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
- 감독
- 이승영, 김병수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류승룡, 박효주, 온주완, 안내상, 하재숙, 김무열, 이일웅, 김청, 김부선, 정규수, 서갑숙, 김용선
(첫 번째 쪽) 가을 학기가 되자 oo일보사에서 주최하는 학생 계몽운동에 참가하였던 대원들이 돌아왔다. 오늘 저녁은 각처에서 모여든 대원들을 위로하는 다과회가 그 신문사 누상에서 열린 것이다. 오륙백 명이나 수용할 수 있는 대강당에는 전 조선의 방방곡곡으로 흩어져서 땀 흘려가며 활동한 남녀대원들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폭양에 그을린 그들의 시커먼 얼굴! 큰 박덩이만큼씩 한 전등이 드문드문하게 달린 천장에서 내리비치는 불빛이 휘황할수록, 흰 벽을 등지고 앉은 그네들의 얼굴은 한층 검어 보였다. 만호장안의 별처럼 깔린 등불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도록 사방의 유리창을 활짝 열어젖혔건만, 건장한 청년들의 코와 몸에서 풍기는 운김이 우거진 콩밭 속에 들어간 것만치나 후끈후끈 끼친다. 정각이 되자, P학당의 취주악대는 코넷, 트럼본 같은 번쩍거리는 악기를 들고 연단 앞줄에 가 벌려 선다. 지휘자가 손을 내젓는 대로 힘차게 연주하는 것은 유명한 독일 사람의 작곡인 ‘쌍두취행진곡(雙頭鷲行進曲)’이다. 그 활발하고 장쾌한 멜로디는 여러 사람의 심장까지 울리면서 장내의 공기를 진동시킨다. 악대의 연주가 끝난 다음에 사회자인 이 신문사의 편집국장이 안경을 번득이며 점잖은 걸음걸이로 단 위에 나타났다. (...) 라고 심훈 이 1935년에 쓴 장편소설 <상록수>는 시작한다. 애플북스 「상록수」 소설가 심훈 은 영화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는 내내 경성에 살았으며 그때 거기서는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심훈은 단지 시네필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1926년 (최초의) 영화소설 <탈춤>을 동아일보에 연재하였고, 그런 다음 영화를 배우기 위해서 이듬해 일본에 가서 영화감독 무라타 미노루(村田實) 밑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고 한다. 여기서 공부했다, 는 말이 정확히 무엇을 가리키는지에 관한 자료가 내게는 없다. 무라타 미노루는 영화학교 선생이 아니라 영화감독이다. 그에게서 배울 수 있는 방법은 연출부를 하는 것인데도 구태여 자료에는 공부를 했다, 고 되어있다. 한국영화에서 도제제도라는 방법이 식민지 시대의 영화현장에서 해방 ‘이후’에 남겨진 일본영화의 전통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약간의 추론. 쇼오치쿠 영화사는 1921년 쇼오치쿠 배우학교를 개조하여 쇼오치쿠 키네마 연구소를 만들었다. 여기에 아직 이십 대였던 무라타 미노루도 가세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그 첫 번째 영화로 니콜라이 고골의 소설 <밑바닥>을 각색하여 <거리의 영혼>을 찍었다. 이 영화는 (다소 놀랍게도 ‘이미’) < 인톨러런스 >의 영향을 받은 평행편집기법으로 연출되었다. 노엘 버치는 이 영화를 본 다음 감격하여 프릿츠 랑의 < M >이나(1930년) 칼 드레이어의 < 잔 다르크의 수난 >의 단계에(1928년) 이미 이르렀다고 썼다. <거리의 영혼>이 두 영화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점을 셈에 넣어주기 바란다. 그런 다음 닛카츠 영화사로 옮긴 무라타 미노루는 1924년 요시다 겐지로의 소설을 각색한 <세이사쿠의 아내>를 만들었다. 거의 결정적인 걸작. 이 영화는 마스무라 야스조가 1965년에 훌륭하게 다시 만들었지만 비교는 어림도 없다. 심훈이 1926년에 무라타 미노루 밑에서 ‘영화를 공부했’을 때 그는 <춘희>를 찍고 있었다. 심훈은 왜 무라타 미노루를 선택했을까. 심훈은 그에게서 무엇을 배웠을까. 아쉽지만 나는 이 영화를 보지 못했고, 그런 다음 돌아와서 심훈은 < 먼동이 틀 때 >를 자신이 각본을 쓰고 연출하였고 이 영화는 단성사에 개봉하였다. 한국영화사가 (프린트가 사라진) 걸작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아마 흥행은 잘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심훈이 이듬해 조선일보에 기자로 입사했을 리 없다. 하지만 심훈은 영화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 상록수 >를 쓴 이듬해 1936년 심훈은 이 소설을 각색하여 영화로 만들 계획을 세웠다. 이것이 심훈의 마지막 행보이다. 그는 그해 9월 16일 장티푸스로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1926년 11월 29일 동아일보, 심훈「탈춤」 나는 하스미 시게히코가 아니다. 그는 플로베르에 관한 글을 쓰면서 마치 영화감독을 다루듯이 <마담 보바리>를 바라본다. 물론 ( 심훈 가까이 살았던) 현진건이나 이효석을 읽고 있으면 종종 어떤 문장의 수사들이 마치 이미지를 만지는 것만 같다는 인상을 받지만 그 대목들이 영화적으로까지 옮겨간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상록수>를 읽으면서 심훈이 영화감독이라는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나는 무라타 미노루의 영화를 보았고 심훈의 (사라진) 영화는 (당연히)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심훈이 이 소설을 어떻게 영화로 옮길 계획이었는지를 알 수 없다. 이루지 못한 심훈의 소망을 1961년 신상옥 이 영화로 만들었다. 주연은 최은희 와 신영균 . 두 사람이 채영신과 박동혁을 연기했다. 그런 다음 1978년에 임권택 이 다시 이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새로운 커플. 한혜숙 과 김희라 . 물론 1978년은 이 소설을 다시 만들기에 좋은 시기였다. 나는 이 말을 부정적으로 하는 중이다. 거의 절정에 이른 새마을 운동. 농촌 계몽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소설. 게다가 그때는 영화진흥정책에 따라 반공영화, 새마을영화, 문예영화로 나눈 우수영화에 선정되면 외국영화 수입 쿼터권을 나눠주던 시기였다. 제작자들은 영화가 농촌에 가기를 희망했다. < 삼포가는 길 >을 새마을 영화로 둔갑시킨 마지막 쇼트를 기억하라. 교과서에 올라온 심훈이라는 이름. 누구나 읽어야 하는 소설의 명단. 일제 식민지의 탄압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농촌 계몽에 온몸을 바친 선남선녀의 이야기. 민족주의와 근대의 (기괴한) 결합. 그해에 임권택은 < 족보 >와 < 상록수 >를 찍었다. 그리고 정말 이상한 두 편의 반공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실험영화처럼 보이는) <가깝고도 먼 길>과 <저 파도 위에 엄마 얼굴이>를 만들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이 네 편의 영화 중 오직 <상록수>만이 우수영화에 선정되지 않았다. 나는 그 선정과정에 얽힌 우여곡절을 알지 못한다. 아마도 임권택은 몹시 당황했을 것이다. 가장 안전한 선택. <상록수>는 새마을영화이면서 문예영화였다. 양수겸장. 그런데 빗나간 예상. 거기서 느꼈을 어떤 위기를 상상해주기 바란다. 그때 임권택의 영화들은 거의 대부분 개봉되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영화는 간판은 걸려있지만 영화는 상영되지 않았다. 사라져 가는 경력. 외부가 허용되지 않는 상황. 한국영화의 많은 감독들이 그때 자신의 경력을 거기서 끝냈다. 미미해지는 잔존의 영역.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을 때 거기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에서 제외될 때의 사라져가는 존재의 기분. 그 곁의 예. <족보>는 미처 개봉도 하지 못하고 재개봉관으로 향해야만 했다. 하지만 제작사의 관점에서 <족보>는 제 임무를 다했다. 버려진 영화들. 수 없이 많은 1970년대 영화들은 그 과정을 따라갔다. 그 과정에서 허용된 미학적 성취들. <족보>는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숨겨놓은 놀라운 미학적 경지에 가 닿았다. 거기에 담겨있는 힘. 거기서 다시 한 번을 원하는 의지. 이 말을 반복해서 하고 싶다. 다시 한 번. 임권택이 1970년대 국책영화의 폭력적인 요구 안에서 가까스로 끌어낸 예, 라는 긍정의 힘과 의지의 새로운 조화. 오직 그의 영화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긍정의 구도. 정확하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상록수>가 또 다른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1978년은 임권택에게 모든 점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상록수>의 첫장면 아마, 어쩌면 아마도, 임권택 은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계몽의 서사로 따라가는 대신 신파의 감흥으로 가득 찬 비애극으로 받아들인 것 같다. 그의 독서 체험은 < 장군의 아들 2 >에서 나온다. 김두한이 출판사 앞을 지나가다 계용묵 선생으로부터 자네 김두한이지, 책 좀 읽고 다녀, 라는 핀잔을 들은 다음 자신이 머무는 종로 운당여관에 두 청춘남녀 학생을 부른다. 문맹이었던 그는 그들에게 심훈 의 <상록수>를 낭독시킨다. 대낮에 시작하여 밤늦은 시간까지 듣던 김두한은 죽어가면서 채영신이 박동혁을 그리워하는 대목에서 눈물을 훔쳐 닦으면서 중얼거린다. 죽여주는구나. 죽을 만큼 슬픈 이야기. 그런데 이상하게도 임권택의 < 상록수 >는 슬프게 찍히지 않았다. 단지 관객의 슬픈 감흥을 불러내는 데 실패했다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슬프게 접근하지 않았다. 구태여 이 영화의 기분을 설명해야 한다면 차라리 우울하다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론 슬픔과 우울을 엄격하게 나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사이를 우울증이 가로막아 나서고 있고 그 둘은 그 상태로 불투명한 채로 남는다. 슬픔은 종종 자아가 텅 비었는데 주체가 남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 말을 빌려서 우울은 이미 잃어버린 대상 앞에서 즐기는 주체의 외설적 긴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개의 상실. 임권택은 <상록수>에서 어떤 승리도 거둘 생각이 없다. 그는 일단 이야기를 찌그러트리고 그런 다음 두 주인공의 운명을 따라가는 척하다가 완전히 바꿔놓는 쪽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누구나 알고 있는 데로) 박동혁과 채영신은 교육을 받고 개화한 다음 각자 자신의 고향에 돌아가 개혁에 몰두한다. 그러므로 이야기는 두 사람의 고향 이야기를 오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채영신은 몸이 아파서 그만 먼저 세상을 떠난다. 남은 박동혁은 고인의 뜻을 이어받아 더욱 힘을 모은다. 그래서 “... 오호, 너희들은 기나긴 겨울에, 그 눈바람을 맞구두 싱싱하구나! 저렇게 시푸르구나!” 라고 감탄을 한 다음 상록수 그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었다.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 하지만 임권택의 <상록수>에서 박동혁은 일본의 토지개혁정책에 동조하지 않아 음모에 빠진 채 경찰서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완전히 실성한 채 풀려난다. 그러는 동안 채영신은 소설 그대로 점점 몸이 아파 죽어간다. 마지막으로 채영신이 박동혁을 만나지만 그건 아무 의미 없는 작별이다. 채영신은 죽어가고 박동혁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다. 절반은 심훈을 따라가지만 남은 절반은 심훈을 버리는 결정을 내린다. 채영신과 박동혁의 작별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내가 무언가 소설을 잘못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14개로 나눈 이야기에서 12번째 장(章) ‘천사의 임종’부터 다시 읽었다. 만일 이런 식으로 말해도 괜찮다면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은 영화였다. 물론 그것이 영화의 잘못은 아니다. 소설을 빌려온 영화가 어느 대목부터 원작을 버리는 예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흔하다. 아니, 차라리 이것이 소설과 영화가 맺어온 우정의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낱말이 이미지 안에서 반대로 활동한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만을 따라간다면 둘 사이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이 비애극적인 연인들이 죽음의 위력 앞에 던져졌을 때 심훈 은 거기서 그것을 뛰어넘고 승리하는 계기를 찾으려고 한다. 반대로 임권택 은 무기력하게 그걸 받아들이면서 움츠러들고 마침내는 견디지 못해 부서져 나가기 시작한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고 싶다. 심훈은 슬픔의 충만함에 만족한 다음 그걸 대가로 하여 그 너머에로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임권택은 희생의 셈에 실패한 채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우울한 상태에 젖어들어 거기에 그냥 머문다. 나는 지금 그 둘 사이의 우열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내가 보는 것은 둘 사이의 운명의 서사적 차이가 아니라 그 운명의 시간적 차이이다. 무엇이 반복을 봉쇄하는가. 나는 그 사이에 어두운 바탕이 있다는 기분이 든다. 채영신과 박동혁이 살았던 시대에 이 소설을 쓴 심훈이 운명 안에서 가까스로 희망을 보려던 신비한 합리화로부터 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져서 임권택은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재현하면서 운명의 윤곽이 어떻게 역사를 대상으로 자신을 유지하는지를 쳐다본다. 이때 영화는 일제 식민지 강점 하를 다루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새마을 운동의 시대를 우울하게 비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복하는 운명극의 기분. 공허해진 세계. 그들은 어린 상록수를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을 맹세하듯이 몇 번이고 말하지만 세계는 여기에 응답하지 않는다.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심훈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상록수>를 그렇게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임권택은 새마을 운동시대에 < 상록수 >를 이렇게 찍을 수밖에 없다. 같은 이야기 안의 차이. 차이 안의 차이. 그 차이의 유기적 재현을 한 번 더 만날 때, 그래서 그사이에 놓인 매개의 요구가 반복이라는 복종을 요구할 때 우리는 거절해야 한다. 내가 영화 <상록수>에서 보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의 한 번 더, 라는 반동의 의지이다. 임권택은 심훈의 <상록수> 앞부분을 성큼 건너뛴 다음 70쪽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디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어디를 자를 것인가. 장편소설을 만나면 영화는 책장을 이리저리 넘기기 시작한다. 소설은 정월 대보름이 지나고 삼 개월 뒤 긴 가뭄 끝에 비가 내린 다음 날로 되어있지만 영화는 그저 화창한 초여름 어느 날로 시작한다. (소설) 이윽고 파아란 뺑끼칠을 한 똑딱이가, 선체를 들까불며 들어온다. 갑판 위에서 손수건을 흔드는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가 보인다. 동혁은 손을 높직이 들며 허공을 저었다. 조가만 거루는 선객과 짐을 받아 싣고, 선창으로 들어와 닿았다. 동혁은 반가운 웃음을 얼굴 가득히 담고, 영신의 손을 잡아 뭍으로 끌었다. “이번 비, 참 잘 왔죠?” 한 마디가 첫밗에 하는 영신의 인사였다. “잘 오구말구요. 그래 그 동안 얼마나 고생을 허셨에요?” 하며 동혁은 얼굴빛을 살핀다. 상상하던 것보다는 나아도, 어글어글하던 눈이 전보다 커다래 보이는 것은, 그 복성스럽던 얼굴의 살이, 그만큼 빠진 탓일 듯. 드러나 반가운 김에 상기가 되어 그런지, 혈색은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을 보고, 위선 안심을 했다. (중략) 소설은 채영신과 박동혁이 만나는 데서 시작해서 그 두 사람이 농촌 계몽운동에 뜻을 모으고 연인으로 발전한다. 영화는 그 두 사람이 연인으로 만나서 자신들의 감정을 확인한 다음 (거기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연인으로 머문다. 임권택 이 심훈 의 원작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지만 그러나 소설 안의 균형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상록수>를 다시 읽어나간다. 이때 임권택은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굴곡을 거의 없애버린 다음 마치 제자리를 뱅뱅 도는 것만 같은 방식으로 두 연인을 가둔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박동혁의 고향인 한곡리를 하나의 원으로 하고 채영신의 고향인 청석골을 다른 하나의 원으로 한 다음 두 사람이 번갈아 두 개의 원 사이를 오가는 왕복운동만이 반복적으로 진행될 뿐이다. 각자의 원은 각자의 운동을 하면서 지리적 경계를 두고 채영신과 박동혁을 사이에 둔 교집합이 있긴 하지만 어떤 교환도 일어나지 않는다. 한곡리와 청석골은 다소 대조적이긴 하지만 그 둘 사이의 대비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이 두 개의 원의 운동에 대해서 그저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임권택은 이상할 정도로 채영신과 박동혁의 동선을 따라가지 않았다. 한쪽을 진행하다가 잠시 후에는 다시 다른 한쪽이 진행된다. 그래서 마치 두 개의 원이 이질적으로 보일 정도이다. 물론 끝까지 그 둘을 그렇게 내버려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순간에 그 둘을 수렴시킬 것인가. 임권택은 여기서 갑자기 두 개의 원을 두 개의 다른 차원으로 옮겨놓는다. 수렴에 관한 거의 결정적인 순간이 마지막에 기다리고 있다. 비애의 순간. 임권택 은 희극의 순간에는 언제나 실패하지만 비애의 순간에는 그것이 품고 있는 병든 감상주의의 이면에 숨겨져 있는 역사의 고통스러운 상실을 불러낸다. 비유의 시간. 하지만 무엇에 대해서? 대상을 괴상한 의미의 노예로 삼는 시간. 그때마다 임권택의 주인공들의 몸이 부서지거나 기관의 일부가 훼손되거나 때로 감각의 일부를 상실한다는 것을 떠올려주기 바란다. < 상록수 >는 그중에서도 가장 처참하고 아름다운 순간이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영화는 소설에 전혀 없는 부분을 찍어나가기 시작한다. 면회 채영신은 병색이 짙은 몸을 끌고 비를 맞으면서 멀리 떨어진 경찰서 지하실에 붙잡힌 채 고문을 받고 있는 박동혁을 만나러 간다. 채영신은 마음을 조리며 그를 만나러 지하실 방에 들어선다, 라고 해야겠지만 영화는 그 반대로 찍혔다. “3분 동안만 면회를 허락하겠소. 증거가 없을 뿐 이 자의 죄과를 잘 알고 있소. 순순히 자백을 하면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해주겠다는데도 끝내 자백을 않고 우리 취조관 진을 빼놓고 있소. 약혼자 되시는 분이 잘 타일러서 우리도 이 자로부터 손을 털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소”라고 형사가 채영신에게 말하지만 그 말은 화면 바깥에서 (voice_off) 주인 없는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이때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형사의 언질은 그렇게 장면 위에 내리 누르듯이 놓인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목소리는 어떤 저항도 불가능한 절대적인 권력을 얻게 되고 목소리는 마치 전체의 상황을 요약하는 하나의 지배적인 쇼트(master_shot)처럼 기능한다. 채영신이 고문실에 들어설 때 영화는 채영신이 박동혁을 보는 대신 고문을 받고 지친 박동혁이 고문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지금 막 들어서고 있는 채영신을 발견하는 것으로 이 신scene을 시작한다. 나쁜 시작. 여기서 갑자기 동선이 끊어졌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런 다음 마치 조건반사적인 기계적인 작동처럼 쇼트들의 순서는 채영신을 따라 고문실에 들어선다. 그런데 갑자기 마치 다시 시작하기라도 하듯이 박동혁에게로 옮겨 들어서는 채영신을 바라보는 자리에로 옮겨간다. 이때 가장 이상한 것은 두 사람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기울어진 구도이다. 갑자기 잃어버린 균형. 이제까지 < 상록수 >는 그렇게 진행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장면을 반듯하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정면과 45도를 번갈아 진행시켰으며 두 사람 사이의 어떤 감정적인 동요도 느끼지 못한다는 듯이 평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박동혁이 균형을 잃고 앉아있는 것도 아닌데 갑자기 카메라가 수평을 잃는다. 이 장면은 심리적인 표현주의를 따르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잃어버린 균형이 아니라면 동선을 일시적으로 중단시킬 수 있었을까. 그 방은 매우 단조롭다. 텅 빈 사각의 방. 길게 줄을 늘어뜨린 채 매달린 전구. 가운데 놓인 책상. 가장 간단한 미장센. 고문실에는 더할 게 없다. 거기에 앉아있는 박동혁. 그저 한눈에 보기에도 그동안 심한 고문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모습. 물론 어떻게 말문을 꺼내 들어야 할지 알 수 없는 채영신에게 갑자기 박동혁은 돌아가라고 말한다. “빨리 돌아가요, 돌아가서 청석골 학원의 어린나무들을 돌봐요. 긴긴 눈보라를 맞고도 시들지 않는 싱싱한 상록수가 클 때까지 쓰러져선 안 돼요. 이자들은 내가 죄인이 될 때까지 죄인으로 몰고 가고 있는 거요. 이게 모두 나를 빼앗긴 설움이오” 채영신은 그 말을 멈추게 할 방법을 알지 못한다. 여기서 이상한 장면이 갑자기 나타난다. 쇼트는 말하고 있는 박동혁과 듣고 있는 채영신 둘 사이를 단순하게 등 뒤에서 오간다. (over_the_shoulder_shot) 그러다가 갑자기 박동혁을 바라보는 채영신의 얼굴을 왼쪽 구석으로 몰아넣은 다음 마치 카메라의 오른쪽이 주저앉은 것만 같은 구도의 쇼트가 이 일련의 연쇄 속에 침입한다. 이 쇼트는 박동혁과의 물리적 거리와 둘 사이의 심리적 거리 양쪽 모두로부터 탈구되어 있다. 얼핏 보면 단지 박동혁의 등 뒤에 찍던 채영신의 얼굴을 좀 더 자세하게 보기 위해 다가간 것처럼(close_up) 보이지만 이때 상상선의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만일 그렇게 진행하고 싶었다면 채영신의 얼굴은 오른쪽에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프레임에서 왼쪽으로 온 그 얼굴은 심지어 거의 화면 바깥으로 빠져나갈 것만 같을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다. 차라리 영화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고 요구하듯이 그렇게 가까스로 거기 그렇게 잠시 머물 때 나는 이 쇼트를 침입이라고 불렀다. 새로운 힘. 복종하기를 거절하는 반동적인 힘. 파졸리니라면 훨씬 잘 설명했을 그 힘. 어떻게 반동적인가. 여기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표현의 속성을 지닌 상태가 생겨난다. 우선 첫째, 이 쇼트는 문법적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 순간 채영신의 얼굴은 이 신 안에서 갑자기 하나의 고정점 같은 역할을 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빠져나온 쇼트가 연쇄망 안에서 이미지가 된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지금 쇼트가 아니라 이미지라고 말했다. 쇼트에서 이미지로의 후퇴. 연쇄망 바깥에서 일어나는 작용. 말하자면 이 신 전체의 작동방식에 마치 채영신의 얼굴의 이미지가 침입하는 것처럼 이루어질 때 그건 단지 하나의 쇼트가 아니라 이 신의 얼룩이 된다. 두 번째, 서로 교환하던 두 사람 사이의 연쇄적인 쇼트에서 이 난데없는 쇼트는 채영신을 갑자기 박동혁으로부터 빼내듯이 관계의 바깥으로 데려간다. 주고받던 쇼트가 연속성을 중단하는 순간 박동혁의 계열의 쇼트와 채영신의 계열의 쇼트는 서로 분리된다. 이때 이 분리는 이제까지 진행되어 온 이야기의 계열과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이미지의 계열이라고 불러보고 싶어진다. 처음에는 이 둘 사이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았지만 여기서부터 마치 두 개의 서로 다른 차원이 존재하는 것처럼 서로 평행하게 서로 분리된 두 개의 계열이 공존하기 시작한다. 세 번째, 여기서 갑자기 이루어진 파괴는 그것을 대가로 하여 이야기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영화가 감상하고 있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먼저 감정과 감상의 차이를 충분히 음미해주기 바란다. 박동혁의 진지한 표정, 웅변적인 대사에 어울릴법한 채영신의 경청하는 쇼트 대신 그 말을 조금도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한 카메라의 태도는 마치 그 둘 사이에 다른 무언가가 개입하고 있는 것만 같은 틈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갑자기 그 둘 사이가 묶이지 않는 것을 한데 묶어놓은 것 같은 어긋남을 보여준다. 이때 그 틈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두 개의 쇼트가 단지 문법적으로 어긋났을 뿐만 아니라 그 둘 사이에 어떤 시간적인 진공상태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둘이 동시적으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박동혁을 채영신이 사후적으로 보고 있는 것만 같은 착시가 벌어진다. 암전의 반복 하지만 이 순간이 길어지면 영화는 부서질 것이다. 그 둘을 다시 강제적으로 하나로 묶기 위해서 하나의 통일된 행위가 필요해진다. 지켜보던 일본 형사는 그런 박동혁을 채영신의 눈앞에서 무자비하게 때라고 걷어차기 시작한다. 임권택 은 이 장면을 단순하게 찍었다. 하지만 이 단순한 장면 단순한 공간에서 형사가 박동혁을 때리기 시작할 때 매달려있는 전구를 건드리고 그 전구가 좌우로 진자운동을 시작하자 빛과 그림자가 번갈아 나타나고 사라지면서 갑자기 이 공간 전체가 바로크적인 미장센으로 바뀐다. 일그러진 공간. 어둠 속의 사라짐과 나타남. 이때 핵심은 이 장면이 채영신의 눈앞에서 연출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 형사가 채영신에게 면회를 허락한 것은 어떤 호의를 베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박동혁과 함께 일본의 조선반도 식민지 정책에 반대하면서 계몽운동을 하는 채영신에게 고문을 전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채영신 앞에서 박동혁은 나타나고 사라진다. 연속된 행위 안에서 이미지의 비연속성. 그녀 앞에서 박동혁은 마치 포르-다 게임을 하는 것처럼 보여 진다. 면회 후 새로운 계열은 새로운 장면을 출현시킨다. 박동혁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채영신을 영화가 멀리서 물끄러미 쳐다보는 장면은 너무 이상해서 어떤 감정을 느끼기는커녕 그 장면 자체가 마치 그 무언가에 대한 표현처럼 보인다. 단순하게 이 장면을 상징의 예술적 표현이라거나 알레고리의 기술적 압축이라고 부르기에 망설여지는 그 어떤 것이 거의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것만 같은 이 신 안에서 작동하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이 장면이 무언가를 환기시키고 그 안에 이미 운명을 예고하는 것만 같은 인상을 단번에 붙잡아낸다. 채영신은 언덕에서 걸어 내려오고 그 오른쪽 곁에 나무 몇 그루가 무심하게 서 있을 뿐이다. 카메라는 휘청거리면서 그 언덕길을 걸어 내려오는 채영신을 돌볼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마치 그녀가 쓰러져도 할 수 없다는 듯한 거리. 멈추어선 카메라. 그 언덕길을 채영신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저 보지 않고도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길. 이때 구도는 화면 대부분을 하늘이 차지하고 있다. 구름 낀 사이로 조금 드러난 파란 하늘. 그렇게 언덕길을 내려오던 채영신은 그만 지쳐 쓰러지고 만다. 아무도 없는 들판과도 같은 언덕. 쓰러진 채영신이 고개를 들어 보는 것은 구름 낀 하늘이다.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박동혁의 목소리가 그녀를 일으켜 세운다. 마치 (구슬픈) 합창처럼 그 목소리 뒤에서 들려오는 (박동혁이 작곡한) ‘애향가(愛鄕歌)’. 채영신의 희미한 미소. 하지만 이 노래가 그녀에게 새로운 힘을 주기는커녕 생명을 앗아가는 듯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가까이 다가온 죽음. 몰락해가는 기운 속에서 잠시 동안 바라보는 구원의 빛은 죽음의 표정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말하자면 어떤 약속. 이제 당신은 할 만큼 했어요. 그러니 부디 짐을 내려놓아 주세요. 카메라가 채영신을 도와주는 대신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저 멀리서 지켜볼 때 내가 느껴보는 것은 이 소설을 이미 읽은 자의 측은지심이다. 여기서 결정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이 장면을 그렇게 쇠락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때 여기서 보는 것은 어린 상록수들에 대한 희망이 아니라 쇠락해가는 역사 안에서의 수난의 시간이다. 채영신은 청석골에 돌아와 박동혁의 말을 전하고 그냥 쓰러진다. 그날 밤 박동혁은 고문으로 인해 완전히 실성한 채로 풀려난다. 그런 다음 영화는 박동혁이 실성해서 머물고 있는 한곡리와 채영신이 몸져누워있는 청석골을 단순하게 오간다. 채영신은 의사로부터 “알릴 데가 있으면 기별하시오”라는 마지막 통보를 받는다. 하지만 박동혁은 여전히 고문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한다. 채영신은 마지막 가는 길에 박동혁을 보고 싶어 하고 그래서 먼 길 제자인 원재 청년이 달려가 청석골 마을 사람 한 명과 함께 박동혁을 데려온다. 소설은 채영신이 도망치듯이 일본에로 떠났다가 심신이 더 쇠약해져서 청석골로 돌아와 다시 농촌계몽사업을 하지만 각기에 맹장염이 도져 미처 아직 경찰서에서 풀려나지 못한 박동혁을 보지 못하고 숨지는 것으로 다한다. 그런 다음 오일장을 치르는 가운데 사흘째에야 박동혁은 옥에서 풀려난다. 그가 소식을 듣고 청석골로 달려와 마주치는 것은 학교 ‘교단 위에 검정 보를 덮고 가로누운 영구’이다. 소설과 반대로 영화에서 채영신과 박동혁은 만난다. 하지만 채영신은 죽어가고 박동혁은 실성한 채로 만난다. 나는 같은 말을 몇 번이고 반복할 것이다. 여기에는 원작과의 대결관계나 반대로 가까스로 해피엔딩을 만들겠다는 의도 따위는 없다. 그래서 반대, 라는 표현 대신 소설과 상관없이, 라고 설명하고 싶다. 상관없다는 말. 임권택 은 원작에서 무얼 꺼내 들어서 이야기의 어떤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대신 거기까지 따라온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나는 이미 경찰서 고문실에서부터 이 영화가 두 개의 계열로 진행된다는 말을 했다. 쇼트의 계열과 이미지의 계열은 서로 만날 수 있을까. 하나가 만나고 싶어 할 때 다른 하나가 그걸 알지 못한다. 하나가 보고 싶어 할 때 다른 하나가 그걸 알지 못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잡아당길 때 다른 하나가 그걸 알지 못한다. 여기서 채영신과 박동혁의 만남이 그 두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채영신과 채영신이 만나보고 싶어 하는 박동혁과 자신이 박동혁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고문에 의하여) 잃어버린 박동혁 이 세 사람이 함께 만나는 자리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너무 쇠약해져서 이제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채영신은 자기 앞에 도착한 사람이 박동혁이라는 건 알아보지만 지금 그가 실성해버렸다는 건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자기 앞에 와 있는 이 사람이 눈앞에 몸만 와 있을 뿐이지 텅 빈 대상이라는 것을 모른다. 마치 인형과도 같은 박동혁은 자발적인 의지로 아무 것도 못하고, 아무런 판단도 내리지 못하고, 아무런 태도도 보여주지 못한다. 임권택은 이 장면을 단순하게 찍었다. 박동혁은 마을 사람의 손에 이끌려 방에 들어와 앉는다. 채영신은 방에 들어서는 박동혁을 바라본다. 하지만 박동혁은 실성한 채 초점 없이 허공을 응시할 뿐이다. 그래서 이 신에는 박동혁의 시선 쇼트(point_of_view_shot)가 없다. 반면 박동혁이 실성한 것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깊은 병색인 채영신의 죽어가는 시선 안에서 세상은 점점 희미해져 갈 것이다. 하지만 임권택은 채영신의 시선에 별다른 기술적 조작을 가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이 두 시선의 교환은 단지 기계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박동혁과 채영신 두 사람 사이는 일종의 부등가 교환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중이다. 박동혁은 이 방에 들어서서 이 자리에 앉았지만 채영신을 그저 알아보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박동혁의 쇼트는 채영신의 쇼트를 마주 보지 않는다. 아니,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다. 채영신은 박동혁을 알아보지만 쇠약해진 그녀의 시선이 고문 후유증으로 실성해버린 박동혁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저 간절하게 박동혁의 쇼트에 말을 걸고, 또 걸고, 또 걸 뿐이다. 대답해주세요, 제발 대답해주세요. 그러므로 이 둘 사이는 한쪽의 오해를 기반으로 한 관계만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박동혁의 계열은 완전히 중단된다. 혹은 쇼트의 진행이 더 이상 안 된다. 반대로 채영신의 계열은 완전히 고립된 것이 되어버린다. 그녀가 말을 걸지만 박동혁은 그 말을 한마디도 듣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녀가 하는 말은 사실상 그녀 자신에게 돌아오는 말이다. 이때 쇼트의 성질로 말하면 채영신은 일종의 재귀 대명사의 반복처럼 보인다. 그래서 신 안에서 박동혁과 채영신이 함께 만나지만 그 둘의 쇼트는 각자의 계열을 따라가기만 할 뿐이다. 임권택은 그 사실을 잘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저 단순하게 반복적으로 둘 사이의 쇼트를 오고 간 다음(shot_reverse_shot) 채영신이 대사를 시작하자 그저 그녀를 바라본다. 아니, 그저 그녀에게 머문다. 이때 수수께끼 같은 시선은 채영신이 박동혁의 손을 붙잡고 긴 대사를 시작할 때 그녀를 박동혁이 바라보는 대신 박동혁의 등 뒤에서 바라본다는(over_the_shoulder-shot) 것이다. 누워있는 그녀를 그렇게 찍으면 그녀 쪽에서는 다시 마주 볼 방법이 없다. 그런데도 그렇게 했다. 두 개의 쇼트는 그렇게 마주 볼 수 없는 불가능의 자리에 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녀가 애처롭게 대사를 낭독하기 시작했을 때 무언가 이 쇼트는 그렇게 등에 걸린 채 느리게 다가가는 렌즈의 운동 때문에(zoom_in) 무언가 머뭇거리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것은 영화의 대답이 아니다. 채영신이 마지막 숨을 몰아쉬면서 “아이들을 부탁해요”라고 한 다음 “약속해주세요”라고 반복한다. 하지만 박동혁의 대꾸는(reverse_shot) 아무 말 없이 허공을 응시하는 무표정한 침묵뿐이다. 알지 못하는 채영신은 다시 한 번 “약속해주세요”라고 거의 꺼져가는 목소리로 힘겹게 요구한다. 이때 갑자기 다시 한 번 박동혁의 얼굴로 돌아가는 대신 박동혁의 뒤로 가서 앉아있는 그의 등 전체를 보여준다. 그리고 마치 쇼트의 구도 안에 침입하기라도 하듯이 (옆에 앉아있던 박동혁의 마을 친구의) 왼손이 그 등을 따라서 조심스럽게, 행여 들킬세라. 느리게 박동혁의 뒤통수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손은 지금 무엇과 결합하려는 것인가. 누구라도 이 손이 지금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예기치 않은 운동. 이 갑작스러운 손의 운동은 누구라도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답고 슬프다. 그렇게밖에 달리 말할 수 없다. 그런 다음 이 손이 박동혁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이때 이 긍정은 단지 채영신을 만족시키려는 목표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긍정의 힘은 이제까지 두 개의 계열로 나뉘어 진행되어 온 이미지의 계열의 부름에 쇼트의 계열이 응답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중이다. 임권택이 여기서 힘들 사이의 관계를 정확하게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의 신 안에서 서로 다른 차원을 공존시키면서 파토스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성공적인 한순간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 상록수 >를 언제나 < 족보 >와 함께 보아야 한다. 두 편의 영화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했거나, 혹은 원작소설을 각색했거나, 또는 같은 해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아무 관계가 없다. 두 영화가 같은 여배우 한혜숙 을 주연으로 해서 만들었다거나 두 영화가 농촌을 무대로 진행된다는 사실도 아무 상관이 없다. 이때 임권택 은 두 편의 영화에서 조심스럽게 쇼트의 성질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했다. 나를 감동시킨 두 가지 예. 박동혁의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 손. (<족보>에서) 어느 초여름 날 무심하게도 포풀라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길을 따라 걸어오는 설진영 노인을 바라보는 쇼트. 나는 약간 망설이면서 이렇게 설명하고 싶어진다. 이제까지 임권택은 쇼트가 결합하여 신이 어떻게 하나의 사건을 만드는지를 물었다. 그 사이의 조화. 그들 사이의 화음. 하지만 하나의 차원. 여기서부터 하나의 신이 두 개의 차원을 얻기 시작했다. 이때 쇼트는 종종 신 안에 침입해 들어오는 불순물을 허락하거나 혹은 쇼트 자체가 갑자기 세상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므로 신 안에서 쇼트는 어떤 원근법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엔 쇼트가 바라보는 영화와 영화가 바라보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이 생겨났다. 임권택은 그 간극을 그냥 내버려둔 채 자기의 방법을 밀고 나아가기 시작했다. 벤야민은 내게 간명하게 충고한다. 인식에 있어서 방법이란 영유대상을 획득하는 길이지만, 진리에 있어서 방법이란 제시 자신의 제시이다. 방법의 대가들. 어쩌면 영호욜뇩예疫萱?역사이다. 좀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방법이 결과이다. 간단한 예. 오즈의 방법. < 오차즈케의 맛 >. 로셀리니의 방법. < 유럽 51 >. 혹스의 방법. < 몽키 비즈니스 >. 1952년의 세 개의 방법. 이때 지성은 방법을 통해서만 영화를 구성하는 표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며, 표현이라는 쇼트가 그때 방법의 속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법을 정식화시키기 위해서 먼저 방법을 작동시키는 장면을 만나야 한다. 나는 임권택의 방법으로부터 임권택이라는 방법에로 옮겨가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것이 목표이다. (계속) 추신_ 인용한 대목은 애플 북스에서 ‘한국문학을 권하다’ 전집 중 다섯 번째로 2014년 6월 16일에 나온 판본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용된 쪽수는 모두 이 판본에 따른다. 또한 인용 판본에 따라 1936년에 쓰인 일부 당시 문장을 2014년에 독자를 고려하여 고친 대목도 역시 그에 따랐다. 그러나 문단 나누기는 임의로 이어 붙였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명기하지 않았다. 1978년 105분 컬러 1.66 감독 임권택 화천공사 각본 김강윤 촬영 이석기 조명 정덕규 편집 김희수 음악 정민섭 한혜숙 채영신 김희라 박동혁 이일웅 김형자
영화를 보러 쏘다니는 것은 가끔 시대착오적으로 여겨진다. 나는 이 말을 단지 새로운 방법으로 방에서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영화관에 가는 것을 비웃기 위해서 꺼내 든 것이 아니다. 영화 그 자체가 아니라 영화를 보는 경험이라는 것을 중심에 가져다 놓는 것을 허락한다면 영화들은 서로 구름처럼 뒤섞인다, 고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가 저 영화와 겹치고, 저 이미지가 이 영화 안으로 들어온다. 쇼트들 사이의 칸막이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사이를 어떤 경계도 없이 자유자재로 비행할 때 거기엔 어떤 법칙도 없고 중심도 없다. 그저 감정의 바람이 있을 뿐이며, 이따금 하나로 뭉친 구름들이 만들어낸 비가 내리거나, 혹은 반짝이는 감각의 빛이 섬광처럼 스쳐 갈 것이다. 이 구름과 저 구름을 서로 구별할 수 있을까. 영화들 사이를 오가는 것은 나를 흘러가는 구름처럼 자유롭게 만든다. 그렇다. 영화를 보러 다니는 것은 멈추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다. 이때 나는 이 말을 공간적인 자리에 제한하고 싶지 않다. 그건 나만 그런 것이 아닌 모양이다. 자크 오몽은 약간 웅변조로, 게다가 어떤 예술분야에서 (전문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특수한 문화적 소양도 없는) 대중 관객이 과거와 최근 작품들을 동등하게 찾아보는 일이 일어나고 있단 말인가, 라고 반문한 다음 나는 같은 날 저녁에 존 포드와 힛치콕, 오우삼이나 키아로스타미의 영화를 다 함께 볼 수 있으며, 시간 여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서로 다른 스타일 사이를 여행했다고 느낄 것임을 말하는 또 다른 방식, 이라고 설명했다. (<영화와 모더니티>) 영화 관람의 새로운 일상생활을 영원한 동시대성이라는 정의 곁에 놓아둘 때 영화는 아무것도 모순되어 보이지 않는다. 나는 당신에게 여기서 임권택 의 영화(들)을 읽는 시간이 바로 지금, 2013년 늦봄에서 초여름에 이르는 계절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다. 지금 내 곁을 흘러가는 구름. 나는 막 난니 모레티의 <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를 본 다음 < 나비 품에서 울었다 >를 썼다. 난니 모레티는 처음에 다소 우스꽝스럽게 시작했지만 교황청을 빠져나온 멜빌을 따라가면서 마법에 가까운 운율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한편으론 바티칸에 갇혀서 교황 발표가 날 때까지 기다리다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추기경들이 편을 나눠 배구를 하는 장면들은 이상할 정도로 시적인 감흥이 감돈다. 왜 아무도 이 기적적인 순간을 함께 감탄하지 않는 것일까. 타비아니 형제의 < 시저는 죽어야 한다 >는 생각지 못했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지만 영화를 보면 정확하게 거기서 멈춘다. 켄 로치의 < 엔젤스 셰어: 천사를 위한 위스키 >는 시작하고 15분은 여전히 훌륭하다. 그러나 이야기가 시작되면 여전히 지루하리만큼 계몽적이다. 두 개의 여전한 사이의 불균형한 면적. 그리고 지금 내 눈앞을 지나가고 있는 구름들. 스티브 맥퀸의 < 헝거 >는 무시무시했다. 그러나 < 셰임 >은 안전하고 세련되었으며 그만큼 상투적이다. 필요 이상으로 안정적인 균형상태 안의 권태로운 음악들로 이루어진 장식. 런던의 아일랜드인과 뉴욕의 아일랜드인의 차이? 2013년 5월 15일 오후 7시 칸에 자리한 뤼미에르 극장에서 상영된 < 위대한 개츠비 >는 칸 영화제의 첫 번째 3D 개막작이다. 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분한 만찬. 끝. 이를테면 작년 개막작인 우디 앨런의 < 미드나잇 인 파리 >와 비교해보라. 물론 지금 (그다음 영화인) < 로마 위드 러브 >가 상영 중이다. 누군가는 두 편의 우디 앨런의 영화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한다. 나는 둘 사이의 차이는 그저 유럽지도 전체를 펼쳐놓은 다음 파리와 로마를 힐끗 쳐다보면서 배치의 공존을 모색하는 지리학적인 거리정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할 수만 있다면 뉴욕과 베니스와 파리를 연결한 다음(< 에브리원 세즈 아이 러브 유 >) 바르셀로나(< 내 남자의 아내도 좋아 >), 런던(< 스쿠프 >, < 매치 포인트 >, < 환상의 그대 >) 를 펼쳐놓고 우디 앨런의 유럽 지도를 만들어보고 싶다. 나는 의도적으로 목록을 펼쳐 들지 않고 그저 떠오르는 대로 열거하는 중이다. 아마 여기에 빠진 영화제목이 있을 것이다. 경계선 없는 도시들. 그 사이를 마치 거미가 쳐 놓은 함정처럼 이어지는 선들. 사랑의 선. 질투의 선. 의심의 선. 그때 그 선을 건드리는 것은 우연과 운명이다. 서로 아무 관계도 없는 각자의 존재들 사이의 비평형적 균형. 저 멀리 흘러가는 구름. 나는 그 시간에 < 안개마을 >을 다시 보고 있었다. 여전히 반짝거리는 정윤희. 때로 어떤 배우는 전혀 연기하지 않는데도 그 존재만으로 아름다울 때가 있다. 근처에서 떠도는 구름. 나는 두 편의 영화를 어떻게 해서든 여기 잠시 머물게 하고 싶다. 레오 카락스의 < 홀리 모터스 >는 종종 섬광처럼 빛나며, 때로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복화술사의 테크닉을 이용해서 영화 그 자체의 가면을 뒤집어쓰고 우리에게 내기를 요구한다. 어떤 내기? 나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술래잡기. 그때 어디선가 영화의 죽음이 어른거린다. 레오 카락스는 영화를 구하기 위해 밤새 유령을 잡기 위해서 온갖 곳을 돌아다닌다. 수평과 곡선. 상승과 추락. 당신이 영화를 사랑한다면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임무이다. 구름들 사이의 대기현상. 하늘의 구름들이 일시에 대지로 내려올 때 거기서 새로운 질서를 보게 될 것이다. 리차드 링클래이터의 < 비포 미드나잇 >은 잘 알려진 것처럼 < 비포 선라이즈 >, < 비포 선셋 >에 이어지는 이야기이다. 물론 리차드 링클래이터가 에릭 로메처럼 사랑의 도덕적 서스펜스를 전개하지는 못한다. 게다가 점심을 먹으면서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산만하고 상투적으로 찍혔다. 자신이 없으면 식탁에 앉히면 안 된다. 하지만 리차드 링클래이터는 일단 걷기 시작하면 설명하기 힘든 매직의 순간을 만든다. 산책의 영화. 걸어가는 영화. 선물 받은 호텔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제시와 셀린느가 걸어가면서 대화하는 기나긴 매직 아워는 마치 저물어가는 햇빛을 쫓아가는 것처럼, 때로 즉흥적인 순간에 의지하면서, 종종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우아하게 연출되었다. 하루의 날씨. 대기의 이동. 제프 니콜스의 < 테이크 쉘터 >는 코엔 형제의 < 시리어스 맨 >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대답처럼 시작한다. 하지만 그런 다음 곧 자기의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야기? 그렇다. 이 영화는 이미 이야기의 영화가 끝났다고 생각한 바로 그 자리에서 아직 구름이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구름의 그림자 아래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때 나는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보고 또 보고 있었다. 영화들 사이에서 마치 구름들처럼 이것 때문에 저것이 안 보이는 경우란 없다. 마치 두 개의 구름이 서로 겹칠 때 번개가 일어나는 것처럼 내가 그 글을 쓸 때 그 영화들은 새로운 영감을 안겨주었다. 그럼 다음 < 울지 않으리 >를 보았다. 상황의 설명. 임권택 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처음부터 만들었다. (지금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은) 두 번째 영화 < 전쟁과 노인 >(1962년) 이후에도 < 전쟁과 여교사 >(1966년), 그리고 < 증언 >(1973년)을 연출했다. 여기에 무장공비나 간첩과 관련된 영화를 포함시키면 셈이 더 복잡해진다. <증언>과 <울지 않으리>와 1960년대 전쟁영화의 차이점은 국가 행정기관이었던 영화진흥공사의 제작으로 만들어지면서 국방부의 실제적인 군부대 지원을 받았고, 그런 까닭에 이 영화들은 당시 정부의 반공정책에 따른 홍보영화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물론 이런 영화를 만든 것은 임권택만이 아니다. 이만희는 국방부 국군영화 제작소에서 < 고보이강의 다리 >(1970년)을 만든 다음 영화진흥공사 제작으로 < 들국화는 피었는데 >(1974년)를 찍었다. 이 목록은 한참 더 이어질 수 있다. 시나리오는 사전 검열을 거쳐 감독의 손에 도착했으며, 그런 다음 완성된 영화는 다시 한 번 검열을 거쳤고, 이렇게 개봉된 영화들은 반공교육의 일환으로 학생 단체관람을 거친 후에 극장에서 사라졌다. 이 시기의 영화들은 대부분 영화사 안에서 조롱의 대상이 되었으며, 대부분의 진지한 연구들도 영화들을 정책 홍보의 담론 안에서 제한적으로 설명하였다. 나는 의도적으로 어제 본 영화를 맨 앞에 붙여놓았다. 물론 이 영화가 제작된 배경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 과정을 다른 영화들과 함께 간단하게 당신에게 환기시켰다. 그런 다음 즉시 여기서 제작 과정을 치워버리는 것은 매우 위험한 괄호 치기이다. 대신 나는 여기서 질문의 방식을 바꿔볼 생각이다. 우선 간단한 줄거리. 재남은 아직 국민학교에 다니는 어린 소년이다. 병원원장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북한군이 밀려오자 서울에 유학 중인 형과 누나가 내려온다. 할아버지는 집을 지키기 위해서 남고, 식구들은 피난을 떠난다. 그러나 피난길에 아버지는 북한군의 총에 맞아 숨지고, 어머니는 폭격에 숨을 거둔다. 폭격에 뿔뿔이 흩어진 형과 누나와 헤어진 재남은 오던 길을 되돌아서 고향으로 간다. 그러나 고향은 이미 북한군 인공치하가 되었고, 할아버지는 반동 지주로 몰려 강제부역을 하는 중이다. 재남은 동네 아이들과 힘을 합쳐서 마을을 점령한 북한군을 괴롭히고, 여기에 북한군에서 탈영한 동네 아저씨들이 돕는다. 그 사이 서울이 수복되고 북한군은 철수를 결정한다. 떠나기 전에 마을 사람들을 몰살하려던 음모를 알게 되고, 북한군과 마을 주민들은 밤새 총격전을 벌인다. 아침이 밝아오자 북한군은 물러가고 군인이 된 형과 간호병이 된 누나가 돌아와 재회한다. 자, 무슨 이야기인지도 알겠고 거기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도 알겠다. 하지만 그것이 이 영화의 효과 전부라고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을까. < 울지 않으리 >를 건드릴 때 정책 담론의 효과를 설명하려는 방법들은 대부분 영화가 자기를 둘러싼 세계의 제도와 정책(사이에서 발생하는 이데올로기 효과)에 대해서 이미지들이 어떻게 조합되고 그런 다음 증언하는가를 따라간다. 이때 사실상 그 설명들은 영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 다음 이후를 겹쳐놓고 동어 반복하는 것이다. 나는 반대로, 하지만 그 안에서, 거기, 바로 거기, 그 영화 안에 무엇이 있느냐고 물어보고 싶다. 무엇이 그 안에서 홀로 말하고 있는가. 틈새들. 하지만 그 균열은 작지만 좁고 깊게 그 안으로 파고 내려가기 시작할 것이다. 임권택 은 기계적으로, 상투적으로, 자동적으로 시나리오의 서사를 따라가다가, 가끔, 아주 가끔, 갑자기 어느 장면에서, 경험의 존재론이라고 부를만한 어떤 순간의 쇼트를 지금 진행되는 영화의 규칙 바깥에서라도 온 것처럼, 지금 보고 있는 영화의 진행에 변형을 가해서라도, 그것을 디테일 안의 표현이라는 방법으로 다시 그려 넣기 시작한다. 줄거리 바깥에서,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단지 디테일이라는 표면 위에서 활동하는 표현의 쇼트들. 그게 너무 이상해서 영화의 다른 전체와 아무 상관도 없는 증인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때 이야기는 희미하게 지워지고 마치 그 위에 덧칠을 하는 것처럼 다시 표현되기 시작한다. 지금 영화를 둘러싼 제도의 증언과 그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이야기 속의 증인. 그때 경험의 표현. 좀 더 정확하게 그 시간을 경험한 존재의 증명을 어쩔 수 없이 더하는 표현. 이 쇼트들은 시나리오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이야기에서 온 것이 아니다. 인물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건 전쟁을 경험한 사람의 몸에서 온 체험의 디테일이다. 내 질문은 간단하다. <울지 않으리>에 국가 정책과 반공 효과는 어떻게 배치되었고, 어디에서 작동을 시작하며, 그 안에서 어디로 연결되는지를 물어보는 것은 지배에 대한 전략적인 비평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헤게모니를 둘러싼 영화 안의 (지배) 질서에 대한 거절과 저항. 이때 나는 문득 돌아본 다음 질문하고 싶어진다. 그런데 참, 임권택은 어디에 있습니까. 불확실성 안에서 진행되는 관계. 이야기 안의 경험이라는 문제. 그리고 그들 사이의 표현. 나는 분석하는 대신 묘사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임권택이라는 인칭, 그것을 통해서만 설명되는 장면을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그 이야기를 다루면 그 배경 안에서 피할 수 없게 되는 시간을 바라보아야 하는 순간의 시선. 그때 그 시선으로 이야기의 틈새 사이를 지나가야 할 때, 다소 고개 숙인 시선 아래서 차라리 더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쇼트와 마주칠 때, 바로 그 시간의 쇼트들에서 나는 이 영화에서 부정할 수 없는 임권택의 흔적을 보게 된다. 말 없는 보충. 남겨진 흔적. 무엇이 거기서 사라졌을까. 그런 다음 무엇이 남겨진 것일까. 산만하게 흩어진 자국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선. 나는 그 선을 따라 그려나가면 거기서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그림? 나는 매번 새로운 방법을 생각할 것이다. 내게 다소 유머를 허락한다면 지금은 마티스를 떠올리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1904년 앙리 마티스가 그의 그림 <사치, 고요, 쾌락>을 그렸을 때 한 말. “나는 지금 내 감각을 조정하는 중이다” Henri Matisse, < Luxe, calme et volupte > < 울지 않으리 >를 다시 보면서 나는 두 장면에서 멈추었다. 비슷한 장면. 이 말의 방점, 비슷한, 이라는 반복의 바깥, 혹은 차이의 디테일. 임권택 이 의도적으로 둘로 나눈 것은 아니지만 같은 씬이 두 번 반복된다. 첫 번째 씬은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두 번째 쇼트부터 시작되는 첫 번째 대목이고, 그런 다음 (정확하게는 아니지만 거의) 절반에 이르렀을 때 그 씬의 쇼트들이 다시 반복된다. 이때 이 둘은 서로 동등하지도 않고 짝이 맞지도 않는다. 그 둘이 반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들의 이미 본 장면들에 대한 경험의 기억에만 의존하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 비대칭 안의 대비적인 구조는 <울지 않으리>에서 전쟁에 의한 순환의 중단이라는 재난 속으로 우리를 끌어당기고 있다. 삶의 탈선. 이때 차이는 역사라는 얼룩에 의한 어두운 바탕을 배경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차이를 운반하고 있는가. 그때 무엇이 반복되고 있는가. 그 사이를 연결하면서 머물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두 개의 씬 사이에서 수없이 참혹한 전쟁 장면들을 이미 보았다. 임권택은 그런 다음 전쟁의 효과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전쟁의 효과? 그렇다. 이 무시무시한 말. 영화는 전쟁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당신은 맨 먼저 전쟁의 지각을 떠올릴 것이다. 임권택은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의 경험에 대해서 느껴보고 있는 중이다. 무엇이 와해되고 어떻게 폐기되고 그런 다음 지워져버렸는가. 영화가 느껴보는 비극. 나는 재남이라고 쓰지 않았다. 첫 번째 질문. 이때 쇼트는 왜 어제를 반복하지 못하는가. 대답. (역사 안의) 전쟁은 지금 영화를 부수고 있는 중이다. 두 번째 질문. 이때 쇼트는 어떻게 반복하는 일을 멈추는가. 우리는 반대로 질문해야 한다. 무엇이 반복을 봉쇄하는가. S#1 S#2 S#3 S#4 S#5 S#6 S#7 S#8 S#9 S#10 S#11 S#12 S#13 S#14 첫 장면. 초여름, 조용하고 화창한 대낮. 느리게 수평으로 이동하는 화면(horizontal_pan)은 마치 병풍처럼 보일 정도로 과도하게 아름답다. 이 말의 방점. 과도하게. 이 영화 전체의 얼룩. 금방이라도 지나쳐버릴 것만 같은 평온함. 이런 감흥을 이 영화에서 두 번 다시 맛보지 못할 것이다. 오늘은 막 1950년 6월 25일이 지난 다음 월요일일 것이다. 혹은 아무리 늦어도 화요일일 것이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북한군은 쳐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 동네 사람들은 금방 그들은 물러갈 것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오늘도 어제 같은 하루를 시작한다. 아버지는 병원에 출근하고, 막내 재남은 학교에 가야 한다. 사람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는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쇼트. 토끼장 안에 토끼들( S# 1) 그 토끼들에게 먹이를 주는 재남, “튼실한 놈으로 열 마리만 낳으라구, 알았지” 라고 말하면서 일어서는데(hand_held_tilt_up) 어머니가 멀리서(LS) 학교 가라고 이른다.( S# 2) 재남 집의 행랑채에서 사는 성식이가 어머니에게 인사하고(pan_right) 문 저편에 보이는 재남에게(LS) “재남아, 나 먼저 학교 갈께”라고 하자 재남이 “알았어”라고 대답한다.( S# 3) 마루가 보이는 전경, 아버지와 재남은 각자 집을 나설 채비를 한다.( S# 4) 아버지 정원을 가로 질러( S# 5) 옆 정원을 돌보는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하고 재남 따라와서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서려는데 저 멀리서(LS) 어머니가 따라 나온다( S# 6) 집 대문 앞에서 자전거를 탄 아버지와 재남에게 쫓아온 어머니가 도시락을 건네준다. ( S# 7)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의 뒷모습.( S# 8) 어머니, 그걸 바라보다가 (BS) 손을 흔든다.( S# 9)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 읍내 큰 길에 ‘영광 오토바이’가 보이고 다리를 저는 아저씨가 지나가는 아버지에게 배앓이 약 처방을 해준 것에 감사하다고 인사를 한다. ( S# 10)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버지와 재남, 은화상회, 中央精肉店, 德元商會가 (pan_right) 차례로 보이고 ( S# 11) 慈愛病院 입구에서 아버지가 자전거를 세우자 재남은 학교로 간다.( S# 12) 멀리서 대포소리가 들리자 아버지 불안한 표정으로(BS) 돌아본다. ( S# 13) 학교 앞에서 친구들을 만난 재남은 함께 등교하면서 정문까지 걸어간다. ( S# 14) 여기서 평화는 끝난다. 나는 다소 장황하게 두 번째 장면까지의 광경을 설명할 것이다. 당신은 줄거리를 따라오지 말고 이것이 광경의 묘사라는 걸 떠올려야 한다. 사방에서 감도는 피비린내. 그런 다음 우리는 이 영화가 전쟁을 경험한 세대가 찍은 영화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디테일이라는 묘사의 미시적 재현들. < 울지 않으리 >에는 자꾸만 이야기는 아무래도 상관없으니 광경의 디테일 속에 들어가 멈칫거리면서 그 안에 펼쳐지고 있는 세상이 진정 그러하다, 는 순간과 만나는 사건들이 나타난다. 경험의 밀도. 기억의 부피. 영화에서 디테일이라는 난처한 개념. 어떻게 이미지의 디테일들은 서사의 흐름을 중단시켜가면서까지 대상의 실감을 자아내는가.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아무리 동화 같은 설정이 벌어져도 거기에 달라붙는 이상할 정도로 사실적인 재현들의 무게. 임권택 과 어린 재민이. 둘 사이에서 공유하는 시간. 학교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담임선생님은 불길한 표정으로 아침 조회를 시작한다. 그리고 미처 선생님의 말이 끝기도 전에 가까이서 들려온 포탄소리가 교실 맨 뒤에 자리 잡은 아이들의 미화게시판에 걸려있는 그림을 뒤흔들어 한쪽 끝이 떨어져 나가게 만든다. 전쟁의 신호. 그런 다음 이야기는 무자비하게 진행된다. 할아버지는 집에 남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서울에서 막 내려온 형과 누나와 함께 재남을 데리고 피난을 떠난다. 마치 끊어지지 않는 줄처럼 이어진 수많은 난민들. 길에서 죽은 어머니와 울고 있는 가엾은 어린아이. 기력을 잃은 채 길에 주저앉은 할머니와 어린 손녀. 거기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그날 밤 아버지는 길을 막아선 공산군으로부터 중상을 입은 중대장을 치료해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총살당한다. 갑작스러운 폭격. 마치 세상이 화가 난 듯한 불바다. 어머니는 중상을 입고도 딸을 구하기 위해 후퇴하는 국군 트럭에 그녀만을 실어 보내고 그만 숨을 거둔다. 형은 전쟁에 휩쓸려 피난민을 따라 가족과 헤어진다. 순식간에 모두가 헤어져 버린 가족. 이제 혼자 남은 재남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거두어 착한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묘를 만들고 우연히 죽은 국군의 시신에서 수류탄이 잔뜩 담긴 가방을 손에 쥔 다음 수차례의 고비를 넘긴 끝에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온다. 거기까지 걸어갔으니 아마도 재남은 걸어서 돌아올 수 있었을 것이다. 떠날 때는 온 가족이었지만 돌아올 때는 재남 혼자뿐이다. 게다가 재남은 이 영화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시신을 모두 본 유일한 증인이다. 재남은 이미 고향을 떠날 때의 그 소년이 아니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죽음을 보았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았고, 피 흘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았고, 손에 피를 묻혀보았고, 그런 다음 수류탄을 던져서 사람을 죽였다. S#1 S#2 S#3 S#4 S#5 S#6 S#7 S#8 S#9 S#10 S#11 S#12 S#13 S#14 S#15 S#16 S#17 두 번째 광경은 재남이 다시 돌아오게 된 자기 동네에 들어서는 장면이다. 이때 이 둘 사이에 개입한 시간의 부피는 한국 근대사를 둘로 쪼개는 단절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첫 장면. 살던 동네로 돌아온 재남, 힘없이 걸어간다. (LS)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 휴지가 흩날린다.( S# 1) 걸어오는 재남, (frontal_tracking_back) 바람이 분다.( S# 2) 재남이 쳐다보는(point_of_view) 을씨년스럽게 닫힌 가게들 ( S# 3) 걸어가는 재남, 신문지가 재남의 얼굴 곁을 스치고 지나간다. ( S# 4) 재남의 시선으로(point_of_view) 德元商會, 中央精肉店이 차례로 보인다.( S# 5) 재남, 달려가기 시작한다.( S# 6) 재남, 읍내 대로변을 따라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LS) ( S# 7) 재남, 집 앞 골목을 달려온다.( S# 8) 재남, 집 대문 앞으로 뛰어 들어간다.( S# 9) 재남, 집 안 마당으로 뛰어 들어간다.( S# 10) 그리고 집을 두리번거리면서( S# 11_12, dissolve) 누가 없는지 둘러본다. 재남을 반기는 건(point_of_view) 토끼장이다.( S# 13) 바라보는 재남, 표정이(CU) 밝아진다.( S# 14) 재남, 토끼장 앞에 서서 (over_the_rabbit’s_shoulder) 새로 낳은 토끼 새끼들을 세어본다.( S# 15) 한 마리씩 세어보는 재남(voice_over/point_of_view) 앞의 토끼들.( S# 16) 재남, 토끼 한 마리를 들어 올리는데 뒤편에서 성식이 재남을 부른다. ( S# 17 ) 먼저 환기할만한 사실. 재남이 고향에 돌아오기 전에 사실상 영화는 이미 돌아온 다음이다. 이 첫 장면 앞의 씬은 고향에 남은 재남의 할아버지가 ‘노력동원’에 끌려가 무거운 통나무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장면이다. 이때 이 작업은 (첫 장면에서 본 이 마을의 녹음 짙은 풍경과 동떨어진 채) 마치 다른 지역에 끌려가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 한 그루 없는 황량한 벌판에서 다른 ‘반동분자’들과 함께 부역을 하는 중이다. 발은 피범벅이고, 할아버지가 등에 엎쳐 들고 나르는 건 이미 그 나이에 들 수 없는 무게의 통나무이다. 그림자 한 점 없어 쉴 곳조차 없는 벌판. 낯선 장소. 마치 병풍과도 같았던 그 숲과 같았던 나무들은 모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 더 이상 여기는 낙원이 아니다. 혹은 일상생활의 시간선은 이미 끊어졌고 지금은 역사 안의 함정에 떨어져 그 안에서 견뎌야 한다. 새로운 조건. 임권택은 그렇게 두 개의 씬을 연결하였다. 재남에게 어떤 희망도, 어떤 기대도, 어떤 구원도 서둘러 뺏어버리는 것. 그는 이곳에서 저곳을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아니다. 지금 이곳은 다른 이곳이다. 정확하게 이 두 번째 시퀀스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B_S# 1 A_S# 10 나는 두 개의 시퀀스를 비교하기 위해서 첫 번째 시퀀스를 A라고 부르고, 재남이가 돌아온 시퀀스를 B라고 구별할 것이다. 재남이가 동네에 들어서는 첫 장면은( B_S# 1)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장소를 이동한 다음 원래의 장소로 돌아올 때 마을 전체의 풍경을 보여주는 편이(establishing_master_shot) 쇼트의 진행에서 경제적이며 재빨리 다음 씬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을 통해서 공간적인 지각을 할 수 있게 지형적이며 지표적인 지도를 소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권택 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게 안에 들어가서 동네로 돌아오는 재남을 보여주고 있다. 텅 빈 동네. 아마도 동네 사람들은 모두 ‘노력동원’에 나가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 쇼트의 바로 전 씬. 그러므로 가게에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왜 가게 안에 들어가서 재남을 바라보는 것일까. 그렇게 되면 이미지의 면적은 매우 제한적인 풍경만을 보여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때 이상하리만큼 스산한 바람이 불어 휴지들이 흩날린다. 우리에게 읽기를 요구하는 것만 같은 우연한 대기현상의 기호. 이 바람은 물론 만든 것이다. 휘날리는 바람은 동네에 재남이 들어서는 것을 방해라도 하듯이, 혹은 반기지 않는다는 듯이, 이제부터 벌어질 나쁜 사건들에 대해서 불길한 예언이라도 하듯이, 그렇게 재남을 마주 보고 맞은편에서 불어오고 있다. 이 쇼트는 재남이 아버지와 함께 학교 가던 첫 번째 씬에서 집 앞 골목을 막 벗어난 다음 마을 읍내에 들어서던 첫 번째 쇼트와 같은 방법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 A_S# 10) 그러나 여기서 두 개의 쇼트 사이의 관계가 개념적으로는 동일하지만 형식적으로 마치 오른손과 왼손처럼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것이다. 첫 번째, 배치라는 문제. 두 개의 쇼트 모두 마을 읍내로 들어가는 것을 안내하는 첫 번째 쇼트이다. 이것을 만일 풍경으로 찍었다면 우리들은 순간적으로 놓쳤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두 쇼트의 풍경은 정반대로 찍혔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하나는 평화롭고 행복한 ‘전쟁 이전’ 시간의 풍경이고, 다른 하나는 을씨년스럽고 황량한 ‘전쟁 이후’의 풍경이다. 나는 반복해서 이전과 이후라는 말을 꺼내 들 것이다. 임권택은 둘 사이에서 여전히 거기 머물면서 변하지 않는 읍내 가게 공간을 프레임으로 하여 재남이가 읍내로 들어가는 장면의 풍경 입구(introducing_master_shot)를 배치하였다. 그러나 이 두 개의 쇼트는 가게 안에서 재남을 찍으면서 동일한 프레임을 보여주지만 동일한 가게에서 찍은 것이 아니다. 동일한 구도. 두 개의 쇼트 모두 왼쪽 길에 자리 잡은 가게 안에서 찍었다. 다른 가게. 그 둘은 같은 가게에서 찍으면 안 된다. 첫 번째 장면에서 우리는 저 멀리 ‘영광 오토바이’가 보이지만 재남이 돌아오는 장면에서는 그 가게가 보이는 그 자리가 아니다. 안 되는 이유. 재남은 지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그리고 첫 번째 장면은 집에서 나오는 장면이다. 이 둘을 동일한 가게에서 찍으면 재남이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의 연속적인 쇼트를 집에서 나오는 장면의 역순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나는 이 문제를 기능상의 문제로 단순하게 환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재남이 같은 길을 되돌아옴과 그 길의 다름은 동일한 과정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이제 더이상 동일한 시간의 길이 아닌 것이다. 임권택은 두 개의 쇼트 사이의 거리와 차이 사이에서 그 동일성을 때려 부순 전쟁이라는 효과를 보여주는 중이다. 두 번째, 분배라는 문제. 이야기 안에서 기계적인 운동은 인물의 동선을 따라가면서 진행될 때 주거나 배분받은 인물이 누구인가 만큼이나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재남이가 아버지와 학교에 갈 때 그들의 자전거 선을 가로막고 나선 사람은 다리를 저는 동네 아저씨이다. 이 영화에서 그가 다리를 저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기억할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아버지에게 처방해주신 약 덕분에 배앓이가 모두 나았다고 길게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까다로운 문제. 재남이와 아버지는 자전거를 타고 이 장소를 지나가기 때문에 순식간에 지나쳐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저씨의 장광설은 이 쇼트를 오랫동안 붙잡아 놓는다. 게다가 이 아저씨는 다리를 절기 때문에 더 속도가 느려진다. 나는 이 동선을 반대로 설명하고 싶다. 이 쇼트를 기억하지 못하면 재남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마을 읍내의 첫 쇼트를 여기서 시작하기 난처해진다. 두 사람은 자전거를 타고 가고 있기 때문에 쇼트의 프레임을 순식간에 가로질러 가버릴 것이다. 만일 여기서 쇼트를 나누기 시작하면 동선이 끊어져 버릴 것이다. 하나의 동선. 하나의 운동. 이 곡선을 나누면 안 된다. 다리 저는 아저씨는 여기서 가게 안의 프레임 쇼트를 멈춰 세우는 고정점의 역할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때 자전거가 프레임을 빠져나간 다음 그 동선은 카메라의 기계적인 운동으로 이어진다. 임권택 은 쇼트를 나누는 대신 여기서 거의 곡예에 가까운 운동으로 줌과 팬을 이용해서 다리 저는 아저씨에게 머문다. 그러나 전쟁 ‘이후’ 다리 저는 아저씨는 ‘지주’인 할아버지를 고발하고 당원이 된다. (그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말을 구태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재남이의 씬에 있었던 아저씨는 재남이 마을 읍내로 돌아올 때 할아버지를 감시하는 자리에서 강제부역이 진행되는 전 씬에 자리하고 있다. 만일 이 아저씨가 당원이 되지 않았다면 있어야 할 자리는 전 씬의 강제부역이 진행되는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마을 읍내 큰길가에서였을 것이다. 다리가 불편한 그가 강제부역 공사장에 있어야 할 자리가 달리 어디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만일 읍내 길가에 서 있다면 반대로 재남의 동선을 다시 가로막고 나섰을 것이다. 하나의 선. 멈추지 않는 선. 끊어지지 않는 선. 우리는 영화에서 동선이라는 문제가 동시에 각자의 자기 자리의 자기 원인의 운동이자 실존의 곡률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B_S# 3 B_S# 4 B_S# 5 B_S# 6 A_S# 11 두 번째 쇼트. 재남은 이 낯선 풍경 앞에서 마을 읍내로 들어선다. 물론 집으로 가는 길이다. 영화는 재남을 바라보면서 뒤로(tracking_back) 물러난다. 재남의 표정. 그는 다른 풍경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이때 재남을 가로 막아나서는 것은 바람이다. 그의 얼굴을 때리고 지나가는 바람결. 나는 첫 장면에서 이상하리만큼 바람 한 점 없었던 여름날 화창한 기후를 기억한다. 여기서 이 바람은 이상할 정도로 부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 바람은 비를 불러오기 위한 신호가 아니다. 바람결의 매치 컷. 재남을 맞이하는 것만 같은 바람. 단지 그것이 만들어진 바람이라서가 아니라 왠지 그 장소에 불어오는 바람이 그 쇼트 바깥에서 불어오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바깥의 어디? 이제까지 진행된 전쟁 장면들의 쇼트들 사이의 잔인함과 무심한 순간들의 이미지가 서로 부딪치면서 만들어낸 충돌의 몽타주 효과. 그것이 아니라면 달리 어디서 불어 올 수 있겠는가. 여기에 더해 A씬에서 단 한 번도 자전거의 속도로 카메라가 이동한 적이 없다는 것을 환기시키고 싶다. 더도 덜도 아닌 풍경(속의 재남)을 바라보기. 그렇다면 여기서는 왜 재남의 발걸음이라는 속도가 필요해진 것일까. 당신을 환기시키고 싶은 사실. 말 그대로 불가능한 이야기. 이제부터 우리는 한국전쟁의 이상한 나라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재남이 만들어내는 주관적인 이야기의 세계. 만일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재남의 ‘전쟁’은 우스꽝스러울 뿐만 아니라 너무나 어처구니없어서 더이상 이 모험의 선을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위기. 새로운 속도. 이때 이 바람을 재남이 고향의 낯선 공기 안에서 느껴보는 감정의 터치라고 말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더이상 마을 읍내의 가게들은 정겨워 보이지 않고( B_S# 3) 지나쳐가는 바람결에 날리는 신문지가 재남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간다.( B_S# 4) 마치 그에게 마을 읍내의 풍경을 돌아보기를 요구라도 하는 듯한 일깨움.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면서 보았던 가게의 간판들이 (역순으로) 차례로 보인다.( B_S# 5) 德元商會, 그리고 中央精肉店. 이때 이 쇼트를 전쟁 ‘이전’의 쇼트 맞은편에 세워놓을 필요가 있다. 전쟁 ‘이전’의 쇼트( A_S# 11)에서 재남은 아버지의 자전거에 실려 이 가게들 앞을 기분 좋게 달려간다. 조금 더 앞부터 시작된 자전거의 운동은 은화상회를 거친 다음, 德元商會, 그리고 中央精肉店을 지나서 간판이 없는 가게 앞을 지나간 다음에도 마치 그 기분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자전거가 빠져나간 다음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데도 잠시 그 자리에 머문다. 그 순간이 매우 짧은 데도 불구하고 임권택 은 인물이 빠져나갈 때 거기 공백을 남겨놓지 않기 때문에 이 쇼트의 여분의 지속이 이상할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전쟁 ‘이후’의 쇼트는 하나로 찍은 쇼트를 찢어놓았다.( B_S# 4_5_6) 이 쇼트의 분리는 반대로 마을 읍내의 풍경과 아버지와 재남을 연결하는 자전거의 동선이 단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하게 유기적인 관계를 구성하지 않으면 하나의 쇼트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것만 같다. A_S# 7 A_S# 8 A_S# 9 A_S# 11 B_S# 7 B_S# 8 두 개의 씬, 전쟁 ‘이전’과 ‘이후’에서 한 장소를 반복해서 오가면서 임권택 은 같은 쇼트와 다른 쇼트를 마치 붙였다 떼어놓기 혹은 하나를 다른 하나 위에 겹쳐놓는 것처럼 보인다. 재남이 집을 향해서 달려갈 때 마을 읍내를 수평으로 달려가는 장면( B_S# 7)은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같은 길을 지나가던 장면( A_S# 11)을 같은 자리에서 단지 자전거와 재남의 동선을 반대로 하여 다시 한 번 찍은 것이다. 집으로 가는 길의 진행에는 단 하나의 어떤 다른 장소의 쇼트도 개입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되풀이. 그 둘은 형태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마치 이 길은 집으로 가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한다는 듯이 그렇게 하나의 선을 따라간다. 그래서 읍내의 이 길을 벗어나자 다음 장소는 바로 집 앞의 골목으로 이어진다. 골목과 집 앞 대문을 하나의 이미지로 찍은 쇼트는 없지만 이 길은 분명히 집 앞 대문에서 이어져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전쟁 ‘이전’의 씬에서( A_S# 7_8_9) 집 앞 대문까지 따라 나온 어머니가 재남에게 도시락을 건네주고( #7) 골목 앞을 자전거를 타고 빠져나가는 아버지와 재남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8) 손을 흔들 때 ( #9) 그 세 개의 쇼트 사이에서 문 앞에 서 있는 어머니가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손을 흔들기 위해서는 시선 안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 개의 쇼트로 진행되는 이 씬을 처음 보았을 때 운동의 연속성을 지연시킬지라도 골목을 빠져나가는 아버지와 재남을 마을 읍내로 보내기 위해서 어머니의 손짓이 둘 사이를 면과 면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면서(invisible_cut)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집합의 다리(transitional_shot)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 문제를 기능적으로만 바라보면서 ‘엄마의 클로즈업’이라는 정감이 가져다주는 씬 전체 안에 놓인 관계의 도약을 놓쳤다. 이 자리가 분명해지는 순간은 재남이 전쟁 ‘이후’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사라진 쇼트 안에 있다. 구멍 뚫린 씬. 그 쇼트는 거기 있지 않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거리를 두고 자기의 존재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서술의 목소리. 나는 그 바깥의 체험을 사라진 쇼트 안에서 느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재남이 집에 가기 위해서 집 앞 골목으로 뛰어오는 장면은 ( B_S# 8) 재남이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골목을 빠져나가던 그 장면 ( A_S# 8)과 같은 프레임이다. 다만 둘의 차이는 온다, 와 간다, 는 반대 운동방향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무슨 수를 써도,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어머니의 손짓 장면을 반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어머니는 이미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 가지 가능성은 가까스로 남아있다. 그건 재남이 환상을 동원해서 어머니의 손짓을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 가능성을 동원하면 재남은 어쩔 수 없이 환상이 요구하는 명령을 따라야 할 것이다. 결과는 지금보다 더 가련해진다. 재남은 전쟁 ‘이전’과 ‘이후’를 구별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재남은 이제 자기만의 전쟁을 시작할 명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임권택은 그 가능성을 처음부터 차단하였다. 재남은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아버지 곁에 묻고 지금 여기에 돌아오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는 더이상 재남이 (환상 안에서) 진행해야 할 행위의 줄거리는 남아있지 않다. 매장이라는 문제. 나는 따분하게 여기서 억압의 귀환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A_S# 7 B_S# 9 B_S# 17 이때 내 관심을 사로잡은 것은 사라진 쇼트가 아니다. 비슷한 것과 같은 것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이 두 개의 씬, 그러니까 전쟁 ‘이전’과 ‘이후’의 씬은 사라진 쇼트와 비슷한 쇼트 사이, 이 둘 사이에서 서로 다른 짝을 찾아가고 있다. 이 둘 사이에서 공명을 느껴보기란 간단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둘 사이의 진동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놓여있는 전쟁이 없다면 반대로 그 둘은 아무런 진동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이를테면 나는 이 둘 사이의 플래시백은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임권택 은 여기서 어떤 사건, 어떤 줄거리, 어떤 설명을 하는 대신 그냥 간단하게 성립이라는 질문을 던져본 다음 동일한 쇼트의 재현이라는 요구의 불가능을 마주하게 만든다. 재남이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아버지의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쇼트( A_S# 7)는 재남이 집에 도착하는 장면( B_S# 9) 과 동일한 장소지만 동일한 프레임이 아니다. 왜 두 개의 쇼트는 동일한 쇼트 대신 비슷한 쇼트라는 방법으로 짝을 이루는 것일까. 이 세 개의 쇼트와 두 개의 쇼트는 그 둘을 비교할 때 동선의 방향이라는 질문 앞에서 갑자기 부서진다. 우리는 영화가 물리적인 예술이며, 장소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안에서 뇌 위에 펼쳐지는 상상적인 지도를 만든다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반복된 설명(을 통한 문제제기). 재남과 아버지가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골목과 재남이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은 같은 골목이며 같은 방향에서 (거의 같은 자리에서) 찍었다. 그런 다음 어머니의 손짓과 눈길로 이 골목과 집 대문의 선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다. 전쟁 ‘이전’의 쇼트만으로 이 선을 따라가면 이 골목은 집 대문을 정면으로 해서 오른쪽으로 이어진 길이다. 그러나 재남은 이 골목을 따라 어떤 우회도 없이 일직선으로 수직으로 집 대문을 향해 뛰어간다. 동선으로만 설명하면 이 두 개의 골목은 서로 다른 골목이다. 첫 번째, 오로지 기능적인 설명. < 울지 않으리 >는 시네마스코프로 찍었고, 자전거에 재남을 태운 다음 아버지가 끄는 자전거로 이 프레임을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수평의 구도가 필요해졌다. 이렇게 설명하면 재남이가 돌아오는 쇼트는 완전하게 잘못 찍힌 동선이다. 자동적인 설명. 그렇게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두 개의 쇼트는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재남의 동선을 연결하기 위하여 곡선을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에 (혹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둘 사이에 직선을 그은 다음 180도를 기준으로 하여 연결시킨(match_cut)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이걸 경로적 공간으로 재 정의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전쟁 ‘이전’과 ‘이후’의 두 개의 시퀀스가 진행되는 과정이 단순히 역순을 밟아나가는 대신 사라진 쇼트와 비슷한 쇼트로 이루어져있다고 말했다. 같은 말의 다른 판본. 왜 두 개의 씬은 함께 가능하지 않을까. 하나의 세계에서 가능했던 쇼트가 다른 세계에서는 불가능해질 때 우리는 그 둘 사이에 놓인 칸막이로서의 시간을 생각해야 한다. 이 장면들은 지금 공간적인 특징을 따라오는 대신 재남이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는 세상의 풍경이다. 그렇지 않다면 재남이가 이 동네로 들어올 때 부는 바람은 달리 설명될 수가 없다. 마치 재남의 마음으로부터 불어온 듯한 바람. 게다가 단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은 마을 읍내. 어른들은 부역에 모두 끌려 나갔다고 반문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강제부역 현장에서 단 한 명의 여자도 보지 못했다. 재남의 할머니가 없기 때문에 여자들의 부역장을 찍을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재남의 친구들은 모두 어디에 갔는가? 그 아이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았다고 주장하려면, 혹은 그 시간에 모두 학교에 있었다고 가정하려면, 그와 동시에 재남이 집에 들어선 다음 토끼장 앞에 섰을 때 행랑채에 살던 성식이는 왜 그 시간에 집에 있었는지를( B_S# 17)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둘 중 어느 쪽이 재남의 주관적인 풍경이라고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은 양쪽 모두 부분적으로 풍경 안에 주관적인 디테일의 삽입이라는 방식으로 외상의 얼룩을 더해놓았다. 이를테면 전쟁 ‘이전’의 과잉할 정도로 평화로운 낙원에 가까운 풍경. 반대로 전쟁 ‘이후’의 인공적으로 삭제시킨 낙원의 디테일들. 그 안에서 종종 비정상적인 운동이 그 내부의 배치 사이로 이동하기 시작한다. B_S# 10 B_S# 11 B_S# 12 B_S# 13 B_S# 14 B_S# 15 집을 나서는 장면과 돌아온 장면의 차이. 재남이 어머니의 배웅을 받으면서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집을 떠나는 장면이 집에 돌아오는 장면에서 반복될 수 없는 것은 두 쇼트 사이의 크기가 불러일으키는 같은 장소의 다른 조건이다. 그저 힐끗 보는 것만으로 느껴보는 두 쇼트 사이의 차이는 마치 전쟁 ‘이전’의 쇼트를 ‘이후’의 쇼트는 확대시켜 놓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두 쇼트는 카메라의 위치가 다르기 때문에 기계적으로 확대하여 촬영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두 가지 모두를 건드려볼 필요가 있다. 전쟁 ‘이전’의 쇼트는 가벼운 이동 사이에서 집 대문을 열어 놓고 어머니를 왼쪽에 세운 다음 아버지와 재남의 자전거를 오른쪽에 세웠다. 물론 세웠다는 표현은 정확한 묘사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지금 막 병원(과 학교)로 떠날 채비를 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이때 이 세 사람을 뒤로하고 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다. 이제 막 시작하는 하루. 누구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있는 문. 물론 이 장면을 보는 사람들의 관심은 누구라도 이 세 사람의 가족에게 모여 있기 때문에 그 문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전쟁 ‘이후’의 장면은 여기서 재남의 집 대문과 지붕이 담길 만큼 뒤로 물러서서(long_shot) 찍었다. 정면으로 보이는 집 대문을 중심으로 한 전체의 모습. 이건 지금 이 집의 흉한 몰골을 보라는 이미지이다. 아무도 드나들지 않고 있을 것만 같은 집. 이때 초여름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이 집의 행랑채 창문은 닫혀있고, 오른쪽에 자리한 쪽문도 단단히 닫혀 있다. 그런데 왜 대문은 열려있는 것일까. 그 말은 이 집을 돌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재민이가 피난을 떠날 때 그대로의 집.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는 집. 연신 땀을 닦고 있는 재민의 제스처. 그렇게 힘들게 재민이 먼 길을 돌아 돌아왔는데도 누구도 반기는 사람이 없는 집. 대문이 반쯤 열려있지만 마치 집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대문 안의 벽은 우리가 전쟁 ‘이전’의 쇼트에서 보지 못한 것이다. 이 을씨년스러운 풍경. 마치 모두가 어디로 가버린 것만 같은 집. 집에 들어선 재남은 텅 비었다는 것을 확인한다. ( B_S# 10_11_12) 그런 다음 고개를 돌려 토끼장을 바라본다. ( B_S# 13_14_15) 이 쇼트는 물론 영화의 맨 첫 장면으로 되돌아온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영화는 여기서 다시 시작한다. 다시 시작한다. 이중의 용례. 나는 위험한 자리에 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모두들 들어서기를 두려워한 시작. 임권택 의 영화를 다룰 때 < 증언 >에서 시작하는 일련의 국책영화에 대해서 할 수만 있으면 그 자리를 피한다. 종종 임권택의 60년대 영화들, 이를테면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로 이어지는 다찌마와리들, 그리고 < 황야의 독수리 >와 함께 하는 만주 웨스턴들에 대해서 신나게 이야기하던 관대한 대중영화의 친구들마저 1970년대 정책영화들 앞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심지어 임권택 자신도 이 영화들에 대한 대답을 미루거나 혹은 종종 피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마주 볼 생각이다, 그리고 마주 보아야 한다. 그런 다음 새로운 모델을 제시할 생각이다. 모델? 그렇다. 나는 지금 이브 알랭-브아를 떠올리고 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프리모 레비의 증언을 읽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서 살아남는 것, 그런 다음 연좌제의 그늘 아래서 1970년대 반공국가의 독재를 통과해온 삶. 이 둘이 서로 비스듬하게 겹칠 때, 결국 이 모든 것은 다시 삶의 문제이다. 나는 이 질문을 외상적 증후의 과도한 도식으로 만드는 것에 맹렬하게 저항할 것이다. 희생이라는 방법으로 살아가기. 그 안의 임권택. 영화를 저들의 것에서 다시 나의 것으로 되돌리는 순간, 바로 예외적 순간만이 영화를 다시 한 번 가능하게 열어줄 것이다. 영화 안에서 예외적 지위에 놓여있는 쇼트들. 굴복하지 않는 쇼트. 나는 지금 1970년대 안으로 들어왔다. 하지만... (계속) 1974년 11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영화진흥공사 각본 신봉승 윤삼육 나한봉 촬영 박승배 조명 박태수 편집 김창순 음악 한상기 이승현 재남 황해 할아버지 김진규 아버지 문정숙 어머니 박지훈 재석 김영숙 지은 이일웅 칠용 추석양 다리 저는 동네 아저씨 독고성 공산당 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