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산
- 감독
- 이승현
1970년대 한국영화가 청년 문화와 만나면서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 하길종 , 1975)을 낳았다면, 그 반대편엔 당대의 하이틴 문화를 담은 < 고교얄개 >( 석래명 , 1976)가 있었다. 전자가 유신 시대와의 불협화음이었다면, 후자는 순응적인 화음에 가까웠다. 반공 영화, 새마을 영화 등 ‘국책 영화’가 창궐했던 1970년대, 이른바 ‘얄개 영화’는 십대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명랑 드라마로 사랑 받으면서 한편으론 ‘어른’들의 가치관을 별 저항 없이 수용했다. 여기엔 ‘우수 영화 제도’라는 미끼도 있었다. 좋은 영화로 선정되면 제작사에게 외화를 수입할 수 있는 쿼터 하나가 주어졌던 것. 이후 심사 대상에서 하이틴 무비가 제외되자 이 장르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1975년 < 여고 졸업반 >에서 시작해 1978년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까지, 고등학생들의 로맨스와 일상을 다루었던 그 영화들은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쏟아지다 갑자기 사라졌던 시한부 트렌드였던 셈이다. 그 중심은 임예진 - 이덕화 커플의 '진짜진짜' 시리즈와, 이승현 - 김정훈 콤비의 '얄개' 시리즈였는데, 전자가 순애보라면 후자는 코미디에 가까웠고, 특히 <고교얄개>는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간판 스타 같은 영화였다. 귀여운 반항아들의 요절복통 스토리처럼 보이지만, 유신 시대라는 시대 배경을 감안할 때 <고교얄개>는 의외로 복잡한 텍스트다. 이 영화는 1970년대 국가 이데올로기를 충실하게 담아내면서, 한편으론 그 시절 억눌린 청소년들을 위한 작은 해방구 역할을 했다. 체제 선전과 대리 만족을 동시에 수행하는 기묘한 프로파간다 영화였던 셈이며, 그 어떤 국책 영화보다 순수하게 메시지를 전달했던 작품이기도 했다. 첫 신은 예배 장면이다. 주인공 두수(이승현)는 미션 스쿨에 다니는데, 이때 강당을 가득 채운 까까머리 교복 차림 남학생들의 모습은 그 시대의 집단주의를 잘 보여준다. 여기서 두수는 돌발적 행동을 하는 개인이다. 낙제 때문에 유급을 한 두수는 입시나 교칙 같은 제도를 거부한다. 그저 학교 생활이 지루하기에 매일처럼 장난을 일삼고, 우연히 알게 된 여학생 인숙( 강주희 )과의 로맨스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는 두수는 어쩌면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 십대이다. 하지만 유신 시대의 세계관에서 두수는 자기 절제를 하지 못하고 미래에 대한 꿈도 없는 '잘못된' 청소년이다. 그러기에 '교화(敎化)의 서사'가 시작된다. <고교얄개>의 이야기를 추동시키는 원동력은 두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한 주변 인물들의 노력이다. 교장 선생님을 비롯해 부모와 국어 교사인 백상도( 하명중 )와 그의 하숙집 딸인 인숙 그리고 같은 반 친구인 호철(김정훈)까지 이 과정에 동원된다. 특히 호철과의 관계는 핵심이다. 두수의 장난으로 안경이 깨진 호철은 다리를 다쳐 학교를 나오지 못한다. 어떤 죄책감을 느낀 두수는 호철의 집을 찾아간다. 이층 양옥에 사는 부잣집 아들 두수와 달리, 가난한 달동네에서 살고 있는 호철. 이때 호철이 두수에게 하는 말은, 영화의 테마를 지나칠 정도의 직설법으로 전한다. “두수야, 저길 좀 봐. 저 장관을 이룬 즐비한 고층 건물들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었겠니. 모두가 피와 땀이 이뤄놓은 기적이야. 난 비탈진 언덕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어. 발길은 가볍고 마음은 늘 무럭무럭 자라지. 난 열심히 공부해야지, 어서 자라야지, 그리고 저 많은 빌딩 속에 뛰어들어 주인공이 되어야지. 난 늘 이렇게 결심한단다. 가난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야. 다만 불편할 따름이지. 얄개야, 우리에겐 밝고 희망찬 내일이 있어. 그 풍요한 내일의 세계를 이룩하려면, 학생 시절에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이 시기 청소년들을 길들이기 위한 산업화 이데올로기의 성공 신화와 성장주의적 가치 체계를 내화한 호철은, 성인이 되기 전에 '아버지의 법'을 체득한 소년이다. 여기서 <고교얄개>는 호철을 두수가 따라야 할 인간형으로 설정한다. 두수는 호철처럼 새벽에 우유 배달을 하고, 호철처럼 수업 시간에 열심히 공부하며 '호철화'된다. 이 영화는 이러한 방식으로 두수를 '유신 청소년'으로 교화하며, 그 대가로 '인숙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이성애적 로맨스의 성공을 선사한다. 두수는 그렇게 어른이 되는 것이다. 물론 <고교얄개>는 밝은 구석이 많은 영화다. 두수가 만들어내는 악의 없는 유머의 에피소드들은 관객을 미소 짓게 하며, “아기다리 고기다리 던데이트”(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데이트) 같은 대사는 당시 유행어가 될 정도로 재치 있는 언어 유희였다. 남녀 학생들의 하이킹이나 운동회의 차전놀이는 해방감을 준다. 하지만 이러한 장면들을 즐기다가도, 학교 건물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표어(“오늘의 안보 없이 내일의 번영 없다”)나 “북괴의 야욕에 맞서기 위해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이나 '근대화 연쇄점'이라는 동네 구멍가게 간판을 맞닥트리게 되면, 군대식 사회였던 '1970년대'를 환기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고교얄개>는 분열증적이면서도 순응을 요구하는, 당대의 시대 정신을 그대로 담고 있는 작품인 셈이다. >> 고교얄개 고화질(HD) VOD 보러가기 <<
198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과거에 가장 의존적이었던 장르는 하이틴 무비와 청춘 영화일 것이다. 모든 건 1970년대에 결정되었고, 1980년대 충무로에서 만들어진 틴에이저와 청춘의 이야기는 대부분 과거의 답습 혹은 각색이었다. 여기서 ‘1975년’은 기억할 만하다. 이 해에 얄개 영화가 시작되었고,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이 나왔다. 이후 1980년대는 물론 21세기까지도, ‘스물 즈음’을 다룬 한국영화는 1975년이라는 시간에 정박되어 있었다. 먼저 하이틴 무비를 보자. 조흔파의 소설을 각색하고 안성기 가 주연을 맡은 1965년의 < 얄개전 >( 정승문 )이 있었지만, 얄개(얄미운 개구쟁이) 영화의 물꼬를 튼 영화는 10년 후인 1975년의 < 여고 졸업반 >( 김응천 )이었다. 1976년 문여송 감독의 ‘진짜진짜’ 시리즈가 이어졌고, 1977년 석래명 감독의 < 고교 얄개 >(1977)가 나오면서 ‘얄개의 전성시대’가 열렸으며, 1978년에 김응천-문여송-석래명 3인방은 옴니버스 영화 < 우리들의 고교시대 >에서 만난다. 1, 2. < 고교 얄개 >와 < 대학 얄개 >( 김응천 , 1982). 얄개 영화의 전통은 1980년대도 지배했다. 3, 4. < 바보들의 행진 >과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 ‘병태’의 청춘 스토리는 지속된다. ‘얄개 영화’는 유신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을 위한 가이드라인이었다. 최고 권력자를 정점으로 국가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했던 시기를, 입시의 중압감과 칙칙한 교복과 ‘교련’으로 상징되는 군대식 학교를, 게다가 남녀 공학마저 없었던 시대를, 한참 꿈 많고 호기심 충만한 틴에이저로 살아간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거다. 여기서 얄개 영화는 작은 해방구이자, 참고 견디며 현실에 순응하자는 국책성 메시지였다. 각자의 개성과 고민이 있지만 결국엔 흐뭇한 웃음으로 무마되고, “그렇게 우린 성장한다”는 식의 찡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던 영화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 바보들의 행진 >은 아직까지도 ‘한국 최고의 청춘 영화’로 꼽히는 작품이다. 실제 대학생들을 캐스팅 한 이 영화는 당시 캠퍼스 청춘 문화를 배경으로 로맨스와 청춘의 고뇌를 담아내고, 동시에 숨 막히는 시대에 대해 절규한다. 그리고 한 친구는 죽음을, 한 친구는 군 입대를 선택한다. 장발 단속과 통금과 휴교령의 시대에 “한 마리 예쁜 고래를 잡는 것”이 꿈이었던 젊음의 이야기. 이 영화는 이후 청춘 영화의 정전이 된다. 그렇다면 1980년대의 양상은 어떠했을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 이장호 , 1980)처럼 청춘들의 모습을 사회적 메시지와 결합시킨 작품도 있었지만, 여전히 ‘털보’ 김응천 감독의 영향권 아래 있었다.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가 이룬 자가발전은 곧 10대를 다룬 하이틴 영화와 20대 초반을 다룬 청춘 영화를 아우르며, 이 장르들 자체의 역사가 된다. 유신 시대가 막을 내리고 교복 자유화가 이뤄진 1980년대에 얄개 영화는 지속될 수 없었다. 이때 김응천 감독은 대학 문화를 얄개 영화 방식으로 접근한다. < 꽃밭에 나비 >(1979)부터 조짐이 보였고, < 모모는 철부지 >(1980) < 달려라 풍선 >(1980) < 내 이름은 마야 >(1981) < 갈채 >(1982) 등을 거쳐 그는 드디어 < 대학 얄개 >(1982)와 < 대학 들개 >(1983) < 대학 괴짜들 >(1984)에 도달한다. 이 영화들의 테마는 꽤 익숙했다. 가난 속에서도 잃지 않는 희망, 진실한 우정에 대한 깨달음, 부모의 강요와 자신의 꿈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화해, 학교생활의 낭만과 로맨스, 이루어지지 않는 첫사랑…. 김응천 감독의 ‘대학 청춘 영화’들은 여전히 얄개 영화의 세계관 안에 있었다. 고등학교는 대학 캠퍼스로, 교복은 사복으로, 치열한 입시는 머리 싸매는 고시로, 제과점은 나이트클럽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1. 김응천 감독은 1970년대 틴에이저 무비를 개척해 1980년대 청춘 영화로 변형시켰다. 그는 1980년대에 20편의 하이틴 청춘 영화를 만들었다. 2. 이규형 감독은 1980년대 청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3. 이장호 감독의 < 바람 불어 좋은 날 >(1980). 1980년대의 포문을 연 이 영화는 < 바보들의 행진 >과는 다른 방식으로 청춘의 현실을 다룬다. 4. 전상국 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임권택 감독의 < 우상의 눈물 >(1982). 얄개 출신인 진유영 은 이 영화에서 사뭇 다른 톤의 십대 연기를 보여준다. 배우들도 여전했다. 단짝이었던 김정훈 이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지만, 이승현 은 여전히 ‘사고뭉치’ 캐릭터로 이 장르를 이끌었다. 그는 김응천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 대학에 가고 결혼을 하고 취직을 한다.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과 ‘앙토완 드와넬’ 시리즈의 장 피에르 레오처럼) 한 감독의 영화 안에서 배우가 성장하는 ‘감독-페르소나’ 관계였던 셈이다. “흥, 절교야!”라며 홱 토라질 때 남학생들의 애간장을 녹이던 깍쟁이 강주희 , 완력을 앞세우던 ‘마초 고교생’ 진유영 , 어눌하면서도 인간적이며 낙관적인 의리파 손창호 ,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김보연 , 부잣집 도련님 스타일의 활동파 전영록 , 동안의 감성파였던 전호진 과 박재호 (이후 < 내일로 흐르는 강 >(1996)으로 감독 데뷔), 얄밉게 고자질하던 강남길 …. 그들은 여전히 얄개 시절의 캐릭터를 지닌 채 대학생이 되었다. 오토바이 사고로 활동을 중단했던 이덕화 는 < 대학 얄개 >에 ‘얄개 1기 선배님’으로 불리며 등장하기도 했다(단 20대에 접어든 임예진 은 연기 변신을 시도하며 이 대열에서 이탈한다). 인력 충원도 있었다. 송승환 김주승 강문영 이미영 조용원 등이 ‘포스트 얄개’ 시대의 청춘스타가 되었고, 이미숙 이나 원미경 도 이 장르에 적잖은 지분을 가지고 있었다. 특기할 사랑은 가수들의 진출이었다. 전영록 의 사례가 있긴 했지만, 1980년대엔 가요계와 영화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두드러졌고, 청춘 영화 장르는 그 격전지였다. 일단 당대 최고 인기 밴드였던 송골매가 있다. 처음엔 카메오처럼 등장하더니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와 < 대학 괴짜들 >에 이르면 배철수 와 구창모 는 주요 배역을 차지한다. 숨은 강자는 김형용 이었다. ‘김형용과 톱니바퀴’의 리더로 ‘해변가요제’ 출신인 그는 당대는 희귀한 미소년 스타일로 어필했다. < 고래 사냥 >( 배창호 , 1984)의 김수철 , < 졸업 여행 >( 오성환 , 1985)의 김범용 도 가세했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의 전환점(사실 하강점)이 되는 영화는 이상아 와 하희라 주연의 < 말괄량이 대행진 >(1986)이다. 여기서 그는 다시 고교 시절로 돌아가며, 다음 해 < 얄숙이들의 개성 시대 >(1987)를 이어간다. 이런 회춘이 가능했던 건, 새로운 스타덤의 등장 덕분이다.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하희라 이상아 김혜수 김희애 이응경 최수지 이미연 , 그리고 강석현 이재학 민규 최재성 최민수 허준호 박중훈 김민종 김보성 김세준 등은 좀 더 화려한 아이돌 스타덤을 이루었다(1980년대에 한국의 아이돌 문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여기서 김응천 감독은 기존의 청춘스타를 조연으로 기용하고, 신진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나름의 ‘절충’을 이룬다. 1. 김응천 감독의 < 대학 들개 >(1983). 전영록 과 이승현은 1980년대에도 여전히 얄개로 활동했다. 2. < 스물한 살의 비망록 >( 김응천 , 1983)의 송승환 과 강문영 . 1980년대 초에 새롭게 등장한 청춘 배우. 3. < 모두 다 사랑하리 >( 김응천 , 1983)의 김형용 . 가수이자 배우로 1980년대 초 청춘 영화를 잠시 이끌었다. 4. < 대학 괴짜들 >의 배철수 . 그가 속했던 밴드 ‘송골매’는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청춘스타 중 하나였다. 스타 지형도만 변한 게 아니었다. 1980년대 중반, 한국의 틴에이저 무비는 1970년대의 영향권을 벗어나 드디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 김응천 의 세계관’을 벗어나기 시작한 십 대의 이야기는 훨씬 더 거칠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시작은, 당시로선 충무로에서 정말 드물었던 ‘20대 여성 감독’ 이미례 의 데뷔작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1984)이었다. 호즈미 다카노부의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한국영화의 10대들이 더 이상 얄개 영화의 해피 엔드에 갇혀 있을 순 없다고 말한다. 폭력적 사회와 무관심한 가정 사이에서 콤플렉스를 지닌 16세 소녀 유리( 김진아 )는 갈 길을 잃고 저항한다. 1985년 동명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 차현재 , 1986)은 밤거리를 헤매는 아이들의 사연 속으로 들어간다(< 나쁜 영화 >( 장선우 , 1997)의 선배격이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비디오 다방, 술집, 대학로, 만화가게, 성인 오락실, 나이트클럽, 여관 등을 휘저으며 단속에 걸린 10대들을 경찰 보호실로 내몬다. 영화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그들의 속마음을 드러내며, 소외당한 아이들의 외침을 들려준다. 이런 시도들은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 강우석 , 1989)를 통해 대중적 폭발력을 지닌다. 1990년대 초 기획영화의 포문을 여는 ‘신씨네’의 신철 대표는 이 영화의 기획을 맡았는데, 그는 수백 명의 중고등학생들을 만나 직접 이야기를 들었고, 취재를 바탕으로 김성홍 감독이 시나리오를 썼으며,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학창 시절의 에피소드와 로맨스를 배치함으로써 얄개 영화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이 영화는 당시 아이들이 실제 모습을 영화에 담아낸다. 이후 <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 >( 김성홍 , 1990) < 사랑은 지금부터 시작이야 >( 이미례 , 1990) < 있잖아요 비밀이에요 >( 조금환 , 1990) < 열아홉의 절망 끝에 부르는 하나의 사랑 노래 >(강우석, 1991) < 인생이 뭐 객관식 시험인가요 >( 강구연 , 1992) 등 ‘긴 제목 영화’들이 쏟아진다. 다소 나이브한 태도는 있지만, 이 영화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아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포착했던 영화들이었다. 리얼리즘에 좀 더 기운 영화들도 있었다.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 황규덕 , 1990)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와는 다른 방식으로 입시 지옥을 보여주는데, 담임 교사( 문성근 ) 캐릭터를 통해 ‘참교육’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이것은 1987년 민주화 항쟁 이후 변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움직임과 맞물리는 부분으로, 1989년에 ‘전교조’를 계기로 ‘참교육’이라는 단어가 등장했고 그 문제의식은 영화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단체 ‘장산곶매’에서 제작한 < 닫힌 교문을 열며 >( 이재구 최호 김숙 김건 강경환 황길재 , 1990)는 바로 전교조 문제를 담아낸 첫 영화였다. 1. < 방황하는 별들 >의 이상아 . 이상아는 1980년대 후반기에 등장한 새로운 아이돌 스타덤의 기수였다. 2. < 캠퍼스 연애특강 >( 조금환 , 1988)의 강석현 하희라 민규 . 3. < 수렁에서 건진 내 딸 >의 김진아 . 4. 연극을 영화화한 < 방황하는 별들 >은 다큐멘터리, 극영화, 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적 요소가 결합된 실험적 작품이었다. 틴에이저 무비 계열에서 ‘현실’이라는 화두가 떠오르며 얄개 영화와의 결별이 서서히 이뤄졌다면, 청춘 영화 계열에서도 작은 변화는 있었다. 이 시기 조금씩 시도되던 청춘 로드 무비가 그렇다. < 바보들의 행진 >의 병태( 윤문섭 )가 꿈을 찾아 떠나듯, < 고래사냥 > < 열아홉 살의 가을 >( 김응천 , 1984) < 가슴을 펴라 >( 최원영 , 1987) < 굿모닝! 대통령 >( 이규형 , 1989) 등의 그들도 길 위에서 인생을 배운다. < 내일은 뭐 할 거니 >( 이봉원 , 1984) 같은 실험적 영화도 등장했다. 1960년 4.19 때 도주 중이던 대학생과 창녀 사이에서 태어난 주인공 B( 강석현 )은 대학생이 된 1980년대에 마치 사회 부적응자처럼 방황한다. 아마도 < 바보 선언 >( 이장호 , 1984)과 함께 가장 파격적인 스타일과 내러티브의 1980년대 영화로 기억될 <내일은 뭐 할 거니>는 당시 젊은이들의 무기력함에 대한 메타포였다. 새로운 흐름을 만든 사람은 이규형 감독이었다.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1987)가 흥행작이지만, 먼저 그가 20대 때 만든 데뷔작 < 청 블루 스케치 >(1986)를 주목해야 한다. 이 영화는 당시로선 드물게 ‘청춘 비가’ 스타일의 영화였으며, 이야기보다는 모던한 공간 감각과 비주얼에 더 초점을 맞춘 작품이었다. < 비 오는 날의 수채화 >( 곽재용 , 1990)나 < 비트 >( 김성수 , 1997)의 장르적 근원을 더듬다 보면 <청 블루 스케치>를 만날 수 있는데, 로맨스와 범죄 세계의 폭력과 비극적 서사 장치를 결합한 청춘 영화는 1980년대에 만나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밋밋한 흥행(서울 관객 약 4만 명) 이후 이규형 감독은 ‘얄개의 세계’에 더 접근했고,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로 서울 관객 약 26만 명을 동원한다. 대학 초년생인 영문과 미미( 강수연 )와 신방과 철수( 박중훈 )의 연애담인 이 영화는, 미래지향적 분위기와 젊은 날의 고뇌를 동시에 담았고, 이규형 감독은 청춘 영화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등극한다. 이 영화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또 한 명은 배우 박중훈이었다. 그는 < 이장호 의 외인구단 >(1986)으로 상한가를 치던 최재성과 투 톱을 이뤄 <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 >(1988)와 < 내 사랑 동키호테 >(1989)를 이끈다. 메가폰의 주인은 얄개 영화의 장인이었던 석래명 감독. 그런데 두 영화는 같으면서도 달랐다. 두 편 모두 젊음과 사랑과 도전과 우정을 다루지만, <내 사랑 동키호테>는 당시 입시 현실을 다루던 하이틴 영화와 접점을 지닌다. 두 주인공이 개발한 ‘쿨쿨 머신’은 수면 중에도 뇌파 조작을 위해 학습을 할 수 있는 기계. 이것은 당시 밤낮없이 책상 앞에 앉아 입시 공부에 매달려야 하는 십 대의 현실에 대한 풍자였다. 이처럼 1980년대 말에 오면, 이 장르 안의 그 어떤 영화도 현실을 외면하지 못하게 된다. 1.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는 하이틴 영화가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한 영화다. 2. < 꼴찌부터 일등까지 우리 반을 찾습니다 >는 ‘참교육’을 이야기한다. 3. < 내일은 뭐 할 거니 >는 실험적 스타일 속에서 억압적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 4. <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 >는 1980년대에 가장 흥행한 청춘 영화이다. 1970년대 얄개 영화와 청춘 영화는 1980년대 시기 변형을 겪은 후 1990년대에 리얼리즘으로 방향을 잡았다. < 숲속의 방 >( 오병철 , 1992)이나 < 세 친구 >( 임순례 , 1996) 등이 ‘현실’이라는 프리즘으로 방금 고등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의 삶을 바라본다면, < 정글 스토리 >( 김홍준 , 1996)처럼 힘겹게 자신의 길을 가는 청춘의 이야기가 있었다. < 비트 > < 태양은 없다 >( 김성수 , 1999) < 질주 >( 이상인, 1999) 등은 ‘도시 청춘’을 스타일리시한 영상과 결합시켰다. 흥미로운 건 1990년대 말에 나타난 장르화 현상이었는데, 남녀의 성이 바뀌는 판타지 < 체인지 >( 이진석 , 1997), 아이돌 문화나 밴드 콘셉트와 결합했던 음악 영화들인 < 세븐틴 >( 정병각 , 1998)과 < 짱 >( 양윤호 , 1998) 그리고 호러 장르를 부활시킨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등이 등장했다. 어떻게 보면 1980년대 하이틴 청춘 영화는, 이 장르의 역사에서 일종의 ‘가교’ 역할을 한 셈이다. 전통은 수정되었고, 관습은 변주되었으며, 배우는 교체되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수많은 젊음의 테마들은 좀 더 시간이 흐른 2000년 이후 독립영화와 저예산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그렇다면 얄개 영화의 전통은? 거의 희석되었고, <학교> 시리즈 같은 TV 드라마를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이어졌다.
영화 촬영 감독. 써놓고 보니 그야말로 멋진 단어가 아닌가. 아마도 그 멋의 대부분은 영화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지 않은 사람의 경우 보통은, 이게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데에서 나올 것이다. 모니터 앞에 앉아서 “액션”이라든가 “컷”이라든가 하는 말들을 외치면서 배우를 감독하는 사람이 아마도 감독일 터인데, 촬영 감독이란 사람은 무엇을 감독한단 말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뭐라도 감독한다니 멋이 나는구나! ...그러니까 촬영 감독이란, 말하자면... 카메라를 감독하는 사람이리라. 영화란 매우 당연하게도, 카메라로 찍는 것이다. 제아무리 명작가가 기가 막힌 시나리오를 쓰고 명감독이 액션과 컷을 멋들어지게 외치고 명배우가 울고 웃어도, 그 촬영장 어딘가에 카메라가 서 있지 않으면, 좀 더 생색을 내자면 촬영 감독이(엣헴) 카메라의 REC 버튼을 누르지 않으면 그 순간들이 영화로 기록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그렇다면 촬영 감독이란 인간은 고작 버튼 정도를 감독하는 사람인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을 터인데,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게 이것이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카메라가 그냥 서 있을 것인지, 움직일 것인지, 혹은 움직이기로 사전에 결정을 해 두었는데 막상 움직여보니 그냥 서 있는 편이 나은 것 같은데, 그러는 사이 해는 져 가는데 접고 내일 다시 찍어야 하는지 하는 문제들이 꼭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 문제들엔 정답이라는 것이 없고, 누군가는 그것들을 조율하고 결정을 내려서 어느 순간에는 계속 버튼을 누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고로 촬영 감독이란, 촬영장에서 생기는 기술적인 문제를 감독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럼 어떻게 하면 촬영 감독이란 직업을 가지게 되는가. 소싯적부터 카메라에 숨길 수 없는 재능을 보여 빨간 버튼만 보면 누르지 못해서 안달이 난다든지 왠지 모르게 팀 버튼 영화가 취향이라든지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그것은 본인의 경우는 아닌 듯하고, 무언가 영화 언저리에서 기웃거리는 일을 하고 싶어 어찌어찌 영화학교에 들어갔으나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을 하는 건 어째 내 길이 아닌 듯한 와중에, 이것 봐라 카메라맨이란 직업이 꽤 나쁘지 않은 것이다. 촬영장에서 무언가 무거운 것도 척척 나르고 문제들을 척척 해결해 나가는 것이 무언가 척척 만들어 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졸업 작품으로 촬영한 단편 영화가 프랑스의 썩 유명한 영화제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상을 받는 바람에, 또 그런 마음이 들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계속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해서 어쩌다 보니, 덜컥 영화 아카데미에 들어가 촬영을 전공하게 되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빼도 박도 못하게 카메라맨의 삶을 선택한 거지. 카메라 뒤에 계속 있기로 한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졸업 후 통장의 잔고를 돌아보니 매우 슬퍼져서 이런저런 촬영 일들을 하면서 버티던 차에, 손태겸 감독이 영화 아카데미 장편과정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이 친구와는 영화학교 동기이자 문제의 그 졸업 영화를 함께 만드는 바람에 영화 아카데미에서까지 동기가 되고 마는 불행한 인연을 계속 이어온 사이었으며, 언젠가는 장편 영화라는 걸 한 번쯤 만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막연한 꿈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이자 무엇보다 개그 코드가 서로 잘 맞는다는 결정적인 장점이 있었다. < 아기와 나 >는 그가 예전부터 장편으로 해보고 싶다 말하던 이야기로, 큰 파고의 감정을 다루는 걸 피해가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리하여 때는 2015년 여름, 본격적인 < 아기와 나 >의 제작에 들어가게 되었다. 장편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우선 사무실에 출근하는 일이어서, 홍대 모처의 냉방이 좀처럼 되지 않는 사무실에 스태프들과 모여앉아 여러 가지 촬영 계획을 짜야 했다. 처음으로 장편 영화의 촬영을 맡게 된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제작비 통장을 볼 때마다 문득 슬퍼지곤 해서, 이런 돈으로 사람을 쓰려 하면 안 된다고 훈계하신 미술 감독님도 계셨고, 미팅을 하러 왔다가 페이를 듣고 허허 웃으면서 사라져 가신 녹음 감독님도 계셨더랬다. 어찌 되었든 영화는 찍어야 되지 않겠는가. 연출부는 손태겸 감독의 지인들이었는데, 여러 가지 처참한 상황에도 쉽지 않은 준비 기간 동안 쉽지 않은 일들을 함께해 주었다. 보통은 영화 준비 기간에 본 촬영에 들어가면 이러이러한 동선과 화면으로 이래이래 찍자 하고 계획을 짤 때면 콘티 작가가 붙어 그림을 그려서 계획을 세우고는 하는데, 우리는 대신 감독과 연출부들이 사무실 근처 공간들을 오가며 촬영 현장을 가정하고 연기하면서 실제 사진을 찍어 콘티 작업을 대신했다. 이런 작업 방식은 많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퇴근을 하지 못하고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점에서 아픔이 많은데, 모두가 한마음으로 영화에 관한 열정이 있었으니까...!! 라고 말한다면 적잖이 간지러운 이야기이고, 사실은 우리 모두 이 과정이 꽤 즐거웠었으니까. 라는 생각이다. 영화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은 실은 그런 종류의 일들이 연속되는 나날들이다. 어쨌거나 영화를 만드는 일 밖에는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으니까. 우리가 만들 영화는 이런 모습이 될 거야, 라고, 준비하는 시간이나마 낙관하는 일. 화이트보드 언제나 실제 상황은 낙관적이지 않다. 주연으로 결정된 이이경 배우는 한창 떠오르는 스타로 TV 프로그램과 드라마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바빴고, 정연주 배우는 실제 촬영 회차는 많지 않았음에도 TV 쇼에서 고정 패널을 맡고 있어서 일정 조율이 쉽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영화의 수없이 많은 변수들 덕분에 프로덕션을 앞둔 우리는 사무실의 화이트보드에 스케줄을 작성해놓고는 가안과 수정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끼리는 ‘강 건너기 게임’이라고 부르곤 했는데, 왜 있잖는가, 양치기가 늑대와 양과 양배추를 강 건너까지 보내야 하는데 늑대와 양을 두고 가면 늑대가 양을 잡아먹고 양과 양배추를 두고 가면 양이 양배추를 먹어치우고 하는 문제들. 이날은 10씬을 찍고 20씬으로 이동하면 되지 않을까? 아뇨 그때 이경씨가 스케줄 때문에 이 시간 이후만 가능한데요? 그러면 10씬 대신 9씬을 집어넣으면? 그때는 그 장소가 몇 시부터만 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럼 아예 8씬과 21씬을 이날 찍으면? 그러면 7, 8씬에 나오기로 한 선배님께서 일정이 어긋나는데? ...그럼 그냥 20씬만 찍는 걸로 합시다. 감독님 연락이 왔는데 그날 20씬 찍기로 한 데가 다른 날밖에 안 될 것 같대요!! ...말을 말자. 그렇다고 한들 허허 알아서들 하시고 저는 촬영장 가서 REC 버튼만 누르겠습니다. 라고 할 수가 없는 일이 아닌가. 내가 만드는 영화 속 장면 장면들이 좋은 공간에서, 좋은 빛을 받게 하고 싶으니까. 어찌어찌 그 생지옥 속에서도 최선의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배우들의 감정이, 감독이 시나리오에 묘사한 이야기가, 카메라를 통해 영화로 제대로 옮겨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모름지기 개와 애와는 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라는 격언이 있는데, 제목부터 심상치 않은 이 영화는 아직 걸음마도 못하는 아기가 어어어어어엄청나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다행히 영아치고는 몹시 수더분한 성격의 피디의 조카 예준이가 캐스팅되기는 하였으나 아니나 다를까, 낯선 사람들이 가득한 영화 촬영장에서 낯선 배우의 품에 안긴 예준 배우는 얌전하다가도 액션을 외치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우리의 배우들은 젊은 나이에 표현하기 쉽지 않은 감정들을 때로 카메라 뒤의 본인마저 찡해질 정도로 멋지게 표현해주곤 했다. 그런 감정들을 거칠더라도 온전히 카메라에 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감독과의 의논 하에 < 아기와 나 >의 촬영은 90퍼센트 이상 들고 찍기로 진행하기로 했다. 그래서 두 달이 넘는 촬영 기간 동안 몇십 킬로그램쯤 될 카메라는 촬영의 어깨 위에 대부분 올려져 있었다. 꽤나 고생스러운 일이지만 마찬가지로, 꽤나 즐거운 일이기도 했다. <아기와 나> 촬영 현장 그래서 영화 촬영이란 결국, 무거운 쇳덩이를 짊어지는 일이다. 영화 아카데미에는 어지간한 상업 영화들에 비교해도 나쁘지 않은 촬영 장비들이 구비되어 있는데, 좋은 장비가 좋은 영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만 그러한 전문적인 장비들을 사용해 화면을 어떻게 구현할까를 고민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관객이 두 시간 남짓한 러닝타임 동안 좀 더 영화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고, < 소셜포비아 > <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 > < 연애담 >과 같은 아카데미 장편들이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 뒤에서 뛰어난 촬영감독들이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장비의 전문성이란 장비의 무게이기도 해서, 그것을 운용하는 데는 그 쇳덩이들이 손에 익은 사람들의 노동이 필요하다. 영화 촬영팀은 고가의 장비들이 담긴 무거운 박스들을 많이 가지고 다녀야 하기 때문에 보통 12인승 스타렉스를 빌려 트렁크 쪽의 의자를 두 줄쯤 떼어내고 차곡차곡 장비를 테트리스해서 다니곤 한다. 짧지 않은 프로덕션 기간 동안 그곳에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노라면 어차피 잠만 자고 나오는 집보다 여기가 진짜 집처럼 느껴질 때가 있는데, 그 안에서 매일 만나는 촬영부 친구들은 어떻겠는가. 이 이상한 유대감의 정체는, 마찬가지로 스타렉스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이것 말고는 도통 재미가 없어하는 인간들이기 때문이겠지. 영화를 찍기 위해서 어딘가에 카메라를 세우는 것. 앵글 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이 글을 빌어 ‘아기와 나’의 촬영부인 이승현, 박찬희, 김선형과 데이터 매니저 오혜주에게 다시 한번 감사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프로덕션 시간표는 흘러가고 결코 끝날 것 같지 않던 < 아기와 나 >는 한 편의 영화로 완성되었다. 영화는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조만간 해외 영화제에서도 상영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 있는가 하면 그다지 좋지 않게 생각하는 관객들도 있었다만, 뭐 그런 거지. 마틴 스콜세지쯤 되는 거장도 영화를 찍어 놓으면 칭찬도 받고 욕도 먹고 하는데 우리 같은 쪼렙들이 좋은 소리만 듣겠냐. 우리는 꿈꿔오던 장편 영화를 만들었고, 그걸 의도하던 대로 어찌어찌 완성한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기도 하고. 장편 영화를 한 편 완성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통장 잔고는 계속해서 줄어들기 마련이고 그 부분은 썩 기쁘지만은 않기 때문에, < 아기와 나 > 이후에도 어떻게 REC 버튼을 꾸준히 계속 눌러 보려고 한다. 장편을 하나 찍고 나니 강의를 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겨서, 지금은 학교에서 막 카메라에에 흥미를 느끼는 젊은 친구들을 돌이킬 수 없게 부추기는 일을 하고 있다. 어차피 영화 만드는 거에 재미를 느끼기 시작한 친구들은 놔둬도 불구덩이로 뛰어들기 때문에 그다지 죄책감은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진심으로, 카메라를 책임진다는 건 꽤나 멋진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부족하게나마 이렇게 계속해봐도 괜찮지 않을까? 라고 해주고 싶은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