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속의 시간
- 감독
- 김봉식, 남승환
- 제작년도
- 1990
- 출연
- 박재영, 이철재, 정수정, 이시은, 김윤희, 최선중, 이병조
경성고등연예관은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흥행사 가네하라 긴조(金原金藏)가 황금정 제63통 7호에 세운 조선 최초의 활동사진전용관으로 1910년 2월 18일 개관했다. 《국민신보》에 게재된 광고를 보면 경성고등연예관은 1909년 10월 영업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암살당하면서 다음해인 1910년 2월까지 개관이 연기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성고등연예관이 처음 자리한 ‘황금정 제63통 7호’는 원래 남부(南部) 조동(棗洞), 즉 대추나무골이라 불리던 곳이다. 경성고등연예관은 여기 농상공부(農商工部) 건너편, 지금의 기업은행 본점 자리에 세워졌다가 1911년 9월, 맞은편인 황금정 3번지로 신축 이전했다. 현재 모 증권회사빌딩이 자리한 곳이다. 그러나 1912년 6월 황금정 도로 확장으로 건물의 일부가 헐리게 되자 영업을 중단, 개축하여 1912년 9월 16일 영업을 재개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설립자 가네하라 긴조는 태국에서 와타나베 토모요리(渡邊智賴)라는 사람 밑에서 활동사진업을 했는데, 조선에 건너와 경성고등연예관을 세우고 와타나베가 운영하던 ‘K다이아몬드’ 회사 배급작을 들여와 상영했다. 와타나베는 태국의 초기 영화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태국에 일본식 흥행 문화가 정착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다. 와타나베나 가네하라처럼 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눈을 돌린 배경에는, 태국에서의 흥행 경험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있던 조선의 활동사진 흥행업 진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판단이 있었다. 개관 직후 경성고등연예관의 프로그램은 다양한 장르의 단편영화들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 사이사이 간단한 무용 등의 여흥이 곁들여졌다. 이 프로그램은 영화의 길이가 길어지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프로그램의 교체 주기는 시기마다 차이가 있는데, 개관 이후 1910년 5월까지는 월 2회(매월 1일, 15일) 교체되었고 6월부터는 월 3회(매월 1일, 11일, 21일) 교체됐다. 1912년 3월 1일부터 1913년 3월 말까지는 다시 월 2회(매월 1일, 15일)가 되었으나, 경쟁 영화관들이 1주일 간격으로 프로그램을 교체하기 시작하자 1913년 4월부터 폐관되는 9월까지는 일주일마다 프로그램을 바꿨다. [자료] 경성고등연예관 개관 광고(《황성신문》, 1910.02.18) 앞서 언급했듯이 경성고등연예관에서 상영한 필름은 태국의 영화회사 K다이아몬드가 배급한 것이었다. K다이아몬드는 1910년 쭐랄롱꼰 국왕의 장례식을 기록하는 등 태국의 왕실 행사를 담은 실사영화를 여러 편 제작하기도 했는데, 이를 따라 경성고등연예관 또한 조직을 정비하고 환등 및 활동사진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1911년 8월 경성고등연예관의 신축 이전을 앞두고 조선에 건너온 가네하라는 활동사진 제작과 상영을 위해 가네하라상회를 신설, 산하에 연예부, 사진부, 판매부를 두었다. 연예부에서는 경성고등연예관과 활동사진순업대를 운영하고 사진부에서는 환등과 활동사진을 제작하며 판매부에서는 활동사진 필름이나 환등 기계 등 다양한 물품들을 판매하겠다는 것이었다.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에서는 1912년 9월 16일 재개관을 맞아 촬영부를 개설하고 본격적으로 환등과 활동사진 제작에 나선다. 더 나아가 1913년 2월에는 여흥을 강화하기 위해 기존의 전기응용 방식을 대신할 키네오라마(キネオラマ)를 설치했다. 키네오라마는 일출(日出), 석립(夕立, 소나기), 석효(夕燒, 저녁노을), 명월(明月) 등의 효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장치였다. 1913년 전후로 대정관을 위시하여 우미관, 황금관 등 세 곳의 활동사진 상설관이 등장하자 경성고등연예관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 이에 1913년 4월 1일을 기해 경성고등연예관은 대대적인 혁신을 선언한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구(新舊) 일본극을 더하여 매주 프로그램을 바꾼다. 둘째, 입장료를 저렴하게 개정한다. 셋째, 도쿄에서 변사 후지모토 류코(藤本龍光)를 초빙하여 다나카 아사히유(田中旭湯)와 함께 활동사진 설명을 맡겨 변사 진용을 강화한다. 다섯째, 관객의 대우를 한층 새롭게 한다. 이러한 조치는 조선인과 일본인 관객을 모두 유인하려던 기존의 전략을 포기,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꾸겠다는 뜻을 공표하는 것이었다. 일본인 전용관으로 전환하며 대대적인 혁신을 시도했음에도 경성고등연예관은 치열한 상설관 사이의 경쟁에서 도태되었고, 결국 1913년 9월 1일 경영난을 이유로 폐업을 선언한다. 경성고등연예관의 건물과 흥행권은 대정관을 운영하던 닛타 고이치(新田耕市)에게 매각되었으며, 이후 경성고등연예관은 제2대정관이라 이름이 바뀌어 1913년 10월 31일부터 운영을 재개했다. 제2대정관 개관 광고에는 주임 변사 이마이 요시카(今井芳香), 차석 변사 와타나베 마쓰카제(渡邊松風)라 기록되었다. [자료] 제2대정관 개관 광고(≪조선신문≫, 1913.10.30) 제2대정관이 개관하면서 경성의 일본인 상설관은 제1대정관(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세 곳이 된 반면 아직 조선인 상설관은 우미관 한 곳뿐이었다. 닛타 고이치는 대정관, 제2대정관, 황금관 3개관이 6~7만 명에 불과한 경성의 일본인 관객들을 나누는 것보다는, 하야가와연예부의 필름을 제공받아 20만 명의 조선인 관객을 독점하던 우미관을 견제하는 편이 유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대정관을 조선인상설관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그리하여 1914년 6월, 제2대정관의 유일한 조선인 변사였던 김덕경(金悳經)을 변사장에 임명하고, 설명 주임 이병조(李丙祚), 차석 최병룡(崔炳龍) 등의 변사진을 꾸려 조선인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한다. 당시 제2대정관에서는 일본인 상설관에서 상영하던 방식대로 여러 명의 변사들이 출연하여 마치 오늘날의 성우와 같이 각자 주어진 배역을 맡아 스크린 속 배우의 목소리를 연기했다. 그뿐 아니라 여변사 강경옥(康鏡玉)과 소년변사 이병호(李丙浩)를 두어 여자 배역과 아이역의 연기를 담당하게 했다. 이처럼 영화 속 어떤 배역의 목소리를 도맡아 연기하는 변사를 연극변사 혹은 성색(聲色)변사라고 불렀다. 그러나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조선인 상설관은 활동사진의 배경을 설명해주거나 타이틀을 읽어주는 역할의 소위 설명변사가 독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제2대정관의 연극변사 제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진 듯 보인다. 제2대정관을 조선인 상설관으로 전환하여 사용하려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이에 닛타연예부는 대정관의 경쟁 상대인 황금관을 견제하기로 전략을 바꾼다. 황금관을 운영하던 하야가와연예부로부터 필름을 제공받던 우미관을 공략하여 하야가와연예부 대신 제2대정관의 필름을 함께 사용하는 동시에 제2대정관을 일본인 전용관으로 되돌리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1915년 4월 제2대정관은 조선인 상설관에서 다시 일본인 상설관으로 전환되어 세계관(世界館)이라고 이름까지 바꾼다. 특약에 따라 제2대정관을 운영하던 닛다연예부는 우미관으로부터 매달 2백원의 보상금을 받기로 했으며, 우미관은 세계관과 같은 필름을 매월 5백 원의 싼 가격으로 공급받아 사용하기로 했다. 이로써 닛다연예부에서 운영하던 세계관은 경성 서쪽의 일본인들을 주요한 관객으로 삼을 수 있었고, 닛다연예부의 필름을 공급받는 우미관은 경성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유일한 조선인 상설관이라는 지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인 전용관으로 바뀐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계관은 폐관한다. 1915년 9월 20일 본정 한복판에 유락관(有樂館)이 들어서면서 활동사진 흥행 권리를 유락관에 넘기게 된 것이다. 이리하여 경성고등연예관을 시작으로 제2대정관, 세계관으로 이어진 영화관의 역사가 사라지고 그 권리만 유락관으로 옮겨갔다. 경성 최초의 활동사진 상설관은 훗날 영화관과 상관없는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면서 더 이상 흔적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참고문헌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99~134쪽. [사진](상단). 경성고등연예관 외관(《국민신보(國民新報)》, 1909년 10월 5일자.) [자료] 《황성신문》, 1910.02.20. 世界 苐一 活動冩真 開館 ● 本舘新築落成 에 就 야 二月 十八日(陰曆 正月 九日) 로 開館 ● 二月 二十日(陰曆 正月 十一日 午后 六時 브터 年中無休 로 一般 顧客 의 觀覽 에 供 ● 本館 의 寫眞 은 佛國 파데 會社 의 最新 器機 를 使用 고 每週 輸入 世界 各國 의 最 히 壯觀 에 極 山水 의 風景、人事 의 現象 은 勿論、滑稽、奇術 及 世界 有名 의 諸般 珍事 를 映寫 야 一般 活動寫眞界 에셔 斷 히 企及 키 能 치 못 것을 明言 ● 本館 은 寫眞 의 外 에 日本 美人 의 花 와 如 電氣踊 을 間間 히 行 고 且 韓國 妓生 의 舞踏 를 加 야 錦上添花 의 觀覽 이 有 ● 本舘 의 建築 宏壯 은 內部 의 完全、 장 篩 의 美麗、待遇 의 懇篤、衛生 設備 의 整然 이 模範的 演藝舘 이 될 것을 一般 에게 誇張 ● 本館 의 擔任 技師 靑森縣人 中村初太郞 이니 活動寫眞業 의 本邦 創業 以來 로 吉澤商店 及 파데 會社 에 技師 兼 敎授 의 任 에 在 야 精巧 老鍊 의 技術 이 有 야 斯界 의 錚錚 의 評 이 有 바 其 映寫 의 巧妙 本館 의 壯談 바요 ● 高尙 고 優美 活動寫眞 은 敎育 又 家庭 의 一時 娛樂 이 此 에 優 것이 無 니 開舘 後 陸續 御來覽 심을 深 히 希望 入場料 四等 金拾錢 三等 金貳拾錢 二等 金參拾錢 一等 金伍拾錢 特等 金一圓 每日 午後 六時 開舘 但 五人 以上 組合 觀覽者 에게 一割引 十人 은 二割引 京城黃金町(農商工部通) (南部東洞) 京城高等演藝舘 [자료] 《황성신문》, 1910.04.10. ● 銀甁 下賜 大皇帝 陛下 게 셔 去七日 에 高等演藝館 에 活動寫眞 을 招入 御覽 심은 已報 어니와 該 館主 日本人 宮田伊助 에게 銀製 花甁 一個 를 下賜 셧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1.08.11. ● 金原商會 의 新設 目下 黃金町 三番地 에 新築 落成 은 九月頃 인 故 로 卽時 開業 다 向者 에 館主 金原 氏 가 來鮮 야 營業 의 方針 을 變更 고 京城高等演藝館 은 仝會 의 演藝部 가 되야 今後 에 大改良 을 加 고 昔年 東京 에셔 郵便局長 으로 勤務 던 成淸 氏 를 招 야 演藝部 로 敎育的 活動寫眞 으로써 全道 에 巡業 케 며 又 寫眞部長 에 工山 氏 招聘 며 又 東京 三越吳服店 의 寫眞部 에 在 야 技術 이 卓越 大庭 氏 超 야 一般 寫眞 의 撮形 은 勿論 고 活動畵 及 幻灯 도 製作 케 며 販賣部 活動寫眞畵 及 幻燈器械 外 에 日鮮人 의 實用品 도 薄利 로써 販賣 다더라 [자료] 《매일신보》, 1914.06.03. ● 第二大正館 新面目 ▲ 구리 뎨이대졍관에셔 ▲ ▲ 슌젼 죠션인을 위 활동 ▲ 이왕 , 구리개 고등연예관을 , 뎨일대졍관에셔 사드린 후 , 일홈을 뎨이대졍관 ( 第二大正館 ) 으로 곳치고 , 활동사진을 영샤 즁이더니 , 시셰의 요구를 응 여 , 오 날 지 , 디인의 경영으로 , 디인 변 ( 辯士 ) 지 두고 , 뎐업 던 것을 , 일톄 페지 고 , 죠션사 으로 야곰 , 사진 셜명을 계 야 , 죠션인 젼문 ( 專門 ) 으로 뎡 고 , 참신 긔발 , 셰게 인졍 풍속 등 , 여러 가지 사진을 가져다가 , 오 밤부터 , 시작 다 오 밤부터 흘 동안은 , 입장료 ( 入場料 ) 를 특별히 감 야 , 웃층은 평균 십젼으로 , 아 층은 , 평균 오젼으로 다 며 , 젼덕경 ( 全德經 ) 최병룡 ( 崔炳龍 ) 두 변 의 류챵 쾌활 설명이 , 잇슬 터이라더라 .
1930년 1월 조선극장과 단성사가 토키를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의 활동사진 변사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조선의 영화 문화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변사들의 연행이 ‘화예(話藝)’라는 말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원숙한 경지에 이른 때였다. 무성영화 시대를 대표하는 변사의 한 사람, 김영환은 곱상한 외모와 단정한 매너로 흥행계에서 인기를 얻어왔을 뿐 아니라, <장화홍련전>(1924), <세 동무(삼걸인)>(1928), <약혼>(1929), <젊은이의 노래>(1930), <연애광상곡>(1931) 등을 연출한 영화감독이기도 했으며, “낙화유수”, “세 동무” 등의 영화 주제가와 “강남제비”, “추월색” 등의 유행가를 작곡할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1928년에 단성사에서 조선극장 해설부 주임으로 자리를 옮긴 그는 앞으로 수년 내에 변사라는 직업이 사라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선에서의 영화해설 역사를 설명한 음반 《역려》(1932)에서, 그는 자신이 서있는 격변의 시간을 “활동사진이란 그 이름이, 영화라는 이름으로 바꾸이는 동시에 변사라고 하든 것도, 해설자라는 것으로 고치어진 오늘” 1 이라는 정도로 인식했다. 그가 보기에 토키 이후의 변사는 ‘활동사진 변사’에서 ‘영화의 해설자’로, 그러니까 극장의 엔터테이너에서 필름 텍스트에 한걸음 더 다가가 영화의 번역자로서 자기 인식을 가져야 하는 존재였다. 김영환에게는 더 나은 해설자가 되는 것이 중요할 뿐 굳이 다른 분야를 곁눈질할 필요가 전혀 없어 보였다. 김영환은 ‘조선인 변사 1세대’ 서상호와 김덕경의 견습으로 흥행계에 입문했다. 경상도 출신으로 사투리 탓에 견습 시절에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꽤 오래 생활고에도 시달렸지만, 이제 영화해설계의 중진이 되자 변사의 화예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는 외국영화뿐 아니라 국산영화를 상영할 때도 변사의 해설이 붙는 일본이나 조선에서 “해설은 외국인들도 일찍 발견치 못한 영화감상의 효과를 한층 더 힘 있게 하는 일종 특수적 색채”이며 “영화를 일반적으로 감상시키는 동시에 영화의 색채와 더 예민한 감각과 인상을 주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작품을 해부하여 일반적 감상에 바치는 일종 수단”인 영화해설에는 그야말로 ‘연구’가 필요하다. “지껄이되 잘 지껄이자는 것이며 어떻게 해야 조리 있게 잘 지껄일까를 힘써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연구 끝에 김영환은 영화의 주제와 플롯, 분위기를 이해하고, 작자의 주안(主眼)과 세선(細線)을 분별하는 안목을 보유하며, 영화 번역에 창의성을 발휘하되 자기도취에 빠지지 않는 것이 해설자의 자질이라고 풀어 설명했다. 2 1931년 조선극장에서 <럭비시대>(The Forward Pass, 1929)와 <크랙 장군>(General Crack, 1929)을 상영하던 때, 김영환이 기록한 일기에는 이제 막 토키 시대로 진입한 조선 변사의 일상이 꼼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는 하루하루가 바쁜 변사였다. 조선극장에서는 이미 외국의 토키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김영환은 그 외국어 자막을 번역해 설명하는 연행을 했다. 그런 한편 개인적으로 유성기 극음반을 취입해 상당한 재미를 보기도 했다. 유성기와 라디오 보급률이 서서히 증가하면서 극장에서 ‘오리지널’한 변사의 목소리는 레코드를 통해 ‘복제’되고 방송을 통해 ‘전파’되었다. 변사가 자신의 다른 목소리들과 공존할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1930년대의 김영환은 라디오에 출연해 영화를 해설하고 극음반 취입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새로운 ‘재생 예술’들과 상보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어떤 면에서 그는 ‘소리 복제 시대’를 반기고 있었다. 1931년 봄 김영환이 콜롬비아레코드에서 취입한 《춘향전》은 윤혁과 이애리수의 실연(實演)과 박록주의 창, 그리고 그 자신의 설명이 어우러진, 다시 말해 연극과 판소리, 영화해설이 뒤섞인 음반으로서 구매자들에게 풍성한 즐거움을 제공했다. 극음반이 잘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던 김영환은 극음반 취입의 소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3 기술적 격변의 시기에 그는 쏟아지는 신작 영화와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세계 영화계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자, 일본의 영화 잡지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와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를 구독하며 동시대적인 감각을 익히려 노력했다. 어느 날은 자신이 취입한 음반이 많이 판매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솔직하게 적었지만, 또 어느 날은 일본의 명변사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가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 반론을 펼친 데 깊이 동조했다. 김영환은 여기서 언어와 계급의 불평등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며, 토키영화를 해설하지 않는 것은 민중 오락인 영화를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새로운 기술 도입으로 인해 일본영화 산업계의 구조 조정이 시작된 것을 영화 노동자의 입장에서 아프게 바라보기도 하는데, 체계를 갖춘 스튜디오 하나 없이 산업적으로 허약한 조선영화의 현실에서는 그것조차도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4 기술과 산업의 후진성이 어떤 경험을 ‘결핍’시키거나 ‘지연’시키는 조선의 현실에서, 1930년대 초반의 변사들은 기존의 상영 관습을 이어가는 차원에서, 또 외국어 토키에 대한 관객들의 언어적 소외를 최소화하는 차원에서 발성영화의 음향을 줄이고 영화해설을 곁들이는 ‘토키 연행’을 시작했다. 하지만 관객의 항의에 부딪치지는 않았다. 비단 외국어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조선에서는 여전히 무성영화가 제작되고 있었고 아직 토키 상영 설비를 갖추지 못한 극장들도 많았다. 무성영화 프린트는 계속 유통되었고, 변사는 여전히 중요한 존재였다. 그러나 이 시기를 지나며 관객들이 영화 사운드와 영상 동조 시스템을 이해하고 자연스레 토키 감상에 익숙해지자 변사는 점차 불필요한 존재로 그의 연행은 ‘낡은 문화’로 인식되어갔다. 김영환의 일기로부터 몇 년이 지난 1930년대 후반, 경성의 이른바 ‘일류관’에서 변사의 해설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근대 문화의 첨단에 서 있었던 변사들은 불과 몇 년 사이에 활동사진 시대의 유물이 되었다. 1938년 가을, 조선일보영화제에 자극을 받은 ‘재경해설유지연맹(在京解說有志聯盟)’이 동양극장 영화부의 후원을 얻어 11월 16일부터 3일간 ‘무성영화 감상제’를 개최했다. 그해 여름 우미관 화장실에서 변사한 왕년의 인기 변사 서상호를 추모하듯, 무성영화 감상제에서는 과거의 동료들인 ‘무성영화 해설계의 권위’ 변사 이십여 명이 해설을 하고 그들과 함께 이름을 날리던 악사들이 영화음악을 연주했다. 5 <선라이즈>(Sunrise: A Song of Two Humans, 1927), <부활>(Resurrection, 1927), <거리의 천사>(Street Angel, 1928), 그리고 조선영화 <철인도>(1930), <아리랑 전·후편>(1926, 1930) 등 ‘추억의 명화들’이 이병조, 최병룡, 서상필 등의 해설로 다시 상영되었다. 그때가 아마도 ‘잊혀졌던 암실의 웅변가’들이 마지막으로 화려하게 조명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진 2. ‘무성영화감상제’ 광고 출처: 『동아일보』 1938년 11월 16일자, 3면. 1) 배연형·구인모,「역려」『유성기 시대, 변사의 화예』, 한국문화사, 2018, 321쪽. 2) 김영환,「영화해설의 소고(小考)」『대중영화』 제4호(1930년 7월), 8~13쪽. 3) 김영환,「영화생활」『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2쪽. 4) 김영환, 위의 글, 30~31쪽. 5) 「해설유지 주최 무성영화감상제」『동아일보』 1938년 11월 17일자, 4면. 상단사진 1. 변사 김영환의 영화일기 출처: 「영화생활」, 『영화시대』(1931년 5월) (아단문고 미공개 자료 총서 2013, 7권, 104쪽)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김영환, 「영화생활」 『영화시대』 1권 3호(1931년 5월), 30~32쪽. (부분 발췌) 3월 7일 (토) 10시 기상— 근래 처음으로 충분히 잠을 잔 모양이다. 어린애가 몸성히 잘 있다는 편지가 왔으므로 오늘은 마음이 좀 편해진다. 오늘은 토요일, 주야(晝夜) 곱빼기를 또 마시는 날이다. 『영화시대』에 보낼 원고 몇 장을 쓰고 나니 벌써 무대 교대 시간이 되었다. 마음에 없는 작품을 지껄이는 것이야말로 울면서 겨자 먹기, 이를테면 ‘빵’ 구실에 지나지 못하니 ‘밥’이 시키는 것이라 어쩔 수 없다는 그것뿐. 밤에 김연실, 강석연, 강석제, 유영광 이 네 분의 양(孃)들이 놀러 왔었다. 편지 쓰고 있던 때라 고급적 인사를 못하였더니 “방해가 너무 많아 미안합니다”라고 석제 씨의 꼬는 말씀 한마디에 낭자군은 일제 행동! 네 분의 양군(孃群)은 객석으로 달아났다. 저녁 일을 마치고 『키네마순보(キネマ旬報)』(3월 1일 제393호)를 통독함. 유니버설 춘계 작품 에드윈 커리우 (Edwin Carewe) 감독, 루프 벨레즈 (Lupe Velez) , 존 볼스 (John Boles) 주연으로 톨스토이의 『부활』이 재차 영화화가 된 모양. 반가운 소식이다. 돌로레스 델 리오 (Dolores del Rio) 가 지긋지긋하게 싫으니만큼 전(前) 영화 <부활> (Resurrection, 1927) 에서도 나는 호감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라 재차 영화화인 루프 벨레즈와 존 볼스의 이 신(新) <부활> (Resurrection, 1931) 에 나는 기대를 가져본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영화로 세실 B. 드밀 (Cecil B. DeMille) 감독 <마담 사탄> (Madam Satan, 1930) 의 발표는 그리 반갑지가 않다. 또 어느 구석에서든지 기필코 하나님이니 무엇이니 하고 씨부렁대놓은 구절이 있을 것 같아서 평(評)이나 시사를 대하기 전까지는 믿고 싶지가 않다. 동 회사 클래런스 브라운 (Clarence Brown) 감독 <불사조> (Wonder of Women, 1929) , 문호 주더만 (Hermann Sudermann) 의 원작인 만치 스토리의 통속적이 아니요, 비상업적인 그 점에서 어서 좀 보고 싶다. 일활(日活) 촬영소에서는 소원(所員)의 감봉 정리를 단행하였다고? 해고당한 50명 중에는 기술자나 배우로서 제일선에 나선 사람은 하나도 끼이지 않은 모양. 그러고 본즉 결국 수하 자(手下者) 참수 단행이나 아닌지 원! 먹을 것이 제법 생긴다는 저 땅에서도 영화 노동자의 수난이 생길 데에야 백사지(白沙地) 이 땅 위에서 갈팡질팡 헤매는 우리 영화 노동자들이야 말해서 무엇 하리. 아직도 참수 단행은 당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나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도쿠가와 무세이(德川夢聲) 씨의 「영화연첨일기(映畫軟尖日記)」, 『키네마주보(キネマ週報)』소재,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한 대항전은 흥미 있게 읽었다기보다도 장차 우리에게도 전환되어올 수난일 듯한 거기에서 같은 감정에 가슴이 흔들린다. 토키영화 설명 반대론에 대해서는 나 역시 거기에는 수긍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직업적 입장에서가 아니라 제3자의 견지로도 물론 그러하다. 만일 세계 공통어가 세계적 보급과 발달을 얻고, 그리하여 그 세계 공통어로 취입(吹込)하여 토키영화를 제작한다면 모르되, 그것을 얻지 못하는 금일에 있어서 토키영화 설명 반대를 고창(高唱)하는 것은 민중 오락에 본위를 가진 영화 그 물건으로 하여금 일부 유식급(有識級)만이 즐길 수 있는 일종 독락적(獨樂的) 기호물을 만들어 버리겠다는 전횡적 야심인 동시에 가공적 잠꼬대에 지나지 못하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아! 과학문명의 발달은 노동자의 생명을 뺏는 독와사(毒瓦斯)! 축음기의 권위로 말미암아 음악사(音樂士)의 희생을 본 오늘에 있어 토키영화의 출현으로 해서는 또다시 해설의 존재까지 그러하지 않은가! “아- 쿠오바디스 (Quo Vadis) 변사여!” 무세이 씨의 차탄사(嗟歎詞)이다. 참 아닌 게 아니라 어디로 갈꼬! 3월 8일(일) 9시 기상- <럭비시대> (The Forward Pass, 1929) 를 오늘도 주야로 두 번씩이나 씨부렁댈 일을 생각하니 졸음이 온다. 존 배리모어 (John Barrymore) 주연 <크랙 장군> (General Crack, 1929) 은 내가 보지는 않았으나 생각건대 <럭비시대>보담은 지껄일 재미가 좀 있으리라 했더니 후반을 담임한 성동호 군,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말. 그러나 <럭비시대>나 <크랙 장군>이 태작이라고 할 지경이면 배급소의 시비를 받을 말인 고로 이를테면 어디까지든지 태작이 아니요, 걸작이란 말이다. 요컨대 이 두 개의 걸작이 유감천만히도 우리들의 입에는 맞지 않는 음식과 같아 씨부렁대기에 매우 부아통이 터질 뻔 했다는 그것뿐이니 당해 배급소여! 달은 잡지 마실지어다. 적선동 강대원 씨에게 조극(朝劇) 초대권으로 미성(微誠)을 표하였다. 콜롬비아축음기회사 문예부 강윤석 씨 방문, 나의 취입한 레코드 초회 발매, 레코드 대회, 2회 발매, 《춘향전》은 상당히 잘 팔린다는 말 듣기에 기쁘다. 영화는 형태의 촬영이라면 레코드는 음성의 촬영이다. 촬영을 마친 영화배우나 취입을 마친 취입자의 궁금증은 피차가 일반이니 시사나 시험반(試驗盤)을 대하기까지에 일력장(日曆帳)이 곤죽이 되어버리는 것도 똑같은 일이다. 3회 발매품은 무엇인지 어떻게 되었을까. 잘 되었으면 좋고, 못 되었으면 낙망! 낙망! 단성사 해설부 견습이던 편순만 군. 조극 무대로 오겠다는 것을 단성사 해설 주임 김덕경 씨의 승낙을 맡아오라 했더니 저녁에 씨(氏)의 쾌락을 맡아왔음으로 즉시 출연을 허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