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일기
- 감독
- 이병일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최무룡, 조미령, 김승호, 안나영, 후라이보이, 염매리, 이빈화, 박암, 고선애, 김칠성, 석금성, 손석우, 남인수, 김정옥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2022년 노만 선생님의 생애사 구술 인터뷰 를 진행하며 굉장히 흥미롭게 들었던 이야기가 있다. 하여튼 그때 내 임화수 씨를 처음 알게 됐고, 임화수 씨는 또 젊은 나를 굉장히 좋아했어. (웃음) 그래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하고는 전연 달러. 주먹이지만 굉장히 뭐라고 그럴까, 겸손해요. - 노만(영화평론가, 2022, 90쪽) 아마도 위 발언에서 ‘보통 우리가 아는 임화수 ’란 SBS 드라마 < 야인시대 >(2002~2003) 속 캐릭터로서의 임화수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방영 당시 최고 시청률 51.8%, 평균 시청률 30%를 찍었던 이 드라마에서 임화수라는 캐릭터는 픽션적 상상력이 더해지긴 했지만 그에 대해 전해 내려오는 각종 ‘썰’들을 대체로 반영하고 있고, 또 해당 역을 맡은 배우의 살벌한 연기 덕에, 시청자들에게 아주 폭력적이고 제멋대로에 비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위 구술에서 이어지는 “겸손해요”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내가 모르는 사이에 ‘겸손’의 뜻이 바뀐 건가 하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국제영화》 1959년 7월호 속 임화수 하지만 임화수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 평가는 1950년대 활동했던 영화인들의 이야기 속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양반이 스태프들한테는 잘했어요. 거기서 말썽 일으킨 거는 저, 돌아가신 김희갑 씨 때려가지고선 갈비가 부러졌다, 그때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스태프들한테는 난 잘했다고 생각을 해요. … 또 영화에 투자도 많이 하고요. 이런 얘기하면 뭐 어떻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그 사람도 영화산업에 기여한 바가 있다고 난 생각을 해요. - 이도원 (편집, 2004) 내가 생각하기에 임화수라는 사람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본질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성격이 나뻐, 성격이. 불같은 사람이에요. 그 사람이 원래 깡패 출신 아니에요? … 나는 임화수의 덕을 많이 본 사람이에요. - 박진수 (조명, 2007, 53~54쪽) 아주 연예계에선 임화수라고 하면 알아줘야돼, 그때. 뭐 배우고 뭐고, 연예계에 하여튼 가수고 뭐 할 거 없이 임화수 말을 거역할 수 없어. 그렇게 돼 있었다고, 그 당시에. 근데 임화수 씨하고 나하고는 아무런 마찰이 한 번도 없었고. … 그리고 임화수는 배운 게 없지마는 머리는 잘 돌아가고 약았어. 그때 그래가지고 무슨 문화부장관인가, 응? 박마리아 여사한테 가 붙어가지고 그때 문화부장관인가 뭐 발령이 났다가, 사건이 터져가지고 고만뒀든가, 아마 그렇게 됐어. 그 얼마나, 그 사람 위대해. 위대한 사람이야. 학교 못 다녀도 그런 정도로 했다면, 응. - 이지룡 (배급, 2012, 171쪽) 그러나 위 구술에서 중요한 것은 ‘정말 임화수가 괜찮은 사람이었느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어떻게 1950년대 활동한 영화인들에게 임화수가 깡패이면서도 ‘위대한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었는가이다. 사실 구술자들이 임화수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중 일부는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에 기대고 있다. 즉, 자신이 개인적으로 덕을 봤거나, 그와 특별히 마찰을 겪지 않아 그의 나쁜 점을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구술자들이 이야기하는 그에 대한 평가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위험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들의 기억을 조금 우회하면서 한국영화사에서 그의 ‘공적(功績)’이라고 이야기되는 것들이 어떻게 그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이는 1950년대 중후반의 한국영화 산업을 이해하는 것과도 긴밀하게 연결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앞으로 보고자 하는 것은 한국영화의 역사가 ‘임화수’라는 한 인간을 통과하며 어떤 변화를 겪게 되었는가이다. 물론 이는 하나의 통일된 방향이 아니라 마치 빛이 프리즘을 지나 여러 갈래로 굴절해 뻗어나가는 것처럼 다양한 결과들로 귀결될 것이다. 깡패는 왜 ‘극장’을 좋아했을까? 그럼 먼저, 임화수와 영화산업에 접근하기 이전에 가장 기본적인 질문을 던져보고자 한다. 내가 영화나 역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던 꼬꼬마 시절에 < 장군의 아들 > 시리즈(임권택, 1990~1992)를 볼 때도, <야인시대>를 보면서도 항상 궁금했던 것은, ‘왜 저 사람들은 자꾸 극장 앞에서 싸우지?’ 하는 것이었다. 물론 싸움에 적당한 장소로서 극장 앞에 공터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우리가 흔히 ‘김두한’ 하면 ‘우미관’이라는 극장을 떠올리는 것처럼 당시 깡패들은 이상하게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군의 아들>(임권택, 1990)의 한 장면. 오른쪽에는 김두한의 주 활동무대인 ‘우미관’이 보인다. 물론 이때 제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이유는 ‘돈이 되니까’일 것이다. 실제로 당시 극장은 아주 수지가 좋은 현금 장사였다. 임화수처럼 직접 극장을 운영함으로써 *주1 수익을 얻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흥행업은 주먹 패거리들에게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나는 경리만 보고 돈만 계산하고. 표 받고 뭐하고 하는 거는 주먹이 댕겨요. 극장에 가면 극장마다 그 동네 깡패들이 있어. 그러면 이놈들은 날마다 극장은 상시출입이야. 지 맘대로 돈은 안 내고. 얘네들이 내려가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주먹이니까 딱 오면 “아, 형님 오셨습니까.” 절대로 그냥은 못 들어와. 그리고 또 유명한 게 그 당시만 해도 지방 가면, 입장료가 500원이다 그러면 400원 가지고 와서 그냥 들어가려고 그런다고, 현찰로. 그러면 지금은 표를 찍고 그러지만, 여기 딱 궤짝이 있고 구멍이 뚫려있는데, 표를 받으면 여기다 넣는 거야. 그런데 이제 이 궤짝을 주먹쟁이가 깔고 앉아. 극장 직원이 표를 받아서, 돈도 받으면 그걸 그 궤짝에 넣는 거야. 이 궤짝이 그날 전체 수입이야. … 이걸 가지고 극장 사무실에서 쏟아 가지고 표는 표대로 돈은 돈대로 해서 다 계산을 해요. 그리고 ‘오늘 얼마가 들어왔다’고 극장에다가 먼저 들이민다구. 그러면 극장에서 마지막날 전체 수입이 얼마다 계산해서, 당시 극장이랑 3:7이야. 극장이 3이고 단체(공연/연극단을 말한다)가 7할 가져가는 거거든. 그렇게 계산해가지고 거기서 세금 떼고 돈 딱 주면 그걸 봉지에 다 넣고 계산서 딱 붙이고, 봉투를 딱 여매서 신주 모시듯, 잊어버리면 큰일나니깐. 그런 식으로 지방을 돌고 올라와요. - 김인기 (제작/기획, 2004) 구술자 김인기는 임화수와 어린 시절 같은 집에 세를 들어 살았던 인연으로, 후에 성인이 되어 임화수가 연예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했을 때 그의 회사 경리로 일하며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김인기에 따르면, 극장마다 일명 기도(木戸, ‘문지기’를 뜻하는 일본어)라고 불리는 힘 꽤나 쓰는 ‘주먹’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역할은 입장권을 사지 않고 몰래 극장에 들어가려 하거나 과감하게 ‘자체 할인’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막고, 표나 돈이 다른 곳으로 새지 못하도록 돈통 지키는 일을 했다. 그리고 아마도 공연단과 함께 극장을 돌며 간혹 배우들에게 시비 거는 사람들을 때려주는 일도 했던 것 같다. 그때는 깡패들이 한몫을 한 게 있어, 흥행계에서는. 그런 일 많지. 배우가 유명하면 또 명동서 술먹고 놀다가도 얻어맞기 일쑤고, 댄스홀에서도 곤조부리고 그런 거지. 그런 거 많어. - 황남 (배우⋅제작/기획, 2004) 이처럼 극장의 기도 또는 수표주임은 극장 운영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력이었는데, 이들을 지정해주는 것 역시 그 지역을 관리하는 주먹 패거리들이었다. 1950년대 명보극장 부사장을 지냈던 구술자 이지룡은, 명보극장 의 수표주임으로 명동파 이화룡 이 보내준 사람을 썼다고 말했다. 명보극장의 전경과 내부 이화룡이라고 있어. 무섭긴 이화룡이 더 무섭지. 이화룡이는 명동파야. 임화수는 종로파고. 근데 극장 하나 시작을 한다 하면은, 그 기도주임이라는거, 수표주임이야, 응? (이화룡은) 바로 극장이 자기 극장인 거처럼 생각하고, “이 사장, 수표주임은 내가 보낼 테니까 그 사람 쓰시오.” 이렇게 된 거야. (질문) 수표주임은 임화수랑 이화룡이 보내주는 사람을 무조건, 모든 극장이 다 쓰는 거예요? 응, 대부분 아마 그랬을 거야. 내 알 건댄 그래.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착취해 먹는 게 아니고, 다 자기들 따르는 그 나름대로의 제자들이거든? 그러니까 밥벌이 하라고 취직을 시켜주는 거지. - 이지룡(제작, 2012, 170~172쪽) 그런데 이 정도뿐이라면 깡패들치고 매우 성실하고 건전하게 극장과 공존하며 수익을 나눠 갖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것이 당시 깡패들이 극장으로부터 수익을 얻는 가장 주된 방법이기는 했지만, 좀 더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삼류관인께 한 푸로 4일간, 그러면 네(4) 푸로를 해야 돼. 회장이 한 푸로, 써금써금헌 놈 영화사 아무거나 그냥 공이로 갖다가 붙여먹고 많든 적든 수입 가져가. 그때 유지광 이가 그다음 꼬붕이여. 유지광이가 대. 그러믄 인자 극장 앞 부근에 이런 놈 있어. “사장님, 우리도 먹고 살어야 된다”고 … 그럼 9일을 뺏겨 갖고 21일 갖고 장사를 허니 미치제. - 전경섭 (배급, 2007, 80쪽) 전경섭은 해방 이후 제국관 (동방극장으로 명칭 변경)을 불하받은 형 전기섭의 밑에서 극장 운영을 배웠고, 호남 지역의 영화 배급일도 맡았었다. 이후 전기섭은 서울 동대문 천일극장을 운영하게 되는데, 천일극장은 광장시장 앞 큰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평화극장 과 매우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구술자 전경섭은 천일극장이 평화극장과 경쟁하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가 자신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이유는 천일극장이 이정재의 권역 안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 구술은 당시 이정재가 천일극장으로부터 어떻게 수익을 챙겨갔는지 설명하고 있다. 천일극장은 재개봉관으로 영화 한 편을 상영하면 평균 4일 정도 상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정재와 유지광, 그리고 그 밑에 깡패들이 영화사로부터 낡은 영화 한 편씩을 공짜로 가져와서는 극장에 상영하게 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수익은 자신들이 가져갔다. 그러면 극장 측은 한 달 중 열흘 *주2 정도는 영업을 하고도 한 푼 벌어들이지 못하니,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극장 주변의 깡패들은 대체로 영화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기보다는 대중오락으로서 인기가 있었던 영화 흥행을 이용해 쉽고 빠르게 현금을 챙기고자 했다. 그러나 임화수는 단순히 극장 경영을 돈벌이로만 이용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단체를 조직하고, 더 나아가 영화 제작에 돈을 투자했으며, 영화 정책에도 관여하고자 시도했었다. 그의 이러한 영화산업에 대한 욕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기억 그때 그 면세조치운동이요, 지금 그거를 어떻게들 평가할런지 모르지만, 사실은 임화수가 나쁜 짓도 했지만 좋은 짓도 했어요. 임화수가 그 국산영화면세조치를 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 강대선 (감독⋅제작/기획, 2004) 1950년대 영화 기자로 활동한 바 있고, 이후 영화 연출, 영화제작⋅기획을 했던 구술자 강대선은 임화수와 관련하여 그의 가장 큰 공(功)으로 ‘국산영화면세조치’를 꼽았다. 이에 대한 그의 설명을 더 들어보자. 비오는 날이었어요. 내가 기억하기론 여름인데, 돌아가신 김승호 란 배우가 있었는데,아주 유명한, 동남아시아를 석권했던 명배웁니다. 이 양반이 하얀 모시저고리를 입고 단성사 극장 흙탕물에 털썩 주저앉아서 땅을 쳤던 일이 있어요. 각 신문 사진기자들이 (담기에) 좀 좋아. 당대 최고의 스타가 말이지 비오는 날 말야 물구덩이에 앉아서 땅을 치면서, 또 연기는 좀 잘했겠어? (웃음) 연기자인데. 이거를 전부 그냥 사진을 찍어가지고 곽영주 경무관이 이 박사(이승만 대통령을 가리킨다)한테 드린 거라. 이 박사가 그냥 특명을 내려가지고 이기붕 씨가 손수 나서서, 말하자면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를 해줬지. - 강대선(감독⋅제작/기획, 2004) 구술자가 이야기하는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영화배우 김승호는 당시 임화수가 경영했던 한국연예주식회사 소속 배우였다. 즉 임화수는 자기 회사의 소속 연예인을 이용하여 극적인 그림을 만들어냈고, 평소 친분이 있었던 곽영주를 통해 이 그림과 함께 ‘국산영화면세조치’에 대한 청을 이승만 대통령에게까지 전달했다는 것이다. 영화 < 해떨어지기 전에 >(강대진, 1960)에서의 배우 김승호.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과 대략 비슷할 것 같은 사진을 골라보았다. 구술자의 증언이 너무 극적이고, 눈앞에 그려질 듯 생생해서 하마터면 덜컥 믿어버릴 뻔했다. 그렇다고 구술자가 말하는 상황 자체가 꾸며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약간 기억의 왜곡이 작용한 듯 보인다. *주3 사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국산영화뿐만 아니라 흥행물에 대해서도 입장세 인하 요구는 꾸준히 예술인들에 의해 주장되어왔다. 그 결과 국산영화제작 진흥의 일환으로 1954년 3월 31일 공포⋅시행된 입장세법에는 ‘국산영화에 대해 입장세를 면한다’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다시 말해 임화수가 극장 및 연예단체 운영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국산영화에 대한 면세조치는 이루어져있었으며, 그는 오히려 이러한 특혜조치에 따른 이득을 누리기 위해 영화계로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게다가 김승호가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며 동남아시아 영화시장에 이름을 알린 것도 1957년 < 시집가는 날 >(이병일, 1956)이 동남아에 수출되고, 제4회 아시아영화제 에서 최우수희극상을 받은 뒤부터였다(물론 이전에도 영화에 출연하기는 했지만, 연극계에서 더욱 이름이 높았다). 따라서 강대선이 기억하는 저 화려한 퍼포먼스는 적어도 1958년 이후에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주4 비록 몇 가지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기억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는 분명하다. 위 구술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임화수라는 인물이 ‘김승호’라는 명배우를 동원할 수 있는 힘과, 동시에 국가 최고 권력에 닿을 수 있는 ‘끈’이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러한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영화계에 들어와서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해외 진출 시도와 실패 임화수는 영화계에 첫발을 딛는 동시에 과감하게도 해외로 진출했다. 많은 당대의 영화인들이 꼽는 그의 두 번째 ‘공적’이 바로 이 해외와의 합작 시도이다. 그는 1957년 한국연예주식회사에 소속된 배우와 스태프들을 데리고 홍콩으로 갔다. 홍콩에 도착한 이들을 맞이해준 것은 동남아 지역에 대규모 극장 체인과 스튜디오를 소유하고 있는 유명 영화사 쇼브라더스였다. 처음에 홍콩에 도착을 했더니, 트랩에서 내리는데 정말 배우생활 60년 동안에 그런 카메라 세례를 받아본 건 처음이야. TV기자라든가 잡지사, 신문사 기자들 한 50명이 트랩 밑에서 후레쉬를 터뜨리는데, 정말 야! 정신이 없더라구요. … 그날 저녁, 우리가 파티 저녁을 먹는데 그쪽 뉴스에 “한국배우들 도착” 그리고 합작영화 소개가 뉴스 시간에 나오더라구. 그러니깐 그때부터 우리 일행들은 좀 흥분이 되고, (웃음) 새롭게 느껴지는 그런 분위기였어요. 왜냐하면 아시다시피 50년대 우리 영화계는 아주 빈약했고, 또 촬영현장 가도 카메라래든가 조명이래든가 여러 가지 기재가 아주 구닥다리였고. … 근데 가서 촬영현장을 보니까 쇼브라더스의 스튜디오라든가, 조명기구, 카메라 그리고 기술적인 그 흐름이 아, 역시 우리가 처음 보는 그런 환경에서 연기한다는 게 참 신기스러울 정도로, 변화를 느끼게 됐죠. - 윤일봉 (배우, 2015, 11~12쪽) 영화 < 이국정원 >(전창근, 도광계, 와카스기 미쓰오, 1957)의 스틸컷. 왼쪽이 구술자 윤일봉이다. 쇼브라더스 측에서는 일찍이 1956년부터 한국 정부에 자신들이 보유한 영화와 한국영화를 교환하는 방식의 무역 거래를 요청해왔다. 이 시기 쇼브라더스는 동남아시아를 넘어 한국과 일본으로 시장의 확장을 꾀하고 있었고, 한국도 1955년 제2회 동남아시아영화제에 옵저버 자격으로 참여했던 영화인들을 중심으로 해외 진출(한국영화의 수출과 합작을 통한 기술 교류)의 필요성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던 참이었다. 이렇게 서로의 필요가 맞닿은 찰나에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잡은 것이 임화수였다. 그리고 그가 다른 영화사들에 비해 더 적극적일 수 있었던 것 역시 임화수에게 닿아있던 정부 권력 덕분이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합작영화 제작이 어려웠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당시에는 여권을 받아 해외로 출국한다는 것 자체가 힘들 때였다. 그때는 국제적이라는 거가 굉장히 어려웠어요. 합작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일본이나 홍콩을 자주 왕래할 수도 없었고. … 아주 여기서 허가 내는 데 어려왔어요. 절대로 못 나가는 거예요, 그때는. (22~23쪽) … 나라에서는 여권이라든가 그 편의는 문화공보부, 그땐 공보부에서 ‘많이 편의를 봐줘라. 이거 대한민국을 위해서 외화수입만 의존하지 않고 이제 우리도 합작을 해서 우리 걸 제대로 국제적으로 이 무대에서 나가는 거니까 도와줘라’ 그래서 스무스하게 왔다갔다 하는 거는 참 잘했어요, 우리가. - 문금순 (제작, 2014, 22쪽) 하지만 무엇보다 합작 진행 과정에서 가장 힘든 것은 외화(外貨)를 국외로 반출하는 일이었다. 쇼브라더스와 한국연예주식회사는 합작 당시 제작비를 5:5로 분담하기로 했다. 영화제작이라는 것이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거액이 필요한 사업이었고 그 절반이라고 하더라도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그러나 1950년대는 국내 보유 외화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외화의 사용은 국가에 의해 관리되고 있었고, 매년 상공부의 무역 계획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규모가 정해져 있었다. 따라서 계획에도 없는 거액의 외화를 갑자기 필요에 의해 갖고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에 대한 불만은 임화수가 ‘썼다는’ 칼럼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 해외시장 확보에 목적한 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가 투자를 자유스럽게 해야 하겠는데 우리 영화제작계에는 외화(外貨)가 없고, 또한 있다 해도 자유롭게 해외에 투자할 수 없기 때문에 가장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루속히 정부는 선진국의 예를 따라서도 해외시장진출을 목적한 영화제작에 제작비를 보장 내지 보상해주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투자의 자유스러운 길을 열어주어야만 우리 영화도 우방국가의 영화와 대열을 같이 하여 해외시장을 어느 만큼이라도 점유할 수 있고 따라서 발전과 향상을 기하리라 생각된다. - 임화수, "합작영화의 가능성", 《조선일보》, 1958. 2. 20. 4면 기사 중 어쨌든 이런 장애 요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화수는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그때그때 외화를 조달해가며 합작을 진행했다. 합작영화라면 외화 유출을, 인제 보내줘야 되잖아요? 근데 대체로, 송금하고 이게 아니라 이 양반이 싸 가지고 갔다고. 왜냐면 세관이라든가 이게 외화유출로, 법적으로 걸릴 수도 있는데 이이는 용감했어요. 그리고 또 세관 사람들 다 알고. 임화수 하면은 뭐 다 그때는 통할 때니까. “아, 오늘 누구 엄마 연락해서 몇 만 불 좀 사라.” 뭐 이래서 현금 주고. 자금줄이라는 게, 그이가 그렇게 돈이 많고 이러지는 않더라고요. 그때 평화극장 하면서 뭐 갈쿠리로 긁을 정도로 사람이 그렇게 많이 모이니까 현금이 많이 들어왔어요. 그런데 거기는 그거 갖고는 제작비 감당이 그렇게 쉬운 건 아니에요, 잔돈푼은 될지언정. 대개 재택이 엄마가 계모임을 조직해서, 그거 어… 동대문시장 상인연합회에 7형제라고 있어요. 그 부인들하고 계조직을 하면은 계모임에서 그 돈을 가져오고. 또 두 번째 부인을 통해서. 자기 본부인하고 둘째 부인하고 경쟁을 시킨 거예요. “얼마가 오늘 필요한데, 며칠날 홍콩 가는데 돈이 있어야 되니까 해오라”고. 양쪽에서 해오는데 어떤 때는 안 되는 때가 있고, 어떤 때는 되면, “크, 그냥 너는 아주 최고다.” 막 이러고. 그날 인제 좋은 분위기로 그 집을 가는 거고. 안 되면 “야, 넌 그것도 못 해오냐”고, “기분 나쁘다”고 막 싸우는 수도 있고. (18쪽) … 각 극장에서도 좀 도와준 것 같아요. 극장주들이 많이 도와줬고, 또 나름대로 주위의 고리대금하는 사람들도 슬슬 흘려서 빌려줬어요. 이자를 다른 데보다 싸게. … 하여튼 저는 열심히 그냥 명동에 달라 아줌마한테 가서 받아다 드리고. (30~32쪽) 그냥 야미(뒷거래)지. 그러니까 주머니에 넣고 가서 쓰고. 또 홍콩 자체에서 필요해서 교포들하고 거래로 해서 우리나라 돈 주고서 하는 수도 있고. 무슨 수든지 하여튼 우리 걸 분담은 다 깨끗이 했기 때문에 그 영화가 나온 거겠죠. (35쪽) - 문금순(제작, 2014) 한국연예주식회사와 쇼브라더스가 합작한 영화 < 천지유정 >(김화랑, 1957) 양국 참여 스태프 단체사진 그런데 이렇게 힘들게 동원된 막대한 자금은 제작비로도 사용되었지만, 대체로 경비로 나갔다고 한다. 보은의 뜻으로 자기한테 충성했던 사람들을 홍콩 구경시켜 준다고 많이 갔어요. … 외국에를 나갔으면 좋겠는데 영화를 핑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트였다고 굉장히 선호도가 좋았어요. 배우들이고 뭐, 엑스트라라도 좋으니까 홍콩 좀 한번 갔다 왔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조금 이쁘게 보이면 그냥 “이번에 너 데려간다” 이렇게 해서. 그런 경비가 좀 많이 나갔어요. - 문금순(제작, 2014, 40~44쪽) 제2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에서 한중 합작영화 제작의 공로를 인정받아 특별상을 수상한 임화수(왼쪽에서 세 번째) 이런 식으로 3편의 합작영화를 제작했지만, 흥행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하자 그는 합작에서 손을 뗐다. 비록 임화수는 합작에 손을 뗐지만, 이후에도 합작에 대한 국내 영화사들의 움직임은 계속되었다. 특히 1962년 제정된 영화법에서 합작영화를 법제화하여 그 기준을 정하고 정식 공보부의 허가 절차를 통해 자금 출자도 가능하게 되면서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활발해졌다. 물론 이와 같은 규정이 만들어진 바탕에는 어쨌든 앞서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영화법이 제정된 후 가장 활발하게 합작에 나선 것은 신상옥 감독이 이끌던 신필름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초까지 신필름(신프로덕션)을 거쳐간 많은 영화인들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을 통해 새로운 영화기술과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홍콩 무협영화의 인기가 높아지자 다수의 한국 영화제작사들이 합작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것이 1970년대에는 위장합작 문제를 야기시켰고 이로 인해 합작영화에 대한 여러 제한 규정들이 생겨나기는 했지만, 이는 그만큼 당시 합작영화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한국영화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이 시기를 기억하는 영화인들에게는 처음 합작을 시도했던 임화수의 공이 더욱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작 임화수는 자신이 세운 공든 탑을 버리고 다른 선택을 했다. 이맘때부터 그는 반공예술단을 결성해 소속 연예인들을 관제행사에 동원하는가 하면, <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 >(신상옥, 1959)과 같은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만송 이기붕>이라는 제목의 문화영화와 함께 1960년 3월 15일 이루어질 정부통령선거를 위한 선전영화로 전국 극장과 군(軍)에서 상영되었다. 여전히 연예계에서 활동하며 영화를 만들고 있었지만, 정치깡패로서 정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선택이 그에게 가져온 결말은 모두 알고 있는 그대로이다. 깡패냐, 예술인이냐 3.15부정선거의 결과로 4.19혁명이 일어났고, 임화수는 이후 3.15부정선거 개입과 고대생 시위대 피습사건 등 정치폭력 혐의로 체포되어 여러 차례의 재판 끝에 1961년 12월 21일 사형에 처해졌다. 재판 최후진술에서 임화수는 자신이 ‘예술인’임을 강조하며 “국가에 공로는 있을지언정 죄를 지은 일은 없다” *주5 고 주장했다. 5.16 이후 진행된 혁명재판의 최후진술에서도 그는 다시 “자유당을 위해 <청년 이승만>의 영화를 만드는 등 이용만 당하다가 억울하게 고대생 습격범으로 재판을 받게 되었으니 잘 살펴달라” *주6 며 자신이 ‘문화사업가’임을 강조했다. 물론 그의 이러한 발언은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한 구차한 발버둥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나는 그가 진심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예술인’으로 여기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자기가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든 크게 문제될 바는 없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그가 이 ‘예술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어떤 일을 했는가에 있다. 임화수는 무궁화악극단과 코리아악극단이라는 당시 굵직한 두 개의 악극단을 연합하여 한국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하고는 소속 연예인들을 빈번하게 자신의 명예와 문화적⋅정치적 지위를 높이기 위한 도구로 이용했다. 영화산업에 뛰어든 후에는 자신이 가진 뒷배를 동원하여 합작을 시도하기는 했으나, 이를 지속시켜 제도화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작비를 긁어모아 지인들과 선심성 여행을 다니기에 바빴다. 이렇다 보니, 이른바 그가 한국영화사에 남긴 공로라는 것도 단지 ‘예술인’ 또는 ‘문화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한 깡패의 허세처럼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임화수는 비슷한 길을 걸었던 화성영화사의 이화룡과 비교가 된다. 이화룡은 앞서 구술에서도 나온 것처럼 명동파 어깨두목으로 1958년 일명 ‘명동깡패사건’으로 기소되어 1959년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 사건이 그에게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는지는 몰라도 그는 1960년 화성영화사를 설립하며 영화제작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4.19 이후에는 임화수와 마찬가지로 ‘단체적 폭력행위’로 혁명재판에 기소되어 6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주7 1963년 특별사면으로 풀려난 뒤에도 영화인으로서의 생을 살며, 한국영화계에 자신의 족적을 남겼다. < 신세계 >(박훈정, 2012)에서 정청이 자신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하는 이자성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제 고만 선택해라. 그래야 니가 살아”)처럼 임화수는 어느 순간엔가 자신이 영화인으로서 살 것인지, 정치깡패로 살면서 언젠가는 몰락할 정권과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인지, 둘 중에 하나의 길을 선택했어야 했다. 따라서 분명한 선 긋기에 실패한 이 예술하는 정치깡패는 한국 연예계에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고 여러 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는 데에 막대한 돈을 투자하기는 했지만, 끝끝내 죽는 순간까지 대중에게 ‘예술인’으로는 인정받지 못했다. *** 주1. 임화수는 해방 후 적산(敵産)이 된 제일극장(일제시기 미나도좌)을 불하받은 뒤, 평화극장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했다. 주2. 영화 한 편에 4일 상영이니까, 이정재, 유지광, 그 아래 깡패가 한 편씩만 들고 와도 총 12일간은 극장 수익이 없는 셈이다. 구술자는 9일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는 구술자의 단순한 계산 오류일 수도 있겠으나, 이 날짜가 그만큼 유동적이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주3. 1956년부터 1960년까지 한국연예주식회사에서 회계 담당 직원으로 일했던 문금순도 구술에서 “한국영화 세금 안 내게 한 사람이 임화수 씨”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그런데 문금순은 면세조치가 이루어진 과정이 강대선과는 또 다르다. “‘우리 한국영화를 위해서 말이야 면세조치를 받아야 되는데 재무부장관 집에 새벽에 쳐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래 갖고 김승호 씨, 김희갑 씨, 복혜숙 씨, 고선애 씨, 이향자 씨 이런 사람들 … 막 끌어내고. 그래서 새벽 일곱 시에 재무부장관 집을 가는 거예요. … 재무부장관이 허락해야만 되니까. 그래 갖고 그걸 뚫고 면세조치가 돼서 한국영화 세금 없이 상영관에 상영을 했어요.” (공영민, 『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문금순 박행철 안정무 편 』, 한국영상자료원, 2014, 23~24쪽 참조.) 그러나 이 역시 잘못된 기억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아마도 임화수는 자신의 의견을 중앙에 전달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4. 국산영화면세조치 덕분인지는 몰라도, 1955년 이후 한국영화는 제작편수 면에서나 흥행 면에서나 눈에 띄는 상승세를 보였다. 이에 따라 타 무대연예예술이나 외국영화와 비교해봤을 때, 국산영화만 특별히 입장세를 면해주는 것이 형평성에 맞는가에 대한 이야기가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 것이 1958년 즈음이다. 그리고 1959년 자유당에서 제안한 입장세법 개정안(국산영화와 외화 모두 극장의 등급에 따라 세율을 차등 부과)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이에 반대하는 영화인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국회 앞에서 배우들 진정", 《조선일보》, 1959. 12. 27. 3면 기사 참조) 구술자 강대선이 봤다는 시위는 1958~1959년 즈음에 있었던 이 배우들의 시위일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위가 입장세법 개정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1960년 개정⋅시행된 입장세법에 따라 국산영화에 대해서도 2~4%의 입장세가 부과되었는데, 대신 1958년 문화공보부 고시를 통해 우수 국산영화를 제작한 영화사에 외화수입배급 쿼터를 1편씩 추가로 배정하는 ‘국산영화제작장려 및 영화오락순화를 위한 보상특혜’가 시행되었다. 그러나 임화수는 외화 배급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보상정책이 수립되는 데에 그의 입김이 얼만큼 닿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주5. "법정스냎-말끝마다 예술인/임화수, 국가공로 있다고", 《동아일보》, 1960. 9. 6. 3면 기사. 주6. "임화수⋅유지광 최후진술", 《경향신문》, 1961. 8. 22. 조간 2면 기사. 주7. 이때 그의 범죄혐의는 ①국도극장 임검순경 폭행 ②명보극장 사장을 협박하여 권리행사 방해 ③투자액 반환을 요구하는 공연 투자자 폭행으로 인한 상해 등 세 가지였는데, 모두 영화사 설립 이후 극장 흥행과 관련한 폭력 행위로 이전에 명동파로 활동하던 때의 범죄로 처벌을 받은 것은 아니었기에 상대적으로 가벼운 형을 받았다.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1931년 《동아일보》(4.14.)와 《조선일보》(4.15.)에 조선영화제작연맹의 제작발표회 기사가 실렸다. 당해 4월 8일에 일어난 홍옥임과 김용주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을 기반으로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소식이었다. 기사에는 <명일의 여성>이라는 제목뿐 아니라 출연과 제작진도 함께 발표되었다. 감독 및 각본 홍개명 , 각색 김서정, 촬영 한창섭 , 진행 홍찬 , 출연 나웅 · 윤봉춘 · 김연실 · 임운학 등이 제작 동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두 젊은 여성이 자살한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한 지 이제 막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음에도 한두 달 내에 제작에 착수할 것이며 야심 차게 상해로 수출할 것이라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관련된 후속 보도는 이어지지 않았다. 홍옥임, 김용주 철도동반자살 사건 관련 《조선일보》 기사(1931.4.10.) 당시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를 보면 1923년 윤백남 의 < 월하의 맹서 >가 개봉된 이후 본격화된 조선의 영화제작이 점차 그 수를 늘려가고 있던 중이었다. 특히 1926년 < 아리랑 >(나운규, 1926)의 전국적인 흥행으로 1927년에는 무려 14편의 영화가 제작되었고, MGM이나 파라마운트와의 특약 계약을 통해 영화를 수입하는 회사도 세워져 외화배급이 원활해졌다. 영화와 관련된 담론 역시 활발해져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의식을 구현한 영화를 옹호한 카프와 작품성이나 상업성에 주안을 둔 그룹이 논쟁을 벌였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식한 광견(狂犬)’, ‘무지한 필님충(film蟲))’으로 날선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그리고 1930년대에 이르면 세계 영화계는 발성영화의 시대에 진입하고 극장은 신기술을 도입할 새로운 자본과 혁신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명일의 여성> 제작발표 기사가 났던 1931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검열이 체계화되고 경제상황이 안 좋아지면서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31 』) 개봉되고 제작된 조선영화는 그 수가 대폭 줄었다. 영화창작을 향한 열망은 여전해서 <명일의 여성>처럼 제작발표를 했지만 실제로는 아예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거나 완성되지 못한 영화 목록이 꽤 길었다. 한국 퀴어 영화의 역사 쓰기를 고려할 때 <명일의 여성>은 흥미로운 위치에 있다. 이 영화는 아마도 제작조차 들어가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만들어진 적 없는 ‘허구의 영화’다. 하지만 제작되었다면 첫 번째 레즈비언 영화로 불렸을 수도 있는 영화다. <명일의 여성>은 그런 면에서 허구의 기원, 기원 없는 기원이다. 그러나 이 허구야말로 늘 퀴어 역사와 존재에게는 실재의 또 다른 말이 아닌가? 존재하면서도 부정당하거나 가짜와 위장으로 의심받는 섹슈얼리티, 정체성 그리고 수행. 심지어 스크린 위에 가시화될 때도 마치 없는 것이나 오점처럼 지워지는 역사들. <명일의 여성>은 시간을 특정할 수 없다. 백퍼센트 제작이 안 되었다고 확신할 수 없는 영화, 그래서 영원히 제작 ‘중’인 영화. 과거의 사건이지만 지속적으로 현재일 수밖에 없으며 어딘가에서 비틀어지고 왜곡된(pervert) 씨를 뿌리는 시간 속에 있는 영화. 어제의 시간 속에 있으면서 오늘일 수밖에 없는 영화다. 과거라는 시간(1931년)에 단단히 묶여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로 열려 있을 수밖에 없는 기이한 시간의 모양을 갖는다(“시간의 구속Time Binds”이란 용어는 엘리자베스 프리먼[2010]의 저작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과거는 희뿌옇고 부실하고 오염되어 있으며, 현재와 미래는 부재 중이다. 어쩌면 우리는 <명일의 여성>에서 허구의 세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어디에도 없는 곳이자 결코 규정되지 않아 끊임없이 규정이 필요한)유토피아’를 조우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허구’라는 방법론으로 퀴어의 역사를 쓴다면 어떤 역사를 쓸 수 있을지 생각해 봐야 한다. 먼저 ‘허구’는 그저 공상이 아니라 공통세계에 공존하는 틀을 만들 수 있는 도구라는 점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 흥미로운 영화의 ‘허구’에 어떤 현실감, 수용가능성, 개연성을 불어넣어줄 수 있을까? 먼저 두 범주로 나눠 질문들을 던져 보자. 조건의 질문들과 상상의 질문들. - 조건의 질문들 : 당시 비극적인 자살사건이 일어난 지 겨우 일주일이 지난 시점에서 어떻게 이렇게나 빠르게 동인을 모아 제작발표를 할 수 있었을까? 더불어 영화가 (아마도) 제작을 할 수 없거나 완료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젊은 여성의 동성애 소재는 신선함, 대중성, 이국성을 갖는 매혹적인 영화 소재였을 것이다. 당시 엘리트들에게 고등교육을 받은 신여성들 간의 동성애는 이질적이고 새롭지만 거부감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신문칼럼이나 잡지는 여성 동성애 ‘유행’을 자세히 소개하면서도(1930년대 잡지 <별건곤>의 ‘여류명사’들의 동성연애기 투고기사) 제대로 된 남성을 만나기 이전의 소녀들의 일시적 실험이나 정사 없는 플라토닉한 사랑으로 한정되기 때문에 가부장제 이성애에 위협을 주지 않는다고 적고 있다. 남성 엘리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항문성교를 한다고 알려진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동아일보》 1932.3.17.). 더군다나 이 영화는 당시 젊은 세대의 연애관과 결혼관을 비판적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반드시 두 여성의 시점에서 서사가 구성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홍옥임(21세)은 당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수 홍석후의 딸이자 음악가 홍난파 의 조카였으며, 김용주(17세)는 종로 덕흥서림 사장 김동진의 딸이자 비행사 심종익의 아내였다. 스스로도 엘리트 교육을 받은 신여성인 동시에 조선 최고 엘리트 집안이었기 때문에 세간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도 연인관계에 있던 노동계급의 젊은 여성들의 철도동반자살 사건이 있었지만 해당 사건은 워낙 유명한 집안이었던 만큼 더 큰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박차민정의 『조선의 퀴어』(2018) 참고). 또한 상해 수출을 염두에 두었다는 것은 이 주제가 그만큼 해외에서도 수용될 만한 소재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소재의 대중적 매력만으로 영화를 완성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당연히 자본이 가장 큰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혹은 동인들 간에 이견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 중 한편 독일의 유명 레즈비언 영화 <제복의 처녀Mädchen in Uniform>(1931)가 같은 해 독일에서 개봉되었다는 것은 우연이지만 조선영화가 세계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여성작가인 크리스타 윈슬로가 쓴 극본 <어제와 오늘>을 여성 감독 레티오네 사강이 연출한 <제복의 처녀>는 1933년 3월에 조선에도 개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변사 박창원의 녹음으로 1936년 12월 영화해설 음반이 발매되었으며, 일본에서는 1934년 《키네마 준보》에서 최고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당시 언론은 영화의 인기에 여학교 학생들을 ‘제복의 처녀’라 부르기도 했다. - 상상의 질문들 : 실제로 이 영화가 모종의 이유로 제목을 바꿔 해당 영화인지 알 수 없게 제작되었는데 개봉을 할 수 없어 프린트의 일부가 상해 어딘가에 있을 가능성은 없을까? : 당시 <명일의 여성>의 출연 및 제작 동인(이름을 올리지 않은 이들을 포함)에 퀴어는 없었을까? 퀴어적 관계나 정체성을 가진 제작진이 포함되었다는 상상 속에서 <명일의 여성>을 갖고 ‘영화에 대한 영화’를 만들어 영화가 실종되었거나 완료되지 못한 이유를 추리해볼 수 있지 않을까?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의 1930년대 버전이 될 것이다. 조선의 영화현실 뿐 아니라 당시 젊은 여성 동성애자들에 대한 성적 억압과 다른 여러 불만들(가부장제, 교육, 계급, 식민지적 억압 등)을 교차해 서사화할 수 있다. : 조선영화가 1930년대 이미 여성 동성애 소재로 트랜스내셔널하게 연결되었던 역사와 현재 식민지 조선 혹은 경성이라는 시공간이 종종 퀴어화 되는 것에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 < 청연 >(윤종찬, 2005),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해영, 2014), < 아가씨 >(박찬욱, 2016), < 유령 >(이해영, 2022). <명일의 여성>처럼 시간의 구속을 가진 퀴어화된 영화들을 어떻게 봐야할까? 나는 이 모든 질문에 답할 수도, 답하려는 욕망도 없다. 단지, 시간의 구속에 얽혀 실종되고 왜곡되고 흐릿한 퀴어 영화들의 파편 더미들을 더듬어 보고자 한다. 그리고 경성 퀴어로 시작해보고자 한다. (계속)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이해영, 2014) 중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드는 영화적 순간들이 있다. 운동을 동결하는 프리즈 프레임처럼 무리 없이 흘러가던 기존의 판단과 감정을 괄호치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섣불리 의미화 하지 않게 하는 정초(定礎)의 얼굴들. 특히 엔딩에서 인물들 간의 관계를 넘어 스크린 바깥으로 급진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얼굴들 말이다. 인상 깊었던 한국영화의 그러한 순간들을 거칠게 꼽아보자면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 < 길소뜸 >(임권택, 1986), < 시 >, < 살인의 추억 >(봉준호, 2003) 같은 영화들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들 얼굴-물음의 성격은 모두 다르다. 메타 영화인 <반도의 봄>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영화 <춘향전> 제작기와 이성애 로맨스를 서사화한다. 이 영화는 일본이 내선일체를 강조하며 군국주의적 착취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던 시기에 제작되었다. 표면적으로는 영세한 조선 영화를 발전시키고자 하는 영화인들의 성장서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본과 기술을 앞세운 총독부의 국책회사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조선영화를 통제하기 위한 명분을 쌓는 프로파간다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영화는 여러 어려움과 오해에도 결국 영화를 완성시키고 애정을 확인한 두 영화인 남녀가 선진영화를 배우기 위해 일본 유학길을 떠나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런데 영화는 마지막 쇼트로 행복한 연인이 아닌 플랫폼에서 배웅하는 동료 영화인들의 어두운 얼굴 클로즈업을 선택한다. 식민지 조선이라는 현실에서 그들이 기차의 선로를 따라 뻗어 나갈 수 없음을, ‘발전’은 허구에 불과한 것임을, 실제로는 진퇴양난에 몰려있음을 드러내는 당혹감, 즉 픽션과 스크린을 넘어 현실의 시간성을 묻는 얼굴들이다. <길소뜸>은 1980년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와 가부장적 민족주의가 결합된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국가적 미디어 이벤트였던 ‘이산가족찾기’가 가진 이면을 보여준다. 화영(김지미)은 한국전쟁 중 잃어버린 아들과 연인을 극적으로 찾게 되고, DNA 검사로 그가 아들임을 확인받는다. 그러나 화영은 자신에게 매달리는 아들 부부를 끝내 뿌리치고 부인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차를 운전해 도로를 달리는 가운데 검사를 진행한 의사의 내레이션이 깔린다. 의사가 ‘과학’의 이름으로 민족과 가족의 가치를 설교하는 가운데 화영은 되돌아가려는 듯 차를 멈춘다. 그리고 카메라는 화영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살짝 눈시울이 불거진 얼굴은 ‘본능적 모성’이 그녀를 막은 것처럼 보이지만, 화영은 단호하게 다시 가던 길을 간다. 그녀의 행동은 민족-국가와 대중이 기대하는 얼굴을 부인하며, 부인을 재확인한다. 화영은 그로써 대중매체와 과학이 강요하는 가부장적 민족주의와 혈연주의뿐 아니라, 여성 스타를 거대서사의 반응(reaction) 스크린으로 만드는 얼굴 이미지를 이중적으로 질문한다. 한편 <살인의 추억>은 연쇄살인 사건을 담당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박두만(송강호) 형사가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의 시체가 발견된 평화로운 논밭을 다시 찾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마지막 장면은 박두만이 카메라를 바라보는 것으로, 즉 직설적으로 스크린 너머의 현실을 응시하는 것으로 끝난다. 봉준호 감독이 인터뷰에서 종종 밝혔듯이 박두만의 얼굴-물음 쇼트는 당시에 아직 잡히지 않은 범인을 호명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박두만의 표정은 아련하게 무언가를 추억하는 것처럼 보일까? 박두만은 그 시절을 ‘실수가 좀 있었지만 열심히 산 시절’로 추억할 수 있다. 여기서 범인과 동시에 그 얼굴을 질문받아야 하는 대상은 박두만을 비롯한 경찰 공권력 그 자체이다. 서태윤(김상경)도 처음에는 인권적이고 과학적인 수사를 도입하려 하지만 결국 대책 없고 폭력적인 박두만과 조용구(김뢰하)의 방식에 물든다. 박두만은 질문하는 얼굴인 동시에 질문 받아야 하는 얼굴이다. <시>의 얼굴-물음은 위의 영화들과는 다르다. 이 영화는 스크린 바깥에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얼굴 자체를 물음으로 만들어 버린다. 앞에서 말한 정초의 얼굴에 가장 가깝다. 최종적으로 미자는 자신의 자리에 타자의 얼굴이 들어올 수 있도록 자신의 얼굴을 기꺼이 희생하는 급진적 선택을 한다. 양미자(윤정희)는 딸이 맡겨둔 손자 종욱(이다윗)과 함께 살고 있다. 60대의 미자는 신산한 삶을 살았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지만 여전히 소녀 같은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꽃과 시에 진심인 미자는 어느 날 한 자신의 손자가 집단강간 가해자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시>의 오프닝과 엔딩은 수미상관을 이룬다. 오프닝에서 카메라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프레임 밖에서 들리는 아이들이 떠들며 노는 소리를 따라 카메라가 패닝한다. 강가 모래밭에서 놀던 한 아이가 하늘을 보다 물에 떠내려 온 희진(한수영)의 시체를 발견한다. 시체는 뒤집어져 있고 우리는 희진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카메라와 소녀의 시체가 서로 가까워지며 소녀의 뒤통수가 화면 안에 가득 찰 즈음 ‘시’라는 제목이 화면의 왼쪽에 떠오른다. 집단강간 피해 후 자살을 한 소녀는 ‘시’가, ‘영화’가 될 수 있을까? 더 정확히 말하면 희진이 시와 영화로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조건은 무얼까? 영화는 알츠하이머를 앓아 언어를 상실해 가는 미자가 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의 죽음, 영화의 죽음 또한 반복적으로 선언되고 있는 시대에 말이다. 이 영화는 무언가를 상실하고 죽어가는 것들의 연대를 말한다. 영화에서 ‘봄’은 시/영화 쓰기의 핵심적 실천으로 언급된다. 이 영화가 말하는 시적/영화적 봄은 김용탁(김용택) 시인이 사과를 두고 말한 것처럼, 존재(방식)에 관심을 두고 돌보며 이해하고자 하는 현상학적 봄이다. 현상학적인 봄에서는 주체와 대상이 이분법적으로 나눠져 있지 않고(나의 봄은 언제나 당신의 봄과 얽혀 있다), 관습적인 사용방식, 즉 도구화에 질문하면서 존재의 다양한 역량이 드러날 수 있게 한다. 하지만 시상이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것이 아니듯 현상학적 봄도 쉽지 않다. 미자는 꽃을 비롯해 보기에 예쁜 것을 좋아한다. 챙이 있는 하얀색 모자에 하늘하늘한 꽃무늬가 있는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늘 웃고 다니는 미자는 주변 사람들에게 곱고 예쁘다는 평가를 듣는다. 미자 역시 자신을 곱다고 하는 주변 사람들에 늘 “저 멋쟁이에요?” “나 예쁘다고 생각해요?”라고 되묻는다. 하지만 이들은 의미 없이 화제를 돌리기거나 자기 기준에 맞춰 에둘러 비난하기 위해 그들의 첫인상을 거리낌 없이 평가한다.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제로 상대방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 빠르게 판단하고 도구적으로 이용한다. 손자 종욱과 함께 범죄를 저지른 아이들의 아버지들은 희진을 불쌍해 하지만 자기 아들들을 위해선 그녀의 피해를 지워버리려 하고, 희진 엄마를 쉽게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며, 심지어는 미자에게 “같은 여자”, “혼자 손자를 돌보는 불쌍한 할머니”로서 희진 엄마에게 사정을 해보라고 한다. 공적 책임이 있는 기자와 교감조차 희진을 진정으로 대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의 편익에 따라 이용한다. 간병을 받는 김노인 역시 미자를 일방적으로 자신의 욕구를 풀 성적 대상으로 본다. 그렇다고 피해자나 약자 역시 도구적 봄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어렵다. 희진 엄마는 결국 돈을 받고 합의를 해주기로 하고 미자 역시 김노인을 협박해 돈을 받아내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자는 희진의 죽음과 울부짖는 희진 엄마를 가십거리처럼 동네 슈퍼에서 전한다. 미자가 다니는 병원 로비에선 전쟁에서 자식을 잃은 팔레스타인 엄마가 고통스럽게 인터뷰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미자는 정말로 왜 그렇게 아름다움을 보는 행위에 집착하는 걸까? 시 강좌에서 ‘내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을 고백하는 미자의 말에서 우리는 실마리를 포착할 수 있다. 미자는 자기 인생의 첫 번째 기억으로서 서너 살 즈음 아픈 엄마 대신 일곱 살 차이 나는 언니가 자신을 돌보며 예쁜 옷을 입혀주고 애정을 담아 돌봐줬던 순간을 기억한다. 언니의 ‘예뻐해 줌’은 존재의 첫 각인으로 남는다. 언니의 사랑은 그녀가 존재함을 감각하게 한 원초적 기억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언제나 ‘아픈 엄마’처럼 고통과 함께 한다. 미자는 시를 쓰려고 노력하고, 알츠하이머로 언어를 잃고, 더 이상 손자라는 존재를 이해할 수 없게 되면서 관습적인 관계와 이해를 벗어던진다. 미자는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는 것으로 실천을 시작한다. 미자의 추도식에서 액자에 담긴 희진의 사진을 훔쳐오고, 그 액자를 손자가 보도록 식탁에 놓는다. 하지만 손자는 그 얼굴을 외면하고 크게 마음 쓰지 않는다. 미자는 다른 아버지들에게 떠밀려 합의를 요구하기 위해 희진 엄마를 찾는다. 농사일을 하고 있는 희진 엄마를 찾아 떠나지만, 미자는 곧 자신의 목적을 잃고 따뜻한 햇살, 살랑대는 바람, 초록이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에 마음을 뺏긴다. 희진 엄마를 마주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세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지를 읊는다. 미자는 뒤늦게 그가 희진 엄마였음을 깨닫고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마주한다. 타자의 얼굴을 대면하기 위해선 어쩌면 자신의 끔찍한 얼굴을 봐야할지 모른다. 미자는 이후 자기에 대한 몰입에서 스스로의 얼굴을 질문하고 비우는 것으로 간다. 희진이 자살했던 다리를 찾아갔을 때 더 이상 습관처럼 적어 내려가던 아름다운 글귀들을 적지 못하고 비운 채로 남아있던 시상 노트는 미자의 얼굴이 된다. 자기를 비우고 타자의 얼굴을 위한 자리를 남겨둘 때야 원초적인 존재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다. 미자는 희진의 존재를 삭제하지 않기 위해 홀로 손자를 경찰에게 신고해 수사가 이뤄지도록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드디어 수강생 중에서 유일하게 시를 쓴다. 희진의 세례명을 딴 ‘아네스의 노래’라는 제목을 가진 미자의 시는 김용탁 시인이 읽으려고 하는 제스처에서, 미자의 목소리로, 그리고 아마도 희진의 목소리로 옮겨간다. 미자의 보이스오버로 시가 낭독되는 가운데 화면은 미자가 살았던 집, 미자의 집에 온 딸, 아파트 앞의 평상과 커다란 나무, 자주 이용하던 버스와 정류장을 따라간다. 우리의 신체 중에서 유일하게 직접 볼 수 없는 부위는 얼굴이다. 눈이 포함된 얼굴은 다른 신체 부위를 직접 볼 수 있지만 스스로 얼굴을 볼 수 없다. 그렇기에 존재론적으로 얼굴은 비움이자 물음이 된다. 이 장면은 미자가 보아 온 삶의 흔적을 훑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미지의 흐름 자체가 얼굴이기도 하다. 얼굴은 고정하거나 규정하지 않을 때 타자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 타자의 얼굴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면서 미자는 시를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아네스의 노래’는 미자와 희진이 함께 쓴 시라 할 수 있다. 영화는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시를 미자와 희진의 목소리로 읽게 하고 그 둘의 시점으로 보는 삶의 이미지들을 연달아 보여준다. 희진의 목소리로 낭독되는 시의 중반부터는 희진이 애정 어린 눈으로 보았을 장면들이 주관적 시점으로 이어진다. 학교 운동장, 수업하는 교실, 희진의 집과 반가워하는 강아지, 버스와 경주하는 희진의 남동생, 그리고 희진의 친구들. 마침내 다리 위에 도달했을 때 카메라는 드디어 희진의 얼굴을 보여주며 스크린 너머에 있는 관객들의 얼굴을 질문한다. 당신은 희진이 존재할 수 있는 자리를 비워두고 있는가? 다시 카메라는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