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FA컬렉션] 영화제작자 이재명 컬렉션
- 제작년도
- 2022
1967년 홍콩 쇼브라더스의 <대취협>(호금전)이 한국 시장에 처음 등장했을 때 이 새로운 ‘장르’ 영화가 이후 한국에 미칠 막강한 영향력을 예상했던 자는 거의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이 낯선 장르영화는 당시 한국 영화시장의 강력한 흥행 장르인 마카로니 웨스턴 풍의 제목을 빌려서야 이 시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셀지오 레오네의 A Fistful of Dollars(1964)가 ‘황야의 무법자’로 개봉, 대히트를 기록하며 불붙기 시작한 이 이탈리안 웨스턴들의 제목은 거개가 원제와 상관없이 황야, 석양, 결투, 무법자를 선호하곤 했다). 그리고 이 영화 <대취협>=< 방랑의 결투 >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상적 흥행기록’을 세웠다. 곧이어 쇼브라더스산 무협영화 세 편이 이 시장을 강타했다. 1968년 신필름이 수입한 <독비도>(장철, 한국 개봉제목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 <변성삼협>(장철, 한국 개봉제목 < 삼인의 협객 >), <금연자>(장철, 한국 개봉제목 < 심야의 결투 >)의 총 관객수는 무려 65만 명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중에서 단연 압권은 <독비도>였다. 홍콩영화 최초로 백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낸 이 영화는 1960년대 중반 ‘무협 신세기’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새로이 무협영화를 일신함으로써(모더나이제이션) 시장을 확대하고자 한(글로벌라이제이션) 쇼브라더스 ‘신파 무협영화’ 전략의 혁혁한 성과이자 1960, 70년대를 풍미한 한국의 수많은 신체상해 히어로의 액션활극이라고 할만한 것들에 강력한 영감의 기원이 되었다.(아마도 이 중 가장 ‘급진적’인 실천의 사례를 들자면 1969년에 발빠르게 만들어진 < 팔없는 검객 >(임원식)이 될 것이다. <독비도>의 내러티브를 고스란히 차용한 이 영화는 한쪽 팔이 아닌 양팔을 모두 잃고 입과 발가락으로 검을 휘두르는 주인공을 선보인다!) 또한 <독비도>의 외팔이 왕우는 한국 관객들을 열광시킨 최초의 홍콩 스타가 되었으며, 한국에서 홍콩영화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과 소비의 방식을 보여주는 첫 번째 이름이 되었다(그리고 알다시피 이 스타를 향한 열광은 홍콩영화의 장르 변천 속에서 이소룡, 성룡, 주윤발 등으로 이어질 터이다). 이 새로운 열광을 자국 내 영화로 흡수하고자 한 것은 당연한 일일 게다. 게다가 당시 ‘중국검객영화’ 혹은 ‘검객활극’이라고 불려졌던 이 장르영화는 자국 시장을 넘어서는 가능성으로 충만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이 영화들은 어떤 계층, 어떤 젠더, 어떤 세대, 즉 도시의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강력히 어필하는 것이자 이 지역 공통의 산업화 속에서 발생한 이 관객들은 국경을 넘어 이곳과 저곳에 모두 존재하고 있었다. 곧이어 어떤 한국영화들이 일시에 ‘검’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 쌍용검 >, < 비호 >, < 대검객 >, < 유랑의 검호 >, <신룡검객>, < 무정검 >, < 3인의 여겸객 >, < 괴도의 검 >, < 단장의 검 >, < 필살의 검 > < 팔도검객 >...... 리스트는 끝없이 이어진다. 임권택은 < 뢰검 >, < 월하의 검 >, < 비검 >, < 요검 >을 만들었다. 어떤 영화들은 단독으로 만들어졌고, 어떤 영화들은 홍콩 혹은 대만과 합작으로 만들어졌으며, 어떤 영화들은 한국 국적의 감독이나 배우를 빌미로 합작을 주장하였다. 어떤 영화들은 재편집과 한국어 더빙을 거쳐 합작영화라고 주장되었다. 이를테면 장철의 < 철수무정 >과 <십삼태보>(한국어 개봉제목 < 13인의 무사 >)는 한국어로 더빙되어 한국-홍콩 합작영화로 공개되었다. 당시 쇼브라더스 전속 감독이었던 정창화가 만든 < 아랑곡의 혈투 >는 그의 국적을 이유로 합작영화라고 소개되었다. 식자들은 근심과 탄식과 분노를 금치 못했다. 누군가는 “한결같이 잔혹성에 의한 쇼킹도”로 극장 가를 석권한 이 “국적도 고증도 없는 검객물”의 홍수를 한탄했으며, 누군가는 “관객들의 양식을 뒤집어 보게끔” 할만한 것이라고 아연실색했다. 누군가는 “한국 배우가 중국식 칼장난이나 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우리의 얼을 모독하는 무의미한 상행위”에 불과하다고 분노하였다. 요컨대 이 영화들은 도저한 내셔널 시네마의 담론 내에서 긍정되기 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너무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문제적이었다.(덧붙이자면 홍콩영화의 폭력성에 대한 이 식자들의 우환은 1990년대 초까지 줄기차게 반복될 터이다.) 1968년의 영화 <쌍용검>은 이 영화의 원작인 『정협지』까지를 포함하여 말하자면 ‘무협’이 어떻게 한국의 남성 하위문화에 기입되고 있는지, 한국영화에 도착한 트랜스내셔널한 실천의 양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먼저 김광주의 『정협지』. 김광주가 대만 작가 위지문(尉遲文)의 동시기 소설 『검해고홍 劍海孤鴻』을 번안한 이 소설은 1961년 경향신문에 연재된 이래 이 신문의 지가를 올렸으며 1963년 신태양사에서 출판되어 당대의 베스트셀러로 자리잡았다. 소설가이자 루쉰의 한국어 번역자였던 김광주가 어떻게 무협소설을 번안해오고 있는지 그 구체적 경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무협 장르가 가지고 있는 대중적 파급력에 그 누구보다 민감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김광주는 1920년대 중후반 상하이 문예비평계의 주류에서 활동하였다. 이 시기 상하이는 지난 글에서 다뤘던 바, 무협이 대중문화의 자원으로서 등장한 바로 그 시공간이기도 하다. 쇼브라더스가 그러한 것처럼(이 영화사의 전신인 천일영화사는 1920년대 후반 무협영화를 양산했던 상하이의 주요 프로덕션 중 하나였다) 김광주 또한 이 시기 무협에 대한 대중의 열광, 그 매혹의 한 가운데를 통과해갔다. 즉, 그는 이 장르의 효용성을 그 누구보다도 실감했던 자이다. 『정협지』가 누린 인기를 염두에 둔다면 무협영화의 저 붐 속에서 이 텍스트가 재빨리 불려져 나온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인다. 실제로 『정협지』의 영화화를 둘러싼 영화사들 간의 치열한 경합이 벌어졌다. 한국영화사의 이재명과 제일영화사의 홍성칠이 영화화 판권을 둘러싼 공방을 벌였는데, 한국의 김광주와 대만의 위지문, 한국 내 에이전트, 친우 등이 복잡하게 얽힌 이 공방은 흐지부지되었지만 그 와중에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제일영화사였다. 이 영화사는 홍콩의 옥련영화사와 손을 잡고 <쌍용검>과 또 한편의 김광주의 번안 무협소설 『비호』의 동명영화를 동시제작하였다. 이 영화들은 검술영화 열풍으로 달아오른 자국 시장 뿐 아니라 동남아 시장에도 예상대로 어필 가능하였다. 제일영화사는 1969년 한해에만 네 편의 합작 무협영화를 만들었으며, 이 해에 이 영화사의 수출액은 30만불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었다. 1968년의 전체 한국영화 수출액이 8만불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숫자의 크기가 얼마나 놀라운 것이었는지 짐작 가능하리라.(1969년의 한 영화잡지 기사는 대종상에 올해의 수출상이 있다면 이 영화사가 받아야 할 것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사례는 1970년대 횡행하게 될 한국과 홍콩과 대만과 여타 동남아시아 영세 영화제작자들의 합종연횡이라고 할만한 소위 ‘합작’의 계기들이 어떤 식으로 등장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거기에 외화수입 쿼터라는 정책이 마련해놓은 구조, 정기적으로 가해지는 홍콩산 무협영화의 수입규제 하에서 자국 영화로 카운트될 수 있는 합작은 충분히 선호될 만한 것이었다. 종종 그것이 소위 ‘위장합작’의 형태였다고 하더라도. 어쨌건 이제 막 이런 영화들에 호응하는 관객집단이 발견되었으며, 변두리 싸구려 극장에서 환호하는 이들을 통해 무협은 한국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화려하게 등극할 수 있었다. 무협이란 그리 오래된 단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단어는 동아시아 근대의 산물이다. 무(武)에 협(俠)이라는 오래된 개념을 조합시킨 최초의 인물은 일본의 초기 모험소설가인 오시카와 슌로로 알려져 있다. 오시카와 슌로는 1903년 『무협의 일본』이라는 소설을 발표하였고, 『무협세계』라는 소년잡지를 만들었다. 이 열렬한 ‘군인칙유’의 신봉자는 무(武)와 이미 무를 포함하고 있는 협(俠)을 겹쳐놓음으로써 근대 일본의 무력에 대한 강렬한 열망을 담아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 단어는 일본 내에서 정착되지 못했으며, 일본의 중국인 유학생들에 의해 중국으로 전파되어간 이래 전술한 것처럼 1920년대 중반 상하이라는 장소에서 드디어 강력한 대중문화의 이디엄으로 기입되었다. 일본에서 이 단어는 1970년대 이전까지 거의 쓰이지 않았다. 왜 이 조어는 일본이 아닌 근대 중국에서 정착할 수 있었는가? 무가 말 그대로 무력을 뜻하는 것이라면, 협은 이보다 좀더 복잡한 정의를 필요로 한다. 이 오래된 개념은 한비자에 의해 가장 처음 정식화되었다. 그에 따르면 협(俠)은 무로써 禁(法)을 범하는 것이다(俠以武犯禁). 법가 한비자에게 이 개념은 두 가지 점에서 부정적인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협객이란 현존하는 법질서를 깨고 자신들만의 룰로 움직이는 도당의 무리이기 때문에 그렇다(『수호지』의 양산박을 떠올려보라). 이 개념에 의(義)를 개입시킴으로써 정치적 의제로 이동시켜온 것은 사마천이었다. 사마천은 「유협열전」에서 “무로써 법을 범하고 권위를 무시하지만 언신행과(言信行果)의 행동규범에 입각하여 약자와 액곤(厄困)한 자를 도와줌에 있어서는 자신의 생사를 돌보지 않는’ 자의 속성으로 이를 정의내림으로써 협을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전화시키고자 했다.(『사기』) 그러나 유협의 유(游)와 자객의 객(客)이라는 명칭이 이미 보여주듯 시스템 바깥의 행위자들에 의한 시스템의 파괴라는 의미에서 여전히 협은 잠재적으로 위험한 개념이다. 즉, 현존 법질서를 초과하는 폭력으로서 협에는 언제나 법정립적 폭력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제국의 패권적 질서를 위한 강력한 무력을 상정하는 일본이 아닌 반(半)식민지 중국에서 힘(武)을 통해 이 상황을 깰 수 있는 협에 대한 상상은 보다 적극적으로 개진될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무협의 핵심 공간은 현실 세계의 법과 무관한 강호-무림의 세계이다. 이 상상적 세계란 1920년대 근대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국에서 발견된 판타지 공간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마도 협이 내포하고 있는 어떠 시스템의 파괴, 폭력의 가능성이야말로 무협영화가 1960년대 홍콩에서 홍콩영화 최초의 영컬처로서 재등장하고, 나아가 한국과 같은 장소에서 이제 막 하나의 관객층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젊은 하위계층 남성들에게 그토록 어필할 수 있었던 이유일 것이다. 또한 이 지점이야말로 이 영화들에 쏟아졌던 저 식자들의 우환의 진짜 이유인지도 모른다. 홍콩에서 무협영화는 그 장르적 후신으로 1970년대 초 맨몸의 싸우는 영화, 이후 ‘쿵푸영화’로 이름붙여질 영화로 옮겨갔다. 홍콩영화의 장르 변동과 민감하게 연루되어 있던 한국의 어떤 영화들은 검술영화에서 권격영화, 당시 용어로는 ‘태권도 영화’로 이름붙여질 장르로 넘어갔다. 이제 유신 시대 한국의 변두리 극장에서는 정책과 장사꾼들과 특정 관객들의 욕망이 단단하게 엉킨 채로 소위 위장합작의 복마전이 펼쳐질 터이다. 다음에는 여기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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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은 아니었다. 남성처럼 호방하고 활달했지만 달필에다 의외로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남옥 (朴南玉) 감독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내가 박 감독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4월 20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현목 감독의 소개로 서울 서대문 화양극장 뒤쪽에 있는 한 경양식집에서였다. 나는 그때 <일간 스포츠>의 청탁을 받고 기획 연재물 ‘인물영화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박 감독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관련 자료가 빈약해 일차 집필 대상에는 빼놓은 상태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미국에 살고 있던 그가 잠시 귀국했던 것이다. 만나고 헤어진 지 5일쯤 지났을까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엷은 미농지 넉 장에 볼펜으로 쓴 달필의 편지에는 추가 내용과 함께 간곡한 부탁이 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표현대로 ‘일제(日帝) 교육 덕에 철자법’이 틀리긴 했지만 주요한 부분에는 삼각표시(△)를 하는 등 인상과는 달리 매우 꼼꼼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그가 광복 전 세운 투포환 한국 신기록 수립 연도를 재확인하면서 광복 후는 백옥자지만 광복 전은 박남옥 이라고 기재하거나, 집필에 참고가 될 만한 자신의 과거사 게재 잡지<신여원>를 알려 주었다. 심지어 데뷔작 < 미망인 >의 스틸까지 지정하고, 이혼한 남편(방송연출가 이보라 )에 대한 얘기는 되도록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리어카 이동차’를 탄 사진은 흥행 가치가 없으니 내지 마세요 하거나, 제7회(1960년) 동경 아시아영화제 때 일본배우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스냅 사진에 대해서는 “멋은 있어도 좀 건방질까?” 이렇게 타진하는 식이었다. 1955년은 6.25전쟁 복구와 함께 영화행정 업무가 국방부에서 문교부로 이관되고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흥행에 크게 성공해 국산영화가 기업의 기틀을 마련한 해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부터 활약해온 배우 이금룡이 별세하고 그를 기리는 최초의 민간 영화상인 금룡상(錦龍賞)이 제정돼 시상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이 탄생했다. 그의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이보라 원작 각본 < 미망인 >은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박남옥 감독은 1923년 2월 24일 경북 경산군에서 섬유업을 하는 박씨 집안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해 초등학교 때 이미 도대회에 선발될만큼 운동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선지 경북여고 재학 중일때 단거리 달리기와 높이뛰기 선수로 뽑혀 경기에 나가 입상했고, 1939년 제2회부터 41년까지 투포환 선수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에 참가해 3년 연속 우승, 한국최고기록을 보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반면 미술과 문학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었다. 3학년 무렵 그는 최인규 감독의 < 집없는 천사 >(1941)를 보고 꽃 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 에게 반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장차 화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희망과는 달리 집안의 압력에 굴복해 미술이 아닌 가정과에 진학하게 된다. 광복 전인 1943년이었다. 정작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화여전(梨花女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헌책방을 뒤지거나 영화를 보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기숙사감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이 무렵 그는 성장기 여학생들의 감성을 다룬 <제복의 처녀>(레온티에 사간, 1931)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 < 민족의 제전 >(1936)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그가 이 영화를 각별히 좋아하게 된 이유는 두 편 다 여자가 연출했다는 점이었다. 박 감독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맞서 가정과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일일신문의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여기서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2년도 안 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영화의 길에 들어선다. 첫발을 내디딘 곳이 조선영화사(사장 이재명 ) 광희동 촬영소였다. 그는 거기서 뉴스 편집 일을 거들며 최인규 감독의 < 자유만세 >, 이규환 감독의 < 똘똘이의 모험 >과 < 민족의 새벽 >(이상, 1946)의 편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최은희 를 데뷔시킨 신경균 감독의 < 새로운 맹세 >(1946)의 스크립터 일을 맡게 된다. 50년 초여름 박남옥 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으로 선을 보러 갔다가 6.25전쟁을 겪는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했다. 그가 방송극작가 조남사 의 소개로 방송극 연출가인 이보라 (李保羅)와 백년해로를 기약한 것은 1954년 서른세 살 때인 부산에서였다. 9.28수복 후 관훈동 종로학원 자리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딸 경주를 낳았다. 그가 언니 돈까지 끌어들여 제작한 < 미망인 >은 낳은 지 두 달도 안 된 딸을 들쳐업고 찍은 영화였다. 20여명의 스태프에게 밥을 해먹이고 리어카 이동차에 올라 앉아 고무신 차림으로 레디고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4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참패로 끝났다. 게다가 결혼생활마저 순탄치 못했다. 심한 성격 차이로 남편과도 3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6년이었다. 영화 실패와 파경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낀 박 감독은 <시네마 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스크린 대신 활자로 승부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제3자에게 판권을 넘기고 57년 둘째 형부 김상문(金相文)이 운영하는 동아출판사에 들어갔다. 78년 퇴사할 때까지 21년 동안 관리과장으로 근무했다. 2년 뒤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공부하다가 UCLA 디자인과를 나온 딸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박남옥 감독은 소주 2~3병은 눈 깜짝할 새에 마시는 주량과 ‘골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다. 또한 웬만한 권투 중계 프로는 놓치지 않았던 복싱 팬이기도 했다. 나는 박 감독과 만나기 전에 그의 남편이었던 이보라 선생을 먼저 알았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사이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의 ‘갈채다방’과 기독교방송국이 있던 종로 2가의 ‘시온다방’ 시절이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미소 머금은 모습으로 나타나 주태익 , 조남사 등 주로 방송극작가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라는 염려가 먼저 들 때가 있다. 치코, 하포, 그루초 마르크스 삼형제의 난동극에 가까운 < 오페라의 밤 >을 처음 보았을 때는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부글부글 거리더니 점점 넘쳐나기 시작한다. 나중에는 급기야 걷잡을 수 없게 넘쳐날 때 그걸 가로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하스미 시게히코는 마치 햄릿 같은 말투로 기꺼이 찬사를 바쳤다. B급인가, 아방가르드인가, 여기서 영화의 장치들이 고스란히 창자를 내보인다. 하지만 이걸 보고 심미주의를 느끼는 자들만이 천국에 들어설 것이다. 아아, 천국이라니. 착란과도 같은 반란. 유희와도 같은 실험. 하지만 나는 이런 영화들을 너무 빨리 보기 시작했다. 이런 과잉의 영화들의 계보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정말 미친 듯이 찾아보기 시작했다. 만찬의 영화. 그런데 그 만찬은 (롤링 스톤즈의 앨범 제목을 빌려 부르자면) ‘거지들의 만찬’(Beggar’s Banquet)이다. 나는 이 행복한 표현을 긍정의 의미로 사용하는 중이다. 영화의 운동에 부여한 난처하리만큼 불편한 포만감. 갑자기 화면은 일시적으로 두뇌의 활동을 정지하고 육신과 감각, 팔과 반경거리, 사방을 둘러보는 눈, 허우적거리는 동선,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발과 제한적인 공간, 그 안에서 영화의 모든 기호가 결국 주어진 세계-내-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게 만들고야 만다. 그런 다음 카오스가 기다리고 있다. 마치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할 때 그들이 쓰러트리는 것은 반대로 점점 더 속도를 더해간다. 여기서는 오로지 영화가 허용한 모든 것을 현실에서야 어찌되었건 잠시뿐 일지라도 법칙을 무시하고서라도 허용한다. 영화만의 선언. 말 그대로 이 안으로 들어오면 위반을 긍정한다. 영화는 세계와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바깥으로 나가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해진다. 종종 이 결정이 영화를 우스꽝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해버리는 영화들이 있다. 그래서 세계를 비현실로 만들어버릴 때 갑자기 세계 자체가 영화라는 이미지가 되어버린다. 여기서는 몸으로 버텨야 한다. 물론 모든 희극영화들은 폭력 안에서의 웃음이다. 버스터 키튼의 필사적인 질주. 찰리 채플린의 곡예와도 같은 방어술. 웃음이 아니라면 이들의 악전고투를 차마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두 개의 전통으로부터 톱니바퀴처럼 갈려 나온 서로 다른 운동의 수없는 변주들. 하지만 토키영화가 시작하자 영화 안에서의 기계적인 활동들은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만 같았다. 대신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영화 안의 기호들로 이루어진 서로 다른 차원의 이미지의 행성들은 안정을 얻는 것처럼 서서히 자기 자리를 잡으려 들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들이 나타났다. 닥치는 대로 열거하자면 그 중에는 프랭크 타쉬린(과 제리 루이스), 스즈키 세이준, 러스 메이어, 로저 코먼, 존 워터스, 그리고 (....)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들은 희극의 장르 안에서도 좀 특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 신세 좀 지자구요 >는 거의 아슬아슬하게 그 전통의 자락에 기대어 선 영화이다. 나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 갑자기 임권택 이 이 계보에 합류하게 되었는지 잘 설명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이전에 그런 영화를 만든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기에 오랫동안 머문 것도 아니다. 그는 잠깐 동안, 정말 잠깐 동안 머문 다음 재빨리 빠져나갔다. 1969년을 임권택은 그 자신이 막다른 골목에 몰린 시기라고 설명하곤 했다. 하지만 반대로 나는 이 시기에서 갑자기 임권택의 영화들이 자유로워졌다는 인상을 받곤 한다. < 몽녀 >의 몽환적인 산책. < 황야의 독수리 >의 무국적 풍경. < 속눈썹이 긴 여자 >의 조명이 넘쳐나는 실내.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에서 보여준 상실의 멜랑꼴리. 그리고 < 둘째 어머니 >의 황당무계할 정도로 긴 마지막 시퀀스. <신세 좀 지자구요>는 이 사이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사라진 칸막이들. 고정적인 문법을 따른 안정된 선을 버리고 갑자기 생겨난 쇼트의 난반사들. 무언가 길을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새로운 습관들. 나는 여기서 임권택의 이전 장면들에선 본 적이 없는 영화적 습관을 발견하곤 한다. 나는 지금 그걸 이 시기의 영화를 건드릴 때마다 일일이 열거하는 중이다. 물론 그때 임권택은 주어진 상속의 전통 바깥으로 나가면서 갑자기 자신이 전락했다는 느낌을 받았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시장에서 점점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과정의 끝에 가 불현듯 나타났다는 것을 셈에 포함시켜야 한다. 구先生 미셸 시몽, 시인 천상병 처음 < 신세 좀 지자구요 >를 보았을 때는 종잡을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주인공 구先生은 임권택 의 영화중에서 가장 이상한 인물이다. 어쩌면 한국영화 속에서 다시 만나기 힘든 주인공이다. 구태여 다시 한 번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나는 이런 인물을 미셀 시몽의 천의무봉에서나 찾을 수 있다. 장 르누아르의 < 물에서 건진 부뒤 씨 >와 장 비고의 < 라탈랑트 >에서 거의 같은 역할을 해낸 이 이상한 인물. 선과 악의 경계 바깥에서 종잡을 수 없게 살아가는 사람. 장 조레스가 암살당하고 인민해방 전선이 실패로 돌아간 다음 나타난 무정부주의적인 삶을 구가했던 이상한 보헤미안들. 구태여 여기에 더해야 한다면 (자끄 타티가 만들어낸) 윌로 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정치적으로는 의미가 다르다) 이런 주인공을 떠올린 이유가 있다. 난처한 주인공, 번번이 추적의 선을 끊어버리는 것만 같은 행각.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게 마치 자기 법칙이 있다는 듯 이리저리 옮겨간다. 나는 자료를 뒤져야했다, 그리고 미처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레카. 이제는 알겠다. <신세 좀 지자구요>의 주인공 구先生의 모델은 시인 천상병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이 성립된다. 아마도 시인 중의 시인, 그 스스로 시인의 삶을 살아간 마치 봉황의 깃털과도 같았던 사람. 누군가에게 배우기도 전에 처음부터 그가 시를 쓰면 읽는 사람을 움직였다. 김춘수 시인에게 발견된 재능. <신세 좀 지자구요>를 둘러싸고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설명을 읽기 전에 불행했던 시인 천상병의 위대하고 가냘픈 시를 먼저 읽어주기 바란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 영화의 원작이었던 문화방송 드라마 <불청객>을 보지 못했다. 이 드라마는 친구들 집을 아무 거리낌 없이 동가식서가숙했던 천상병 시인의 기인 행각을 보면서 소재 삼아 그의 친구 중의 한 사람이자 극작가였던 신봉승 이 대본을 썼고 1966년에 방영되어 그해 가장 인기 있는 드라마의 한 편이 되었다. 나는 원래 드라마에 천상병 시인의 삶의 향기가 얼마나 배어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신봉승의 인터뷰에 따르면 거의 대부분 자신과 친구들이 겪었던 이야기로 매회를 이어갔다고 한다. 그 후 <방 좀 빌립시다>로 준비되었던 이 영화는 <신세 좀 지자구요>로 제목이 바뀌어서 삼 년 후에 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작 드라마 각본을 영화를 위해서 신본승 자신이 각색을 했는데 이상하게도 구先生이 시인이라는 설정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처음부터, 그러니까 드라마 대본에서부터 없었던 것일까) 다만 고향에서 올라온 갈데없는 독신 중년으로만 소개하고 있다. 구先生은 계속해서 언젠가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고향에 돌아갈 생각이며 (그러므로 영화의 엔딩은 구先生이 고향에 내려가는 것으로 끝난다) 거기서 잘못된 사랑을 했으니 이제는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 한다. 하지만 그가 어떤 잘못된 사랑을 했는지, 왜 그는 고향을 떠나야만 했는지, 그리고 여기서 다시 삶을 살아볼 생각을 왜 하지 않는지, 아무리 기다려도 끝날 때까지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심지어 나중에는 이 모든 고백이 거짓된 핑계가 아닐까, 라는 생각마저 들 정도이다. 어쩌면 구봉서 가 연기하는 구先生의 어디에서도 시인 천상병의 그림자 자락을 붙들지 않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구봉서가 훌륭한 희극 연기의 대가이기는 하지만 여기서 그는 천상병의 천의무봉한 자유와 거의 사회적으로 파문당하기 직전까지 몰렸을 때조차 거기서 재난에 가까운 사건 사이를 가볍게 지나쳐가면서 그 모든 것이 우리 모두의 상상을 뛰어넘는 시적인 사유의 행위라는 것을 펼쳐 보이지 못한다. 그저 과장된 개그의 제스처, 우스꽝스러운 표정. 그러나 천상병 시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1967년 7월 14일 ( 윤이상 , 이응로를 간첩으로 몰아붙인) 동백림 (북한 대남공작단)사건에 연루되어 중앙정보부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다음 세상에 돌아와 ‘그 날은 새’라는 시를 썼다. 고문 후유증으로 내내 고통을 받았고 1971년에는 행적이 묘연해지자 동료 문인들이 유고시집을 발간했지만 길거리에 쓰러져 행려 취급을 받고 서울시립병원 정신병동에 갇혀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가까스로 다시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러면서도 시인 천상병은 무거운 가난을 등에 짊어지고 계속해서 자신이 새가 되고 싶다는 시를 썼다. (시집 “새”) 세상이라는 도면에 대한 서로 다른 관측법. 누군가는 그걸 그 안에서 두리번거리며 바라볼 때 누군가는 상공비행해서 내려다 볼 것이다. 아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무언가 여기에는 신비로운 모험이 사라져버렸다. 구先生의 기행은 드라마 안에서 시종일관 전혀 설득되지 않으며 그러면서 점점 더 기괴해져가기만 한다. 무엇보다도 구先生에게서 세속 바깥에서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의지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는 다른 목적을 지닌 삶, 거기서 그를 비루한 현실 속에서조차 구해내는 고귀한 목표의 겸손함, 그때 어떤 수단도 그를 굴복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지 못한다. 나는 그게 신봉승이 (어떤 이유에서) 포기해버린 것인지, 아니면 임권택이 삭제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다만 여기 남아있는 것은 구先生의 기행 뒤에 숨겨져 있는 고독함뿐이다. 어쩌면 천상병 시인의 기인과도 같은 삶은 결국 고독함이라고 이해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구先生이 마담과 함께 한밤중에 데이트하는 장면의 우울함은 갑자기 이 희극 영화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오는 것만 같은 속도로 바뀐다. 종종 전체적인 균형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만 같은 이 영화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간단하게 무시하면서 지나치지 못하는 것은 이런 씬에서 무언가 사무치는 것만 같은 정서가 거의 유령처럼 출몰한 다음 수없이 부스러기처럼 잘게 쪼개져버린 이 세계의 한 순간을 멈춰 세우기 때문이다. 이재명(우)과 아내(좌) 구先生과 마담 보영 세진 먼저 KMDb 에 소개된 줄거리의 정정. “ 구봉서 와 김희갑 은 절친한 사이다. 그래서 갈 곳이 없는 봉서는 희갑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다. 그러자니 자연히 희갑의 부부간에는 싸움이 자주 일어난다. 그때마다 봉서가 화해시킨다. 어느 날 봉서가 산 복권이 당첨이 된다. 그리하여 봉서는 희갑의 어려운 사정들을 해결해 주고 남은 돈을 가지고 고향으로 간다.” ( https://www.kmdb.or.kr/db/kor/detail/movie/K/02010 ) 구봉서와 김희갑이 절친한 친구 사이로 나오는 건 사실이고 그 집에 머무는 것도 맞지만 그런 다음은 영화와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할 수 없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복기할 수밖에 없다. 지방에서 올라온 구先生(구봉서)은 누군가의 집에서 쫓겨난 다음(영화의 첫 장면) 겨울 거리를 배회하다가 술집에서 옛 고향 고등학교 동창 이재명(김희갑)을 만난다. 갈 데 없는 구先生은 뻔뻔하게 이재명의 집에 쳐 들어와 방 한 칸을 차지하고 그냥 머물면서 아침 겸상에 용돈까지 받아 챙긴다. 이재명의 아내( 도금봉 )은 어이가 없지만 체면 때문에 참고 딸 보영( 전양자 )은 재미있게 생각하고 식모( 안인숙 )은 그저 어쩌지, 어쩌지, 할 뿐이다. 이재명은 감원 대상자 명단에 매번 자기가 속하면서 전전긍긍하는 중이고, 구先生은 낮에는 다방에 나가 마음에 둔 마담( 조미령 )과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고 밤이면 이재명의 집에 다시 쳐들어온다. 그런 와중에 구先生은 시종일관 사고만 치고 이재명 부부로서는 점점 참기 힘든 상태가 된다. (갑자기 여기서부터 인물관계가 뒤엉키기 시작하지만 정작 영화를 볼 때는 문제가 안 된다) 마침 딸 보영이 다니는 회사의 전무가 이재명이 다니는 회사 과장( 양훈 )의 아들( 이철 )이고 그는 이재명의 딸 보영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 과장의 아내와 계장( 서영춘 )까지 나서서 결혼을 재촉하지만 보영에게는 이미 마음을 둔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구先生 단골 다방의 마담의 아들 세진이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에게 딸을 줄 수 없다는 이재명 아내는 만일 청혼한 과장 집보다 혼처가 훌륭하다면 결혼을 승낙하겠다면서 부모 상견례를 하자고 제안한다. 마담은 구先生에게 하루만 성공한 남편 역할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여기에 과장집 식구들에 계장까지 모여 지켜보고 있다. 자, 여기까진 아무래도 좋다. 임권택 은 여기서 두 세계 사이에 모호하게 머문다. 하나는 세계 안에 머무는 영화이다. 모든 것은 세상의 법칙을 따르고 그 안에서 인물들은 반복적으로 고통 받고 점점 찌그러진다. 가장에게 끊임없는 감원의 협박. 근처에서 맴도는 가난. 회사 안의 위계질서에 따른 부당한 요구의 반복. 위협받는 순수한 사랑. < 신세 좀 지자구요 >의 인물들은 대부분 여기에 머문다. 다른 하나는 세계 곁에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거기서 세상의 법칙이 금지한 바깥으로 나와 만일 영화가 허용한다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 구先生의 탈선. 하지만 수 많은 사고를 만들어내도 그는 언제든지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법칙에 의해 항상 구원받는다. 문제는 두 영화가 하나의 세계 안에 공존할 때 생겨난다. (나는 두 세계가 하나의 영화 안에 공존한다, 고 쓰지 않았다) 기괴한 예. ( 서영춘 ) 계장은 ( 양훈 ) 과장과 아들 혼사 문제를 놓고 계획을 짜다 말고 갑자기 그 유명한 만담을 한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강에 가야 고기를 잡지,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컵이 없으면 못 마십니다, 돈 내고 돈 먹기, 시작해야 부자 되지 어서 어서 오세요...(그리고 한참 더)” 이 만담은 서영춘 이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백금녀 와 함께 이중창처럼 라임에 맞춰 노래하듯이 외우는 구절이며(그래서 이 만담이 시작되면 아이들은 합창하듯이 따라했다) 레코드로 출반되었을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신세 좀 지자구요>에는 백금녀가 출연하지 않아 서영춘 혼자 이 만담을 하는데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장기자랑이 마침내 시작해서 반갑기는 하지만) 너무 갑자기 등장해서 어리둥절해진다. 하지만 내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이때 ‘사이다 송’ 만담을 하는 서영춘의 얼굴을 극단적인 왜곡 상태로 만들어(fish_eye_wide_lens)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 씬은 누구라도 보는 사람을 꺼림칙하게 만든다. 우스꽝스럽기는커녕 무언가 잘못 작동되기 시작한 인형이 재롱의 동작을 취하면 취할수록 원래의 목표를 벗어나 제멋대로 움직이면서 이제는 수명이 다해버린 음울한 실체를 드러내는 것만 같은 인상을 자아낼 때 우리의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틀림없이 이 장면은 웃기 위해서 찍은 씬이다. 서영춘은 언제나처럼 약간 넋이 나간듯한 표정을 만든 다음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자기의 차례가 돌아오자 외운 것을 반복하는 기계처럼 구절을 반복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미 그 자체로 인격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의 모델이 된 채 추상화된 자동기계 인형이 된 서영춘을 다시 한 번 굴곡 된 이미지로 만들어버릴 때 거기엔 우리가 개입할 코믹한 환상의 여지가 사라진다. 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이때 내가 보는 것은 괴로운 현실과 더 괴로운 환상이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방식이다. 임권택은 희극이 고통으로부터 잠시 동안 우리를 구하는 것이라는 통념적인 생각과는 반대로 두 개의 고통을 전시한다. 하나는 물론 억압에 의지해서 버티는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억압이 사라지자 통제가 불가능해져버리는 환상이다. 둘 사이를 분리하는 경계는 여기서 그렇게 분명한 것이 아니다. 종종 그 둘은 서로의 자리를 바꾸기도 한다. 하지만 일단 인물들은 현실이 무너져 내리듯 홀연히 비현실의 장막 안으로 들어서면 추상적인 미결정의 이미지에로까지 다가간다. 이때 이미지는 히스테릭하게 웃기 시작한다. 나는 여기서 이미지가 웃는다고 썼다. 이미지가 웃기 시작할 때 일그러진 화면은 육체를 침공하듯이 뒤집어쓴 다음 그것을 통해 고통을 전시한다. 나는 그 뒤에 무언가 숨어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로 그 뒤는 그저 공허한 텅 빔이 전부이다. 그것을 감추기 위해서 점점 더 히스테릭해지는 이미지는 대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을 감추기 위해서 자기 스스로 자멸해버리듯이 스스로를 일그러뜨리며 웃기 시작한다. 그때 일그러지면서까지 웃는 이미지는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것일까. 물론 대답은 환상의 불만족이다. 왜냐하면 여기는 또 다른 고통의 왕국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히스테리가 만족을 얻게 된다면 이미지를 둘러싼 영화의 기호들은 갑자기 도착적인 기능을 시작할 것이다. 그건 임권택이 바라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걸 바라기 시작할 것이다. < 천년학 >의 마지막 장면은 분명히 그러했다) 아직은 고통에 머물러야 한다. 이때 임권택의 희극은 웃음이 고통이라는 이상한 역설에 빠진다. 언젠가 내게 말했다. “거 참, 이상하게도 나는 코미디가 안 되는 거예요” 나는 대답할 수 있다. 아니요, 코미디가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웃음이 고통에 머물러있는 것입니다. 당신의 영화에서 웃음은 고통스러운 감정의 경련입니다. 송해 와 박시명 장소라는 쇼트의 하부구조. 이 히스테리의 경기장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은 절정은 (내가 줄거리를 정리하다말고 잠시 중단한 이후의) 마지막 시퀀스 전부이다. 무대는 고급 제과점. 이재명과 그의 아내, 딸 보영은 지금 다방 마담과 그 아들 세진과 (결혼을 해야 할지 말 지를 결정하기 위한) 서로간의 부모 상견례를 위해 여기 나와 앉아있다. 제과점은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상견례 장소로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장소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세트에서 찍은 것이 분명한 이 장소는 이제까지의 장면들에 비해서 지나치게 밝고 화사한 느낌으로 설계되어 있으며 약간 비현실적인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때 이 경기장을 처음 작동시키는 이미지 벡터는 주문을 받으려고 테이블을 오가는 두 명의 점원, 그런데 마치 쌍둥이 로봇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송해 와 박시명 이다. 영화에서 처음 등장하는 두 사람. 서로가 거울에 비친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서로가 서로의 동작을 보완하는 개그는 물론 송해와 박시명 콤비의 발명품이다. 이때 이 둘이 주문을 받으러 가는 손님은 이재명 가족의 테이블이 아니라 영화에 처음 등장한 (그녀 자신을 ‘뚱보 여성’ 코미디언 백금녀 와 구별하기 위해 지은 예명인) 오천평의 테이블이다. < 신세 좀 지자구요 >에 차례로 등장하는 코미디언들의 열거 방식은 이 영화가 종종 예능 프로그램 방식으로 연출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나는 이 대목에 돌아올 때마다 다소 무례한 상상을 해보게 된다. 그때 영화산업은 추락하고 있었다. 충무로의 수많은 재능들이 방송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방송국은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서 경험이 있는 연출자와 촬영, 조명, 편집, 혹은 이미 얼굴이 알려진 스타들과 안정적인 연기를 할 수 있는 배우들이 필요했다. 한국영화는 이중의 검열 속에 관객들에게 거리의 죽은 개 취급을 당하면서 구경거리로서도 버림받고 있었다. 재빨리 대중들은 스크린을 버리고 모니터 앞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1969년의 이야기이다. 그때 방송국은 안정된 직장이었다. 임권택 은 <신세 좀 지자구요>를 연출하면서 종종 텔레비전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것만 같은 실험을 할 때가 있다. 그 목표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그 실험이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로셀리니를 시작으로 (그의 교훈에 따라) 에릭 로메, 자크 리베트, 고다르, 필립 갸렐, 외스타슈, 라이너 베르너 파쓰빈더, 헤어초크, 벤더스로 이어지는 수 없는 텔레비전과의 모험이 있다. 시네-텔레비전이라고 세르주 다네가 명명했던 시기. 레지스 드 브레는 좀 더 과감한 예언을 했다. 결국 관객은 시청자의 감각을 갖게 될 거예요. 그 말을 빌려서 나는 우리 시대의 관객에 대해 말하고 싶다. 영화관객은 스마트폰 유저의 감각을 갖게 될 거예요. 하지만 임권택의 실험은 미학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관점에 따른 것이다. 그것이 앞으로 다가올 미디어의 잡종교배에 따른 방법의 탐구인지 아니면 그 자신이 방송국으로 옮겨갈 것을 염두에 둔 테스트인지는 (당연히 내가) 알 수 없다. 경기의 시작. 마치 우회를 하듯이 오천평의 테이블을 거쳐서 송해 와 박시명 은 이재명과 아내, 그리고 딸이 앉은 테이블로 간다. 물론 오천평은 경기장의 새로운 벡터를 더할 것이며 지금은 단지 자리를 차지하고 자기의 순서를 기다리는 중이다. 이재명의 아내는 신랑댁이 시간에 늦는다면서 툴툴 거리고 있지만 딸은 아직도 3분이나 남았다고 대답한다. 그때 저편에 ( 양훈 ) 과장과 아내, 아들( 이철 ), 계장( 서영춘 )이 이미 자리를 잡고 감시하듯이 지켜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그들이 왜 온 것일까. 대답은 단순하지만 기괴하다. 최후의 클라이맥스를 준비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것은 영화에서는 성립되지 않는 대답이다. 만일 그러기 위해서라면 그들은 이재명 테이블로부터 시선 바깥에 숨어있거나 (이 영화가 희극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변장을 하고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다른 집안의 상견례에 개입하는 중이다. 그런데 이재명의 테이블에서는 마치 이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를 취한다. 일종의 양해를 받은 시선의 차단. 혹은 관객과의 약속. 간단하지만 지나치게 간단해서 기형적인 배치. 말하자면 여기서는 통상적인 영화의 약속이라고도 할 수 있는 포르(Fort)-다(Da)의 원근법이 성립되지 않고 있다. 혹은 마치 연극무대처럼 진행된다. 임권택 은 두 집단 사이의 시선을 다시 나눌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앙상하리만큼 드러난 인물들의 노출. 붙들어 매어놓은 것처럼 한 화면 속에 앉아있는 의자 위의 인물들. 그런데도 그렇게 해도 여기서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이미 이 장소는 영화의 법칙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임권택이 이따금 비영화적인 배치에 이끌릴 때 만들어내는 블록의 구성에 대해서 난처함을 느낄 때가 있다. 지금이 그 순간 중의 하나이다. 세 개의 테이블. 이재명 가족이 기다리는 테이블과 오천평이 혼자 앉아있는 테이블과 과장 가족과 계장이 훔쳐보는 테이블. 마치 기계처럼 돌아가는 순서가 이어진다. 이제 소개가 끝나자 (조미령) 마담과 아들 세진이 제과점에 들어선다. 마담은 믿는 구석이 있다는 듯 도도하게 다가와 이재명 테이블의 의자에 앉고 그 기세에 눌려 ( 도금봉 ) 아내는 약간 주눅이 들었다는 듯 맞이한다. 다시 돌아가기 시작하는 홀의 서빙. 송해 와 박시명 점원이 다가와 오렌지 주스 주문을 받는다. 잔의 주문 숫자를 영어로 세면서 거기에 자기들의 숫자까지 슬쩍 더한 다음 (그런데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돌아간다. 마지막 등장인물. 말하자면 완결된 숫자. 이 장소에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마담의 남편 자리에 구先生이 약간 거만한 자세로 나타난다. 모습이 가관인 것은 카이저수염을 달고 거기에 중절모를 쓰고 이 자리에 나온다. 물론 구先生도 누구를 만나러 이 자리에 자기가 불려나왔는지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구先生은 능청맞은 얼굴로 마치 처음 보는 사람들인 것 같은 제스처를 취하면서 인사를 한다. 이때 이재명과 그 아내, 딸 보영은 그가 구先生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 나는 이미 이 시퀀스의 약속에 대해서 설명했다. 하지만 그 변장한 모습 때문에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구先生이 쓰고 나온 모자는 원래 이재명이 가장 아끼는 비싼 모자이며 눈치 없는 식모가 그만 구先生이 필요하다는 말에 냉큼 내다줬다가 아내로부터 야단을 맞은 것인데, 바로 그 모자를 쓰고 나왔는데도 알아보지 못한다. 좀 더 간단하게 자기 모자를 쓰고 나온 상대방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재명의 가족들이 구先生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이야기) 안에서 서로 약속한 생활의 기호들에서조차 누구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중의 장님 효과가 있다. 몹시 망설이면서 이재명의 아내는 “혹시 구先生님 아니세요?”라고 묻지만 모자를 벗고 (뒤집어쓴 것을 누구나 알 수 있는) 대머리(모양의 가발)을 보여주자 금방 실례했다고 사과한다. 이야기는 납득할 수 있는데 전개 방식은 ( 임권택 답지 않게) 전혀 납득할 수 없게 진행된다. 사실 이 장면이 드라마로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긴장은 구先生의 변장이 들키느냐 마느냐에 있다. 이중의 역할. 마담의 남편의 자리이자 구先生이라는 역할. 구봉서 라는 배우, 드라마가 불러일으키는 긴장. 여러 개의 진동판을 동시에 건드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허약한 약속. 여기서 그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이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된다. 이때 우리는 이 약속을 좀 더 밀고 나갈 필요가 있다. 좀 전에 한 말을 수정하고 싶다. 희극의 진정한 약속은 여기서 그 정체를 들키게 된다면 이 모든 노력은 허사가 된다, 라고 전제를 던진 다음 그것을 기어이 들키게 만들어서 소동을 만드는 것이다. 전형적인 포르-다 게임. 이때 눈속임은 이중으로 배치된다. 이야기 안의 인물들은 속지만 이야기를 보는 우리는 절대 속지 않는다. 우리가 속는 것은 절대 속지 않는다고 가정된 약속 그 자체의 배신이다. 당신은 이 상황이 1969년에 만들어진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희극 영화이며, 게다가 텔레비전에서 영향 받은 분장이라고 가볍게 지나치고 싶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잘못 붙잡은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는 지금 구先生의 외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의 주인이 알아보지 못하는 모자라는 기호를 질문하는 중이다. 종종 어떤 기호들은 마치 침점과 같아서 이야기 안의 시간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이 문제가 보기와 달리 그렇게 단순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임권택은 이미지의 재현이 약속에 관련된 문제가 아니라 재현 자체가 대상의 뿌리와 관련지어야 한다고 믿는 연출자이다. 그건 < 두만강아 잘 있거라 >에서부터 그러했다. 그런 다음 임권택이 연출한 1960년대의 사극을 볼 때마다 그가 어떤 순간에는 과도할 정도로 그 뿌리의 안에서 영화가 살아가야한다는 믿음을 밀고 나가는 것만 같은 인상을 받을 때를 발견하곤 했다. 그는 어느 순간 그게 왜 거기에 있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놓고 이미지의 자리에 대한 내기를 벌이곤 했다. 영화는 그에게 재현될 때 그 안에 대상의 뿌리가 체화되고 시간이 종합되는 장면을 보는 것이라는 어떤 믿음의 일관성으로 진행되었다. 나는 그걸 < 길소뜸 >에서 무시무시한 심정으로 지켜보았다. < 신세 좀 지자구요 >를 만들던 해에 임권택은 < 황야의 독수리 >를 연출했다. 이 시기의 임권택은 매우 빠른 속도로 자기 영화의 어느 부분들이 무너져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그래서 종종 어떤 영화들은 임권택의 영화들 안에서 완전히 고립된 것처럼 보일 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여기서 무언가 재현의 이미지들은 단절되고 스스로 이야기 안의 인물들의 기호들이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은 소리를 듣는다. 갑작스러운 사고. 여기서 괴상한 장면이 연출된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손님 오천평의 주문을 받고 핫 케익 10장을 구운 접시와 주스를 담은 쟁반을 들고 나오다가 그만 송해 와 박시명 은 서로 부딪쳐서 그걸 바닥에 떨어트려 접시는 나뒹굴고 컵은 깨지고 핫케이크는 바닥에 떨어진다. 그때 갑자기 기적이 벌어진다. 놀라지 말 것. 영화 화면이 거꾸로 돌아가면서, 말하자면 카메라 필름을 되감으면서(rewinding_shooting), 바닥에 떨어졌던 케이크와 주스 잔과 접시가 바닥에서 위로 날아올라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물론 간단한 테크닉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영화의 기계장치가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드라마의 리듬은 산산 조각나버린다. 혹은 완전히 작동을 중단하게 된다. 차라리 어리둥절한 중단. 이 순간 영화는 완전히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버린다. 무언가 이 쇼트는 이 갑작스러운 리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처럼 보인다. 마치 이 순간에 대한 알리바이를 준비하기라도 하듯이 구先生은 먹을 것을 보면 식탐을 주체하지 못한다는 설정이 반복되었다. 이를테면 양주병에 바꿔 넣은 화장품 스킨로션 한 병을 모두 마시고 화장실을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드나드는 장면. 이때 임권택 은 구先生의 복통을 배가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는 장면과 마치 폭격기의 폭음과도 같은 과장된 사운드를 결합시켜서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주스를 보자 구先生은 지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맥주를 마시기라도 하듯이 그걸 벌컥벌컥 마신다. 그때 이들과 아무 상관없는 오천평은 자신이 주문한 핫케이크를 다른 테이블에서 혼자 정신없이 먹기 시작한다. 두 개의 테이블. 하나의 장소, 새로운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테크닉. 영화는 그 둘을 반복해서 서로 오가면서(cross_cutting) 마치 둘 사이에 어떤 관계라도 있다는 듯 보여준다. 물론 둘 사이에는 아무 연관성도 없으며 또한 드라마도 생겨나지 않는다. 강제적인 매듭. 사회적인 태도를 포기하고 본능에 충실하겠다는 듯한 동물적인 제스처. 오로지 그 둘의 관계는 탐식의 광란에 가까운 속도 이외에 어떤 연관성도 없다. 여기까지 드라마를 쫓아왔다면 당신은 중얼거릴 것이다. 이래도 괜찮은 것일까. 그리고 이 말은 내가 맨 처음에 했던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연쇄반응이 일어난 것만 같다. 그런데 그 반응은 이제 이 운동이 완전히 이야기 바깥으로 나갔음을 알린다. 거의 제멋대로 작동하기 시작하는 신체들. 마치 그 주인들이 통제를 상실하기라도 한 것처럼 카메라가 대상을 건드리면 그 부위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기라도 하는 것만 같다. 구先生과 오천평이 각자의 테이블에서 각자의 음식에 매달리자 과장 가족과 계장이 앉은 테이블에도 진동이 온 것처럼 보인다. 이때 이걸 바라보던 ( 서영춘 )계장이 마치 이미 프로그램이 되어있는 인형이 두 사람의 탐식에 반응을 보이기라도 하듯이 물고 있던 담배를 뱉어내자 그게 날아가 ( 양훈 ) 과장의 입에 꽂힌다. 사라진 삶의 법칙. 그걸 (양훈) 과장이 다시 뱉어내자 그게 아내의 코에 가서 박힌다. 거의 서커스와도 같은 동작. 물론 여기서 그걸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훈련받은 연기자들의 묘기가 아니라 영화의 기계적인 트릭이다. 오로지 영화라는 기계의 작동. 그걸 아내가 다시 콧바람으로 불어내자 그게 날아가 다시 (서영춘) 계장의 입에 꽂힌다. 질세라 그걸 다시 뱉어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벌려 ( 이철 ) 아들이 받아먹는다. 이 개그는 사실 지금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와 아무 상관도 없으며, 심지어 이재명 가족과 마담 가족 간의 상견례의 어떤 내용과도 상관이 없다. 그들 사이에서의 행동은 어떤 비유도 성립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각자의 테이블은 상징과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세 개의 테이블을 어떻게 짝 지워야 하는 것일까. 세 개의 테이블은 가장 단순한 상태의 신체라는 운동의 작동만이 기계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제 이 세 개의 테이블로 나뉜 기계적인 활동을 어떻게 하나로 결합할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았을 뿐이다. 첩첩산중. 이 활동에서 어떤 작동을 중단시키고 이들을 보다 큰 범주의 새로운 운동의 경기에로 어떻게 이동시킬 것인가. 구先生은 큰 기침을 한다. 콧물을 닦으려하자 (당신도 예상했듯이) 카이저수염이 떨어져나간다. 이때 이재명과 아내는 깜짝 놀라지만 이상한 것은 그걸 보고 딸 보영이 깔깔 웃는 것이다. 사실상 구先生의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상견례는 파국을 맞을 것이며 보영의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남의 일처럼 바라보면서 반복해서 웃는다. 이 순간 구先生이 실례했습니다, 라는 대사를 하고 나면 그 다음에는 할 말이 없다. 상황종료를 알리는 대사. 임권택 은 다시 상황을 시작해야만 한다. 그때를 기다린 것처럼 파리가 구先生의 대머리 가발에 앉는다. 이번에는 (두 명의 점원 중의 한명인) 송해 가 다가가 구先生의 머리에 앉은 파리를 잡는다고 내려치다가(물론 우리는 그 다음에 벌어질 상황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순간 긴장을 불러내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고 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라는 두려운 기대이다) 그만 가발을 벗겨버린다. 그제서야 이재명과 아내는 마담의 남편(역할을 하기 위한 나온 이 사람)이 구先生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하지만 관객 중에 이 사람이 구先生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여기엔 어떤 게임도 없다) 맙소사. 드라마는 사실상 여기서 가장 불편한 순간을 맞이한 것이르였?이상 해야 할 이야기는 남아있지 않다. 새로운 동선. 그때 어디선가 크림을 잔뜩 토핑한 케이크가 날아와 구先生의 얼굴에 정통으로 맞는다. 돌아보니 ( 양훈 ) 과장과 아내, 아들, ( 서영춘 )계장이 일어나서 이재명의 테이블을 향해 일제히 던지기 시작한 케이크가 날아든 것이다. (할리우드 희극장르에서) 파이던지기(라고 부르는) 액션. 파이던지기는 카오스로 달려가는 입구이다. 임권택 은 전쟁영화를 찍을 때 누가 누구를 (종종 과도할 정도로) 쏘는 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연출자이다. 하지만 자, 정반대로 여기서 임권택은 거의 고의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던지는지를 알 수 없게 동선을 무시하고 (좀 더 정확하게는 넘나들면서) 서로에게 집어던진다. 혹은 누가 누구에게 던지든 상관이 없다. 순간적으로 그 자리를 피한 사람은 쓰러진 책상 밑에 모습을 숨긴 이재명의 딸 보영과 마담의 아들 세진이다. 그때 송해 와 박시명 은 재빨리 파이던지기의 동선에서 빠져나와 케이크를 맞고 기절한 오천평의 삼백만 원짜리 반지를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다. 서로 관계가 없는 전체. 그저 동선의 재난이라고밖에 달리 말할 수 없는 활동. 그때 인물들은 뒤집어쓴 케이크의 크림으로 무너져 내린 형상이 되어간다. 반드시 상대방을 겨냥할 의도조차 없이 사방에서 서로 던질 때 여기에는 원칙이 없다. 그런 다음 거의 지친 그들이 서로를 향해 주먹질을 할 때 (양훈) 과장과 이재명이 서로 마주보고 있고, (서영춘) 계장과 구先生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이들 사이의 짝은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사이에 ( 이철 ) 아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재빨리 바깥으로 도망친다. 당신이 좀 더 예민하다면 문득 화면의 주변을 돌아볼지 모르겠다. 그렇다. 그들이 케이크를 집어 던지는 사이에 처음 시작할 때 앉아있던 다른 손님들은 아무 말 없이, 말 그대로 소리 없이, 마치 그들의 난동극에 조금이라도 방해라도 될 것 같아 자리를 피하기라도 하듯이, 흔적도 없이 화면에서 사라졌고, 그런 와중에도 카운터 저편의 제빵 셰프들은 그들이 만든 케이크를 사방에 집어던지는 동안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이, 마치 그들을 보지도 못한 듯이, 계속해서 빵을 만든다. 그러다가 구先生이 두 어머니, 이재명의 아내와 다방 마담에게 그들의 자식들에게는 그들의 기회를 주어야한다는 충고를 주고 떠나갈 때에야 비로소 돌아본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마지막 장면의 마지막 장면을 설명하는 대신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 < 신세 좀 지자구요 >는 임권택 이라는 설명 바깥으로 나간 영화이다. 그냥 서둘러 실패작이라고 설명한 다음 빠져나오고 싶을 정도로 한편으로는 부서져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가 그 사이를 메워나간다. 처음 볼 때는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예기치 않은 골격이 나타나 영화의 윤곽을 다시 설정하기 시작할 때 임권택은 거기서 무언가 혼란스럽긴 하지만 영화 안에서 끊임없이 변형을 가하려는 시도를 한다는 걸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는 이런 방식을 두 번 다시 취하지 않았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무언가 모델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눈으로 만지지 않는다. 그 대신 영화 그 자체가 하나의 육체처럼 다루어지기 시작할 때 몸은 히스테리에 빠져들기라도 한 것처럼 무언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려 든다. 지나치게 빈약한 장치들. 모든 것이 드러나 버린 몸. 벌거벗은 영화. 여기서 눈은 기능을 포기했고 창자가 음식에 반응하면서 영화의 장치들을 뒤틀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배고픈 영화. 굶주린 수사학. 나는 그 사이에서 무언가 거기서 독립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그건 리비도의 퍼포먼스이다. 이제까지 임권택을 다루면서 이상할 정도로 아무도, 정말 누구도, 한 번도 다루지 않은 질문. 나는 이 질문의 시작을 여기서부터 해볼 생각이다. (계속) 1969년 90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일영화주식회사 각본 신봉승 촬영 장석준 조명 김진도 편집 장현수 음악 김기갑 구봉서 ... 구선생 김희갑 ... 이재명 도금봉 ... 이재명의 아내 전양자 ... 이재명의 딸, 보영 조미령 ... 마담 서영춘 ... 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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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제작자 이재명 컬렉션 | 75건 | 2026-05-27 | 2022-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