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 감독
- 최훈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최무룡, 김지미, 김승호, 이예춘, 김희갑, 장동휘, 김동원, 황정순, 한미나, 박노식, 김석훈, 최남현, 김칠성, 유춘, 서월영, 김만, 임해림, 백송, 노경희, 이빈화, 강미애, 이민, 주선태, 최성호, 양훈, 장혁, 박세룡, 강성양, 경윤수, 조항, 남춘역, 임운학, 함국절, 송범,주리 무용단, 미팔군실바스타쇼단
이용민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는 불모지에 가까웠던 공포영화 장르를 개척한 선각자이다. 공포의 양식화라는 측면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지알로 호러를 대표하는 마리오 바바나 일본 괴담영화의 거두인 나카가와 노부오와 유사한 부류로 범주화할 수 있다. 공포와 스릴러, 판타지를 혼융한 < 악마와 미녀 >(1969)는 공포영화 감독으로서 이용민의 개성과 스타일에 대한 유용한 개요를 제공한다. 이용민 감독은 여기서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 모티프를 병합한 설정을 중심축으로 삼아 한국적인 원귀 서사, 사무라이 활극, 폐쇄적인 실내극 양식, 표현주의 스타일을 다층적으로 쌓아올린다. 특히 프랑켄슈타인 서사는 이용민의 후기작 < 공포의 이중인간 >(1975) 등에서 반복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귀기서린 괴 저택을 무대로 한 괴담이라는 일부 설정은 나카가와 노부오의 <망령의 괴묘저택>(1958)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몇 개의 촬영 세트에서 진행되는 조잡한 프로덕션 디자인에서는 저예산 속성 제작의 흔적이 여실하지만 이런 흠결은 장르의 특장을 손상시키지 않으며 도리어 기이한 스토리를 증폭하는데 도움이 된다. 영화의 무대는 으슥한 숲속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양식 병원이다. 음산한 기운이 감도는 병원의 수장인 곤도( 이예춘 )는 유리관에 누워있는 아내( 도금봉 )를 위해 매일 생피를 주입한다. 곤도의 계획은 뇌수이식에 성공하여 빈사 상태의 아내를 구제하고 인간의 영생을 이루는 것. 신선한 피를 얻기 위해 곤도는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어느 날 미스터리한 가족사를 품은 간호사 옥경( 오은이 )이 조수로 들어오면서 곤도의 계획은 조금씩 틀어진다. 옥경의 수상한 활동을 기점으로 거악(巨惡)의 씨앗이 발아하게 된 경위가 플래시백으로 제시되면서 미친 과학자의 스토리는 번개처럼 앞으로 나아간다. 이야기의 절반이 곤도의 음모와 옥경의 복수에 전념하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플래시백을 통해 과거사를 기술하고, 곤도의 한국인 조수 원석( 김석훈 )과 옥경의 로맨스도 양념으로 첨가된다. 팜므 파탈의 이미지로 등장한 옥경이 점차 동정적인 캐릭터로 변모함에 따라 초자연적 복수 미스터리의 균형이 조정되면서 곤도와 옥경의 대립관계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킨다. <악마와 미녀>의 각본은 허흥 이라는 작가가 썼다. 허흥은 유일하게 이 영화의 각본가로만 기록되어 있는데 감독 자신의 가명일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악마와 미녀>의 스토리는 갈짓 자를 그린다. 허무맹랑한 신념에 강박된 의학박사의 맹목을 따라가다가 그의 악마성이 폭로되는 과거 장면들 이후에는 복수의 스토리로, 옥경과 원석의 대립과 공모로 국면이 전환되자 멜로드라마의 정동이 느닷없이 폭발한다. 현실과 단절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순수한 허구이지만 스토리 안에 있는 우매한 믿음과 광기, 냉담한 복수와 같은 요소는 우리들의 실제 생활에도 있다. 음모나 배신의 트라우마로 복수를 다짐하는 원한에 찬 여성의 스토리는 한국 고전 공포영화의 공식이다. <악마와 미녀>도 이 공식을 따르지만 원녀(怨女)의 존재가 인간과 유령의 경계에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반면에 인류의 삶을 뒤바꿀 의학기술의 신기원에 도달하겠다는 망집에 빠진 의학박사는 서양 공포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상투형이다. 영화의 주요한 소재로 채택된 수혈과 흡혈은 역시 드라큘라 전설에서 파생된 설정이다. 생명 연장을 위해 타인의 생피를 주입한다는 설정은 생명의 기원으로서 피의 의미를 강조한다. 피의 순환이라는 관점에서 곤도의 야심은 옥경으로 전이되는데, 복수의 일념으로 살아온 옥경이 우연히 피맛을 알게 되어 흡혈에 집착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피에 굶주린 살인광 박사를 전형적인 공포와 구별하는 독특함은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지는 서사에 새겨진 무국적성일 것이다. 이처럼 <악마와 미녀>에는 상이한 뿌리를 갖는 이야기의 요소들과 사물들, 영화 기술, 정서들을 두서없이 교배한 흔적들이 넘친다. 고립된 서양식 병원과 일본식 장검을 휘두르는 곤도의 표상, 액션 활극에나 어울릴법한 옥경의 초인적인 퍼포먼스, 곤도의 어수룩한 일본인 조수의 생뚱맞은 사랑 고백 등 예측할 수 없는 요소들의 결합이 태연자약하게 이루어진다. 두 대의 카메라를 사용한 전통적 방식의 3D 영화로 제작되었는데, 둥둥 떠다니는 원귀들의 얼굴, 무덤을 뚫고 나오는 손, 카메라를 향해 날아드는 몽둥이와 램프 등 입체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적인 연출도 눈에 띈다. 영화의 색조는 시종일관 어둡고 여러 면에서 특이하게 보일 뿐 아니라 과장된 연극적 연기로 일관하는 배우들의 뻣뻣한 말투는 비현실적이어서 더욱 이목을 끈다. 촬영감독으로 영화 이력을 시작한 감독답게 이용민의 장면 연출은 카메라의 활용을 중심에 둔다. 옥경이 수행하는 역동적인 액션 신을 제외하면 대다수 장면을 실내 세트에서 촬영하여 속성 제작의 효율성도 성취한다. 곤도의 정신을 어지럽히는 원귀들의 환영은 조잡한 특수효과로 제시되어 B급 공포영화의 무드를 조성하고, 시각적으로 로우 키 조명으로 방과 복도 세트를 채우면서 공포영화의 표현 스타일을 확실히 구현한다. >> 악마와 미녀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이강천 의 < 피아골 >(1955)은 반공법 위반으로 상영이 금지되었던 최초의 영화다. 더불어 반공법을 위반한 최초의 반공영화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형용모순의 수사는 <피아골>을 설명하는 데 있어 턱없이 모자란 표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영화의 흥미로운 면모를 살피는 데 있어서는 얼마간 유효해 보인다. 당시 이 영화는 빨치산을 인간적으로 묘사했다는 이유로 상영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특히 마지막 장면이 논란이 되었는데, 주인공 애란( 노경희 )이 지리산을 내려와 공허한 몸짓으로 백사장을 걸을 때, 그녀가 남한사회로 귀순할지 피아골로 다시 오를지 목적이 불분명해 보인다는 이유서였다. 제작자는 이후 영화 마지막에 태극기 장면을 삽입했고, 개봉된 영화에선 지친 애란의 모습 위로 휘날리는 태극기가 디졸브 되며 이야기가 끝난다. 위풍당당하게 휘날리는 태극기가 당대에는 중요한 표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각에서 보면 마지막 태극기만큼 이 영화에 어울리지 않는 장면이 없다. 내막을 모른 채 마지막 장면을 맞더라도, 이물감이 강하게 느껴져 억지로 끌어온 장면이라는 걸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피아골>은 반공영화이기 이전에, 휴전 후 지리산 피아골에 잔류한 소수 빨치산을 세밀하게 그린 탁월한 인물화다. 여는 반공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엔 남한군이나 경찰이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관념적인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서사를 할애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영화가 관심을 두는 건 피아골에 갇힌 빨치산의 생태계와 죽음에 가까워 가는 인물들의 절박한 생존기, 무너져 가는 이념 속에서 얼룩져 가는 인물들의 초상에 있다. 멀리서 날아오는 총탄과 포탄의 피해로 아가리( 이예춘 ) 부대의 대원들은 쓰러져 가지만, 그들에게 더 큰 공포는 지리산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는 일이다. 나약한 인물들을 지탱하고 있던 이데올로기는 진퇴양난의 상황에서 점차 자리를 잃어가고, 각자의 신념은 견지한 당성의 강도와는 상관없이 무너져 가며, 인물들을 저마다의 회의와 모순과 광기 속으로 빠져든다. 이를테면 대장 아가리는 부대의 규율을 어긴 자들을 잔혹하게 처치하면서도 스스로는 비밀스럽게 규율을 어기며 자기모순에 빠져있고, 부대원들이 보급투쟁을 하러 부락에 내려간 사이 고요한 사찰에 홀로 남아 과오에 대한 죄의식으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비서인 애란 역시 당성이 강한 인물로 그들이 반동분자로 명명한 이들에게 잔혹하긴 마찬가지지만, 그녀를 지지하고 있는 건 신념과 함께 빨치산의 규율을 지킴으로써 돌아갈 고향도 없는 자신의 운명을 피아골에 결부시키는 일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부대의 간부이지만, 영화 시작부터 혁명투쟁에 회의하고 있는 철수( 김진규 )는 부대의 잔혹한 행위들을 은밀하게 거부하면서도 무력하기 그지없는 표정들로 얼룩져 가는 인물이다. 외에도 부대원들은 서로 짝을 이뤘다 배신하기를 거듭하며 불안한 공동체의 마지막 모습을 아로새긴다. 사실 그들의 초상 속에 반공메시지가 스며들어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의 초상 하나하나를 구체적으로 그리며 이데올로기의 작동 시스템에 잠식당한 인물들의 항변에 이처럼 귀 기울이는 작품도 영화사에 흔치 않았다는 점을 부인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피아골>은 탁월한 인물화기도 하지만, 심리의 풍경화이기도 하다. 영화는 간혹 넋을 잃고 바라보게 만드는 유려한 움직임과 리듬으로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세밀히 묘사한다. 또한 지리산의 견고한 바위와 유약한 풀잎들 사이, 그리고 사물들이 드리우는 그림자 속에 인물들을 배치시키며 그들의 복잡한 심리를 형상하고 있다. 이를테면 영화는 철수와 마음을 나누는 소주( 김영희 )가 지대 본부로 소환되기 전까지 철수와 소주 그리고 철수를 연모하는 애란 사이에 흐르는 감정을 세심히 어루만지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세 인물 사이의 감정적 기류를 아리고도 아름답게 표현한 장면이 있다. 소주가 대장 아가리에게 겁탈 당한 후 이어지는 장면들에서다. 숙소 안의 상황을 모르는 철수는 대장에게 보고할 사항이 있어 아가리의 숙소 앞에서 잠시 기다리고 철수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애란은 어느새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대장의 명령을 받은 철수는 먼저 자리를 뜨고, 숙소 앞에 남아있던 애란은 시간차를 두고 나오는 대장과 소주의 매무새를 보고선 소주가 당한 일을 얼핏 눈치 챈다. 그러나 그녀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않는다. 다만 숙소의 모퉁이를 지나가는 소주를 애란이 조용히 따르고 카메라 역시 둘의 움직임을 유유히 따를 뿐이다. 철수와 소주와 애란이 차례로 숙소 모퉁이를 지나갈 때 세 인물 사이에 흐르는 애정과 질투와 환멸과 연민의 감정은 그런 마음을 억누르고 있는 표정과 고요한 움직임 사이에서 아릿하게 미동한다. 그리고 소주가 떠난 밤, 부락으로 보급투쟁을 나서는 대원들의 모습은 나뭇잎들이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얼룩지거나 건물들이 드리운 짙은 그림자 속에 묻히곤 한다. 출구 없는 암담한 운명이 그들을 자꾸만 어둠 속으로 밀어 넣고, 영화는 그들의 불안과 회의와 광기의 현장을 무섭도록 고요하게 비춘다. 이 영화를 반공영화로 보아야 한다면, 이들의 잔혹함과 광기를 치밀하게 그려서가 아니라, 이들의 침묵 속에서 저 홀로 청명한 소리를 내고 있는 계곡의 물소리가 더 깊이 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대립된 이념에 아우성치지 않고 침묵 속에 새어나오는 신음을 첨예하게 그린 <피아골>은 어느 한 범주에 몰아넣기에는 품이 넓은 영화다. >> 피아골 VOD 보러가기 <<
신상옥 감독은 < 코리아 >(1954)를 만들면서 영화를 “온 몸으로 배웠다”고 썼다. 석굴암을 촬영하러 올라가다가 지프가 굴러 떨어져 죽을 뻔하기도 했고 추운 창고 건물에서 벌벌 떨면서 포터블 편집기로 편집을 하는 동안 “영화의 흐름과 감각”을 “몸의 한 부분으로 체화”했다는 것이다. 전후의 폐허에서 가산을 털어 만든 이 가난한 다큐멘터리에 대해서 신상옥은 뒷날의 많은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된 작품이라고 술회한다. 특히 < 무영탑 >(1957)과 < 성춘향 >(1961)은 <코리아>에서 다룬 이야기의 일부를 독립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신상옥, 『난, 영화였다』, 랜덤하우스, 2007, 53~54쪽) 1960년대 초까지 신필름 기술력의 핵심이자 평생의 친구였던 이형표 를 만난 것도 <코리아>의 후반작업을 하면서였다. 최은희 와의 스캔들로 선배 영화인들이 신상옥의 작품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는 상황에서 도움을 주었던 이가 바로 공보처 산하 대한영화사의 사무장이었던 이형표였던 것이다. 당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이었던 두 청년(신상옥은 1926년 생, 이형표는 1922년 생)은 공통점이 많았다. 식민 말기의 전시체제 아래서 예술에 심취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해방 후에 영화에 입문했다는 점이 일단 그렇다. 10대의 신상옥과 이형표는 둘 다 그림에 몰두함으로써 현실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다. 도피주의적 성향과 관련해서 보자면,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탐독하며 유럽의 관념철학에 빠졌던 이형표 쪽이 더 분명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아름다운 것을 쫓아 예술에 탐닉하는 것으로 험악한 세월을 견뎌내기로는 신상옥도 마찬가지였다. 요컨대, 유미주의적 성향은 1920년대에 태어나 10대와 20대 대부분을 전쟁 통에서 보냈던, 그럼으로써 일찍부터 삶의 허무를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세대 예술가들이 어느 정도는 공유하고 있던 것이다. 영화계에서의 처지 또한 비슷했다. 집단 따돌림을 당했던 신상옥 만큼은 아니지만, 이형표도 선배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영어에 능통했던 이형표는 1950년을 전후한 시기에 미공보원(USIS)에서 일했는데, 이때 이필우 휘하의 기술 인력들은 미공보원의 하청을 받아 영화를 만들고 있었다. 미공보원이 영화를 직접 제작하는 조직개편을 하면서 일자리를 잃게 된 영화인들은 그것이 통역을 했던 이형표 탓이라고 생각했고 이형표의 부역 전력을 발고했다. 이로 인해 이형표는 부산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미공보원에서도 해고되었다. 영어 능력을 바탕으로 영향력 있는 미국인들과 교류를 쌓았던 덕에 그 이후에도 커리어를 쌓는데 큰 문제는 없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도 그는 선배 영화인들의 미움을 샀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배들과 선을 그으며 활동했던 것은 오히려 두 사람으로 하여금 전후 한국영화의 새 출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이끌었던 것처럼 보인다. 식민 말기에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영화 만들기를 익혔던 선배들은 도제제도의 강력한 위계관계에 얽매어 있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기자재에도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전후 원조의 일부로 미국의 아시아재단이 한국에 들여와 설치한 휴스턴 자동현상기가 영화인들의 거부감 때문에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던 것은 단적인 예다. <꿈>(1955) 아시아재단의 한국영화 원조 프로젝트를 입안하고 실행했던 존 밀러(John Miller)는 ‘일거리를 잃을까 두려워하는 구세대 영화인들 일부가 퍼뜨린 근거 없는 악소문 때문에’ 한국 영화인들 사이에는 자동현상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만연해 있다고 아시아재단 본부에 보고했다. 영어로 소통할 수 있고 영화계의 낡은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우며 새로운 기자재에 훨씬 개방적이었던 젊은 영화인들에게 이 미국인 조력자가 더 호의적이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존 밀러는 전후 한국영화 중흥의 신호탄이 되었다고 평가받은 이규환 의 < 춘향전 >(1955)이 아니라, 열악한 환경에서도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신상옥의 < 꿈 >(1955)에서 한국영화의 미래를 보았다. 탈식민의 과제를 안은 채 냉전체제로 편입되어갔던 1950년대의 시대적 성격을 고려해본다면, 존 밀러가 이규환보다는 신상옥에 주목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상옥과 이형표 또한 냉전의 세계질서를 주도하는 미국에서 미래를 보았다. 멜로드라마로 대중영화의 흥행감각을 익히는 한편으로 영화사를 운영하며 기업적 발전을 모색했던 신상옥이 할리우드 영화산업을 바라보고 있었다면, 이형표는 테드 코넌트 (Theodore Conant)와 함께 휴대용 자기녹음기로 다이렉트 시네마 스타일의 < 위기의 아이들 >(1955)을 만들거나 파라마운트사의 <휴전 Cease the Fire)> 촬영에 참여하여 입체영화 기술을 경험하고, 16mm 코다크롬으로 컬러영화를 시도하면서 미국 발(發) 신기술을 통해 시각적 체험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었다. 신상옥이 제작, 감독하고 이형표가 촬영한 컬러 시네마스코프 영화 <성춘향>(1961)의 성공은 개인적 수준에서는 그들이 각자 1950년대 동안 쌓아온 역량이 결합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거시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식민지 문화로부터 냉전문화로의 변화가 극적으로 발현된 사건이었고 영화계 내부에서는 중심 인력의 세대가 교체되고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델로 한 새로운 산업 시스템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영화기술의 유력한 출처이자 표준으로서 미국영화가 부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당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상옥- 최은희 의 <성춘향>과 홍성기 - 김지미 의 < 춘향전 >간의 대결이 <성춘향>의 승리로 귀결된 것은, 한국영화사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홍성기는 1924년 생으로 신상옥과 비슷한 연배였지만 일제 말에 만주영화협회에서 영화를 배웠고 선배 영화인들과 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경작(競作) 소동이 영화계의 신구파 대결로 표출되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춘향전>을 옹호하는 구파와 <성춘향>의 편에 선 신파의 대결은 신파의 승리로 귀결되었으며, 이는 곧 신필름이 이끌어갈 한국영화의 새로운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했다. 구세대의 지원을 받았던 홍성기는 젊은 신상옥에게서 발견되는, 산업과 기술 그리고 영화미학에 대한 진취적인 비전과 모험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고전 ‘춘향전’을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만든다는 기획 자체가 애초에 신필름의 것이었거니와, 뒤늦게 제작에 뛰어든 홍성기 팀은 새로운 미학적 경지를 보여줄 만큼 신기술을 구사하는데 능숙하지 못했다. <춘향전>이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는지 처음부터 산업적 비전을 갖고 있지 않았던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1950년대 말 최고의 흥행감독이었던 홍성기는 한국영화가 새롭게 도약하는 1960년대 초에 영화계의 주도적 위치에서 밀려났다. 거의 테크니컬러에 육박하는, 현재까지도 퇴색하지 않은 <성춘향>의 아름다운 색감이 얼마나 대단한 기술적 성취였는지는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일반화된 1960년대 말 이후의 한국영화들과 견주어보았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그것은 1950년대 동안 미국영화의 신기술을 탐구해왔던 이형표가 영어로 된 기술서적을 열독하면서 장면마다 일일이 색온도를 재어가며 공들여 찍은 결과였지만, <성춘향>의 기술적 성공은 단지 아름다운 색감으로만 설명될 수는 없다. 유려한 카메라워크와 배우의 매력을 십분 살리는 효율적인 나눠찍기, 깊이 있는 공간구성은, 마치 초기 영화나 발성영화 초기의 작품들처럼 정면 롱 쇼트(tableaux)의 롱 테이크 위주로 구성된 <춘향전>과 현격히 구별된다. 기술이 예술적 표현을 제약하는, 신기술 도입 직후의 일반적인 상황을 뛰어넘은 <성춘향>의 성취는 기술이 예술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시간과 비용, 재능과 노력을 과감히 투여한 결과였다. 컬러 시네마스코프는 많은 조명 장비가 요구될 뿐 아니라, <성춘향>에서처럼 커트를 자주 나눌 경우에는 그때마다 현장을 다시 세팅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다. 더구나 신상옥은 촬영에 필요한 코닥필름을 미국으로부터 직수입하여 사용했는데 여기에도 많은 돈이 들었다. (당시 많은 한국영화들이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 미군부대 주변의 암시장에서 유통기한이 지난 자투리 필름을 구입해 썼다. 홍성기의 <춘향전> 또한 그와 같은 경로를 통해 필름의 많은 부분을 조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감한 투자는, 결과적으로 서울 개봉관에서 관객 38만 명을 동원한 유례 없는 흥행 성공으로 보답 받았지만, 당시 한국영화의 시장 규모를 가늠했을 때 이는 무모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성춘향> 이전에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은 서울 개봉관에서 불과 10만 명을 동원한 이규환의 <춘향전>이었다. 기존 시장에서는 회수할 수 없는 제작비를 투여한 <성춘향>은 한국영화의 시장규모 자체를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마치 할리우드의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를 만들 때 그러했듯이, 신상옥은 <성춘향>으로써 영화시장의 한계에 도전하는 모험을 감행했고, 결과적으로는 시장의 혁신적 성장을 이끌었다. (실제로 셀즈닉은 신상옥이 모델로 삼았던 할리우드의 창의적인 제작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모험을 불사하는 진취적인 기업가 정신이 신상옥의 추동력이 되었음은 분명하지만, 대작 <성춘향>의 기획은 1950년대 중반 이후 성장해온 흥행산업의 잠재력에 기반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승산 없는 도박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한국전쟁 시기와 전후 얼마 동안은 기술과 자본이 아니라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공연예술이 대중오락의 중심을 이루었다. 1930년대부터 이미 융성했고 전쟁 기간 동안에도 선무공작의 일환으로 활발하게 공연되었던 악극과 여성국극은 형편없는 기자재와 낮은 기술력, 자본의 빈곤으로 조악한 만듦새를 보여주었던 한국영화를 압도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전후 복구에 투여된 미국 원조자금의 일부가 영화계로 들어오면서 기자재가 갖춰지고 서울의 개봉관과 지방 극장들을 잇는 배급망이 확보됨에 따라 영화산업은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악극과 여성국극의 작가와 레퍼토리, 배우들과 그들이 무대에서 발전시켜온 캐릭터들, 조명, 미술, 의상 분야의 스태프들을 흡수하면서 1950년대 말 한국영화는 비약적으로 성장한다. 흥행시장의 잠재력을 폭발시킬 수 있었던 <성춘향>의 대중적 흡인력은 기술적 완성도 때문이기도 했지만 1950년대 동안 대중과 교감하며 쌓아온 공연예술의 자산들을 효과적으로 영화에 끌어들인 결과이기도 했다. 두 주인공 최은희와 김진규는 나이가 많아서 적역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안정적인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면서 조연들이 마음껏 개성을 펼칠 수 있는 마당을 만든다. 능청스럽고 익살맞은 악역(변학도)을 맛깔나게 소화한 이예춘 을 비롯하여 방자의 허장강 , 향단의 도금봉 , 그리고 양훈 , 김희갑 , 구봉서 같은 배우들은 악극에서부터 구축해온 캐릭터를 끌어와 영화를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었다. 고전 ‘춘향전’ 자체가 영화 뿐 아니라 공연예술을 통해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레퍼토리였는데, 특히 여성국극이 그려낸 화려하고 웅장한 스펙터클의 세계는 민족의 과거를 판타지의 무대로 만들곤 했다. 1950년대 후반의 사극영화들 대부분이 레퍼토리와 시각적 효과에서 여성국극에 빚지고 있거니와 특히 화려한 색감과 넓은 화면의 <성춘향>은 여성국극이 보여준 전통의 스펙터클과 판타지로서의 역사를 영화로 가져온 최고의 성공사례라고 할 만하다. 전통의 스펙터클을 통해 역사를 판타지로 구성하는 것은 민족의 역사를 문화의 차원으로 회수하면서 특정한 미의식과 연관시키는 문화민족주의의 소산이다. 독립의 전망이 희미해져갔던 1930년대 이후에 우파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정체성 확보를 주권의 회복이 아니라 조선이라는 지역의 전통문화로부터 구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신상옥이 말했듯이 그는 “일제 치하에서 일본 역사는 귀가 아프도록 들었지만 한국의 역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라났”던 세대, 다시 말해 민족국가의 학교제도 안에서 역사교육을 받는 대신 전통을 미적 대상으로 삼는 문화민족주의를 통해 역사에 대한 초월적인 감각을 습득한 세대에 속했다. 그와 같은 감각은 로컬리즘 담론과 그에 기반한 문학, 영화, 공연예술들을 통해 재생산되었으며, 신상옥이 말했던 것처럼 해방 이후까지도 “역사극과 문예영화의 기초”가 되었다. <성춘향>은 미적 대상으로서 전통이라는 문화민족주의가 미국영화의 테크놀로지를 만남으로써 만개한 작품이었고 그런 점에서 냉전시대의 한국영화가 새롭게 출발하는데 식민의 문화적 유산이 어떻게 전유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 탁월한 사례였다. <성춘향> VOD 보러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