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끈한 동영상
- 감독
- 이정길
- 제작년도
- 2009
3편이 끝난 후, <애마부인> 시리즈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제작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인엽 감독은 ‘두손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고 < 파리 애마 >와 < 짚시 애마 >(1990. 이석기)를 내놓은 것. 판권이 연방영화에 속해 있기에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못했고, 캐릭터 이름도 애마 대신 오해리( 유혜리 ), 필라 김( 이화란 ) 등으로 설정해야 했지만, 이 두 편의 외전은 이후 이어지는 정전보다 오히려 더 ‘애마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었다.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두 영화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으로 들어간다. 1~3편에서 정인엽 감독과 호흡을 맞춘 이석기 촬영감독은 <파리 애마>에서도 기존의 애마 시리즈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을 선보였고, <짚시 애마>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나름 당대의 파격이었다. <파리 애마>의 설정은 오해리가 이혼한 남편을 찾아 파리로 찾아간다는 이야기. 외국에서의 낯선 성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강한 남자’였던 전남편( 현석 )에게서 벗어난다. <짚시 애마>의 필라는 나이 많고 남편 몰래 짚시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지만 결국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패션 모델 출신의 이국적 외모를 지닌 여배우를 캐스팅해 당시로선 이례적이던 유럽 로케이션을 감행한 이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비주얼의 업그레이드를 노렸고, 두 편 모두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성공했다. 여기서 ‘애마 프랜차이즈’의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의 현우(임동진), 2편의 현우(최윤석), 3편의 노 박사(이정길) 그리고 <파리 애마>의 장석환(현석). 특히 장석환은 가장 강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편이었다.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애마부인> 2기’는 1990년에 시작된다. <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 시리즈(1987~88)의 석도원 감독이 < 애마부인 4 >(1990)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후 그는 10편까지 총 6편의 <애마부인> 시리즈 정전과 외전인 < 드라큐라 애마 >(1994)를 연출한다. 석도원 감독이 등장하면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진화를 일단 멈추고 불균질적인 시기를 맞이한다. 어떨 땐 황당할 정도로 급진적이고(5편의 남편( 최동준 )은 하나코( 민희 )라는 정부에 의해 일본도에 찔려 살해된다), 어떨 땐 1960년대 신파 멜로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이었다(7편의 애마( 강승미) 는 성불구 남편( 이무정 )에게 돌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에로 영화는 극장이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흥행 성적도 서울 관객 5만 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에로 영화 지형도에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어느새 ‘올드 스타일’로 밀릴 상황이었다. < 복카치오 > 시리즈(1991~94) 같은 새로운 감각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애마부인> 시리즈도 경쟁을 위해 변해야 했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4편의 주리혜, 5편의 소비아, 6편의 다희아, 7편의 강승미, 8편의 루미나, 10편의 오노아. 소비아는 이후 비디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배우 임옥경의 동생인 주리혜는 이후 비디오 영화 <쌍파울로 애마 신바람 났네>(1996. 유진선)의 주연을 맡았다. 소비아는 ‘10대 애마’ 진주희와 함께 <애마 섹시 월드>(1998. 조명화)에 출연했다. 오노아는 역시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애마>(1994)에 출연했다. 이때 석도원 감독이 끌어들인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애마나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적 설정(행위예술가, 현대무용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스테이지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분리되면서도 이 시리즈가 지니는 에로틱한 면모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때론 섹스 신에 실제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편엔 사도마조히즘 섹스 컨셉트가 도입되는데, 이때 아티스트 원석( 원석 )은 애마를 묶으며 “이것도 예술입니다”라고 말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토론 장면엔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아르토의 잔혹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거론된다). 5편에서 시작되는 퍼포먼스의 전통은 이후 김성수 와 조명화 로 감독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의 혐의는, 잘만 킹 영화의 영향력이다. <애마부인> 1편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면,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에선 당시 한국 에로 콘텐츠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 레드 슈 다이어리 >(1992. 잘만 킹) 스타일의 에로틱 느와르 톤이 묻어나며, 이것은 다소 난폭한 섹스와 결합된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7편에선 바닷가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가 퍼포먼스를 한다. 6편엔 4대 애마 주리혜와 5대 애마 소비아 그리고 6대 애마 다희아가 자매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그들은 철로 위에 눕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8편엔 밴디지 컨셉트가 등장한다. 11편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공연 장면. 조금은 장황한 모놀로그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테마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영화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한 석도원 감독의 의도로 여겨지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여(게다가 비문이 많다)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6편은 ‘말 잔치’인데 애마( 다희아 )는 언니( 소비아 )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은 정상궤도를 이탈한 빗나감이며,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항이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독선의 모습이야.” 이후 이혼을 결심한 애마의 독백은 이렇다. “순수와 영혼의 진한 사랑의 연습이, 크고 작음을 모두 잉태해낸 너는, 이제 허공에 익숙해진 사랑의 노래다. 높은음 외마디 끓어오르는 진실, 사랑의 한 맺힌 신음으로 고뇌하는 아픔, 네 귀를 후려치는 듯한 울음소리로, 울음소리로, 사랑의 바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슬픔이여, 내 앞에서 그대 눈물이었다. 어떤 고통의 미움이 들었나. 독하디독한 미움을 마시고 보면 새까만 허공, 침묵의 계절. 무거운 돌 바위 무너져 내리듯 슬퍼하자, 슬퍼하자.” 영화의 시작이나 끝은 선언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8편은 “에로티시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에로티시즘은 우리들을 착각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활력소일 수도 있다”는 문구로 시작해 “시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시를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시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사람이든 시든 모두가 사랑이었나”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외에도 “우리의 사랑은 짧게 빛나는 불협화음이었나.”(4편) “그대 영혼으로 그리움 엉기어 우리의 사랑은 눈꽃이 되었나.”(5편) 같은 한탄조의 대사들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이때 등장한 김성수 감독은 < 애마부인 9 >(1993)을 연출하며 혁신을 일으킨다. < 색깔 있는 남자 >(1985)로 유명한 그는 ‘최연소 애마’ 진주희를 캐스팅하는데, 그녀는 기존의 애마들과 다른, 차라리 하이틴 아이돌이나 로맨스 히로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범죄 스릴러 요소와, <색깔 있는 남자>의 반전 엔딩을 장식했던 레즈비어니즘의 터치가 결합되면서, <애마부인 9>는 석도원 감독이 이식한 사변적 톤을 걷어내며 “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마라? 그따위 논리가 어딨어!”라는 직설법으로 승부한다. 특히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애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라는 자막이 뜨는 대목은, ‘애마 프랜차이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엔딩일 것이다.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10편으로 다시 석도원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간 시리즈는 11편과 12편에서 조명화 감독을 만난다. 액션 요소를 대거 도입한 조명화 감독은(그는 < 우뢰매 >와 < 슈퍼 홍길동 > 시리즈의 연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가장 거친 스타일의 <애마부인>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 시리즈는 에로 비디오 시장에 거의 잠식 당한 상태였고, 마지막 13편은 김성수 감독이 돌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1990년대 중반은 ‘애마 프랜차이즈’의 대혼란기였는데, 1995년을 보면 11편과 12편이 나왔고, 외전인 < 애마와 변강쇠 >(김문옥) < 애마와 백수건달 >(김문옥)이 등장했으며, 비디오 시장엔 <적도 애마>(김인수)와 <빨간 애마>(유세기)가 출시되었다. 정전과 외전과 비디오 시장을 아우르는 상황. 이후 그 주도권은 완전히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지만 대세는 진도희 의 < 젖소부인 > 시리즈였고, 1998년 이후 ‘애마’라는 이름을 붙인 영화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 2016년 < 애마부인 2016 >이 나왔다. IPTV 시장의 확산을 통해 18년 만에 애마가 부활한 셈이다. 외전의 여주인공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겨울 애마, 봄>의 애리(박엘리자), <애마와 변강쇠>와 <애마와 백수건달>에서 애옹(애마+옹녀)과 애미/미치코 역을 맡은 박양희, <빨간 애마>의 설희(정세희), <애마부인 2016>의 은혜(류현아).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독고영재는 6편에서 주희(주리혜)의 전남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원석과 유병완은 석도원 감독의 단골배우였다. 그들은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원석은 종종 애마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맹찬재와 노현우는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와 외전에서 남편 역할을 주로 맡았다. 4편에서 에리카의 결혼 파트너였던 신성하는 12편과 13편에 남편으로 등장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애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테마와 스타일과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절규하듯 내뱉었던 대사들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 애마부인 9 >에서 강희가 애마에게 던지는 충고는 아마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것이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애마에게 강희는 말한다. “진정 네가 필요한 남자를 선택해. 윤리, 도덕, 이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리고 못을 박는다.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최초로 ‘진솔한 욕망’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가져왔던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 한국영화의 ‘위대한 유산’까지는 아니라도, ‘역력한 흔적’ 정도로는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
올해는 조흔파 탄생 백 주년이 되는 해이다. 20세기 후반 몇십 년 동안은 굉장히 인기 있는 이야기꾼이었고 소설과 방송 매체, 영화에 남긴 업적도 만만치 않지만, 지금은 거의 중장년층의 기억 속에만 남아있는 작가이다. 방송 활동은 증발해버렸고 소설은 얼마 전 탄생 백 주년을 맞아 새 책들이 나오기 전에는 한동안 거의 절판된 상태였다. 새로 나온 책들을 통해 조흔파가 새 세대의 독자를 얻을 수 있을까? 장담은 못하겠다. 5, 60년대 한국은 백 년 전 미국이나 유럽보다 낯설고 생경한 곳이다. 과거 배경의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만 그 시대를 상상하는 사람들은 당시 사람들의 언어와 사고방식이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지 놓칠 때가 많다. 조흔파와 같이 현재성이 중요했던 대중작가의 작품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조흔파 작가 조흔파하면 다들 『얄개전』을 먼저 떠올리지만 『서울의 지붕밑』도 만만치 않은 히트 프랜차이즈였다. 단지 이 제목은 그가 지은 것이 아니다. 원래 제목은 『골목 안 사람들』. 이형표 가 감독한 1961년 영화가 택한 < 서울의 지붕밑 >이라는 제목은 르네 클레르의 <파리의 지붕밑>(1930)에서 가져온 것 같다. 그래도 각색물과 함께 원작이 꾸준히 읽혔던 『얄개전』과는 달리 『서울의 지붕밑』은 오로지 원작의 설정을 끊임없이 재해석한 각색물을 통해 명맥이 유지되었다. 우선 가장 유명한 이형표의 영화가 있었다. 다음 해에 최초의 시추에이션 드라마였다는 <서울의 지붕밑>이 나왔다. 1982년에 나온 텔레비전 드라마 <서울의 지붕밑>은 나도 본 기억이 있다. 검색하다가 <골목 안 사람들>이라는 아침 일일연속극이 2002년에 방영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똥고집 한의사 가족이 중심이고 딸이 양의사와 연애를 한다니 이 역시 <서울의 지붕밑> 드라마가 맞았나보다.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5, 60년대 서울 서민들의 삶을 그린다는 계획으로 시작된 설정이 전두환 시대를 거쳐 (주인공이 세상이 좋아져 통금이 해제되었다며 자정을 넘긴 골목을 돌아다닌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21세기 초까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이다. 비록 지금 아무도 원작을 읽지 않지만. <골목 안 사람들>의 작가는 원작을 읽었을까? 아니면 그냥 설정만 취했을까? 후자여도 이상하지는 않다. 『서울의 지붕밑』에서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내용이 아니라 설정과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연속극에 최적화된 재료였다. (출처: KBS 홈페이지) 이형표의 영화 역시 시트콤의 한 시즌을 재편집한 것처럼 보인다. 단지 흑백 와이드스크린으로 찍고 김승호 , 황정순 , 도금봉 , 최은희 , 김진규 , 허장강 과 같은 당대의 명배우들을 총동원한 시트콤이다. 큰 흐름의 이야기는 있다. 주인공 한의사 김학규의 딸인 미용실 주인 현옥은 아버지의 숙적 양의사 최두열과 사귀는 사이다. 한의사의 아들 현구 역시 아버지 맘에 안 차는 술집 주인의 딸 점례를 임신시켜 결혼하려 한다. 세상 돌아가는 게 꼴 보기 싫은 김학규는 지방선거에 시의원 후보로 나가지만 떨어진다. 하지만 <서울의 지붕밑>은 큰 흐름으로 이 이야기를 그리는 대신 다양한 골목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한 10여 분 정도의 짧은 소동극 에피소드들을 모자이크처럼 조립해나간다. 이야기의 호흡이 툭툭 끊기는 단점이 있지만 그만큼 1960년대 초 사회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서울의 지붕밑> 촬영현장 지금 와서 보았을 때 <서울의 지붕밑>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것은 세대 갈등을 그리는 낙천적인 관점이다. <서울의 지붕밑>의 세계는 둘로 갈라진다. 시대에 뒤떨어진 구닥다리지만 고집은 엄청난 구세대와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하고 보다 열려있는 신세대다. 영화는 다양한 소동을 거치며 저항하던 구세대가 고집을 간신히 접고 신세대의 젊은이들에게 항복하면서 끝난다. 김학규는 조흔파와 같은 세대이니, 이는 열린 마음을 가진 구세대의 이야기꾼이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응원과 화해의 제스처라고 읽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영화가 그리는 60년대 신세대 젊은이들은 어떤 시대적 특징도 갖고 있지 않다. 우리는 영화 속 젊은이들이 막연히 구시대보다 똑똑하고 친절하고 많이 배웠고 그들보다 새로운 시대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만 안다. 이는 세대 묘사가 아니다. 구세대의 희망이 2차원적으로 반영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이 영화는 다음 세대가 구세대보다는 낫지만 그들의 가치관과 기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존재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울의 지붕밑>의 설정은 그 안전한 기대 때문에 21세기 초까지 살아남았다. 세대는 계속 바뀌어갔지만 늙은이들은 대를 거치는 동안에도 여전히 비슷하게 살아 버텼다. 2002년 <골목 안 사람들>에서 한의사 가장을 연기한 이정길 은 1961년 신세대를 연기한 김진규의 조카뻘이다. 그동안 세상은 충분히 젊어졌는가? 영화 끝에 그렇게 희망에 차 있던 젊은이들은 그 뒤로 어떻게 된 것일까?
“어쩌면 세상은 자기가 바라는 남자는 멀어져만 가고 대수롭게 생각 않는 남자는 눈앞에 귀찮게 서성거릴까. 여자는 자기 배우자를 찾는 거로 인생이 정해진다. 정해진 남자에게 육체를 제공하고 동화돼서 그 사람의 자손을 이어주는 일로, 여자의 전부가 끝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에게 남자의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가. 또는 그런 긴 안목이 구비되어 있단 말인가. 어느 시대건 여자는 장님처럼 눈을 못 보고 남자를 골라 왔다.” 젊은 여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기로는 남자를 고를 때만은 아니었다. 직업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권유받는 일자리는 다방 레지. 막무가내로 선물을 안겨주고 그녀를 호텔로 끌고 가려는 남자에게 “싫어, 싫어, 나 안 갈래, 싫단 말이야” 라고 분명하게 거절해도, “내 육체를 들뜨게 했으면 가라앉혀줘야지, 이 도둑년아”라는 말과 함께 따귀를 맞는다. 이후 이어지는 강간 장면에서 그녀의 몸을 손에 넣고자 하는 남자들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기차에 앉아 고통뿐인 과거를 회상하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왜 여수로 향하는가.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거의 플래시백뿐인 이 영화에서, 여러 시간대의 과거를 액자처럼 늘어놓는 기억의 주체는 숙영( 김지미 )으로 보인다. 그녀가 열차에 타 과거를 회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내레이션 역시 그녀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숙영이 알 도리가 없는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긴 플래시백으로 거의 영화 본편이라 해도 좋을 3년 전 상황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숙영이 기다리는 사람과의 사연이 거기 있으며, 그녀가 살고자 하는 현재의 선체험과도 같은 시간여서다. 3년 전, 숙영은 다른 여성( 박정자 )과 함께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가고 있다. 옆자리의 여성은 숙영에게 사탕을 먹이고 그녀는 그것을 무력하게 받아먹는다. 맞은편 자리에는 훈( 이정길 )이 타고 있는데 그는 숙영에게 수작을 부린다. 숙영과 그 옆 여성의 관계는 곧 밝혀지는데, 옆자리의 여성이 훈을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은 교도관이며, 숙영은 죄수라는 것이다. 교도관이 훈을 설득하기를, 숙영이 자꾸 자살하고자 하니 내일 교도소로 돌아갈 때까지 “남은 시간 내에 여자는 남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이 말은 숙영이 없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왜 훈이 숙영에게 애초에 접근했는지를 숙영이 추측한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런 장면은 또 있다. 여수에 가서 그녀는 묘비도 없는 무덤에서 울부짖고, 그런 그녀에게 훈이 다시 접근해 다짜고짜 혼인을 올리자고 한다. 그러고는 남은 시간 동안 관광이라도 하자며 저녁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데 여기서 숙영이 알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더 등장한다. 훈은 친구를 만나 빌려준 돈을 돌려받고자 한다. 그의 친구는 택시 강도로 그 빚을 갚으려 하고, 훈이 기겁하자 자살해버린다. 칼에 찔린 택시기사도 도망친 상황, 약속시간으로부터 5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훈은 이전의 여유 많고 껄렁하던 태도와 달리 뭔가에 쫓기고 좌절한 모습이다. 왜 훈의 태도가 바뀌었는지, 숙영이 그 공백을 채워 넣고 있다. 숙영은 본 적 없으나 이 긴 플래시백에 등장하는 장면 마지막은, 결국 세 사람이 다시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 있다. 교도관은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비우는데, 그때 세 남자가 숙영을 따라붙는다. 자신들은 형사이며 훈을 잡으러 왔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서 교도관은 그들을 설득한다. 서울에 갈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이 설득하는 내용은 이후 교도관의 말을 듣고 숙영이 상상한 것에 가깝다. 본 적 없는 이 세 장면은 결국 그녀가 끊임없이 시도하던 자살을 포기하고 삶의 의지를 갖기까지, 타인들의 선의를 상상해낸 것들이다. 그녀의 수난이 다른 남성들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녀의 남은 삶 역시 다른 남성의 희생(훈이 붙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숙영의 교도소 앞까지 동행한)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그의 희생을 알고 나서야 숙영은 그를 “여보”라고 부르며, 사기당해도 매 맞고 그래도 믿음을 다시 가져보겠다며 “여보, 당신 이름 뭐야. 이름 말이야. 내 이름은 효순이, 효순이란 말이야.”라고 울부짖는다. 매년 그 날짜 여수의 그 벤치에서 기다릴 테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교도소 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절박한 마지막 만남 이후 훈은 사복형사들에게 끌려가는데 정작 그는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해버리겠어.”라며 반항한다. 훈 앞에서 자살한 친구가 “넌 감상적인 것이 실수야”라고 그를 비난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플래시백이 전부 마무리되면 영화의 첫 대목, 특징 없는 한 남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숙영을 서울역에 데려다주는 부분에서 이어지는 현재 그녀의 삶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숙영은 이제 새 출발을 하려 한다. 첫 대목에 잠시 등장한 남자는 이제 그녀가 신뢰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이 기나긴 플래시백은 마지막으로 훈을 기다려보기 위해 여수로 향하는 그녀가 떠올리는 마지막 작별 의식이었다. 자살을 몇 번이고 기도한 그녀가 살아보기로 마음먹기까지, 훈이 그녀에게 직접 보여준 행동은 사려 깊다기 보다는 그간 그녀를 착취해 온 다른 남성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앙탈을 부리는 건 봐줄 수 있지만 남자를 조롱하는 것은 못 참아!” 성관계가 강간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성욕과 고통을 구분하기 어려운 그녀의 세계에서, 그녀가 훈을 믿는 결정적 이유는 교도소 입소의 마지막 순간에 교도관이 하는 설득(그 젊은 남자가 이제 사형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과 숙영이 직접 기억의 빈틈을 상상으로 채워 넣은 훈과 관련된 사연이다. 숙영은 이제 자신의 서사를 완성한다. 플래시백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녀는 여수에 왜 갔을까. 재회하기 위해 갔을까, 완전히 이별하기 위해 갔을까. <육체의 약속>은 후자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숙영을 품평하고 학대하는 남성들의 언어가 전시되는 방식은 조롱에 가깝다. 그들의 권력은 이제 그 플래시백 안에 봉인되었으며, 이제 그녀는 그 시간에 이별을 고한다.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은 이만희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만추>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육체의 약속>은 <만추>가 (실물 없이) 상징적으로 갖고 있는 오리지널의 위치를 영화라는 육체로 대신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와 비교해보면 인물과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스산한 풍경으로 애나(탕웨이)의 내면을 외부에 전시하며 많은 부분을 상상에 맡기는 김태용의 <만추>와 달리,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흔히 <만추>와 그 리메이크 영화들의 여자 주인공을 설명할 때 ‘남성 혐오에 빠진’이라는 설명이 이어지곤 하는데, 김기영 감독은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의 과정을 전부 펼쳐 보인다. 쥐어뜯듯 선물의 포장을 벗겨내고 한번 가지고 놀면 흥미를 잃는 아이처럼, 남자들은 그녀를 갖고 버린다. 그녀는 그렇게 여러 남자에게 이용당했고, 낙태도 여러 번 경험한 듯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가게 되었고, 죄인의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교도관은 그녀의 입에 계속 사탕을 물린다. 입에 넣어주는 사탕을 수동적으로 받아먹던 퇴행적인 모습의 숙영이 마지막 순간, 훈의 희생을 알고 나서 스스로 사탕을 뱉는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사탕을 뱉으라는 말을 해 준 이가 훈이었음을 떠올려보라. 그녀가 플래시백을 통해 회고하고자 하는 기억은 적나라한 수난사와 훈이 개입된 구원의 순간뿐이다. 그녀가 교도소에 가게 된 살인 장면은 아예 플래시백에 등장하지 않는다. 일인칭 시점의 역사인 플래시백이 갖는 자기 기만성을 잘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만추>와의 연관성 외에도 1970~80년대에 많이 만들어진 호스티스 영화의 계보에서 <육체의 약속>을 살펴보는 일도 가능하다. 그래서 <육체의 약속>의 숙영은 김지미가 그 전에 맡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남자 때문에 팔자를 망친, 하지만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여성의 전형으로 그려지는 숙영은 남자를 죽이고서야 남자가 없는 곳(여자 교도소)으로 갈 수 있었지만, 결국 남자가 그녀를 살게 한다. 그런 이야기를 숙영은 플래시백을 통해 완성해낸다.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닌, 이별하는 이야기. <육체의 약속>의 흥미로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