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방관 이상국
- 감독
- 이상혁
- 제작년도
- 2019
유신체제기 | 1975~1979년 197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계 유신헌법에 근거해 1974년부터 발동된 긴급조치와 1975년 유신헌법 찬반 국민투표의 시행은 한국 사회를 더욱 경직되게 만들었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국회 동의 없이 국민의 기본권을 정지시키는 행위다. 특히 1975년 5월 13일 시행된 긴급조치 9호는 유신헌법에 반대하는 집회·시위 그리고 언론이나 표현물을 일절 금지했다. 물론 영화 검열도 강화됐다.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영화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1974년 41% 수준이던 수정·반려 비율이 1975년에는 80%에 이르게 된다. 한국영화산업의 수치도 불황을 증명한다. 한국영화 제작/상영 편수는 1975년 94/115편, 1976년 134/106편, 1977년 101/66편, 1978년 117/69편이었고, 외화 상영 편수는 1975년 70편, 1976년 71편, 1977년 47편, 1978년 41편, 1979년 68편이었다. 편수로는 한국영화와 외화가 엇비슷한 수준이었지만, 관람객도 상영 일수도 외화 쪽이 2배 이상 많았다(서울개봉관 기준). 명백하게 외화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 시기 제작사는 외화를 수입하기 위해 국산영화를 만들었다. 1975년을 기준으로 보면 서울 소재 극장에서 일주일 이상 상영한 6편을 기준으로 수입권 1편을 부여하는 식이었다. 또 분기별로 5편을 뽑는 우수영화에는 각 1편의 수입쿼터가 주어졌다. 1976년부터는 정의조차 모호한 ‘우수영화’ 제작이 아예 의무화되었고, ‘국책영화’를 제작할 경우 수입쿼터를 주는 조항도 추가되었다. 제작사들은 일단 저예산 제작으로 작품 편수를 채우는 데 치중했으므로, 작품의 질이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액션 장르를 중심으로 호스티스·에로영화가 판을 쳤다. < 바보들의 행진 >은 1975년 1월 말까지 진행된 시나리오 사전심의에서 곳곳에 개작과 삭제 통보를 받았고, 그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2월부터 2개월간 촬영을 마친 후 4월 초 다시 본편 심의에 들어갔다. 그리고 15군데의 삭제와 단축 통지를 받았다. 영화는 4월 31일 국도극장에서 개봉, 49일 동안 17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검열에 시달린 감독으로서는 예상조차 못한 히트였다. 그리고 당국은 이 작품에 ‘우수영화’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국가의 폭력과 암울한 사회 분위기를 온몸으로 새긴 영화를 통해 당대 관객들은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는 아이러니, 그 중심에 하길종 감독이 있었다. 뉴웨이브의 기수 하길종 1941년 4월 부산에서 태어난 하길종 은 1959년 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데모대의 최전선에서 4·19 혁명을 경험했다. 문학 활동을 했지만 후배 김승옥 등에 비해 주목할 만한 것은 아니었고, 졸업 후 항공사에 입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를 만든다. 1965년 UCLA 영화과 대학원에 입학해 정규 영화교육을 받았고 M.A(이론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영화계 데뷔 전 하길종의 일부 이력에 대해서는 신화화된 점이 있음이 밝혀지기도 했지만(안재석, 「하길종 감독 바로보기」, 『영화연구』, 2009), 그의 미국 체류가 이후 영화세계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1960년대 미국은 저항운동과 청년 문화가 주도한 변혁의 시기였고, 특히 그가 미국에 도착한 1960년대 중반은 미국영화의 뉴웨이브 즉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태동한 때이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또 영화언어적으로 청년 하길종의 이성과 감성의 각 회로는 쉴 틈조차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화적 자산에도 불구하고, 1970년 한국에 돌아온 하길종의 연출 활동은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김지하와 야심만만하게 개발한 시나리오 「태안전쟁」은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고, 이효석 원작을 동생 하명중 이 각색한 < 화분 >의 촬영도 예산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1972년 데뷔작 <화분>을 완성했지만, 영화가 내포한 정치성으로 대중적인 호응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시나리오들 역시 대중성 부족과 검열의 문제로 좌초되었다. 미학적 실험이 이어진 1974년 < 수절 > 역시 흥행에서 좋은 결과를 낳지 못했다. 하지만 1975년 세 번째 연출작 < 바보들의 행진 >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청년들의 감수성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던 당대 최고의 인기 작가 최인호 의 원작이었고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단성사 시사가 끝난 후 김수용 감독이 영화의 대중적 감각을 칭찬하자 하길종이 크게 화를 냈다는 일화는 그래서 유명하다. 검열로 인해 117분의 영화가 99분가량의 작품이 되었지만, 청년 관객들은 열광했다. 물론 감독 하길종의 연출력이 빛을 발한 결과였지만, 그는 이 영화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도 한국영화 10선으로 선정될 만큼 높게 평가받는 작품이고 하길종의 대표작임에 분명하지만, 그는 세상을 떠날 때까지 자신의 대표작으로 <화분>을 뽑았다. 영화가 성공한 그해 하길종은 ‘영상시대’ 동인이 되었고, 서울예전 영화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이후 그는 < 여자를 찾습니다 >(1976)와 < 한네의 승천 >(1977, 미개봉)으로 다시 주춤했고, < 별들의 고향(속) >(1978, 32만), < 병태와 영자 >(1979, 18만)로 흥행에 성공했다. 상업적으로 성공한 세 작품 모두 최인호의 원작과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점은, 서구의 ‘뉴웨이브’ 영화언어라는 이상과 통속적 대중문화라는 현실 사이에 놓인 하길종의 복잡한 고민을 짐작하게 만든다. 1979년 2월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타계했다. 단 7편의 극영화를 남기고 요절한 하길종 감독 빛나는 감각 그리고 검열의 흔적 사운드 없이 대학생들이 팬티만 입고 연병장을 행진하는 장면으로 갑갑한 병영 사회임을 암시하며 시작하는 < 바보들의 행진 >은 검열과의 고투를 텍스트 곳곳에 노정하고 있는 영화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102분 버전의 영화(블루레이 출시본)는 당시 개봉 때보다 2분 29초 더 살아있어 그나마 다행이지만, 네거티브(원본) 필름 자체에서 삭제된 15분 정도의 분량은 심의대본을 통해서만 상상해볼 수 있다. 병태( 윤문섭 )와 영철( 하재영 )이 참가한 입대 신체검사 장면이 끝난 후, 영화는 대학 캠퍼스로 자리를 옮겨 철학과 학생들이 인근 여대 불문과 학생들과의 미팅을 계획하는 장면을 담는다. 목욕탕에서 광을 낸 병태와 영철은 미팅 장소로 향하다 경찰의 장발 단속에 걸린다. 이 에피소드는 시대상을 반영하면서도 새로운 영화 화법을 고민하고 완성시킨 하길종의 감각이 제대로 드러나는 장면이다. 경찰과 마주친 순간 병태와 영철이 도망가기 시작하면 송창식의 ‘왜 불러’가 흘러나오고, 가사와 이미지가 맞아떨어지는 뮤직비디오 같은 화면이 계속된다. 촬영된 화면에는 구경하는 인파가 그대로 등장하지만 경찰과 장발 대학생들의 추격전이라 전혀 어색하지 않다. 결국 둘은 경찰서로 잡혀가고, 경찰은 미팅이 있다는 둘에게 “흔해빠진 게 대학생인데 너희들은 혼이 나야 해, 너희들은 괴질이야”라고 나무란다. 이 장면의 아이러니는 경찰조차 장발이라는 점이다. “순경의 머리 긴 장면 클로즈업된 곳 단축”이라고 지시한 심의서류 문구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당연히 검열 과정에서도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102분 버전에는 살아있는 덕분에, 정부 권력에 대한 하길종 의 조롱과 야유를 읽어낼 수 있다. 둘은 경찰이 한눈판 틈을 타 경찰서에서 도망가고, 경찰이 “야 임마, 학생” 하고 둘을 부르자 “왜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 왜 불러”라는 가사가 기다렸다는 듯 흘러나온다. 이후 영화는 대학생들이 만들어내는 경쾌한 분위기와 암울한 정서를 오가며 ‘파편적’으로 진행된다. 그 핵심적인 이유는 예술문화윤리위원회(예륜)의 심의 사항을 반영한 117분의 텍스트에서 또 20분 이상 잘라냈기 때문일 것이다.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요구 사항을 반영한 영화를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신을 흩트리고 다시 배치하는 과정을 수없이 진행했을 것으로 보인다. 초입의 ‘왜 불러’ 시퀀스가 보여주는 영화적 감각이, 전체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후반부로 가면서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그대로 노출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불균질한 텍스트로 남는 것을 선택한다. 특히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이후 급격히 무너지는 리듬은 프랑스 누벨바그식의 형식 실험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다 포기한 채 단순히 나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유다. 심의대본에서 영화로 옮겨지며 크게 바뀐 장면 중 하나는 학생들의 시위로 휴강하는 신이다. 대본상으로는 학생들의 시위가 묘사되고(물론 이는 유신 반대가 아니라 일본에 대한 시위로 표현된다), 교수는 참가할 사람은 나가라고 말한다. 결국 교수는 휴강하겠다며 강의실을 떠나고, 칠판을 지우던 병태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 ‘상국가’의 획을 지우고 덧붙여 ‘사구라’로 바꾼다. 원래의 연출 의도는 학생들의 시위로 정상적인 수업이 불가능한 캠퍼스 풍경과 강의실에 홀로 앉아 고민에 빠진 병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완성된 영화에는 시위 장면을 모두 연고전으로 추정되는 여러 운동 경기의 실사 영상으로 바꿨다. 당국의 검열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통해 감독이 더 진전한 부분도 있다. 최종 대본(녹음대본)에는 아예 글자를 고친다고만 지시하며 한발 물러나 있지만, 사구라에서 ‘사쿠라’로 한 획을 더 쓰려고 하는 순간 커트하는 것이다. 이상국가에서 바뀐 사쿠라는 일본어로 벚꽃이기도 하지만 사기꾼, 야바위꾼, 한통속 같은 의미도 있다. 한국에서는 가짜라는 의미로도 즐겨 쓴다. 과 대항 술마시기 대회 장면. 맨 아래 줄 왼쪽이 소설가 최인호, 오른쪽은 코미디언 이기동 한국의 ‘뉴 시네마’가 태어나다 < 바보들의 행진 >이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비롯해 전 세계적 뉴웨이브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청년 문화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는 영화는 그들이 놓인 배경을 다큐적 질감으로 제시하고 또 거칠지만 인상적인 숏 배열을 보여준다. 과감하게 줌을 쓰는 장면들도 그렇다. ‘뉴 아메리칸 시네마’에서 기성곡을 영화음악으로 활용하며 뮤직비디오 신을 만든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송창식의 노래 ‘왜 불러’ ‘고래사냥’ ‘날이 갈수록’을 메인 테마곡으로 사용해 영화의 이미지를 넘어서는 인상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날이 갈수록’은 영화가 엔딩을 준비하면서 흘러나온다. 무기한 휴강이 결정된 캠퍼스에서 “들립니까”라는 외침이 들리고 병태는 구역질을 하는 듯 괴로워 보인다. 그리고 예쁜 고래를 잡겠다고 버릇처럼 얘기하던 영철은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 ‘고래사냥’이 힘차게 울려 퍼지는 그 순간 영철은 자전거 페달을 밟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 영화의 마지막 신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뽑힌다. ‘그냥’ 입대를 선택한 병태는 빡빡 머리를 하고 입영열차에 타고 있고, 영자( 이영옥 )가 플랫폼으로 뛰어와 그를 찾아낸다. 열차가 출발하기 시작하자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 병태에게 영자가 키스하려 하고, 낭만적이게도 헌병이 그녀를 들어 키스를 도와준다. 심의대본에서 “입술을 맞추는 영자, 말리는 헌병”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영화는 당대의 청년들에게 위로를 건넨다. 한국영화의 뉴웨이브에서 가장 중요한 인자는 검열이었을지 모른다. 할리우드에서 작가주의 영화가 자본과 제작 현장의 소음을 뚫고 나온 것이라면 1970년대 한국영화의 작가주의는 당국의 가위질을 견디는 것까지 추가해야 했다. 하길종이 만들고 싶었던 ‘새로운 영화’는 당국의 집요한 검열로 파편화된 불균질한 텍스트가 되었고, 이는 당대 사회를 있는 그대로 반영한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의 ‘뉴 시네마’는 이렇게 탄생했다. 검열과 자본과 창작자가 빚어낸 한국영화사의 비극적인 순간들은 1980년대로 이어졌다. 영철 역의 하재영(왼쪽)과 영자 역의 이영옥(오른쪽) 침체의 연속 1970년대 후반 한국영화가 최소한의 품위를 지켜낸 것은, 1960년대 대표적인 감독들과 영상시대 동인 덕분이었다. 유현목 , 이만희 , 정진우 가 각각 < 장마 >(1979), < 삼포가는 길 >(1975), < 심봤다 >(1979) 등을 내놓으며 각자의 자리를 지켰고, 김호선 , 홍파 , 이원세 등 영상시대 동인들의 작품이 또 다른 축을 버텨냈다. 특히 영상시대 활동은 동인으로 참가한 평론가 변인식 의 평가처럼 비록 ‘바보들의 행진’으로 끝났지만, 1980년대 초반의 사회비판적 리얼리즘 영화, 더 나아가 ‘코리안 뉴웨이브’의 흐름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79년 10월 26일 유신 정권이 무너졌지만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서울의 봄’으로 상징되는 민주화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은 5.18 민주화운동을 짓밟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킨다. 신군부의 영화 정책은 유신 체제의 기조를 이으면서 반공안보영화의 제작을 추가했다. 당국의 요구대로 반공영화를 만들었지만, 반공영화가 아닌 반공영화가 등장한 것도 시대의 아이러니일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장르영화로 연마한 임권택 의 구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검열과 한국영화의 새로운 관계 1970년대 한국영화를 들여다보는 시야는 대체로 검열에 국한되어 있고, 그 프리즘을 통과한 분석과 해석은 한국영화의 형해(形骸)화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검열이야 국가가 주도하는 가혹한 문화정치의 시대에 엄존했던 제도인지라 그렇다 치더라도 그 결과로서 1970년대 한국영화가 잔해로 타락 내지 돌변했다는 판단에는 아직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1970년대 몇몇 한국영화들은 분명 새로운 스타일을 제시했으며, 또 이 과정이 검열을 분명하게 의식한 지점에서 출발하고, 검열을 경유하면서 보다 적극적으로 수행된 측면이 있다. 공교롭게도 국가가 설치한 몇 겹의 검열 단계를 지나면서 어떤 영화는 처음보다 더 나은 영화가 되어갔으며, 스스로 한국영화를 그 이전의 시간과 결별하게 만드는 사건이 되기도 했다. 1970년대 한국영화에 등장한 새로운 스타일이란 재현 불가능한 것을 재현하려는 욕망에서 시작되었으며, 결국 재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검열마저 영화적 표상으로 끌어안는 실험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하길종이 연출한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에 대응하는 영화언어를 고안해 냄으로써 가장 1970년대스러운 영화가 되었다. [그림1] 시나리오심의의견서(1974.12.10.) 무려 세 장에 걸쳐 22개의 항목에 관한 삭제 및 수정 지시가 기록되어 있음. ‘전면개작을 요망’한다는 표현이 눈에 띔. 〈바보들의 행진〉은 1975년에 개봉된 작품으로 일간스포츠에 연재되었던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영화이다. 이 영화는 널리 알려진 대로, 바로 전 해 1970년대 흥행에 가장 성공한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성적을 이어보려는 제작사의 기대에 부응한 흥행작이었다. 이 영화의 흥행은 여러 면에서 〈별들의 고향〉과 겹치지만 또 구별된다. 소설가 최인호의 원작을 각색한 영화라는 것과 도시 중심부 청년 문화의 화려한 이미지들과 영화음악을 통한 스토리텔링 등은 두 영화 흥행의 공통요인이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낯선 공간, 무엇보다 몇몇 까메오를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오디션을 통해 캐스팅된 대학생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은 〈바보들의 행진〉 흥행의 독자적 요인들을 궁금하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다. 특히 수차례의 검열을 거치면서 방황하는 대학생들의 세태에 놓여있던 산만한 이야기가 그러한 삶의 기원에 대한 암시로 초점화된 사실은 검열과 1970년대 한국영화의 또 다른 관계를 상상하게 한다. 예를 들어 애초의 시나리오에서는 인트로의 병영 신체검사 다음 장면으로 주인공 병태와 영철 무리가 입대를 앞둔 친구를 사창가로 데려가는 신이 이어진다. 숫총각 대학생과 성매매 여성 사이에 내재하는 억압도 문제거니와 검열을 거치면서 영화는 이 장면을 스스로 배제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한 곳으로 모으게 한다. [그림 2] 원본시나리오 “시나리오심의 과정에서 수정된 성매매 씬은 영화화 과정에서 자체 삭제된다.” 이 글은 〈바보들의 행진〉이 시도하고 있는 새로운 스타일이 1970년대 한국영화가 지니는 간극을 문제시하고, 문자가 아닌 영상을 통해 새로운 세대 감각을 표출하는 데에서 드러났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 영화가 보여준 영화라는 새로운 신체는 ‘훼손당하고 분리된’ 그것이었다. 이전에는 기술의 낙후나 연출의 실패에 의해 우연적으로 등장했던 그것에 하길종은 실험적인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1970년대 영화계의 가장 문제적인 장면은 국가의 과도한, 그렇지만 허술한 간섭이었으며 이 영화는 그것을 흔적으로나마 새겨두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실험에 옮긴다. 그리고 영화에 사용된 대칭을 이루는 카메라 워크는 기존의 문자가 전달하던 의미나 미학적 효과를 완벽하게 대체함으로써 영상세대의 시각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법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점들이 차례로 규명되고 나면 이 영화가 1970년대 영화사 기술의 의미있는 매개항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구조로서의 검열 197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주지하듯 국가의 검열이다. 그런데 이 영화제작에 대한 국가의 검열 정책은 대체로 이전 시기부터 지속되어 온 우수영화 보상제도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검열과 우수영화라는 제도의 결합이 만들어내는 간극이 1970년대 검열정책의 가장 중요한 지점이다. 통상적으로 보여줄 수 없는 것을 규정하는 검열과 보여주고 싶은 것을 선별하는 우수영화라는 겉보기에 행복한 조합은 사실 검열의 작위성을 강화하고 이에 따라 영화의 기형화를 가속화시킨 문제적인 측면이 있다. 우수영화 보상제도는 반공과 경제성장의 거시적인 국가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영화 제작을 장려하고, 여기에 국제영화제 출품과 수상을 통해 국내 영화 발전을 꾀하겠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이 제도의 세 가지 중요한 키워드는 물론 반공의식 고취, 새마을 운동 홍보, 국제영화제 수상이다. 전쟁영화, 그리고 농촌계몽이나 팔도유람 류의 영화가 새로 만들어지고 또 이를 주제로 하는 소설들이 영화화되었다. 특히 세 번째 키워드 덕분에 1960~1970년대 문예영화의 붐이 조성되고 지속될 수 있었으나, 국제영화제 출품은커녕 문예영화가 당시 영화계의 수준을 떨어뜨리는 애물단지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도 사실이다. 반공이나 경제성장이라는 한국사회의 특별한 사정을 프로파간다화 하면서 세계영화 시장에 도전하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전망이었고, 결국 이 제도는 제작보다는 흥행에 관심이 있었던 제작사들의 외화 수입 쿼터를 위한 수단으로 빠르게 전락했다. 곧게 뻗은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청춘이 영화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단골장면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미개봉 ‘창고용’ 문예영화라는 기이한 현상이 유행처럼 번지기도 했다. 이 제도는 분명 자체 내에 수많은 간극과 균열을 지니고 있었으며 따라서 검열주체나 창작주체 모두에게 자의적으로 운용될 수밖에 없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국가의 과도한, 그러나 작위적인 검열에 따른 1970년대 영화계의 기묘한 풍경은 마치 1940년대 일제의 검열에 대한 조선영화의 난망한 반응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최인규의 〈집없는 천사〉(1940)는 검열과 추천영화라는 제도의 역학이 내재하는 모순을 여실히 보여준 하나의 현상이었다. 문부성 추천까지 받은 이 영화가 내지에서의 상영이 돌연 취소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조선의 부랑 아동들을 모아 황국의 신민으로 길러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영화는 시종일관 조선의 부랑 아동들과 이들을 거두어 고아원을 건립하는 조선인 교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마지막 장면에 일장기 앞에서 고아원 아이들이 황국신민서사를 읊고 일본인 의사의 훈시를 듣는 장면이 느닷없이 등장하는데, 추천의 이유는 아무래도 이 장면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내지에서의 상영이 취소된, 즉 검열의 이유는 이 영화의 어둡고 남루한 정조 때문이었다. 조선영화는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기 위해 말해야 하는 것에 습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에는 말하고 싶은 것 역시 전달 불가능한 상황에 맞닥뜨리는 기묘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집없는 천사〉라는 하나의 현상은 검열의 권력이 어느 때보다 강력했으며, 따라서 명백한 기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보다 작위적일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인해 영화의 기형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가 국가 검열에 대처하는 방식은 통상 두 가지가 가능하다. 영화는 국가 검열을 수용하거나, 아니면 저항을 택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알려진 대로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으며, 저항이란 특히 1970년대 한국 사회의 선택지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결국 영화에게 가능한 것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가 우회하는가 정도였다. 반공영화, 근대화된 조국 팔도를 유람하는 영화, 그리고 문예영화 대부분이 전자의 선두에 서 있다면, 희소하기는 하나 몇몇 신예 시네아스트들의 영화가 후자에 해당된다. 사실 우회의 방법이라는 것 역시 결과적으로 검열을 반영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수용의 태도와 구별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영상시대를 주도했던 젊은 영화감독들의 검열에 대처하는 태도에서 몇몇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우회의 한 방법으로 볼 만한 것이 있다. 말은 기꺼이 포기하나, 영상은 절대 포기 못한다는 일종의 영상본위의 태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가장 강렬하게 고수했던 감독은 아무래도 하길종이다. 하길종의 이러한 태도는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새로운 길을 시도하는 데까지 가 닿는다. 집요한 영상본위의 감각을 통해 검열과의 충돌을 직접 영화에 새겨 넣는 방식이 그것이다. 재현 불가능한 것의 재현 감독의 말을 통해서나 당시의 자료와 연구서들을 통해 밝혀진 〈바보들의 행진〉에서 검열당한 장면들 중 중요하게 거론해 볼 만한 것은 시위 장면과 주인공들과 일본인 사이의 몸싸움 장면이다. 그 중 실제로 개봉된 영화에서 이 영화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는 시퀀스의 검열과 검열 대응은 눈여겨 볼만하다. 개봉된 영화에서 이 장면은 ‘강의실-대학 응원연습(연고전 실사)-과거회상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의에 참석한 주인공 영철과 병태는 응원연습 동원으로 인해 휴강하겠다는 교수의 말을 듣고 갈등한다. 함께 나가자는 영철의 제안을 거절하고 강의실에 남은 병태 다음 장면으로 당시 연고전 실사 장면들이 인서트 된 뒤, 병태가 과거 당구장에서 사람들 사이에 믿음이 남아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신문팔이 소년을 두고 영철과 내기를 했던 과거장면으로 플래시 백 된다. 이 장면에서 응원연습은 애초의 시위장면을 대체한 것이라는 정보를 모르더라도, 이 부분은 여러 면에서 부자연스러운 연출 효과가 감지된다. 함께 나갈 것을 종용하고, 결국 혼자 강의실을 나서는 영철의 대사가 필요 이상으로 비장하다는 점, 강의실에 남아 칠판을 지우는 병태가 ‘이상국가’를 ‘사구라(사쿠라)’로 고쳐쓰는 장면, 그리고 이 영화에서 유일한 회상장면으로 등장하는 인간애에 대한 고민 등이 응원연습과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검열 과정에서 시위장면 삭제 요청이 있었다면 응당 시위장면을 연상시키는 내용까지의 삭제를 의미했을 터인데, 여기에 하길종은 달랑 시위장면만을 들어내고 체육대회 실사장면으로 대체함으로써 은폐된 무엇의 존재를 암시하는 효과를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검열로 삭제된 일본인과의 몸싸움 장면에서도 동일하게 반복된다. 스트리킹을 감행한 두 주인공이 다음 장면에서 클로즈업 될 때 둘의 얼굴은 피 흘린 자국이 선명하다. [그림 3] 왼쪽의 시나리오 재심 의견서(1974.12.17.)의 4번 항목은 이 씬의 전부 삭제를 지시하고 있으나, 영화는 오른쪽 수정 이전 시나리오의 강의실 전반부를 그대로 영화화 함. 시위장면을 체육대회장면으로 대체하는 것은 검열주체가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을 충족시켜주는 방식이다. 체육대회는 실제 연고전 실사장면으로 인서트 되는데, 이 체육대회는 명문사학 간의 경쟁의식을 해소하는 하나의 축제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라는 근대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를 실천하는 이벤트로서 국가에 의해 적극 장려된 것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이 어색한 장면들의 병치는 대학과 대학생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의 시선에 대한 응답으로서 검열주체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도 교란시키는 영화적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이 장면은 검열과 보상정책의 명시적 법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임으로써 검열의 권력을 지탱하는 권력주체의 불법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저항의 지점과 방법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적 완성도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러한 편집을 시도할 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의 뉴시네마 운동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가령, 하길종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 그룹의 “우리는 거짓되고 외곽만이 윤이 나는 영화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오히려 덜 매끈하고, 거칠기는 하나 생동하는 영화를 원한다”라는 선언에 힘입은 바 크다 하겠다. 분명 이 부분은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도 보게 만들려 한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시각적 욕망을 극한까지 부추기는 것이다. 물론 보이지 않는 것, 은폐된 그것은 검열의 흔적이다. 하길종은 자신의 영화를 검열로 훼손당한 신체의 표상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관객에게 보여줄 수 없는 불가능한 것을 전달 가능하게 하는 전략을 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의 검열대응이 영화 내적으로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돌발적인 장면인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플라톤의 시인추방론 강의로부터 시작한다. ‘예술이 필요로 하는 허구가 이상국가 건설에 위협이 되기 때문에’ 시인은 추방되어야 한다는 이 논의는 근대의 검열제도로 이어진다. 플라톤의 이원론적 인식론에서 예술은 저급한 모방일 뿐이며, 이데아를 추구하기 위해 유지해야 할 감정의 평형 상태를 깨트리는 예술은 위험천만한 것이기도 하다. 플라톤의 이 시인추방론은 예술이 지니는 상상력과 이미지에 대한 억압으로 근대 이후 예술에 대한 국가의 간섭과 통제로 제도화된다. 영화의 시작 자체가 국가와 예술의 대립을 암시하고, 결국 검열의 흔적이 가장 강한 이 장면에서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사쿠라’로 변형하는 병태의 행위는 검열의 기준에 내재하는 간극을 드러내고 문제시하는 상징적인 의미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이다. 1970년대 한국영화를 돌아보는 하길종의 시선에는 비관적인 인식이 선명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서 영화를 내세웠고, 이를 통해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구하려 했다. 〈바보들의 행진〉이 태어나게 된 데에는 〈별들의 고향〉이라는 선행하는 가능성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이 작품에 대한 평을 마치면서 후반부에 정책과 영화의 관계를 언급하면서 “영화가 없는 혼미한 우리의 현실에서 질서를 찾는 길이란 영화 그 자체밖에 없다.” 1) 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국가의 검열과 정책, 그리고 영화인들의 합의에 기초한 1970년대 한국영화는 하길종이 보기에 비극 그 자체였다. 이 합의라는 지배의 형식에 균열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영화여야하며 그는 〈바보들의 행진〉을 통해 그 가능성을 실험에 옮긴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 〈바보들의 행진〉은 여러 면에서 암시적인 측면을 지닌다. ‘바보’와 ‘행진’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역설적인 의미가 여전히 회자되고 있으나, 사실 이 영화가 개봉하기 한 해 전에 개봉된 영화진흥공사 제작 국책 새마을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아내들의 행진〉(임권택, 1974)을 떠올리게도 한다. 소설 『바보들의 행진』이 국책영화 〈아내들의 행진〉에게 빼앗길지도 모르는 권리를 영화가 다시 찾아오고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패러디라고 볼 만하다. 자기검열의 훼손 실험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저항으로 편협하게 인식할 필요는 없다. 〈바보들의 행진〉에게 〈별들의 고향〉이 그러했듯이, 새로운 영화의 가능성을 견인해주는 역할이면 된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영화의 가능’이다. 그것은 영화의 개발을 통해 진리에로 접근하고자 하는 끈질긴 영화의식과 작가정신을 바탕으로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2) 라는 말을 참조한다면 하길종에게 영화의 새로운 가능성은 금기와 배제의 원리가 만들어놓은 한국영화의 간극을 지속적으로 문제시할 수 있는 것, 그리고 그 간극이 곧 영화가 되어버릴 순간에 대한 기대였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영화의 검열은 세 가지 차원으로 존재한다. 가장 직접적으로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검열, 그리고 관념론적인 검열이 그것이다. 정치적 검열이 배급을 훼손하고, 경제적인 검열이 생산을 훼손한다면 관념적이고 도덕적인 검열, 즉 자기검열은 창작 자체를 훼손한다. 3) 이 세 검열은 사실 서로 밀접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나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검열의 유착관계에 비해 관념론적인 검열의 해방 가능성은 다소 열려 있다. 하길종이 선택한 방식은 적어도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검열의 흔적을 영화의 신체에 새겨 넣음으로써 스스로 관념론적 자기검열을 파기하는 실험을 감행한다 볼 수 있다. 1. 하길종, 「영화단평_별들의 고향」(출처미상), 『하길종전집2_사회적 영상과 반사회적 영상』, 한국영상자료원, 2009, 206쪽. 2. Loc. Cit. 3. C. Metz, 김수진 역,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1』, 문학과지성사, 2011, 27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