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게 사는 촌놈
- 감독
- 이연
- 제작년도
- 2012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하게 된 일이지만, 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솔직히 내겐 사치스러운 일이다. 영화평론가로서의 명맥을 유지하는 건 내 돈과 시간, 자원을 써야만 가능한 일이니까. 영화를 감상하고 분석하고 연구하는 걸 멈추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개봉작을 부지런히 보러 다녀야 하고, 미처 보지 못한 고전 영화도 꾸준히 찾아봐야 하며 영화 관련 이론이나 최근 담론을 공부하는 것도 게을리할 수 없다. 시간은 차치하고서라도 한 달에 청탁 받은 원고를 써서 받는 돈이 이 모든 활동을 하는데 드는 돈보다 더 많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본업이 있기 때문에 주로 평일 낮에 열리는 시사회에 가지 못해 일반 관객과 똑같이 직접 내 돈을 내고 영화를 보러 다녀야 하며 OTT 콘텐츠 구독료와 영화 관련 서적, 강의에도 돈을 쓴다. 나는 궁금했다. 다른 평론가들은 어떻게 살고 있나? 그들은 대부분 영화와 관련한 학계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거나 영화 관련 업종에 종사하고 있거나 아니면 아직 학생이었다. 나처럼 영화와 관련 없는 본업을 갖고서 퇴근 후나 주말에 짬을 내어 활동을 이어가는 평론가가 과연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이쯤 되면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야 할 것 같다. 그런데도 왜 나는 계속 영화를 보고 글을 쓰나? 비정규직 회사원과 프리랜서 생활을 번갈아 전전하며 혼자 생계를 이어가는 가난한 30대 여자인 내게 영화평론가로 활동하는 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존의 평론을 볼 때마다 나와 시선이 너무 다르다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높은 평가를 받은 영화 중 내게 불편하게 다가온 것들이 많고, 반면 주목받지 못한 영화 중에 어떻게 이런 영화가 저평가 받고 그대로 묻힌 건가 생각이 드는 것들이 있다. 이렇게 주류 대중과도 기존의 평론가들과도 시선이 어긋나는 지점들을 하나씩 짚고, 내가 영화 안에서 다르게 포착한 것들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한 영화의 뛰어남을 형식 중심으로만 얘기할 때의 거북함도 있다. 한 영화가 영화사적으로 높게 평가받을 만한 훌륭한 형식을 갖추었다는 이유로 그 안에 드러나 있는 노골적인 혐오나 비윤리성을 아예 못 본척하고 언급하지 않는 비평들이 불편했다. 영화는 형식과 내용의 결합이다. 형식이 곧 내용이라는 관점에서 비평을 한다면 놓치는 것이 너무 많다. 어쩔 때는 내용이 곧 형식이라는 관점에서 영화를 볼 필요도 있다. 형식과 내용은 결코 분리될 수도 없고,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를 온전히 대변할 수도 없다. 이런 점에서 한편으로는 타자의 입장에서 만든 영화가 그 생경함으로 인해 저평가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지금까지 말할 수 없는 입장에 놓였던 타자의 시선에서 구성된 형식과 내용은 기존 영화의 역사와 문법으로만은 파악될 수 없는 지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리턴 투 서울>(데이비 추, 2022) 중 작년에 개봉한 영화 중 가장 좋았던 작품은 캄보디아계 프랑스 이민 2세대인 데이비 추 감독의 < 리턴 투 서울 >(2022) 이었다. 한국의 해외입양 정책에 의해 갓난아기 때 프랑스로 입양된 한국 여성 ‘프레디’가 20대 중반에 처음으로 한국에 와서 겪는 혼란들을 불균질적으로 담아냈다. 최근 활발하게 제작되고 있는 아시안 디아스포라 영화의 자장 안에 놓여 있다고 할 수도 있지만, 결이 조금 다르다. 부모 세대나 자신의 의지로 인해 외국에 정착하게 된 이민자들이 주류 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을 그린 게 아니라, 어렸을 때 입양되어 외국인 부모 밑에서 평생을 그 나라의 시민으로 자라다 성인이 되어 처음으로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이 느끼는 당혹스러움을 담았기 때문이다. 프레디의 감각은 그 어떤 한국인과도, 프랑스인과도, 또 프랑스에 정착해 살고 있는 한국인 이민자와도 다르고, 프레디의 부모 찾기 여정은 < 라이스보이 슬립스 >(앤소니 심, 2022)의 경우처럼 캐나다에 이주했다가 한국의 친가에서 아버지의 흔적을 통해 한국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는 동현(이든 황)의 경우와도 매우 다르게 진행된다. 입양아, 한국계 프랑스인, 여성이라는 삼중의 소수자성이 교차되며 만들어지는 감각의 특수함이 긴 시간 안에서 파편적으로 묘사된다.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중요성과 작품성에 비해 주목받지 못했다고 느꼈던 영화 중엔 여성 주체의 이야기를 여성의 시선에서 만든 영화들이 많다. 작년에는 < 나의 피투성이 연인 >(유지영, 2023)이 그랬다.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 문제를 그린 영화는 많지만 보통 그런 영화는 두 가지 중 하나의 방향을 선택한다. ‘그래도 낳아야 한다’라는 당위성 안에서 아이 낳는 과정을 어떻게든 긍정적인 색채로 꾸미거나 또는 아이를 지울 수 없거나 결국 낳게 되어서 불행에 휩싸이는 여성의 삶을 고통스럽게 묘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은 그런 이분법적 함정에 빠지지 않고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여성 예술가가 자신의 작업을 계속 해나가기 위해서 어떤 선택에 직면하고 어떤 비난에 취약하게 노출되는지를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에 무너지지 않고 그녀가 자신의 신념을 지킬 때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게 되는지를 냉정하게 담아낸 결말에 힘이 있었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 절해고도 >(김미영, 2021)에서도 최근 한국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풍경과 감각을 마주했다. 여성 캐릭터와 남성 캐릭터 간의 관계 묘사가 레퍼런스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신선했고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그에 영향받는 등장인물의 고통에서 한 발짝 물러나 시간과 여유를 갖고 지켜보는 거리감도 범상치 않았다. 계절감을 갖는 자연을 풍부하게 담은 것도 인상적이었다. 조각가인 윤철( 박종환 )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 자신에게 예술가로서의 재능이 그다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방황한다. 그러던 중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딸인 지나( 이연 )가 미대 진학을 포기하고 출가를 하겠다고 한다. 예술가가 되지 못하면 스님이나 수도사가 되고 싶었던 윤철은 그가 갖지 못했던 재능을 갖고 그가 가지 못했던 길을 가는 딸을 지켜보며 변화한다. 속세에 있을 때 서로 가시 돋친 날카로운 반말을 스스럼없이 주고받던 부녀는 딸이 행자가 되고 난 후 예우를 하고 존대하며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자신의 욕망을 우선시하며 딸의 삶에 간섭하기 보다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선택해 걸어가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지하면서 윤철 자신도 변화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부분 핸드헬드에 롱테이크로 찍혀 불안감을 자아내지만 지나가 도맹 행자가 되고 난 뒤의 후반부에서는 이들의 모습을 고정샷으로 차분히 지켜본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인해 한때 관계가 틀어졌던 애인과의 관계 또한 변한다. 윤철은 암이 재발해 죽어가는 전 연인을 바라는 바 없이 옆에서 지켜봐 주고 또 그녀가 자신의 존엄을 위해 호스피스로 가는 선택 또한 존중해 준다. <절해고도>를 만든 김미영 감독은 임권택 감독 밑에서 십여 년 동안 연출부로 활동했다. 이번 작품은 마찬가지로 임권택 감독과 일했던 강창호 미술감독과 함께 만든 영화이다. < 안개마을 >(임권택, 1982)을 레퍼런스로 해서 자연 안에서 인물이 하나의 요소로 공존하고 어우러지는 모습을 표현했다.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1981), < 아제아제 바라아제 >(1989) 같은 불교영화에서 다뤘던 주제의식을 이어가면서도 여성을 타자화했던 시선에서 벗어나 모든 인물을 주체로 그린 점이 인상적이었다. 구도의 길을 걷는 주체와 그를 현혹하는 타자의 이분법을 벗어나면 영화의 정서와 스토리의 방향성, 미학 등도 다 함께 바뀌게 된다. 한국 영화의 거장 아래에서 받은 영향을 짙게 드러내면서도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의 시선에서 이뤄진 이 전환에 대해 좀 더 주목하고 의미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절해고도>(김미영, 2021) 중 한 편의 영화엔 세상과 인생을 대하는 감독의 태도가 담겨있다. 무엇을 담을 것이고 어떤 거리에서 어떤 시간과 빛으로 그 장면을 구성할 것인가? 이건 영화에 대한 지식과 경험에 더해 살아온 삶과 사유가 어우러져 만들어지는 것이다. 결국 영화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이고, 거기엔 단순히 영화의 역사나 형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것을 초과하는 삶이 있다. 따라서 한 편의 영화를 이해하는 데는 영화사에 대한 지식뿐만 아니라 삶의 감각도 필요하다.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 비슷한 교육을 받고 비슷한 과정을 거쳐 비슷한 삶을 삶고 있는 사람들은 한 영화를 비슷하게 평가할 것이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배경에서 다른 삶을 산 사람이 그 영화를 본다 해도 그 영화에 대한 비슷한 평을 가질 수 있을까? 어떤 감상들은 그것이 전문적인 영화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너무 쉽게 무시당하고 간과된다. 하지만 다른 위치에서 오는 삶의 감각으로 영화를 보는 사람의 의견은 한 영화를 둘러싼 담론의 장을 넓히고, 영화가 나아갈 수 있는 다른 방향성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등단한 후에도 영화를 보고 영화에 대해 쓰는 내 삶과 태도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블로그에 취미로 영화 비평을 쓰던 아마추어 정신으로 평론을 쓰고 있다. 주류에서 비켜난 자리에서 내가 좋다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영화의 흥행이나 홍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청탁이 들어와도 본업에 치여 마감을 어기기 일쑤이고, 별로라고 생각한 영화에 대해서는 에둘러서라도 칭찬을 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나는 영화평론가라는 명칭에 걸맞은 자격을 여러모로 갖고 있지 못하면서도 우연히 등단한 후 뻔뻔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있고, 이런 자리에서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오늘도 영화를 보고 글을 쓴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유지영, 2023) 중 박예지(영화평론가) l 소수자의 시선에서 영화를 보고 쓴다. 2022 영화의 전당 영화평론대상을 수상하며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 영화비평 구독 메일링 서비스 <씨네픽션> 운영.
작년 한 해는 뭐 하는 한 해였는지 모르겠다. 코로나19 판데믹 때문에 영화업계는 불안과 침체가 주였던 것 같은데 그나마 이래저래 만난 한국 영화들이 2020년을 관통하는 한 줄기 빛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1월 말, 2월 초 참가했던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는 윤단비 감독의 < 남매의 여름밤 >이 밝은 미래 부문 상을 탄 것, 같은 곳에서 다른 한국 영화들의 활약과 함께 작년 칸 영화제 황금 종려상을 탄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이 흑백 버전 월드 프리미어와 마스터클래스를 엄청난 열기 속에 마친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 곧이어 2월 초 미국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전례 없이 비영어권 영화로 <기생충>이 최고 작품상을 비롯한 4개 부문 상을 휩쓴 것으로 기분 좋게 시작한 한 해였다. 세계인이 감탄한 가운데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LA 현지 시각 2월 9일) 끝나고 이틀인가 사흘 후, 연상호 감독과 < 반도 > 단독 인터뷰를 할 때까지만 해도 서울에 있는 투자배급사의 밀폐된 유리 상자 같은 회의실 안에서는 마크스를 벗고 이야기한 것이 기억이 난다.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거의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옮겨진 일상에 오늘도 Zoom 화상 인터뷰가 잡혀있다.) 어쨌든 한국 안팎으로 2016년작 < 부산행 >이 이례적인 인기를 끌었던 것에 이어 그 후속작인 <반도> 역시 칸 영화제 월드 프리미어 후 여름 성수기 텐트폴 개봉의 수순을 밟을 것에 국제적인 기대가 이미 모아졌던 때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2020년은 정말 신나는 한 해가 될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 글을 쓰는 11월 말, 12월 초 시점에서는 이게 다 올해 얘기 맞나 팩트 체크를 해야 할 정도로 다른 세상의 먼 과거 얘기가 돼버린 것 같다. 2월 베를린 국제영화제 이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COVID-19)’라는 말이나 ‘판데믹이 영화업계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한 얘기가 빠지는 기사는 거의 쓴 적이 없는 것 같다. 세계적으로 극장 관객 수는 폭락했고 영화사들은 극장 개봉을 미루거나 OTT로 직행했고, 칸 영화제도 취소한다 만다 한참 끌다가 결국 6월에서야 선정작 발표만 하고 물리적 영화제 자체는 취소하는 형태가 됐고, 앞으로 영화 제작과 상영은 잘해나갈 수 있을까 계속 불안하고 우울한 2020년이 돼버렸다. (그래도 일찍부터 세계 여름 동시기 개봉을 준비했던 <반도>는 그나마 코로나19 방역 조치를 잘 취한 한국 외 아시아 몇 개국 중심으로 개봉을 과감히 실행하면서 얼어 있었던 극장가를 어느 정도 녹여주었다. 칸 영화제는 열리지 않았지만 공식 선정작 목록에 오른 <반도>는 그것과 별 상관 없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이례적인 흥행기록을 또 세웠고, 국제 영화업계는 그 행보에 주목했다.) 그리고 수개월 간 개막을 할지 말지 고민하던 부산 국제영화제는 조심스럽게 사회적 거리두기 및 방역 조치를 강화한 상태의 축소된 행사를 10월에 개최하기로 했다. 이에 <스크린 인터내셔널>에서는 영화제에 선정된 떠오르는 한국 영화 신인들 몇에 대한 취재를 하게 됐고, 덕분에 신선한 장편 데뷔작들을 또다시 볼 수 있게 됐다. 그 중 뉴 커런츠 부문에 선정된 이란희 감독의 < 휴가 >가 기억에 가장 남는 영화 중의 한 편이다. 보통 취재를 위한 스크리너 링크를 받으면 당장 관람하지 못한다. 다른 일이 좀 없는 늦은 밤이나 주말에 볼 수 있게 되는데, 그때 가서 링크에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을 발견할 경우, 보내준 이에게 연락하기 곤란한 타이밍이다. 그래서 이메일로 받으면 “잘 받았습니다” 답신을 하기 전에 먼저 스크리너를 잠깐씩 틀어본다. 앞부분 크레딧과 첫 장면 몇 초가 잘 나오나 보고, 무작위로 중간쯤 계속 문제없이 나오나 한두 군데 정도를 틀어본다. 스포일러가 될까 봐 2-5초씩만 틀어본다. 그리고 아무리 그래도 맨 끝은 피한다. 그런데 반갑게도 이번 부산 영화제 기대작으로 받은 스크리너들은 거의 다 불과 그 몇 초 안에 ‘아, 이 영화 좋을 것 같다’ 싶은 것들이었다. 그리고 다 보고 났더니 실제로 이 불안하고 침체된 시기에 영화에 대한 희망을 주는 작품들이 맞았다. 신기해서 주로 취재 기자로 일하는 나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전문적으로 보고 평가하는 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와 평론가 친구들에게 SNS상으로 물었다. 어떻게 몇 초 안에 영화가 좋다는 게 티가 나지? 무슨 연출력의 힘이나 미쟝센의 요소들이 결합하면 총 5초 내에 느낌이 오게 할 수 있을까? 쟁쟁한 영화제 프로그래머들도 제대로 답을 못 해준 건지 안 해준 건지 그저 좋은 영화를 봤다니 기뻐해 주고, 기껏 해 봤자 ‘많이 보다 보면 알아볼 수 있게 된다’ 정도였다. 주인공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3초 동안 나오는데 ‘뭐 하나 동행해 보고 싶다’,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배경과 소리가 나오는 장면을 2초 동안 보는데 ‘저 안에서 호흡해 보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무슨 화학적 반응을 일으켜 그런 느낌을 주는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휴가>도 분명히 그런 영화 중 하나다. <휴가>는 중년의 해고 노동자 재복이 동료들과 함께 1,882일째 농성하는 날 해고 무효 소송에서 최종 패소하고, 일단 장기 농성을 하던 차가운 노상의 텐트를 떠나 며칠간 재충전의 시간, 남들처럼 ‘휴가’를 가자는 결론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엉망이 된 집에 들어간 재복은 밀린 청소와 정리를 시작하는데 딸들은 너무 오랫동안 가정을 비웠던 아빠가 반갑지 않다. 농성장에서 식사 담당인 재복은 집에서도 따뜻한 밥을 차리지만 애들은 외면하고 늘 먹었던 듯한 라면을 알아서 해 먹는다. 고3인 큰딸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합격한 대학에 낼 예치금이 필요하고, 작은딸은 롱 패딩 코트를 갖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재복은 얼마 없는 휴가 동안 돈을 벌기 위해 친구가 관리자로 있는 가구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이 작품은 이전에 단편 영화 < 파마 >, < 천막 > 등으로 베를린 국제영화제 외 다수 영화제에서 기대주로 떠올랐던 이란희 감독의 장편 영화 데뷔작이다. 감독은 2012년 실제로 어떤 기타 공장 해고 노동자 밴드 공연을 보고 그 멤버들에 관한 시나리오를 쓸 생각으로 취재하다가 결국 단편 영화를 몇 편 찍게 됐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보게 된 장기 농성자들 중에 12년간 투쟁한 사람이 농성장을 중간에 떠났다가 몇 번이나 돌아온 것을 보면서 궁금해하다가 어떤 일을 하다가 왜 돌아왔는지 이해하려다 이 영화를 만들게 됐다고 한다. 할 일이 있고 ‘일정이 있어서’ 그랬다고 한다. 이렇듯 재복도 가깝게는 함께 지낸 공장 동료들과 멀게는 더 큰 노조 조직들과의 연대 의식과 책임감으로 농성에 성실히 임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돌보아야 할 가족들이 있어 고민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재복은 무덤덤한 것 같으면서도 누군가 억울한 일, 어려운 일을 당한다 생각하면 없는 처지에도 발 벗고 나서서 도우려 한다. 말주변이 없는 듯하면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소신을 갖고 말할 때는 사람들이 당황해하면서도 설득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봉하 배우는 성실한 곰 같으면서도 섬세한 면을 드러내는 재복을 연기하는데 가슴을 천천히 미어지게 한다. 이 영화 전체가 그런 것 같다. 덤덤하게 다큐멘터리처럼 인물들을 따라다니는데 섬세한 순간순간과 사건들이 모여서 조용히 가슴을 미어지게 하는 게 있다. 스포일러를 쓰지 않고 이란희 감독이 쓴 시나리오를 칭찬하기 힘들다. 그런데 어쨌든 시나리오를 받쳐준 노신웅 촬영감독과 한동훈 동시녹음 기사와 이연정 편집자의 역할도 꼽을 만할 것 같다. 분명 처음에 2~5초씩 스크리너를 돌렸을 때 매력을 느끼게 한 그 모습들이나 소리들도 감독의 연출 아래 그들의 공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작품 속에 큰딸 현희를 연기한 김정연 배우, 작은딸 현빈을 연기한 이승주 배우, 그리고 작업장의 젊은 동료 준영을 연기한 김아석 배우를 보면서 계속해서 한국 영화의 자라나는 연기자 풀이 메마르지 않음에 희망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영화는 10회차, 2월 18일부터 3월 1일 사이에 촬영했다고 한다. (‘코로나19는 저희가 촬영을 마치자마자 한국이 난리 났었다’는 감독의 기억이 있다.) 주로 인천에서 촬영했는데, 한 회차는 서울 강남역 삼성해고자복직투쟁위원회 농성장에서 찍었다고 한다. 노조를 만들려다가 해고돼 복직을 위해 355일 동안 고공농성한 김용희씨가 아직 철탑 위에 있을 때의 농성장인데, 그 로케이션이 영화 속에 제대로 활용된다. 감독은 '노동 이슈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하기 힘들고 말하자면 가난한 사람, 힘이 없는 사람, 그럼에도 품위를 잃지 않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나도 평생 부자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눈이 가는 것 같다. 허투루 살지 않고, 최대한 성실하게 인간적인 측면에서’ 도리를 지키며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을 보살피려는 재복도 그런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양극화로 ‘좋은 인성까지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집안에서 세습되고 있는 생각이 들더라’ 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제도를 바꾸려는 노력도 하지만, 어쨌든 제도가 바뀌든 안 바뀌든 살아야 하니까 그럼 우리는 품위를 잃지 않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뭘 가지고 여유가 있어서 나오는 에티켓 같은 것이 아니라 힘든 와중에도 이 일은 하는 내가 사람이니까 잘하려고 하는 고민’에 대해서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도 재복은 누가 보든 말든 착실하게 정성껏 할 일을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지 그동안 농성하느라 묵혔던 기술과 경력을 살려 가구 만드는 아르바이트에 임할 때 나름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것 같다. 남들처럼 휴가 때 어디 좋은 데 놀러 가는 것도 아니고 아픈 등에 파스를 붙여가면서 노동하는 것인데도 나름 품위가 있어 보이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대충 감이 왔겠지만 <휴가>는 블록버스터 상업 영화가 아니다. 저예산 독립 영화다. 인천영상위원회, 한국영상위원회, 영화진흥위원회, 전주정보문화산업진흥원, 전주영화제작소 등 여러 단체의 기획개발, 제작, 후반 작업 등 각 단계별 지원뿐만 아니라, 밥을 날라다 주고 장소를 빌려준 지역 주민들의 성원 등 여로모로 지원이 들어간 작품이다. 영화업계 역시 양극화되어가는 상황에서 <휴가>와 같은 독립영화들도 품위 있게 지속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족한 글을 몇 자 적어봤다. 가장 인간적인 작은 단위의 관찰과 동조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라는 문제와 함께 좀 더 넓은 폭의 사회 문제도 곱씹어 볼 수 있게 하는 영화는 지원해줄 가치가 있는 것 같다. 그게 지역이나 국가의 단체로서든, 개인 극장 입장권을 예매하는 관람객으로서든, 밥을 날라다 주는 이웃으로서든 말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갈리는 것 같다. 대체로 평단에서 나온 호평들은 그간 한국영화가 깊게 들여다본 적 없던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전면화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한다. 반면 일부 SNS를 통해 짐작되는 일반 관객들의 혹평은 주로 이 영화의 거친 만듦새와 다루는 대상들, 특히 여성 인물들에 대한 남성 인물들의, 나아가 영화의 왜곡된 시선을 문제 삼는다. 한쪽은 영화 안의 폭력적 상황들을 ‘헬조선’의 괴물성에 대한 구체적 진단으로 인식하고, 다른 한쪽은 그것을 영화 자체의 위험한 태도와 등치 시키고 있다. 전자는 이 영화의 내용적 시의성을, 후자는 형식적 결함을 지적한다. 나는 이 영화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이러한 두 개의 주장들 중 어느 하나에 찬성하고 다른 하나에 반대해서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내게 이 둘은 상이한 맥락과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성과와 한계를 모두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로 소화하고 있고, <우리 손자 베스트>가 우리에게 안기는 일련의 당혹감을 단순화된 논리로 압축해버린다는 의미에서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영화의 소용돌이 안으로 들어가길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에 대한 반문을 안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렇게 표현하고 싶다. <우리 손자 베스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영토를 초과하는 곳에서 활동하는 세계다. 이 영화를 움직이는 괴이한 혼종성과 불균질한 층위들과 위태로운 리듬에 닿기 위해 지금부터 나는 위와는 좀 다른 길을 상상해보려고 한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보는 내내 우리를 따라다니며 혼란하게 만드는 물음이 있을 것이다. 가해자의 서사를 만든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의 서사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가해자의 서사를 구축하면서 영화가 그것과 완전히 거리를 두는 일은 가능할까. 그 거리는 어떻게 생길까. 그 거리는 착각일까. 더욱이 가해자의 행위를 사회 구조적인 차원 안에서 설명할 의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 이와 같은 영화 앞에서라면 더욱 난감해진다. 말하자면 이 영화에는 우리를 안도하게 할 만한 일관된 가치판단의 기준 같은 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요컨대, 영화의 시선은 인물들을 체제의 피해자로 이해하려는 쪽에 가까운가, 공모자로 공격하는 쪽에 무게를 두는가). 시선은 모호하고 서사에는 도덕의 자리가 없다. <우리 손자 베스트>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영화적 윤리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추하고 부패한 세계를 비판적으로 판단하고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그 추하고 부패한 세계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영화의 몸을 맡기는 행위와 관련된다. 그러니까 대상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대상과의 유희라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 우리가 경험하는 이상하고 당황스러우며 종종 불쾌한 기분은 어쩌면 당연한 감정인 셈이다. 혐오의 언어들, 혐오의 행위들과 유희라니, 이 영화는 결국 혐오의 운동에 동조하고 있을 뿐이라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인가. 언뜻 그럴듯해 보이는 반문이지만, 이 영화를 지탱하는 유희의 활동은 그런 반문에 무너질 만큼 단순한 차원의 것이 아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의 관심은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즉각적으로 상기시키는 두 인물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지 않다. 이것은 세계와 충돌하는 병적인 인간존재를 궁금해하거나 그들의 비뚤어진 행위를 관음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것은 ‘말’에 대한 영화다. 이 영화의 혼종성은 인물들의 신념을 체화한 말의 내용이 그 저열함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거름 장치 없이 영화적으로 나열되는 데서 비롯된다기보다는, 수많은 층위에 놓인 말들의 비일관되고 교란된 움직임들이 물질화되는 데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인물들이 아니라, 말의 움직임과 도발적이고 공격적으로 유희한다. 영화의 도입부,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구교환)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던 중,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주시하던 동영상을 훔쳐본다. 그것은 경찰이 물대포로 시위대를 진압하는 영상인데, 교환은 먹잇감을 발견한 듯, 자신이 하던 게임 속 성우의 목소리를 조작해서 그 영상에 입힌다. 영화는 단지 교환의 그러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렇게 희화화된 영상을 우리로 하여금 큰 화면으로 다시 마주하게 만든다. 이 장면은 불편하다. 처절한 시위의 현장을 간교한 편집으로 농락한 교환의 행동을 보는 일도 힘들지만,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그 영상이 우리에게 특정 사건을 연상시키는 실제의 기록이라는 점, 무엇보다 가공된 게임의 세계를 지배하던 전능한 목소리가 그 참혹한 기록을 한순간 인공적인 이미지로 돌변하게 만든다는 점에 있다. 사실을 지시하지 않는, 아니, 사실 자체에 완전히 무감한 텅 빈말의 선정적인 힘이 여기,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장면에, 이 영화를 관통하는 논쟁적인 질문이 있고 이제 우리는 그 질문을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사실(교환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팩트’다. 물론 그가 사용하는 ‘팩트’라는 단어는 팩트와 가장 먼 자리에 있다)의 진위를 탐구하고 밝히려는 영화가 아니라 말의 저 위태로운 활동을 보려는 영화다. 팩트에 조응하거나 팩트를 지시하고 설명하는 말의 기능이 아니라, 팩트를 진공상태에 두고서도 전혀 균열되지 않는 말의 뻔뻔한 표면, 말의 경박한 생동감을 따라가 보는 것이다. 그 생동감은 어떤 이성이나 논리도 없이 오직 경박한 차원의 감정으로만 지탱된다.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입에서 나오는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조롱과 혐오의 말들뿐만 아니라, 교환과 영어 선생님이 얼굴을 대면하지 않고 전화로 나누는 대화를 보라. 사실 영어 대화라고도 할 수 없는 그들 사이의 말들은 언어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암묵적인 규칙조차 사라진 일차원적인 감정의 잔여물들에 불과하다. 그것은 조롱과 혐오의 발언들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저급하기 짝이 없다. 한 장면이 있다. 고엽제 후유증으로 사망한 동료의 장례식장에서 해병대 전우회 소속의 한 남자와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사내들이 모여 있다. 그들은 고작 육개장이나 얻어먹으러 온 듯한 모양새지만, 겉으로는 현실에 대한 강한 불만과 분노의 말들을 쏟아내고 있다. 말이라기보다는 무질서한 소란에 가깝다. 그때, 그들 사이를 오가던 영화는 갑자기 모든 소리들을 다 죽여 버리고 침묵 속에서 잠시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풍경을 쳐다본다. 그러니까 이 말들의 간교한 힘을 내용적인 교정 등으로 순화시키거나 옳은 길로 인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 힘을 그저 죽이는 것만이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아주 잠깐이나마 이 장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걸 알면서도 이 영화가 그처럼 무식하고 폭력적인 말들의 집요한 활동에 ‘영화적으로’ 대면하는 방식은 그래서 더욱 놀라운 것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진짜 팩트를 제시하거나 파고드는 방식이 아니라, 그 말들의 활동에 자신의 몸 전체로 휩쓸려보고 반응하며 치열하게 대응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나는 이 영화가 현실에 대한 패러디나 풍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즉 이 영화는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울타리도 세우지 않은 채로 무모하고 위험하게 돌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영화 자신이 부서질 수도 있으며,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 말들에 오염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손자 베스트>는 그걸 겁내지 않는다. < 우리 손자 베스트 >가 ‘말의 영화’라고 할 때, 우리는 영화 속에서 성우로 등장하는 한 여인(김상현)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베와 어버이연합을 주인공으로 삼은 이야기임에도 이 영화에는 그들과 싸우는 반대진영이 등장하지 않는데,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그들과 충돌하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이 여인이다. 그 존재가 여자라는 사실만큼 중요한 건, 그녀가 성우라는 사실이다. 비록 그녀의 목소리는 교환에 의해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비인칭적으로 비열하게 사용됨으로써 처음 나오지만, 그 훼손된 목소리는 그녀의 등장과 함께 이내 온전한 육신을 회복한다. 여러모로 그녀의 음성은 그 성질상 너나나나베스트 회원인 교환, 혹은 어버이별동대 단장인 정수의 그것과 구별된다. 전자는 논리적으로 사실을 설명하고, 타자를 향하며, 감정에 동요하지 않고 나지막하고 품위 있게 명령한다. 반면 후자는 비논리적으로 사실을 왜곡하고, 자기를 향하며, 극단적으로 흔들리고, 시끄럽게 분노한다. 말의 차원에서라면, 성우의 말은 너나나나베스트나 어버이별동대의 말보다 우위에 있다. 그녀의 말이 내용적으로 더 객관적이고, 옳으며, 진정하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녀의 말에는 형식이 있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요컨대, 교환이 그녀를 납치한 후, 목욕탕에서 벌어지는 요상한 상황을 보자. 밧줄에 묶인 그녀는 교환이 시키는 말을 내뱉는다. “김일성 개새끼, 김정은 돼지 새끼.” 그러나 곧 상황은 반전을 맞고 이번에는 교환이 포박된 채, 그녀 앞에서 말한다. “이승만 개새끼, 박정희 삐, 전다크 삐, 이명박 삐, 미스 박 삐, 방 씨 일가 삐..” 내용의 수준으로 볼 때, 어느 한 쪽이 더 우월하거나 정당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양자 모두 천박한 말장난이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그들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교환의 말은 자기 만족적으로 두서없이 상대를 위협하지만, 성우의 말은 자신을 위협하는 상대의 말을 마치 거울로 반사하듯, 고스란히 되돌려 보내어 그 말에 수치심을 안긴다는 점이다. 경찰서와 목욕탕 장면에서 그녀는 교환에게 담담히 명령하지 않았는가. ‘내가 저 밖에 나가서도 소리가 들릴 정도로 너의 언어를 크게 말하지 않으면 너를 고발할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층위의 말이 (내용이 아닌) 성질로 팽팽하게 겨룬 후, 오직 말의 힘으로 그녀는 교환을 이긴다. 말과 관련해서 가장 통쾌한 성우의 장면에 대해 이야기를 했으니, 이번에는 가장 소화하기 힘든 다른 여성의 장면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일명 ‘박카스 아줌마’로 불리는 숙희(박명신)는 노인들에게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녀는 거의 언제나 술에 취해 있고, 기지촌에서 일했던 자신과 같은 여자들이 이 나라를 살린 거라고 거의 매번 같은 내용의 술주정을 한다. 그녀는 이상하게도 자신을 언어로 학대하고 때리는 정수( 동방우 )를 쫓아다닌다. 영화 중반 이후에는 교환과 섹스를 하다가 그에게서까지 모멸을 겪는다. 질문은 이것이다. 영화는 무엇 때문에 그녀의 존재를 필요로 한 것일까. 그녀가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그런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녀 또한 우리의 어두운 현실이기 때문에, 혹은 그녀를 통해 너나나나베스트와 어버이별동대의 사악함을 더 극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라고 말하는 건 당연히 설득력이 없다. 여전히 그 장면들 앞에서 고심하는 나는 지금으로서 두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단 한 장면의 힘을 보는 것이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그녀를 천대하지만, 한 남자만큼은 그녀를 아낀다. 어버이별동대에 속한 것 같지도 않고, 정수 무리들에게 늘 얻어터지는, 정체를 알 수 없지만, 어딘지 온기가 느껴지는 이 남자는 깁스를 한 채, 숙희를 식당으로 데려간다. 남자는 국밥을 시킨 후, 그녀에게 낮은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한다. “그대에게 밥상을 수여함.” 숙희는 자신을 향한 소박하고 따뜻한 환대를 수줍게 받아들인다. < 우리 손자 베스트 >에서 가장 이질적이며 정겹고 평온한 순간이다. 이 순간의 영화적 울림은 바로 전에 등장한 장면의 기운과 부딪치며 생성된다. 우리는 저 아름다운 ‘밥상’ 수여식을 보기 직전, 나라사랑유공자 보훈처에서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고 화가 난 채 빈손으로 나오는 정수의 모습을 보았다. 허황되고 속이 빈 이데올로기의 상과 정직하고 구체적인 마음의 상. 영화는 두 상을 나란히 붙여두고, 상이라는 말이 영화적으로 온전히 물질화된 순간, 말이 하나의 세계가 된 순간의 공기를 ‘밥상’의 장면에서 구현하는 것 같다. 물론 다음 장면에서 또다시 술에 취한 숙희가 정수를 찾아오고, 정수가 그녀를 따라온 깁스 한 남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면서 세계는 불행하게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다른 하나는 그녀를 성우와의 대척점에서 생각해보는 것이다. 성우의 경우, 우리는 그녀의 사적인 삶이나 과거를 알지 못한다. 김상현이 영화 밖에서 실제 성우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성우’라는 직업인으로서만 접근 가능하다. 그리고 그녀는 앞서 언급했듯, 말의 형식(음성과 태도와 논리)으로 남자들의 위협을 제압한다. 그러나 숙희의 경우, 그녀의 말에는 그러한 권위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녀의 말이 그녀를 멸시하는 교환과 정우의 말처럼 사실을 농락하고 우롱하는 광기 어린 신념의 언어도 아니다. 말과 삶과 육체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과 내용과 형식, 이 모든 것들이 경계 없이 뒤엉키고 뭉개지는 순간들을 우리는 숙희에게서 본다. 자신의 과거에 대해 그녀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한 인물을 찾기 어렵지만, 정작 그녀는 이 영화에서 그 속이 잘 들여다보이지 않는, 가장 알기 어려운 자다. 말의 형식으로도, 말의 내용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지만, 그 세계 안에서 가장 질기게 살아남아 있는 존재. 우리가 그녀의 장면들을 편히 바라보기 어려운 건, 그녀가 등장하는 장면들의 폭력적 수위 때문이 아니라, 그 사실 때문인지 모른다. 현실의 극단적인 사건이나 현상을 영화 안으로 불러들일 때, 실재의 외설성과 선정성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좋은 작품들은 자기만의 영화적 방어선을 견고하게 구축한다. 그 방어선이란 실제 사건이나 현상을 끌고 오되, 그 내용에 기대지 않고서도 독창적으로 이야기를 지속하게 만드는 동력이자 ‘나는 현실이다’가 아니라 ‘나는 영화다’라는 점을 내내 각성하게 하는 힘이다. < 우리 손자 베스트 >는 일베와 어버이연합이라는 우리 현실의 극단적인 얼룩에서 출발했으나 그 얼룩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거나 사실적으로 그리는 데 관심을 두는 영화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서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초반 우리를 헷갈리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교환의 집이 처음 등장하는 이 장면은 이상하다. 아버지와 딸이 한 쇼트 안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고, 아들은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며, 엄마는 집을 나서는 중이다. 그들은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하거나 서로를 향해 말을 하지만, 어쩐지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것 같지 않다. 이들 사이를 오가는 말의 내용들은 중의적이다. 더욱이 딸이 엄마의 목을 조르던 앞선 장면과 엄마가 구급차에 실려 가기 직전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는 모습, 죽음의 기운이 어른대는 대화들은 이 집 장면을 죽음 이후의 시공간으로, 인물들을 유령이나 환영으로 느껴지게 한다. 영화의 중반, 집을 두고 편의점에서 괴이하게 재회하는 가족들의 장면도 마찬가지다. 인물들이 서로에게 건네는 말들은 더없이 무의미하고 행동들은 뜬금없으며 이들의 등 퇴장 방식은 갑작스럽다. 교환이 정수를 아무도 살지 않는 빈집에 데려온 날, 그가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들을 보며 한 말이 있다. “영정사진 같죠?” 그날 그는 술에 취해 방에서 낮잠을 자다가 거실에서 엄마가 낯선 남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문틈으로 보게 되는데, 그 순간 엄마 또한 교환을 응시하고 있다. 말하자면 교환의 가족은 구체적인 실체가 아니라 교환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망상 같은 것이다. 이 가족에 얽힌 상처를 추론하고 그에 근거해 교환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시도를 영화는 비웃는다. 영화는 말 그대로 그의 집(가족)을 텅 비게 만듦으로써, 너나나나베스트에 경도된 자의 근원을 가정적 배경에서 찾으려는 시도를 무화시킨다. 대신 영화는 인과관계를 이룰만한 요소들의 고리를 끊어 곳곳에 흩뜨려 놓음으로써, 한국 사회가 탄생시킨 이 광적인 존재들의 비상식적인 에너지에 오직 영화 내적인 활력만으로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결론 또한 마찬가지다.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된 정수는 교환과 현충원에 간다.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둘은 무덤을 파고 교환은 정우의 부탁대로 삽으로 그의 머리를 내리친다. 쓰러지기 직전, 정수는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가 진짜 죽었는지 알 수 없다. 현충원을 나서는 교환이 “자주 올게요”라는 말을 했으니, 그가 죽은 것 같지만, 교환이 그의 얼굴에 흙을 뿌릴 때,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우리 손자 베스트”라고 중얼댔으니, 그는 죽지 않은지도 모른다. 마지막 장면에서 교환은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으로 광화문 광장에서 춤을 추며 외친다. “내가 찾는 팩트는 바로 나다!” 정수와 교환의 마지막 장면들에는 어떠한 의미작용도 없다. 정수와 교환이 마지막에 보여준 것들은 그들이 영화 내내 보여준 행각들 중 가장 위악적인 퍼포먼스일 따름이며, 그들이 남긴 문장들은 여전히 상투적이거나 무의미하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김수현 이 그들을 퇴장시키며 섣부르게 어떤 견해를 밝히거나 영화적 처벌 혹은 깨달음으로 은밀히 이동하는 대신, 어떻게든 끝까지 그들을 영화적으로 운동하게 하면서 그들을 향한 질문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니 당신이 < 우리 손자 베스트 >를 통해 일베와 어버이연합에 대한 영화 나름의 정리된 결론을 기대했다면, 이러한 마지막을 두고 무책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그 집단들과 현상들에 대해 답을 내리는 일이 자신의 몫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토록 망가진 사회를 살면서, 자기검열에 경직되지 않고도, 도덕에 짓눌리거나 주눅 들지 않고도, 그 사회의 한가운데서 구정물을 뒤집어쓰고도, 세계의 온갖 비루한 운동들을 향해 과연 영화적 활동만으로 다시 질문할 수 있을까. <우리 손자 베스트>는 이 질문에 대한 김수현 의 대답이다. 올해 경험한 수많은 영화들 중에, 우리가 사는 이 현실에 대해 이보다 더 논쟁적이고 담대하고 치열하게 질문하는 세계를 나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