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싸우는 사람들
- 감독
- 양철
- 제작년도
- 1930
- 출연
- 나웅, 서월영, 김연실, 박제행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첫 번째 단계는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평을 쓰는 것이며, 세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라는, 프랑스 누벨바그 시네마의 거장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이 유명한 말은 한국의 수많은 시네필에게 영화 사랑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주1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반드시 영화 창작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영화 창작 욕구가 없다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의 영화 사랑 정도가 트뤼포가 말한 저 세 단계 중 어느 경지에 있는지 재본 적이 있지 않을까? 게 중에는 실제로 영화 창작의 꿈을 펼치는 이가 있을 것이고, 영화에 관한 글 혹은 영상을 쓰거나 만드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저 영화 보는 즐거움을 온전히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 사랑의 정도를 단계로 매겨 고수와 하수로 평가할 일은 사실, 아니다. 영화를 사랑하는 각자의 방식이 있을 뿐, 정해진 단계란 있을 수 없다. 트뤼포가 말한 세 단계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으며 영화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이도 있다. 이 글에서 소개할 ‘사진첩’의 소장자, 고(故) 홍영철(1946~2016)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여느 영화팬과 마찬가지로 영화 보는 걸 즐기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영화에 관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이윽고 자신이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며 영화사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20대 초반, 영화를 즐겨 보면서 입장권을 버리지 않고 모았다. 포스터와 신문광고 같은 것을 함께 모으다 보니 재미가 있더라. 그러다가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71년이다. 영화에 빠지면서 그에 대한 정보를 접하려 했지만 어려웠다. 변변한 자료집 하나 없었으니.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것을 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시작했다. - “ 한국 영화사 연구가 홍영철에게 ‘영화도시 부산’의 길을 묻다 ”, 《부산시보 부산이라 좋다》, 2014. 8. 25. 1946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 때 피난으로 부산에 정착했다. 젊은 시절, 영화를 즐겨 보며 입장권을 모으던 데서 시작해, 영화 포스터와 스틸, 전단 등 영화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직접 카메라를 들고 부산의 여러 영화관을 돌아다니며 극장 간판 사진을 찍었고, 영화관에 대한 자료를 모았다. 1971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했다고 하니, 2016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꼭 45년 동안 수집한 자료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할 것이다. 당연히 그는 자료를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수집한 자료들을 정리해 『한국영화도서자료편람 1925~1990』(한국영상자료원, 1991)과 『부산영화 100년』(한국영화자료연구원, 2001), 『부산근대영화사: 영화상영자료 1915~1944』(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편, 산지니, 2009), 『부산극장사』(부산영상위원회·한국영화자료연구원 엮음, 부산포, 2014) 등의 책을 편찬했다. 그리고 2017년, 홍영철 선생의 유족은 그가 반평생을 넘게 수집한 자료들을 부산시에 기증했다. 자료의 원본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에서 보존·관리하기 시작했는데, 2019년에 한국영상자료원은 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과 업무협약을 맺고 일부 자료를 디지털 복사본의 형태로 기증받았다. 한국영상자료원이 이번에 공개한 “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은 바로 이들 자료 중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을 정리해 해제를 덧붙인 것이다. 이 컬렉션에는 1923년 하야카와 고슈(早川孤舟)가 연출한 < 춘향전 >부터 1944년 방한준 감독의 < 거경전 >까지,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제작된 극영화 70여 편의 스틸 132점이 디지털 파일의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에는 언뜻 영화 스틸 같아 보이지만 영화 스틸이 아닌 것도 섞여 있다. 사진 속에는 그 유명한 영화 < 아리랑 >(1926)의 감독이자 배우로도 인기 많았던 나운규 가 등장하고, 그와 함께 <아리랑>에서 열연을 펼친 배우 남궁운 과 주인규 가 출연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사진들은 심훈 이 1926년 11월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영화소설 「탈춤」의 스틸이다. 극의 한 장면을 실사(實寫)로 촬영한 스틸인데 영화가 아닌 소설의 스틸이니, 그렇다면 ‘소설 스틸’이라고 하는 게 좀 더 정확할까? 그런데 잠깐만! ‘소설 스틸’이 무슨 말이냐고? 문자를 존재의 수단으로 삼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시각 요소가 핵심인 ‘스틸’이라는 용어가 붙은 합성어가 말이 되냐고? 하신다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1920년대 중반에 등장한 ‘ 영화소설 ’이라는 문화현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10년대까지 ‘영화 관람의 시대’를 보낸 식민지 조선의 영화계는 1919년 < 의리적 구토 >를 시작으로 본격 영화를 만드는 시대를 맞았다. 이와 함께 영화의 대중적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1920년대 중반부터 여러 신문은 연재 소설에 삽화 혹은 연출된 사진을 수록하고, 여기에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이 ‘영화소설’이 일련의 공통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른 특별한 양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당시 신문들이 앞다투어 사용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는 나름의 마케팅 전략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영화소설을 문학 장르가 아닌 ‘문화현상’이라 언급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조선에서 처음으로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신문에 연재된 것은 김일영의 「삼림의 섭언」이라는 작품으로, 이는 《매일신보》를 통해 1926년 4월 4일부터 5월 16일까지 총 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192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문화통치의 일환으로 민간 신문 발행을 허용했던 때로, 1910년대까지 총독부 기관지로 독주했던 《매일신보》는 이제, 1920년에 창간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민간 신문과 경쟁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서 1926년에 《매일신보》가 처음 도입한 ‘영화소설’은 당시 영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신문 판매 부수로 견인하려는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등도 잇달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단 작품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주2 영화소설을 신문 마케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은 《매일신보》에 「삼림의 섭언」이 연재되고 약 6개월 후, 《동아일보》에 연재된 「탈춤」(1926. 11. 9.~12. 16., 총 34회 연재)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동아일보》는 「탈춤」 연재를 시작하기 하루 전, 다음과 같은 홍보 기사를 게재했다. 사진: " 창작 영화소설 탈춤(예고) 심훈 작 ", 《동아일보》, 1926. 11. 8., 3면 심훈의 「탈춤」을 “조선서 처음되는 영화소설”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이미 수개월 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를 달고 연재된 작품이 있기에, 이는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이 홍보 기사에서 방점을 찍어 주목할 부분은 따로 있다. 기왕의 신문 연재 소설과 다를 바 없이 삽화를 수록했던 최초의 영화소설 「삼림의 섭언」과 달리, 「탈춤」은 “매일 삽화 대신으로 미려한 실연 사진”을 수록한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차용했을 ‘영화소설’이라는 표제에 대해 최초라는 타이틀은 다른 신문 다른 작품에 뺏겼지만, 《동아일보》는 처음으로 소설에 “실연 사진”을 도입하는 차별화 전략으로 신문 독자들에게 영화 관람 못지않은 기대감을 심으려 했을 것이다. 비로소 그 실상이 공개된 「탈춤」의 스틸은 화려한 캐스팅마저 자랑했다. 연재 첫 화의 스틸에는 같은 해 공개돼 화제를 모았던 영화 <아리랑>의 감독이자 스타 배우 나운규가, 또 같은 해 < 장한몽 >(이경손, 1926)의 심순애 역으로 스타 반열에 오른 김정숙 을 안고 비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이어지는 회마다 차례로 공개된 스틸에는 <아리랑>에서 현구 역으로 큰 인기를 끈 배우 남궁운과 악역 연기의 일인자로 정평이 난 주인규가 등장했다. 스틸 캐스팅만으로도 당대 소설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다. 영화소설 「탈춤」을 읽는 재미는 이뿐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연재되는 사진 위에는 상황을 요약한 지문 내지는 등장인물의 대사가 말풍선으로 제시되었다. “영화 수집가 홍영철 소장 일제강점기 영화 사진 컬렉션(부산시 부산영화체험박물관 기증)” 속 영화소설 「탈춤」 스틸 역시 연재 당시에 다음과 같은 말풍선과 함께 실렸다. 소설을 읽고 사진을 보면서 말풍선으로 제시되는 대사로 등장인물의 목소리를 상상하는 재미까지 의도한 듯한 구성은 어느새 독자들에게 ‘진짜로’ 만들어진 혹은 만들고 있는 영화라는 생각을 들게 하지 않았을까? 특히 보통의 소설처럼 서술되던 내용이 연재 후반부에 이르러 갑자기 영화 시나리오 형식으로 제시되었을 때, 이러한 의심(?)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작가 심훈은 연재 중 불쑥 등장해, 다음과 같이 변명을 하기도 했다. 결혼식까지 하게 되기 전에 여러 가지 층절이 잇서 좀 더 세밀한 묘사를 해야 할 것이나 “스티-ㄹ”(삽화 사진)이 부족 해서 부득이 겅정겅정 뛸수밧게 업시되얏고 결혼식 장면은 전문용어만 쓰지안코 원 영화 각본을 꿈이는 체로 시험삼아 써봄니다. - " 탈춤(26) ", 《동아일보》 1926. 12. 6., 3면 그런데 작가의 이 말은 또 다른 혼란을 가중한다. 심훈은 극 중 혜경이 준상의 강압으로 그와 결혼식을 치르는 과정을 세밀하게 전개하지 못한 이유를 스틸이 부족한 탓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과 스틸의 주객이 전도되는 순간이다. 소설의 스토리를 뒷받침해 주는 보조 수단이 스틸이어야 하는 것이 마땅할 텐데, 이 순간부터는 역으로 소설이 스틸의 스토리를 보완하는 장치가 되어버린다. 처음부터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소설 연재가 기획된 것인지 아니면 연재하던 중에 영화화가 결정된 것인지 전후 사정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어찌 되었든 영화소설 「탈춤」은 연재가 끝난 그 이튿날, 영화 제작 소식을 전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서 제작할 영화 < 탈춤 >은 원작자 심훈이 각색을, 나운규가 감독을 맡을 예정이었다. 나운규를 비롯해 소설 스틸에 출연한 남궁운과 주인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할 계획이지만, 여배우만큼은 전격 신인으로 교체하리라고 발표되었다. *주3 그러나 영화 촬영은 예고했던 것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7월, 《조선일보》는 그간의 각색 작업을 마치고 계림영화사 제작 아래 심훈이 감독을 맡을 것이라고 알렸다. 배우 역시 선정 중이라고 밝혀, 영화소설 「탈춤」 스틸에 출연한 배우들마저 전격 교체될 것임을 시사했다. *주4 그러나 영화 <탈춤>에 대한 소식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주5 대신 심훈은 1927년 9월, 자신이 쓴 시나리오 < 먼동이 틀 때 >를 촬영하며 첫 메가폰을 잡았다. 심훈의 연출 데뷔작 <먼동이 틀 때>(1927) * 공교롭게도 영화소설 「탈춤」이 신문에 연재 중이던 때에 「탈춤」 스틸에 출연한 나운규, 김정숙, 남궁운, 주인규는 조선키네마프로덕션 제작, 나운규 연출의 < 풍운아 >에도 출연했다(1926년 11월 19일 크랭크인, 1926년 12월 18일 조선극장에서 개봉). 그 때문인지 나운규가 자동차 뒤에 매달린 스틸은 훗날, 영화 <풍운아>의 스틸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스틸이 영화소설 「탈춤」에 수록된 날짜(1926. 11. 15.)가 <풍운아>의 공식 크랭크인 날짜보다 나흘 앞선다는 점에서, 그 정보는 수정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 주1. 정성일에 따르면, 이 말은 일본을 경유하며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사실 트뤼포는 ‘시네필로서 어떤 순간에 감독 혹은 비평가가 되려 했는가’라는 질문을 반추하며, 자신의 비평집 『내 인생의 영화(Les Films de ma vie)』에서 영화에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첫 번째 단계는 영화를 많이 보는 것이며, 두 번째 단계는 영화관을 나서면서 감독을 적어 두는 것이며, 세 번째는 연출의 자리에 가서 내가 선택한 같은 영화를 몇 번이고 다시 보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성일, 「트뤼포,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사람처럼」, 앙투안 드 베크·세르주 투비아나,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 을유문화사, 2006, 980~981쪽. 주2. 《매일신보》의 영화소설 게재 배경 및 특징에 대해서는 배현자·이혜진, 「근대 영화소설의 처음과 끝- 『매일신보』 영화소설」, 『한국 근대 영화소설 자료집: 매일신보편 上』, 소명출판, 2019, 3~34쪽 참고. 주3. 《동아일보》 , 1926. 12. 17., 5면. 주4. 《조선일보》, 1927. 7. 23., 2면. 주5. 심훈은 “촬영을 개시하기 6일 전에 초지(初志)를 뒤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탈춤」은 부르주아의 생활 이면을 유치하게나마 그린 것이 되기 때문에 스케일이 여간 크지가 않고 출연 인원도 엄청나게 많은 동시에 한 이천 원 한도하고 촬영비를 내게 되는 터라 그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도저히 실현시킬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심훈, 「『먼동이 틀 때』의 회고-조선영화감독고심담」, 『심훈문학전집 1』, 탐구당, 1966, 577쪽; 주인, 「영화소설 정립을 위한 일고- 심훈의 탈춤과 영화평론을 중심으로」,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어문연구』, 34권 2호, 2006, 267쪽에서 재인용.
한국영상자료원 수장고에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 중에는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비장한’’ 가치를 품은 원석들이 있습니다. 그런 원석을 골라내고 잘 다듬기 위해! 아키비스트들은 오늘도 여러 단서를 모아 추적에 나섭니다.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역사적 의의를 지닌 원석 으로 발굴되기까지, 자료의 맥락을 추적하는 KOFA 추리반장 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2023년 12월, 한국영상자료원은 3년여에 걸쳐 정리한 대규모 컬렉션을 공개했다. 영화 <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와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이 그것. 정리부터 공개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데에는 규모가 워낙 방대한 탓도 있었지만, 컬렉션 자체가 거대한 한국영화사를 관통하는 자료들로 채워진 까닭도 있었다. 故 김학성 촬영감독 (1913~1982)이 생전에 꼼꼼히 모아둔 자료들로 구성된 이 컬렉션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자,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기, 한국전쟁기 그리고 전후 시기에 그가 경험하고 마주한 한국영화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와중에 끝끝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자료 역시 존재해, 정리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지난 2008년부터 그의 아들 김충남 씨의 이름으로 기증된 자료들이다 보니, 자료의 원 주인을 직접 만나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자료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단서가 될 만한 어떤 것이든 찾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료 중에는 이 일련의 사진들이 있었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사진 속 인물들의 의상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모두 같은 날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마다 카메라가 세워져 있는 걸 보면 영화 촬영 현장인 듯한데, 대체 무슨 영화였을까? 간혹 기증된 사진 중에는 기증자가 사진 뒷면에 관련 정보를 적어두는 경우가 있지만, 아쉽게도 이 사진들에는 단서가 될 만한 정보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해야 할 일은 사진 속 인물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교집합을 찾는 일이다. 위의 사진에서 우선적으로 식별 가능한 인물들은 하이라이트 쳐진 인물들, 즉 컬렉션의 주인공인 김학성과 배우 서월영 , 최은희 , 주증녀 , 감독이자 편집 기사로도 활동했던 양주남 그리고 많은 영화에서 김학성과 함께 작업한 조명감독 고해진 정도였다(사진 오른쪽 하단 김학성 기준 반시계 방향 순). 그렇다면 이것으로 사진과 관련된 영화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정도 단서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김학성, 서월영, 최은희, 주증녀, 양주남, 고해진의 교집합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 하나. ① 이 영화는 촬영은 되었으나 공개되지 못했거나 어쩌면 완성조차 되지 못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사진이 촬영된 시점을 추정해 보는 것도 좋겠다. 배우 최은희가 스크린에 데뷔한 것이 1947년 신경균 감독이 연출한 < 새로운 맹서 >(김학성 촬영)이니, 이 사진은 적어도 1947년 이후에 찍혔을 것이다. <새로운 맹서> 이후 부부의 연을 맺은 김학성과 최은희가 함께 있는 현장인 점에서, 이 사진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헤어진 1953년 이전에 촬영되었을 것이다. 즉 ② 이 영화는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된 작품 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이 이상으로 추적할 만한 단서는 찾아지지 않았다.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되었으나 미완성된 혹은 미공개된 작품,’ ‘최은희·서월영·주증녀 출연, 김학성 촬영, 고해진 조명, 양주남 참여(역할 미상)’라는 것 말고는 영화의 구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만한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을 공개한 2023년 12월, 이 사진들은 ‘작품 미상 촬영 현장’으로 분류돼 공개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후, 이 사진의 정체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2025년 공개를 목표로 정리 중인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가제, 영화사 연구자 배수경 조사 및 연구)”에서였다. 이 역시 방대한 규모의 컬렉션이 될 예정으로, 각종 문헌과 사진, 박물 자료를 합쳐 3천여 점의 자료가 모여 있다. 그중 사진 자료만도 1,800여 점에 달한다(이는 복본을 포함한 수량으로, 컬렉션 공개 시 조정될 수 있다). 참여 연구자의 조사·연구가 끝난 결과물을 검토하던 중에 익숙한 사진 한 장이 갑자기 눈에 걸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의 앞면 (좌)과 뒷면 (우)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서 ‘미상 작품 촬영 현장’으로 분류했던 사진의 하나와 꼭 같은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사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聖血 (성혈) 은 永遠 (영원) 히 빛나리 撮影 (촬영) 스탚과 口防部 (국방부의 오기로 보임) 映畫課 (영화과) * *은 식별 불가 / 괄호 안의 내용은 인용자 주 정일성은 < 가거라 슬픔이여 >(조긍하, 1957)를 통해 정식 촬영기사로 이름을 올리기 전에 김학성 문하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으니, 그가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충분히 그러할 만하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한 때가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을 촬영할 때였으니, 아마도 이 사진은 스승인 김학성을 통해 받은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여하튼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에서 두 개의 주요한 사실을 얻을 수 있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영화의 정체가 ③ <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라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과 ④ 국방부 영화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 이제 남은 일은 위의 ③과 ④의 가설을 입증하는 일이다.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한국영화를 집대성한 편람이나 총서, 신문·잡지 등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 소장된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_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표지는 김학성 촬영감독이 개인적으로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는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주인공 서준이 가족들과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다 이튿날 새벽, 전쟁 발발 소식에 군대에 복귀하고 악전고투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콘티 앞부분에서는 스태프 명단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 이 연출하고 김학성이 촬영을, 고해진이 조명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녹음, 미술, 음악, 편집, 배역 등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콘티는 제작진이 모두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본된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위의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영화를 연출한 김홍 감독의 얼굴이 새삼 확인된다. 단체 사진에서 소매 배색 점퍼를 입고 선글라스에 모자를 쓰고 김학성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김홍 감독이다. 한편 온라인 고서점에서 개인적으로 입수한 동일본의 촬영 콘티 표지에는 “崔銀姬 瑛. 役(최은희 영. 역-인용자 주)”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 배우 최은희가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1 이로써 위의 일련의 사진들이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촬영 현장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라는 ③의 가설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김학성 콘티 (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와 최은희 콘티 (우, 개인 소장) 영화의 정체를 파악했으니, 이제 제작 정보를 좀 더 추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 뒷면에 적힌 정보를 신뢰할 경우, 이 영화는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된 작품일 것이다. “신뢰할 경우”라 말한 이유는 사진 뒷면의 메모가 사후에 적힌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회고’와 같아서 완벽하게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단 이 정보를 신뢰하기로 하고 좀 더 추적에 나서보자. 이것이 군 영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일 먼저 국군홍보관리소가 1992년에 발간한 『군영화 40년사』(“ 연감총서 컬렉션 ” 참조)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1950년 국방부 촬영대 발족부터 1992년 현재까지 군의 영화 제작 역사를 정리한 책으로, 군 영화 제작에 참여한 여러 영화인의 회고록과 군 영화 목록, 촬영 현장 사진 등이 수록돼 있다. 그런데 책을 훑어보던 중, 위의 사진들과 유사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군영화 40년사』 화보 면 화보 면 아랫단 오른쪽 사진에서 최은희(2열 우2)와 양주남(2열 우1)의 의상이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과 동일한 것이 확인된다. 책에는 이 사진에 대해 “‘聖血(성혈)’ 로케 현장의 촬영대원들과 최은희 씨”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를 줄여 <성혈>로 일컬은 것이지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영화 40년사』에서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이뿐이었다. 연도별 군 제작 목록에서도 더 이상 영화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가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이 있다는 추정은 든든한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이 같은 추정은 위의 ②번 가설, 영화 제작연도(1947~1953년 사이)를 보다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국방부 영화과의 정식 명칭은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휴전협정 체결 후 서울 환도와 함께 1953년 8월, 정부 기구 및 국방부가 개편되면서 기존의 ‘군사영화촬영소’에서 변경된 명칭이다. *주2 영화의 서사가 한국전쟁 발발부터 9.28 서울 수복까지의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전개된다는 점, 그리고 1953년 8월에 명칭을 변경한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제작에 관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추정컨대 1953년에 촬영된 작품일 것이다. 공적 기록이 부재하는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추적기는 여기서 ‘일단락’을 맺는다. 일단락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에 대해 추적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이 영화에 관계한 정도는 여전히 밝혀야 할 숙제이며, 촬영 콘티의 스태프 명단에 적혀 있는 “각본 협영문예부”에 대해서도 좀 더 파고들 여지가 있어 보인다. 참고 자료와 시간적 제약, 한국영화사 연구에 대한 개인의 미진함을 탓하며, 남겨진 과제들을 후속 연구를 통해 보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본다. * 미완성/미공개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김홍, 1953년 촬영 추정)에 대한 정보를 아는 분은 언제든 제보 바랍니다. *** 주1. 이 촬영 콘티는 배우 최은희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판본의 「CAST」 면에는 주인공 서준의 여동생 서영 역에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 있다. 서영은 최은희가 맡은 배역으로 추정된다. 한편 촬영 콘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배역 중 최은희, 주증녀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캐릭터는 서영과 유경옥으로, 주증녀는 서준의 약혼녀인 유경옥 역을 연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우 서월영이 맡은 캐릭터와 양주남이 담당한 역할은 촬영 콘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2. 국군홍보관리소, 『군영화 40년사』, 1992, 10쪽; 12쪽; 15쪽. 1950년 8월 대구에서 발족한 ‘정훈국 촬영대’는 1952년 1월, ‘군사영화촬영소’로 승격 발족했다. 이는 1953년 8월에 이르러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국방부 정훈국 군영화촬영소(1955년) →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1963년) → 국군홍보관리소로 잠정 통합(1979년) → 국군홍보관리소 정식 창설(1981년) → 국방홍보원(2000년)으로 변경되었다.
김수용 감독은 1965년에 아동영화 < 저 하늘에도 슬픔이 >로 그해 방화 흥행 1위를 기록하고, 청룡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곧 이어 개봉한 < 갯마을 >은 평단의 호평과 함께 흥행도 성공하고, 서울시문화상을 비롯하여 여러 영화상에서 감독상과 작품상을 수상했다. 그 전까지 코미디와 멜로를 주로 만들던 김수용은 1965년 성공에 자신감을 얻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를 계속해서 시도하게 된다. 일명 ‘문예영화’의 시대는 김수용과 함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당시 문예영화는 예술성이 높고 격조가 있다고 인식된 데에다 소설이나 연극으로 인지도가 높아 관객에게 호소하기가 좋은 장점이 있었다. 김수용이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준 1967년은 문예영화의 해이기도 하다. 이 해에 문예영화는 전체 한국영화 제작편수의 20%에 달했고, 대중에게 예술영화로 유통되었던 문예영화가 대중성도 있다는 것을 <갯마을>로 확인한 김수용은 1967년 한 해에만 10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1966년부터 우수영화를 선정하고 그에 대한 보상으로 외화 쿼터를 지급하는 제도가 문예영화의 붐을 이끈 측면이 있지만, 당시 문예영화 현상에는 수익성이라는 요소도 무시할 수 없다. 한해 10편이라는 한국영화 사상 신화적 기록의 시작은 1967년 1월에 개봉한 < 만선 >이다. 그런데 한해 10편이 그저 그런 작품들의 나열이 아니라는 점이 김수용 신화에서 더욱 놀라운 점이다. < 산불 >, < 빙점 >, < 안개 >, < 까치소리 >로 이어지는 스토리의 완결성에 중점을 둔 김수용 문예영화가 한 해에 만들어졌다. 김수용 영화세계에게 1965년이 전환과 깨달음이라고 한다면, 1967년은 방향설정과 완숙기라고 볼 수 있다. <만선>과 <안개>는 그런 점에서 김수용 영화세계의 두 방향타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바로 농어촌 리얼리즘과 도시 모더니즘, 두 개의 방향이다. <만선>은 천승세 작가가 1964년에 발표한 희곡을 원작으로 한다.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자연과 대결하는 한 어민 가족의 굳건한 의지와 비극적 삶을 사실적으로 그린 자연주의 연극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 <만선>은 어부 곰치가 장남과 막내아들에 이어 딸마저 자살해버리면서 세 자녀를 한꺼번에 잃고, 아내까지 정신이상이 되어가는 것을 마주하고 바다로 사라져 버리는 참담한 가족 비극을 각색하면서 엔딩을 바뀌었다. 영화에서는 딸 슬슬이( 남정임 분)의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이 포문을 열고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그 목소리는 일련의 사건 이후 바다를 떠나지 않고 일상으로 되돌아간 심경을 전한다. 이로 인해 숙명과 도전, 집착과 벗어남이라는 큰 주제적 갈등 요소가 모호하게 정의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는 여러 형태의 대립 요소들을 가지고 인간사회의 상징적 축소판으로서 섬마을을 묘사한다. 박정희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끝나고 민정 2기가 시작되는 시점이 1967년이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영화 내부로 가지고 와서 살펴보면, 젊음과 방황이 있는 청춘영화 유행이 서서히 저물고 다시 피해의식과 자기연민에 빠진 신파적 감성으로 무장한 멜로드라마들이 60년대 중후반부터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다. 조국근대화라는 떠들썩한 국가적 이벤트에서 밀려난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이 느끼는 절망감은 과거로 회귀하는 보다 보수적인 양태를 취했다. 다시 말하면, 계층상승의 길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과 박탈감이 대중문화에서 연민과 우울의 형태로 표현되는 신파적 감수성의 전면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영화는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아무리 고생해봤자 평생 빚에서 벗어날 수 없지만 이를 숙명으로 받아들인 곰치( 김승호 분)가 다시 바다로 나갔다가 아들 도삼( 남궁원 분)을 잃어버리고, 연쇄적으로 비극을 맞이하는 곰치 가족 구성원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다.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 변기종 분)는 과거의 빚을 이유로 몫을 나눠주지 않는다. 곰치의 딸 슬슬이는 어부를 천직으로 알고 성실히 살아가는 연철( 신영균 분)과 사랑하는 사이인데, 여기에 뭍으로 나가 큰돈을 벌어 온 범쇠( 박노식 분)가 끼어든다.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곰치 아내 구포댁( 주증녀 분)은 늘 육지로 나가길 간청했지만 남편의 고집 때문에 물러섰다. 그녀는 장남이 사망하자 아직 갓난아기인 막내아들을 배에 띄워 뭍으로 보내려고 하고, 곰치는 아기를 구하려다가 바다에 빠지고 만다. 아버지와 두 형제,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어머니마저 미쳐버린 상황에서 어촌마을을 지키는 자는 슬슬이뿐이다. 하지만 가난한 어촌마을에서 이런 비극을 마주하는 이는 슬슬이만이 아닐 것이다. 이겨낼 수 없는 좌절의 연속에서도 인물들에게 다시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 어머니의 품처럼 다시 고요해진 바다를 칭송하는 슬슬이의 목소리에는 체념이 가득하다. 아들들이 사라진 어촌마을에 남은 어머니와 딸, 그리고 인간이 자연에 맞설 수 없음을 경고하는 무당의 모습이 프레임에 채워지는데, 일상으로 다시 복귀한 이들의 광경은 숭고함을 전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인간과 자연의 대결, 빈부간의 갈등, 숙명을 받아들이려는 자와 이겨내려는 자의 갈등 등 묵직한 갈등들이 극단적인 사건들과 함께 펼쳐지다가 서둘러 평화로운 엔딩으로 향하는 것은 조금 갑작스럽게 느껴지지만, 당대의 박탈감과 절망감을 생각하자면 이해가 된다. 바다의 생명력을 자양분으로 다시 일어서는 것 말고 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사랑이 가득한 어머니에서 두 아들을 잃고 미쳐버린 여인을 연기한 주증녀는 이 영화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그리고 김수용의 또 다른 걸작인 <산불>로 청룡상 여우주연상을 한 해에 수상했다. 영화는 바다를 벗어날 수도,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던 이들의 서글픈 기록이다. 그리고 이들의 고단한 순간의 풍경은 조국 근대화라는 절체절명의 대의 아래 숨죽이고 있어야 했던 수많은 민초들에게 보내는 연민의 그림이다. >> 만선 고화질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