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Love U
- 감독
- 이숙균
- 제작년도
- 2010
갈등의 민낯을 보는 일은 어렵다. 사랑하기 때문에, 미워하기 때문에, 일궈온 것이 무너질까 무섭기 때문에, 과오를 인정하는 것이 괴롭기 때문에, 부끄러운 모습이 드러날 것 같아 불안하기 때문에 등등으로 갈등 상황 및 그 안의 사람들을 마주하는 일은 미뤄지거나 외면당하기 일쑤다. 그러나 2018년 두 편의 다큐멘터리 < 핑크페미 >(남아름)와 < 길모퉁이가게 >( 이숙경 )는 갈등의 역사 속에서 헤쳐가야 할 문제를 응시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페미니스트를 엄마로 둔 감독이 가족사를 되짚으며 페미니즘과 자신의 관계를 탐색하는 <핑크페미>는 여러모로 깨는 작품이다. 헌신적인 엄마와 철부지 자식의 구도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는 일찍이 사회활동을 통해 자아실현을 꾀했으며, 초등학생 때부터 딸은 자식을 위해 대기하는 엄마의 모습을 요구하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다. 이 영화는 여성이기 때문에 분홍 리본 달린 공주 옷을 입었던 시절 대신 페미니스트보다 공주병으로 불리는 편이 사회적으로 낫다는 것을 체득했던 시절을 가진 청년의 이야기다. 페미니스트 엄마를 상대로 살아온 딸의 투쟁기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녀에게는 페미니즘의 부재가 아니라 너무 무거운 페미니즘의 역사가 문제였던 것이다. 감독이 엄마와 함께 오랜 회포를 푸는 과정에서 우리는 두 가지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 첫 번째는 우리사회에 지속해온 페미니즘 역사와의 반가운 만남이다. 한국사회에는 엄마의 역할을 우선시 하라는 것은 남녀차별이라고 어린 딸에게 말하며 세월을 헤쳐 온 쎈언니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거인 같은 엄마의 역사를 딛고 진격하는 딸의 역사다. 여유롭게 대화에 임하는 엄마 앞에서 울먹이며 그간의 사정을 고백하는 딸이 있다. 마냥 기대고 싶은 사람에게서 지극히 이성적인 태도를 요구받는 것은 매우 야속한 일이고, 신뢰하는 대상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위치에 서는 건 자기를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앞에 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울먹거림과 함께 조목조목 나오는 딸의 이야기에는 진실한 용기가 담겨 있다. 위험을 각오하고 자기 역사의 거인 앞에 선 자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핑크페미니스트’는 엄마에게 딸로서의 자기를 고백하는 한편 엄마의 그늘에 있기를 경계하면서 스스로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자신을 껴안고 주체적으로 페미니즘을 질문해간다. 역사는 우리를 가르치고 억압하고 좋고 나쁜 여러 영향력을 행사한 우리의 조건 중 하나다. <핑크페미>는 이런 역사의 자산 및 도전의식과 함께 다시 커나가는 존재의 힘에 대한 호기로운 보고서다. <길모퉁이가게>는 사회적 기업의 일원인 청년들과 기업을 이끄는 수장을 소개하되 이들의 사연을 파고들지는 않는다. 영화에서 응시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 기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이끌어 가는 시간 속에서 ‘사회’와 ‘기업’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이다. 정규 학업 과정에 적응하지 못했거나 그 과정을 거부한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도시락 제조 기업 ‘소풍가는 고양이’는 두 가지 과제 수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것은 멤버들이 사회적 관계 안에서 스스로 또 함께 성장해가는 것, 그리고 기업의 운영이나 문화가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저런 불안정한 운영상황에 직면하여 이를 극복하기 위한 ‘소고’의 노력은 매출 증가라는 목표를 향하게 되고, 이러한 기업 성장은 역설적으로 그들이 애초에 꿈꿨던 성장의 위상을 위태롭게 한다. 영화는 조용하게 ‘소풍가는 고양이’의 세월을 따라가는 것만 같지만 작고 세세한 긴장과 변화의 국면을 놓치지 않는다. 웃으면서 하는 회의지만 그것은 회사에 어떻게 기여할지 이야기해야 하는 잔인한 자리기도 하다. 전문 인력이 들어오고 효율적이고 철저한 서비스 관리가 시작되지만 이는 예민한 직원들을 사회적으로 좀 더 나이스하게 행동할 수 있도록 통제하는 문제와 맞닿는다. 이것은 그전에 멤버들 각각이 자기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필요했던 성장을 이야기 나누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리고 직원들이 쉬는 시간에 옹기종기 아이스크림을 먹던 풍경 대신 밤늦게 혼자 짐을 내려놓거나 코에 휴지를 꽂고 있는 모습들이 대치된다. 감독은 서서히 풍경이 바뀌어 가는 ‘소고’의 변화를 기록한다. 이는 기업의 성장 역사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역사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인물들의 표정과 이야기가 이 영화를 갈등하는 시간의 기록으로 만들어준다. 좋은 의도나 이미지에 숨지 않는 영화의 기록은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막을 내린다. 직원을 다그치는 주방의 소리와 함께 영화는 자본주의 하에서 규정되는 기업의 운영을 질문한다. 그리고 청년들이 자신의 사회를 만들어가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태도를 일터의 성장과정과 함께 지켜가는 일이 요원해지는 우리사회의 한계점에 대해서도 묻는다. <핑크페미>와 <길모퉁이가게>는 대결하기 어려운 갈등 앞에 기꺼이 선다. 자기 앞의 대상에게 휘둘리거나 주눅이 들지 않고 잘 이해하기 위해 역사와 대면하고 대상의 본질적 경향과 마주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간 한가운데를 젊은 청년들이 걷고 있다. 그들은 망설이기도 하고 뛰쳐나가기도 하면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역사 속에서 역사에 지지 않으려는 인물들과 연출자의 자세가 씩씩하다.
2001년 | 싸이더스 감독: 허진호 | 각본: 류장하 이숙연 신준호 허진호 | 제작: 차승재 진가신 히데시 미야지마 | 촬영: 김형구 | 미술: 박일현 | 음악: 조성우 CAST 상우: 유지태 | 은수: 이영애 | 할머니: 백성희 | 아버지: 박인환 | 고모: 신신애 허진호 감독의 < 봄날은 간다 >(2001)는 그의 데뷔작 < 8월의 크리스마스 >(1998)과 함께 한국의 멜로, 로맨스 장르를 이야기할 때 영원히 언급될 작품입니다. “사랑이 변하니…”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대사들의 일상적 울림과 함께, 이 영화는 ‘연애’라는 관계에 깃들어 있는 씁쓸한 감정들을 리얼하게 드러냅니다. 현장 공개는 2001년 여름에 있었습니다. 상우(유지태)가 은수(이영애)에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말하는 바로 그 장면이었죠. 묵호시 삼본아파트 앞, 해안도로와 바다가 함께 하는 그곳. 버스에서 내린 은수는 상우에게 다가가 이별의 말을 전합니다. 현장은 너무나 조용했는데요, 가끔 새 소리나 동네 아낙들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습니다. “우리 헤어지자.” “내가 잘할게.” “헤어져.” “너 나 사랑하니? (침묵) 사랑이 변하니… (침묵) 헤어지자…” 연인이 이별하는 일반적인 장면이지만, 그 감정을 영화에서 제대로 표현하는 건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여기서 허진호 감독은 ‘숏-리버스 숏’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나누지 않고 하나의 테이크를 사용합니다. “두 사람의 시간이 실시간으로 한 번에 진행될 때와, 시간을 잘라서 붙여 놓았을 때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에요. 난 전자의 느낌이 더 좋았어요.” 이 영화의 카메라는 김형구 촬영감독(맨 오른쪽)이 잡았습니다. <8월의 크리스마스>가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작인데요, 김형구 촬영감독은 유 감독님의 촬영부 출신이었죠. 허진호 감독은 현장에서 스스로를 “헤매는 스타일”이라고 말하는데요, “설명도 안 하고, OK 사인도 잘 안 주고 그러는데, 스태프들이 많이 이해해주었다”고 고마움을 전합니다. 은수는 사랑에 대해 다소 냉소적인, 어쩌면 사랑을 믿지 않는 인물입니다. 이영애는 이렇게 말합니다. “감독님은 물론 배우와 스태프를 통틀어서 아무도 은수에 대해 똑 부러지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뭐라고 한마디로 말하기가 참 어려운 인물이에요. 하지만 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인물이기도 하고요.” 버스 안 현장 모습입니다. 모자를 쓴 허진호 감독 뒤로 류장하 조감독이 보입니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요, <8월의 크리스마스> 조감독이기도 했죠. 2004년엔 < 꽃피는 봄이 오면 >으로 감독 데뷔했고 < 순정만화 >(2008) < 더 펜션 >(2018) 등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9년 2월 3일에 5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한번 감독님의 명복을 빕니다. 두 배우의 연기를 허진호 감독이 미소 지으며 보고 있네요. 이영애는 자신과 유지태와 허진호 감독의 성격이 비슷했고, 그래서 현장에서 잘 맞았다고 하네요. 한편 허진호 감독은 “과연 사랑은 변할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사랑뿐만 아니라 모든 게 다 변하는 것 같아요. 그게 나쁜 것도 아닌 것 같고. 사람 자체가 변하는 것 같아요. 자신의 모습을 지키려는 것도 좋지만, 변해가는 것에 대해 집착하고 붙잡으려 한다면 행복해지는 데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어요.” 허진호 감독은 은수라는 캐릭터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은수도 혼자 있을 때는 힘들어하는 부분들이 분명히 있겠죠. 하지만 누군가가 곁에 있을 때는 활발하고 자기중심적이 되는 여자예요. 그래서 상처를 줄 수도 있고. 상우는 사랑을 처음 해보는 거니까 사랑이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은수는 사랑이 없어지면 사랑했다는 사실조차 부정해버릴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인물이에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가 자신에게 “일종의 실험”이라고 말합니다. ‘자연스럽게’ 채워나가는 느낌의 연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도 ‘자연스러움을 가장한 자연스러움’을 경계해야 했고요. 유지태는 <봄날은 간다>의 감정 연기가 조금은 달랐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진짜 감정을 다루니까요. 사랑하던 사람과 헤어졌다고 정말 하루 종일 아무것도 못 하고 슬퍼하진 않잖아요. 실제로는 직장에 나가 일도 하고 그러죠. 영화 속에서 상우가 은수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는 신이 있는데, 속으로는 슬프고 힘들지만 둘 다 겉으로는 슬퍼하지 않아요. 그런 내재된 슬픔이 보는 사람에게 전이될 수 있는 영화가 <봄날은 간다>라고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때 이영애는 “슬펐다”며, 그래도 좋았던 건 ‘소리’였다고 합니다. “평소 자연의 소리에 민감한 편이었고 관심도 많았기에 소리를 채집하는 사람들이라는 설정이 매력적으로 다가왔죠.” 한편 유지태는 “멜로 영화 같지 않다”는 게 첫인상이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슬픔을 다룬 영화거든요. 누구나 슬픔이 있잖아요. 사랑하고, 헤어지고, 잊혀지는 슬픔.” “이 신에선 상우가 화면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거 아냐? 은수가 나가니까 좀 이상한데.”(허진호) “그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이영애) “그럼 이번엔 제가 나가는 걸로 한 번 해볼게요.”(유지태) 세 사람은 하나의 테이크가 끝나면 마치 오누이들처럼 소곤소곤 모니터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다음 테이크를 준비합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이별 장면은 쉴 새 없이 변했는데요, 은수가 상우에게 악수를 청하기도 하고, 상우가 그 손을 만지작거리기도 하고, 대사를 빼기도 하고, 은수와 상우가 번갈아 가며 화면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10번이 넘는 테이크가 이어졌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봄날은 간다>에서 되도록이면 설정하지 않고, 콘티도 만들지 않고, 상황만 던져준 채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습니다. 각자 포커스를 달리한 두 배우의 투 숏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의 첫인상을 ‘맑다’라는 형용사로 표현하는데요, 촬영 전에 상우는 어떤 사람일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한편 이영애는 첫 만남부터 조금 남다른 느낌을 받았다고 하네요. < 선물 >( 오기환 , 2001) 현장에서 바로 올라왔는데, 공항인가 역 화장실에서 막 세수를 한 맨 얼굴이었다고 합니다. 허진호 감독은 유지태에서 “물이 안 채워진 유리잔처럼 배우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그래서 “빈 잔에 물이 조금씩 채워져서 찰랑찰랑 넘칠 때쯤 영화가 개봉했으면 좋겠다”고 했다고 합니다. “백지상태에서 함께 조금씩 그림을 그려나가길 바라셨던 거죠.” <봄날은 간다>는 한국의 싸이더스의 홍콩의 어플라우즈 픽쳐스와 일본의 쇼치쿠가 공동 제작한 영화입니다. 제작 발표회에서 각국 제작진과 배우, 감독이 함께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맨 오른쪽에 홍콩의 제작자인 진가신 감독이 보이네요. <봄날은 간다>는 “소리를 채집하는 사운드 엔지니어의 이야기”라는 설정에서 발전한 영화입니다. 그러면서 작가들과 영화사 기획실 사람들의 연애담들이 하나둘씩 보태졌고, 그렇게 시나리오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8월의 크리스마스>에 비하면 <봄날은 간다>는 훨씬 더 거칠고 현실적이며 기복이 큰 감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1969년 7월 21일, 지금은 코리아나 호텔이 들어선 자리에 있었던 아카데미극장의 뮤직홀에서 김구림은 그가 감독과 편집을 맡아 16mm 필름으로 제작한 영화 한 편을 최초로 상영한다. 바로 <1/24초의 의미>이다. 그러나 김구림은 이날의 상영이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영화계에서 이 작품을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는 이유로 전문가의 도움을 얻지 못하였고, 직접 기술을 배워서 편집 작업을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리허설 때도 그랬지만 결국 행사 도중 필름이 끊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미리 준비해 둔 슬라이드를 환등기로 보여주는 것으로 상영은 대체되었다. 한편 김구림은 그 자리에서 동료 예술가였던 정강자와 함께 흰색 타이즈를 입고 영사되는 이미지를 받아내는 스크린 역할을 하며 <무제>라고 이름 붙여진 필름 퍼포먼스를 진행하기도 했다(때문에 이 날의 상영을 “총체 예술”이라고 평하기도 한다). 김구림은 그의 집이 영화관을 운영했었으며, 사실은 작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 했음을 회고한다. 하지만 영화관이 아닌 곳에서 퍼포먼스와 함께 작품을 선보였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24초의 의미>는 기존의 영화 시스템과는 그리 관련이 없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무제>(김구림, 정강자, 1969) 김구림은 곧이어 “한국 최초의 메일아트”라고 불리는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 대지미술로 회자되는 <현상에서 흔적으로> 시리즈(1970), <불가해의 예술>과 같은 사진 콜라주 시리즈(1970), 그리고 동료 작가 정찬승, 극단 에저또의 대표 방태수, 의상 디자이너 손일광 등 인접 예술분야의 사람들과 함께 결성한 제 4집단에서의 퍼포먼스(1970)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가지만 더 이상 영화는 제작하지 않는다. <1/24초의 의미>를 만들기 전 <문명, 여자, 돈>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완성하지는 못했다. <1/24초의 의미> 또한 실패한 첫 상영 이후 오랜 시간 동안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이후 2000년대 초에 이르러 1960년대의 미술을 “실험 미술”이라는 이름으로 재평가하기 시작하면서, <1/24초의 의미>는 소위 “한국 최초의 실험 영화”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시 소개된다. <1/24초의 의미> 스틸컷 <1/24초의 의미>는 10분이 채 안 되는 무성 영화이다. 1초가량의 짧은 시간만 지속되는 약 300여 개에 이르는 푸티지가 영화의 주를 이루며, 이 이미지의 연쇄는 꽤나 강렬한 시각적 경험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이 푸티지들의 면면이다. 먼저 확연히 눈에 띄는 것은 급격한 도시개발과 산업화가 이루어지던 1960년대 후반의 서울에서 관찰할 수 있는 풍경이다. 벽돌이나 파이프, 건축 자재, 더미로 쌓여 있는 공산품과 거리를 바삐 오가는 군상, 자동차들, 한창 지어지고 있거나 이미 완공된 고층 건물 등은 1960년대의 산업도시를 상징적으로 드러내줌 과 동시에 실제 세계에 대한 기록으로서 시각적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모든 푸티지가 이런 종류의 이미지들로 일관된 것은 아니다. 가방을 메고 가는 어린 학생의 뒷모습이라거나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 고무줄놀이를 하는 어린이들, 공원에서 산책하는 사람들 등 시민들의 일상적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이러한 사실적 세계를 반영하는 듯한 이미지 외의 여분의 것들이다. 과노출되어 형상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이미지, 무언가 너무 빨리 지나가거나 초점이 맞지 않아 그저 추상적인 움직임만이 남은 이미지, 초록색의 화면을 빠르게 이동한 후 저 멀리 사라지는 원이 모습 등 지시 불가능할뿐더러 형용하기조차 힘들어 다소 무의미해 보이기까지 한, 분명한 주제로 한정하거나 의미로 환원시킬 수 없어 오직 바로 그 이미지로서만 머무르게 되는 그런 푸티지가 적지 않게 등장한다. 이를 무시하더라도 우리로서는 충분히 이 영화에 대해 서사화 가능하고 의미화 가능하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문득 짐짓 자명해 보이는 어떤 서사 혹은 입장이 영화 전체에 스며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미지들로 인해 끊임없이 와해되고 거부된다. <1/24초의 의미> 의미 불명의 이미지들 관찰자의 시선으로 채집한 파편적인 이미지에 더해, <1/24초의 의미>에는 이와 다른 범주로 여겨지는 ‘연출된 장면’들이 있다. 이는 영화 안에서 비교적 또렷한 두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데, 작가가 의도한 주제를 이끌어 가면서 영화 전체를 다섯 파트로 나뉘게끔 구조적인 축을 이룬다는 것이다. 그 구조란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영화의 도입부는 고가도로를 달리는 차 안에서 바라보는 측면 창밖의 풍경을 비교적 긴 시간 동안 보여준다. 그다음은 앞서 언급한 1초가량의 짧은 푸티지가 약 60여 개 정도 이어진다. 그리고 불현듯 건물을 배경에 둔 반듯한 정장 차림의 남자(정찬승)를 아래에서 위를 보며 바스트숏으로 찍은 푸티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 거울을 보고 하품하는 정장 차림의 남자, 피어오르는 연기를 담은 푸티지가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고가도로의 풍경이 나타나고, 엄밀하지는 않지만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이와 동일한 구조적으로 짜여진 푸티지의 집합은 전체 다섯 파트 중에서 네 개를 차지한다. 반면 상이한 구조를 가진 네 번째 파트는 오직 연출된 장면들로만 이루어져 있는데, 고가도로 아래에 서 있는 남자와 계란, 물컵, 과일, 쥐 등을 돌로 내리치거나 돌을 깨기 위해 정에 망치질하는 푸티지를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것이다. 흑백이나 컬러로 이루어진 다른 파트들과 달리 이 파트는 다소 몽환적인 색감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다른 시공간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파트에서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마지막 시퀀스에 변화가 찾아온다. 샤워기에서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고, 남자는 더 이상 거울을 보고 하품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강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푸티지가 추가된다. 이후 다섯 번째 파트는 이전의 여느 파트와 마찬가지 구조로 이어지는데, 마지막 부분에서 하품하는 남자의 푸티지가 사라지고 영화는 끝이 난다. 이 연출된 장면들은 반복의 진행을 통해, 즉 구조 그 자체를 통해 영화의 드라마를 도출한다. <1/24초의 의미> 마지막 하품하는 남자 미술사학자 김미경은 <1/24초의 의미>에 대해 “불연속적이고 비논리적인 전개과정으로 파괴와 잔인함, 지루함과 일상을 느리게 혹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중첩해 한국의 현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단면들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평하였고, 당시 주간지의 보도자료 내용에 비추어 보면 김구림 또한 이 영화의 주제를 현대사회의 권태 정도로 생각했던 듯하다. 이는 분명 연출된 등장인물인 정장 입은 남자를 중심에 둔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69년 7월 21일의 퍼포먼스와 결합한 독특한 상영 방식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데, 김남수는 이러한 맥락에서 <1/24초의 의미>를 일종의 안무 작품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신정훈은 이 특징을 종합하며 애초에 <1/24초의 의미>가 “사회적 지시성과 지각적 자극”이라는 두 기획 의도를 가지고 있었음을 논의하지만, 이 작품의 진정한 의미는 “1960년대 말 서울의 근대화에 대한 미묘한 논평”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흐름”, “기능”, “전망”, “질서” 등의 단어가 의미심장한 것이 되었던 1960년대 말 서울의 공간적 상상력”에 “적극적인 차단, 중지, 휴지 등과 같은 장치들을 통해서” 개입한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1/24초의 의미>에 관한 기존의 논의들은 모두 타당하다고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에서 분명 여분으로 남겨지는 것이 있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특정한 의미로 환원시키기 어려운 이미지들 때문이다. 물론 ‘도시 사회의 단면’이라는 광범위한 범주로 수렴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는 영화의 주제를 부연하는 것 이외에 이 이미지가 실제로 영화적인 것으로 기능하는 측면에 있어서는 아무것도 설명해줄 수 없는 정의이다. 어떻게 보면 김구림의 <1/24초의 의미>에 관한 대부분의 논의는 시각적으로 명백하고 언어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는 사실로 여겨지는 이미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음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영화의 지속 안에서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는 데 열중하고 명시적인 것들을 매개하며 때로는 말문을 막히게 만드는, 판단을 불확실함으로 되돌려놓는 이 기능적인 더미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분명 사실적 정보를 넘어서는 영화적 영역의 문제일 것이다. 1초간 지속하는 푸티지의 연속 도중에는 연출된 푸티지가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그 풍경에 속한 것인 양 숨어 있다. 정장을 입은 남자는 쇼윈도 앞에서 자기 자신을 이리저리 비춰보기도 하고, 쓰레기통 앞에 앉아 입에 머금은 액체를 뱉어내기도 한다. 더 교묘히 위장된 것은 마치 길거리에서 우연히 찍힌 듯 연출된 세련된 차림의 여성이다. 순환되는 구조 중 두 번째 파트의 마지막 즈음에는 힐을 신고 치마를 입은 세 명의 여성들이 걸어가는 뒷모습이 나온다. 그보다 다섯 번째 뒤의 푸티지는 세 명의 여성 중 줄무늬 원피스를 입은 여성이 다시 등장하여 정면으로 걸어오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 여성이 연출된 것임을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그가 카메라를 향해, 비켜 지나가지 않고 거의 렌즈 코앞까지 다가오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영화는 관찰자의 시선으로 수집한 풍경 푸티지 사이에 연출된 장면을 능청스레 삽입하는데, 1초라는 빠른 속도로 지나치기 때문에 지각에 의한 판단은 유예되고 이미지에 대한 감각적 경험만이 부유하면서 다큐멘터리의 허구성을 유발한다. 모호한 이미지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서 어느 쪽에 속하거나 선언하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오히려 이 두 가지 측면을 깊은 교착 상태로 이끌고 나아간다. 때문에 이 영화의 서사란 영화 자기 자신이 가진 구조처럼 계속해서 되먹임 될 뿐 명징한 무언가로 환원되지 못하는 상태에 이를 뿐이다. 때문에 이 영화는 실제 세계의 사실을 수집한 아카이브이거나 그에 대한 비평적 개입을 표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세계에 대한 허구를 강화하기 위한 영화적 장치라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왜 특정한 시공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이와 같은 영화적 장치가 요청되었나 하는 점을 질문해볼 수도 있겠다. 1966년 김수근이 창간한 『공간』은 건축 전문 잡지였지만 어느 시점까지는 미술을 비롯한 시각예술과 여러 문화영역을 아우르는 종합 비평지에 가까웠다.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편집자로 재직하던 때이기도 했던 1969년 12월 호에서, 이 잡지는 “1960년대 도시, 건축, 미술”이라는 제목으로 1960년대를 회고하는 야심 찬 특집을 마련한다. 10년(decade)을 단위로 시대를 일별하는 움직임이 특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첫 페이지부터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 10여 쪽에 걸쳐 이어지는 흑백 이미지의 콜라주는 무척이나 강렬하여 과연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당대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첫 페이지에는 월남전인 듯한 전쟁 사진 세 장과 나체의 여성이 해변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광고처럼 보이는 사진이 병치 되어 있다. 이후 전 지구적 이슈를 상기시키는 사건과 그 대상과 출처를 알기 어려운 어떤 행위 혹은 장소의 이미지들이 상당한 리듬감을 만들어내도록 구성되어 이어진다. 그리고 달에 착륙하여 표면을 걸어 다니는 아폴로호의 선원, 그리고 지구의 바다에 다다른 귀환선에서 구명보트로 옮겨 가고 있는 장면을 담은 사진으로 “1960년대의 이벤트(포토 에세이)”라 이름 붙여진 이 섹션은 끝이 난다. 다른 모든 것은 차치하더라도, 이 이미지의 구성이 강하게 환기하는 감각적 경험은 1960년대라는 것이 아마도 말이 필요 없는, 아니 언어(의 의미)를 초과하는 시각적 스펙터클로 집적되고 점철된 시대였음을 말하고 있는듯하다. * 현재 <1/24초의 의미>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 아시아문화전당 등의 기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작품은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전시 이후 원본이 유실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작가가 디지털 파일로만 가지고 있던 것을 2013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의 전시 《SeMa Green 김구림 展: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16mm로 복원하여 상영하였고 서울시립미술관은 이 형태로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필름은 단지 디지털 파일을 필름으로 레코딩한 것이므로 엄밀히 말해 복원된 판본이라고 볼 수는 없다. ** 본 글에서 언급한 신정훈과 김남수의 글은 《SeMa Green 김구림展: 잘 알지도 못하면서》와 연계되어 출판된 도록에 실려 있다. 외에도 이 책에는 윤난지, 조앤 기, 이숙경, 유진상, 임근준 등이 각자의 관점으로 쓴 김구림에 대한 글이 풍성하게 실려 있다. 한국의 1960-1970년대 실험 미술에 관한 논의는 김미경의 저서 『한국의 실험 미술』(2003, 시공아트)을 보라. 동 저자의 『한국현대미술자료 약사(1960-1979)』(2003, ICAS)에는 해당 시기 미술에 대한 개괄과 함께 정치, 경제, 사회와 미술계에 대한 방대한 신문 기사 자료가 함께 실려 있다. <1/24초의 의미>를 포함해 김구림의 초기 작업에 집중한 최근의 연구로는 문지예가 쓴 「김구림의 초기(1969-1970) 작품에 대한 ‘매체(medium)’ 연구」(2015, 홍익대학교 석사논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