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se
- 감독
- 이승준
- 제작년도
- 2000
가끔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게 무슨 얘기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예를 들면 분명 A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있었던 것 같은데 문득 정신차려보니 F나 Q정도의 이야기가 눈앞에 펼쳐 치고 있는 것이다. 이게 어쩌다 이렇게 됐지..? 분명히 뭔가 급작스럽게 커브를 튼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또 이해를 못할 건 아니라서 그렇군. 하면서 따라가게 된다. 이런 경우 애초에 설정이 희한한 경우가 많다. 꽤나 독특한 소재를 가지고 후반부에 이르러 보편적인 이야기로 확장시키려다보니 연결부가 조금 허술하거나 어떤 경우는 아예 그냥 철갑을 두른 듯 뻔뻔하게 진행시키기도 한다. < 고스톱 살인 >은 꽤나 뻔뻔한 영화다. 영화의 홍보문구부터 ‘기상천외한 한국형 판타지스릴러’이니 아무튼 좀 평범하지는 않은 이야기라는 걸 미리 경고하는 중이다. 영화의 주된 소재가 되는 ‘고스톱 살인’은 도박을 하다가 한 쪽이 돈을 많이 잃어서 뭐 사람을 죽였다. 그런게 아니다. 자기도 모르게 사람을 계속 죽이고 있었던, 그저 화투를 좋아하고 사랑을 기다리던 한 여자의 능력에 관한 이야기(대충 그렇다)이다. 소싯적부터 도박을 하며 큰 빚을 지고 삼촌이 키우는 말을 돌보며 숨어있는 ‘상’(이승준). 말 농장에는 매주 일요일 미스 정, 안교수(김홍파), 최여사(권남희), 삼촌(송영재) 넷이 모여 화투를 친다. <타짜>처럼 큰돈이 오가는 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두둑한 만원짜리가 오가다 보니 상이도 옆에서 담배 심부름, 커피 심부름을 하며 용돈 벌이를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미스 정이 급사해버려 멤버가 3명이 된다. 얼떨결에 미스 정의 자리에 앉게 된 상. 워낙 도박에 재능이 없는 터라 안 그래도 없는 돈을 잃고 괴로워하던 그의 앞에 안교수가 나타나 술을 한 잔 하자고 권한다. 그리고 ‘최여사’에 얽힌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데, 최여사가 게임을 끝내는 판에서 그녀가 가진 패의 숫자 나열이(점수가 아닌 각 화투장이 가지고 있는 숫자들. 예를 들면 똥은 11, 단풍은 10) 주민등록번호의 모양이 되고, 그에 해당하는 사람은 사망하게 된다는 것. 너무 말이 안 되는 이야기라 상이는 무시하려고 하지만, 안교수는 그 동안 자신이 기록해왔던 주민등록번호와 해당 인물의 생사여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자신은 그저 연구를 하고 싶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화투판을 조작해 안교수가 지정하는 숫자가 최여사에게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고, 한 번에 100만원을 제시한다. 당연히 믿음은 가지 않지만 돈이 필요했던 상이는 이를 수락하고, 그들은 ‘실험’을 진행하게 된다. 충격적인 설정이다. 일단 화투로 주민번호가 만들어진다는 것도 그렇고, 그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이 죽는다고? 그럼 이건 한국인 한정으로만 통하는건가? 물론 그런 생각들은 부질없다. ‘데스노트’보면서 그런 생각하는 사람은 애초에 그런 걸 볼 자격이 없는 것 아니던가. 영화는 이 능력을 안교수와 상이의 복수와 재물욕에 사용하진 않는다. 개인적으로는 참 아쉬운 부분이었다. 안교수-최여사-상이 3인조 암살단이 신나게 화투를 치고 사람이 죽어나가고 부귀영화, 주지육림, 풀소유... 이런 식으로 폭주했으면 정말 화끈한 B급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랬다면 영화가 제작되진 못했겠지만.. 능력에 대해 더 알아가면서 죽는 시간을 지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과거로 지정이 가능하다는 점까지 알아낸다.(주민번호 이후 붙는 화투패의 숫자들로 가능) 이건 데스노트를 능가하는, 초시공적 살인능력인데 문득 드는 상상만 해도 타노스 저리가라 할 가공할 능력임과 동시에 인류의 오점을 모두 바로잡을 수 있는 절대 스킬... 이지만 당연히 그런 쪽으로 진행되지는 않는다. 그 대신 복잡하고 힘든 상이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수준에서 소박하다면 소박한 마지막 화투판을 벌이게 된다. (물론 능력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들에 비해 소박하다는 것이지 상이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비극을 되돌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이 바꾸려고 했던 작은 변수는 의외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큰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참 특이한 설정을 가진 영화다. 어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됐을까 싶어 찾아보니 영화를 연출한 김준권 감독은 ‘고스톱은 가장 일상적인 게임 중에 하나라고 생각했고, 아주 사소한 것이 큰 부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이 두 가지가 섞여서 만들어진 영화가 <고스톱 살인> 이다. 난 이 영화를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 가장 중요한 ‘능력’부터 너무 극단적이고, 이후 이 능력의 사용처에 대한 서사를 만들어 가는 부분도 꽤 엉성해서, 글의 초반에 말한 것처럼 ‘어?’하게 되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여러분에게 소개를 하고 싶었던 이유는 이런 뻔뻔함을 더 많이 보고 싶기 때문이다. B-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특히 한국 영화에서 갈수록 더 ‘이상한’ 영화를 보기가 힘들어진다. 안 만든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돈이 안 벌려서 일 것이고, 사람들이 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전 비디오 가게가 흥했던 시절에는 대충 아무 영화나 빌려서 보고 우연히 발견한 꿀잼작에 즐거워하고, 노잼작이 걸리면 에잉.. 하고 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과정에서 전설의 B급 영화들이 발굴되고 입소문을 통해 후대까지 그 이름을 남기는 일들이 적잖이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접하기 말도 안 되게 쉬워진 요즘은 오히려 더 고르는데 신중해지고 블록버스터, A급 영화 아니면 아예 흥미조차 갖지 않게 되는 상황이 된 듯하다. 비용도 저렴해지고 접근도 쉬워졌는데 왜 오히려 이렇게 된 것일까? 선택지는 다양해졌는데 그 선택이 가리키는 방향은 획일화에 더욱 더 가까우니 알다가도 모를 일. 칼아츠(CalArts, 캘리포니아 예술대학. 픽사와 팀버튼을 배출해 유명한 그 학교 맞다.)를 졸업하고 <고스톱 살인>으로 장편 영화 데뷔를 한 김준권 감독은 아직 차기작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이런 독특한 상상력을 밀고 가는 스타일을 유지한다면 분명 쉽지는 않은 길이겠지만, 누구나 봉준호가 되고 박찬욱이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김준권 감독의 괴상한 상상력을 매우매우 응원한다. 두 번째 작품을 가지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나기를 기원한다. 사족 : 이야기를 정리하다보니 생각보다 복잡해서 다 풀어내면 과한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언급하지 않은 부분이 꽤 있다. ‘고스톱 게임 중 획득한 패가 의미하는 숫자의 나열에 의해 사람이 죽는다.’는 설정, 꽤 끌리지 않는가?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은 뒤의 이야기들도 제법 재미가 있으니 나른한 주말 오후 맥주 한 잔 하면서 보기에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고스톱 살인> 은 왓챠, 티빙, 웨이브에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내레이션은 “대사가 아니나 직접적으로 영화의 내용을 해설하는 말” 1) 로 정의된다. 영화 속 캐릭터와 별개의 해설자가 등장해 사건을 해설한다거나, 대사로 전달하기 어색한 정보 혹은 인물의 속마음을 1인칭 보이스오버로 전달하는 등의 방식으로 활용되곤 한다. 다큐멘터리에서의 내레이션은 주로 후자의 방식을 택한다. 화면에 더해 추가적인 정보를 전달하거나, 감독 자신이 화자가 되어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거나. 배리어 프리 화면해설은 "시각장애인에게 영상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해 '소리로 화면을 보여주는 것'" 2) 이다. 이는 화면에서 보이는 것 이상의 정보를 전달하거나, 1인칭으로 화자의 속마음을 발화하는 내레이션과 구별된다. 무엇보다 화면해설에는 객관성이 요구된다. 프랑스 화면해설방송헌장은 다음과 같이 객관성의 기준을 제시한다. 개인적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내용을 명확히 전달해야하며, 화면해설자가 이미지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선 안 되며, 설명 내용을 명료하고 압축적으로 구성해야 한다. 3) < 피아노 프리즘 >(2021)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영화는 모든 한국어 사용자를 위해 화면해설과 음향자막이 추가된 배리어 프리 방식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이는 꽤나 독특한 효과를 가져온다. 배리어 프리 버전이 동시에 제작되어 일반 버전의 영화와 동시 개봉했던 이승준 감독의 < 달팽이의 별 >(2010)과 같은 사례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배리어 프리 버전은 사후적으로 제작된다. 한 차례 완성된 영화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음성해설과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별도로 제작되는 방식이다. 경우에 따라 영화의 감독이 직접 음성 화면해설의 연출을 맡기도, 그렇지 않기도 하다. 다만 감독이 직접 자신의 작품에 음성해설을 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대부분의 배리어 프리 음성해설에선 화면 속 인물을 이름이나 외모, 직책으로 묘사한다. 가령 < 기억의 전쟁 >(2018)의 초반부 시민법정 장면에서 “법복을 입은 세 명의 판사”라 해설한다거나, < 학교 가는 길 >(2021)에서 카메라를 든 감독을 제작진이라 명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반면 오재형 감독의 음성해설은 영화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인 자신을 그대로 노출한다. 다른 작품이었다면 “오재형”, “주인공”, “감독” 등으로 지칭되었을 화면 속 오재형 감독은 “나”로 지칭된다. 감독 자신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의 화면해설은 "잡다한 물건들이 많은 방, 잠옷 차림의 저는 가운데에 서서 허리 스트레칭을 합니다."라며 자신을 “저”로 지칭하고 있다. 보통의 영화였다면 이러한 이는 익숙한 사적 다큐멘터리 혹은 1인칭 다큐멘터리의 기법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 프리즘> 속 화면해설 내레이션은 ‘내레이션’보단 ‘화면해설’의 기능이 최우선 목적이다. 다만 영화의 연출자이자 주인공이며 내레이터인 오재형 감독의 화면해설은 첫 문단에서 제시된 객관성의 기준을 충족시킴과 동시에 위배한다. “나”라는 지칭이 등장하는 순간 이것은 화면해설과 내레이션 사이에서 진동하게 된다. <피아노 프리즘>이라는 영화의 내용으로 잠시 들어가보자. 이 영화는 회화에서 영화, 피아노 등으로 이어지는 오재형 감독 자신의 예술적 궤적에 관한 기록임과 동시에, 감독 자신에 관한 자전적 다큐멘터리다. 무엇보다 이 영화를 통해 오재형 감독의 거의 모든 단편영화를 간접적으로 만날 수 있다. <쇼팽 이미지 에튀드>(2008), < 강정 오이군 >(2015), < 덩어리 >(2016), < 블라인드 필름 >(2016), < 봄날 >(2018), < 화가의 숲 >(2019), < 보이지 않는 도시들 >(2021) 등 오재형 감독이 여러 영화제와 전시에서 선보여온 작품들이 <피아노 프리즘> 곳곳에 등장한다. 오재형 감독의 작업은 2020년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진행된 개인전 <피아노 프리즘: 보이지 않는 도시들>로, 그리고 개인전과 공연을 준비하는 자신에 관한 기록인 영화 <피아노 프리즘>으로 한데 모인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댄스 필름, 애니메이션, 퍼포먼스 등이 뒤섞여 있는 이 작품들을 하나로 묶긴 어려워 보인다. 영화들의 다양한 형식은 회화에서 영화로, 영화에서 피아노로 이동하는 오재형의 다종다양한 관심사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피아노 프리즘>은 그러한 자신의 과거 작업들을 포괄하는 피아노 공연을 선보이는 과정의 기록이다. 그 과정 속에서 그는 번복가능성을 내포한 화가 은퇴식을 꾸리고, 70살 노인이 될 때까지 피아노를 치겠다 다짐하며, 공황장애의 기억을 고백하고, 강정·밀양·용산·광화문 등에서 벌어진 투쟁과 집회에 연대한다. 다만 이 영화는 이러한 주제 하나하나에 집중하지 않는다. <피아노 프리즘>은 오재형이라는 개인에 관한, 다양한 장르를 횡단하고 혼합하는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다. 이 영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다. 당연하지만 여기서 “개인적이고 사적인 이야기”란 진술은 <피아노 프리즘>이 한 예술가의 자아도취라거나, 자기 홍보를 위한 작품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사적 다큐멘터리는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1인칭의 시선으로 전개”함과 동시에,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모두를 향해 “예술적 발언”을 한다 . 이러한 관점에서 <피아노 프리즘>은 근 10년 동안 다양한 분야에서 등장한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의 경향 속에 놓인다. 동시에, “공적으로 발화되는 ‘예술적 발언’인 자신의 영화를 어떻게 발화할 것인가?”라는 첨예한 질문을 던지고 하나의 답변을 제출하고 있다. 다시 배리어 프리에 관한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피아노 프리즘>의 음성해설은 감독 본인이 직접 내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다. 때문에 종종 사적 다큐멘터리에서의 내레이션과 구별되지 않으며, 더 나아가 “나”라는 지칭을 통해 여타 영화들의 내레이션 개념과 배리어 프리 음성해설 사이의 구분을 흐려 놓는다. <피아노 프리즘>의 음성해설은 “나”라는 시각적 이미지의 청각적 확장이다. 반대로 자막해설은 시각적 이미지로 제시되고 있는 것을 해설한다. 음성해설이 오로지 청각적으로만 영화를 접하는 상황을 가정한다면, 자막해설은 오로지 시각적으로만 영화를 접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배리어 프리 영화는 가시적이지 않은 시각 이미지의 전달과 가청적이지 않은 청각 이미지의 전달이라는 양측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하여야 한다. 오재형 감독은 그 과제를 자처하여 수행한다. <피아노 프리즘>은 감독 자신의 예술적 발화를 모든 이에게 닿게 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오재형”이라는, “나”라고 지칭되는 자신을 가능한 모든 이에게 선보이고자 하는, 자신의 예술적 작업은 물론 그 작업을 생산해낸 과정과 예술의 주체인 자신 자체를 전달하는 행위다. 때문에 <피아노 프리즘>을 감독 자신이 사회 혹은 세상이라 할 수 있는 것과 맞부딪히며 경험해온 것을 예술적으로 전달해온 작업의 집합이라고 할 때, 이 영화가 보여주는 배리어 프리라는 형식은 “나”를 최대한 반영할 수 있는 예술형식에 관한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 1) 『영화미학용어사전』(프랭크 E. 비버, 1995), 『영화용어사전』(김혜리 외 3인, 1999), 『영화사전』(김광철, 장병원, 2004) 등의 정의를 참고하였다. 2) 『배리어프리(barrier-free) 영상제작론』, 김정희, 산지니, 2018, 87p. 3) 앞의 책, 103p
2018년 봄 “요즘 특별한 일 있어요?” “요즘요? 바빠요. 부산, 광주, 대전… 강연하러 다니느라 정신없어요.” “강연요?” “북한 바로 알리기 강연요.” 그녀는 북에서 왔다. 평양엔 지금도 딸과 남편, 부모님이 살고 있다. 여러 시민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그녀의 강연을 몇 번 촬영했던 터라 그녀가 강연을 하러 간다는 말에 그다지 큰 흥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부산, 울산, 서울에서 강연이 있어요. 그리고… 참, 다음 주 월요일 저녁에는 합창 연습해요. 615 합창단…” “합창연습요?” “5월에 615 합창단이 일본에서 재일동포 대상으로 공연을 해요. 매년 했다고 하는데 이번엔 저도 가려고요.” “여권 없이 어떻게 가요?” 그녀에게는 여권이 없다. 많은 다른 탈북자들처럼 그녀는 중국, 동남아시아를 거쳐 대한민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순간 그녀는 그녀를 다시 평양으로 돌려 보내줄 것을 당국에 요청했다. “저는 중국에서 브로커에게 속았어요. 남한에 가서 두세 달 일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고, 그러고 나서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땐 이미 늦었어요. 가족과 헤어지는 건 상상도 못 했어요.” 그 후로도 그녀는 지속적으로 송환을 요청했고, 신원 특이자로 분류되어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8년째다. “아는 분 통해서 알아보니까 여권이 4월에 나온다고 해요.” 여권이 나온다고? 카메라를 챙겨 그녀가 합창연습을 한다는 서대문의 연습실을 찾았다. 2015년 여름, 그리고 가을 2015년 여름 경상북도 영천의 플라스틱 재생공장에서 그녀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지게차를 운전할 정도로 능숙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일간지 신문 1면에 실린 ‘나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기사를 보고 나서였다. 그녀의 이야기는 놀라웠고, 북으로 다시 돌려보내달라고,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채 인터뷰를 했던 건 신선한 충격이었다. 온갖 고초를 겪으며 고향에 돌아가기를 원했던 그녀는 여권위조, 밀항과 자살 시도까지 했지만 모두 실패했고, 마지막 희망을 부여잡는다는 생각으로 공개적으로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녀의 이야기가 대중적으로 알려진 후 통일 운동, 인권 운동을 해왔던 시민단체가 그녀와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산 적십자사 앞에서, 종로 유엔 인권사무소 앞에서,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1인 시위를 했다. 한편 그녀는 북쪽의 삶을 궁금해하는 남쪽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2015년 가을, 겨울, 그녀에겐 희망이 보이기 시작하는 듯했다. “혼자였어요.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안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자살까지 하려고 했고… 이제는 희망이 생겼어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녀의 이야기는 점점 더 많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CNN과 BBC도 그녀를 취재했다. 그녀의 ‘조국’도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고 송환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희망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 듯싶었다. 2016년 봄 2016년 3월 어느 날, 그녀는 가방을 가만히 쌌다. 그날 저녁, 고향인 북쪽으로 돌아가기를 수십 년 동안 갈망해왔던, 서울에서 함께 지내던 장기수 어르신들께 평양식 국수를 대접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조그만 배낭 하나를 들고 집을 나섰다. 그녀가 간 곳은 주한베트남대사관. 그녀는 망명을 신청했다. “베트남이 사회주의 국가잖아요.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니 저의 망명을 받아주지 않을까요?” 그녀가 내게 말했다. 대사관의 담당자는 그녀에게 몇 가지 사실 확인을 한 후 놀랍다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드디어 고향에 있는 딸을 볼 수 있겠구나. 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건강하세요. 평양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는 난 그 자리를 나왔다. 그녀의 망명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베트남 대사관 앞에는 취재진과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닫혀 있는 육중한 대사관 문 너머로 날카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점점 가까워졌다. “망명을 신청한 사람한테 집에 가서 기다리라니… 그리고 어떻게 대사관에 경찰을 부를 수가 있어?” 그녀는 울부짖었다. 대문으로 나오는 그녀를 취재진이 감싼 채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잠시 후 경찰 관계자가 다가오더니 “주거침입 등으로 신고를 받았다. 차후에 소환장을 보낼 테니 소환에 응해 달라.”는 말을 건네고는 사라졌다. 그렇게 그녀의 망명은 실패했다. 2016년 여름, 그리고 가을 베트남대사관 망명 실패 후 경찰은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사고’ 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목적이라고 경찰은 그녀에게 말했다. 힘든 하루하루였다. 희망이 사라진 듯했다. 마음을 추스를 수 있을까 싶어서 그녀는 고향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났다. 그들은 중국에서 브로커 감시하에 함께 공동생활을 하다가 대한민국으로 건너왔기에 그녀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난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갈 거야.” 가족과 같이 살지 못할 바에는 죽는 게 낫고, 죽으면 몸이라도 고향에 돌려 보내줄 거라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죽어서라도? 죽는다고 해도 그 몸이 북쪽으로 갈 수가 없어.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지금은….”라거나 “순진하네. 아직 고생 덜했어….”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며칠 뒤 그녀가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아침에 갑자기 들이닥쳤어요, 수십 명의 경찰이….” 경찰은 베트남대사관 주거침입 등으로 그녀에게 소환장을 보냈고, 압수수색영장을 들고 그녀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내가 4시간을 운전해서 그녀가 있는 곳을 찾아갔을 때도 그녀는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해 여름과 가을은 그녀에게 가혹했다. 2016년 겨울, 2017년 봄 그리고 2018년 2016년 겨울과 이듬해 봄은 온 나라가 촛불 정국이었다. 이 땅의 부패한 정권이 무너지는 역사를 그녀도 목격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고, 그 정권은 북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라 그녀는 다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 역시 ‘곧 돌아가겠네요.’라며 인사를 하곤 했다. 하지만 북미 관계는 극단을 치달을 기세였고, ‘올해는 갈 거 같네요.’ 라던 그녀는 또 다른 한 해를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해가 바뀌자 거짓말처럼 정세가 바뀌었다. 남북관계는 급격히 좋아지기 시작했다. 북측 선수단이 평창동계올림픽에 참가했고, 북측과 남측의 공연단이 평양과 서울에서 공연을 했으며, 이제 곧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남북 당국은 그녀의 송환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이제는요… 희망이 아니라, 돌아가는 게 기정사실같이 생각돼요. 가면 생각 많이 날 것 같아요. 저를 도와준 사람들과 헤어진다는 게 제일 아플 것 같아요. 감독님과도 헤어져야 할 테고...” 그녀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 듯싶었다. <그림자꽃>, 그녀의 봄을 기다리다 처음 이 다큐멘터리를 시작했을 때 제목은 ‘달의 바다’였다. 지구에서 우리가 바라보는 달은 한 면뿐이고, 그 반대편 달 표면은 지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다는 사실, 그 반대편 달 표면을 일컫는 용어가 ‘달의 바다(Lunar Maria)’다. 사람이든, 사회든, 자연이든, 그 이면을 들여다보고 드러내는 것은 언제나 풀어야 할 숙제와 같은 것이다. 그녀를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탈북자, 북한, 나아가 대한민국 사회의 이면이 보이지 않을까? 남북 간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는 정치적, 이념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가족에게 돌아가고 싶다는 한 개인의 소망조차 그 틀 안에서 판단되는 현실 속에서 나는 <그림자꽃>을 통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탈북자 문제에 관한 이야기는 한 가지밖에 없을까? 그녀가 정말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닐까? 남북은 서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일까? 이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본의 아니게 대한민국 정부의 여러 기관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게 됐다. 가족에게 돌려보내달라는 것, 그 마음을 잘 담고 싶은 것뿐인데, 그게 위험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가 보다. “그들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분단이 죄지….” “돌아가면 관광 가이드 하고 싶어요. 제가 남쪽 사람들을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남쪽에서 온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평양을 안내하는 일, 멋지지 않아요?” 그녀도 돌아가고, 다큐멘터리도 잘 완성되고… 이 다큐멘터리를 가지고 평양국제영화제에 참가한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지나친 욕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