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1009
- 감독
- 이승민
- 제작년도
- 2010
그녀의 이름은 김순옥 이름이란 무엇일까? 나에게 붙여진 이름이지만 나보다 다른 사람이 더 많이 부르고, 나의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 조건 없이 알려주며 불리길 바란다.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비록 단순 호명일 지라도 그 순간 접속되고 관계가 생성된다. 이름은 나의 것이지만 나를 부르도록 혹은 내가 응답하도록 하는 타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름에서 시작한다. 아니 이름들에서 시작한다. 김순옥, 김순악, 왈패, 사다꼬, 데루코, 요시꼬, 마시다케, 위안부, 기상, 마마상, 식모, 엄마, 할매, 미친개. 술주정뱅이, 개잡년, 깡패 할매, 그리고 순악씨. 다중의 목소리로 불리는 이름들은 한 사람을 가리킨다. 한 사람의 여러 이름은 그 사람의 여러 모습을 일컫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영화는 김순옥에서 수많은 사회적 명칭을 경유해 순악씨로 불리워진 한 여성의 인생 여정을 담는다. 태어나서 부모와 가족에게 불린 이름은 김순옥이었다. 그러나 이름을 등록하러 가서 ‘옥’자는 양반녀식에게 쓰는 이름이라 그 자리에서 김순악이 된다. 번역조차 불가한 고유명사인 이름이 순간적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순옥과 순악은 모음 위치를 살짝 옮긴 것 뿐이지만 옥과 악의 뉘앙스 만큼이나 사회 계층의 극단적 격차를 드러낸 사례이다. 그렇게 김순악이 된 김순옥 할머니는 번역불가한 이름이 다양하게 번역되어 호명되기 시작한다. 영화는 세 명의 젊은 여성의 목소리로 김순악 할머니의 증언을 읽어나가고, 세 명의 여성 활동가의 목소리로 할머니와의 경험담을 들려준다. 할머니를 재구성하고 재현하는 이들 목소리는 사실 누구를 말하는가 만큼이나 누가 말하는가 역시 놓치지 않는다. 이들 여성들은 단순히 할머니를 재구성하기 위해 목소리를 빌려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가진 능동적 발화자이다. 여성들은 처음에는 대변자이자 대리자로 출발하지만 점차 할머니와 겹쳐져 동일시 되다가 여성의 집단적 경험을 표상한다. 동시대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김순악 할머니와 접속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 보드랍게 >( 박문칠 , 2020)는 이름을 가진 자와 이름을 부르는 자를 이어내면서 이름을 부르는 자 또한 이름을 가졌음을 연결해내면서 발화의 능동성과 수행성을 짚어낸다. 영화는 김순악 할머니를 위안부 피해자로만 가두지 않는다. 인간 김순옥 혹은 김순악 아니 왈패, 미친개, 술주정뱅이... 순악씨로 그녀를 짚어낸다. 영화는 결국 마지막에 직접적으로 말한다. “한 인간의 삶을 특정 부위만 확대하고 그것만 이야기”하지 않겠노라고. 지금까지 일본 위안부를 다룬 작품과 사뭇 다른 지점이다. 다수의 위안부 주제를 다루는 작품들은 은폐되고 왜곡된 일본 위안부가 실재함을 알려내는데 주력해야 했기에 피해자의 존재와 피해자성에 주목해왔다. 은폐되고 지워진 일본 위안부 사건을 수면에 올리고 사실여부를 밝혀나가기 위한 필연적인 스토리텔링 방법이었다. 이 경우 할머니들은 피해자이자 긴 투쟁을 이끌어가는 용기있는 영웅이기도 했다. <보드랍게>도 일련의 작업의 연속선상에 있다. 할머니의 증언을 통해 “위안부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를 기억하고 보관하고자 한다. 그러나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로만 할머니를 한정시키거나 그 특정 사건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인간 김순악의 삶의 여정 전반을 풀어내면서 그녀 인생에서 사건의 맥락을 풀어낸다. 따라서 그녀의 수많은 이름들은 그녀를 읽어내는 거울이다. 영화는 그녀의 다층적 모습을 조각 맞추기 하면서, 조각을 맞춘 여성들과 연대를 꾀한다. 위안부 피해자로 혼자 외롭게 고군분투 살았던 할머니가 동료를 만나 세상과 소통하고 투쟁하는 모습은 동시대의 미투 운동에서 커밍아웃한 여성들에게 용기를 심어준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는 위안을 받으면서 “참 애 묵었다”는 말을 갈망하는 마음을 주고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의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영화로 들어서는 첫 관문이자 가장 짧은 서사로의 영화 제목이자 영화의 이름은 70여분의 관람 후 같지만 다른 의미를 품고 있다. 특히 <보드랍게>를 번역한 영문 제목 <Comfort> 의 간극은 이 영화의 가장 서늘한 지점이자 아픈 순간이다.
<삽질> < 삽질 >( 김병기 , 2018)이 전주국제영화제에 이어 개봉하였고, < 메이드 인 차이나 – 그날, 바다 SPINOFF#1 >( 김지영 , 2019)이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되고, < 대통령의 7시간 >( 이상호 , 2019)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일명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혹은 무비 저널리즘이 다수 상영되고 있는 셈이다. 탐사보도 형식의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지는 몇 해 되었다. < 다이빙벨 > 시리즈와 < 김광석 >, < 자백 >과 < 공범자들 >, < 더 플랜 >, < 저수지 게임 >, < 그날, 바다 >은 상영 뿐 아니라 개봉을 통한 상영 운동을 한 작품이다. 모두 당대 사회적 현안을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실제 불러온 사회적 파장도 적지 않았다. 최근 부상하는 한국의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는 방송의 저널리즘과 독립 다큐멘터리의 의외의 만남에서 촉발한다. 한국에서는 방송 저널리즘과 다큐멘터리 영화는 다른 지지기반으로 인해 오랜 세월 독자적인 노선을 걷고 있었다. 2010년 전후 언론 탄압으로 인해 방송국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PD들을 대거 해고하는 사태에 발생했다. 해고 언론인들은 방송국 밖 인터넷 방송(뉴스타파, 오마이뉴스)과 독립 영화로 적극적으로 진입하고 유입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이상호 감독(<다이빙벨>시리즈)와 최승호 감독(<자백>, <공범자들>이다. <공범자들>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는 주로 저널리스트이자 감독이 은폐되고 부조리한 사건의 실체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구성을 취한다. 마이클 무어식 다큐멘터리 영화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흥미로운 지점은, 추적하는 감독이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감독은 저널리스트로서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치고 고발하고 때때로 고발 대상이 만나주지 않아도 끈질기게 만남을 시도한다. 이때 화면에 등장한 감독이자 저널리스트는 기존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의 감독의 등장과는 결정적으로 차이를 갖는다.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감독은 대상과의 관계맺음 방식에서 대변자 혹은 함께 경험하는 자라면,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감독은 저널리스트의 정신과 사명감을 형상화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비리나 거짓을 폭로하기 위해 악을 끝까지 쫓는 정의로운 인물로, 마치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나 탐정 영화의 화자 같은 역할을 한다. 이 경우 관객은 사건을 파헤치는 인물의 행위에 주목하고 그들의 가설과 분노에 동일시하게 된다. 인물의 실패가 예견된 행위들은 극적 긴장과 비판적 웃음을 유발해 공감과 설득을 촉발한다. 여기서 핵심은 사건의 진실을 확증할 증거와 증거에 대한 팩트 체크이다. 여기서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의 위태로운 선택이 발생할 수 있다. 증거를 파헤치는 과정에 지나치게 초점을 맞추거나 검증되지 않은 증거로 사회적 파장을 겨냥한 경우나 혹은 증거의 팩트 자체를 검증하는데 과도하게 초점을 맞추는 경우다. 진실을 쫓는 자와 진실을 둘러싼 주장과 가설은 넘쳐나는데 정작 사건의 실체와 진실은 가려진다. 최악의 경우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사건의 여론몰이 도구로 선정적으로 활용하게 되는 경우다. <대통령의 7시간> 최근 한국 저널리즘 다큐멘터리는 크게 두 방식으로 진실 논쟁을 추구한다. 둘 다 사건을 추적하고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현장과 전문가 인터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지만, 한 축은 사건 현장에 초점을 맞춰 발로 뛰면서 몸으로 취재를 하고, 다른 하나는 증거에 초점을 맞춰 사건에 접근하고자 한다. 주로 데이터와 인터넷 정보를 활용한다. 전자는 전통적인 방송의 저널리즘 계보와 궤를 같이 한다면, 후자의 경우는 딴지일보에서부터 인터넷 방송과 팟캐스트와 같이 새로운 플랫폼에서 각광받는 저널리즘 형식이다. <자백>, <공범자들>, <삽질>이 전자의 사례로 들 수 있고, 프로젝트 부 시리즈 <더플랜>, <저수지게임>, <그날, 바다>, 그리고 스핀오프로 제작된 <메이드 인 차이나-그날, 바다>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 여기서 중요한 지점은, 현장 중심이든 데이터 중심이든 사건의 증거를 찾아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다. 사후적으로 사건의 진실을 찾는 과정에는 여러 가설들이 증거와 경합을 하게 된다. 다만 가설은 열린 가설이 되어야 할 것이고 증거는 확증편향이 아닌 다방면의 팩트 체크가 들어가야 할 것이다.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가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여정이 사건 수사 기관의 수사 방식을 따를 필요는 없다. 영화가 진실을 찾는다면 좋겠지만 영화는 왜곡되고 은폐된 사건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진실을 찾아갈 수 있도록 촉매하는 역할 또한 중요하다. 최근 등장하고 있는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는 초기 저널리즘 다큐멘터리 영화에서 보여준 한계를 다른 방식으로 모색하고 있다. 영화라는 매체 속에서 저널리즘이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답을 찾아가고 있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염려와 기대가 교차된다.
영화와 도시는 닮아있다. 둘 다 근대의 산물이고, 집단과 익명을 전제로 하고, 무엇보다 어둠 속에 빛이 발현할 때 둘은 ‘어떤’ 에너지를 뿜어낸다. 여기 ‘도시’를 다루는 두 작품이 있다. 두 영화는 비단 ‘도시’를 제목으로 할 뿐 만 아니라 도시의 속성과 영화의 특성을 활용하고 실험한다. 정한 감독의 < 환영의 도시 >(2018)는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를 담은 실시간 동영상을 모은 작품이고, 박군제 감독의 < 거대 생명체들의 도시 >(2018)는 그래픽적 감각을 동원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논하면서 도시 재개발을 다룬다. 각각의 작품은 기존의 도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도시와 영화의 ‘본다’는 키워드를 통해 색다른 도시리듬으로 구축하고 있다. 실시간의 감각 <환영의 도시>는 11분 동안 진행된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를 11분 동안 담은 영화이다. 영화는 감독이 직접 촬영한 영상이 아니라 온라인상에 오픈된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를 찍은 동영상을 모아 실제 사건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연동시킨다. 다시 말해 11분의 불꽃놀이의 시간과 11분의 영화의 시간 그리고 그 시각 찍은 수많은 휴대폰 동영상 클립들은 영화의 새로운 시간감과 리듬을 구축한다. 사진과 달리 시간을 현재화하는 속성을 가진 영화는 이제 실시간 동영상이라는 질료와 함께 색다른 시간감을 만들어낸다. 각기 다른 사람들이 각기 다른 공간에서 동일한 이미지를 보고 온라인에 올린 동영상은 동시성과 연결성의 감각을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찍힌 대상인 불꽃놀이 자체의 이미지 보다 불꽃놀이를 찍고 있는 카메라 뒤 사람들의 존재를 강하게 느끼게 된다. 각기 다른 거리와 각도에서 찍힌 불꽃놀이는 카메라 뒤 찍는 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실시간 현장의 동시성과 다양성을 구축해낸다. 마치 생중계하듯이 불꽃놀이의 여러 현장을 동시에 드러내는 영화는 불꽃의 아름다움에 탄성을 지르는 동시에 40억 화약에 대한 자본을, 환경을, 노동을 나아가 동시대 사회이슈인 사드배치까지 소환해낸다. 실시간 다중의 감각은 불꽃축제 중 흘러나오는 아나운서톤 목소리로 인해 보다 강조된다. 전지적 시점의 권위적인 단일 목소리는 핸드폰 뒤의 다중의 생기 넘치는 목소리와 대비된다. 미시적 일상사를 나누는 목소리에 비해 이 목소리는 관습적이고 단호하고 단선적이다. “새로운 기적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대한민국을 믿습니다.” 핸드폰 뒤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비웃기도 하지만 이어 나오는 아리랑을 따라 부르기도 한다. <환영의 도시>는 표면적으로는 대자본 대도시 소비의 정점인 롯데월드타워 불꽃축제의 스펙터클을 보여주지만, 그를 통해 볼거리를 향유하고 소비하는 관객의 보기 방식을 다루고 있다. 이제 볼거리는 그 자체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매개된 이미지로 부유한다. 순간을 기록하고 간직하고자 하는 욕망은 직접 보기를 대신해 이미지를 소유와 소비하고 나아가 박제한다. <환영의 도시>의 진짜 주인공은 그래서 스펙타클한 도시 건물이 아니라 도시에서 환상을 체험하는 방식이다. 일명 ‘소셜미디어적 관람 체험’이라고 할까? 디지털 스펙타클 보기의 방식을 실험하는 또 한편의 도시 영화가 있다. <거대 생명체들의 도시>는 표면과 이면의 역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표면적으로는 뚜렷이 연결성이 없는 파편화된 장면들의 연속이지만 영화는 그 자체를 구성으로 본다/보이지 않는다를 도시 재개발과 엮어낸 흥미로운 작품이다. 첫 장면은 색감대비가 강렬한 그래픽과 비트감 있는 음악에 맞춰 한 남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눈에 띈다는 이유로, 징그럽다는 이유로 군화발로 짓밟아 죽이는 무당개구리 일화를 들려주는 장면은 실상 지시적 이미지가 부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이미지와 사운드는 연동가능하다. 특히 무지개빛 그래픽에 이르러서는 본다와 보이지 않는다 사이의 어떤 섬뜩한 관계를 인지하게 한다. 다음 에피소드는 전자와 달리, 선명한 지시적 이미지를 가진 장면이다. 다리 밑 도시 재개발 현장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영화는 이어 해운대 대규모 재개발 광고를 담는다. 흥미롭게도 이처럼 구체적이고 지시적인 이미지를 보고 있어도 실제로 무엇을 보고 있는 지 모호할 뿐 아니라 별 감흥이 없다. <거대 생명체들의 도시>는 이처럼 “본다 (혹은 보지 않는다)” 는 표면을 통해 본다(보지 않는다)의 이면에 대해 고찰한다. 볼거리는 <환상의 도시>처럼 기억과 기록의 욕망으로만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과 편견의 영역으로도 나아간다. 보이지 않는다면 무심하겠지만 눈에 띄는데 징그러우면 죽인다의 혐오의 감각은, 보이지만 의미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무감각해지는 지점, 영화는 한발 더 나아가 보이지 않지만 상상할 때 연민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어지는 장면들이 그렇다. 연가시와 바퀴벌리 그리고 매미로 향하는 일화는 그래픽 이미지와 강한 비트의 음성을 통해 상상 가능한 징그러움을 다층적으로 자아낸다. 한 측은 벌레를 향해 다른 한 측은 개발과 파괴를 행하는 인간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다. 이 구조는 도시 재개발의 문제와 집단 지성의 문제로 확장된다. 도시는 가시적인 자본주의의 거대 스펙타클 뿐 아니라 비가시적인 곤충과 벌레와 같은 생명체 (그 생명체 속에는 인간이라는 생명체도)도 공존한다. 두 작품은 기존에 도시를 거주 공간으로 혹은 생활 공간으로 재현하면서 가난, 청춘, 고립, 차별, 이주를 다른 반면, 도시의 이미지와 리듬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보기’의 방법을 영화 속 언어로 담아낸 새로운 도시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