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일과 심순애
- 감독
- 김달웅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신성일, 김지미, 김승호, 허장강, 김동원, 추석양, 조항, 유계선, 정애란, 방성자, 이향자, 박지현, 표만성, 전갑례, 장미연, 최은연, 임해림, 최준, 유관홍, 임운학, 지방열, 공시훈, 최삼, 박순봉, 윤일주, 이창식, 석귀녀, 김성숙, 지계순
영화에서 사라진 위대한 전통 중 하나는 변사(辯士)일 것이다. 물론 인간문화재처럼 기예를 갖추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가 되어가고 있다. 토키영화는 그들을 무대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걸 늘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일제강점하 식민지의 유산이기도 하다. 영화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온 변사는 일본영화의 발명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변사라는 말 대신 가쓰벤(活辯)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가쓰벤이 언제 나타났는지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쓰벤은 그 전통이 17세기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림과 이야기를 하나의 화폭에 담는 에도키(繪解)의 전통이 나타났고(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일본 불교화의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 다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에도키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읽기만 했지만 점점 더 거기에 감정을 담고 심지어 자기가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에도키가 곧장 영화로 넘어온 것은 아니다. 분라쿠 인형극이 진행될 때 그 곁에 사미센 연주자들과 함께 해설자들이 앉았다. 그들은 단지 인형의 대사만을 낭송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여러 명의 해설자가 앉기도 했지만 진정한 대가는 혼자서 여러 인형의 목소리를 번갈아가면서 낭송했다. 이 전통의 섬세한 구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영화사의 순간은 가쓰벤의 고고학이 아니다. 어쩌면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온 20세기 초의 일본 관객들에게 가쓰벤의 존재는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될 때부터 가쓰벤은 무대에 함께 올라왔다. 심지어 일부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입담 좋은 가쓰벤들이 일종의 여흥으로 재담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쓰벤의 존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영화의 자막을 구태여 번역할 필요 없게 만들면서 경제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영화가 점점 대중의 관심을 모으자 점점 더 많은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가쓰벤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열렬한 관객들은 같은 영화를 다른 가쓰벤의 공연으로 보기 위해 구태여 찾아가기도 했다. 일본 영화사는 위대한 가쓰벤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공연(!)은 1912년 요코다상회(橫田商會)에서 제작한 <곤자키야샤(金色夜叉)>를 혼자서 낭송한 가쓰벤 쓰치야 쇼토(土屋松濤)의 무대라는 데 일본영화사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곤자키야사>는 말 그대로 ‘돈 귀신’이라는 뜻인데, 오자키 고요가 요미우리신문에 1897년 1월 1일부터 1902년 5월 11일까지 연재한 대중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조중환이 번안해 「장한몽」으로 소개했다. 좀 더 간단한 설명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수일이 사랑하는 여인 심순애가 돈 많은 김중배에게 시집을 가자 “김중배의 다이야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라고 한 다음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해 복수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신파. <곤자키야샤>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가쓰벤 쓰치야 쇼토는 “칠색음(七色音)이라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인물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 감미로운 음성으로 관객의 넋을 빼놓다가 하지마 간이치(말하자면 이수일)가 비통하게 죽어가는 연인 시가사와 미야(말하자면 심순애)에게 후회를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절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쓰치야 쇼토의 공연을 담은 기록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토키영화의 등장으로 가쓰벤은 설 자리를 잃었지만 아직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여성 가쓰벤 아소코야타(麻生子八咫, 사진2)와 그의 아버지 야소야타 (麻生八咫, 사진1) 의 공연 모습 일본에서 가쓰벤은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첫 번째 토키영화 < 재즈싱어 The Jazz Singer >(앨런 크로슬랜드)가 미국에 등장한 1927년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가쓰벤이 6,818명이었며, 그중 180명이 여성 가쓰벤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명하면서 한편으로 그 자신의 역사를 살해했다. 영화사의 순간들은 언제나 그렇게 섬광처럼 지나갔다. (계속)
신파는 한국 영화의 척추다. 아무리 성형수술을 가해도 척추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그만큼 신파는 그가 출현한 시점부터 100년을 반복해왔다. 더 이상 신파는 싫고 좋고의 문제도 아니다. 마치 한국인의 밥상에서 된장찌개가 무한 반복되듯이, 신파는 한국영화판에서 무한 반복된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신파를 대하는 가장 모범적인(혹은 가장 ‘모던한’) 태도는 그러한 신파의 반복성을 비웃는 일이 되어버렸다. “또 신파야?”라고 비웃으면 그만이다. 그 모든 눈물과 운명의 신비에 나도 모르게 감응하는 본능적 반응에 대해서 여타의 지성적(다시 ‘모던적’) 해석과 변명을 꾸며댈 수고를 스스로 덜어내며, 그저 비웃으면 그만인 게다. 하지만 그처럼 잘도 반복되는데, 한낱 비웃고 말면 그만일 구닥다리 인습에 불과할까. 무한루핑되는 된장찌개가 한국 혼의 척추이듯, 신파는 또 그렇지 아니할까. 신파의 핵심은 모던인들이 비웃는 바로 그 반복에 있다.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확인되는, 신파의 짐짓 ‘모던한’ 정의는 ‘개연성 없는 감정의 과잉 반복’이다. 다시 말해보면, 신파는 ‘개연성의 공백을 채우는 감정의 반복’이다. 이 정의를 하사해주신 모던인들에게 감사드린다. 하지만 모던인들께서 하나 잊은 게 있다면, 바로 그 개연성의 출처다. 신파에서 개연성이 없는 이유는 그것이 정말 없어서가 아니라, 여기에 없고 딴 데 있기 때문이다. 즉 이 땅에 없고 저기 저 하늘에 있어서다. 왜냐하면 신파에서 모든 사건을 이끄는 것은 다름 아닌 운명, 즉 천명(天命)이기 때문이다. 신파의 진짜 주인공은 하늘이다. 신파극에서 망막에 진물이 날 때까지 반복되는 하늘의 이미지를 다시 떠올려보지 않더라도, 기실 신파를 볼 때 가장 신비로운 점은, 죄는 있는데 죄인은 없다는 사실이다(그리고 바로 이 역설을 가장 첨예하게 밀고 나갈수록 좋은 신파극이 된다). 김중배의 다이아몬드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엇갈렸을 이수일과 심순애 때부터 그랬다. 이수일과 심순애가 죄인이 아닌 것처럼, 김중배와 심순애의 어머니도 악인은 아니다. 그들은 단지 악역일 뿐이다(그들에겐 나름의 사정이 있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뉘우치기까지 한다). 실상 신파에서 진짜 죄를 짓는 것은 하늘이다. 하늘은 운명적 사랑을 개시한 진짜 범인이다. 신파의 인물들이 죄지은 적도 없이 고통받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다시 한번- 이걸 잘해야 안타까움은 배가되고 좋은 신파극이 된다). 그들은 하늘의 잘못 때문에 상처받고, 하늘의 죄를 뒤집어쓰는 자들이다. 이 모든 것이 현대신파극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 미워도 다시 한번 >( 정소영 , 1968)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딱히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미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시작한 남녀가 있다. 그리고 그 나름 생의 무게 때문에 “나예요? 저 여자예요?”라고 운명의 선택을 강요하는 본부인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들을 갈라놓고 또 각자 가둬놓는 침묵과 투명성, 공기의 벽들이 있다. 그들은 하늘에 감금되어 있다. 실상 두세 명의 인물들이 엇갈리게, 혹은 서로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정소영의 샷은 한국 신파(막장드라마 포함)가 앞으로도 부단히 참조하게 될 하늘감금샷의 원조다. 정소영은 하늘감금샷의 끝판왕도 발견한다. 그것은 바로 희망고문의 이미지다. 운명에 의해 시골어촌으로까지 유배당한 여인을 진정 가둔 것, 또한 그녀가 기다림과 노란 풍선으로 채워나가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이다. 한국신파는 하늘감옥으로 정의된다. 하늘이 잘못했네. 이것이 신파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반응이다. 그런데 분노를 거두기엔 아직 이르다. 더 얄미운 것은 잘못을 해놓고 또 그것을 애써 고쳐보려고 하는 놈도 하늘이란 사실이다. 신파의 하늘은 병 주고 약 주는, 우주의 에너지 자체다. 개연성 없는 사건의 해결과 진전? 개연성은 바로 그 하늘의 보이지 않는 약손에서 온다. 이 엄청난 약손을 거의 최초로 선보였던 장일호 감독의 < 사랑하는 사람아 >를 보라. 양색시였던 어머니의 혈통 때문에 연인이 파혼되자, 어머니가 돌연사하고 남자의 본처가 돌연사하고 아버지가 돌연사하고... 사건의 심화와 갈등의 해결을 위해 갑자기 뒷목을 잡고 쓰러지는 이러한 인물들에게서, 저승사자가 되어버린 하늘이 아니라면 그 개연성은 당최 무엇일쏘냐. 하늘의 폭력적 개입, 자연(自然)의 돌연(突然)으로의 변신, 이것이 <사랑하는 사람아> 연작으로 장일호 감독이 한국신파극에 남긴 엄청난 유산(막장 드라마로까지 이어지는)이다. 하늘은 제멋대로다. 제멋은 모든 운명의 조각을 맞추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맵시도 알지 못한다. 실상 한국 신파영화는 하늘의 위대한 변주들이다. < 엄마 없는 하늘 아래 >( 이원세 )에서 지평선을 대들보로 해서 만든 하늘감옥이 그렇고, < 만추 >( 김수용 )에서 연인마저 낙엽으로 만드는 가을바람이 그렇다. 병도 주고 약도 주는, 또 감옥도 되고 집도 되는 공기(空氣)는 신파극의 진정한 주연이다. 신파에서 진정 반복되는 것은 바로 그다. “개연성 없는 과잉감정”이 아니라. 신파는 하늘이 그 자신만의 법률을 제정하는 과정이다. 신파극 인물들은 수동적이지 않다. 바로 이 제헌과정에 참여하여 그를 몸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하늘은 팔다리가 없다. 심순애와 이수일의 팔다리를 빌어야 한다. 신파극은 하늘의 자율성(말 그대로- 스스로 다스림)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신파극의 소중한(동시에 독특한) 계승은 이송희일 의 작품들일 게다. 이송희일 영화는 한국사회의 육체적이고 정신적 법규들을 가로지르는 가장 끈적이는 바람에 도전하고 있다(< 후회하지 않아 > < 백야 > < 야간비행 >). 이송희일은 젠더의 자율성이다. 난 잘 모르겠다. 모던인들이 신파를 비웃는 이유를. 반대로 그들은 비웃는 통에 하늘과 땅을 혼동한다. 그들은 대지 위에서의 감정의 반복을 말하지만, 실상 신파에서 먼저 반복되는 것은 하늘이다. 한국신파에서 감정은 반복되기보다는 바로 그 반복을 “버티는 힘”이다. 하늘이 자율성의 원환을 완성할 때까지 병 줌과 약 줌을 버티고, 감옥과 집을 버티는 힘. 버팀도 밉다면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대 모던인의 밥상에도 된장찌개는 오늘도 버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