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
- 감독
- 이범희
- 제작년도
- 2010
1981년. 신군부의 문화정책을 상징하는 행사 ‘국풍 81’이 열렸고, 서울올림픽 개최가 결정됐다. 이듬해엔 교복 자율화가 발표되고 프로야구 정규리그가 출범했다. 1983년 6월, 이산가족 찾기 방송이 밤낮으로 전국을 울렸다. 그해 8월 셋째 주 일요일. 미국 망명 중 하버드에서 김대중과 이웃하며 지냈다던 베니그노 아키노가 마르코스 치하의 필리핀으로 돌아가자마자 마닐라 공항에서 총을 맞아 죽었다는 뉴스가 이산가족들의 눈물바람을 뚫고 종일 들려왔다. 10월 9일에는 버마 아웅산 묘소에서 폭탄이 터져, 대통령이 도착하길 기다리던 남한 정부 각료 등 21명이 죽었다. 이십 일 뒤인 10월 29일, 단성사에서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 적도의 꽃 >이 개봉했다. 1983년 흥행 수위를 차지한 이 영화는, 서울 개봉관에서만도 15만 명이 넘는 관객들과 만났다. 배창호 감독은, 자신이 조감독을 맡았던 < 어둠의 자식들 >( 이장호 , 1981) 원작자 이동철의 동명 소설을 각색해 1982년 첫 장편 < 꼬방동네 사람들 >을 만든다. 개봉 전 프린트 검열과 더불어 존재했던 사전 시나리오 검열에서 어림잡아 67군데를 손보라는 지시를 받았으나 뚝심으로 완성한 이 작품은 크게 흥행했다. 도시빈민의 현실을 생생히 살렸다며 비평계의 지지도 얻었다. 곧이어 “현대그룹 홍보영화” < 철인들 >(1982)을 만든 배창호는, 차기작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최인호 가 1981년 중앙일보에 연재한 소설 『적도의 꽃』을 선택한다. 직장을 다섯 번 그만두고 아버지가 주는 생활비에 의존하나 가족과 왕래하지 않는 미스터 M( 안성기 분)은, 혼자 지내는 자신의 아파트 이웃들을 망원렌즈로 훔쳐보며 소일한다(발단의 설정과 연출은 히치콕의 < 이창 >(1954)을 절로 떠오르게 하는데, 최인호 원작소설의 첫 장 제목도 ‘이창(裏窓)’이다). 어느 여름날, 맞은 편 아파트로 이사 온 오선영( 장미희 분)에게 반한 그는 그녀를 스토킹한다. 중년 기혼남 김성두, 바람둥이 사업가 정준환과 차례로 사랑에 빠지는 선영을 남자들과 떼어놓으며 그녀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하는 미스터 M. 그러나 그의 편집광적인 사랑은 파국을 부른다. 출간된 『 최인호 시나리오 선집』(1987, 우석출판사)에서 남자주인공 미스터 M은 “월남전에서 뭔가 받은 충격으로 식물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다. 한데 완성된 영화에서나,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하고 있는 < 적도의 꽃 > 시나리오 원안과 심의대본에는 월남전의 흔적이 없다. 정신과 의사가 미스터 M을 문진하는 오리지널 시나리오 첫 장면은 M의 보이스오버로 시작하는 출판 시나리오나 심의 대본과 차이가 있으나, “명예와 욕망과 물질에 눈이 먼 사람을 경멸하”며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사랑을 찾아 헤매고 있는 이방인”으로 자신을 일컫는 미스터 M의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다. 베트남 참전 언급을 원치 않았던 검열 당국의 수정 지시를 따랐다기보다는, 1980년 이후 당대에 집중하려는 작가와 연출자의 의도가 아니었을지 조심스레 짐작할 따름이다. 참전용사가 아닐지언정, 미스터 M은 여전히 프로이트가 진단한 바 “외상적 신경증”을 입은 주체로 남는다. 영화 초반, 열기가 이글거리는 아스팔트 가로수 그늘에 기대 하품하는 그의 몸짓은, 권태와 무료를 드러낸다기보다는 소리 없는 절규에 가깝다. 80년대라는 “모멸과 폭압”의 시간이 주는 고통을 견딜 완충재(프로이트는 이를 위해 “자극에 대한 방어기제를 재조정”하는 “불안”이 필요하다 했다)를 지니지 못한 그는, “수용의 임계치를 넘어 쾌락 원칙에 심각한 손상을 가하는 압도적인 외부의 충격”에서 비롯하는 “경악”을 괴로움 없이 체현한다.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의 탄생> 복제판을 자신의 아파트 벽에 걸어둔 그는 선영을 순수한 사랑의 화신으로 여긴다. 그녀를 농락하고 모독하는 모든 이들을, 미스터 M은 “심리적 거리감”을 한순간에 지우며 망설임 없이 단죄하고, 자신의 기대에 어긋난 선영을 미련 없이 버린다. “주체와 대상의 가상적 경계”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신체와 세계를 연출”하지 못하는 미스터 M을 재현하는 안성기 의 얼굴 근육 쓰기와 말더듬이 연기는 탁월하다. 그를 동반하는 초?중기 배창호 의 전매특허 360도 카메라 트래킹은, 결말에 이르러 트라우마를 회복하는 < 이창 >의 제임스 스튜어트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미스터 M의 강박증을 뚜렷이 그린다. 정신없이 쏘아댔다고 감독이 회상하는 붉고 푸른 조명, ‘국풍 81’이 낳은 스타 이용 의 ‘잊혀진 계절’을 작곡해 당대 최고의 대중음악가로 떠올랐던 이범희 가 담당한 발라드와 디스코를 오가는 스코어도 M의 심리를 끈끈히 엮는다. < 고래사냥 >(1985) 등으로 80년대 충무로를 뒤흔들 배창호와 최인호 , 안성기 “트리오”는 이렇게 만났다(지극히 아름다우나 남성의 시선 앞에 “한 송이의 허망한 꽃”일 뿐인 장미희 라는 배우가 욕망이 깃든 피와 살을 지닌 인간으로 육화하기 위해선, < 깊고 푸른 밤 >(1985)까지 기다려야 한다). < 적도의 꽃 >의 숨은 주인공은 아파트다. 최인호 는 이미 1971년에 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공간을 다룬 「타인의 방」이란 소설로 화제를 불러일으켰었다. 영화는 아파트 이미지로 시작하고 같은 장면으로 끝난다. 들끓는 여름 모래톱 너머에 신기루처럼 솟아오른 아파트 그림자가 일렁인다. 이어지는 컷은 전지적 시점, 한강 변 아파트 전경을 살피던 카메라가 베란다를 거쳐 미스터 M의 집으로 들어간다. 당시로선 드물게 중앙난방과 욕실을 갖추었고 최대형 면적이 80평에 달했던 신흥 부촌으로, 1978년엔 특혜 분양 때문에 물의를 일으키기기도 했다는 이 아파트 벽에는 ‘現代’라는 검은 글씨가 또렷하다(감독의 전작 < 철인들 >을 상기하노라면, 이 공간은 더욱 복합적인 파장을 부른다). 압구정 현대 아파트 세 채를 빌려 찍었다는 영화 속 카메라는 아파트 단지와 베란다 사이를 자유로이 오가며 인간의 눈높이를 벗어나 “새로운 토건 권력”이 굳혀지는 시점을 포착하는 시선이 된다. “시선과 응시의 교환이 빚어내는 욕망의 경제, ‘현실과 상상 사이의 경계’ 위에 구축한 나르시시즘의 성채”인 아파트는 “도시-산업적 기술의 확산, 대규모로 진행된 사회적(성적) 관계의 해체, 대중 소비로의 이행이 실질적인 파괴와 결손을 초래하는 동안, 시선과 감각적 지각을 조직화하는 새로운 방식, ‘사물들’과의 새로운 관계, 모방적 경험 표현, 정서, 시간성, 성찰성의 다양한 형식”(미리엄 한센)을 보여주는 시대정신의 현현이었던 것이다.(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 2011, 자음과 모음).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지속”이며 “정치적 보수화의 전초기지”이기도 했던 아파트 주민 미스터 M과, 역시 한창 개발 중이던 동부이촌동 양옥을 소유한 김성두, 토착 부촌 평창동 저택에 사는 정준환. <적도의 꽃> 속 남자들이 이루는 삼각형은, 1980년대 초 서울이라는 시공간에 거했던 어떤 이들의 몸과 정서, 욕망이 변하는 경로를 따라가게 하는 지도가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