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 관계
- 감독
- 장조린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나혜연, 오대유, 이원화
“한국영화의 얼굴들”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재개하게 됐다. 이 연재에선 한국영화에서 얼굴이 된 클로즈업(close-up) 쇼트들을 관찰하고 이야기하려 한다. 클로즈업으로 프레이밍된 인간의 얼굴뿐 아니라 동물, 사물, 풍경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응시(gaze)를 돌려주며 기어이 얼굴이 되는 클로즈업까지 포괄하려 한다. 클로즈업은 영화사 초기부터 어떤 다른 영화 쇼트보다도 영화이론가들을 사로잡아 왔다. 특히 클로즈업은 이전의 시각매체가 보여준 적 없는 시점과 크기를 표현하면서 영화 고유의 매체성을 표현하는 기법으로 평가되곤 했다. 영화학자 매리 앤 도앤은 이러한 매혹에 대해 클로즈업이 양가적 특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좀 더 상세히 말하면 클로즈업은 근접성, 내밀함, 디테일, 부분, 정서, 인칭화된 시점, 닮음, 연속성, 인간화, 주체화, 의미작용의 집중화 공간이면서, 반대로 거대함, 외부성, 총체성, 디제시스로부터의 자율성, 비례에 맞지 않음, 노출, 탈인칭화된 응시, 낯선 기이함, 불연속성, 비인간화, 객체화, 의미화 할 수 없는 잔여의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아이콘으로서의 스타를 표현하는 주된 기법이자 높은 주목도 때문에 쉽게 교환할 수 있는 상품-물신이 될 수 있는 반면, 압도와 경외감을 일으키는 낯선 타자로서 탈약호화된 기호가 될 수도 있다. < 국가의 탄생 >(1915)의 미국감독 D.W. 그리피스와 < 전함 포템킨 >(1925)의 러시아 감독 세르게이 에이젠쉬쩨인은 두 대립된 관점의 대표적 감독이었다. 그리피스는 친밀감과 정서적 집중을 활용해 멜로드라마적 순간과 영화스타를 창조했고, “롱 쇼트의 코끼리떼보다 클로즈업으로 촬영된 한 마리의 바퀴벌레가 더 무섭게 보인다.”고 피력했던 에이젠쉬쩨인은 일상을 넘어선 낯선 충격으로 계급화된 현실을 깨닫고 혁명의 깃발을 들게 만들었다. 이 연재는 클로즈업의 양가성 중 어느 한쪽을 옹호하기 보다는 이 대립된 잠재성이 교차하면서 혼란과 붕괴를 야기하고 무너져 내린 파편더미들 속에서 영화적 응시가 드러나는 순간들에 더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극장의 거대한 스크린보다는 휴대가능한 스몰 스크린이 지배적인 상영 플랫폼으로 부상하면서 영화의 개념과 범주가 달라지는 가운데 위에 언급한 클로즈업의 잠재성이 여전히 유효한지도 살펴보려 한다. 첫 번째로 다룰 클로즈업은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 >(1991, 이하 <이태원 밤하늘>)의 마지막 쇼트로, 샤니라는 인물의 얼굴이다. <이태원 밤하늘>은 < 고교우량아 >(1977), < 깊은 밤 갑자기 >(1981), < 장군의 아들 >(1990) 등의 영화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활발하게 활동했던 윤삼육 감독의 첫 연출작이다. 영화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주류사회에서 밀려나 이태원으로 오게 된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린다. 여기서 이태원은 한국사회에서 소외된 이들을 받아주는 포용적 공간이자 미국이라는 제국의 지배를 받는 (탈)식민적 공간이다. 미군에게 성판매를 하는 기지촌 클럽의 ‘양공주’, 클럽댄서로 일하는 트랜스젠더 여성들, 조직폭력배들, 미군과 ‘양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 가진 것 없지만 기성세대에 질린 젊은 청춘들이 그곳에 산다. 이 영화는 광주항쟁 마지막 순간에 도청을 탈출해 동두천 기지촌으로 숨어든 대학생이 민중의 삶을 지척에서 경험하고 갈등하는 이야기를 다룬 < 오! 꿈의 나라 >(이은, 장동홍, 장윤현, 1989)가 취했던 반제국주의 관점과 1980년대 상업영화의 에로티시즘 경향을 절묘하게 섞는다. 실제로 영화의 오프닝씬은 “미국 UPI 영화 직배저지투쟁에 앞장서온 모든 영화인에 바친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당시는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1988년 미국 할리우드 영화 직배가 허용되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10%대로 떨어지는 가운데 한국영화 스크린쿼터를 사수하는 투쟁이 영화계에서 거세게 일고 있었다. ‘한국영화 위기’의 감각은 이 영화에서 민족-국가 및 이성애중심의 ‘정상’가족 위기와 남성성 재건의 욕망으로 전이된다. 그리고 그 중심에 샤니가 있다. 다수의 인물이 주인공인 영화이지만 클럽댄서이자 트랜스젠더 여성이고 레즈비언으로서 애인 금자(임주연)와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샤니는 마지막까지 영화의 주제를 운반하는 동시에 비트는 인물이다. <이태원 밤하늘>이 제작된 시기는 사회 진보운동이 통일, 계급, 민주화 운동에서 인권운동으로 확장되어가던 시기였다. 현실과 스크린 모두에서 성소수자,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은 사회적 차별을 당하는 민중 또는 시민으로 소환되기 시작한다. 일부 용어나 관점이 문제적이지만 트랜스젠더와 관련된 제도적 문제들을 인권적 관점에서 조명했던 <PD수첩>의 「여자가 되고 싶은 남자들-‘게이’들의 삶」(1995.5.9.)이라는 에피소드가 방영되고, < 개 같은 날의 오후 >(이민용, 1995)는 가정폭력에 항의하며 옥상에 올라가게 된 여성들 중 트랜스젠더를 포함시켜 시스젠더(cisgender, 사회에서 지정받은 성별과 본인이 정체화한 성별이 일치한다고 인지하는 사람) 중심의 여성범주를 해체했으며, <이태원 밤하늘>과 < 마스카라 >(이훈, 1994)는 트랜스젠더 여성 캐릭터에 각각 오윤희와 하지나라는 트랜스젠더 당사자 배우를 캐스팅했다. 샤니는 애인 금자의 만류에도 둘의 미래를 위해 미군을 상대로 성판매를 한다. 그러던 중 금자가 샤니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오래전부터 여성으로 정체화하고 호르몬치료를 받아온 샤니는 금자의 임신을 믿을 수 없다. 금자의 임신은 자신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이태원의 트랜스젠더 선배는 호르몬 치료에도 불구하고 간혹 “어떤 자극에 의해” “죽어있던 남성이 살아나는” 경우가 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그 자극이 무엇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민족-국가의 미래가 있으려면 반드시 이성애 부부에 의한 생물학적 친자가 있어야 한다는 목적론적 암시로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샤니가 남자의 모습으로 살아달라는 금자의 청을 거절하자, 금자는 홀로 자신의 시골 고향집으로 떠난다. 결국 샤니는 고민 끝에 남장을 하고 금자를 만나러가는 고통스러운 결정을 내린다. 이 영화에는 샤니와 금자 외에도 아이가 있는 또 다른 대안 가족이 등장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 클럽의 다른 ‘양공주’ 여성들과 달리 젊은 커플인 유진(최진영)과 상희(전세영)는 동생을 학대하는 엄마와 청년들을 착취하는 조폭 두목 아버지 장포 모두로부터 탈출한다. 그러나 이 셋은 “대안을 찾아 떠나겠다”는 분명한 선언에도 친자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민족-국가를 맡길 수 있는 이상적 가족으로 선택되지 못한다. 영화는 오히려 샤니에게서 제국인 미국에서 해방된 민족-국가의 미래 서사를 찾는다. 트랜스젠더인 샤니를 강제로 여성에서 남성으로 재성전환 하는 혹은 드랙킹(drag king) 수행을 하게 만드는 과정은 ‘식민화되고 여성화되었던’ 민족-국가의 재건/재남성화로 은유화 된다. 이성애 부모와 친자라는 생물학적 관계로 맺어진 규범적 가족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산부인과 의사의 증언처럼 죽은 줄 알았던 민족적 자존심인 ‘남성’이 ‘건강하게’ 살아있어야 하는 것이다. 샤니를 통해 효과적으로 이분법적 대립과 위계화가 형성된다. ‘근대/도시/여성/비규범적 트랜스젠더 신체/동성애/(탈)식민화된 공간/오염/헤테로토피아’인 이태원과 ‘전근대/자연/남성/규범적 시스젠더 신체/이성애/주권적 민족-국가/순수/유토피아’인 고향으로 이원화되고, 전자에서 후자로의 이동이 성장서사처럼 진행된다. 샤니는 심신이 찢겨나가는 고통을 느끼며 화장을 지우고, 머리를 자르고, 깨진 거울을 응시하고, 양복을 입으며 남장을 한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와 사각앵글로 이뤄진 짧은 쇼트들이 몽타주씬으로 구성되며 그야말로 존재가 뿌리부터 흔들리는 엄청난 폭력과 고통을 가시화한다. 이것은 단순히 샤니에게 보존되어 있던 남성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다. 남성으로의 강제된 (재)성전환이자 강압적인 이성애로의 교정이다. 또한 거칠게 이어 붙어진 몽타주는 그 자체로 프랑켄슈타인의 몸처럼 남성성의 편집이 된다. 남성성이 편집된 자국과 인공성은 사라지지 않고 드랙킹 공연처럼 샤니 혹은 오윤희 배우의 신체의 표면에서 이질적으로 겉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몽타주씬 이후 쓸쓸하고 황폐해 보이는 이태원 낮의 거리를 걷던 중 샤니는 남자 행인에게 부딪혀 욕을 먹는다. 남자는 “야 임마! 똑바로 보고 다녀, 이새끼야!”라고 소리친다. 순간 샤니는 자신이 남성으로 패싱(passing,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겉보기 성별)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샤니는 옅은 미소를 띤다. 이중의 성전환 속에서 분명히 정체성과 존재가 파괴되고 분열되는 고통을 겪지만 또한 그녀의 (재)성전환 혹은 드랙이 제대로 통했다는 복잡한 트랜스젠더의 쾌감을 보여준다. 품이 커서 어색해 보이는 남자 양복을 입은 샤니는 산으로 둘러싸인 금자의 시골 고향에 도착한다. 화려한 도시의 네온사인과 비교되는 새소리가 들리는 자연풍경 속에서 놓인 샤니를 카메라는 핸드헬드로 뒤쫓는다. 금자는 전통적인 초가집 가옥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다. 금자의 신체는 샤니가 트랜스 여성으로서 동일시하는 여성 신체인 동시에 레즈비언으로서 성적 욕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결말에서 원초적으로 보이는 그 젖가슴은 오직 가부장제-이성애 중심적인 재생산만을 위해 거리를 두고 타자화해야 할 자연적 신체로 묘사된다. 재생산이 가능한 모성성으로 환원된 시스젠더 여성의 신체는 트랜스젠더 여성은 근접할 수 없는 원본의 환상을 만든다.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가슴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신체화된 금자와 대비되게 카메라는 역쇼트로 손을 허리에 얹고 우뚝 서며 역광을 받고 있는 샤니를 로우앵글을 시각화하며 남성성을 강조한다. 다시 한 번 로우앵글의 줌인 클로즈업으로 잡힌 샤니 얼굴 뒤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높은 산봉우리가 보이고 전통음악이 깔린다. 샤니의 얼굴은 모성적 자연 풍경에 빨려 들어가며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이자 남성적 민족-국가의 얼굴로 이론의 여지없이 알레고리화 된다. 여기서 샤니의 여성 정체성과 퀴어한 섹슈얼리티는 폭력적으로 부정되고 제거되며 남장을 한 샤니는 한국영화와 민족국가를 위기로 몰아넣었다가 다시 구원해내고 동질화하는 얼굴이 된다. 하지만 여기에는 완전히 의미화 되지 않는 잔여가 남는다. 줌인 클로즈업의 순간 샤니의 얼굴에는 찡그린 미소가 각인된다. 이 미소는 다시 줌아웃하며 풍경 속에 작게 남아있게 되는 샤니와 독립되어 부유한다. 샤니/오윤희 배우의 얼굴은 산으로 병풍 쳐진 자연, 즉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 이데올로기로부터 뜯겨져 나와 자율성을 갖는다. 어떤 고정된 의미로 해석되지 않고 통합되지도 않는 미소는 샤니가 남장을 하고 패싱된 후 짓는 미소, 오윤희 배우가 느끼는 잘 수행된 드랙킹의 쾌락, 그리고 여성성을 지워내고 남성성을 인공적으로 편집하는 쇼트들의 봉합솔기와 겹쳐진다. 그 미소는 감독이 설정한 엔딩씬의 샤니 캐릭터를 떠나와 이물감을 느끼고 있는 오윤희 배우의 트랜스젠더 신체위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찡그린 미소는 가부장적 민족-국가의 시스젠더 응시 아래 억눌리지만 곧 슬며시 고개를 들며 벌어진 봉합 솔기를 비집고 되돌아오고 마는 트랜스젠더의 응시로 전치된다. 누구의 모습과 수행으로, 어떤 정체성과 섹슈얼리티로, 어떤 마음으로 짓는 미소인지 알 수 없는 여러 얼굴이 레이어된 마지막 클로즈업은 이성애 시스젠더 중심의 민족-국가를 재건하려는 욕망과 끊임없이 오염되고 변용되며 이질적인 장소로서의 트랜스 신체성이 교차하는 마디점(nodal point)이자 영화적 응시가 된다. * 샤니의 남장 혹은 재남성화를 드랙킹으로 보는 아이디어는 김일란 감독과의 대화중에 나온 것임을 밝힌다. * <이태원 밤하늘엔 미국달이 뜨는가>의 해석은 필자의 논문 「헤테로토피아 공간과 트랜스젠더 여성 재현-1990년대 이후 한국영화를 중심으로」(『한민족문화연구』, 2023.3)에서 일부 발췌한 것입니다.
어쩌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할지 모르겠다. 할리우드 영화사에 거대한 영화사들이 그렇게 차례로 설립되었을 때는 눈길도 주지 않다가 왜 갑자기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건가요, 혹시 유명한 스타들과 감독이 여기에 참여했기 때문인가요. 위대한 이름들, D. W. 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미국인들의 스위트 하트’ 메리 픽포드. ‘남자 중의 남자’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만일 그렇게 질문했다면 당신께서는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오해가 영화사의 순간들 중의 이 순간의 핵심이기도 하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 짧은 우회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대중들과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벌어진 일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게 전개되었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손을 떠나자마자 자본으로 전화하였다. 단순하게 돈을 내고 영화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는 시장에서 유통과정을 통해 가치를 구현하는 상품에서 출발하였다. 이 상품이 자본을 가진 자들에게 유리했던 것은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예술가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고할 필요도 없는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엄청난 주급(週給)을 받는 몇 명의 스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용직 비정규 노동자들이었다. 영화에서 이윤은 대부분 초과 잉여가치를 바탕으로 발생시켰으며 심지어 이 착취과정은 오늘날까지 일반화되었다. 1917년, 미국 영화산업이 전국적인 규모가 되었을 때 26개의 독립적인 체인을 운영하고 있던 극장주들이 모여 합병 형태의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First National Exhibitors Circuit)을 만들었다. 그들은 개봉작과 재개봉작으로 이원화된 극장 배급 시스템에서 개봉일정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려고 했다.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으며 채플린의 야심작이었던 <개 같은 삶>과 <어깨 총!>의 흥행을 좌지우지하자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를 준비하면서 이들을 <키드>의 촬영현장에 초대하여 이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설득시켜 상영 일수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퍼스트 내쇼널은 미국 영화사에서 메리 픽포드와 채플린 영화를 내세워서 첫 번째 백만 불 흥행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아직 용어가 등장하진 않았지만 최초의 블록버스터를 독점적 배급체인의 기반 위에서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규모를 확장시켰고 1919년 전국 5,000개 극장을 체인화 시켰다. 물론 이 과정을 이미 할리우드를 장악한 제작사들은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파라마운드 영화사의 아돌프 주커는 공격적인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본의 회전속도는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합병과정과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응 과정에서 복잡한 일이 벌어졌다. 이 과정은 그것만으로 영화라는 자본은 어떻게 자기 축적의 과정을 형성하였나, 라는 셀 수 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희생자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계약서 바깥에 놓여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과 출연하는 배우들은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당시의 계약 관례에 따라 영화사와 5년 단위의 주급 계약을 맺었고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면 아무 가치도 없을 계약서를 그들의 동의 없이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영화사를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하자는 이야기를 처음 나눈 사람은 찰리 채플린과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그리고 메리 픽포드였다. 여기에 데이빗 W 그리피스와 서부극 영화의 스타 윌리엄 S 하트가 가세하였다. 이들이 모여 영화사를 세운다는 것은 할리우드 전체가 긴장할만한 사건이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돈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주급을 받으면서 영화를 연출하고 출연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영화 프로젝트를 그들 자신의 뜻에 따라 거절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이제까지 할리우드는 감독과 배우에게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계약은 숫자로 이루어졌고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와 배급업자의 판단에 따라야만 했다. 그들이 영화사 이름을 ‘(하나로) 맺어진, 뭉친, 결합한, (다소 과장해서) 단결한 예술가들(United Artists)’라고 지은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서명 직전에 윌리엄 S 하트는 파라마운트가 편당 20만 불로 인상하면서 여기서 빠졌다. 그때 윌리엄 S 하트는 일 년에 평균 여섯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픽포드와 찰리 채플린은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과 아직 계약이 남아있었다. 그리피스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자기 지분을 높이기 위해서 퍼스트 내쇼널과 별도로 세 편의 계약을 했다. 단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만이 아무 계약조건의 단서 없이 자유롭게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함께 사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다음 아름다운 이야기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영화사의 순간들, 의 다음 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이다. 하지만 돈의 이해관계로만 움직이던 할리우드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이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조에트로프 영화사를 차릴 때였다. 스필버그도 자신의 영화사를 가지기를 원했다. 그렇게 뉴 시네마 이후 감독들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기 위해서 하나 둘씩 영화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자본의 순환 안에서도 누군가는 영화가 예술가의 선택의 문제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 가지 후일담은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마이클 치미노의 어마어마한 야심에 찬 서부극 <천국의 문>의 박스 오피스에서의 재난으로 1981년 MGM에 매각되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서 끝났다. 60년에 걸친 역사. 하지만 이 영화의 예술적 야심을 그리피스,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는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할리우드가 언제 태어났는가. 라는 질문은 간단한데 이걸 설명하는 건 영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마다 견해가 서로 다르다. 그건 할리우드가 단순하게 지명이 아니라 복잡하게 서로 성격이 다른 자본이 난마처럼 얽혀있는 산업이며, 동시에 하나의 상징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할리우드는 그저 호명을 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여기에 스튜디오가 세워지고 실제로 물적인 자본과 인력이 동원되어 세워진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할리우드의 탄생에 관한 학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영화사의 순간을 건드리려는 것이지 산업의 역사를 쓰는 것이 목표가 아니다. 마침내 할리우드가 나타났군요, 라고 말해보고 싶어지는 날. 그러므로 내가 기술하는 순간은 할리우드가 자본의 성격을 물적 형태로 드러낸 그 어느 날이다. 당신이 정치경제학의 관점을 갖고 다른 날을 더 중요하게 여길 수도 있다. 혹은 다른 어느 날이 문화적 사건으로서의 탄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나는 그 견해를 존중한다. 그걸 염두에 두고 읽어주기 바란다. 로스앤젤리스에서 16킬로미터 떨어진 이곳을 할리우드라고 처음 부르게 된 데에는 ‘믿거나 말거나’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온다. 19세기 말 부자인 H. J. 휘트니가 아내와 함께 신혼여행을 왔다. 그때 마차를 타고 가던 휘트니는 나무를 끌고 가던 흑인에게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흑인이 “아이, 할리우드”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사실은 “I, hauliing-wood(나는 아주 힘겹게 나무를 끌고 있어요)”라는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이다. 휘트니는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휘트니는 이 지역의 땅 480에이커(1.942제곱킬로미터)를 사들였다. 그리고 자기가 산 땅 이름을 ‘할리우드(성스러운 나무)’라고 불렀다. 그와 비슷한 몇 가지 이야기가 더 있다. 이 지역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1855년, 할리우드에 최초의 집이 지어졌고, 그 곳에서 금광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퍼지자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여기에 우체국이 들어선 것은 1900년이 되어서이다. 하지만 빠른 속도로 이 지역은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2년에 호텔이 들어섰고, 커다란 2개의 시장이 세워졌다. <데이비드 W. 그리피스> 여기서 영화를 찍은 최초의 중요한 인물은 데이비드 W. 그리피스이다. 그리피스는 뉴욕의 투자자들의 현장 간섭에 질린 상태였다. 그들은 영화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 스타의 얼굴이 좀 더 크고 많이 나오기를 원했고, 그저 액션장면만을 원하면서 종종 현장을 방문했다. 그리피스는 그들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곳에 가서 영화를 찍었다. 뉴욕의 투자자들이 오기에 할리우드는 너무 멀었다. 그때까지 영화 제작의 중심지는 뉴욕, 그 다음은 시카고였다. 1910년 단편영화 <오래된 캘리포니아에서>를 찍었다. 그리피스는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늘 날씨가 좋았고 (당연한 이야기이다. 여기는 사막 기후를 가지고 있다) 도시가 가깝게 있는데도 거의 개발되지 않았다. 1911년 10월 26일, 네스토어 픽쳐스 컴퍼니는 여기에 최초의 스튜디오를 세웠다. 그 뒤를 따라서 파라마운드, 워너 브라더즈, RKO, 컬럼비아 영화사가 차례로 스튜디오를 지었다. 그리피스의 영화를 보고 세실 B 데밀도 여기서 영화를 찍었다. 하지만 그들은 산발적인 작업이었고, 좀 더 본격적인 작업을 위해서는 더 큰 스튜디오가 필요했다. 좀 복잡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영화산업은 뉴욕을 중심으로 재빨리 자본들 사이에서 일종의 트러스트 방식으로 결합하면서 독점자본화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투자자들은 새로운 자본이 이 시장에 들어오기를 원치 않았다. 이 배타적 자본의 방어에 대해서 반(反) 트러스트의 입장을 취한 자본가들이 나타났고 그 중에서 유니버설 매뉴펙처링 코퍼레이션의 대표 칼 럼리는 기존 영화 트러스트들과 싸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지역에서 영화 사업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아마도 20세기 초라서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오해하면 안 된다. 칼 럼리는 독점자본의 트러스트에 반대한 것이지 영화예술의 융성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영화에서 자본의 집약이라는 방식을 도입하였다. 칼 럼리는 남부 캘리포니아 산 페르난도 협곡을 사들였다. 230 에이커를 사들였고, 여기서 영화 제작과 배급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한 장소로 모아놓고, 영화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노동 집약, 기술 집약. 자본집약의 고전적인 토대를 만들어냈다. 칼 럼리는 1915년 3월 21일 유니버셜 스튜디오 개막식 행사를 치렀다. 사막 위에 지구상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가 세워지는 날이었다. 17살에 미국으로 이민 온 이 독일소년은 미국에서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이 소망이라고 종종 말했다. 어쩌면 이 날 칼 럼리는 진정한 소원을 이룬 것일지도 모른다. 칼 럼리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지만 할리우드는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전 세계 곳곳을 남김없이 지배하는 가장 커다란 영토를 가진 왕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날 스튜디오 개막식을 구경하기 위해서 2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하지만 칼 럼리는 철두철미한 실용주의자였던 것 같다. 칼 럼리는 개막식 연설을 생략했다.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래도 모여든 사람들은 행진을 하면서 미국 성조가를 불렀다고 한다.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스타였던 폴린 부쉬, J. 워렌 커리건, 그레이스 커나드, 프랜시스 포드, 론 채니, 윌리엄 클리포드, 거르투르드 셀비와 차례로 계약했다. 그들은 서명을 하자마자 뉴욕을 정리하고 반대편에 자리한 로스앤젤리스로 옮겼다. 변화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세워지자 할리우드 영화는 새로운 차원의 제작 시스템을 발명해나갔다. 데이빗 보드웰은 할리우드의 영화사는 스타나 감독이 아니라 전 세계 어디에도 유례없는 시스템의 역사라고 단언했다. 할리우드는 이제 은행자본을 중심으로 한 뉴욕과 제작을 중심으로 한 할리우드로 이원화되었고, 영화는 마치 공장과도 같은 하나의 시스템을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날은 또 하나의 역사가 시작한 날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