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 감독
- 이완민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김지유, 박성미, Alice Fargier, Johanna Bah, Jasmine Bazoukis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소리가 어떤 영상을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되고, 어떤 영상이 어떤 소리를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된다. -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나는 영화 음악 작업을 할 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관성에 기대게 되기 때문이다. 관성에 기댄 받아쓰기는 순간을 모면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이 일을, 혹은 나를 이끄는 건강한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다행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의 질문을 던질 때 후반 작업에는 연출이 곁에 있다. 그러나 조금은 두려운 표정으로. 내 홈페이지의 자기 소개란에는 10년 넘게 “저와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겁먹지 말고 연락 주세요”라고 쓰여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연출들이 메일을 보낼 때 팔 할은 이 부분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음악을 잘 몰라서 두렵지만 겁먹지 말라고 쓰신 것을 보고 용기 내어 연락드립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걸까? 두려움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영화제 제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일정이 딜레이 되어서 후반 작업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이미 예산이 초과되었다거나 하는 현실적인 문제일 때도 있고, 음악 감독과 작업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 어떤 방식과 일정으로 소통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음악적인 소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어떤 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형용해야 하는지 몰라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 실질적인 워크플로우에서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주기는 어렵지만, 후자 둘의 경우 문제는 음악에 대한 설명을 음악적인, 음악의 문법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면 쉬워진다. 이 부분에서 왜 음악을 원하는지, 여기서의 음악은 누구의 생각을 대변해야 하는지, 음악은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지, 미래를 예지해야 하는지, 누구의 시점이어야 하는지, 혹 필요 없지는 않은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림에 음악을 붙일 때 필요한 대화가 꼭 음악적 문법 안에 갇혀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미 연출의 머릿속에는 음악 외적(이라고 알려진)인 단서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크레딧을 제외한 모든 음악이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 사랑의 고고학 >(이완민, 2022)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는 수많은 “왜”들 속에 연출의 두려움뿐 아니라 나의 두려움도 자리한다. 내가 만든 음악들이 영화에서 어떤 당위를 잃은 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혹은 실패한 환영(phantom)의 대리인이 되지 않을지, 현란한 몸짓으로 언어와 그림의 간극을 메우는 모종의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지는 않을지,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 거짓말은 환영받을 수 있을지, 관객을 이 세계로 끌어들이는 마법이 될지, 이 음악이 도움이 된다면 어디에,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몇 편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리고 작업 과정이 익숙해질수록(!) 이런 끝없는 의심과 두려움은 사라지기는커녕 거의 실재하는 무엇이 되어 작업실 한 켠에 자리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하는 이 일이 지루할 틈 없도록 나를 긴장시키고 이끄는 재미가 되었다. 재미. 역시 재미가 중요하다. 혹자에겐 식상한 레퍼런스일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대학 초년생 때 보았던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2022)의 < 미치광이 삐에로 >(Pierrot le fou, 1965)가 영화 음악을 만들 때 맞닥뜨린 두려움을 재미로 치환시키는데 일조한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치광이 삐에로>(장 뤽 고다르, 1965)의 첫 시퀀스 중 한 장면 <미치광이 삐에로>의 인트로는 앙투안 뒤아멜(Antoine Duhamel, 1925-2014)의 세련된 오케스트레이션과 그 위를 타고 흐르는 유려한 멜로디로 시작한다. 오 아주 신경 써서 음악을 썼구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음악은 음악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끊기고 나레이션으로 넘어간다. 내 첫 고다르 영화였던 이 영화의 인트로를 보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음악 편집 작곡가랑 협의된 건가?’ 놀랄 겨를도 없이 음악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바로 대사와 현장음, 컷과 뒤섞이면서 편집에 고유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성큼성큼 나아간다. 멀찍이 떨어진,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운 모습이 아닌, 스크린 앞에서 배우와 함께 대사도 치고 연기도 하면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종래에는 갑작스러운 연출에 정당성마저 부여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음악은 두 주인공 마리안느와 페르디낭의 나레이션을 우스꽝스럽게 과장하기도 하고, 관객과 영화 속 인물의 경계를 허물면서 인물들이 가진 권한을 확장하기도 한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연속성을 가져오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이야기에 반주를 맞추며 자신의 쓸모로 재주를 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부러 뭉그러뜨린 질감과 갑작스러운 등장과 사라짐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들리고 있는 것이 만들어진 영화 음악이고 당신은 만들어진 허구를 보고 있다, 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물론 매 순간 자신의 정당성을 뽐내는 이 칼춤 같은 음악의 사용이, 혹은 이것이 주는 쾌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쥐고 벼려온 도구의 사용 방법과 기능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것이 의심 없이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 온 사람의 고민의 흔적은 현재 나의 고민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길잡이가 되어주고, 때로는 위안이 되어준다. 이런 소리의 질감과 음악의 사용이 어떤 사고와 고민을 거쳤겠구나, 천천히 짐작하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선택지가 깔린 두려운 길에 친구가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음악 사용의 옳고 그름과도, 성공과 실패와도 무관하며, 오히려 그런 것이 없다는 것, 수많은 선택지 안에는 어떤 더 많은 (드러나는 혹은 숨겨지는) 선택지들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음악이 화면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신경 쓰면서 보는 것과 그냥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일례로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직종에 종사 중이신 나의 부모님은 당신의 자식이 영화 음악을 시작한 뒤로 극장에서의 청취 경험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어떤 방식이 더 적절한(?) 영화 감상인지를 논하는 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이지만, 영화에서 어떤 감동과 위로를 받는 것만큼이나 영화의 말하기 방식이나 그 속성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지금 극장을 울리는 음악이 어떤 이유로 거기 있는지, 그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신경 써서 감상해보시기를 권한다. 그 과정은 영화와 새로운 관계 맺음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정말로 재미있을 거니까. *** 사진: "Pierrot le Fou",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59592/?ref_=fn_al_tt_1 > 이민휘(음악가) l 종종 다른 사람들의 영화, 드라마, 연극이나 미술 작업에 음악으로 함께 하기도 한다. 2012년 무키무키만만수 [2012]로 데뷔, 2016년 첫 솔로 음반 [빌린 입], 2023년 두 번째 정규 음반 [미래의 고향] 발표. 둠-메탈 밴드 'Gawthrop'에서 베이스 담당. 드라마 < 박하경 여행기 >(이종필, 2023). 영화 < 사랑의 고고학 >(이완민, 2022),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 최선의 삶 >(이우정, 2020) 등의 영화에 음악.
이완민 감독의 두 번째 장편 < 사랑의 고고학 >(2022)에서 주인공 영실(옥자연)은 고고학을 공부하고 30대에도 여전히 현장에서 흙을 털어내고 고르며 유물을 찾아내는 연구원을 하고 있다. 지도교수를 비롯해 같이 공부한 사람들이 이제 아카데미로 들어와 일을 찾으라고 해도 영실은 시간을 직접 만질 수 있는 현장이 좋다. 유적 안에 있는 옛 건물과 주거지가 변경되었음을 알려주는 지표인 유구선(遺構線)을 직접 붓으로 하나하나 흙을 털어내며 만지는 것은 시간의 과거와 접촉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영실이 자기의 삶 자체를 멀리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지층처럼 중첩된 과거, 현재, 미래가 발굴된 유적 현장처럼 그 시간들과 시간들 사이에 켜켜이 쌓여 있는 마음들의 유구선을 끈질기고 집요하게 털어내고 고른다. 그것이 무엇이고, 언제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마음으로 변해갔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해갈지 지켜보면서 말이다. 때로는 그러한 고고학적 실천이 영실 스스로를 상처 내는 것일지라도 말이다. 영실은 모두가, 심지어 함께 사랑을 확인하고 미래를 약속했던 연인이 떠나고 그 남자가 야기한 폭력으로 폐허만 남은 후에도 그 감정의 결과, 약속의 의미와, 폭력의 메커니즘의 유물을 섬세하게 손끝으로 감각하며 끝끝내 자신의 삶의 현장을 떠나지 않고 마지막까지 시간을 응시하는 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는 ‘뒤늦음’의 시간이나 ‘후회’라는 마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고고학 현장에서 ‘이후의 시간’은 뒤늦지 않고 언제나 적당한 때이기 때문이다. 이완민 감독의 첫 번째 장편 < 누에치던 방 >도 두 번째 작품처럼 시간과 마음의 지층들을 보살핀다. <사랑의 고고학>이 40대에 다다른 여성이 30대의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발굴하는 데 집중하는 영화라면, <누에치던 방>은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할 만큼 큰 상처가 각인된 청소년기의 시간의 방에 갇혀 사회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가기 힘든 이들이 서로를 지켜봐주고 증언하고 그 지층의 실들을 발굴하는 영화다. 그렇게 교차적으로 목격된 시간들은 사회를 만든다. 독립된 인간이란 사회에 참여하면서 사는 인간이다. 이 영화는 30대, 40대가 된 성인들이 서로의 청소년기를 목격하고 상대에게서 우연히 자신의 흔적을 찾아내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10년 째 고시공부를 하다 이제 30대 중반이 되었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실패한 미희(이상희)는 남자친구와도 헤어진다. 고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공부를 목적으로 친구 관계도 모두 끊어내고 고립되어 살아온 미희는 할 줄 아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다. 미희는 고치에서 나오지 못한 애벌레이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지하철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나눠주며 자기한테 하고 싶은 말을 그게 뭐든지 적어달라고 호소하는 고등학생 유영(김새벽)을 만난다. 유영 역시 이 사회 속에 참여하고 싶은 열망이 있지만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는 데 서툴다. 유영을 쫓아간 미희는 아파트 문을 두드리고 성숙(홍승이)을 만나게 된다. 미희는 충동적으로 한 번도 본적 없는 성숙에게 자신이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라고 한다. 성숙은 그런 미희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느끼면서도 집안으로 들여 다독여준다. 이 영화에서 성숙은 유일하게 사회에 참여하는 이다. 성숙은 미희에게서 자신과 자신의 진짜 어린 시절 단짝친구인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다. 미희는 부모의 만족을 위해 평생을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단절해온 상처를 갖고 있고, 성숙과 성숙의 남자친구 익주(임형국)는 단짝친구 유영을 잃은 상처를 안고 산다. 성숙과 익주는 유영이 죽은 이유를 알 수 없다. 유영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고 말을 하고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는 그런 유영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했다. 성숙은 이제 겨우 고치에서 탈출해 사회로 나오려고 하는 미희에게서 그런 유영의 흔적을 처음부터 본다. 그리고 진짜 단짝 친구였던 것처럼 관계를 맺는다. <누에치던 방>은 30대인 성인도 뒤늦게 고치에서 나올 수 있다고 다독여진다. 그럴 때 아무 말 없이, 이유도 묻지 않고 친구로 받아들여주는 성숙 같은 주변인이 있다면 실패하고, 늦었더라도 다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연극배우인 성숙은 거리에서 어떠한 인위적인 무대장치나 소품도 없이 돈키호테를 연극하는 실험적인 공연을 한다. 관객도 지나가는 거리의 행인들이다. 그럼에도 성숙이 칼을 들고 풍차를 향해 달리는 연기를 하자 사람은 말이 되고, 지저분하고 무미건조한 회색도시의 풍경은 초원이 된다. 성숙은 사회에 참여하는 동시에 자기 주변의 사회를 바꾸는 사람이다. 미희는 과거에 자신이 모질게 굴어 단절했던 고등학교 친구와 대학교 선배를 찾아가 시간과 관계를 회복해 보려 한다. 그러나 선배와의 만남은 다소 허무하고 고등학교 친구는 만나주지 않는다.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려던 미희는 수술을 하게 됐으니 보호자가 되어줄 수 있느냐는 성숙의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자살을 포기한다. 늘 보호와 관심을 요청하던 미희는 돌봄의 요청을 받는 자가 된다. 독립적으로 사회 속에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성숙은 사실 미희만큼은 아니지만 유영이라는 상처와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미희는 그런 성숙을 알아봐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유영을 알지 못했던 미희는 유령처럼 다른 시간대에 출현한 유영을 알아보지만, 성인이 된 성숙과 익주는 유영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마도 미희가 만난 유영은 진짜 유영이기 보다는 유영과 같은 상처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등학생일 수도 있다. 그리고 미희가 그녀에게서 유영의 흔적을 읽어낸 것일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시간대에 있는 이들이 교차하면서 서로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주는 혼란스럽고 복잡한 서사 속에서 그래도 미희와 성숙은 살아남아 미희의 고등학교 친구 근경을 찾아간다. 그러나 근경은 미희에게 ‘그만 스토킹을 하라’며 화를 낸다. 근경은 ‘이제 와서 무엇을 함께 할 수 있겠냐?’며 반문한다. 과거, 현재, 미래가 얽인 실타래처럼 혼재되어 살아가는 미희, 성숙과 달리 근경은 이미 오롯이 현재의 시간을 산다. 근경은 미희에게서 더 이상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낼 수 없다. 그리고 영화는 그에 약간의 충격을 받은 미희의 얼굴 클로즈업으로 끝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다르게 흘러가고 그 시간이 언제나 맞아떨어질 수 있으리란 염원은 불가능하다. 그런 면에서 영화는 낙관을 말하기보다는 성숙이란 존재가 고대유물처럼 얼마나 희귀한 존재인지를 역설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시네마테크 KOFA가 주목한 2018년 한국영화’의 리스트가 발표됐다.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하자면, 이 리스트에 참여한 초기에는 열 편의 작품을 선택하는 게 쉽지 않았다. 10편에 다 넣지 못한 작품의 수가 항상 대여섯 편 이상이 되었다. 그래서 매번 깊은 고심 끝에 그만큼의 작품을 제외시켜야 했다. 그런데 근래 몇 해에는 그런 작품의 수가 한두 편 정도밖에 안 된다. 글쎄다, 정확한 이유는 나 자신도 정확하게는 알 수 없다. 계속 참여하다 보니 내 결정 기준이 단호해진 것인지, 아니면 그사이에 한국영화가 빈곤해진 탓인지 좀 더 생각해볼 문제다. 후자가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다. 말했듯이 올해도 10편을 선택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내가 선택한 작품과 전체 결과는 언제나처럼 적당한 선에서 사무송(使無訟)한 모양새다.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해 아쉬운 작품의 리뷰를 의뢰받고 고민했다. 개인의 리스트를 별도로 발표하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작품을 골라야 할지가 그 이유였다. 내 리스트와 상관없이 우선 몇몇 작품의 제목을 (ㄱㄴㄷ 순으로) 언급만 하자면 < 1급기밀 >( 홍기선 ), < 곤지암 >( 정범식 ), < 누에치던 방 >( 이완민 ), < 인랑 >( 김지운 ), < 춘천, 춘천 >( 장우진 ), < 파란입이 달린 얼굴 >(김수정) 등을 꼽을 수 있겠다. 독립영화, 상업영화의 구분과 별개로 각자의 영역에서 제 역할을 했고 또렷한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다. 위 작품들은 리스트에 들어가지 못했으나 작년 한국영화를 풍성하게 만든 이름들임을 확신한다. 리뷰 대상으로 선택한 작품은 < 홈 >이다. 신인 감독 김종우 의 데뷔작인 <홈>은 작년 5월 30일에 개봉해 8천 명 정도의 관객을 모았다. 비평적인 수난은 더욱 심해서 이 영화를 제대로 조명한 글을 거의 보지 못했다. 연말에 발표된 리스트에서 이 영화가 언급조차 안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청소년 인물, 가족과 사회를 다루는 점잖은 태도나 영화가 이야기하는 소중한 주제를 감안하면 이 영화가 감내해야 했을 외면의 정도는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나는 작년에 정부 정책을 다루는 매체에 이 영화에 관한 칼럼을 보낸 적이 있다. 리뷰는 아니었고, 영화가 다루는 이런저런 문제를 놓고 정책적인 해결책 등을 물어보는 글이었다. <홈>의 특성은 그러한 데 있다. 눈물을 흘리거나 감동을 받는 선에서 영화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런 경험이 실제 생활로 넘어오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주인공 소년에게 닥친 환경의 안타까움이 질문으로 이어지고 해결 방안은 없을까, 라고 생각하는 데 이르는 것이다. 변화를 초래하는 경험을 보통 다큐멘터리로부터 얻곤 하던 나로선 각별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줄거리를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홈>은 졸지에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의 이야기다. 고아는 아닌데 고아보다 더한 상황이 준호( 이효제 분)에게 일어난다. 소년의 가족 관계는 조금 복잡하다. 준호의 어머니는 준호의 아빠와 이혼한 상황에서 다른 유부남 강원재( 허준석 분)와 관계를 맺었고 그들 사이에서 성호( 임태풍 분)가 태어났다. 원재는 부인과의 사이에 딸 지영( 김하나 분)을 두었다. 어느 날 아침, 원재의 부인이 준호의 엄마를 찾아와 실랑이를 벌이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해, 두 여인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나란히 병실에 누워 있게 된다. 원재가 아들 성호를 데려가면서 준호는 홀로 집에 남는다. 소년의 처지를 가엽게 여긴 원재는 준호에게 두 동생과 함께 살 기회를 만들어 주는데, 원재의 착한 결정은 상황을 알아차린 처가의 분을 사고 만다. 청소년이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이 종종 범하는 실수는 아이와 성인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다루는 데 있다. 아이들은 지나치게 순수하고, 때가 묻은 폭력적인 어른들이 아이들의 세계를 파괴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더 이상 고전적이지도 않고 별다른 감동도 주지 못한다. 영화가 두 개의 세계 사이로 선명하게 그어놓은 선이 작위적이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어른들의 시선 아래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왜곡하기도 한다. 하지만 근래 만들어진 어린이 혹은 청소년의 성장영화는 영화의 시선을 인물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홈>의 제작사인 ‘아토’는 이 영화 외에도 < 우리들 >(2016, 윤가은), < 용순 >(2016, 신준), < 살아남은 아이 >(2017, 신동석) 등의 작품을 연이어 제작해왔다. 내면적으로 충실한 작품을 통해 한국영화의 경계를 확장하는 방식은 지지를 받아 마땅하다 하겠다. 중학생인 준호의 나이로 치면 <홈>은 <우리들>과 <용순> 사이에 놓인다. 두 동생 앞에서는 어른스러워 보이는 준호는 아직 성인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운 소년이다. 무엇보다 성인들이 관계를 맺는 방식이 익숙하지 않다. 그런 준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곧 <홈>의 태도다. 엄마가 병실에 누운 후, 준호가 처한 상황은 급변한다. 영화는 덜컹거리는 상황을 곱게 포장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 영화의 태도가 불편하다면 그것은 우리가 소년의 시선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의 방증이다. 극중 복잡한 어른들의 관계, 어른들의 처지가 상세하게 그려지지 않은 건, 그것을 대하는 소년에게 그렇게 보이기 때문이다. 친부는 딱한 상황에 처한 아들을 거두지 않으며, 원재는 처가와의 갈등을 소년에게 설명할 길이 없다. 준호가 주변 상황에 대처하는 수준은 더욱 어수룩할 수밖에 없다. 어찌하지 못할 때마다 소년의 어깨는 자꾸 움츠러든다. 원재의 호의에 보답한답시고 편의점 물건을 훔쳐간 아이들과 싸움을 벌이고 끝내 물건을 되찾아온 장면에서는 눈물을 감추기 힘들다. 소년은 상처투성이의 입으로 온 힘을 다해 “같이 살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아니라 소년의 마음을 따라가다 얻게 되는 그런 출렁거림이 <홈>의 미덕이다. 소년이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 행복하게 사는 일은 <홈>에서 벌어지지 않는다. 후반부에서 소년은 아주 어두운 잘못을 저지르려고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소년에게 어마어마한 시련이 닥치는 것으로 끝맺지도 않는다. 영화의 후반부로 전개되는 과정은 얼핏, 준호라는 어린 존재가 세상에서 홀로 서는 성장담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도입부로 돌아가 보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준호는 패스를 하지 않고 홀로 골을 시도하려다 실책을 범해 친구들로부터 책망을 받는다. 엔딩에 앞서 영화는 소년이 거쳐온 공간들을 한 번씩 마주한다. 그 공간을 거치며 보낸 시간 속에서 소년은 성장했을까. 영화의 엔딩, 다시 운동장에서 선 준호는 별 무리 없이 친구들과 함께 호흡을 나눈다. 표정도 밝다. 그렇다면 우리는 소년의 어깨를 두드리며 응원만 하면 되는 것일까. 영화의 마지막 쇼트는 일순간의 응원에 스스로 만족하고 떠나려던 나를 돌려세우고 만다. 카메라는 줄곧 소년을 향해 바라보고 있었으나, 문득 나를 향한 시선을 느끼게 된다. <홈>은 ‘함께 사는 것’을 박탈당한 소년의 외로움에 관한 영화다, 소년에게 그런 세계를 던져주고도 담담하게 지내는 나를 깊은 슬픔에 잠기게 하는 영화다. 끝으로 소년 준호를 아름답게 연기한 배우 이효제가 연기상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것은, 이 영화가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묻힌 것보다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글을 다 쓴 뒤 김종우 감독이 「씨네21」과 나눈 인터뷰를 읽었다. 그는 “8살 때 형과 헤어졌다. 형은 영천 시골에 있었고 나는 부산으로 이사왔다. 형이 고등학생 때였는데, 그때부터 형은 혼자 살았다. 왜 형이랑 떨어져 사는지 몰랐는데, 중학생 때 어머니가 우리 가족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돌이켜보면 그때 형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가족관계를 떠나 당시 형의 심정을 헤아려보면 너무 힘들고 아팠겠다는 생각이 들더라.”라고 밝혔다. 영화에서 유달리 진실함이 느껴졌는데, 감독 자신에게서 출발한 이야기라 더 그랬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