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해버린 지주놈(지형영화)
- 감독
- 이종호
- 제작년도
- 2004
- 출연
-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침묵에는 여러 결이 있다. 할 말이 없는 경우에서부터 말하기 자체의 어려움, 말하고 싶지 않음 나아가 말할 수 없음까지. 영화는 이미지로서 침묵에서 시작한다. 입을 다문 이들이 정면을 보고 있다. 어디선가 들리는 시계 소리로 인해 침묵의 표정이 더 크게 다가올 즈음, 서서히 침묵의 표정 위에 개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간제로 일해 오다 5년 전 생탁에 정식 입사했다는 이해영 노동자, 텃새로 인해 두 달만 견뎌보자던 세월이 어느새 20년이 된 이옥형 노동자, 초창기부터 생탁의 전 제조 과정을 몸으로 감당해온 이종호 노동자, 열악한 노동환경에 대해 말을 건넸지만 번번이 무시당한 성복남 운전사 그리고 입사 초기 경리과장에게 명절 선물을 하지 않아 내내 불이익을 당해온 김종환의 이야기가 이들 목소리로 풀려나온다. 침묵의 이미지 위에 개인의 목소리를 따로 또 같이 불어넣은 영화는 무엇을 침묵했고 무엇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 것일까? 이미 짐작했겠지만, < 깨어난 침묵 >은 부산 대표 막걸리 생탁 노동자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한 투쟁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불결한 제조 환경, 휴일 없는 노동, 식사나 수당은 물론 임금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근무환경 시정을 요구하는 투쟁을 위의 다섯 노동자를 주축으로 일 년 반 이상 진행하고 있는 지난하고도 고단한 싸움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생탁 투쟁의 목적이나 대의 혹은 진행 과정에 대해 크게 주목하지 않는다. 투쟁 자체에 초점을 맞추어 설득과 동참을 유도하는 여느 투쟁 다큐멘터리 영화와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영화는 투쟁을 ‘경험하는’ 개인들의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나이 오십이 넘어 함께하면 나아질 거라는 희망으로 노동조합에 가입한, 투쟁과 단결의 구호도 헛갈린, 말없이 회사에 들어간 동료들의 배신이 괘씸해서 남아있었던, 시간이 지나면서 투쟁 현장보다 집이 더 무섭다고 말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는 이처럼 노동 투쟁을 경험하는 이들의 목소리로 그들의 희망에서 분노, 즐거움과 두려움의 감정과 상황을 지인에게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러나 또 한편, 이들의 투쟁 경험담은 그리 새롭지 않다. 사측의 내분 조작과 이로 인한 공동체의 와해와 배신 이후 이어진 지난한 버팀의 싸움은 생탁 만의 특별한 유일무이한 경험이 아니다. 이 땅에서 아니 자본주의가 가속화되면서 계속 더 심해지고 있는 투쟁 현장의 한 단면이다. 수년간 함께한 동료와 서로 편이 갈려 삿대질을 하고, 그에 따른 인간적 분노와 오기가 서로를 상채기 내고, 그럼에도 해야 하는 싸움이기에 버티는 이들과 점점 무감하고 무관심하게 조성되는 사회 분위기가 현재 투쟁의 양상이다. 영화는 새삼 옳고 그름을 따지거나 피해자 가해자를 가르기보다 투쟁의 현주소를 딛고 서서 이 모습들 자체를 조용히 담아낸다. < 깨어난 침묵 >의 힘은 여기에 있다. 고단하고 지난한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재확인의 세밀한 기록 대신, 이 모습 자체를 공유 가능한 기억으로 풀어내고자 한다. 침묵은 관찰로 이어지고 관찰은 무감해진 현장의 목소리들을 다시 들리도록 하면서 서서히 연대적 동일시를 구축해간다. 그래서일까? 영화 초반 침묵의 표정은 한바탕 영화를 보고 영화 난 후 다시 마주한 그 순간 화면을 응시하는 처음과 달리 마치 거울 앞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거울을 마주 보면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이야기를 눈으로 한참 나누고 난 공감이랄까. 여기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바로 ‘현장의 카메라’의 흥미로운 ‘콜라보’다. 영화는 노동자들이 직접 찍은 푸티지와 이후 현장에 결합한 감독의 촬영본이 공존하고 있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측에서 설치한 감시 카메라에 대응해 자신들을 보호하고자 노조 측에서 직접 든 카메라의 화면들이 영화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화면들에는 기록의 내용만이 아니라 기록의 행위 자체로 발산하는 그 무엇이 존재한다. 투쟁 현장 내부 노동자들이 직접 든 카메라이기에 드러나는 그 무엇. 이들이 담은 소소한 일상의 화면들은 정보로서는 포착될 수 없고, 포착될 필요도 없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사건에 대한 기록 욕망에서 벗어나 서로가 서로를 찍어주면서 담아낸 디지털 시대의 사적 기록은 투쟁의 흔적이자 기억이고 이는 곧 공동체의 형상으로 다가오게 한다. 여기에 감독은 연대자이자 지지자로 그리고 영화감독으로 화면을 배치하고 자신의 기록을 이어낸다. 영화는 생탁 투쟁기이자 여느 투쟁의 이야기, 생탁 노동자들이자 여느 노동자들의 영화로 특수와 보편을 넘나들게 한다. 박배일 감독은 투쟁 현장의 다소 상투적 이미지와 표상을 재활용하여 나름의 방식으로 투쟁 현장을 포착하고 말 건네기를 시도한다. 오랫동안의 현장 투쟁을 경험하고 기록해온 기반으로 그는 섣부른 희망을 말하지도, 그렇다고 절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색을 뺀 영화 전반의 흑백 이미지들은 멈춘 듯 흐르는 노동투쟁의 오늘을 그 자체로 감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생탁을 통해 전교조에서부터 밀양 투쟁, 강정 투쟁, 최근 옥시사태까지 멈춘 듯하지만 작은 발걸음을 만들어낸 수많은 투쟁을 불러오게도 한다. 생탁의 이야기이지만 생탁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 깨어난 침묵 >은 아무도 말하고 있지 않지만 많은 말을 듣게 하는 힘을 가진 영화이다. 투쟁 현장을 알리는 영화가 아니라 알게 하는 힘 있는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