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다 꿈마다
- 감독
- 이사라
- 제작년도
- 1959
- 출연
- 도금봉, 남춘역, 이민, 이해랑, 문정숙, 허장강, 최봉, 성소민, 고향미, 김초선, 김동원, 강미애, 차석종
[사진]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1960)에서 이민과 노경희 이민(李敏)은 1947년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의 이준 열사 역으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후 한중영화사 제1회작인 강춘(江椿) 감독의 16밀리 시대극 <연화(蓮花)>(홍서량, 박양실 주연, 1948)와 반공영화 <화랑도>(염매리 공연, 1951) 두 편에 출연했다. <불멸의 밀사>는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한 전후 시기의 독립운동의 이면을, <연화>는 조선조 제25대 왕 철종 12년에 일어난 대교육자의 분기(奮起)와 기생 도화(道花)의 비련을 그린 것이다. (『민주일보』, 1948년 6월 27일, 광고) 배역 모두 2천여 명의 응모자 중에서 선발하였다. (『대동신문』, 1948년 7월 8일) [사진] 이준 열사 역을 맡은 이민의 첫 출연작 <불멸의 열사> (사진제공: 김종원) <화랑도>는 북한에서 월남한 청년이 헤어진 애인을 만나 반공전선에 나서는 얘기로, 촬영 중에 6.25를 만나 중단됐다가 피난지인 대구에서 완성한 것이다. 이런 내용의 특성상 <화랑도>는 개봉 후 상이군인들이 조직한 영화계몽반에 의해 남한 일대의 각 지역에서 상영되기도 (「상이군인들이 영화로 계몽운동」, 『조선일보』, 1952년 11월 13일) 했다. 그는 이렇게 일찍이 영화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한동안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춘향전>과 <자유부인>의 히트 전후 1953년 휴전과 함께 정부가 서울로 환도한 후에도 대부분의 영화인들은 부산, 대구 등지에 남아 있었다. 그해 초겨울이었다. 대구의 자유극장 옆 단골다방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이민의 눈에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 들어왔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와 <갈매기>(1948)로 유명한 이규환 감독이었다. 이민은 여종업원에게 차 한 잔을 시켜 보낸 뒤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에게 다가가 인사했다. 이 일은 결국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에 기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남원의 기생 딸 성춘향(조미령 분)을 사랑하게 된 사또의 아들 이몽룡 역이었다. 이민은 연기뿐만 아니라 제작 진행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예정했던 남원 대신 촬영지로 선택한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이란 마을은 로케 장소로는 적합했으나 기계를 움직일 동력이 없었다. 전력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가까이 있는 달성광산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행히 일이 쉽게 풀리느라 마침 그곳 광산소장이 이민의 경성제대 공과 시절 동기생이어서 전기를 끌어올 수 있었다. [사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 여배우는 조미령 이렇게 필름 길이 1만 2천자, 상영시간 2시간 15분으로 완성한 <춘향전>이 1955년 1월 16일 서울 국도극장에 개봉되자 첫 날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관객들이 서울 변두리는 물론 인천, 수원 등지에서까지 트럭을 동원하여 단체로 몰려들 정도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50) ‘영화60년’」, 『중앙일보』, 1980년 2월 21일) 였다. 그 결과 <춘향전>은 20일 동안 10만 여명이 관람하여 당시까지 한국영화사상 최다 흥행 기록을 세웠다. 이에 따라 이민은 여주연인 조미령과 함께 일약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여세를 몰아 <막난이 비사>(김성민,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와 <애인>(홍성기, 1956), <자유부인>(한형모, 1956) 등에 기용되었다. <막난이 비사>에는 조선조의 홍문관 정오품 벼슬인 교리(郊理)로 등장했다. 진사의 외동딸(이경희)을 소실로 삼으려다 반대에 부딪치자 그 아버지를 역적으로 몰아 목을 치게 하는 악역이었다. <단종애사>에는 세종대왕에 이어 등극한 후 재위 2년 만에 어린 단종을 신하에게 부탁하고 죽은 비운의 문종대왕 역을, 김내성 원작 <애인>에는 요정마담의 딸인 여대생(노경희)을 좋아하는 청년으로 나와 아프레게르적인 끼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이민에게 결정적인 돌파구를 열어준 것은 크레인 촬영을 시도한 정비석 원작 <자유부인>이었다. 가부장 중심의 유교적 인습사회에 외래문화가 들어오면서 변해 가는 여성들의 모습을 한 대학교수 부인(오선영: 김정림 분)을 통해 보여준 이 영화에 춤으로 그 부인을 유혹하는 건달 대학생 신춘호역으로 등장했다. 그는 ‘마담 익스큐즈 미' ‘알러브유’ 따위의 영어단어를 읊조리며 능란하게 대학교수 부인의 탈선을 부추겼다. 이 영화는 1956년 6월 9일 서울 수도극장(현재의 스카라)에서 개봉되었고, <춘향전>의 흥행을 무색하게 하는 대박을 터뜨렸다. [사진] <자유부인>의 이민과 안나영(오른쪽) 그는 잇따라 <실낙원의 별>(홍성기), <애원의 고백>(홍성기), <여성전선>(김기영), <찔레꽃>(신경균), <청실홍실>(이상 1957, 정일택) 등 5편에 이어 58년 <그 밤이 다시 오면>(노필), <꽃도 생명이 있다면>(홍일명), <낙엽>(박구),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모정>(양주남), <청춘비가>(이규환), <별만이 아는 비밀>(이선경),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촌색씨>(박영환), <흐르는 별>(김묵) 등 12편에 출연했다. 주로 신문연재소설과 연속방송극을 원작으로 한 것이다. [사진] <청춘비가>의 이민과 김아미(오른쪽) (사진제공: 김종원) <청실홍실>에는 사장 딸(엄앵란)의 구애에도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운전기사로, <그 밤이 다시 오면>에는 잡지사 여사원(이빈화)을 임신시키고 회사 돈을 훔쳐 이용하려다가 실패하자 자취를 감추는 회사원으로, <청춘비가>에는 일찍이 고아가 돼 헤어졌던 여동생(김아미)을 혈육인 줄 모르고 사랑하게 되는 기구한 화전민 출신의 오빠로, <별아 내 가슴에>에는 대학생(김동원)과 기생(주증녀) 사이에서 태어났으나 사귀는 여대생(김지미)의 양부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모르는 출판사 사원으로, <흐르는 별>에는 아내를 두고 월남한 후 혼자 딸을 기르며 온갖 시련을 겪는 장님으로 각기 등장한다. [사진] <그 밤이 다시 오면>의 이민과 이빈화(사진제공: 김종원) 1959년에는 <가는 봄 오는 봄>(권영순), <꽃피는 시절>(최훈), <꿈이여 다시 한 번>(백호빈),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신상옥), <내 사랑 그대에게>(하한수),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동백꽃>(정일택), <동심초>(신상옥), <밤마다 꿈마다>(이사라),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 <비오는 날의 오후 세시>(박종호), <사모님>(최훈), <아내>(김묵) <애모>(신경균),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등 27편으로 출연작이 증가된다. 태평양전쟁에 끌려갔다가 딸(전계현)을 남기고 죽는 <가는 봄 오는 봄>의 학도병, 6.25전쟁 때 작전을 수행하던 중 눈에 부상을 입고 국군병원으로 후송된 <꿈이여 다시 한번>의 육군 중위, 수절하는 전쟁미망인(이민자)을 사랑하는 <별은 창 넘어로>(홍성기)의 관상대 기사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 가운데 주목을 끈 것은 고아로 자란 한 여성(김지미)을 사랑하여 결혼 단계에 이르렀으나 전사했다던 그녀의 약혼자(최무룡)가 나타나면서 파국을 맞게 되는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미8군 소속 교포 2세 헨리 장 역이었다. 그는 이 영화에서 군복과 양복을 번갈아 입으며 때로는 양미간을 찌푸리는 특유의 표정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사진] <비오는 날의 오후 3시>의 이민과 김지미 최훈(9편)과 홍성기 감독(8편)의 단골배우처럼 나왔던 그가 신상옥 감독의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 등 세편에 기용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미혼 여성(최은희)의 원치 않는 임신과 기혼 여성(주증녀)의 불행한 불임의 모순을 다룬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의 너그러운 약혼자, 구한말 20세의 청년 이승만에게 개화학문을 배우라고 권하는 신긍우, 전쟁미망인(최은희)을 도우려는 친구에게 차용증부터 챙기는 <동심초>의 냉정한 증권회사 사장 신동일 역할이 그것이다. [사진]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의 이민과 최은희 이민은 이처럼 영화계에 진출한 뒤에 가장 바쁘고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할까, 이 기간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꿈이여 다시 한번>, <나는 고발한다>, <비오는 날의 오후 3시> 등 세편의 제작에 손댔다가 손실을 보기도 했다. 연극 경험 없는 명문대 출신 정상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는 법. 그의 독주는 얼마 못가 뒤에서 치고 올라오는 후배들에 의해 위협받기 시작한다. 이미 <젊은 그들>(신상옥, 1955)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무룡과 <피아골>(이강천, 1955)에서 두각을 나타낸 김진규의 도전으로 확고한 듯싶었던 인기의 성곽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러한 조짐은 1960년대에 이르면서 뚜렷이 나타난다. 60년 한 해 동안 출연 편수가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추억은 영원히>(전택이), <투명인의 최후>(이창근), <햇빛 쏟아지는 벌판>(정창화) 등 10여 편으로 줄어들고 이마저도 예시한 네 편을 제외하고는 조연급에 밑도는 것이었다. <애수에 젖은 토요일>(1960)은 그동안 우리 영화가 즐겨 다뤄온 민족분단, 이산의 비극을 소재로 한 것이다. 6.25 때 헤어진 사람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윤락가로 전락한 여자(김지미)가 죽은 줄 알았던 애인이 부상당한 군인의 모습으로 살아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비극으로, 이민이 그 주인공 박경일 중위 역을 맡았다. <추억은 영원히>에는 6.25전쟁 중에 부모를 잃고 정신이상자가 돼 거리에서 방황하는 여자(김지미)를 간호하는 착한 운전기사로, <투명인의 최후>에는 부족한 능력 때문에 애인을 빼앗기고 음독자살을 기도했으나 죽는 대신 투명인간으로 변해 복수를 하는 끈질긴 캐릭터로 나타난다. 이후 이민은 62년 안현철 감독의 <그리움은 가슴마다>를 비롯한 <양귀비>(최훈), <여자의 일생>(신경균), <운명의 골짜기>(전창근) 등 5편과 63년 <돈바람 님바람>(김수용), <상처받은 두 여인>(이규환) <백마고지>(김수길) 등 3편, 64년부터 66년까지 <처녀성>(홍성기, 1964), <대석굴암>(홍성기, 1965), <눈물 젖은 왕관>(하한수, 1966)을 만들고 칩거에 들어간다. [사진] <여자의 일생>의 이민과 이민자(사진제공: 김종원) 그랬던 그가 10년 만에 장미희의 데뷔작 <성춘향전>(1976, 박태원)에 이몽룡의 아버지 이진사역으로 등장하여 관심을 끌었다. 19년 전 서른다섯 살 이몽룡이 이번에는 쉰여섯 그의 아버지가 된 것이다. 제작자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이민은 1951년 <화랑도> 이후 4년여 동안의 공백기를 제외한 15년의 배우생활을 마쳤다. 그때까지 출연한 70여 편 가운데 <춘향전>(1955)을 비롯한 <막난이 비사>(1956), <단종애사>(1957),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1959), <양귀비>(1962), <대석굴암>(1965) 등 6편의 시대·역사극과 <햇빛 쏟아지는 벌판>(1960), <백마고지>(1963) 등 전쟁물을 제외하고는 60여 편이 넘는 작품이 멜로드라마였다. 그 후 영화계를 떠나 사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던 이민이 17년 만에 홀연히 서울에 나타났다. 영화를 제작한다는 것이었다. 일흔 세 살 때였다. 한 도예공의 삶을 통해 장인정신을 기리는 <서편제> 유의 영화라고 했다. 자신이 시나리오를 쓰고 주연을 맡는다는 이 영화의 예산은 일화 5억 엔으로 학창시절 친구였던 일본아시아문예협회 키누가와 고오이치(衣川耕日) 회장이 부담한다고 했다.(⸀‘자유부인’ 플레이보이 이민 73세에 영화 찍는 인생」, 『부산일보』, 1998년 2월 6일) 그러나 일본과 중국의 합작을 꾀한 이 계획은 얼마 못가 무산되고 말았다. 이민은 1921년 2월27일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시중(李時中)이다. 삼형제중 막내로 선비들과 어울려 시조창을 즐기고 사군자 치기를 좋아했던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그러나 춘천초등학교(1934년)와 춘천중학교를 졸업(1939년)하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의 회고 (한국영상자료원 기획, 「이민」,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1』, 도서출판 이채, 2005, 272~273쪽) 에 따르면, 벽이나 전주에 걸린 일본 시세이도(資生堂) 화장품의 선전을 위해 도자기로 만든 선전용 레이또 크림이나 눈에 넣는 와카모도라는 영양제 광고를 봐뒀다가 밤에 몰래 뜯어내 고철로 팔았다고 한다. 이렇게 3년 반 동안 모은 돈이 여비가 되었다. 1940년경이었다. 동경에서 가까운 사이타마현(琦玉県)의 우라와(浦和)고등학교에 들어가 아르바이트를 하며 1년 정도 다니다가 귀국했다. 이후 경성제국대학교(서울대 전신) 예과에 들어갔다. 그는 이 대학을 나올 무렵 길에서 발탁돼 영화와 인연을 맺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였다. [사진] <여성전선>(김기영, 1957)에서 이민과 조미령 1950년대 중반 이후 한때 최무룡, 김진규와 함께 삼각경쟁 구도를 이룬 이민에게는 당시의 일반적인 배우와는 다른 삼유삼무(三有三無)라는 특징이 있었다. 그것은 그만이 가진 세 가지 있음(三有), 즉 서울대학교(경성제대 후신)를 나온 명문대 출신이라는 점과 <춘향전>이나 <자유부인>과 같은 최다 흥행작을 일구어낸 광복 후 최초의 미국풍 댄디보이였다는 사실이다. 세 가지 없음(三無)은 연극 경험이 없는데다 본격적인 액션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고 연기 외에는 대외 활동을 한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시기에 첨단적인 정장과 점퍼, 스웨터의 옷맵시로 여성들의 허영심을 자극한 대표적인 '니마이메(二枚目: 미남배우의 통칭)였다. *
세월의 흐름의 무상함을 모든 사람이 말하고 있지만 유명을 달리한 친지를 다시 떠올려 생각할 때만큼 절실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 자신 원고 청탁을 받고 나서야 그이가 내 곁을 떠난 지 벌써 5년이란 시간의 공백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그이와의 첫 만남은 196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나는 차태진 사장과 극동흥업이라는 영화제작사를 창업하고 전속감독 겸 전무이사라는 이름뿐인 직함을 유지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나는 주로 돈을 벌 수 있을 만한 작품을 주로 만들고 있었으며 예술성이 높은 문예물을 외부에서 감독을 초빙하여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몇 친구 중에 군에 장교로 몸담고 있는 괴상한 청년이 하나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나를 찾아 회사로 왔을 때 복도에 걸린 스틸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한 듯 입에 침이 마르지 않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은 연기자가 있었다. 그 주인공이 바로 '' 이낙훈 '' 아형이다. 당시 그이는 한운사 선생 원작, 유현목 감독의 < 아낌없이 주련다 >에 출연 중이었다. 그이의 존재를 내게 알려준 그 청년장교는 군인의 신분에 걸맞지 않게 다방면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문화예술 부문에도 전문가 이상의 혜안을 갖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의 말을 빌린다면 ' 이낙훈 이란 배우는 앞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최고의 연기자가 될 것이다'라고 단언하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작품을 함께 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업을 같이 하고 있는 나로서는 그러한 엄청난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너무도 부끄러웠으며 그 부끄러움은 커다란 관심으로 바뀌어 그이를 가까이 만나보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을 급속도로 가깝게 만든 것은 같은 K고등학교 동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 당시만 해도 봉건주의적이고 보수주의적 사상이 팽배해 있던 시절이다. K고를 나와서 무엇이 할 일이 없어 연극쟁이나 탈렌트 또는 영화판에 몸을 담아야 하느냐고 주위의 멸시와 냉대를 받아야 했던 그런 세상이었다. 동병상련이라고나 할까 우리 두 사람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이가 되었으며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다. 나이는 필자가 두 살이 위였고 학년으로는 그이가 나보다 하나 아래였다. 우리 두 사람은 직업상으로만 가까웠던 것이 아니라 가정적으로도 친형제 이상의 교분을 유지하며 상호 간의 집안 대소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돈독한 관계를 지키는 사이가 되었다. 그 당시 우리 두 사람은 신혼초였고 우연히도 안사람들의 나이가 동갑내기여서 안사람들끼리의 교분은 우리 두 사람의 사이를 능가할 만큼 돈독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하여 그이가 신혼초에 함께 모시고 살던 홀어머니의 소천시에는 ''호상''이라는 중책(?)을 맡아 모든 제의를 주재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필자는 그이의 친가 쪽뿐만이 아니라 처가댁의 여러 친척분들과도 친족 이상의 관계를 맺고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었다. '' 이낙훈 '' 아형은 필자가 감독한 많은 작품에 출연해 주었다. 역할의 크고 작음을 떠나 기꺼이 출연하여 직간접적으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너무나 많은 세월이 흘러 하나하나 모두 연대별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 늦어도 그날까지는 >, < 친정어머니 >, < 용사는 살아있다 >, < 결혼반지 >, < 원죄 >, < 동과 서 >, < 그대 이름은 >, < 섬마을 선생 > 등등이 주요 작품들이다. 그이는 참으로 만능의 연기자였다. 라디오 연기(성우)로 시작하여 연극, TV드라마 그리고 영화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매체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그 특성에 가장 잘 어울리는 연기를 개발하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이의 연기력이 얼마나 원숙하였는가 하는 것은 제1회 동아연극상 주연상 수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 연기상, TV부문 수상, TBC연기대상 주연상 수상, KBS연기대상 수상 등이 잘 대변해 주고 있다. 그이는 고교 재학시절부터 연극활동을 하였으며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에 진학하여서도 그의 연극 활동은 계속되었으며 미국의 MIAMI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면서도 연극에 대한 집념은 변함없이 이어졌다. 이와 같은 특별한 경력이 그로 하여금 원숙한 연기자로 성공할 수 있는 토양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이와 함께 한 작품 촬영중에 있었던 일화를 소개해 보고자 한다. < 원죄 >라는 작품의 촬영중이었다. 주인공 역으로 연기와는 거리가 먼 신인 0군을 발탁하여 썼을 때의 일이다. 장면의 내용은 여름 장면이었고 촬영 시기는 한겨울이었으며 장소는 난방이 전혀 안된 세트장에서의 일이다. 살을 에이는 것 같은 추위 속에서 런닝셔츠만을 입은 상태로 촬영을 하는 장면이었다. 등장인물은 이낙훈 씨와 신인인 0군이었는데 0군의 연기가 너무 미숙하여 도저히 그대로 촬영할 수가 없었다. 리허설을 거듭하고 거듭해도 0군의 연기는 조금도 진전이 없었다. 모든 스탭들도 기다리기에 지쳤고 그날의 촬영을 포기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감독인 필자도 체념을 하고 현장을 떠나 대기실로 물러났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낙훈 씨만은 포기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0군의 연기를 차근차근 지도하여 몇 시간 후에는 촬영을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이끌어갔다. 덕분에 이낙훈 씨는 심한 감기에 걸려 상당기간 고생을 했다. 연기자의 처지와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는 그이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 생각된다. 그후 신인 0군은 그시대를 대표하는 주연급 스타로 성장하여 팬들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일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이는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후덕한 인품을 지닌 그런 사람이었다. 그이는 참으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다방면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기지에 찬 유머 감각은 항상 주변의 사람들을 즐겁게 하였고 특히 그의 팔도 사투리는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달인의 경지에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술자리에서 기지에 찬 유머와 팔도사투리는 필자를 포복절도케 하여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단편이 되었다. 그이는 팝송에서 프로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북창동에 ''MEXICO''라는 조용하고 아늑하고 정겨운 살롱이 있었는데 우리 두 사람은 그곳 분위기가 너무 좋아 자주 찾곤 했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코코부러더스''라는 이름으로 장우 씨와 박상규 씨가 라이브로 노래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갈 때마다 그이는 두 사람의 권유로 무대 앞에 나가 그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세 사람이 빚어내는 하모니의 앙상블은 그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으며 연속적인 앙콜을 유발하기도 했다. 참으로 아름답고 포근한 추억의 한편이라고 할 수 있다. 가정적으로나 개인 활동에 있어서 그이처럼 행복한 나날을 즐겼던 사람은 그리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할까. 그이에게는 오랜 동안 고통을 주었던 지병이 있었다. ''당뇨병''이 그것이다. 불치의 병이라는 ''당뇨병'' 평생을 함께 해야 한다는 ''당뇨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용하다고 이름난 의사는 다 찾아다녔고 병에 좋다는 처방을 다 써보았으며 효험이 있다는 민간요법을 찾아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다시피 했다, 병마를 이기고자 하는 그의 투병 모습은 옆에서 지켜 보기에는 너무나도 안타깝고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해의 추석 무렵으로 기억된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그의 부고가 내게 날아든 것이다, 아연실색한 필자는 곧바로 그의 영전으로 달려 갔다. 유족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간단한 검사를 받겠다고 제발로 걸어 들어간 사람이 눈깜짝할 사이에 의식을 잃고 손쓸 사이도 없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너무도 어이가 없고 기가 막힌 노릇이다. 62세 한창 나이에 사랑하는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만큼 귀여운 딸 정화 양과 아들 상구 군을 남겨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세상을 등질 수 있단 말인가? 그이는 한 사람의 연기자이기데 앞서 종교적으로 신앙심이 두터운 가톨릭신자였다. 그이의 친가나 처가댁 모두가 독실한 신자 집안이다. 천주님께서도 너무나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이제 정말 뭘 좀 알고 일할 나이에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그이를 천주님 곁으로 불러간단 말입니까? 망연한 허탈감과 그동안 그이에게 너무나도 무심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감으로 나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너무나도 큰 별을 잃은 것이다. 앞에서 나의 친구가 단언했듯이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커다란 연기자를 잃은 것이다. 중후하고 품위있는 그의 외모와 원숙한 연기력, 정답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 포근하고 따뜻한 그의 마음씨 이 모두를 우리는 그이와 함께 잃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이가 남기고 간 사랑하는 유족들은 그이를 잃은 슬픔을 극복하고 그이가 다 이루지 못한 유업을 잇기 위해 각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부인 최윤주 여사는 불우 이웃을 돕는 사회봉사로 눈코 뜰새없이 바쁘시고 딸 정화 양은 뉴욕대학에서 컴퓨터 아트를 전공하고 돌아와 아티스트로의 길을 다지고 있으며 아들 상구 군은 미국대학에 유학하여 연출을 전공하고 돌아와 현재는 단국대, 순천향대, 경인대, 한국사이버대학 등에서 후학지도를 하는 한편 한양대 박사 과정을 이수하느라고 여념이 없다고 한다. 이 자리를 빌어 이들 유족들에게 진심으로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며 유명을 달리한 고인에게는 두 손 모아 명복을 빈다. 김기덕 (예술원회원) / 2003년 <프로필> 1936년 3월 27일 서울 출생 1998년 10월 7일 타계 1954년 경기고등학교 졸업 1956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미학과 2년 수료 후 도미 1961년 미국 마이애미 유니버시티 사학과 수료 1965년 김수용 감독의 < 갯마을 > 데뷔 <주요 경력> 탤렌트 협회회장, 제11대 국회의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 (주)범진흥업 대표이사 등 <수상 경력> 동아연극상, 한국연극영화 최우수연기상, 백상예술대상, 연기대상, 공로상, 특별상 제11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공로상수상 등 다수 수상 <주요 작품> 갯마을 , 용사는 살아있다 , 돌의 초상 , 돌종 , 목소리 , 연합전선 , 꽃네 , 동과 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