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황혼
- 감독
- 마르셀 까르네
- 제작년도
- 1954
- 출연
- 장 가뱅, 아레티, 롤랜드 레사프레, 마리 다엠스, 아브 닌치
< 역마차 >와 직접 관련 없는 객담 하나. 미국에서 <역마차>가 개봉된 해인 1939년 초의 어느 날, 대서양 건너 프랑스 남부도시 마르세유의 알카자르 극장에선 비쩍 마른 꺽다리 청년 하나가 무대에 올랐다. 뜬금없이 노란색 머플러에 하얀 카우보이모자를 쓴 이 청년은 뻣뻣하게 서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머나먼 서부 평원에 어둠이 찾아오면... 야영지 옆에서 카우보이들은 잠이 들었네...” 처음엔 시큰둥해하던 청중들은 노래가 끝나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큰 무대가 처음인 이 18세 신인 기수는 그칠 줄 모르는 앙코르 연호에 얼이 빠진 채 무대로 되돌아가 ‘머나먼 서부 평원에서’를 한 번 더 불러야 했다. 모리스 슈발리에가 대표하는 프랑스식의 유쾌한 환상파적인 노래가 유행하던 시절에 난데없이 카우보이 노래를 불러 프랑스인들을 열광케 한 이 청년은 후에 프랑스 문화계의 큰 별이 된 이브 몽땅(1921~1991)이다. 이탈리아 출신 골수 공산당원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며 “15, 6세 무렵에 나는 이미 공산주의자였다”고 말하는 이브 몽땅은 동시에 열렬한 미국영화 찬미자이기도 했다. 게리 쿠퍼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이 할리우드 키드는 “서부 영화를 보고 나올 때는 카우보이처럼 걸으면서 권총을 찬 사내와 같은 자세를 취했다”고 회고한다. ‘머나먼 서부 평원에서’라는 노래는 카우보이라고는 평생 본 적이 없는 한 맹인 작곡가에게 이브 몽땅이 자기가 본 서부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며 만들어달라고 부탁해 탄생한 곡이다.(이 일화는 그의 자서전 「세기의 연인 이브 몽땅의 고백」(임자영 역, 꿈엔들)에 실려 있다.) 이브 몽땅보다 40여 년 늦게 아시아의 한 귀퉁이에서 태어난 내게도 서부극에 연관된 사소한 기억이 몇 가지 있다. 초등학교 시절 문방구에서 팔던 보안관 배지와 장난감 권총, 그리고 권총 주머니가 달린 혁대는 우리 대부분이 갖고 싶어 하던 사치품이었다. 검지에 권총을 걸고 두 바퀴 돌리면서 바로 권총 주머니에 집어넣는, 상당히 어려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우리는 며칠씩 연습을 했다. TV에선 ‘주말의 명화’ 시간에 수시로 서부극이 방영되었고, 내가 태어나기 전에 시작된 서부극 ‘미드’ < 보난자 >는 이미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며, 언제까지라도 계속될 것만 같았다. 지도 가운데가 불타오르면서 그 사이로 네 명의 서부 사나이가 말을 타고 등장하는 이 드라마의 오프닝은 유년기의 내 뇌리에 가장 깊이 새겨진 이미지 가운데 하나다.(우리가 흑백으로 본 이 시리즈 서부극은 미국 TV 최초로 컬러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1959년부터 1973년까지 15년간 430회차 상영되었다. 이 시리즈의 감독에는 로버트 알트만과 자크 투르뇌르도 포함돼 있다.) 미국 영화학자들이 건국 초기 미국의 서부개척이라는 역사적 경험의 모태에서 태어난 가장 미국적인 장르로 이해하는 서부극이 대서양 혹은 태평양 너머 그것도 서로 완전히 다른 시대와 환경에서 살던 이들을 어떻게 사로잡게 되었을까. 그것도 그냥 인기가 있었던 정도가 아니라 “내 무의식 속에는 서부극이 있다. 아니 서부극 속에 내 무의식이 있다”(아오야마 신지)라고까지 말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정답을 알고 있지 않다. 물론 서부극이 지닌 몇 가지 보편적 호소력을 나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총과 황야로 환유되는 사라진 야성 혹은 고독하고 유능하고 강인한 마초에의 노스탤지어, 대단원의 결투라는 서사적 기술, 서부라는 공간의 시각적 스펙터클 등등.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오늘의 액션영화들에 더욱 강렬하고 다채롭고 세련되게 구현되어 있지 않은가. 서부극에는 쉽게 의미화할 수 없으나 우리 무의식의 지층에까지 스며드는 무언가 주술적인 혹은 마신(魔神)적인 요소가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서부극 전체를 가로지르는 포괄적인 정답을 찾는 대신, 전 회의 마지막 대목에서 말한 모뉴먼트 밸리의 문제로 돌아오고 싶다. < 역마차 > 이후 < 황야의 결투 >와 < 수색자 >를 포함한 9편의 존 포드 영화에 등장하는 모뉴먼트 밸리는 오슨 웰즈의 말대로 다른 감독의 영화에 나오면 표절처럼 보일 만큼 존 포드의 영화 세상에만 존재하는 지명이자 가상의 장소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모뉴먼트 밸리는 서부극의 주술적 매혹이 집약된 장소라는, 논증할 수 없으나 확신에 가까운 인상을 버릴 수 없다. 모뉴먼트 밸리는 애리조나 주 북쪽과 유타 주의 남쪽 접경지대에 위치한 고원의 황무지다. 이곳은 1950년대까지도 제대로 된 교통로가 없어, 일반인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고 한다. < 역마차 > 제작이 준비되고 있을 무렵, 존 포드가 대작 서부극을 찍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 지역 상인의 추천으로 모뉴먼트 밸리를 처음 알게 된 포드는 그때부터 이곳을 자신의 서부극의 고향으로 삼는다. 여느 감독과 마찬가지로 제작자의 간섭을 지긋지긋해하던 존 포드는 제작사 간부들이 찾아올 엄두를 내기 힘든 이 고원의 오지를 사랑했고, 이곳에서의 야영과 집단생활, 그리고 매일 밤의 주연을 즐겼다. 모뉴먼트 밸리는 목초지가 드문 황야와 그 지명을 유래케 한 첨탑 형태의 암석봉 및 갖가지 모양의 바위산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바호족의 성지로 불리는 이곳은 미국 개척민들의 공동체가 들어선 적이 없었고 그럴 수도 없었던 황무지다. 존 포드의 서부극에서 모뉴먼트 밸리는 실제 지리와 무관한 장소라는 뜻이다. 실제로 < 역마차 >와 < 황야의 결투 >의 서사가 전개되는 극 중 무대는 멕시코 국경과 인접한 애리조나 남부이며, < 수색자 >에선 텍사스 평원이다. 물론 미국의 지리에 대해 알지 못하는 우리에게 그 차이는 잘 인지되지 않는다. 모뉴먼트 밸리라는 장소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던 당대의 미국 관객들에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존 포드의 서부극들이 극 중 지명과 무관하게 항상 같은 장소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그곳이 같은 장소임을 알려주는 것은 황야가 아니라 기괴한 형상의 암석봉들이다. 그곳이 모뉴먼트 밸리임을 알게 해주는 이미지도, 존 포드의 서부극을 상징하는 표상도 그 암석봉들이다. 이제부터 모뉴먼트 밸리라는 단어는 주로 이 암석봉들을 지칭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모뉴먼트 밸리를 선회한다. 아니, 이 표현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존 포드의 서부극은 모뉴먼트 밸리에 사로잡혀 있다. 역마차가 끝없이 달려도(< 역마차 >), 툼스톤이라는 고유 지명이 등장해도(< 황야의 결투 >), 농사짓는 개척민이 정착해 있어도(< 수색자 >) 그곳은 여전히 흙바람이 휘날리며 지평선 위로 솟아오른 바위산들이 굽어보는 모뉴먼트 밸리다. 우리는 이 사실을 한 편의 영화를 보고 즉각적으로 인지할 수는 없다. 영화를 보는 우리의 시선은 인물과 사건에 습관적으로 몰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러 편의 존 포드의 서부극을 연속적으로 본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모뉴먼트 밸리의 기괴한 형상이 우리가 매우 이상한 곳에 도착해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 곳은 실제 서부이지만, 오직 존 포드의 서부극에만 존재하는 거대한 오픈세트와도 같은 장소로 점점 깊이 각인되어 가는 것이다. 그런데 선회 혹은 사로잡힘의 과정은 한 편의 영화 안에서도 은밀하게 일어난다. 모뉴먼트 밸리가 처음 등장한 < 역마차 >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1 #2 #3 #4 #5 오프닝 장면에서 황야를 향해 달려가는 역마차의 단독 쇼트(#1), 역마차와 그 뒤를 따르는 기병대 쇼트(#2), 그리고 기병대 단독 쇼트(#3)와 아파치 단독 쇼트(#4)가 이어진다. 감독의 이름이 떠오르는 오프닝의 마지막은 다시 역마차의 단독 쇼트(#5)이다. 쇼트들의 의미만 따지면 위태로운 역마차, 기병대의 일시적 보호, 아파치의 위협 등 이 영화의 주요 모티브를 간결하게 요약한 효과적인 오프닝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모두 제각각인 역마차, 기병대, 아파치의 동선을 머리 속에 일관되게 정리할 수 없다. 그들이 어디에서 어디로 움직이는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물론 서사가 진행되기 전이고 관객은 이 곳의 지형을 전혀 알지 못하므로 이것이 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존 포드는 5가지 동선 중에서 #3과 #4만 일치시켜 놓았다. 동선뿐 아니라 카메라 앵글까지 유사하다. 두 쇼트에서 각각 기병대와 아파치는 같은 곳에서 출발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들 뒤로, 이 영화에서 그리고 이후 존 포드 영화에서 줄기차게 나타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이 최초로 등장한다. 두 쇼트는 점프컷으로 연결되어 있고, 기병대 주제음악과 아파치 주제음악 역시 점프컷으로 이어져 있어, 이 대목은 우리가 충분히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우리의 시각에 은밀한 잔상을 남긴다. #3과 #4는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을 최초로 각인시킨 쇼트라는 점에서 충분히 흥미롭지만 그것의 의미를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특이한 형상의 바위산이 포진한 영화사상 가장 특별한 장소 가운데 하나에 이제 막 도착한 것이다. 이 장소가 특별하다는 것은 이후 서사의 전개과정에서 드러난다. 승객 7명을 태우고 마차 운전자와 보안관이 이끄는 역마차는 이제 톤토를 출발해 드라이포크, 아파치웰스, 리스페리를 거쳐 최종 목적지 로즈버그로 갈 것이다. #6 #7 #8 #9 #10 #6~#10은 톤토를 출발한 역마차가 기병대의 호위를 받으며 다음 정차지 드라이포크에 이르는 여정의 쇼트들이다. 마차의 동선은 대각선, 좌우를 일정하지 않게 오간다. 그런데 여기엔 명백히 동선의 오류가 있다. #9와 #10은 승객 간의 사소한 언쟁 앞뒤에 붙여져 있는 연속적 움직임 안의 인서트 숏들이다. 그런데 마차의 방향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 #9에서는 마차가 두 암석봉으로부터 멀어져가고 있지만 #10에선 전 쇼트에서보다 오히려 가까워진 상태로 그 곁을 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류를 알아차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두 암석봉의 유난히 기괴한 형상이다. #10에서 분명히 드러나지만 두 암석봉은 같은 바위산의 좌우를 바꿔놓은 듯 흡사한 모양이다. 마치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두 바위산은 한번 쉬이 잊힐 수 없는, 모뉴먼트 밸리를 상징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편의상 앞으로 왼쪽 암석봉을 모뉴먼트1, 오른쪽 암석봉을 모뉴먼트2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대목에서의 오류를 제작의 편의에 치중하다 발생한 일종의 실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오류가 마치 자신을 전시하듯이 후반부에 다시 등장한다. 모뉴먼트1, 2의 강렬한 형상 덕으로 우리는 그 오류를 이제 조금은 더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11 #12 역마차는 드라이포크와 아파치웰즈, 리스페리를 거쳤고, 이제 곧 로즈버그에 당도할 예정이다. 그 순간 제로니모와 아파치 무리가 마침내 등장한다(#11). 그런데 아파치 무리 뒤로 #9와 #10에서 우리가 보았던 모뉴먼트1이 다시 나타난다. 아파치의 시선을 받는 #12의 역마차의 작은 형상 뒤로는 멀리 모뉴먼트2가 보인다. 이야기상으로는 그 사이 며칠의 시간이 흘렀고 거센 물살의 강을 건너기도 했건만, 역마차는 여전히 두 기괴한 암석봉 사이를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이 명백한 오류 역시 실수라고 봐야 할까? 잠정적 결론을 말하기 전에 < 역마차 >의 마지막 쇼트를 보고 넘어가자. #13 아파치의 습격을 벗어나고 로즈버그에서 악당 플러머 형제를 해치운 무법자 링고 키드와 매춘부 댈러스가 국경 너머를 향해 달린다. 문명의 축복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향하는 지평선 너머에 희미한 형상이 하나 보인다. 그 형상은 어쩐지 모뉴먼트1과 2를 닮아 있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다만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의 뇌리에 은밀히 새겨진 모뉴먼트 밸리의 강렬한 형상들의 잔상이 그 연상을 피할 수 없게 만든다. 과연 그들은 어디로 향하는 걸까. 나는 이 오류들이 실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 시절 이미 43편의 무성 서부극을 만든 존 포드는 앵글을 조금만 바꾸면 특정 지역을 연상시키지 않는 평야와 지평선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 그중에서도 가장 기괴한 모뉴먼트1과 2를 과시하듯 반복적으로 등장시킨다. 이것은 기획된 오류다. 사건과 무대는 선형적으로 배열되는데도, 장소와 동선은 일종의 원환 운동을 반복하는 이상한 구조의 < 역마차 >는 고전적인 서사 영화의 외양 안에 모뉴먼트 밸리의 형상만큼 기괴한 실험극의 성격을 감추고 있다. 앞서 존 포드의 서부극들이 모뉴먼트 밸리를 선회하거나 그것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했지만, 포드의 선택은 서사의 개연성을 무시한 로케이션 설정에 그치지 않는다. < 역마차 >에서 그 선회 혹은 사로잡힘은 서사의 운동을 이중화함으로써, 서사의 논리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 간다. 나는 여기서 존 포드가 랜드스케이프의 표현주의라고 부를만한 특별한 형식을 창안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존 포드 서부극의 위대성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간단한 반문 하나를 떠올릴 수 있다.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건가. 그건 존 포드 개인의 취향에 불과한 건 아닌가. 서사의 논리를 위험하게 만들면서까지 반복적으로 돌아올 만한 가치가 모뉴먼트 밸리에 있는가. 그것이 하나의 장소에 그치지 않는다면 < 역마차 >라는 영화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모뉴먼트 밸리의 영화적 작용을 한마디로 설명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모뉴먼트 밸리가 우리의 시선을 붙드는 것은 무엇보다 그것의 낯설고 기괴한 형상 때문이다. 아름다운 자연의 형상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화산처럼 노골적인 위협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낯선 행성의 암괴, 대재난 이후의 잔존물, 악의적인 신이 빚은 불길한 조각, 잘려진 거대 신체의 일부... 일련의 두려운 연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끝없이 시선을 유혹하는 괴이한 존재. 존 포드의 인물들은 모뉴먼트 밸리에 가까이 다가서기는커녕 잘 쳐다보지도 않는다(물론 < 웨건 마스터 > 같은 예외도 있다. 또한 인디언들은 #11에서처럼 종종 그것에 바짝 다가서 있다.) 그들은 대개 그곳으로부터 멀어지거나 지나쳐간다. 그럼에도 그 주변으로 반복해 불려 온다. 여기서 회화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미술에는 문외한에 가깝지만 이 그림을 접했을 때 곧바로 모뉴먼트 밸리를 떠올렸다. Arnold Bocklin ‘Wyspa umarłych’ ‘죽음의 섬’이라는 제목이 붙은 이 그림은 스위스 출신 화가 아놀트 뵈클린(1827~1901)이 1880년 남편을 추모하려는 한 피렌체 미망인의 의뢰로 그렸다고 한다. 이 그림을 보고 받은 즉각적인 느낌은 내가 그림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이 나를 보고 있는 듯한 두려움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바다 위에 솟은 괴이한 형상의 섬 그리고 그것에 빨려 들어가는 듯한 조각배가, 황야를 뚫고 일어선 모뉴먼트 밸리의 암석봉과 그 주위를 선회하는 서부의 인물들을 연상시켰다. 그림 속의 섬도 < 역마차 >의 모뉴먼트 밸리도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장악되지 않는 거대한 수수께끼와 같은 존재다. 그림 속의 섬이 죽음의 표상이라면, 모뉴먼트 밸리는 무엇일까. 둘의 유사성을 지나치게 강조할 생각은 없다. 이 그림이 내 시선을 이끈 것은 그것의 형상이지만, 영화의 풍경이 우리 감각에 작용하는 것은 형상뿐만 아니라 서사의 배열과 시간적 지속에도 관계되기 때문이다. 물론 “누군가 다른 사람이나 다른 것의 시선으로, 누군가를 불안이나 공포에 빠트리는 시선”으로서의 ‘응시’(다리언 리더, 「모나리자 훔치기」) 개념을 끌어들여, 히치콕의 < 사이코 >에 나오는 언덕 위의 검은 집과 같은 것으로서 모뉴먼트 밸리를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히치콕의 검은 집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은 절도를 저지른 인물의 죄의식이라는 사건의 효과와 식별되지 않으며, 검은 집은 곧 사건에 연루된다. 하지만 모뉴먼트 밸리는 사건에 연루되지 않는다. 모뉴먼트 밸리가 우리를 은밀하게 불안에 빠트린다면 그것의 형상 때문만이 아니라, 앞서 말한 서사의 논리를 붕괴 직전까지 이르게 하는 사건과 움직임의 분리를 이 서사 외적 사물이 주재하고 있다고 감지되기 때문이다. 다른 지면에서 썼던 구절을 옮기자면 모뉴먼트 밸리가 ‘서부 공동체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서사, 그 오이디푸스적 궤적을 상대화하고 결국 사소화하는 비지(非知)와 무시간성의 심연’으로 감지되기 때문이다. 이 감지는 사건을 쫓는 것이 아니라 모뉴먼트 밸리라는 대상을 ‘보는 것’으로써, 그리고 그 보는 것에 의해 우리가 동요함으로써만 이뤄진다. 끝내 사건과 연루되지 않는 모뉴먼트 밸리가 영화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질문에, 직접 답할 방법은 없다. 마신(魔神)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 존재는 말해질 수 없는 영역에서 보이는 것으로 작동하며 사건의 서사를 동요하게 하고 분열하게 하며 사소화거나 무화한다. 따라서 좀 더 까다로운 반문은 이것이다. 영화를 볼 때 그러니까 영화의 이미지가 지금 우리 눈앞에서 흐르고 있을 때 우리는 사건과 풍경을 함께 볼 수 있는가. 혹시 스틸들을 통한 앞선 분석은 실제적인 영화관람 체험과는 무관한, 디지털 기술에 기대 사후적으로만 포착 가능한 사실들을 놓고 분석가들이 호들갑을 떨고 있는 건 아닌가. 역시 답이 쉽지 않은 이 반문에 대한 고민은 다음 회로 미뤄야 할 것 같다.(계속)
영화가 시작되면 파리의 아름다운 전경들이 펼쳐진다. 공중과 첨탑 등에서 부감으로 촬영된 멋진 풍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파리. 그리고 울려나오는 이브 몽땅의 고혹적인 목소리. “확인하고 싶었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가?”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 < 아름다운 5월 >은 이렇게 시작된다. 1962년 5월. 그는 촬영 감독 피에르 롬과 함께 영화 카메라에 포착할 수 있는 5월의 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파리의 풍경들을 포착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부르주아들, 상인들, 알제리 이민자들, 아이들, 여성들, 노동조합원들.. “당신은 언제 행복하신가요?” “62년 5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알제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파리 사람들은 이 낯선 질문자의 카메라 앞으로 모여들고, 의외로 자신들의 욕망과 생각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한다. 여기까지라면 이 영화는 시네마 베리테의 출발점이라고 이야기되는 장 루슈와 에드가 모랭의 < 어느 여름의 연대기 >(1961)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크리스 마르케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1962년 5월 파리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흔적과 단순한 답들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필름 에세이스트’라고 불렀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답변의 내용이 아니라 그 질문과 대답의 간극 속에서 사유되는, 62년 5월 파리에 관한 한 좌파적 지식인의 근심과 불안에 관한 것이다. 크리스 마르케의 관념 속에서 62년 5월의 파리는 격전지였다. 61년 10월 파리에서 자행된 알제리인 대량 학살(이때 희생당한 알제리인 200여명은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채 세느강에 던져졌다)에 대한 지식인의 죄의식과 트라우마, 제국 프랑스의 전승비 앞에 아직도 사열하는 군국주의자들의 행진들, 수탈당하는 이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의 양태들, 돈을 숭상하며 주식거래장 앞으로 모여드는 군중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파리 사람들에게 5월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이상기온을 꼽았고, 알제리에 대해서는 국수주의적 적대를 보였으며, 여성들은 정치를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다. 행복의 조건으로 돈을 꼽았고, 직면한 문제로는 연애과 결혼, 휴가에 관한 것을 언급했다. 크리스 마르케는 제국 프랑스, 근대적 자본주의 프랑스의 지배와 정치가 어떻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욕망 속에 관철되어지는가를 들여다본다. 미시적 일상에 갇힌 사람들. 지배 논리와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군중들. 그러나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영화 < 아름다운 5월 >은 이른바 몽타주의 미학과 방법을 채택한다. 영화의 첫 장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추상적 관념 속에 있는 파리는 에펠탑과 아름다운 관광지, 전승지, 문학과 예술의 집결지였다. 마르케의 사유는 그 신화적 이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가?” 이 질문과 함께 아름다운 에펠탑과 도시 풍경의 이미지는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신경증적인 대화 목소리들, 교통 소음들처럼 불안하고 음울한 사운드들과 충돌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파리의 곳곳을 포착하던 카메라는 이윽고 파리의 감옥으로 향한다. 높은 담장과 팔각형의 건물은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고,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키워나간다. 에펠탑과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대한 부감숏으로 시작됐던 이 영화의 후반부는 이제 감옥을 거쳐 파리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맑스의 변증법적 사유가 그러했듯 마르케의 카메라는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낮게 장착되어 파리의 거리들을 질주한다. 그리고 불현 듯 제시되는 파리 사람들의 얼굴들. 무언가 잔뜩 화가 난 얼굴들,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 이어지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내레이션. “슬픔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부자가 있을 수 없다. 감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 2012년, 7월 29일. 아흔 한 살의 크리스 마르케가 세상을 떠났다.(그는 1921년 7월 29일 생이다) 스스로 엄격한 좌파 사회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그는 1952년부터 총 52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그 중에는 유일한 극영화 < 환송대 >도 포함된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쿠바, 칠레의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기록들을 지원했으며(그 중에는 < 칠레전투 >의 파트리시오 구즈만도 포함된다. 실제로 <칠레전투>는 크리스 마르케가 보내준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편집작업을 도와준 쿠바의 이카익도 크리스 마르케가 연결해준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영상매체에 대한 놀라운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뉴미디어 아트도 선보였다. 다큐멘터리 영화사에 엄청난 획을 그었고 동료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 은둔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사진도 거의 없다. < 아름다운 5월 >은 그의 이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이미지와 사유, 현실과 기억,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이전의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혁신과 방법론을 선보인 작품이었다. 지금 이 작품이 더욱 놀라운 것은, 1962년 5월 무작위의 파리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과 사유는 2012년을 마감하는 대한민국에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거대한 정치적 권력과 게임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의식과 욕망이 포획되고 관리될 수 있는지, 이때 이 절망적 풍경 속에서 카메라를 든 자, 영화 감독, 아니면 크리스 마르케가 스스로 피력했듯 영화 에세이스트는 이제는 무엇을 사유하고, 무엇을 증언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망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그 이면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역사를 다시 쓰듯 기억을 다시 써야한다.” 크리스 마르케의 방법론이었다.
1961년 5월 당시 [국제영화]는 손미희자 , 전계현 , 남미리 , 문혜란 , 엄앵란 , 나애심 , 이빈화 등의 당대의 여배우들의 그래머 채점표에서 이빈화를 단연 선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의상을 새로 맞출 때는 언제나 같은 상점을 이용하는지,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기는지, 누구를 사귀기 좋아하는지, 입었던 옷을 새 옷이나 유행하는 의상으로 바꾸어 입었을 때 기분이 어떤지, 향수나 의상의 색깔 등에 대한 질문으로 채워지고 있는 이 설문지는 당시 이 여배우들이 얼마나 성실하게 답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50년대를 지나 60년대에 접어들던 당시 한국 사회에서 여배우를 바라보던 하나의 시선을 상기시킨다.BB(브리짓드 바르도), MM(마릴린 먼로), CC(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 등의 이름을 붙이던 시대에 매력적인 여배우로서 미에 대한 관심도를 테스트해보는 이 설문지는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조건을 고려하여 자기자신을 잘 적응시키는 것과 함께 자기를 감추거나 죽이지 않는 자신감과 자주성을 잃지 않는 사교성의 요구와 풍부한 감정의 소유자인가를 강조함으로써 이전까지의 전통적 여성상과는 분명히 선을 긋는 새로운 여성상의 도래를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에도 당신처럼 키 큰 여자들이 많은가요?' 1961년 일본에서 그곳에 촬영온 이브 몽땅이 던진 질문에 한국에서는 키가 커서 언제나 곤란을 느낀다고 털어놓을 만큼 이빈화는 당시 한국 여배우치고는 상대적으로 큰 키에다, 신체 사이즈를 자신 있게 밝힐만큼 균형잡힌 체형을 갖추고 있어, 때로는 지나 롤로브리지다에, 때로는 소피아 로렌에 비유되기도 했다. ''B.B. 붐의 시대'', 즉 신체사이즈로 배우를 설명하는 ''육체의 시대''에 이제 모두들 여배우의 몸에 주목하면서 신체 사이즈에 따라 그들을 분류했다. 수영복을 입은 여배우들이 등장하는 해수욕장 장면이 자주 나와 관객의 눈길을 끈 것도 이 즈음부터였다. 1934년 서울 돈암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이숙한(李淑翰)으로 알려져 있는(국제영화 58년 4월) 이빈화 는 여학교 시절부터 무용과 음악에 타고난 재능을 보였으며 국악원 고전무용연구소에 적을 두기로 한다. 이 곳에서 받은 3년간의 수련은 그녀에게 우아하고 세련된 멋스러움을 갖추게 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에 출연할 수 있는 기회까지도 선사했다. 1952년 부산 피난 시절, 이빈화는 윤봉춘 감독의 징병을 설득하는 < 성불사 >에서 승무를 추는 여주인공 역을 맡으면서 스크린에 데뷔한다. 그녀가 우아하게 춤을 추는 모습은 ''갑분이는 팔자 좋아''하는 노래에 맞춰 동네 처녀들과 춤을 추는 오영진 원작의 < 맹진사댁 경사 >( 이용민 감독,1962)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보다 가문과 체면을 중시하는 얼치기 양반들을 풍자한 이 영화에서 그녀는 ''버리자니 대감댁이요, 주자니 무남독녀''라서 혼인날 자기 대신 입분이를 절뚝발이로 소문난 판사댁 자제에게 보내고 나중에 진실을 알고 발을 동동 구르는 갑분이역을 맡았다. 따라서 당시 잡지의 글들은 동양무용 서양무용에 조예가 깊은 이빈화와, < 양산도 >로 데뷔한 김삼화 를 호적수로서 ''다같이 무용계에서 진출한 스타일 좋은 내일의 스타요, 앞길이 양양한 젊은이''로서 소개한다. ''1950년도 한국영화계에서 얻은 가장 보람된 일 중의 하나가 신인 이빈화 양의 등장''이라고 소개되던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일련의 영화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1956년작 < 청춘쌍곡선 >에서 요염한 자태와 실감나는 연기로 영화와 다시 인연을 맺은 이빈화는 과식으로 병이 난 부자 양훈 과 가난한 학교교원으로 그와 정반대의 병으로 괴로움에 처해있는 황해 가 한 의사의 권고를 듣고 2주일간 서로 집을 바꾸게 되는 이 희극에서 양훈의 여동생으로 출연하여 황해와 짝을 이룬다. 이 영화에서 성적으로 자유롭고 분방한 부자의 딸을 연기하여 호평을 받은 그녀는 뒤이어 한 감독의 작품 < 마인 >(1957)에서도 무리 없이 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빈화의 출세작은 박계주 의 베스트셀러를 영화화한, 전편에 박애주의와 낭만주의 그리고 이국적인 풍광이 특징적이던 < 순애보 >(1957)이다. 스타메이커로도 유명한 한형모 감독은 이 영화에서 아직 조연급에 지나지 않던 이빈화를 여주인공역에 기용함으로써, 스타로서 그녀의 입지를 굳힌다. 현대적인 감각과 균형잡힌 체구를 가진 이빈화에게 ''멜로드라마 시대''가 눈독을 들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근대적 가족을 상상하는 형식으로서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에게 맡겨지는 역할이란 전통보다는 현대를, 수동적이기 보다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성격을, 사랑을 기다리기 보다는 쟁취하는 역할이 맡겨지곤 했다. < 순애보 >에서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며 사랑에 적극적이다가 결국 살해당하고마는 에어걸(당시는 스튜어디스를 이렇게 불렀나 보다.) 인순(김의향)과 달리 이제는 눈이 멀고 누명까지 쓴 화가 애인을 기다리는 제목 그대로 순애보(殉愛普)적 사랑을 보여주는 명희역의 이빈화 는 오히려 예외적인 셈이다. 따라서 기다림과 통절의 미학을 보여주는 멜로드라마에서 그녀의 자리는 조연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 원작의 < 흙 >(1960)에서 기생 백선희역으로 등장하여 현대적인 역할을 기대했던 관객들을 다소 실망시켰던 이빈화는 이후 비비안 리가 나온 < 애수 >를 연상시키는 전쟁을 배경으로 한 멜로드라마인 <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 >(1959)를 비롯하여, < 사랑의 역사 >(1960)에서는 과부인 은선( 최은희 )의 다방업을 하는 친구로, 연속방송극을 각색한 < 다시는 놓지 않으련다 >에서는 종합병원의 여의사로 등장하였다. 충청도 조그만 산골의 산지기 딸( 이경희 )과 그 산주의 아들( 박노식 ) 사이의 애정을 다룬 < 꽃피는 시절 >(1959)에서 집안에서 정해준 약혼녀역을 맡은 이빈화 는 이미 짐작할 수 있듯이 불리한 위치에 놓여있다. 그녀는 이 삼각관계에서 계층적으로 자기 보다 못하지만 자신의 남자를 사로잡고 있는 연적 이경희를 괴롭히고 못살게 구는가 하면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하면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아담하다기 보다는 큰 키에 현대적이고 세련된 그래머의 몸매를 가진 그녀에게 부여되는 역할이란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수동적인 이경희의 전통적인 여성상과 대조되는 적극적이고 사랑을 쟁취하는 역할이 적역이었을 것이다. 여교사인 문현주( 조미령 )의 말썽꾸러기 학생중 한 사람인 상호( 안성기 )의 누나로 나오는 < 어느 여교사의 수기 > 역시 이빈화는 부모 없이 자라는 상호의 빠걸인 누나로서 정부가 오는 밤이면 번번이 동생 상호를 쫒아내고 다음날 동생이 책보를 찾으러 왔을 때도 내려진 커튼 틈으로 책보와 아침밥값을 내주고 창문을 닫아버리는 연기를 매정하게 해내었다. 상호 주변의 차가운 환경을 보여주기 위한 이빈화의 이 계산된 연기는 분명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균형이 잡히고 요염한 육체미에 예리한 혹은 앙칼진 내면적인 정신의 자세가 포함되어 있었던 이빈화 만큼 근대적인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떠맡은 영화의 고유한 기능안에서 마음껏 헤엄칠 수 있는 배우도 드물었을 것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자신의 멋을 알고 또 그 멋을 세련되게 보여줄 수 있는 배우였기 때문이다. 화려한 생활과 서울-동경-홍콩 등지의 국제적인 무대를 통해서 그녀의 자태를 빛냈으며 선천적인 재질, 용모가 장기간의 연기생활을 통해서 비교적 꾸준히 인정을 받는 행운도 누렸다. < 언제까지나 그대만을 >(1959)이라는 일련의 홍콩 스타일 합작영화에서는 ''홍콩 마카오를 무대로 이국적 향취를 풍기면서 삼각 러브스토리를 전개하면서 적당히 액션 맛도 가미하여 대중 취향의 쇼우''로 만들어 놓았고 친구 사이인 박노식 과 독고성 이 각각 암흑가와 경찰을 대표하여 등장한 < 현금은 내 것이다 >에서는 박노식을 사랑하여 그를 구하는 거칠지만 순정파인 바의 마담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69년까지 연기활동을 한 이빈화 연기의 만개(滿開)는 < 안개 >(1967)인 듯 하다. 비록 화면에 등장하는 시간은 길지 않지만 그 역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60년대 한국 모더니즘영화로서 <안개>는 기준( 신성일 )의 시각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의 고향인 무진으로의 공간의 이동이자 과거로의 시간여행이다. 무진으로의 여행은 떠나고싶지만 떠날 수 없는 서울에 대한 기준의 자기 합리화에 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영화에서 기준의 서울 생활은 아내로 표상되며 그것은 그의 권태롭지만 풍요로운 현재와 미래를 받치고 있는 물질적 기반이다. 이빈화는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아내이며 기준에게 무진으로 내려가거나 올라오라고 지시하는 인물이자 기준을 통제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영화를 연출한 김수용 감독은 ''세련되고 돈이 많아 보이고 연상으로 위엄이 있어보여야 하는'' 기준의 아내역으로 이빈화를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감상에 빠지는 것이 내 휴식의 비법''(국제영화 63년 4/5월)이라고 밝혔던 이빈화 . 괄괄하지만 품위 있으며 세련된 팔방미인인 이빈화의 화려함은 어쩌면 언젠가 그녀가 수필에 쓴 것 처럼 너무도 소박한 꿈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꼭 따뜻한 인정속에서 살고싶다. 야박스런 감정에서 자신을 괴롭히고싶지는 않다. 이것이 아마 스크린에서 사라질 때까지의 생활신조인지 모른다. ' 후리후리한 키에 스마트한 양장을 하고 유행을 몰고와서는 어느 날 은막에서 사라져간 이빈화에 대한 대중들의 끊임없는 관심은 당시의 그녀가 얼마나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보여주는 명백한 증거일 것이다. 남성들은 물론 동성인 여성들에게까지 질투와 선망을 느끼게 했던 이빈화를 관객들은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다. 변재란 (순천향대교수)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이숙한 출 생 : 1934년 2월 3일 서울 데 뷔 : 1952년 윤봉춘 감독 < 성불사 > 주요 작품 : < 성불사 >, < 청춘 쌍곡선 >, < 순애보 >, < 마인 >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