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가 우물에서 나왔을때
- 감독
- 이선주
- 제작년도
- 2002
사진: Marry Ellen Mark, “ Apocalypse Now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 지옥의 묵시록 >(1979)은 당시 일본 개봉 제목 ‘地獄の黙示録’을 그대로 활용해 번역되었으나, 원제 ‘Apocalypse Now’는 사실 ‘바로 지금 이곳이 지옥’ 또는 ‘지금 이 순간이 세상의 종말’이라는 처연한 고발, 좌절, 참회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개봉한 지 무척 오랜 시간이 흘렀고(감독 확장판(Redux, 2001)을 기점으로 해도) 이후 직접적 영향을 받은 수작들이 여럿 등장했음에도, 여전히 ‘탁월한 전쟁 영화 중 하나’ 정도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지옥의 묵시록>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넘어 문명과 야만, 이성과 광기, 그리고 예술과 역사-현실의 경계를 짓이기는 정교하며 무자비한 실험이다. 이 영화는 내게 전쟁의 잔혹함을 넘어, 소리와 이미지가 어떻게 관객을 사로잡고 내면의 심연을 드러낼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는 음악을 비롯한 창작 작업의 범위를 넘어 내 삶 전반에 깊이 스며들었다. 영화는 문명의 야만을 파헤쳤다고 평가받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어둠의 심연(Heart of Darkness)』(1899)을 기반으로 하지만, 식민 시절 콩고에서 베트남 전쟁으로 배경을 치환한 단순한 서술적 흐름에 기대지 않는다. 몽환적인 편집과 공간을 압도하는 사운드 디자인, 그리고 음산하게 폭발하는 음악들이 혼재하며 관객을 전장의 무질서 속으로 밀어 넣는다. 스무 살 무렵 친구의 강권으로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영화를 통해 감각적으로 압도되는 경험을 했다. 특히 록 밴드 더 도어스(The Doors)의 <The End>(1967)가 흐르는 오프닝 시퀀스에서, 불타는 정글 위를 비행하는 헬리콥터 프로펠러 소리와 주인공 윌라드 대위(마틴 쉰)가 머무는 숙소 천장팬의 움직임이 하나의 악보처럼 맞물릴 때, 나는 영화 속에서 음악이 보조적 역할을 하는 배경음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심리적 공간을 창조하는 도구임을 깨달았다. 불타는 정글과 헬리콥터, 천장팬, 그리고 윌라드 대위가 겹쳐지는 영화 초반부 영화 속 서사의 시작점인 커츠 대령(말론 브란도)은 니체적 의미에서 초인적 인물로 그려진다. 영화 전체를 기준으로 무척 적은 분량인 그의 대사는 한 음절 한 음절이 묵직한 무게를 공유하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공포는 얼굴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공포와 친하게 지내야 해(Horror has a face... and you must make a friend of horror.)”라는 그의 읊조림은 전쟁터의 참혹한 현실만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를 암시하며 질문한다. 영화에서 음악은 영상의 보조재가 아니라 핵심으로 자리하며 인물들의 심리, 이념, 광기를 대변한다. 헬리콥터 부대가 민가를 향해 무차별적 공격을 퍼붓는 유명한 장면에서 흐르는 바그너의 <발퀴레의 기행(Ride of the Valkyries: Prelude to Act III)>은 단순한 감정 고양의 장치가 아니라, 전쟁 자체를 하나의 장엄한 스펙터클로 완성하며 폭력에 대한 고발과 창작-예술의 경계, 동시에 오락 산업으로서의 영화라는 뒤엉킨 모순적 현실마저 깨진 거울마냥 선연하게 드러낸다. 커츠 대령, <발퀴레의 기행>이 흐르는 전투 장면 (사진: "Apocalypse Now"( 1 , 2 , 3 ), IMDb) 모임 별은 지난 25년간 소속이 없는 독립적인 밴드이자 브랜딩/디자인 스튜디오로 활동해왔다. 우리 팀은 분명 통상적인 영화음악 감독은 아니지만,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에 참여한 이후 꾸준히 학생 영화, 실험 영화, 저자본 영화 작업들에 참여해 왔다. 가능한 상업적 시스템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인 방식으로 활동하기 위해 애써온 우리에게, <지옥의 묵시록>의 제작 과정에서 감독과 출연진, 스태프가 함께 만들어낸 예측 불가능성의 미학과 실험 정신은 여전히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다. 최근 담당한 영화 < 폭설 >(윤수익, 2023)에서는 서퍼들의 몸을 때리는 차디찬 겨울 파도소리와 낡은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들에서 뽑아낸 극한적 소음들을,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에서는 클래식 기타 연주와 랜덤 알고리즘 베이스의 VST 악기 패턴들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꾸준히 작은 실험들을 수행 중이다. 귀를 사로잡는 음률 보다는 반복되는 패턴 속에 미묘하고 예측 불가능한 변화를 주어, 청자가 음악을 뚜렷이 인식하지 않는 상태로 영화 속 서사에 보다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식이다. <폭설>과 <힘을 낼 시간>의 음악 (이미지 클릭) 짧지 않은 세월이 지나 돌아보니 ‘업계 표준’에서 벗어난 활동 방식과 작법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았다. 그럼에도 오랜 기간 다양한 예술가들, 기관, 기업들과 함께 예술, 상업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올 수 있었던 데는, 새로운 시도들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진 여러 실무 담당자의 고마운 배려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우리 또한 새로이 작업을 시작하는 독립적인 젊은 예술가들과 기획자들에게 작게나마 실질적 도움이 되기 위해 이런저런 노력을 하고 있고, 새삼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다짐한다. 코폴라는 <지옥의 묵시록>을 만들며 마주한 끊임없는 문제와 막대한 혼돈을 고스란히 작품 안에 담아내며 영화를 완성했다. 불확실성과 모순의 한복판에서 탄생한 작품은 단순한 작가의 종속물, 재현물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의 온전한 실체가 되었다. <지옥의 묵시록>이 없었다면, 내가 음악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이다. 혹시라도 아직 영화를 감상하지 않으신 분이 있다면 1979년의 최초 개봉 버전, 2001년 공개된 리덕스(Redux), 2019년 파이널 컷(Final Cut) 중 단연 리덕스 를 추천드린다. 조태상(모임 별 작곡가, 디자이너) l 모임 별( Byul.org )은 우연히 만난 친구들의 술자리 시낭송회에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여전히 친한 친구들의 술모임이며,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며 녹음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들의 일상을 기록 중이다. 김경렴, 서현정, 최원겸, 황소윤, 오태경, 김수빈, 조태상, 장용석, 이선주로 구성되어 있다. 조태상은 모임 별에서 작곡과 디자인을 담당한다. 2012년 정규음반 <아편굴 처녀가 들려준 이야기>, 2017년 <밤도깨비들을 위한 선곡집>, 2019년 <주인 없는 금>, 2024년 <우리 개> 등을 발매했고, < 고양이를 부탁해 >(정재은, 2001), < 힘을 낼 시간 >(남궁선, 2024) 등의 영화에 음악 작업으로 참여했다.
한국영화사의 비평세대는 비평의 ‘주체’와 ‘주요비평담론’, 그리고 ‘비평매체’와 이들을 둘러싼 영화산업의 역사적 맥락 등에 따라 구분될 수 있다. 1950년대는 한국영화사에서 비평집단의 조직화가 시작된 시기였다. 활동은 미미했지만 1950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출발한 ‘영화평론가협회’를 필두로 전후비평이 시작되었고, 1957년 일간지 연예담당 기자들을 중심으로 ‘시네펜클럽’이 결성되었으며 1950년대말에서 1960년대초는 ‘일간지 영화평의 최전성시대’였다. 樹( 임영 ), 雄(임영웅), 秀(최일수) 明( 이명원 ), 湖( 호현찬 ), 振(김진찬), 植(신우식), 軒(황운헌), 英( 정영일 ) 등 신문에 고정란을 두고 자신의 이니셜을 새겼던 이들은 영화비평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지만 일간지 중심의 저널리즘 비평은 본격적 담론을 이끌어내기엔 한계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중흥과 함께 <신영화>, <영화세계>, <국제영화>와 같은 영화잡지들이 발간되면서 비평지면이 늘고, 비평적 실천의 대상인 한국영화 자체도 더욱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영화와 지면(매체)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비평은 텍스트중심의 비평보다는 위기에 봉착한 영화계의 현실을 진단하고 정책제언을 하는 시평이나 인상비평이 많았다. 국산영화 면세조치 이후 해마다 제작면에서의 양적 급증이 있었지만, 산업적으로나 제도적, 기술적으로 미비한 상태에서 전후의 공백을 메우고 세계영화의 흐름에 조응하는 ‘새로운’ 담론이 필요했다. 전후 한국사회 곳곳에 세계주의, 실존주의가 확산되던 이 시기에 유두연 은 한국영화 부흥의 허약한 ‘이면’을 강조하며 ‘한국영화 위기론’(경향신문 1956년 상반기/연말 결산 연재기사)을 역설하고, 네오리얼리즘을 모델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을 주창했다. 1950년대 활발한 활동을 했던 몇몇 비평가들( 허백년 , 오영진 , 이봉래 등)과 마찬가지로 그는 일본의 대학에서 서구문학이론을 전공했고, 30여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 유혹의 강 >(1958)으로 감독데뷔 후 총 8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조춘 > 1959, < 카츄샤 > 1960 등). 이전 시대의 비평가들과는 다르게 전후 평론가들은 전근대적 한국영화를 비판하거나 문제제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스스로 시나리오를 쓰다가 연출 및 제작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유두연은 군정청 예술과 근무나 조선영화사 간부 이력에서 드러나듯 시스템이나 정책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높았다. 그는 국제영화제 진출을 문화교류나 예술성 획득의 측면에서만 강조하는 게 아니라 협소한 내수시장의 한계를 해외시장의 개척으로 돌파해야 한다는 예술과 산업의 균형발전 시각에서 일찌감치 접근했다(경향신문 1955년 1월 23일 ‘영화의 예술?상업성’). 또한 유두연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반영한 “오리지날 씨나리오에 의한 현대극영화”가 위기의 한국영화가 나아갈 방향이라고 주장하며 빠른 템포의 현대극 멜로물을 주로 만들어 ‘전후 멜로드라마의 초석을 닦은 작가’로 평가되기도 했다. 1957년 2월 <영화세계> 특집이었던 ‘코리안 대 이타리안리즘의 비교’(필자: 유두연 , 허백년 , 황영빈 )는 ‘코리안 리얼리즘’이 네오리얼리즘을 어떻게 선택적으로 굴절 및 변용시키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네오리얼리즘을 매개로한 코리안 리얼리즘이 이전 시기 한국의 리얼리즘 담론전통과 어떤 지점에서 개념적, 이데올로기적 단절의 선을 긋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한국의 네오리얼리즘 수용시기가 이미 사조자체가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던 1950년대 초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초기작(< 자전거도둑 >, < 무방비도시 > 등)을 선택적으로 정전삼아 수용하는 과정 속에서 비평가들이 이상적으로 상정했던 ‘한국적’이고도 ‘새로운’, 또한 ‘로컬’하면서도 ‘글로벌한’ 리얼리즘의 모습이 드러난다. 유두연이 1954년 네오리얼리즘을 소개하던 글(‘영화기법의 신경향: 네오 레아리즘에 관하여’)의 경우에서도 다큐멘터리적인 방법론이나 스타일적 요소보다는 “전후의 긴박한 사회정세에 대한 영화작가의 현실직시 정신”이나 이태리문화의 전통적 특질에 기반한 “지방주의”에 주목했던 것은 본격적 논의라 할 수 있는 3년 후의 ‘코리안 리아리즘 단상’과도 연결된다. 유두연 은 영화예술에 있어 리얼리즘을 외형적인 측면(방법론, 스타일)과 내면적인 내용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외형적 리얼리티에 대한 논의는 “카메라 렌즈의 리얼리티”로서 간단히 전제하고 “이타리안 리얼리즘의 작가정신에 대한 동경”을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인 리얼리즘담론과 연관짓는다. 그는 일제시대 나운규 의 < 아리랑 >, 이규환 의 < 임자없는 나룻배 >의 저항정신과 해방 후 < 자유만세 > < 마음의 고향 > 등에 산발적으로 계승되던 리얼리즘의 전통을 전후의 한국영화가 상실한 상태에서 이태리 작가들처럼 “코리안 리아리즘도 오늘의 현실(“네오적”)과 대결하는 인간의 진실을 내용으로 해야만 한다”고 하면서, 한국영화의 주류적 성격을 “레지스땅스 의식과 로칼 칼라의 스타일”로 규정한다. 또한 그는 지방주의와도 연결되는 로칼 칼라 스타일은 한국영화의 국제적 진출에 있어서도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한국적인 동시에 세계, 이것이 궁극의 목표이고 영화의 마음이요 예술의 마음일 것”) 이렇듯 유두연 이 제창한 코리안 리얼리즘은 네오리얼리즘을 동경했던 전후 비평가들의 세계화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이상적 담론이자 대안이었다. 그러나 코리안 리얼리즘은 현실에 대한 저항의 ‘내용’을 포함했으되 다른 제 3세계 국가들에서처럼 유물론적 방법론이나 미학, 정치적 실천 및 운동 등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또한 네오리얼리즘 감독 중 급진적 맑시스트였던 비스콘티의 작품은 수입이 금지된 채 데 시카와 로셀리니의 일부 작품들이 수용되고 상찬된 것에는 전후의 비평들과 리얼리즘 담론이 이전시기 한국의 좌파 리얼리즘을 배제시키고 선택적으로 계승한 것과 유사한 한계가 드러난다. 비평의 장에서 이러한 (우파) 민족주의적 리얼리즘 담론의 지배는 1960년대로 가면서 더욱 고착화된다. / 글: 이선주
“우리는 아직껏 이 땅에 영화는 있었어도 영화예술은 부재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영화부재’의 책임을 미래의 우리들 스스로에게 묻고자 한다 …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 이것은 구각을 깨는 신선한 바람, 즉 무덤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이어야 한다. 과연 이 땅에서 단 한번의 ‘누벨바그’나 ‘뉴 시네마’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영상시대’ 동인 선언문 中, 1975.7.18) ‘한국영화의 예술화운동’을 기치로 내건 ‘영상시대’는 다섯 명의 영화감독( 김호선 , 이원세 , 이장호 , 하길종 , 홍파 )과 한 명의 평론가( 변인식 )로 구성된 30대 소장 영화인들의 동인회였다. 변인식은 일찍이 ‘비평가의 자세’란 “영화제작에 영향을 끼치고 관객들의 감상수준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영화평단은 자유항인가: 비평의 모랄과 순수성’ <영화예술> 1965년 12월호) 그는 ‘단문(短文)의 인상비평’이나 ‘사이비 논객’ 이 횡행하는 기성평단의 평론을 신랄하게 비평하거나 수작으로 평가되던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 글쓰기(‘< 안개 >는 예술영화인가’, ‘< 장군의 수염 >과 영화의 본질’ 등)를 함으로써 크고 작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참여했던 ‘< 화분 > 논쟁’(‘영화적 색맹성: 영화 <화분>이 제기한 문제들’)은 당시 큰 이슈가 되었음은 물론, 한국영화비평사의 주요 논쟁을 넘어 이후 『한국논쟁사』 에 실릴 정도였다. 변인식 은 청소년기 미군부대 근처에 살면서 봤던 할리우드 영화들과 고교시절 스승의 소개로 프랑스• 이탈리아 명화들을 접한 후 영화광이 되었고, 대학시절 4•19를 경험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는 고려대 국문과 재학중 ‘영상’이라는 동인회를 조직하고 <고대신문>에 영화평을 기고하는 한편, 유현목 , 이강천 등의 감독과 이영일 같은 평론가를 초청해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변인식은 이영일이 발행했던 <영화예술>의 신인평론가 추천으로 등단후(‘영화현실과 포토제니: 이탈리안 리얼리즘과 한국영화’ 1965.6,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 1965.7) 활발한 활동을 하던중, 1968년 서울신문의 제 1회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한국 문예영화의 허점’으로 당선된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산업의 확대와 매체의 증가로 영화평론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했던 한편 비평의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영화전문잡지의 추천과 신춘문예라는 공인된 절차를 두루 거친 첫 번째 평론가였던 셈이다. 변인식은 수십년간 한국영화평단을 함께 이끈 이영일, 김종원 등과는 다소간의 데뷔시차와 이력의 차이가 있다. 이영일, 김종원이 문학에서 출발해 1960년대 이후 <영화예술>,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의 주축멤버로 오랜 파트너십을 보여왔다면, 그는 영화인생 내내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38년간을 재직해왔고, 1960년대부터 비평활동을 시작했지만 1970년대 들어 더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또한 대학내에서 영화 써클을 만들고 서구영화에 매혹되며 비평과 토론회 등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했던 씨네필 출신 평론가의 첫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인식 은 부조리한 한국영화의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글쓰기로 1972년 한국 최초의 본격영화평론집 『영화미의 반란』을 출간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한국영화가 반세기의 역사를 지났음에도 단 한번도 영화미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거나 반역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없었다는” 점을 개탄한다. 이는 전세계의 영화들이 ‘새로움’으로 물결치고 있던 1960•70년대에 최악의 현실로 치달아 가고 있던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에 대한 젊은 평론가의 가차없는 성찰이었다. 이 무렵 그는 소장파 대학교수, 평론가, 저널리스트 20명 정도로 구성된 ‘현대영화비평가그룹(1972년 12월)’을 창립하고 회장직을 맡는데, 이는 하길종 의 < 화분 >의 청룡상 심사를 둘러싸고 보수적인 기존 영화평단과 발생했던 갈등으로 인해 뜻을 같이하는 젊은 동조자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인식은 또한 1970년부터 발족된 ‘소형영화동호회(발기인: 유현목 , 하길종, 정일성 , 유영길 , 변인식, 최일수)’ 활동을 통해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신일고의 영상을 담은 8mm 교육문화영화 두 편을 각본•감독했다(1972). 소형영화동호회를 통해 배출된 영화감독으로는 배창호 , 장길수 , 신승수 감독 등이 있다. 1975년 누벨바그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상적 모델로 ‘한국영화 예술화’를 내걸었던 ‘영상시대’ 동인들의 활동은 다양한 방면(신인 연출자/연기자/스탭 선발, 관객운동, 순수영화예술동인지 발행 등)에서 ‘새로운 물결’을 갈망하며 한국의 영화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변인식 에 따르면 1975년에서 78년까지 ‘영상시대’ 기간 동안 동인감독들이 만든 작품 11편중( 하길종 < 여자를 찾습니다 >, < 한네의 승천 >, 이장호 < 그래그래 오늘은 안녕 >, < 너또한 별이 되어 >, 김호선 < 여자들만 사는 거리 > < 겨울여자 > 등) 대다수가 대중소설을 영화화했고, 그들이 지향했던 예술영화, 작가영화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변인식이 발행인이었던 계간지 <영상시대>(1977년 여름 창간, 편집위원: 김승옥 , 김화영, 안병섭 , 최인호 , 하길종) 또한 <카이에 뒤 시네마>나 <필름 컬처>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영화문화운동을 꿈꿨지만 2권 발행에 그치는 좌절을 겪었다. 1970년대 ‘영상시대’의 영화운동에 대한 영화사적 평가는 지면을 달리해 논의되어야겠지만 이들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는 당대 한국영화계가 직면했던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예술과 산업’, 그리고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의 딜레마들이 존재하고 있다. 변인식 은 왕성한 필력으로 40여년 동안 두 권의 평론집(『영화미의 반란』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과 수십 편의 논문을 쓰고, 현대영화비평가그룹 회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 ‘영상시대’ 동인활동과 잡지<영상시대> 발행, <영화평론> 발행, 한국소형영화동호회, 동서영화연구회, 대학강의, 영화제 심사위원 활동 등을 하면서 2000년 신일고등학교의 교감으로 명예 퇴임했다(홍조근정훈장 수상). 제자들에 따르면 교단에서의 변인식은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액션 배우이자 영화이야기꾼, 한 마디로 ‘영화에 미친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서구 모던 시네마와 이론들의 강렬한 세례를 받은 변인식 의 비평세계가 한국의 대중적 장르영화들을 논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다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변인식을 비롯한 ‘영상시대’ 동인들이 제기했던 ‘새로움’의 의의와 한계, ‘한국적 리얼리즘’ 전통과의 단절과 지속의 역사성은 1970년대와 이후 영화(비평)사를 구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주의적(씨네필)이고 객관적인 비평을 추구했던 그의 비평을 관류하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과 논쟁적 글쓰기, ‘영화미학’에 대한 천착 등은 주제비평과 인상비평이 주류를 이뤄온 한국영화평단에 비평정신이 살아있는 글쓰기로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 글: 이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