 듣고 싶었던 환상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