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의 시간
- 감독
- 미하엘 하네케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이자벨 위페르, 베아트리체 달, 빠뜨리 자쉐로
1. (... 그리고 계속)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전혀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작년에 나는 이 지면에서 장-피에르 레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마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방식으로 장-피에르 레오의 영화를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첫 번째 영화에 14살의 나이에 출연한 소년. 앙뜨완 드와넬이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를 달려가다 말고 문득 멈춰 서서 우리를 바라볼 때 그 하나의 쇼트는 영화사의 사건이 되었다. 다섯 편의 앙트완 드와넬. 그 곁에는 장-뤽 고다르와 함께 68년 5월을 기다리면서 파리를 서성거리는 청년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혁명에의 예감. 그러나 장 외스타슈의 영화에서 레오는 실패한 혁명의 멜랑코리에 관해 카페에서 장황하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 사이에 12시간 30분 동안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자크 리베트의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에서 레오는 여전히 철들지 않는다. 베르날도 베르톨루치는 누벨바그에 적대적인 감정을 안고 말론 브란도의 맞은편에 세워 놓았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와 글라우베 로샤를 빼놓고 싶지는 않다. 장-피에르 레오는 종종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누벨바그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도 장-피에르 레오는 살아남았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장-피에르 레오를 브레송 영화의 모델처럼 찍었다. 그리고 난 다음 전혀 예상하지 않은 순간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레오를, 나이 든 레오를, 거의 낙엽이 된 것만 같은 레오를 만났다. 청춘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슬픈 마음으로 알베르 세라의 영화에서 내내 침대에 누워있는 장-피에르 레오를 보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 소년을 볼 날이 많지 않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가을에 전화를 받았다. “장-피에르 레오를 만날 볼 생각이 있으세요?” 나는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 장-뤽 고다르의 1985년 작품 <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 >와 스와 노부히로의 새 영화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을 상영하면서 두 편의 영화의 주연인 장-피에르 레오를 초대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곁들여 알려주었다. 장-피에르 레오라니!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너무 감사한 나머지 내 쪽에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버렸다. 해운대의 호텔에서 장-피에르 레오를 만난 것은 10월 13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이 몹시 불었으며 창문 바깥의 구름은 저녁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앞에 나타난 장-피에르 레오는 < 400번의 구타 >의 소년이 아니라 < 루이 14세의 죽음 >의 저물어가는 태양왕이었다. 그는 거동이 몹시 불편했고,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 의자는 최고급이었으며, 마치 침대처럼 푹신한 것이었다. 나는 세세한 디테일을 쓸 수 있지만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장-피에르 레오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앉자마자 내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고다르와 함께 작업한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아아, 고다르라니! 장-피에르 레오는 내가 만난 고다르 영화에 출연한 두 번째 배우이다. 첫 번째는 태안반도에서 만난 (< 다른 나라에서 >를 찍으러 방문한) 이자벨 위페르였다. 그런 다음 장-피에르 레오는 주머니 속의 구슬을 꺼내듯이 차례로 이름을 호명했다. 그는 말할 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정확하게 그 자세로) 커다란 제스처로 양팔을 치켜들고 웅변하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가엾게도 이미 목소리는 지쳐서 갈라졌고 종종 가까스로 힘을 내서 말했다. 게다가 발음은 불분명하게 뒤섞였고 내가 알고 있는 영화 제목들도 때로 놓쳤다. 하지만 몹시 산만하게 이야기를 하다말고 문득 내게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배운 게 뭔지 알아요? 배우에게 연기는 철학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고다르가 내게 해준 말이에요. 영화는 그 방법을 쳐다보는 예술인 거죠” 나는 갑자기 누벨바그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만으로 충분해. 이걸로 나는 충만해. 두 번의 토크, 나흘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누벨바그의 작은 영화사에 관해 절대 알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장 외스타슈에 대해서도 들었다. 차이밍량의 연기 지도에 대해서도 들었다. 하지만 장-피에르 레오는 정말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토크를 원치 않았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한국의 시네필들이 간절히 원한다고 애절할 정도로 간청했다. 한 가지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장-피에르 레오가 그렇게 당신들 앞에 의자에 오래 앉아있었던 건 내 간청에 대한 대답이었다. 장-피에르 레오와의 두 번의 토크가 끝났다. 두 번째 토크가 끝난 다음 그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그는 문이 닫히기 전에 내게 말해주었다. “당신도 트뤼포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그리고 포옹을 해주었다. 나보다 키가 작았지만 약간 힘겹게 고개를 들고 내 뺨에 그의 뺨을 비벼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런 다음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졌다. 약간 멍한 기분으로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문득 내가 평생 동안 꿈꾸었던 일 중의 하나가 이루어진 순간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달리 말할 수 있을까. 2. 올해 나의 영화는 망설일 필요 없이 데이빗 린치의 < 트윈 픽스: 더 리턴 >(시즌 3)이다. 그저 괴이하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이 시리즈는 여전히 데이빗 린치가 우리 시대에 가장 멀리 나아간 예술가 중의 한 명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게다가 (역시)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올해 1월 3일 나의 첫 토크는 데이빗 린치의 < 블루 벨벳 >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빗 린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 아트 라이프 >를 진행했고, 가을에는 < 이레이저 헤드 > < 트윈 픽스: 불바다를 나와 함께 건너자 > < 로스트 하이웨이 > < 멀홀랜드 드라이브 >를 차례로 진행했다. 12월에는 데이빗 린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리가 기다리는 중이다. 말하자면 올 한 해는 내게 ‘다시 찾아온’ 데이빗 린치의 한 해였다. 왕빙의 두 편의 영화는 한 마디로 굉장했다. < 15시간 >은 15시간 40분 동안 진행된다. 쯔린성에 자리한 아동복 피복 공장 15,000개 중의 한 작업실을 막 일이 시작되는 아침 시간에 찾아간 다음 하루 종일 그 장소에 머물면서 그들이 퇴근하는 한밤중까지 하루 종일 버티고 있는 이 영화는 (좀 이상한 의미에서) 왕빙의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이다. (아마 이 영화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할 다른 자리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 < 미세스 팡 >은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할머니 팡슈잉(方?英)을 찍었다. 여기서 찍은 것은 말 그대로 ‘죽어가는’ 시간이다. 왕빙은 죽음을 착취하지 않는다. 그저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미세스 팡>은 죽음 앞에서 영화가 가져야 할 태도를 다시 한번 질문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한 편은 한 장소에 대해서, 다른 한 편은 한 사람에 대해서 찍는다. 왕빙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부산에서 만난) 프랑스 프로듀서에 의하면 왕빙은 이미 다음 영화를 파리에서 편집하는 중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다음 영화에 대해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아마 2018년에 만나게 될 왕빙의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왕빙의 영화가 고통스럽다면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잠시 동안 천국에 다녀온 기분을 안겨준다. <미세스 팡>에 올해 본 최고의 클로즈업 쇼트가 있다면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에는 최고의 롱 쇼트가 기다리고 있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롱 쇼트를 가장 의미 있게 찍는 감독이다. 거의 천국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가 와이즈만도 미처 예기치 않게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가 된 것은 동시에 이 영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의 21세기 영화가 항상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걸작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낸 두 편의 기괴한 영화 <자네트>와 < 재키 >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굉장하다. 아마 <자네트>는 찬반이 갈릴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브뤼노 뒤몽의 새로운 뮤지컬에 완전히 승복한다. 올해에는 두 편의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다른 한 편도 마찬가지로 전기영화인 < 네루다 >이다) 나는 이 사람의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다. 원작에 기대어 만든 두 편의 서사 에픽 < 잃어버린 도시 Z >와 <자마>는 영화와 ‘자연’이 만나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다. 점점 영화에서 자연을 그래픽으로 그려내는 동안 어떤 영화들은 ‘생생한’ 자연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영화라는 장치 자체가 경험하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올해 가장 신선한 영화는 조쉬와 베니 사프디 형제의 < 굿 타임 >이다. 아마 사프디 형제는 점점 더 놀라워질 것이다. 이 선택은 지지의 표명이다. 물론 마지막에 선택한 스와 노부히로의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단지 장-피에르 레오를 만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념으로 포함시킨 것이 아니다. 스와 노부히로는 여기서 매우 느슨하게 진행하면서 마치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가져온다. 물론 이 영화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그의 연출방식, 즉 배우에게 영화를 그저 맡긴 채 그 리듬을 따라가는 흐름은 스와 노부히로만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까지 항상 어떤 긴장을 품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드물게도 기분 좋은 한여름의 휴가를 즐기러 온 것만 같다. 아마 이 영화 속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그 자연스러움이 한몫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 퍼펙트 커플 >이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오마주라면 분명히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 400번의 구타 >의 오마주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영화 속의 영화에서 잠든 연기를 하던 장-피에르 레오가 문득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볼 때 거기서 어린 앙트완이 우리를 바라보던 그 장면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추신: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영화를 뽑지 않긴 했지만 올해의 연기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김민희 는 정말 아름답고 애처롭다. 특히 어둠이 다가오는 커피숍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의 롱 테이크 씬은 홍상수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장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
2016년은 내게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기억될 한해다. 현실 세계에서건 극장에서건, 그동안 발화되지 않았든 혹은 쉽게 간과되었던 여성의 목소리들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울림으로 다가왔고 이러한 흐름이 영화를 보는 관객으로서의 나에게도 큰 감흥을 주었던 것 같다. 2016년 한해 사사롭게 마음에 품었던 영화 중 많은 작품이 새로운 여성상을 보여주거나 여성의 서사에 보다 주목한 작품들이라는 점도 같은 맥락이다. < 엘르 >와 < 아쿠아리우스 > < 아가씨 >와 < 줄리에타 >가 그런 작품들이다. 다시 한번 올리비에 아사야스와 호흡을 맞춘 크리스틴 스튜어트의 호연이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 퍼스널 쇼퍼 >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만 이 영화와 < 슬랙 베이: 바닷가 마을의 비밀 >, 그리고 < 곡성 >은 불균질한 요소들의 충돌과 결합으로부터 생성된 미스터리한 기운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왔던 작품이었다. < 패터슨 >은 영화의 리듬감이, <룸>은 스토리텔링이 인상적이었던 영화였고 드라마 <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은 아이디어와 무슨 일이 곧 일어날 것만 같은(그러나 쉽게 일어나지 않는) 불길한 무드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 자리를 빌려 사사롭게 고백하자면, 리스트를 꼽기 전에 < 비밀은 없다 >를 보았다면 나는 주저 없이 <웨스트월드: 인공지능의 역습> 대신 이 영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손예진의 폭발적인 연기가 인상적인 이 작품은 ’한국 여자’에 덧씌워진 이미지를 사정없이 깨부수는 동시에, 한국 여성 캐릭터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멋진 사례가 될 것이다. 이 지면에서 소개하고 싶은 작품은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묶인 영화들 중 가장 과격한 영화라고 할 만하다. 2016년 칸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중 최고의 논쟁작이었던 < 엘르 >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 감독 폴 버호벤이 할리우드에서 자국으로 돌아가 만든 < 블랙북 > 이후 10여 년 만에 연출한 장편영화로도 화제를 모았다. 영화 < 베티 블루 37.2 >(1986)의 동명 원작을 집필한 프랑스 작가 필립 지앙의 소설 「오...」(2012)를 영화화한 <엘르>는 폴 버호벤이 원래 미국에서 촬영하려 했던 작품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투자자이든 배우이든 이 영화에 참여하는 데 난색을 표하는 바람에, 버호벤은 유럽으로 눈길을 돌려 원작의 무대이기도 한 프랑스에서 프랑스 여배우 이자벨 위페르와 함께 영화를 만들었다. <엘르>를 보면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불륜, 강간, 관음, 사도마조히즘, 폭력. 온갖 종류의 금기에 노골적으로 현미경을 들이대는 이 영화는 미국인들이 감당하기엔 지나치게 모험심을 필요로 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여주인공이 괴한에게 광폭하게 강간당하는 첫 장면부터, 시나리오를 덮어버린 이들이 적지 않았으리라 짐작한다. < 엘르 >는 미쉘(이자벨 위페르)의 비명으로 포문을 연다. 그녀는 복면을 쓰고 집으로 침입한 괴한에게 성폭행을 당한다(사건은 암전된 화면 속에서 진행되고 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괴한은 유유히 사건 현장을 떠나고, 남겨진 미쉘은 잠시 몸을 추스르더니 의연한 얼굴로 입었던 옷을 쓰레기통에 넣고 깨진 접시를 치운다. 그리고 목욕을 하며 다리 사이에서 흐르는 피가 섞인 거품을 바라본다. 이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는 하나의 질문을 제기한다. 누가, 왜 그녀에게 그런 짓을 했는가? 아직도 미쉘의 곁을 맴도는 전남편, 미쉘과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 미쉘에게 자꾸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는 옆집 남자, 게임 회사 대표인 미쉘에게 사사건건 불만을 털어놓는 부하 직원. 모두가 조금씩 의심스럽다. 미쉘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를 맺고 있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소개하는 <엘르>의 초반부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형식을 띤다. 보는 이들로 하여금 누가 범인일지 짐작해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영화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범인의 정체를 추리하는 건 맥거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엘르>의 핵심은 ’그 여자’라는 제목의 의미처럼, 미쉘이라는 인물의 욕망과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미쉘의 삶은 곳곳이 지뢰밭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전 국민이 다 아는 연쇄살인범이고, 어머니는 철이 없다. 전 남편은 제 앞가림을 못 하고 어리숙한 아들은 여자친구가 낳은 다른 남자의 아이에게 집착한다. 불륜 관계에 있는 친구의 남편은 직장에서건 밖에서건 발정 난 동물처럼 추근대고 회사의 남자 직원 중 누군가는 미쉘이 게임 캐릭터에게 강간당하는 영상을 단체 메일로 뿌린다. 어쩌면 삶을 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는 다양한 시련들 사이로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처럼 사뿐하게 걸어나가는 미쉘의 모습을 지켜보는 건 < 엘르 >를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이유다. 무엇보다 미쉘은 선택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택을 내리는 사람이다. 그녀에게 사회가 부여한 역할은 온갖 괴물이 출몰하는 1인칭 게임 속 주인공이지만, 그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게임의 콘솔을 잡은 플레이어가 되길 욕망하는 느낌이랄까(그런 점에서 시나리오 에이전시의 대표였던 원작 소설 속 미쉘의 역할이 게임 회사 대표로 바뀌었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일례로 이 영화에서 미쉘이 가장 먼저 내리는 선택은 경찰에 성폭행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다. 기겁하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경찰하고 엮이기 싫어. 이 얼간이 때문에. (‘연쇄살인범의 딸’이라는 오명 때문에) 내 인생을 재건하려고 정말 힘들게 싸웠어.” 그리고 덧붙인다. “미친놈은 잡아야지. 미친놈 해결하는 건 내 전공이야.” 그렇게 미쉘은 시스템보다 손도끼와 스프레이의 힘을 더 신뢰하는 여자다. 그 선택이 때로는 비윤리적이고 상식과 동떨어져있다 해도, 중요한 건 그녀가 마지막 순간까지 자기 자신이길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임을 깨부수고 변화시키는 것”이 가장 재미있는 일이라 믿는 폴 버호벤의 고약한 취향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다. 성모상을 옮기는 옆집 남자를 창문으로 엿보며 자위를 하고, 성폭행범이 밝혀진 뒤에도 그와 은밀한 게임을 벌이며 사도마조히즘적인 욕망을 펼쳐 보이는 이 여자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금기시되는 상황을 극단적으로 펼쳐 보이며 관객을 난감한 상황으로 밀어 넣는 폴 버호벤의 장기는 이번 영화에서도 여전하다. 미쉘로 분한 이자벨 위페르의 연기는 그녀의 근작 가운데서도 최고다. “이처럼 변태성을 탐험하는 작업을 하려면, 기쁨과 창의성을 가지고 (감독과) 저 멀리까지 함께 갈 수 있는 배우가 필요하다. 세상에서 이런 악보에 장단을 맞출 수 있는 배우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평처럼, 이자벨 위페르는 스릴러와 블랙코미디를 오가며, 냉철한 커리어우먼과 비밀스러운 욕망을 지닌 여성을 넘나들며 폴 버호벤의 변화무쌍한 장단에 기꺼이 ‘놀아’난다. 비틀린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 엘르 >의 미쉘은 역시 그녀가 주연을 맡았던 < 피아니스트 >의 에리카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도 있는데, 하네케의 영화가 에리카를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한다면 버호벤의 <엘르>는 욕망의 주체로서의 미쉘에 보다 초점을 맞추는 느낌이다. 한편 < 엘르 >는 게임의 규칙을 아는 이들만이 헤아릴 수 있는 은밀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영화다. 미쉘과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빠르게 습득한 뒤, 그녀가 매 순간마다 각기 다른 인물들과 나누는 시선의 교환을 좇는 재미가 이 영화엔 있다. 특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초대로 한자리에 모이는 크리스마스 파티 장면이 압권이다. 이 부르주아들은 점잖게 차려입고 샴페인 잔을 부딪히지만, 영화를 보는 모든 관객들은 이미 알고 있다. 이들의 정체가 불륜남, 얼뜨기, (아마도) 강간범-정체가 밝혀지기 전이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 우스꽝스러운 난장의 한복판에서 오직 미쉘만이 고고하다. 파티의 기저에 은밀하게 흐르는 욕망과 비밀스럽게 구축된 관계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많이 알고 있는 그녀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각자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미쉘의 장단에 놀아난다. 이토록 야심만만하게 게임의 완전한 지배자가 되려 하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 때로는 괴물이 되기도 서슴지 않는 여성 캐릭터를 또 언제 만나볼 수 있을까. 폴 버호벤의 다음 영화는 < 블랙북 >과 <엘르>만큼이나 간극이 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올해는 내게 충만한 한 해였다. 좋은 영화를 많이 볼 수 있었다. 만일 연도를 가리지 않고 뽑아도 괜찮다면 가장 좋은 영화는 피터 와킨스의 <레산; 여행>이었다. 이 전설적인 영화를 풍문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마침내 리스본 다큐영화제에서 피터 와킨스의 회고전을 하면서 볼 수 있었다. 사사로운 리스트가 요구하는 명단에로 한정한다면 폴 버호벤의 < 엘르 >가 압도적이었다. 이자벨 위페르는 여기서 그녀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최상의 연기를 보여준다. 폴 버호벤은 이 희생자를 괴물처럼 다룬다. 약간 방향을 달리해서 올해의 괴작은 마렌 아데의 < 토니 에드만 >이다. 시종일관 웃기지만 무언가 이 새로운 이름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인물을 찌그러트리면서 거의 괴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연출을 과시하기 시작한다. 아마 이 영화에 대해서는 긴 글을 쓴 자리가 있을 것이다. 켈리 레이차즈는 기복이 심하지만 이번에는 걸작을 찍었다. 마찬가지로 짐 자무쉬는 자신이 존경한다고 늘 말하던 오즈 야스지로와 허우 샤오시엔으로 이어지는 어떤 선(線)을 따라가는 것만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 패터슨 >은 오로지 리듬뿐인 영화이다. 사건도 달리 없고 그저 하루 일과만이 반복해서 진행된다. 그러면서 포스트 사이키델릭 시네마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놓는다. 몇몇 순간은 거의 홀린 듯한 지경으로 몽환적이다. < 데드 맨 >이후의 걸작임에 틀림없다. 생각지 않았던 올해의 발견은 클레버 멘돈사 필로이다. < 아쿠아리우스 >는 21세기 정치영화의 새로운 모델이 될 것이다. 올해 왕빙은 두 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하나는 미얀마 국경 근처의 정글에서 찍었고(< 타앙 >) 다른 하나는 상하이에서 찍었다. (<고전>) 두 편 모두 각자의 장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명이 어떻게 부서져 가고 또 거기서 어떻게 견디는지를 바라본다. 그런데 뭐랄까, 여기에는 단지 고통을 찍었다는 것 이상의 이상한 순간과 마주하게 만드는 쇼트가 등장한다. 두 편은 각자 다른 의미에서 굉장하다. <타앙>은 기이하게도 어느 순간 전혀 의도치 않았는데도 인물들을 바라보면서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과 마주대하게 되고(이를테면 끝날 것 같지 않은 밤 장면들) <고전>은 똑같은 의미에서 기이하게도 어느 순간 전혀 의도치 않았는데도(이를테면 왕빙 영화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결말) 산문적인 드라마의 네트워크로 인물들을 동여매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왕빙은 세상 안으로 들어가는 두 개의 길을 보여준다. 완전히 반대의 영화. 두 영화는 반드시 동시에 보아야 한다. 그리고 < 설리 >가 있다. 이 영화는 긴 토론이 필요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상한 방식으로 도널드 트럼프를 지지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래서 몹시 거북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비행기가 허드슨 강에 추락하자 그때부터 진행되는 (구조선과 헬리콥터와 승무원들이 아니라!) 일사불란한 쇼트의 진행과 동선의 우아함은 근래 본 영화 중에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트리우마처럼 그 앞에 세월호의 잔영이 떠오른다. 내가 한 사람의 영화평론가이지만 동시에 영화 앞에서 남한의 시민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는 사실이 일깨워질 때 (어떻게 그 둘을 완전하게 분리할 수 있을까) 영화를 보는 경험은 어쩔 수 없이 고통스러워진다. 그러므로 <설리>에 대해서 내가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반대로 완전히 사사로운 의미에서 이 명단을 샹탈 아커만 없이 끝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는 마치 유언과 같은 영화를 찍었다. 그저 몹시 심한 바람에 흔들리는 가냘픈 가지를 보는 첫 장면만으로도 이 영화를 이미 굉장하다. 나는 <잔느 딜망>을 처음 본 날의 쇼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 영화를 만든 사람이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너무 가슴 아팠다. 나는 내 마음을 기록하기 위해 여기에 그녀를 위한 자리를 마련한다. 자, 이제 한 편의 영화를 말해야 할 차례이다. 그 자리에 < 루이 14세의 죽음 >을 남겨놓은 것은 알베르 세라 때문이 아니라 장-피에르 레오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를 뮌헨에서 보았는데 그 자리에 알베르 세라가 왔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예의 광대에 가까운 복장을 하고 무더운 여름에도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타나서 자신의 영화와는 반대로 수다쟁이처럼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칸 영화제에서 처음 상영되었을 때는 장-피에르 레오 때문에 극장 안이 꽉 찼어요. 그런데 뭐, 보시면 아시겠지만 화면 전체가 내내 어두워서 얼굴도 잘 보이지 않을 거예요. 시작하고 나서 10분이 지나서 줄을 지어 나가기 시작했죠, 다행한 건 영화가 짧아서 관객들이 극장에서 다 나가기 전에 끝났다는 거죠. 두 번째 상영 때는 이 소문이 이미 칸에 모두 퍼져서 절반 조금 넘는 관객이 왔을 뿐이지만 각오를 한 표정들이었죠, 사람들이 나가지는 않았지만 대부분 잠들어서 끝나고 극장에 불이 켜지자 다들 깜짝 놀라서 깨어났죠, 하여튼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이 영화는 어떻게 다가가도 즐거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건 죽어가는 시간을 찍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루이 14세는 당뇨가 심각한 수준으로 진행되어 커다란 침대에 누워있을 뿐이며 시종일관 이 침대가 놓여있는 방에서 진행된다. 살아생전 태양왕이라고 불리던 사람. 어둠 속에 누워있는 태양. 거의 꺼져가고 있는 듯한 태양. 이야기는 루이 14세가 죽기 전 21일의 시간이 전부이다. 알베르 세라의 말처럼 어두컴컴한 촛불 조명 아래에서 마치 실내극처럼 펼쳐지고 거기 장-피에르 레오가 누워있다. 76세에 그의 생명을 다한 루이 14세를 이제 71살이 된 장-피에르 레오가 그 침대에 누워 대신하는 중이다. 고정되어 있는 4대의 카메라가 각자의 방식으로 동시에 촬영을 하고 있으며 어느 장면을 선택할지 알 수 없는 배우들은 카메라 앞에서 그저 각자의 동선을 따라 움직일 뿐이다. 알베르 세라는 영리하게 각자의 카메라를 각자의 맥락으로 배치하였다. 그래서 하나의 영화 안에서 4개의 서로 다른 성질의 쇼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가 이 네 가지 성질에 대해서 설명을 시작하면 이 글은 완전히 다른 성격의 글이 될 것이다. 이미 말했지만 나는 장-피에르 레오를 말하고 싶어서 이 영화를 선택했다. < 루이 14세의 죽음 >은 긴 설명을 요구하는 영화이다. 여기서 내 임무는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이 아니다. 사사로운, 이라는 단서를 떠올려주기 바란다. 한 해를 결산하면서 이 영화 앞에서 문득 이상하리만치 올해 자주 마주친 장-피에르 레오를 생각하고 싶어졌다. 좀 이상한 말이지만 이 배우를 볼 때마다 나는 한 연기자의 경력을 본다기보다는 영화에 관한 어떤 연대기를 보는 느낌을 받곤 한다. 프랑소와 트뤼포, 장-뤽 고다르, 자크 리베트,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 베르날도 베르톨루치,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 장 외스타슈, 올리비에 아사이야스, 아키 카우리스마키, 차이밍량, 베르트랑 보넬로, 그리고 이제 알베르 세라. 마치 그들 사이에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것처럼 이어지는 이름들. 물론 배우는 어떤 감독의 영화에 나와도 괜찮다. 어쩌면 그것은 배우의 특권이다. 하지만 이들 사이를 하나의 가족처럼 묶어내는 이름으로서의 장-피에르 레오는 명단을 써나가다 말고 무언가 기괴한 기분에 사로잡히게 만든다. 이때 그 명단을 열거하는 것은 내가 본 영화들의 제목을 주마등처럼 돌려보는 것이기도 하다. <400번의 구타>(1959)와 <루이 14세의 죽음>(2016)의 장-피에르 레오 내가 여기서 말하려는 영화는 세 편의 레오 주연의 작품이다. 올해 봄에 오랜만에 <400번의 구타>를 다시 보게 되었다. 아마 21세기 들어서 이 영화를 처음 보게 된 것 같다. 생각해보니 디지털 버전으로는 처음 본 것이다. 나는 오랜만에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하지만 기이할 정도로 나를 사로잡은 것은 장-피에르 레오의 존재감이었다. 추운 겨울의 파리를 싸돌아다니는 어린 장-피에르 레오를 대상으로 트뤼포는 마치 장 루쉬가 여름에 찍은 것을 겨울에 다시 한번 더 찍었다는 인상을 안겨주었다.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잘 몰랐지만 장-피에르 레오는 몇 가지 독특한 제스처를 평생 동안 변치 않고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스처는 마치 내면의 터치처럼 감정을 투명하게 만드는 표정이 되었다. 그는 그것을 트뤼포의 연기 지도로 해낸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본래의 것이었음을 스스로 평생에 걸친 육체를 통해서 증명해낸 것이다. 나는 영화를 순서대로 보지 못하고 그런 다음 < 루이 14세의 죽음 >을 보았다. 11살 소년을 본 다음 71살이 된 장-피에르 레오를 보게 되었을 때 거기에서 단지 세월이 보인다는 상투적인 표현보다는 차라리 손자를 만난 다음 그 할아버지를 본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둘이 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때 기억은 알 수 없는 불길한 유혹이 된다. 멋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필모그래피. 이때 나는 마지막에 달려있는 그래피, 라는 말을 생각한다. 갑자기 거기 서명하기라도 한 듯한 기록들. 그 행간에서 나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영화가 그렇기 때문에 느껴지는 어떤 유령을 대면하는 것만 같은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시간 감각. 나는 분명히 루이 14세의 어떤 제스처에서 앙또완 드와넬에서 이미 본 어떤 동작을 보았다. 알베르 세라는 그것을 통제하지 않았다. 아마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예민한 미술비평가가 이런 디테일을 놓쳤을 리가 없다. 게다가 <루이 14세의 죽음>에는 카메라의 이동이 없다. 완전히 멈춰 선 카메라. 그러므로 화면에서 볼만한 것이라곤 촛불 불빛 아래 죽어가는 연기를 하는 장-피에르 레오가 전부이다. 장-피에르 레오가 1959년에 찍은 첫 번째 영화와 2016년에 찍은 최근의 영화가 겹쳐질 때, 그래서 하나가 나가고 다른 하나가 들어올 때, 마치 그 둘이 각자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나타났을 때, 촛불은 어떤 주문처럼 일렁거리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 과도하게 의미를 만들어내고 싶지 않다. 그 대신 세 번째 영화를 말하려고 한다. 그런 다음 한여름에 프랑수아 트뤼포 회고전이 영상자료원에서 진행되면서 <두 명의 영국 여인과 유럽대륙>의 토크를 진행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의 핵심은 그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이 영화에 관한 정보가 1시간 48분이었는데 정작 영화를 보니 2시간 11분 판본이었다. 나는 이 영화를 프랑스문화원에서 처음 본 이후 언제나 망설이지 않고 트뤼포의 최고걸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파리 흥행에서 실패한 이후 트뤼포는 자기 손으로 단축 판을 만들었고 그것이 공식적인 상영 본이 되었다. 그래서 원래의 판본이 언제나 궁금했다. 나는 그걸 올해 비로소 본 것이다. 그것도 전혀 기대하지 않고 그저 보면서 내가 전에 본 것과 무언가 이상하게 다른 걸, 하면서 중얼거리다가 끝난 다음에 시계를 보고서야 비로소 원래의 판본을 보았다는 사실에 완전히 흥분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때 이 영화에서 장-피에르 레오는 빛나는 청춘이었다. 죽어가는 노인 장-피에르 레오가 마치 단숨에 청년에로 되돌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내 앞에 다시 나타나서 약간 수줍은 듯한 얼굴로 인사를 할 때 알 수 없는 안도의 한숨을 쉰 것은 오로지 나만의 이상한 여행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올해 영화를 따라서 여행을 했다. 아마 내년에는 내 영화를 들고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나 자신과의 맹세이다. 그랬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