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읍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
- 감독
- 김수형
- 제작년도
- 1980
- 출연
- 이주일, 김병조, 이상해, 이승현, 김희갑, 김윤미, 김하림, 한주열, 김주호, 이향, 박옥초, 박애경, 이규응
1950년대 후반 <청춘쌍곡선>(한형모, 1957)과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로 포문을 연 한국의 코미디영화는 본격적인 장르로 형성되면서 1960년대 후반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이 시기에는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가 제작되었고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청춘쌍곡선>을 시작으로,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을 주연으로 기용한 <오부자>(권영순, 1958), <사람팔자 알 수 없다>(김화랑,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등의 코미디언코미디 1) 가 1950년대 후반 코미디 영화의 주류를 형성했다면,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7)과 <흥부와 놀부>(김화랑, 1959), <탈선 춘향전>(이경춘, 1960) 등 시대극을 표방한 코미디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등의 산뜻한 로맨틱 코미디도 관객들을 찾아갔다. 1960년대 초에는 가족드라마가 주요 장르로 등장하여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 <삼등과장>(이봉래, 1961) 등의 가족희극드라마가 다수 제작되었는가 하면, 1960년대 중반 유행했던 청춘드라마의 영향으로 <총각김치>(장일호, 1964), <말띠 여대생>(이형표, 1963), <말띠 신부>(김기덕, 1966) 등의 청춘코미디가 한동안 코미디 시장을 휩쓸기도 했다. 한편, 196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초까지는 서영춘, 구봉서를 투 톱으로 하는 코미디언 코미디가 다시 주류를 형성하면서, 구봉서 주연의 <남자식모>(심우섭, 1968),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 <남자기생>(심우섭, 1969) 등의 남자 시리즈와 <팔푼이 사위>(심우섭, 1968), <팔푼며느리>(심우섭, 1968), <팔푼이 부부>(심우섭, 1969) 등의 팔푼이 시리즈, 서영춘의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운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 등이 끊임없이 제작되었다. 요컨대, 1950년대 후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코미디영화는 1970년대 초까지 지속적으로 만들어졌으며 코미디영화의 제작 비율은 연평균 12%에 이르렀다. 2) 코미디영화는 한국영화 시장에서 멜로드라마에 이어 지속적으로 관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주요 장르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의 코미디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코미디언코미디에서 주연을 맡았던 이들을 떠올려 보면 가장 먼저 스타덤에 올랐던 ‘홀쭉이와 뚱뚱이’ 양석천(1921~1990)과 양훈(1923~1998)에서 김희갑(1923~1993), 구봉서(1926~2016), 서영춘(1928~1986), 배삼룡(1926~2010)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 남성 코미디언들만으로 명단이 완성된다. 같은 시기, 이들에 못지않게 활발하게 활동했던 여성 코미디언들의 존재는 지금까지 거의 주목받지 못했거나 이야기되지 못했다. 그러나 신불출의 유일한 여성 제자이자 인정받는 만담가로서 신불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던 김윤심(1914~1997)을 시작으로, 수많은 여성 코미디언들의 활약 역시 기억할 필요가 있다. 김윤심은 한국 최초의 여성 코미디언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쇼 무대의 인기 출연자였다. 김윤심의 활약이 만담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박옥초부터는 본격적으로 영화에서 활동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박옥초(1920-1984)는 전방위적인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여성 코미디언의 입지를 다진 인물로 볼 수 있다. 소녀가극단 낭낭좌에서 데뷔한 이래 남성 역을 도맡아 여성관객의 인기를 독차지했던 박옥초는 코미디로 연기 영역을 넓힌 뒤 1950-60년대에는 악극단과 쇼 무대, 영화와 라디오, TV까지 각종 매체를 넘나들며 자신의 영역을 구축했다. 그는 이 시기 영화에서도 중요하게 활약했던 유일한 여성 코미디언으로 약 70여 편의 필모그래피를 남겼다. 박옥초의 첫 영화출연은 안종화 감독의 영화 <수우>(1948)였다. <수우>는 알려진 바대로 ‘경찰정책영화’였는데, 김소영, 전택이, 신카나리아, 서월영 등이 주요 출연자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 두 번째 영화는 6.25전쟁 이후, 한국영화가 새롭게 발돋움하던 시기에 제작된 1956년 영화 <애정파도>(문화성)였다. (그림1) <애정파도>(문화성, 1956) 포스터. 오른쪽 위 전옥의 얼굴이 크게 그려져 있고, 왼쪽 아래는 이예성과 안나영, 오른쪽 맨 아래 수영복 차림의 박옥초와 구봉서가 코믹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예성과 안나영, 전옥이 주연으로 출연했던 <애정파도>는 구봉서의 데뷔작이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구봉서와 콤비로 재미있는 장면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포스터의 오른쪽 아래에 등장한 수영복 차림의 두 사람이 코믹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띈다. 195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이 급증하던 이 시기에, 박옥초의 영화 출연도 한층 활발해졌다. 박옥초는 이 시기에만 총 11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그 중 대부분은 이 시기에 유행했던 코미디영화였다. <봉이 김선달>(한홍열, 1957), <공처가>(김수용, 1958),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 등에서 박옥초는 짧지만 강한 인상을 남기는 조연 및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림2) <홀쭉이 뚱뚱이 논산 훈련소에 가다>(김화랑, 1959)의 한장면. 박옥초는 아들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정혜선)의 집으로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네 아낙으로 등장했다. 박옥초는 빠른 템포로 수다를 늘어놓으며, 특유의 표정 연기와 속사포처럼 쏘아대는 말솜씨로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3) <백만장자가 되려면>(정일택, 1959)의 한 장면 이 영화에서 박옥초는 죽음 이후 다른 사람으로 빙의된 주인(구봉서)이 유령인 것 같다고 하며 호들갑을 떠는 식모로 등장하여 짧은 순간에 웃음을 자아내는 신 스틸러였다. 이처럼 조연이나 단역으로 수많은 영화에 출연하며, 코믹한 순간의 웃음을 담당했던 박옥초의 경력은 196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이미 악극단과 쇼 무대의 유명한 배우였던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끄는 출연자였으며, 웃음을 유발하는 자신만의 장기를 가진 코미디언이었다. 1960년대에는 코미디영화뿐 아니라 사극, 멜로드라마, 문예영화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 안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했다. (그림4) <성춘향>(신상옥, 1961)의 한장면 기생점고에 나타난 나이든 기생 박옥초를 변사또 이예춘이 타박하는 장면이다. 박옥초의 표정연기가 돋보인다. 이 장면은 신상옥 감독의 <성춘향> 중 변학도(이예춘)가 남원에 부임하여 기생들을 불러 모아 점고를 하는 씬이다. 맨 끝에 서 있던 기생 박옥초를 발견한 변학도가 몇 살이냐고 묻자 천연덕스럽게 “열여섯이옵니다”이라고 대답하며 교태를 부리다가, 타박을 받고 돌아서는 장면을 연출했다. 그런가 하면, <민며느리>(최은희, 1965)에서는 무당으로 등장하여 강한 존재감을 발휘했고,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서는 곽규석과 함께 미국 유학을 다녀와 허세를 부리는 박사 부부로 출연하여 이 진지한 영화에서 단 한 번 웃음을 유발하는 씬을 구성하기도 했다. (그림5)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의 한 장면. 미국 유학을 다녀온 박사 부부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 오른쪽부터 신성일, 백일섭. 박옥초와 곽규석이 출연했다. 드물게 허위의식에 가득 찬 상류층으로 등장했던 <장군의 수염>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박옥초가 영화 속에서 맡은 역할들은 주로 식모, 동네 아낙, 무당 등 하층계급의 여성들이었다. 주인공이 아닌 여성, 그 중에서도 젊지도 않고 예쁘지도 않은 중년의 여성이 당시 한국영화 속에서 맡을 수 있었던 캐릭터는 매우 제한적이었으며, 박옥초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대부분을 이런 역할들로 채워갔다. 그럼에도 박옥초는 등장만으로도 시선을 모으고 웃음을 유발하는 개성 있는 배우로, 존재감을 드러내는 여성 코미디언이었다. (그림6)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의 한장면. 박옥초는 코미디영화 제작이 드물었던 1970년대에는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는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기 시작했던 톱스타 코미디언 이주일의 출세기를 보여주는 영화였는데, 박옥초가 출연했던 마지막 코미디영화이기도 했다. 그의 마지막 영화는 김수형 감독의 1981년작 <나는 할렐루야 아줌마였다>로, 박옥초는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70여 편의 영화를 남겼다. 박옥초는 심우섭, 이형표, 김화랑 등 주요 코미디 감독들의 코미디 영화 및 신상옥, 최은희, 이성구 감독 등의 다양한 장르 영화에서 코믹 릴리프를 담당하는 씬 스틸러로 출연하면서 강렬한 인상을 남긴 배우로 기억될 만하다. 박옥초가 주로 조연배우로, 다작을 한 경우였다면 백금녀는 여성 코미디언으로 드물게 주연작을 가진 배우였다. 백금녀(1931-1995)는 김정분이라는 본명으로 부산 지역 악극단에서 데뷔한 뒤, 서울중앙방송 성우 제1기로 본격적인 연예 활동을 시작했다. 청춘극장과 황금좌 등의 악극단에서도 활동했는데 1950년대 후반 서영춘과 콤비를 이루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갈비씨와 뚱순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던 서영춘과 백금녀는 쇼 무대와 라디오에서 큰 활약을 했다. 백금녀는 여기서 얻은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도 진출, <공처가>(김수용, 1958)로 데뷔했다. 또, 1964년에는 박노식과 함께 악극 재건을 목표로 ‘11인 백합회’를 결성하여 부회장직을 맡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중반에 여성 코미디언으로는 유일하게 고소득 연예인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데뷔작 <공처가>에서 백금녀는 장소팔과 부부로 등장하여 곰탕집을 운영하는 여걸 역할을 맡았다. 장소팔은 당시 악극단과 라디오 만담을 통해 전국적인 스타 만담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장소팔의 ‘대화만담’ 파트너였던 고춘자나 고백화가 아니라, 백금녀가 상대역으로 등장한 것은 이채로운 일이라 할 만하다. 아마도 백금녀가 ‘공처가’의 부인이라는 컨셉에 더 적합한 유형의 인물로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점과 다른 한편으로는 연기력을 인정받은 신인 배우 백금녀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캐스팅이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그림7)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장소팔의 등에 업힌 백금녀가 포스터 전면에 위치하여, 이 영화의 코믹한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 백금녀라는 예명은 이 영화의 감독이었던 김수용이 당시 생활고에 시달리던 김정분에게 ‘하얗고 돈 많은 여자’가 되라고 지어준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부터 10년이 지난 뒤, 백금녀가 다시 주연 배우로 등장한 영화는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코미디언들을 주연으로 하는 영화들의 제작이 매우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이러한 경향은 1970년대 초까지도 지속되었는데 여성 코미디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는 <남자는 싫어> 단 한 편이었다. (그림8) <남자는 싫어>(안면희, 1967) 포스터. 이 영화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던 백금녀가 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면서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되찾게 되는 이야기를 다뤘다. 960년대 여성 코미디언을 단독 주연으로 삼아 제작된 유일한 영화이기도 했다. 이 영화는 백금녀 코미디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아니라, 여성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에서 소비되는 경향을 보여주는 자료로서의 의미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아쉽게도 이 영화의 필름은 남아 있지 않지만, 포스터, 시나리오, 개작 전의 원작 시놉시스, 백금녀-서영춘 만담 레코드 등이 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 있어 대략적인 내용은 유추해볼 수 있다. (그림9) <서영춘과 백금녀, 폭소가요 코메듸- 갈비씨와 뚱순이의 애정행진곡> 영상자료원이 소장하고 있는 서영춘-백금녀 만담 레코드의 표지. 이들 콤비 코미디의 스타일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삽화가 전면에 배치되어 있다. 백금녀는 1960년대 초반에 이미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던 스타 코미디언이자 중견 악극 배우였다. 이 같은 백금녀의 스타성을 십분 활용하고자 했던 <남자는 싫어>는 기획부터 개작까지, 백금녀를 통한 웃음을 보여주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였다. 애초에는 서영춘과 백금녀 콤비의 주요 레퍼토리였던 ‘거꾸로 부부’를 차용한 ‘역할전도 부부 코미디’를 보여주고자 하였으나 검열에 의해 전면 개작을 하게 되면서 이 영화가 택한 두 번째 길은 백금녀를 내세워 그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를 만드는 것이었다. 1960년대 후반 코미디언코미디가 다시 관객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한 시점에서 여성 코미디언 중 최고의 주가를 올리고 있었던 백금녀를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기획은 일견 참신하고 새로운 것이었다. 개작된 <남자는 싫어>에서 백금녀가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금녀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아 웃음거리로 만드는 방식이다. 즉, 백금녀를 희생양으로 삼아 (남성) 공동체에서 배제하면서 배타적인 웃음을 만드는 경우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백금녀가 자신의 스타 페르소나와 레퍼토리를 활용하여 적극적인 웃음의 유발자로 존재하는 경우이다. 이미 잘 알려진 자신의 퍼포먼스를 선보이면서 스타 코미디언으로서의 장기를 보여주는 장면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는 코미디언코미디의 특징이기도 하다. 첫 번째 방식에서 웃음이 유발되는 것은 백금녀의 몸을 희화화하고 객체화하는 여타 인물들에 의한 것으로, 이들에 의해 가학적이고 공격적인 웃음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웃음은 사회적 전형화typification의 하나로, 남성들만의 세계all-male-world에서 여성들을 배제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기도 하다. 4) 따라서 그의 신체가 웃음거리가 되는 동안 백금녀 자신은 코믹 행위의 주체이거나 능동적인 주어가 아니다. 즉, 영화 속에서 백금녀는 유머의 주체로 기능하거나 유머를 적극적으로 주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존재함’으로 인하여, 남성중심적 시선에 의해 ‘비정상적인 신체’로 규정됨으로 인하여, 웃음을 유발하는 객체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백금녀의 코미디성이 보다 잘 드러나는 것은 두 번째 범주에서이다. 즉, 기존의 퍼포먼스와 스타 페르소나를 활용한 코미디를 선보일 때, 백금녀는 능동적 주어로 활약한다. 성량이 풍부한 가수인 백금녀의 화려한 노래와 코믹한 춤 솜씨를 볼거리로 제시하는 장면, 서영춘과 함께 ‘거꾸로 부부’와 같은 남녀 역할 전도의 코미디를 선보이는 장면, 여성 레슬러로 활약하는 장면 등은 백금녀 코미디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특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그림10)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이 영화는 서영춘의 출세기를 다룬 것으로, 주연 서영춘(왼쪽)과 함께 스타 배우였던 김희갑(오른쪽)이 포스터에 비중있게 등장한다. 이들 사이에 있는 것은 서영춘과 사랑하는 사이로 등장하는 강문, 그 아래 서영춘을 제압한 백금녀의 모습이 보인다. 특히 <출세해서 남주나>와 같이 서영춘과 함께 출연하는 코미디영화에서는 이러한 두 사람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코미디가 만들어졌다. 첫 번째 범주에서 금순의 신체가 ‘비정상적’이므로 배제되어야 하는 것, 그로테스크하고 혐오스러운 ‘비체abject’로 여겨져 왔다면, 레슬링 장면 등을 통해서 금순의 신체는 ‘단련된 스포츠’의 신체이면서 동시에 ‘요절복통할 폭소’를 유발하는 슬랩스틱의 신체로 새롭게 의미화된다. 특히 레슬링 복장을 하고 신체를 당당히 드러내는 장면은 남성들이 부과한 ‘여성 신체의 아름다움’이라는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며, 이는 훨씬 더 풍성하고 더 문제적인 신체의 가능성’들’의 범주를 보여주는 것 5) 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백금녀의 ‘신체’는 배제와 폭력을 통해 규정되는 ‘대상’ 혹은 ‘비체’의 경계를 넘어, 주체됨을 통해 웃음을 만드는 ‘여성 코미디’의 신체로 독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백금녀가 주연으로 등장한 마지막 영화는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이다. 이 영화는 화재로 전소한 고아원의 원장으로 등장한 백금녀는 김희갑과 함께 감동적인 고아원 재건 스토리를 그렸다. <와룡선생 상경기>(김용덕, 1962)와 <팔도강산>(배석인, 1967)의 또 다른 버전으로 보이는 이 영화에서, 백금녀와 김희갑은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 전국을 다니며, 고아원 재건 비용을 마련한다. 백금녀는 한편으로는 김희갑의 코미디를 보조하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힘으로 사기꾼을 제압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림11) <정따라 웃음따라>(이민욱, 1972)의 한장면 고아원 원장 역의 백금녀와 고아원 운영을 돕는 김주사 역의 김희갑. 이들은 고아원을 재건하기 위해 고아원 출신 청년들을 찾아다니며 재건 자금을 마련하고자 한다. 전국을 여행하며 자녀들을 만나는 김희갑 부부가 출연하는 영화 <팔도강산>와 같은 계열의 영화로 볼 수 있다. 그밖에 영화에서 백금녀의 활발한 활약상은 다음과 같은 영화들을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림12)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백금녀는 코미디영화가 아닌 여타 드라마에서도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였다. (그림13) <신세 좀 지자구요>(임권택, 1969)에서 백금녀는 ‘파이 던지기’라는 고전적 코미디의 한 장면을 차용한 레스토랑 신에 등장했다. (그림 14) <팔도노랭이>(심우섭, 1970) 포스터 <팔도노랭이>는 팔도의 구두쇠들을 사위로 삼은 김희갑의 이야기. 가운데 김희갑이 보이고,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는 딸로 등장한 백금녀는 오른쪽 맨 아래. (그림15) <우리강산 차차차>(박구, 1971)의 한 장면. 왼쪽 붉은 원피스 차림으로 춤추는 백금녀. 왼쪽 끝이 김희자, 백금녀의 오른쪽 옆이 양석천, 갓 쓴 할아버지 역의 김정훈, 그 오른쪽으로 검은 양복 차림의 허장강과 흰 재킷에 권색 바지 차림의 배삼룡이 보인다. 1) 코미디언코미디는 이미 잘 알려진 스타 코미디언의 개성과 퍼포먼스를 전면에 내세워 만들어진 코미디 영화들을 일컫는 장르 명칭으로, 미국의 코미디 영화 연구자 스티브 사이드만이 발전시킨 개념이다. Steve Seidman, Comedian Comedy-A Tradition in Hollywood Film, UMI Research Press, 1981 참고.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는 기존 악극단 코미디 배우들의 스타성과 레퍼토리, 퍼포먼스 등을 전시하면서, 1950년대 한국영화의 중흥기에 영향력 있는 장르로 형성되었다. 한국의 코미디언코미디 형성과 전개에 대해서는 박선영, 「한국 코미디영화 형성과정 연구」, 중앙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1 참고. 2) 영화진흥공사 편, 『한국영화자료편람 초창기~1976』, 영화진흥공사, 1977, 46~48쪽의 “국산극영화 내용별 제작실황”을 기준으로 계산한 수치이다. 이 수치는 멜로드라마가 거의 60-70%를 차지했던 상황에서 결코 작지 않은 비율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연예인고액납세”, 『중앙일보』 1966.8.5.3쪽; “늘어가는 스타의 자가용차”, 『서울신문』, 1966.9.17.5쪽; “납세액으로 본 인기 바로미터”, 『조선일보』 1967.3.26.5쪽. 백금녀는 1965년 연예인 고액납세자 중 가수 분야 3위로, 이미자, 박재란의 뒤를 잇고 있으며, 자가용 승용차를 가진 코메디언 4인(구봉서, 김희갑, 후라이보이, 백금녀) 중 한 사람이었다. 또, 1966년에도 가수 중 8위로 링크되어 고액납세자의 명단에 올랐다. 4) Helga Kotthoff, “Gender and Humor: The State of the Art”, Journal of Pragmatics 38(1), 2006, p.12. 5) Andrew Stott, Comedy, Routledge, 2005, p.104.
서영춘(1928~1986)은 구봉서, 김희갑 보다 다소 늦게 연예계에 등장했다. 서영춘은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형 서영은의 도움으로 1952년에 데뷔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쇼 무대의 사회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백금녀를 만나 코미디 콤비를 이루면서 ‘뚱순이와 갈비씨’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후 라디오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누리게 되었다. 코믹한 연기력과 뛰어난 순발력, 거침없는 언변으로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서영춘은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다. 서영춘은 1961년 <인생갑을병>으로 영화에 데뷔한 뒤,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5년 6월 개봉한 <여자가 더 좋아>는 이례적으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상영되면서 19만의 관객을 동원, 그 해 최고의 인기작이 되었고 이 영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서영춘은 명실공히 원톱 주연이 가능한 최고의 코미디 스타가 되었다. 뒤이어 각종 라디오와 영화에서 서영춘의 겹치기 출연이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서영춘은 라디오, 영화, TV와 각종 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하며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1)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포스터. 서영춘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로, 여장을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성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서영춘이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965년 최고의 인기작이자 서영춘의 대표작이 되었다. 한편, 서영춘은 ‘저질 코미디’ 논란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일례로, 1965년 12월 27일, 중앙라디오방송의 <다이아몬드 스테이지>라는 프로그램 중 한 코너인 ‘하꼬바꼬 요리강습’에서 서영춘은 파리로 국을 끓이는 법을 소개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66년 1월에 열린 방송윤리위원회의 정례위원회는 서영춘의 출연정지 1개월을 의결했다. 저속하고 품위 없는 코미디를 했다는 이유였는데, 중앙라디오방송에서는 그것이 서영춘의 탓이 아니라 각본을 쓴 작가 최휘로의 문제였다고 변명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각본과 코미디 실연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서영춘의 출연 정지를 재가결했다. 이듬해 9월 서영춘은 또 다시 경고처분을 받았다. <다이아몬드 스테이지>에서 품위 없는 언동의 저속한 코미디를 했다는 것이었다. 1967년에도 역시 같은 방송에서 “우리말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언어순화에 역행”하고 “청소년들에게 저속한 유행어를 전파”시키는 품위 없는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서영춘은 활동 기간 내내 라디오와 영화, 방송에 걸쳐 각종 감시와 제재에 시달렸다. 사생활에서도 서영춘은 공권력과 잦은 마찰을 빚곤 했다. 애초에 서영춘은 구봉서처럼 전형적인 ‘가부장’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거나 얌전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방송 이외에도 여러 차례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65년 10월 경찰의 날 행사를 둘러싼 소동이었다. 이 날 사회자로 섭외되었던 서영춘은 40여 분을 지각했다. 각급 경찰 간부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까지 참석하는 행사에 서영춘이 나타나지 않자 30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긴급수배가 내려졌다. 다행히 그로부터 10분 뒤 도착하여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화가 난 종로 경찰서장이 그를 사기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영춘은 형제까지 연루된 폭행사건 및 경찰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사고로 가십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이처럼 서영춘의 통제 되지 않는 성격, 금기를 깨는 막말과 눈치 보지 않는 코미디 스타일 등은 1960년대 후반 <팔도강산>의 아버지의 페르소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김희갑이나 그 자신 ‘건실한 사회인’이자 ‘가부장’으로의 이미지를 일찌감치 획득했던 구봉서의 코미디 스타일과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영춘 코미디에 대한 제재가 지속되던 시기,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코미디의 저속함을 비판하고 나섰다. 먼저 1964년 방송국에서 코미디언 전속제가 시행되면서, 코미디의 수준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코미디는 방송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지 않고 청취자의 말초신경이나 허파를 자극하는 걸로 만족해온 실정”인데, 코미디언 역시 “영화, 무대, 방송 등을 누비면서 같은 소재를 재탕삼탕 울거먹는다”는 것이었다. 1965년 5월 신아일보의 기사는 코미디언들이 때를 만나 TV, 라디오, 영화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저급한 대사가 아니라 독창성으로” 웃음을 줘야한다면서 작금의 코미디가 수준 이하의 것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66년 9월 15일 《서울신문》 기사에서는 방송의 저속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코미디라고 단언하면서, 코미디가 청취자의 “가치판단과 생활 윤리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또한 “어느 프로보다도 청취자들에게 강렬한 자극과 영향력을 끼치는” 코미디 프로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방송 전체의 정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가 요약하는 라디오 코미디프로그램의 특징은 “조잡한 말의 나열과 불순한 상상력의 동원”, “저속하고 무가치한 언어”의 나열, “쓴 웃음을 자아내는 애드립”, “기성(奇聲)의 연속”, “아이디어의 빈곤”, “위트 이하” 등이었다. 기사는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신진 코미디언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응급조치로는 “저속의 낙인이 찍힌” 코미디언을 퇴출해야하며 코미디프로 역시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라디오스타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처럼 초기부터 저속논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저속”하고 “무가치”하며 “조잡”하다고 혹평 받는 서영춘의 코미디는 점차 팬덤을 형성했고 서영춘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라디오와 악극 무대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로 진출하면서부터 대부분 비중 있는 조연이나 주연을 맡았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 서영춘은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부터 시작했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인생 갑을병>부터 서영춘은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어머니 울지 마세요>(전홍직, 1964), <눈물의 자장가>(최훈, 1965)에 이르기까지 20여 편에 가까운 극영화에서 엑스트라급 조연을 맡았다. 이 시기에는 코미디영화보다는 여타 장르 영화에서 단역 혹은 조연을 맡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당시 인기 코미디 배우였던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던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와 로맨틱 코미디 <총각김치>(장일호, 1964) 정도가 서영춘이 출연했던 코미디영화였다. <여자가 더 좋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까지, 영화에서 서영춘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사진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스틸.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를 리메이크한 심우섭 감독의 1983년 영화에서 서영춘은 여장남자 식모인 강태기를 짝사랑하는 노인 역으로 출연했다.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던 1965년의 영화와 달리 1983년의 영화는 그야말로 ‘건전’하고 ‘상식’적인 교훈극에 가까웠다. 서영춘이 영화 스타로 거듭났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의 흥행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라디오스타’로서 서영춘의 인기가 한층 성장했던 시기도 1965년이었는데, 영화에서도 서영춘은 비중 없는 단역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영화에서 늦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서영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전성기에 접어들어 한 해에만 35편의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 물론, 더 이상 단역이 아닌 ‘비중 있는 조연’ 혹은 당당한 주연으로서였다. 그 중에서 단연 서영춘의 주가를 올렸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는 1965년 최고의 화제작이자 그해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여장남자’ 코미디의 붐을 일으켰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서영춘의 영화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진3) <큰 사위 작은 사위>(이봉래, 1965) 포스터. 1964년까지 주로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은 포스터에 얼굴이 실린 적이 없었다. 1965년부터 비로소 포스터에 서영춘의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과 함께 큰 비중 없는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의 얼굴이 포스터 한 켠에 그려져 있다. (사진4)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정면을 바라보는 서영춘 고유의 코믹한 표정, 연민이 느껴지는 표정의 김희갑의 살짝 옆으로 돌려진 얼굴, 김희갑 얼굴 옆 제목의 배치 등으로 인해 조연이었던 서영춘이 주연 김희갑보다 조금 더 중심 인물로 보인다.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으로 서영춘은 영화계에서도 원톱 주연이 가능한 스타 배우가 되었다. 스타덤에 오른 코미디 배우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공담을 가상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 보여주는 영화들이 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김희갑의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배삼룡의 <나의 인생고백>(심우섭, 1974), 이후 이주일의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등이 이런 계열의 영화들이었다. 서영춘의 경우에는 1965년에,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악극단 출신이었던 이 코미디 배우들의 성공담은 시골 출신의 코미디언들이 우연히 악극단에 들어가게 되고 갖은 고생 끝에 스타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 배우들은 자신들의 특기와 코미디 레퍼토리들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한층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사진5)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화려한 악극단의 뒷모습, 시골 출신 코미디 배우의 인생 역전, 각 코미디 배우들의 장기를 한층 살린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등이 이 ‘가상의 전기 영화’들이 가진 특징이었다. 서영춘의 ‘성공담’을 엮은 <출세해서 남주나> 역시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성공한 코미디 배우의 대명사가 된 서영춘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6년 동안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들에 출연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외화 <007> 첩보 시리즈를 패러디한 <살사리 몰랐지>(일명 <007 폭소판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요절복통 007>(김대희, 1966), <기상천외>(김대희, 1967) 등이었다. 서영춘은 이 영화들의 주연을 맡아, 한국 코미디 첩보물을 개척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6)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7)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서영춘 (사진8)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한 장면. 탐정소설 매니아인 보석점 직원 서영춘이 우연한 기회에 007처럼 첩보원이 되어 마약밀매법 일당을 소탕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자신의 유행어인 ‘살사리 몰랐지?’를 매 에피소드마다 연발하며, 자신의 코미디 레퍼토리인 여장하기, 권투 시합 등의 장면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편, <살사리 몰랐지>에서처럼,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 이후 서영춘이 주연인 코미디영화들에서는 서영춘의 여장이 주된 플롯의 장치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이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가 대표적인 영화였다.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은 일종의 <시집가는 날>의 패러디로,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부잣집 바보 도령(김희갑)에게 시집가게 된 주인댁 딸을 대신해서 결혼하는 머슴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과 서영춘의 결혼생활이 유발하는 웃음의 코드는 <내 것이 더 좋아>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내 것이 더 좋아>는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안고 시골에서 상경한 성춘(서영춘)이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부부 행세를 하고 각종 소동을 벌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개봉한 영화로,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이 잘 드러난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진9)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10)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목욕탕에서 쫓겨난 서영춘 (사진11)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미용체조를 하는 서영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혼자 있을 때도 풀메이크업의 여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기 위한 미용체조에 열중하는 등 성적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서영춘은 주로 구봉서 주연의 코미디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영춘은 구봉서와 짝을 이루어 ‘남자 시리즈’나 ‘팔푼이 시리즈’ 등에서 조연으로 등장하여,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 과제에 서민 대중의 욕망을 투사했다. 구봉서가 항상 성공적으로 취업과 결혼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고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윤리를 구현하는 ‘가부장’으로 거듭나는 인물을 연기할 때, 서영춘은 그의 곁에서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고 우직한 구봉서에 비해, 한결 약삭빠르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서영춘은 그럼에도 과히 밉지 않은, 평범하면서도 속물스러운 서민 대중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했다. <단벌신사>(김기풍, 1968)에서 친구 구봉서의 복권을 탐내는 도어맨,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또 다른 가짜 미용사로 변장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되돌리려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버림받는 세탁소 직원,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인 줄 알고 접근하여 결혼을 약속하게 되지만 사실은 식모였음을 알게 된 수위(물론, 사장 딸은 구봉서와 결혼하게 된다.),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에서 생계가 어려워 가짜 장군을 사칭하고 다니다 우여 곡절 끝에 진짜 산적을 잡게 되고 진사 댁의 식모와 맺어지는 검객(물론, 여기서도 진사 딸은 구봉서와 결혼한다.) 등 서영춘의 캐릭터들은 성공의 ‘일보직전’에서 약간의 패배와 함께 약간의 좌절을 맛보는 인물이었다. (사진12)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단벌양복과 복권을 탐내는 친구 서영춘 (사진1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가짜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그리고 진짜 앙드레 곽규석(가운데) (사진14)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 행세를 하는 식모에게 속아 넘어간 수위 서영춘 (사진15)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 포스터. 가짜 검객 구봉서와 서영춘의 억울한 민중 구하기가 펼쳐진다. 1960년대 후반 근대화의 뒷길에 놓인 서영춘의 캐릭터는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여장이나 변장과 같은 속임수가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시 변두리의 떠돌이들이었다. 구봉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서영춘은 지켜야 할 가족이나 도와야 할 동생이 있는 ‘가부장’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좀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타는 생존욕구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변장을 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영춘 캐릭터의 실패는, ‘정상성’이나 ‘사회적 규범’을 포기한 데 따른 일종의 징벌과 같은 것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이 ‘가학’적 쾌감을 만끽하게 했다. 그런 한편, 서영춘의 거침없는 언변,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애드립,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슬랩스틱에 적합한 신체는, 점차 경직되어 가던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의 규율 안에서 ‘해방감’을 주는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다. 이런 점에서, 잘 짜여진 스토리와 닫힌 결말, 교훈을 주는 메시지를 선호했던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 서영춘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리는 배우였다. 코미디영화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당시에도, 서영춘은 항상 좋은 악극 무대를 기획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악극단 시절부터 쇼와 만담, 사회 등 단편적이고 버라이어티한 구성에서 강점을 보였던 서영춘은 1960년대 말,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시민회관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기획하여 코미디 쇼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소비되었던 ‘서영춘’이라는 캐릭터 안에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코미디로, 그 자신만이 주연인 쇼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코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서영춘 역시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1년 8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 다작으로, 1972년 이후부터 1979년까지 총 8편, 1980년대에는 총 4편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팔도강산>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국책영화 <노래 실은 관광여행>(박희준, 1973), <팔도유람>(이명식, 1974)를 비롯하여 여전히 1960년대의 향수를 안고 있는 심우섭 감독의 영화들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82 바보들의 청춘>(심우섭, 198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에 잇따라 출연했으나, 그 웃음의 질이 예전 같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의 시대가 도래하자, 단편적이고 감각적이며 속도감 있는 웃음을 추구했던 텔레비전 코미디에서 서영춘의 코미디는 더욱 빛을 발했다.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제작되었지만,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미 한껏 순화되어 텔레비전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참고문헌>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유신에서 신군부 독재로 이어지는 1970~80년대에 대해 ‘한국영화 암흑기’라는 레이블을 붙이는 건 정설처럼 보인다. 사실이었다. 영화는 TV에 밀리고 있었고, ‘반공’과 ‘새마을 운동’을 내세운 국책 영화에 얽매인 영화계는 점점 뒤틀려 갔으며, 사전 심의와 사후 검열 속에서 크리에이티브는 서서히 증발했다. 산업적 토대의 붕괴, 불합리한 제도, 미학적 고갈이 동시에 진행되었던 이 시대는 몇몇 감독들의 개인기로 돌파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시스템이 붕괴될 때 가장 대표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은 무분별한 트렌드 추종이다. 1980년대는 그 정점이었다. 멜로드라마와 문예 영화와 스타 시스템을 토대로 1960년대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무너졌고 1980년대에 난장판이 되었다. 멜로는 여전히 만들어졌지만 예전 같은 힘을 잃었다(진부한 신파의 클리셰에 빠져 있었다). 그 개념은 조금 모호하지만 ‘양질’의 문학 작품을 스크린에 옮겼던 ‘문예 영화’는 더 이상 영화화할 만한 소스를 구할 수 없었다(대신 1970년대부터 최인호나 조해일 같은 새로운 작가가 등장했다). 과거의 스타들은 일거에 물러났지만 그 공백을 채울 만한 스타는 도착하지 않았다( 안성기 가 유일한 희망이었던 시대였다). 1. 한수산 원작의 <거리의 악사>(정지영, 1987) 2. 이문열 원작의 <레테의 연가>(장길수, 1987) 3. 김홍신 원작의 <인간 시장>(김효천, 1983) 4.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 가장 심각한 건 ‘소스 부족’이었다. 1960년대엔 근대 단편 소설들이 ‘문예 영화’라는 이름으로 애용되었다(여기엔 ‘우수 영화’에 외화 수입 쿼터가 주어지는 현실적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라디오 연속극도 각광 받았고, 때론 일본 영화 시나리오를 그대로 가져온 경우도 있었다. 1970년대는 서서히 재료가 떨어졌고 1980년대에 오면 바닥을 드러낸다. 새로운 광산이 채굴되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방식의 하이브리드 현상이 나타난다. 심하게 말하면, ‘돈 될 만한’ 건 뭐든지 끌어다 썼던 1980년대였다. 여전히 ‘문학’은 가장 중요한 원천이었다. 1970년대 최인호와 조해일에 이어 1980년대엔 한수산 이외수 이문열 박범신 등이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영화계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1980년대엔 훨씬 더 대중적인 콘셉트가 강화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시장』 시리즈의 김홍신은 대표적이었으며 김성종 유홍종 백시종 김병총 등의 작가들도 가세했다. ‘시대정신’이었던 에로티시즘도 영향을 미쳤다. 외설 시비에 휩싸였던 염재만의 소설 『반노』가 대표적. <빨간 앵두> (박호태, 1982)도 최희숙의 소설이 원작이며, <매춘> (유진선, 1988)은 『매춘: 전국 사창가와 창녀 실태』라는 사회학 서적에서 온 것이었다. 전통의 부활도 있었다. 한동안 맥이 끊어졌던 문예 영화의 흐름은 에로티시즘을 통해 재등장했고 나도향과 김유정이 소환되었다. 일본 소설도 영화화되었다. 미우라 아야코 원작의 <빙점 81>(고영남, 1981)은 큰 흥행을 거두었고 호즈미 타카노부의 <수렁에서 건진 내 딸>(이미례, 1984), 하시다 스카코의 <오싱>(이상언, 1985), 나쓰키 시즈코의 <W의 비극>(김수형, 1985형) 그리고 이쿠시마 지로의 <한쪽 날개의 천사>(이성민, 1987) 등이 이어졌다. 1960년대 한국영화가, 당시 문화 교류가 없던 일본 소설이나 시나리오를 가져가 음성적으로 번안해 영화화했다면 그 원천을 밝혔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모습이다. 미즈키 교코 원작의 만화 『캔디 캔디』도 영화화되었다. 1.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최재성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다. 2. <신의 아들>은 최민수의 데뷔작이다. 3. 강철수 원작의 <팔불출> 4. 한희작 원작의 <한희작의 러브러브>. 가장 강력한 소스는 만화였다.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을 영화화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장호, 1986)이 장안을 뒤흔들기 전, 1980년대 초부터 꾸준한 시도가 있었다. 그 시작은 길창덕 화백의 <순악질 여사>(김수형, 1980)였다. 이야기보다는 ‘순악질 여사’라는 캐릭터를 가져온 면이 강하며, 장미희가 주인공을 맡았다. 이후 1980년대에 약 20편가량의 만화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스포츠 신문 연재나 만화 가게나 당시 쏟아지던 만화 주간지를 통해 대중적 인지도를 쌓은 터에 흥행성이 꽤 괜찮았다. 이현세를 주로 이야기하지만, 이 시기 만화 원작 영화의 주요 인물은 강철수였다. <팔불출>(고응호, 1980)의 원작자였던 그는 이후 영화 쪽에 큰 관심을 보이며 <사랑의 낙서>(심재석, 1988)엔 아트 디렉터로 참여했고, 1989년엔 <발바리의 추억>으로 직접 메가폰을 잡는다. <가루지기>(1988)의 고우영 감독도 만화가에서 영화감독으로 잠시 업종 전환을 한 케이스인데, 1980년대의 만화는 충무로에 원작뿐만 아니라 인력도 공급한 셈이다. 그리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다. 당시 프로야구 열풍과 이현세의 만화에 대한 컬트적 반응을 힘입은 이 영화는 영화 제목에 ‘공포’가 들어가선 안 된다는 당시의 심의 규율 때문에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이장호의 외인구단>으로 개명해야 했는데, 이것이 액땜이 되었는지 서울에서 약 28만 7,000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빅 히트를 기록한다. ‘까치’ 오혜성 역을 맡았던 최재성은 당대 최고의 청춘스타가 되었으며, 동네 전파사마다 정수라가 부른 주제가 ‘난 너에게’(“난 네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어…”)가 흘러나왔다. 프로야구의 인기, 이장호 감독의 흥행력 등 이 영화의 성공 원인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핵심은 이야기였다. 당대 한국영화와 비교해볼 때 이 영화가 지닌 극적 요소는 두 배 정도는 셌다. 강한 승부욕, 목숨을 건 순애보. 팽팽한 긴장 관계, 뼈를 깎는 극기 정신…. 떡볶이로 치면 고추장이 아닌 캡사이신 맛이었고, 그 강렬함에 젊은 관객들은 반응했다. 이 영화의 성공으로 일련의 스포츠 원작 영화가 등장하는데, 박봉성의 『신의 아들』, 이현세의 『지옥의 링』, 허영만의 『카멜레온의 시』 등 복싱 소재 만화들이 영화화되었다. 1980년대 ‘복싱’은 여전히 있기 있는 스포츠였고, 여기에 혹독한 트레이닝과 청춘의 고독과 비극적 로맨스가 결합되었다. 안타까운 건 원작을 따라가지 못했던 인기였는데 완성도가 문제였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트렌드는 역시 ‘에로티시즘’이며 스포츠 신문 연재를 통해 성인 만화의 흐름을 이끌었던 한희작과 배금택은 주역이다. <서울 손자병법>(김현명, 1986)이 한희작의 원작이 지닌 지명도에 기대 제목 정도만 가져 왔다면, <한희작의 러브러브>(윤석태 김정진, 1991)은 아예 제목에 작가의 이름을 드러낸다. 당대의 섹시 아이콘인 강리나는 만화 캐릭터를 별 위화감 없이 소화하는데, 이후 배금택 원작의 <변금련>(엄종선, 1991)에서도 캐릭터와의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준다. 하지만 만화 원작 영화의 흐름은 1990년대엔 뜸해진다. 이현세가 직접 연출을 맡은 <아마겟돈>(1996)이나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1996) 등 극장용 애니메이션 쪽에서 성과를 냈고, 이현세의 『카론의 새벽』을 옮긴 <테러리스트>(김영빈, 1995)와 허영만 원작의 <비트>(김성수, 1997)가 흥행했지만 1980년대만큼의 양적 성과를 내지 못한다. 다시 그 붐이 일게 된 건 2000년 이후. 여기엔 웹툰의 등장이 큰 역할을 했다. 1. <멋대로 해라>의 혜은이와 김동현. 그들은 이후 부부가 된다. 2. <너무 합니다>의 원작자이자 주인공인 김수희. 3. 박남정 주연의 <새앙쥐 상륙 작전> 4. <담다디>의 이상은과 민규. 최근 한국영화계에서 아이돌 출신 연기자들의 활약이 돋보이긴 하지만, 가요계와 영화계의 크로스오버 현상은 이미 19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이전 1960년대부터 주제가는 영화 흥행의 중요한 요소였고, 남진이나 나훈아 같은 슈퍼스타들이 은막에 진출하기도 했지만, 1980년대는 남달랐다. 지금으로선 상상할 수 없지만, 이 시기엔 당대의 히트곡 제목을 그대로 딴 영화들이 쏟아졌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출연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며, 영화 내용도 노래 가사와 대부분 무관했다. 오로지 노래 제목의 인지도를 이용한 경우들인데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와 ‘비련’, 와일드 캣츠의 ‘마음 약해서’, 심수봉의 ‘그때 그 사람’, 윤시내의 ‘난 모르겠네’와 ‘열애’, 이정희의 ‘참새와 허수아비’, 김현준과 민해경의 ‘내 인생은 나의 것’,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 최진희의 ‘사랑의 미로’, 이선희의 ‘J에게’, 최성수의 ‘풀잎 사랑’ 등 수많은 히트곡들이 그 제목을 충무로에 빌려주었다. 물론 가수가 직접 영화에 출연한 경우들도 있었다. 지난 연재에서 이야기했던 전영록이나 송골매, 김형용 같은 청춘 영화의 스타들은 대표적인 경우. 이외에도 <나를 보러 와요>(이유섭, 1980)의 방미, <슬픈 계절에 만나요>(박남수, 1981)의 백영규, <잊혀진 계절>(이형, 1984)의 이용, <담다디>(김응천, 1989)의 이상은, <울고 싶어라>(배해성, 1989)의 이남이, <앗싸! 호랑나비>(원정수, 1989)의 김흥국 등은 노래의 주인공이 직접 카메라 앞에 서는 경우들이었다. <너무 합니다>(남석훈, 1984)은 김수희의 자전적 이야기로, 그녀는 원작자이자 주연 배우로 참여한다. 노래와 상관없이, 가수 자체의 인기로 영화계에 진출하는 경우도 많았다. <아낌없이 바쳤는데>(박호태, 1980)의 심수봉, <멋대로 해라>(김정현, 1980)의 혜은이(1970년대부터 배우 활동), <그 사랑 한이 되어>(이형표, 1981)의 조용필, <날마다 허물 벗는 꽃뱀>(강대선, 1982)의 이은하, <흑녀>(강대선, 1982)의 인순이, <졸업 여행>(오성환, 1985)의 김범룡, <새앙쥐 상륙 작전>(김정진, 1989)의 박남정 등이다. 연기력을 인정받진 못 했지만, 당시 이 영화들은 그 화제성으로 이슈가 되었다. 당시 가요계와 영화계의 끈끈한 관계는, 가요 쪽의 붐에서 기인했다. 트로트 중심이었던 한국 대중가요는 1980년대 완전히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며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아이돌 문화를 형성했다. 이 시기 침체기를 지나던 영화계는 가요계의 호황을 이용하려는 수많은 기획을 시도했고, 그 결과 수많은 ‘가요적 영화’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런 영화들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 흐름은 한국영화가 자생력을 서서히 지니기 시작하는 1990년대가 되면 사라지기 시작했다. 1980년대 충무로가 수혈받았던 또 하나의 원천이 있었다면 바로 TV의 코미디언과 개그맨이었다. 이전에도 영화와 방송을 겸하는 수많은 희극인들이 있었고 그 전통은 이주일로 이어졌다. 특히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조용히 살고 싶다>(김수형, 1980)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이형표, 1983) 등의 ‘유행어 영화’는 작은 트렌드를 이뤄 <웬일이니>(김종성, 1983) <난 이렇게 산다우>(남기남, 1985) 등으로 이어졌다. 이것 역시 대중문화의 인기를 영화로 끌어오려는 기획이었다. 새로운 경향은 개그맨들의 진출이었다. ‘아동용 SF 액션’에 대한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듯, 1980년대의 수많은 개그맨은 SF 프랜차이즈의 중심이 되었는데, 그들은 아이들 영화를 벗어나 성인용 영화에도 종종 출연했다. 이외에도 서세원 주병진 김명덕 김형곤 김병조 등 당대의 인기 개그맨들은 대부분 영화계와 만났으며 전유성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비디오 영화를 직접 연출하기도 했다. 1.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의 이주일. 2. <회장님, 우리 회장님>(엄종선, 1988)은 개그 프로그램을 영화화했다. 3. 주병진과 이미숙이 주연을 맡은 <가슴 깊게 화끈하게>(김수형, 1981) 4. 리메이크 영화인 <미워도 다시 한번 1980 - 1부>(변장호, 1980). 1980년대는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강렬한 생존 욕구로 인해 숱한 하이브리드 현상이 일어났던, 용광로 같은 시기였다. 대중 문학계든 가요계든 만화계든 희극계든, 노래 제목이든 유행어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요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고 접목시켰으며 그 중엔 적잖은 성공도 있었고 대부분의 실패가 잇따랐다. 수많은 속편 영화들이 있었고 리메이크도 적잖았으며 애교(?) 섞인 표절도 종종 있었다. 아무튼 살기 위해 모든 것을 했던 시절이었다. 새삼 던져보는 질문. 1980년대는 과연 한국영화의 침체기였나?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이면을 살짝 엿보면 이 시대만큼 역동적이었던 시대도 드물다. 장르적으로 매우 다양했고, 영화 이외의 분야와 끊임없이 접점을 만들어갔다(그런 점에서 2000년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생존을 위한 분투. 1980년대는 천박한 상업주의와 여기에 저항하는 힘, 과거의 관습을 지속하려는 의지와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이 뒤엉켜 기묘한 연대기를 써 가던 시대였다. 이 시대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는, 어쩌면 이토록 미로처럼 뒤얽힌 상황 때문일 것이다.