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콩쿨
- 감독
- 이용선
- 제작년도
- 2015
“나도 힘들다.” 그 말 한마디 내뱉는 것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괴로움이 일상화된 요즘이다. 여기저기 생존의 절박함을 호소하는 목소리를 듣노라면 존엄한 밥벌이 앞에 자존심 따위 내려놓은 지 이미 오래 인 것 같다. 기러기 아빠, 사오정, 팔팔 세대란 말을 들으며 팍팍한 세상사를 걱정했던 게 엊그제 같은 데, 어느새 절망은 사회 전반으로 퍼져 청년 실신, 오포 세대 등등 새로운 낙담을 표현하기 바쁘다. 그래서 피로하다. 한때 유행했던 ‘피로 사회’라는 표현이 공감되는 건 삶이 피로해서가 아니다. 피로한 삶을 나타내는 이 같은 용어들이 너무 많아져 이제는 ‘지옥 같다’는 말조차 일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그 와중에 이용선 감독의 < 화장실 콩쿨 >은 조금 늦게 도착한 편지처럼 느껴졌다. 기러기 아빠와 권고 퇴직의 이야기는, 그때는 충격적이었는데 지금은 오래되어 버린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옥에 비유되며 불행을 나눠서 져야 하는 대한민국의 오늘에 비춰보면 조기 유학은 어쩌면 속 편한 소리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화장실 콩쿨>은 곱씹을수록 더 예뻐 보이는 작품이다. 기러기 아빠 상민은 만성 변비에 시달리고 있다. 스트레스성이라지만 나아질 기미는 없다. 딸의 미래를 위해 아내와 함께 해외 유학을 보낸 지도 벌써 3년, 심신은 지쳐가고 외로움은 쌓여간다. 그러던 어느 날 상민은 회사로부터 권고사직 통지를 받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딸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조르고, 아내는 잠시 귀국하겠다는 약속을 번번이 미룬 채 유학을 연장하자고 한다. 몰릴 때까지 몰린 상민은 딸의 한 마디에 용기를 내고 권고사직을 되돌리고자 잠적한 본부장을 찾아 나선다. 30분 남짓한 시간에 펼쳐지는 이야기는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 익숙하다. 사실 시대를 반영하는 소재일수록 식상해지기 쉽다. 조금만 시간이 흘러도 시의성을 놓칠 수 있고 이미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된 소재일 확률도 높다. < 화장실 콩쿨 >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여전히 유효하지만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고,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마주한 풍경이다. 그럼에도, 아니 오히려 그래서 이 작품이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화장실 콩쿨>이 곱씹을수록 예뻐 보이는 건 닳고 닳은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의적절한 비판이나 시대성의 반영, 다시 말해 소재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작품 저변에 깔린 인간적인 면모가 조금 더 진하게 두드러진다. 기러기 아빠로서의 피로감, 짊어져야 하는 무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는 이유 등이 꽤 설득력 있게 전개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용선 감독의 이전 작품에 비해 훨씬 장르적이고 서사적이다. 일견 장르적이라고 하면 틀에 박힌 구성을 떠올리기 쉽지만 < 화장실 콩쿨 >은 익숙한 듯 새로운 재치가 있다. 변비에 시달리는 아버지와 바이올린을 배우는 딸, 두 부녀의 접점은 화장실에서 울려 퍼지는 클래식 선율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 박수를 보내고 싶은 건 그 유머감각이다. 제목에서 느껴지는 유머 감각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데, 불륜에 빠진 본부장, 시크하지만 따뜻한 참견쟁이 친구, 철없는 인턴사원 등 장편으로 늘려도 손색이 없을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이 가득하다. 이들이 벌이는 각기 다른 톤의 사건들은 마치 한 곡의 콩쿨 음악처럼 재치 있는 구성으로 보는 이의 마음마저 다독인다. < 화장실 콩쿨 >은 괜찮다고, 모두가 힘들다고 어깨를 두드리는 식상한 위로가 아니다. 팍팍한 일상의 피로마저 털어버릴 수 있을 자존감 있는, 시대를 향한 농담이다. 이용선 감독 특유의 따뜻한 작화가 이 같은 위로에 한 몫 단단히 하는 건 물론이지만, 그 밑에 깔린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더 따스하다. 2010년 < Alone >으로 두각을 나타낸 이후, <기억하려하다>(2011) <거대한 태양이 다가온다>(2014) 등 단편을 통해 일상 속 공감과 애니메이션의 환상성의 접점을 모색해왔던 이용선 감독의 진일보한 한 걸음이 느껴진다. <화장실 콩쿨>은 인디애니페스트 2015에서 독립보행상, 관객상, 관객심사단상을 받았다. 관객들의 압도적인 지지에서 알 수 있듯 오늘도 팍팍한 일상을 버티는 우리를 위한 달큰한 오아시스 같은 작품이다. 일상에 치이고 힘들어도 다음 걸음을 디딜 수밖에 없는 이유를 새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