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병과 이쁜이
- 감독
- 강조원
- 제작년도
- 1973
- 출연
- 김희라, 나오미, 장혁, 트위스트 김, 남미리, 최성, 조춘, 장정국
열여덟 살 소년 한슬기는 남산순환로 통행 매표소 동전함을 털다 걸려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는다. 카메라는 비좁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듯 한슬기가 수감된 소년원의 내부를 관음적인 앵글로 비추고 있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음, 정해진 배우 없음, 정해진 카메라 없음, 정해진 미술 없음, 정해진 음악 없음, 정해진 편집 없음, 정해진 거 다 없음, 이라는 자멸적 어조의 자막이 순서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인디 밴드 ‘삐삐롱스타킹’이 부르는 노래 ‘나쁜 영화’가 울려 퍼진다.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보컬 이윤정의 울부짖는 듯한 보이스가 “책상 위에 수많은 아주 좋은 영화가/ 잠을 자고 있는데 식탁 밑엔 수많은/나쁜 영화...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좋은) 100편 (나쁜) 1편/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로 이어지는 가사를 통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기차 안에서 무리를 지어 본드와 가스를 불고 갈피를 잃은 저들의 내면적 정황이 ‘환각 재현’이라는 제목의 키치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재생된다. 다음 쇼트에서 이어지는 한 장의 영정사진, 가스와 본드를 과다 흡입한 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장에서 지루해진 아이들이 춤을 춘다. 순간 나쁜 조감독의 나레이션이 나쁜 감독을 꼬시기로 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나쁜 조감독이 찍은 단편영화의 러프컷인가? 시험에 든 나쁜 감독. 나쁜 조감독의 꾐에 넘어간 나쁜 감독은 생각나는 대로 사는 아이들에 관한 생각나는 대로 찍는 영화를 시작한다. 나쁜 배우들을 구하는 광고를 통해 모인 아이들은 그들이 쓴 짧은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찍는다. 상술(上述)한 < 나쁜 영화 >(1997)의 도입부는 서울의 10대 청소년들과 그들의 무모하고 환멸에 찬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이야기의 개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서정적이고 영적인 것에서부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뤘던 장선우의 이전 영화들과 달리 <나쁜 영화>는 길을 잃은 아이들처럼 거칠다. <제목이 없는 영원한 나쁜 영화>(Timeless, Bottomless Bad Movie)라고 하는 영문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나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구조화되지 않은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기성 영화의 기준과 규칙, 문법을 따를 생각이 없음을 선언한다. 항상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감독 장선우는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는 놀랍다. 자학과 폭력, 섹스, 환각, 범죄의 만화경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10대 아이들이 쓴 대본을 재연하면서, 때로는 술 취한 거리의 사람들을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특정 장면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삽입하는 예술적 만용으로, 일부는 35mm, 다른 일부는 16mm 내지는 슈퍼 8미리로 촬영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경계를 지우가 위해 다양한 출처의 이야기와 장르, 형식, 캐릭터를 비빈다. 영화의 1/4 지점에서 서사는 기성의 논리와 계율을 거부하는 10대들의 삶에서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바깥에 있기를 선택한 홈리스의 삶으로 건너간다.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1997년 한국의 경제적 투쟁이 버려진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장선우의 방식은 틀에 박힌 사회에 풍요에 저항하는 거리의 방랑자들에 대한 사실과 거짓의 앙상블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거친 젊은이들, 안전하게 부유한 삶을 좇는 체제를 회의하는 홈리스들의 정신적 풍경을 기린다. 장선우는 새와 레드변, 감자, 이쁜이, 아이떡 따위의 유치한 별명으로 불리는 10대 등장인물들이 지루함의 공백을 범죄, 학대, 장난, 폭력 및 섹스로 채우려고 하는 맹목적인 행동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연기하도록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서울역 주변을 어슬렁대는 홈리스들의 일상과 10대들의 존재 양식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체제로부터 버림을 당한 이들의 무모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는 것만이 저들의 공통점일까? 10대 청소년들과 홈리스들 사이의 접점을 상상하게 하면서 카메라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와 느슨한 플롯에 의해 사전에 설계하지 않았던 의미가 발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원초적인 분노, 평온한 포기, 특정한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경고를 무시하고 사는 무정부주의적인 삶의 가치를 찬미하는 장선우의 예술적 자의식은 도전적이다. 형식적으로 <나쁜 영화>는 유사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로 거리의 유목민들을 묘사하는 픽션 영화이다. 시네마베리테 양식으로 촬영되었지만 재연 에피소드와 현실, 구성된 이벤트 사이를 오가며 현실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 애쓴다. 계획과 우연을 병합한 사이비 다큐멘터리 형식은 영화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카메라를 든 영화 스태프가 길바닥에 주저앉은 한 소년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자. 이제부터 카메라를 든 사람과 붐 마이크가 화면 안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서 카메라는 스스로 참여적이 되는 동시에 촬영 대상의 개입을 촉발하는 촉매가 된다. 영화적 진실을 생산하는 순간처럼 의도된 그 장면에서 실제적인 세계에 속한 자연인은 허구적 스토리가 요구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실재하는 존재와 대상에게 부여되는 역할이 중첩되어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영화적 실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연출된 무수히 많은 장면들은 상당한 정도의 혼란을 유발한다. 카오스는 캐릭터들의 재현 방식과 그들의 행동 뿐 아니라 운동의 방향에서도 발생한다. 때때로 등장인물들은 의도적으로 화면서 속도를 덧붙이면서 골목길을 질주하거나 추적자들의 추궁을 피하기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섹스와 성적인 방종은 자유로운 행동 양식의 소여(所與)인 것처럼 변덕스러운 스타일로 전달되고 목표나 의도, 지향을 버린 말과 행위, 결과가 수반된다.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습격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태도와 유머, 냉소를 시전하는 특성은 어떤 한국영화도 도달하지 못했던 미학적 혁신의 지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실제 영상과 가공된 재연의 흐릿한 경계가 명확해지는 장면 중 하나는 송강호와 안내상, 기주봉, 이문식 등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홈리스 분장을 하고 실제 홈리스들과 섞여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찬송가를 부르는 거리의 전도자들 사이로 슬금슬금 이동하여 능청스럽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송강호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지우는 전략을 육체적 제스쳐를 통해 몸소 실행한다. 기주봉은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는 서울역의 홈리스가 되어 현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진짜 행려들과 3개월 간 합숙을 한 안내상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10대 아이들, 홈리스들과 달리 이 진짜를 연기하는 가짜들은 오랜 기간 훈련한 스킬을 발휘하여 능숙하게 현실에 자리를 잡는다. 감독과 스태프, 감독과 배우, 배우와 일반인, 진짜와 가짜, 선과 악, 미와 추, 현실과 허구 따위의 기준들을 깔아뭉개는 장선우의 방임적 태도는 야심적이다. 현재 시점에서 회고해 보건대 <나쁜 영화>의 위상은 시네마베리테와 에세이 필름의 언저리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대상들의 세계로 들어가 의도된 구성을 포기하고 그들에 의해 영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직한다. 젊음의 기쁨과 발견의 시기를 거리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장선우는 미학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체의 영화적 형식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간다. 진실(과 진실한 사람)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를 말하고 그 과정에서 매체의 성질을 다시 설정하며, 가치판단의 기준을 재정의하도록 하는 불온한 의도는 시네마의 역량을 시험한다. 도전적이지만 의도적으로 한계를 두지 않는 이 이야기는 체제에 저항하는 존재들의 삶과 예술적 반항의 태도를 일치시킨 현대 한국영화의 시금석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한국영화사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던 사람이라면, '' 이용민 감독''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 살인마 >라는 공포 영화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것이다. 그는 잘 알려진 것처럼 1960~70년대에 < 악의 꽃 >(1961), <살인마>(1965), < 목 없는 미녀 >(1966), < 공포의 이중인간 >(1974) 등 제목만 듣고도 그 장르를 꼭 집어낼 수 있는 공포, 괴기 흥행작들을 연출한 감독이다. 그러나 그의 영화 경력이 감독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당시 언론이 그를 소개하며 사용하는 수식어들을 살펴보자. ''카메라맨의 제1인자'', ''촬영계의 거장'', ''색채촬영의 권위자''로서 ''특수촬영기술''을 ''전매특허''로 삼고 있는 능력 있는 촬영 감독이기도 했으며, 극영화뿐만 아니라 < 제주도 풍토기 >(1946), <신라의 고분>(1946), < 산업시찰 >(1969) 등 기록영화를 만든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하다. 이처럼 극영화/다큐멘터리 감독, 촬영감독인 동시에, 1960년대 초반까지는 현상, 편집 등 후반 작업에까지 참여한 이용민 감독은 1916년에 태어나, 니혼대학교 예술과 영화부에서 영화를 공부한다. 이후, 일본에 머물며 새, 자연을 소재로 한 교육 다큐멘터리를 촬영, 감독하다가 해방 후인 1946년 < 제주도 풍토기 >라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감독하며 한국영화계에 데뷔한다. 감독 경력 가운데 초기에 해당하는 1950년대에는 < 서울의 휴일 >(1956), < 포화속의 십자가 >(1956), < 산유화 >(1957), < 고개를 넘으면 >(1959) 등 전후의 상황이나 엇갈린 애정관계를 소재로 삼는 멜로드라마를 주로 연출하다가, 1961년 흡혈 식물을 소재로 삼은 < 악의 꽃 >에서부터 후일 본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괴기 영화 연출이 시작된다. 이용민 감독은 동시대의 다른 인기 감독들이 유행에 따라 여러 장르를 오가며, 많게는 1년에 10여 편을 연출했던 것에 비해, 30여 년 동안의 감독 경력 동안 20여 편의 극영화만을, 그 중에서도 1960년대 이후로는 괴기 영화만을 중점적으로 연출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경력의 감독이라 할 것이다. 그 가운데 대표작이라 할 < 살인마 >의 도입부는 매우 인상적이다. 현대적 양식으로 지어진 크고 텅 빈 미술관에 양복 차림을 하고, 검은 우산을 든 주인공이 들어가는 장면은 모던하면서도 고딕 소설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이후 전개될, 고부갈등으로 비롯된 한을 푸는 며느리 귀신이라는 다소 전통적이고 익숙한 기둥 줄거리에서는 예상하기 힘든 도입부이다. 서양화풍의 초상화가 녹는 듯 흘러내리는 것에 화들짝 놀라서, 도망치듯 올라 탄 택시의 운전사가 “오늘은 원한을 못 푼 귀신들이 득실거리는 날입니다”라고 말하며 가리키는 택시 밖에는 희끄무레한 소복 귀신들이 숲 속을 활보하고 있다. 특별한 사건도 효과음도 없이 이계(異界)의 귀신들이 현실의 세계를 돌아다니는 이 장면은 이질적이고 혼종적인 것들이 특별히 위화감 없이 섞여 있는 <살인마>의 특징을 규정짓는다. 예컨대, 한국 어느 고장이든 하나씩은 있을 법한 민담, 전설로서 ‘시어머니에게 원한이 맺힌 소복 귀신’이 드라큘라 마냥 ‘흡혈’을 하고, 그러한 원한을 실어 나르는 매개체로 일본 괴담 영화에서 차용한 괴묘(怪猫)가 등장한다는 사실이 영화 속에서 그렇게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이용민 영화에서 이러한 이질적인 것들은 그들이 유래한 서로 다른 역사와 전통 사이의 충돌이나 균열로 나아가지 않는다. 비록 고양이의 영혼이 깃들어 있어 진짜 어머니가 아니라는 설정이 있긴 하지만 어머니 살해 역시 머뭇거림이나 죄책감이 없다. 즉, 이용민 영화에는 당대의 영화적 지식과 기술이 허락하는 것들을 모아 놓고 재미있어 하는 낙천성이 있다. 미륵보살의 도움으로 맞이하는 다소 어리둥절한 결론은 어떤 봉합될 수 없는 균열에서 비롯한다기 보다 그러한 낙천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이듬 해 연출한 <목 없는 미녀>에서도 이용민은 당시 자신의 기술적 트릭으로 재현할 수 있는 동서양의 기괴하고 무서운, 또 재미난 것들을 잔뜩 모아 놓는다. 극 중에서 목 없는 미녀는 소복에 집착하는 여자 귀신이 아닌 서양식의 투명인간이다. (서구의) 옛 식민지 어디에선가 가져왔을 법한 독거미와 황산이 흐르는 도랑, 2층과 지하실이 있는 삐걱거리는 서양식 목조 건물, 숨겨진 보물과 암호, 그리고 여기에 모성과 일제 말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식민(과 식민 이후)의 기억이 한데 섞여 작동한다. 투명인간과 벌이는 카체이스 시퀀스와 독거미, 뱀을 헤치며 보물이 숨겨진 장소의 암호를 찾아내는 시퀀스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자아내기보다는 보물을 찾아 헤매는 신나는 어드벤처물로 보이게 하기도 한다. 앞서 말한 낙천성은 1960년대 이후의 괴기 영화 시기 이전의 연출작에서도 엿보이는데, 우선 이병일 의 < 시집가는 날 >(1956)을 리메이크한 < 맹진사댁 경사 >(1962)를 생각해보자. 원작과 비교했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컬러 영화로 전환되며 나타나는, 세심히 조율된 압도적인 색채감각이겠으나, 영화의 플롯은 거의 동일하다. 다만 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서럽게 우는 이쁜이와 갑분이의 눈물로 끝나는 이병일의 영화와 달리 이용민 영화에서는 행복하게 떠나는 이쁜이(최은희)와 영화에서 코믹한 참견을 담당하는 삼돌이(구봉서)로 끝난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이용민의 첫 극영화인 < 서울의 휴일 >(1956)에는 도시 범죄와 빈민, 정신분열, 불륜이 등장하지만 시종일관 낙관적인 기운이 흐른다. 같은 해 한형모 감독의 < 자유부인 >에서는 한없이 심각하고 비장했던 ‘방종한 여성’과 ‘소홀함 속에 내버려진 남편/가정’이 이용민의 영화에서는 새로운 가정 풍속도 속에 누구 하나 상처 받거나 소외되지 않는 조화로운 방식으로 보여 진다. 남자 주인공의 동료기자들이 여자 주인공에게 호텔 야외 바에서 마시는 맥주 값을 뜯어내기 위해 걸었던 속임수가 조금 얄궂지만 눈 흘기는 것으로 충분히 넘어갈 수 있는 장난이었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낙천성은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동시대의 이질적이고, 균질하지 못한 것들을 포착하지만 그것들이 결국 잘 조화될 것이라는 믿음, 자신이 맞이한 새로운 시대와 그것이 약속하는 미래에 대한 낙관이다. 촬영감독으로서, 특수효과 개발이 필수였던 공포영화 감독으로서 이용민 을 생각해본다면 기계장치와 기술력을 가능하게 한 근대와 그 근대 이후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낙관적인 태도에도 변화가 찾아온다. 시나리오로만 남아 있는 마지막 작품 < 흑귀 >(1976) 이전의 마지막 연출작인 < 공포의 이중인간 >(1974)은 일제 시대에 숨겨진 보물 이야기가 프랑켄슈타인과 결합된다. 미친 과학자는 모험을 즐기기에는 너무 간악하고 탐욕스러우며, 그가 만들어 낸 것들 또한 그로테스크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는 결국 자신의 기술력으로 만들어 낸 실험대상에 의해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는 갑작스레 결론을 지어야 되겠다는 듯, 가까스로 권선징악과 가까운 결말에 이르지만 매우 불안정한 여운을 남긴다. 이러한 변화는 1960년대의 영화에서 보여주었던 근대와 기술에 대한 낙관이 국가주도의 산업화, 후기 자본주의에 가까운 모습으로 전개되며 형성되었던 1970년대식 근대성에 대해 그 스스로의 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글: 전민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