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랑
- 감독
- 이영호
1. 영화검열이 선택한 ‘한국’영화의 풍경 1980년 개봉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 시퀀스는 한국영화의 분명한 변화를 감지하게 한다. 애니메이션으로 시작된 오프닝 타이틀을 지나 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차량 내부의 시점으로 높이 솟아오른 빌딩들을 보여주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카메라는 곧 그 시선을 낮추어 빌딩들 사이, 좁고 낮은 곳에 펼쳐진 난잡한 시장을 비춘다. 이후에도 이 작품은 도시로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심 속 이 비루함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에 주저함이 없다. 쓰레기더미에 파묻혀 일하다 엉덩이를 맞으며 괴로워하는 춘식(이영호), 골목 구석 좁은 공간에서 꾀죄죄한 모습으로 불을 피우며 연신 땀을 닦아대는 길남(김성찬), 위험한 가스통을 뒤로 하고 쪼그려 앉아 망치질을 바라보다 비명을 지르는 덕배(안성기)의 얼굴에서 멈춘 카메라는 그들이 현재 도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한국영화사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사회(비판)적 리얼리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장면들에서 기인할 것이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나오기 전인 1970년대, 빈부격차가 극에 달한 시기였지만 한국영화에서 가난은 철저하게 가려져야 하는 것이었고 검열은 강박적으로 성장의 지표들을 영화에 등장시키도록 강요함으로써 이를 수행하고자 했다. 1970년대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의 검열관들은 검열 시 법적 근거를 지닌 「영화법 시행규칙 제 9조 영화검열기준」뿐만 아니라 부수적으로 제공된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까지를 참고해야 했는데, 「국산영화제작권장방향」이 기본 방향의 첫 번째로 꼽는 것은 ‘한국의 국위를 선양하고 약진하는 한국의 발전상을 부각시킬 수 있는 내용’으로 영화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그 세부방향으로 제안된 것은 ‘가급적 고속도로, 웅장한 공장, 새로운 주택가 등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배경으로’하며 농촌을 소재로 하더라도 ‘가급적 농업의 기계화, 새로운 농지정리 및 지하수 개발’의 적극적인 노출이었다. 고향이 변화한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애잔함과 절망이 교차하던 정씨(김진규)의 얼굴에서 갑작스레 바다 위 거대한 다리를 건너는 버스의 줌아웃으로 넘어가 마무리되는 그 유명한 <삼포 가는 길>(1975)의 기형적인 엔딩은 1970년대의 성장에 대한 강박이 영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서늘하게 보여주었다. 이러한 1970년대를 지나 도달한 1980년의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오프닝은 그래서 의미를 지닌다. 무작정 상경한 세 청년이 도시에서 겪어내야 했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그만큼 상징적인 영화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불러일으킨 변화는 사실 이 작품에 한정된 것이라고 보아도 좋을 만큼 돌출된 것이었다. 1980년으로 진입하면서 영화법 자체의 개정이나 검열의 기준이 바뀐 것은 아니었으며 검열의 방식 역시 이전과 동일한 상황에서 <바람 불어 좋은 날>이 가난을 고스란히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오히려 예외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대체로 10년을 주기로 서술되는 영화사와 마찬가지로 검열 역시 한 시대를 묶어 범박하게 설명되는 경향이 크지만 갑작스런 정치·사회적 전복의 순간들은 검열의 탄성(彈性)에 변화를 일으키며 흥미로운 흔적을 남긴다. 이 글이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 순간이다. 너무도 짧았던 ‘서울의 봄’과 함께 움직였던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은 검열에 있어 1980년대‘적’이라기보다 1980년대 ‘찰나의 균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2. 짧았던 ‘서울의 봄,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장호 감독이 1975년 말 대마초 파동 후 재기하여 제작한 작품으로 이장호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기존 한국영화의 문제점에 대해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이장호 감독은 활동이 어려웠던 4년 동안 연극계와 문학계 등의 인사들을 만나면서 영화를 만들 당시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던 것, 즉 한국영화가 현실을 그리지 못하고 정권에 길들여지고 있다는 점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게 되었고 리얼리즘의 회복에 대해 고민했다고 이야기 한다. 1 이 시간을 보낸 이장호 감독이 1980년에 들어 착수하는 작품이 급격한 도시화와 그 안에서 황폐해지는 청년들을 다룬 최일남의 중편소설 「우리들의 넝쿨」을 원작으로 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이었다. <바보들의 행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정확한 일시가 적혀 있지는 않지만, 제작신고 전 이루어졌을 시나리오 심의의견서의 의견을 살펴보면 이 작품은 ‘청춘물’로 분류되어 있으며 ‘底邊靑春(저변청춘)을 不條理(부조리)하게 描寫(묘사)한 것은 아니므로 크게 問題(문제)될 点(점)은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별첨으로 추가된 지적사항은 문틈으로 보이는 정사 장면이나 신음소리, 인물들의 상상 속 정사 장면 등의 외설적이라 판단한 부분들에 대한 것이었다. 검열관은 이 작품에서 그리고 있는 도심 속 밑바닥 청춘들의 모습이 사회 비판적이지 않다고 판단,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시킨 것임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제작사는 1980년 3월 27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하고 4월 19일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제작신고가 수리, 영화는 제작에 들어간다. 영화가 완성된 후 제출된 「예고편 영화 검열신청서」와 「영화 검열신청서」에서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작품의 예고편 심의에서도 가난에 관한 언급보다는 외설적인 부분에 치중했다는 것과 시나리오가 아닌 영화 필름의 검열이 문공부가 아닌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라는 민간심의기구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먼저 예고편의 영화검열을 위해 제출된 영화예고편 대본을 보면 안마하는 장면이나 안마하는 이를 만지는 장면 등에 삭제 표시가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가난하고 배우지 못하고 대우받지 못하는 젊은이들. 그들이 이 도시에 뿌리내리려는 몸부림’, ‘사회부 기자의 눈으로 바라본 밑바닥 인생의 삶’, ‘한 판 즐겁게 놀아보자 그러나 이 놀이판에 깔려 있는 슬픔과 한을 잊지 말자’ 등의 자막에는 어떠한 제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가난’, ‘밑바닥 인생’, ‘슬픔과 한’과 같은 정서가 걸러내야 하는 감정으로 자리했던 1970년대와 비교한다면, 그리고 이러한 우울함보다 중요한 것이 외설적인 장면의 삭제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라 할 수 있다. <바람불어 좋은 날> 영화 검열신청서 위의 서류의 좌측 하단에 찍힌 파란 도장은 1979년부터 바뀐 영화시책의 시행을 방증한다. 정부는 문공부에서 맡았던 영화검열을 1979년 4월 10일부터 민간단체인 공윤으로 이관하고, 영화관계자와 각계 인사들로 영화검열심의위원회를 구성, 이들이 영화검열을 진행토록 했는데 2 , 이러한 계획은 그해 2월 대통령 연두순시에서 정부주관 문화행사를 조금씩 민간기구로 넘길 것을 검토하겠다고 보고한 문공부의 첫 번째 실천이었다 3 . 하단의 도장은 영화검열심의 대본과 필름이 공윤 쪽으로 접수 완료되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으로 1979년 이후 이 시책이 이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작사에게 영화검열이 늦어진다는 회신을 보내거나 영화검열의 합격을 통보하는 공문을 내리는 일 등은 문공부에서 진행, 1970년대 영화 실사 검열을 직접 진행하던 문공부가 1979년의 시책 변화 이후 제작사측에 결과를 통보하는 행정적인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공윤’의 심의를 거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8월 22일 영화검열에 합격하는데 어떠한 제한사항도 없이, 그러니까 영화 실사검열에서 단 한 군데의 화면 삭제나 단축 없이 심의위원 8명의 전원 찬성으로 검열에 합격한다. 이장호는 당시의 검열 상황을 술회하면서 이러한 결과는 ‘서울의 봄’ 시기에 구성된 전향적인 심사위원 중 소설가 박완서의 강력한 주장에서 비롯되었다며 박완서가 <바람 불어 좋은 날>을 검열에 통과시키기 위해 열 시간에 걸친 회의를 하며 애를 썼다고 이야기한다 4 . 여기에서 주목해 볼 것은 민간 심의기구의 한 심사위원이 ‘가난’과 ‘밑바닥 인생’과 ‘슬픔과 한’이 담긴 이 영화의 무삭제 통과를 강력히 주장할 수 있었다는 그 자체와 그것이 수용될 수 있었던 ‘서울의 봄’ 시기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정확하게 맞물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5 . 3. 다시 ‘고발성 우려’로 삭제되는 서민의 현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1980년 3월 27일 제작신고서를 제출, 약 5개월 후인 8월 22일 영화 검열 합격증을 받았다. 민간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지 약 1년여 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 그 사이 벌어진 10.26과 12.12 직후의 혼란과 무엇보다 아직 군사정권이 공식적으로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던 최규하 대통령의 짧은 재임기간에 절묘하게도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때문에 <바람 불어 좋은 날>을 예로 들어 민감 심의기구로 심의가 이관된 후 자유로운 분위기를 보여주는 흐름을 설명한다거나 1980년대에 들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검열로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오히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정말 짧았던 ‘서울의 봄’의 훈기를 탄 예외적인 작품이었다. 물론 <바람불어 좋은 날> 이후, <어둠의 자식들>(1981),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1981), <꼬방동네 사람들>(1982)와 같이 어두운 분위기의 작품, 가난한 이들을 전면에 내세워 사회의 이면을 드러내는 작품들이 줄줄이 제작·개봉되었다. 이러한 작품의 등장 자체가 이전 시기와는 다른 1980년대의 분위기의 예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위의 작품들이 원작과는 분명한 차이를 지니며 6 영화 자체의 분위기나 설정이 어색하고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이 작품들이 의도대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쉽게 눈치 챌 수 있다. 예상컨대 이전에는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이러한 작품들의 등장은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리얼한’ 소재가 무리 없는 검열을 지나 개봉한 전례가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혼란스럽게 들어선 1980년대이지만 1970년대에 비해 자유로울 것이라는 믿음이 사회적으로 넘치고 있었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이를 잘 보여준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의 검열과정을 살펴보면 1981년으로 들어서면서, 정확하게 말한다면 1980년 9월 1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보궐선거로 전두환이 대통령으로 취임, 남은 임기를 채우고 다시금 대통령 선거인단을 통해 1981년 2월 25일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사회는 급격하게 경색되었고, 검열 역시 태도를 바꾸고 있다는 것이 한 눈에 포착된다. <바람 불어 좋은 날>과 다르게 위의 작품들은 각종 사유서와 각서로 원작과는 다른 의도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증명해보이고 난 후에야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지난한 과정을 겪어야했던 것이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시나리오 심의의견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개작사유서 가령 1981년 7월 21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시나리오 심의가 통과되지 않아 개작의 개작을 거듭하고 유의사항까지 통보 받은 후에야 제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심의 의견서의 심의의견 첫 번째에 주목해보자. 심의위원은 이 작품이 ‘1970년대 중반을 시대 배경으로 명시하기는 했으나 가난하고 절박한 서민들의 생활상과 애환이 짙게 깔려 있어 많은 사회적 문제’의 가능성을 지녔다는 점을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로 꼽고 있다. ‘1970년대 중반’이라는 설정이 현재가 아니라고는 하나 철거의 문제, 빈부의 격차 등은 ‘현재’에도 분명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기에 노출되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에 제작사는 ‘원 대본에서 완전히 탈피 현 사회에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는 기업의 공해문제로 사회 계도성 주제 설정을 내용으로 하는 계몽영화로 개작’하여 대본과 사유서를 제출한 후에야 영화제작에 착수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영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심 속 철거민, 난장이의 이야기가 아닌 염전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로 바뀌어 버린다. 1981년 12월 10일자로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했던 영화 <꼬방동네 사람들>도 사정이 다르진 않다. <꼬방동네 사람들> 극영화 제작신고에 대한 회신 「<꼬방동네 사람들> 검토의견」에는 ‘서민촌 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으로 사회질서 문란과 사회일면의 고발성 우려가 있음’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7 . ‘무허가 건물의 철거로 인해 쫓겨날 형편’을 불법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는 ‘서민생활의 직설적인 표현’이 ‘고발’로 보인다는 것은 그러한 사실이 있다 해도 감추어야 한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이 작품 역시 ‘사회악적인’ 장면을 삭제하고, ‘서민층의 비관적인 삶의 묘사를 피하’며, ‘의지로 환경을 극복’, ‘가난한 판자촌의 애틋한 이야기지만 관객으로 하여금 밝은 얼굴로 볼 수 있도록 서정적인 영상’을 활용하겠다는 개작 내용을 제출했고, 여러 번의 개작 끝에 엄격하게 실사검열을 진행하겠다, 문제가 생겼을 시 모든 책임을 제작사 측에 묻겠다와 같은 협박에 가까운 경고를 들은 후에야 영화를 제작·완성할 수 있었다. 이 영화들은 모두 1981년을 지나 제작신고서를 제출하면서 영화화를 시도한 작품들로 <바람 불어 좋은 날>의 검열 진행과는 1년도 채 차이가 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류들에서는 민간 심의위원들의 적극적인 의견 개진은 찾아볼 수 없으며, 무엇보다 문공부와 내무부 등이 나서 이 작품이 품고 있을 위험성에 대해 직접적인 수정을 요구하는 장면들을 발견할 수 있다. 잠시 동안 꿈꾸었던 자유에 대한 기대가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는지 이 검열서류들이 너무도 명징하게 보여준 셈이다. 이후 가난을 그리는 작품들은 1987년을 지날 때까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옥외 광고탑에서 외치던 세상을 향한 목소리가 제 멋대로 해석되는 과정을 보여주며 1980년대의 진실에 대해 풍자했던 가난한 청년들의 영화 <칠수와 만수>가 1988년 개봉될 수 있었던 것 역시 <바람 불어 좋은 날>과 여타의 영화들이 놓인 시기적 차이와 함께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4. 검열의 탄성(彈性)을 결정짓는 것들 <바람 불어 좋은 날>은 갑작스레 밝은 노래로 마무리 되지만, 이 엔딩송이 흘러나오기 전 덕배는 좁은 사각 링 안에서 긴 시간 얻어맞는다. 이 장면에 깔리는 덕배의 내레이션은 희망찬 엔딩송과는 전혀 다른 편에 서 있다. 덕배는 이야기한다. 서울에 올라와 2년을 사는 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 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된다고. 누가 때리는 것인지는 모른 채 2년 동안 맞아온 상경한 청년의 이야기는 그렇게 잠시 스크린에 자리할 수 있었다. 1980년대를 설명할 때의 위 작품들은 시대의 변화에 등장한 하나의 경향으로 묶여 설명되곤 한다. 리얼리즘의 회복이라 설명되는 <바람 불어 좋은 날>과 그 이후 나온 작품들은 ‘현실’을 묘사한 작품들로 동등한 층위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기에 영화에서 묘사하는 꾀죄죄함과 비루함에는 무수한 균열들이 도사린다. 그리고 이후 ‘서민’의 삶이 다시금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스크린에 등장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긴 시간이 지나야했다. 1. 김상민 엮음, 『박정희 시대와 한국 대중문화』, 선인, 2012, 34-48면. 2. 신문기사에 따르면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은 4월 1일부터로 명시되어 있지만( 「영화검열 민간 단체에 이관」, 《경향신문》, 1979.3.9.) 당시 실제 영화검열 사무를 담당했던 공윤의 월보 『공연윤리』에서는 4월 10일자로 업무가 이관된 것으로 적고 있다(「영화의 검열 심의업무 공윤 민간 기구로 이관: 심의위원은 각계 인사 17명으로」, 『공연윤리』, 1979.4.(32호), 1면. 신문은 기사에 따라 민간이양 일자를 4월1일이나 4월 2일로 각기 다르게 적기도 하며, 실제 업무를 담당하던 공윤에서 명시한 날짜가 더욱 신빙성이 높을 것으로 판단 영화업무의 민관이양 일자는 1979년 4월 10일로 서술하였다. 3. 「영화검열의 민간 이양」, 《경향신문》, 1979.3.24. 4. 김영진, 『이장호vs 배창호』, 한국영상자료원, 2007, 50-51면. 이 글에서 이장호는 몇 장면은 끝내 통과되지 못한 채 삭제되었다고 기억한다. 이장호는 영화에 삽입되어 있던 노래 가사가 문제가 되어 가사 부분의 사운드 트랙을 늘려 문제점을 해결했다고 이야기하는데 서류에서는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처럼 서류와 구술이 서로 차이가 나는 경우, 그 상황은 구술자의 기억의 오류 등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서류에는 남아 있지 않는 심의위원과 창작자 간의 협상이나 검열의 틈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는 좀 더 다각적인 접근과 확인이 필요하다. 5. 이장호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이 완성될 무렵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고, 유신정권 못지않게 억압적인 독재체제가 수립, 1980년대의 말과 상황이 달라져 있다고 술회하지만(김영진, 위의 책, 50면) <바람 불어 좋은 날>의 완성, 그 후 검열의 신청과 진행은 최규하의 하야(1980.8.16.) 이전이다. 이때에도 실세는 이미 군부로 넘어가 있는 상황이었겠지만, 공식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기 이전과 그 후는 사회적 분위기면에서도, 영화 내부로 들어온다면 영화 검열 서류상에서도 분명한 차이가 있다. 6.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 사람들>은 이동철의 동명의 소설을,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은 조세희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7. 서류에 적힌 ‘직절적인’은 ‘직설적인’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2002년 | 강제규 필름 감독: 정초신 | 시나리오: 박채운 | 제작: 최진화 | 촬영: 서정민 | 프로덕션 디자인: 서명혜 | 음악: 이영호 이소윤 CAST 병철: 이범수 | 유리: 김선아 | 동현: 노형욱 | 석구: 전재형 | 상민: 정재훈 | 영재: 안재홍 아마 이 영화가 전국 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한참 성적 호기심에 불타는 남자 중학생들과 여자 교생 선생님의 이야기였던 < 몽정기 >는,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의 대표적인 ‘슬리퍼 히트’, 즉 ‘예상치 못했던 흥행작’입니다. <몽정기>의 촬영이 있던 2002년 8월 부산의 한 여중 교실은 영화 현장이라기보다는 생기 넘치는 교실 같았습니다. 창 밖엔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아이들의 호기심을 사그러들 줄을 몰랐습니다. 교생 선생님과의 점심 식사 장면. 도시락 세대의 추억이기도 하죠. “선생님, 첫 키스는 언제 하셨어요?” “애는 어떻게 생겨요?” 녀석들은 ‘성’에 대해 알고 싶었던 모든 것을 묻지만 꿈 많은 소녀 표정의 선생님은 풋고추를 좋아한다느니 하며 아이들의 짓궂은 질문을 가볍게 넘어버립니다. 겉모습은 조금 궁상맞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선생님 역은 이범수. 교생이자 과거 제자였던 김선아는 그를 사랑하는데요, 이범수의 필모그래피에서 로맨스 라인은 이 영화가 처음 아니었나 싶습니다. 노총각 병철을 짝사랑하는 유리. 그녀에게 그는 ‘영원한 테리우스’지만, 병철은 그녀에게 엄격하기만 합니다. 아이들과 너무 허물 없이 지내는 모습에 “아무리 그래도 교생도 선생이야”라며 엄하게 충고합니다. 유리의 친구이자 동료 교생인 소정 역을 맡은 배우는 김기연 . < 노랑머리 >(김유민, 1999)의 상희 역으로 알려진 배우죠. 소정은 유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에 저렇게 더러운 테리우스가 어딨니?” 짬을 내 네 명의 ‘중딩’들을 모아, 자연스럽게 포즈를 취해 보라고 했습니다. 왼쪽부터 조숙한 아이 상민(정대훈), 그나마 똑똑한 영재(안재홍), 어리숙한 석구(전재형) 그리고 교생을 사랑하는 평범한 소년 동현(노형욱)입니다. 영화에선 중학교 2학년 설정이지만, 영재 역의 안재홍(14살)을 제외하곤 나이를 꽤 먹었습니다. 정대훈과 노형욱은 18살, 전재형은 성인인 스무 살이었습니다. 지금은 이들이 모두 30대가 되었네요. 모두 오디션을 통해 선발되었습니다. 석구 역의 전재형은 이 영화의 ‘신 스틸러’였죠. 첫 영화였는데 강렬한 인상을 남겼고, < 몽정기 2 >(정초신, 2005)에도 출연합니다. 노형욱은 <몽정기> 개봉 즈음 시트콤 <똑바로 살아라>가 시작되면서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졌죠. <몽정기> 전엔 < 깊은 슬픔 >( 곽지균 , 1997)에서 김승우 의 아역이었고요. 이후 < 효자동 이발사 >( 임찬상 , 2004)에선 송강호 의 아들로 출연하기도 합니다. 상민 역의 정대훈은 ‘여관집 아들 상민’ 역을 맡았습니다.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엔 천혜의 환경인 셈인데요, 그래서 <몽정기>의 인상적인 여관 에피소드가 가능했죠. 안재홍은 < 악어 >( 김기덕 , 1996)의 ‘앵벌이 꼬마’ 역으로 인상적이었던 배우죠. 묘한 표정의 김선아. 이때만 해도 그녀는 영화계에선 신인급이었죠. < 예스터데이 >( 정윤수 , 2002)의 여전사 메이가 첫 영화였는데요, ‘포텐’이 터진 건 <몽정기>였습니다. 취재진을 위해 포즈를 취한 이범수. 이 시기 그는 < 일단 뛰어 >( 조의석 , 2002) < 정글 쥬스 >( 조민호 , 2002) 등으로 서서히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흥행작 <몽정기>를 통해 좀 더 확고한 자리를 잡습니다. 메이크업 중인 이범수와 김선아의 모습입니다. 이범수는 촌스럽게, 김선아는 귀엽고 청순하게 보이는 것이 컨셉트였습니다. 1988년이 배경인 만큼, 교실 뒤편에 가지런히 놓인 도시락들은 빼놓을 수 없는 정겨운 소품들이었죠. 그 옆에 당시 남자 아이들이 즐겼던 종이 축구 게임판이 있습니다. 프로듀서 출신으로 첫 연출작 < 자카르타 >(2000)에서 흥행을 맛 본 정초신 감독은 두 번째 영화로 <몽정기>를 선택했고, 흥행세를 이어갑니다. <몽정기>에 대해 “오프라인 세대의 청소년기를 위한 영화”라고 표현했습니다. 일종의 ‘노스텔지어 무비’라는 거죠. 이 영화의 카메라는 서정민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1934년생이시니 촬영 당시 68세의 노익장이셨죠. < 돌아오지 않는 해병 >(1963) < 마의 계단 >(1964) < 만추 >(1966) 등 이만희 감독과 콤비를 이루며 스타일리시한 촬영을 보여주었던 그는 대규모 스펙터클부터 섬세한 감성까지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촬영감독이었습니다. 1980년대엔 이장호 감독의 실험적인 작품들이 그의 카메라를 통해 탄생했습니다. 1990년대엔 < 개 같은 날의 오후 >( 이민용 , 1995) 같은 코미디부터 < 아래층 여자와 윗층 남자 >( 신승수 , 1992) 같은 로맨스, 그리고 < 손톱 >( 김성홍 , 1994) 같은 스릴러와 < 여고괴담 >( 박기형 , 1998) 같은 호러까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셨고요. 놀라운 건 <몽정기> 이후 칠순의 연세에 < 어린 신부 >( 김호준 , 2004) 같은 ‘뽀사시’한 영상을 만드셨다는 점인데요, 서정민 촬영감독에게 불가능한 장르와 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15년, 위대한 카메라맨은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2001년 < 친구 > 이후 한국의 영화 현장에 ‘현장 편집’이라는 게 생겨 급속하게 보급됩니다. <몽정기> 현장에선 그 장비가 매우 간소해졌더군요. <몽정기>의 콘티 북입니다. 이 시기 한국영화의 콘티 북이, 어떨 땐 그래픽 노블을 연상시킬 정도로 매우 정교했는데요, <몽정기>의 콘티 북은 거의 ‘졸라맨’ 수준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엔 슬픈(?) 사연이 있었으니… <몽정기>는 제작 초기 감독이 교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고, 갑자기 투입된 정초신 감독은 시간이 없어 꼼꼼하게 콘티를 그릴 시간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대충 그린 콘티 북이 탄생했는데요, 그럼에도 영화는 ‘대박’을 기록했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1980년에 만들어진 < 바람불어 좋은 날 >은 안성기 , 유지인 , 김보연 , 임예진 , 김영애 등 익숙한 중견 배우들의 풋풋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최근 극장에서 이 영화를 다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임예진의 앳된 얼굴은 그녀가 한 시대를 풍미한 하이틴스타였다는 걸 한눈에 실감하게 했다.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 이들 배우들이 후일 어떻게 성장할지 알 수 없었겠지만 <바람불어 좋은 날>은 배우들의 면면만 놓고 봐도 오래 기억될 작품이다. 앞서 언급한 배우들 외에도 김성찬 , 이영호 , 김희라 , 박원숙 , 최불암 , 김인문 등도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는데 그들 모두의 경력에서 중요한 영화가 됐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배우가 조명을 받은 이유는 <바람불어 좋은 날>이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그들 중 한 사람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덕배(안성기), 춘식(이영호), 길남(김성찬)이라는 세 청년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지만 당시 시대상을 조망할 수 있는 남녀노소가 빠짐없이 나와, 작은 타일 조각이 모여 만드는 거대한 벽화를 보는 느낌을 준다. 목소리를 높여 뭔가를 외치는 영화가 아닌데도 <바람불어 좋은 날>은 당대 관객에게 묵직한 울림을 주면서 당시 영화인에게 지향점을 제시하는 작품이 됐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그리는 시대는 1970년대 강남 개발이 시작된 뒤의 서울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한강변 풍경을 보면 강 건너편엔 아파트들이 보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사는 쪽은 아직 개발이 덜 된 지역이다. 부동산 개발로 벼락부자가 된 김회장(최불암)은 말한다. “남들이 뭐라 손가락질하는지 안다. 배추 장사 하던 무지렁이가 악랄한 수단을 써서 졸부가 됐다고. 하지만 내가 안 한다고 세상이 그런 짓 안 할 리 없다. 나 말고도 그런 짓 할 놈은 많다.” 김회장이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영화는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땅을 뺏긴 노인이 목을 매 자살을 하는 장면을 보면 충분히 짐작이 간다. 그런 김회장의 손이 이발소 미스 유(김보연)의 허벅지를 주무를 때 춘식이 느낀 혐오감은 노인의 자살을 목격한 뒤 살의로 발전한다. 그러나 김회장이 ‘악’이라고 춘식이 ‘선’인 것도 아니다. 김회장은 역겨운 존재지만 미스 유에게 희망이기도 하다. 병든 아버지의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미스 유는 김회장의 품에 안긴다. 미스 유는 거짓이라도 날 사랑한다 말해달라고 하고 김회장은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답한다. 춘식이 김회장의 몸에 칼을 그을 때 미스 유의 희망도 같이 찢어진다. 김회장이 상징하는 천민자본주의의 탐욕스런 모습 반대편에 상류 사회의 매혹을 전시하는 인물 명희(유지인)가 있다. 명희의 의상은 번쩍거리거나 매끄럽거나 하늘거린다. 의상 자체가 ‘유혹’이라는 단어의 대체물처럼 느껴진다. 명희와 덕배가 강가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잊을 수 없는 대목 중 하나다. 명희의 치마가 바람에 날려 팬티가 보일 만큼 펄럭인다. 마릴린 몬로가 < 7년만의 외출 >에서 지하철 통풍구 바람에 치마를 날리는 장면 못지않다. 명희는 키스를 가르쳐준다며 입술을 내민 덕배를 바보로 만든다. 덕배는 내 그럴 줄 알았다며 자신이 올라갈 수 없는 나무에 올라가지 않기로 한다. 명희가 대변하는 자본주의의 모습은 그녀가 디스코 클럽에 가는 장면을 통해 더 선명히 드러난다. 매혹적이지만 선정적이고 위험한 그녀에게 덕배는 어울리는 짝이 될 수 없다. 덕배는 디스코 클럽에서 농악을 떠올리며 몸을 흔든다. 덕배의 춤은 엉뚱한 박수를 받지만 그 이상 발전할 수 없다. 덕배가 돌아갈 곳은 중국집이고 덕배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모욕과 욕설이다. 한국 자본주의의 발전사를 상징하는 빈부 격차와 갈등을 <바람불어 좋은 날>은 이성과 이론이 아니라 감성과 경험으로 납득시킨다. “<바람불어 좋은 날>이 보여주는 사회 고발의 힘은 세월이 흘러 많이 퇴색했다. 그것은 1970~80년대의 사회 현상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계속 회자되고 고전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은 한 차원 높은 인간에 대한 이해를 보여줬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를 몰라도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면 알 수 있는 인간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한국영화 100선> 129쪽, 한국영상자료원 편) 오래전 나는 이 영화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다시금 <바람불어 좋은 날>을 보고 나니 덧붙이고 싶은 말이 생겼다. 왜 지금은 <바람불어 좋은 날> 같은 영화가 안 나오나, 라는 궁금증이다. 상업영화 시스템이 이런 영화를 더 이상 만들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면 독립영화에선 어떤가? 상당수 독립영화가 젊은 세대의 가난과 절망을 다루고 있다. 88만원 세대, 삼포 세대 등 그들을 지칭하는 표현은 바뀌었지만 그들의 절실함은 그대로일 것이다. 아마 오늘의 청년 세대는 중국집, 여관, 이발소 대신 편의점이나 고시원에서 70년대 젊은이들과 비슷한 궁핍과 허기를 견디고 있을지 모른다. 1980년 덕배는 그런 어려움을 견디기 위해 말을 더듬고 매를 맞아도 참는 법을 배웠다. 2018년의 젊은이는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누군가 그걸 제대로 알려주는 영화를 만들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